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 - AI 시대, 다시 인간의 길을 여는 키워드 8
신상규 외 지음 / 아카넷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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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

이상욱·이영의·김애령·신상규·구본권·김재희·하대청·송은주 지음

 [아카넷]


AI시대, 다시 인간의 길을 여는 키워드 8

 



경계와 관계의 문제를 재정의하는 시도




인공지능은 이제 우리 시대의 중심화두가 되었다. 최근 사이 우리는  ‘4 혁명이라는 표어 아래  미래의 삶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와 더불어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이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것이라는 비관론이 함께 논의되는 것을 본다. 세계적으로 공개된 알파고와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알파고가 승리했다. 알파고는 러닝(deep learning) 기술을 통해 승률을 키워나간 인공지능 기술에 기반했다. 바둑은 규칙이 정해진 게임이며, 이렇게 규칙이 정해진 분야에서 인공지능 기술은 발전을 이루었다. 반면, 빅데이터에 기반하는 러닝 방식을 적용한 인공지능 기술은 집안일하기처럼 규칙이 없는 일에는 무용지물이다. 알파고는 스스로 대국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파악하거나 스스로 우쭐대지는 못한다. 바로 현재의 인공지능은 거기까지, 자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자각하는 지능이란 개념 자체는 이미 너무나 인간적인요소인지도 모른다. 인공지능 시대는 지금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삶의 조건을 인간과 기타 동물 환경에 부여한다. 이번에 만나게 《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 바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삶의 국면에 대해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국내 저자 8명은 모두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을 전공한 연구자들이다. 따라서 저자들은 기술적인 측면보다는 기술이 우리에 주는 영향을 탐색하는 일에 논의의 중점을 두고 있다. 책에서 소개되는 여덟 가지 주제는 어느 주제도 빠짐없이 묵직한 주제와 생각거리들을 던져준다. 저자들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삶을 기술 중심의 낙관적 기대와 함께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만들어 나가야 담론으로서 포스트휴먼이라는 주제를 이끌어 간다.  

 


   이번 책을 익으면서 포스트휴먼 개념에 대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번째 장의 저자 이상욱의 언급에 따르면 휴머니즘이란, 인간을 중심에 놓고 바라보는 인본주의로서 근대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포스트휴머니즘이란 휴머니즘 연결선 상에 있으나 이상 인간이 중심이 아닌 인간관이라고 수도 있겠다. 새로운 시대에는 인간 중심의 관점을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1장의 저자는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삶을 새롭게 재발명할 필요가 있다라고 담론의 방향을 정리하고 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때론 호기심어린 놀라움으로, 때론 충격으로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시대의 모습을 상상해볼 기회가 되었다. 무엇보다 포스트휴먼 담론을 통해 개인적으로 주목하게 곳은 경계 관계 머무는 지점이었다.

 


 

인간과 기계가 동일한 지점으로 수렴해가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우선 경계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으로 대표되는 유기체와 기계, 또는 인간과 기타 동물, 인간과 사이버 존재, 물질과 비물질 데카르트 주의로 대변되는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의 경직성을 벗어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영혼을 가진 기계였고, 동물은 영혼없는 기계일 뿐이었다. 여기서 데카르트가 떠올렸던 기계 우리가 떠올리는 로봇이나 자동기계와 크게 다를바 없는 물리적 신체성 가진 존재로 보면 것이다. 그런데 포스트휴머니즘은 서양중심의 공고한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간 중심적관점에서 사이버 존재, 인공지능의 점유는 인간성 상실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포스트휴먼 담론에서는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에 인간성 상실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우리에게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생각할 기회를 있다. 사이보그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간 저자 이영의는 호모 사이보그 경우처럼 인간성 상실보다 오히려 인간 향상과 생존을 위한 진화의 과정으로 바라볼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계-인공지능이 인간의 몸에 침투하여, 점점 인간의 신체기능을 대체하고 오히려 향상해나가는 현실에서 이미 인간(혹은 인간다움) 기계(혹은 인공지능)사이의 경계는 불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 존재 내에서도 우리가 이성 감정이라고 구분지은 개념에 대해서도 보다 불분명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책의 4장에서 소셜로봇이란 키워드로 논의를 이어간 저자 신상규는 안노티오 다마지오라는 연구자를 소개한다. 다마지오는 우리의 신체적 반응이 자체로 감정상태를 구성하는 과정이라고 자신의 책에서 언급한다. 그에게 감정 이성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이 변화에 알맞은 대응전략을 구축하는 수단 뿐이다.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등골이 서늘해지는 등의 신체적반응은 자체로 감정과 분리하여 생각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다마지오는 감정은 신체적이다라고 표현하며 감정과 신체 사이의 관계를 정리했다.      

 


   이처럼 포스트휴먼 담론에서는 인간과 기계가 기존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 포스트휴먼이라는 동일한 지점으로 수렴해간다. 관점은 인류세 중심으로 논의한 마지막 (8)에서 보다 확장되어 제시되고 있다.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모든 (지구적) 환경 사이의 관계 역시 경계 모호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인류세라는 개념은 최근에 이해하게 되었는데, 바로 우리 인류가 처한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표현이다. 저자 송은주는 인류세의 재난에 천재와 인재, 환경-사회적 요인이 불분명하게 서로 얽혀 있음을 언급한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은 물질 세계의 구성요소일 이라는 메시지를 재차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저자는 체르노빌 원전사고 현장 주변을 방문하고 희생자를 인터뷰한 《체르노빌의 목소리》 통해 구체적인 사례로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사례 역시 주관과 객관, 과거와 미래, 나와 타자와의 경계 거리가 붕괴한 순간을 증언하고 기록하고 있는 책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므로 포스트휴머니즘의 시대에는 경계를 너머 상호침투적이기 때문에 경계는 이미 불분명해지게 된다.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는 인류세 관련 사안들에 대해 저자는 우리가 포스트휴먼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과정이라고 언급했다. 다소 생소할 있을 같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인류세와 포스트휴먼되기는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있다. 인류세 논의는 인간과 자연이 합쳐져 공동의 지구 역사를 만드는 행위 주체가 되었다는 점을 기반으로 한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과 자연의 경계 허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대해 다시 바라보기를 요구한다. 인간 자체는 고정되고 닫힌 경계로 둘러싸인 것이 아니라 다른 몸들과 상호적으로 영향을 항상 주고 받으며 변형되는 과정에 있는 존재다”(250)라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영향을 주고 받는 존재라는 것인데, 이것은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관점으로 새롭게 바라보도록 한다. 따라서 인간의 운명은 개별 인간 하나로 규정될 것이 아니라 주변과 전체와의 상호 관련성 속에서만 논의될 있다. 인류세에 대한 논의가 인간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하는 지점인 것이다.

 

 


포스트휴먼 - 인간과 대상과의 새로운 관계 요청한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은 인간을 둘러싼 모든 대상과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것을 이해했다. 과정에서 인간 존재는 새로운 관계 맺기를 통해 새로운 위치 점하게 된다. 특히 3장에서 저자 김애령이 제시한 인공자궁 대한 논의와 6장과 7장에서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새롭게 유발되는 인간의 새로운 노동조건에 대한 논의는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논의는 새로운 환경 조건에서 인간이 처하게 되는 새로운 위치,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 혹은 다른 대상과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글로벌 생명공학산업이 만들어내는 생체노동시장에 대해 전해주는 이야기는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는 사실 충격적이기도 하다. 영화 <구글 베이비> 대표되는 아기 공장산업은 상업적인 글로벌 대리모 시장을 대변한다. 20세기 초의 농축산과학에서 시작된 생명공학 기술들은 이제 임신과 출산과 관련한 산업에 활발히 활용된다. 그런데 여기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아이를 갖기 원하는 산모와 가족의 출산권인 재생산권 공식적으로 인정한 있지만, 산업에는 가난한 나라의 대리모가 대부분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노동자로서 대리모의 지위는 수태에 실패할 경우 건강 상태에 대한 보호나 산후 조리를 적극적으로 받기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도 문제다. 아울러 대리모들의 자궁 재생산 기술과 노동계약 아래 공적 감시를 받으며 투명해지게 되었다.  1965년에 미국의 <라이프 Life>지에  등장한 것처럼 산모의 속에 있는 아이는 과학기술을 통해 얼굴과 표정이 확인가능하게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나라의 대리모에게 지급되는 수당 이들의 삶을 크게 개선할 있지 않느냐는 윤리적 관점 제시할 있다. 이런 관점은 포스트휴먼 사회가 가져오는 새로운 노동구조를 살펴봄으로써 보다 폭넓게 검토할 있을 듯하다.

 


   인공지능의 시대, 포스트휴먼의 시대가 수반하는 새로운 노동구조로서 소개되는 마이크로워크 (7) 자동화에 따라 기계의 노동을 보조하는 인간에 대한 논의 (6) 특히 불안정한 노동구조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나와 다음 세대들을 떠올리며 무엇보다 관심있게 살펴봤던 부분이다.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낙관적인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역시 알고 있을테지만 현재 인공지능 기술, 특히 러닝 기술을 적용하는 인공지능 서비스의 경우, 데이터에 기반하기 때문에 인간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한계가 있다. 페이스북, 아마존, 구글 디지털 기술에 기반하고 있는 대기업들은 이런 러닝 방식을 적용한 인공지능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는 구조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바로 소득 불평등을 발판 삼아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되고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양상을 다시 정리해보자. 러닝 기술은 끊임없는 기술 혁신을 통해 기술이 발전해왔다. 하지만 모든 기술과 서비스가 가능해지려면, 기술 유지와 보수과정에 반드시 인간 노동자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이러한 과정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은 많은 수가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에 해당하며, 가난한 나라 혹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기꺼이 인공지능 기술에 기반한 콘텐츠를 관리하고, 인공지능을 지원하는 업무에 종사하는 것이다. 7장에서 저자는 이런 일을 마이크로워크라고 소개한다. 이런 노동구조 속에서는 점점 커지고 있는 소득 격차 현상에도 무감각해지기 쉽다고 지적하고 있다. 추가적인 문제는 현상의 연장선으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아오지 못했던 여성들의 돌봄 노동역시 마이크로워크의 노동구조와 유사하다는 점이다. 그러면 여성들의 돌봄 노동(: 전통적인 가사노동) 역시 극심한 소득불평등 속에서 디지털 기술사회는 유지되는 것이 당연시된다는데 다른 문제가 있다.

 


    이러한 논의는 바로 6장에서 논의되는 자동화 사회 수반하는 새로운 고용구조의 변화양상과 맥을 같이 한다. 7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거대 디지털 기술 기업에서 제공하는 인공지능 서비스의 이면에는 마이크로워커들의 숨은 노동이 인공지능 서비스를 떠받치는 기둥으로서 역할을 한다. 6장의 저자는 현재의 자동화기술은 인간의 노동이 기계를 보조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 자동화된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은 대부분의 반복작업이 자동화된 까닭에, 인간 노동자들은 이러한 자동화 기계가 최적의 상태가 유지되도록, 혹은 문제가 생겼을 재빨리 정상화될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렇듯 자동화 시대의 새로운 산업구조 속에서 인간 노동자들은 이전과는 다른 지위에 놓이게 되며, 자동화 시설과 새로운 관계 놓이게 됨을 있다.

 


   자동화된 산업구조에서 인간 노동자가 도구화되거나 주변화되는 양상은 사실 인공지능 시대에 낯선 풍경이 아니다. 4장에서 저자 신상규는 로봇이라는 개념이 체코의 희곡 《로섬의 만능 로봇》에서 등장했으며, 로봇이란 단어는 하인, 노예, 고된 등을 의미했다고 밝힌다. 따라서 이미 로봇이란 개념의 탄생은 인간과 로봇(기계) 관계가 주종관계를 염두에 두고 나왔음을 있다. 다만 인공지능의 시대에서 자동화된 로봇과 인간 노동자의 관계는 초기의 개념과는 정반대의 역전된 주종관계의 양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다시 말해 인간 노동자가 자동화된 로봇의 최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보조하는 노동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양상은 앞서 언급한 마이크로워커들이 위치한 노동구조의 모습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한편 인간과 로봇과의 관계는 역전된 주종관계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소셜로봇에 대해 소개하는 4장에서 저자는 아이보나 섹스봇과 같이 인간과 새롭게 관계를 맺는 양상을 보여준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관계맺기에서 저자는 도덕적 지위라는 잣대로 관계를 새롭게 들여다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과 아이보와 같은 로봇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에서, 아이보의 도덕적 지위가 어떤지를 따져보는 것이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관계라는 것은 시대나 사회에 따라 양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해 인간이 갖고 있는 문화적 태도나 인간이 속해있는 사회의 습관에 의해 대상의 도덕적 지위가 결정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예컨대, 2020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개와 고양이는 애완동물로서 사랑을 받으며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반면 닭은 저자의 표현대로 치킨이라는 상품으로 보다 우리 사회에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으며, 돼지 역시 예컨대 삼겹살이라는 상징적인 표상으로서 우리는 대상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동물들을 지능 차이나, 제레미 벤담처럼 고통의 유무와 같은 기준 처럼 동물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에 대상들을 달리 대하고, 다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우리가 동물 각각에 대해 맺게되는 다양한 관계의 맥락 속에서만 이들이 어떤 존재인가가 결정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면, 인간과 동물이 맺게 되는 관계의 맥락 통한 동물의 도덕적 지위 결정이란 발상이 인간과 기계, 인간과 로봇에도 그대로 적용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지점에서 이제 기계에 대한 다양한 새로운 서사, 새로운 은유가 필요한 시점”(136)이라고 독자에게 생각의 환기를 권하는데, 나는 지점에서 시인의 편을 떠올리게 되었다.

 

 

11월의 저문 녘에

낡아빠진 경운기 앞에 돗자리를 깔고

우리 동네 김씨가 절을 하고 계신다

밭에서 사과 다섯개

막걸리와 고추 장아찌 그릇을 차려놓고

조상님께 무릎 꿇듯 절을 하신다

나도 따라 절을 하고 막걸리를 마신다

   

(…)

 

야가 세월 열세 마지기 논밭을 갈고

많은 짐을 싣고 나랑 같이 늙어왔네 그려

덕분에 자식들 학교 보내고 결혼시키고

고맙네 먼저 가소 고생 많이 하셨네

김씨는 경운기에 막걸리 잔을 따라준

폐차장을 향해서 붉은 노을 속으로 떠나간다

 

시는 박노해 시인의 경운기를 보내며라는 시의 일부이다. 화자인 농부는 23 경운기 한대를 고쳐써가며 자녀를 키우고 공부시키며 가족을 건사한 가장이다. 이제 이상 사용이 불가능해지는 노후된 경운기를 폐차장에 보내기 전에 절을 하며, 대추와 고추 장아찌, 막걸리를 대접하는 농부에게 경운기는 단순한 기계가 아닌, 가족에게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시에는 농부와 경운기 사이에 맺어진 특별한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폐차 직전에 제를 지내며 경물(敬物)하는 농부가 경운기와 맺어온 특별한 관계 혹은 도덕적 지위는 일본 노인들과 아이보와 맺었던 관계와 다를바 없다는 점이다.


  

   이렇듯 저자는 인간과 기계, 인간과 로봇,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도덕적 지위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가치관과 문화적 삶의 습관과 관련이 있음을 관계론적 접근을 통해 해설하고 있다. 지점에서 더욱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바로 기계질문’, 지능적 기계의 도덕적 지위에 대해 묻는 일이 결국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묻는다 통찰이다. 왜냐하면 기계, 로봇, 동물과 같은 대상의 도적적 지위 대한 물음은 결국 우리가 이들 대상과 어떤 관계인지를 자각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따라서 기계질문 곧바로 우리 관한 질문이며, ‘우리 사회 관한 질문이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나는 이렇게 간결하고 명료한 통찰이 이번 독서를 통해 매우 신선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이번 독서를 통해 포스트휴먼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놓고 바라보았던 관점을 탈피하여 인간과 그를 둘러싼 모든 조건와 대상을 새롭게 보려는 시도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경계 관계라는 키워드로 다시 이해해보고자 했다. 사실 가지 키워드마져 명확히 구분하여 판단하거나 설명하는 자체가 포스트휴먼의 담론과 모순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경계라는 것은 구분된 어떤 존재들의 만남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존재들의 관계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포스트휴먼의 담론은 이처럼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놓고 바라보던 관점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분법적 사고의 양상을 탈피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과 기계, 인간과 로봇은 서로의 영역을 이미 침투해 들어가고 있으며,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언급하는 이른바 혼종 (chimera)’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다. 아울러 포스트휴먼의 담론은 기존의 협소하고 경직된 관계 구도에서 외연을 넓힌 새로운 관계를 예비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관계의 구도와 맥락을 연결시킬 있는 은유와 상상력의 문법이 필요하게 된다.   상상력은 인도작가 아미타브 고시가 인류세의 위기는 상상력의 위기라고 언급한 것처럼 현재 지구 환경의 위기가 나의 위기임을 자각하는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다. 생태비평가 티모시 모턴이 제안한 초과물개념의 시대에는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있으므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이상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담론은 결국 인간과 밖의 모든 대상과의 구분 아니라 혼종상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를 정의해나갈 것인지, 양상을 어떻게 가꾸어 나갈지를 고민하는 시도라고 있다. 고민은 우리의 생존과도 직결되어 있는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의 역할은 인간과 관계 맺는 모든 피조물과의 새로운 관계맺기, 새로운 공진화에 대한 이해와 준비를 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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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첫날이 되어 새로운 마음으로 이달의 첫 글을 올려봅니다.

오늘은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한 소개를 겸합니다.

제가 주목하게된 도서는 
국민대 김재준 교수의 <벤야민 번역하기>입니다.




 1월 중순, 그러니까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소식이 나오기 시작할 즈음에 같이 출간되어 더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게 된 책이기도 합니다.

(마스크를 구하듯 줄을 서서 책을 사려는 독서인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책소개를 보면 이 책의 정체는 모호합니다. 
 역사책 같기도하고, 평론집 비슷하면서, 우리 삶의 다양한 지점을 
 관통하고 있는 생각 모음집인듯 보입니다. 
 (아직 않읽어 봤으므로, 기대평만...^^)
  발터 벤야민의 전방위적인 생각과 글쓰기의 방식과 닮았을까요.
 
  분명해보이는 것은, 
  저자의 글쓰기가 바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거울 같다는 
  생각입니다.

  저자의 특이한 이력과 다양한 독서(곧 다양한 관심)이 모여 하나의 큰 덩어리를 이룬 유기체 같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묵직하지만, 언젠간 도전해보고 싶은 책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2004년에 저자 김재준이 '여성동아' 기자와 인터뷰한 기사가 있으니,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국민대 김재준 교수의 ‘창의적인 영재 교육법’
   
  이 기사는 다분히 자녀가 있는 부모의 시선에서 관심을 가질만한 '교육법'을 화두로 삼고 기획한 기사가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우리의 독서 현실과 독서 방법, 그리고 글쓰기의 중요성'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사회에서 '영재'란 단어가 같은 의미는 다분히 '엘리트 양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에 이 단어 사용에 조심스럽네요.  
  기사를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무리 좋은 학교 교육 제도라고 해도,
  한계는 있다고 봐야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입시를 위한 학원 없는 사회', '타인에게 공감하고 자신을 발견하는 공부'를 아이들이 접할 수 있게 할 수는 없을까 하는 데에 관심이 생깁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 또는 그러한 노력도 없이) 남자-여자를 대립구도로만 보거나, 타인을 경쟁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쉬운 현실입니다. 
교육제도 또한 그렇습니다.

학교제도에 순응하기만 하는 '자신의 생각이 부족한'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생각의 힘을 기르게 할 수 없을까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기성세대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자의대로 빼앗고 있지는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신문기사 하나에도 생각이 많아 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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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 대한 간략한 보고서

 


작년에 일본계 미국인 문학비평가이자 서평가 미치코 가쿠타니의《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알게 되어 찬찬히 읽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쿠타니는 미국의 일간지 《뉴욕 타임스 New York Times에서 34 (1983-2017) 서평을 담당했는데요, 그녀가 은퇴 처음 발표한 정치·문화비평서가 바로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이하 《진실》 표기)입니다. 책을 읽던 알게 소설 편이 있습니다. 바로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라쇼몽」입니다. 《진실》  서론에 해당하는 들어가며에서 가쿠타니가 단편 소설을 언급한 대목이 나옵니다

 


물론 상대주의는 소설가이자 언론인인 울프가 말한 자기중심주의 시대부터 시작해 자부심 넘치는 셀피(selfie) 시대를 거치며 부상한 나르시시즘 주관주의와 정확히 동시에 떠올랐다. 그래서 모든 우리 자신의 관점에 달려 있다는 라쇼몽 효과 로런 그로프의 《운명과 분노》 같은 대중 소설부터 < 어페어> 같은 텔레비전 드라마까지 우리 문화에 스며든 놀라운 일은 아니다.”

 


처음 책을 읽을 당시에는 라쇼몽 효과 의미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가쿠타니는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라면 류노스케의 「라쇼몽」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가정한 같습니다. 제가 소양이 부족한 면도 있지만, 가쿠타니의 글도 친절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언급한 대목만 가지고는 어림짐작만 해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라쇼몽 효과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류노스케의 「라쇼몽」 찾아 읽어보면 되겠죠. 가쿠타니는 과연 「라쇼몽」 자신의 글에서 어떻게, 어떤 맥락에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일까. 점이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동안 잊고 지내다가, 가끔 라쇼몽 효과 의미가 무엇일지만 가끔 떠올렸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여러 글에서 만나게된 라쇼몽 대한 언급과 자료들을 모아 라쇼몽 효과의미를 이해해보려 합니다.

 




우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 읽어봤습니다. 10페이지짜리 단편이라 금방 읽을 있습니다. ‘라쇼몽 한자어로 읽으면 라생문(羅生門)’ 해당합니다. 어떤 마을 외곽의 폐허가 2 누각의 문이 라생문이라고 불리는 합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곳이기에 동물이 들락거리고, 가난한 백성들이 누각의 나무를 뜯어다 내다팔기도 하고, 시체를 버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비오는 어느 , ‘화자 라생문을 지나다가  2 누각 위로 올라가게 됩니다. ‘화자 조심스럽게 누각 안을 보니 시체들이 즐비해 있었고, 어느 노파가 횃불에 의지해 시체의 머리털을 뽑고 있었습니다. 순간 화자 노파의 악행에 분노하여 칼을 들고 노파를 위협합니다. 시체의 머리털을 뽑는 이유를 말하라고 요구합니다. 물음에 노파는 대답합니다. ‘ 여자 시체는 사람을 속여 고기를 여자로 악행을 저질러 왔던 여자인데,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아 가발용으로 팔려고 한다고 말이죠. 결국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는 겁니다. 배고프고 가난한 화자 말을 듣고 노파의 옷을 벗겨 달아납니다. 노파의 옷을 팔아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 가쿠타니가 말한 라쇼몽 효과 의미를 조금은 이해해보게 됩니다. 그런데 가쿠타니는 《진실》  3장에서 다시 라쇼몽 언급합니다.

 


울프는 1989년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어느 글에서 이런 상황 전개를 한탄하며, 미국 소설의 전통적 리얼리즘이 사망했다고 애도했다. 그러면서 소설가들이 “(자아의 세계로부터 나와) 이렇게 요동치는, 기이하고, 예측불가능하며, 돼지들이 발을 쿵쿵 구르며 걷는 바로크적인 우리의 나라로 향해 그것을 문학 자산으로 되찾 것을 촉구했다. (…) 울프는 기자의 목소리와 관점을 새로이 강조한 1970년대 뉴저널리즘의 영향력 있는 주창자였다. 하지만 그의 새로운 선언이 문학계의 많은 이들을 전향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루이스 어드리크, 데이비드 미첼, 드릴로, 줄리언 반스, 팔라닉, 길리언 플린, 로런 그로프 같은 작가들은 수십 윌리엄 포크너, 버지니아 울프, 포드 매덕스 포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같은 혁신자들이 「라쇼몽」같은 새로운 현실을 포착하고자 개척한 다중시점, 신뢰할 없는 화자, 뒤엉킨 이야기 구성 같은 장치를 여러모로 활용했다.”  

 


대목에서 가쿠타니는 「라쇼몽」 언급하며, ‘다중시점이란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류노스케의 단편 「라쇼몽」 다시 읽어도 다중시점이란 표현이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소설에 다양한 시점이 등장한다면 저처럼 소설이 익숙하지 않은 독자도 시점의 변화만큼은 비교적 쉽게 알아볼 있을텐데요. 다양한 시점이 저에게는 보이질 않았습니다. 다만 소설 속의 노파와 화자 각자 자신의 행위에 대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하듯 아전인수격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해석만 찾아볼 있었습니다. 아니면 소설의 행간을 읽어 감지해 내야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되더군요.

 


다시 가쿠타니가 언급한 대목이 소설과 맞지 않는 듯하여 혼란을 느끼던 , 단편 소설에 대한 작품해설 읽게 되었는데, 여기에 가지 실마리를 찾을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단편 소설 「라쇼몽」말고,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의 줄거리가 사실은 류노스케의 다른 단편 소설 「덤불 속」이라는 것입니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의 배경만 단편 소설 「라쇼몽」에서 가져와 적용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실제로 소설 「덤불 속」에는( 단편의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여러 등장인물의 시점에서 각자 자신의 진실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포스터 출처]

By Daiei, (c) 1962

http://entertainment.webshots.com/photo/2011951000055228984dXleQp[dead link] accessed 01-March-2008,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644246



그러므로 가쿠타니가 《진실》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비판하며 언급하는 라쇼몽 효과 「라쇼몽」이란 작품은 사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 가리킨다고 봐야합니다. 소설의 작품해설에 따르면 영화  <라쇼몽>에서 분명히 여러 사람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해, 영화 <라쇼몽> 사실 류노스케의 다른 단편 소설  「덤불 속」 내용이었던 것이죠. 실제 단편 「라쇼몽」 아니구요. 그렇다면 가쿠타니가 말하는 다중시점 라쇼몽 효과 엄밀히 말하자면 덤불 효과 옳은 것이겠죠. 따라서 라쇼몽 효과라는 표현의 유명세는 사실  단편 소설 「덤불 속」에게 주어져야 마땅합니다.

 


퓰리처상 심사위원이기도 했던 저널리스트 하트(Jack Hart) 글쓰기 《논픽션 쓰기》(정세라 옮김, 유유)에서 저자는 논픽션 글쓰기를 이야기하는데, ‘시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의 마지막에 바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

 

시점이 오락가락하는 영화로 자주 인용되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조차 명의 시점인물을 통해 같은 이야기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준다.”


 




정리해봅니다. 가쿠타니의  《진실》 하트의 《논픽션 쓰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라쇼몽 효과 모두 다중시점 이야기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사실 경우 모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 염두에 두고 언급한 겁니다. 그리고 사람이 언급한 라쇼몽 효과 맥락은 사실 류노스케의 단편 「덤불 속」 내용에서 가져왔다는 점입니다. 나아가 실제 단편 소설 「라쇼몽」 제가 처음 소설을 읽으면서 시점 변화를 찾을 없었다 판단이 틀린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해주었던 것이구요. 가지 이해하게 점은 미국의 문단에서 주로 회자되고 소비되고 있는 작품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실제 「라쇼몽」보다는 다중시점이란 맥락에 초점을 맞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이라는 점입니다.

 


라쇼몽관련 자료를 찾다가 한홍구 교수가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역사이야기코너를 연재하며 글에서 라쇼몽 언급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번에 발간한 역사서 《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이영채·한홍구 지음, 창비, 2020) 공저자 한홍구 교수라서 흥미롭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문학비평가들이나 역사학자가 라쇼몽 언급할 ,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는지가 궁금했었고, 실마리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아래에 라쇼몽 언급한 한홍구 교수의 글을 링크해두겠습니다.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수많은라쇼몽 진실을 찾아」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487.html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

https://ko.wikipedia.org/wiki/라쇼몽_(1950_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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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86호 - 2019.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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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 186(겨울)》를 읽은 감상

 


내게 문학이란 무엇일까



 

예기치 않은 눈이 펄펄 나린, 이번 겨울에 나와 함께 했던 계간지 창작과비평 겨울호(186) 다시 돌아본다. 나라가, 아니 세계가 바이러스로 신경이 곤두서 있다. 문득 진부한 의문 하나가 다시 떠올랐다. ‘문학이란 우리에게 무엇일까. 계간지의 표지에 정리된 글들의 제목과 주제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모두 담고 있는 것만 같다. 어쩌면 문학은 인간이 지닌 본질적인 불완전성과 부조리함이 없다면 태어날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문학은 우리와 사회를 가감없이 비추고 있었다



 

불과 전만 해도 조국사태 일본의 경제 제제 움직임과 일본 제품 불매 우리의 화두였다. 이제는 바이러스 기사 우리의 모든 관심사가 뒤바뀌어 버린   같다. 마치 언제 그런 문제가 있었냐는 말이다. 국내 확진자의 동선이 낱낱이 공개되고, 사생활이 드러난다. 중국인들은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눈총을 받고, 기피 대상이 되어갔다. 서울의 어느 카페 입구에 No Chinese라고 놓은 것을 지인이 보았다고 했다. 작년 말에 우리 사회는 No Japan 자랑스럽게 차에 붙이고, 가게 앞에 붙이지 않았던가. 이제는 차이니즈라니. 물론 극히 일부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전염성이 강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팍팍함 이유로, 또는 우리만은 살아 남기위해, 곤경에 처한 이들을 격리하고 배제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위험이 닥치지 않겠는가?’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다. 문제는 당연시라는 지점에 있다. 겨울에 문예계간지 창작과비평 처음 만나고, 틈틈이 읽으면서 내게 문학이란 무엇일까를 막연히 생각해보았다. 성인이 되고도 한참을 지나 문학과 만나게 나에게, 진부한 질문은 결코 진부하지 않다. 문학이 자리매김하는 자리는 바로 우리 삶에서 당연한 당연하지 않다라고 바라보는 곳에 있지 않을까. 아마 문학의 역할이 이런 것이기에, 내가 계간지의 표지를 보며 문학의 존재는 인간의 삶과 사회의 부조리함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라는 막연한 물음을 갖게 것일지도 모른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 에서 동물로서의 인간이 유전자를 나르고 퍼뜨리는 생존 기계라고 표현한 대목이 떠오른다. 바이러스라는 개체 전체의 전략에 인간이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는 (그나마 공포도 똑똑한 인간이 앎을 통해 추가된 공포다) 바이러스의 위협에 문학 가장 강력한 백신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감염된 타자(사람과 다른 동식물을 포함하여) 격리하거나 배제하는 일을 당연시 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관점에서 바라볼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기술 지식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이러스 집단의 전략을 극복할 있는 것은 문학적 상상력 것이다. ‘문학 내가 타인의 시선과 관점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해줄 기회를 있다. 문학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문학적 상상력 통해, 당연한 현상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음 상상하고 발견하도록 한다. 이것이 문학 우리에게 있는 가장 강력한 효용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문학이란 백신은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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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오늘은 이원석 작가의 서평 쓰는 다시 들여다보다가 머리 속에 계속 남아있는 내용을 기록해보고자 합니다. 책은 제가 가끔씩 들여다보는 책인데요, 얇아도 실속 있는 내용들이 밀도 있게 모여 있습니다. 가운데 서평의 전제라고 하는 () 나옵니다. 오늘 읽은 부분은 부분인데요, 여기에서는 글쓰기 이전에 독자로서 어떻게 책을 읽어 나가야 하는지, ‘독서의 태도 대해 이야기 합니다.

 


     저자는 독서를 어떻게라고 묻고 있지만, 독서의 기술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독서의 목적을 어떻게 것인가에 가깝습니다. 저자의 견해는 독자가 독서 목적을 분명히 정할 주문합니다. ‘우상 숭배냐 우상 타파냐라는 문구를 쓰고 있기도 합니다. 견해를 문장으로 나타낸 표현은 온전히 매료되어야 제대로 비판할 있다라는 말이 되겠네요. 대상에 대한 애정 전제되어야 한다는 의미 입니다. 나아가 서평자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정하고 이를 밝히라는 것이죠. 그래서 저자는 서평은 정치적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서평은 자신의 감상을 기록하는 보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독후감과 다르며, 두루뭉술하게 입장을 정해서는 좋은 서평이 나올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보다 논리적이고 비판적으로 접근하되, 무엇보다 대상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라는 인문학자 김경집의 충고가 떠오릅니다


 




     제가 서평쓰기를 고민할 참조하곤 하는 도서는 황선애/김민영 작가의 서평 글쓰기 특강인데요, 책은 글쓰기 방법론 뿐만 아니라 여러 작가들을 인터뷰하여 각자의 서평쓰기를 이야기하는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저는 책에 소개된 가지 방법론과 더불어 인문학자 김경집의 서평쓰기인터뷰 부분이 좋아서 가끔 찾아보기도 합니다. 이런 성격의 책은 서평자 각자 다양한 글쓰기 방식이 있기 때문에, 책에 소개된 다양한 도움말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들을 골라 적용해보면 됩니다.  앞의 서평 쓰는 에서 서평의 전제 소개한 서평자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이를 명확히 밝히라 부분과 온전히 매료되어야 제대로 비판할 있다 말은 김경집의 비판적이되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라 말과 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글을 쓰다 보면 자신이 쓰는 문장에서 여러 문제가 보일 경우가 많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대개는 자신의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퇴고하는 과정에 중요한 지침을 주는 책으로 저는 박민영 작가의 인문내공 참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책은 기본적으로 독립적인 사유를 하는 인간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간결한 안내서라고 있습니다. 생각 훈련법, 인문적 책읽기, 글쓰기, 글과 문장 다듬기 등의 다양한 지침이 종합적이고 간결하게 권에 담겨있습니다. 이전에 통독했던 책이지만, 때는 흘려 읽었던 겁니다. 이제 다시 글을 다듬고 문장을 개선해보려고 책을 다시 보니, 작가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제시한 예시처럼 제가 문장을 쓰고 있더군요. 과거에는 책을 읽어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보았기 때문에 것이 되지 못했던 겁니다. 이번에 책의 5장을 다시 읽어보니 문장의 문제점이 분명히 보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바로 좋은 문장을 쓰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죠. 글과 문장을 다듬을 부담되지 않고 참고해 볼만한, 군더더기 없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퇴고할 , 자주 참고할 책으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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