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를 울린 과학책

이지유 외 9명 지음 |  [바틀비]



요즘 들어 서평글을 읽는 일이 많아졌다. 우선 이유는 내게 익숙한 독후감과 서평과의 차이가 무엇일지 궁금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도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은 느낌 뿐만 아니라, 책에 언급된 사항에 대한 서평자의 생각이 궁금했다. 과학책에 대한 서평을 읽어보는 최근에 시도해보는 일이다. 과학도 결국 사람의 일이기에 과학지식이라는 결과물만이 아니라 과정을 들여다보면 곧바로 인간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있다. 최근에 알게 과학책방 갈다’(갈릴레이와 다윈에서 따온 말이기도 하고, 밭을 갈다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에서 여러 과학자 과학 저술가들이 읽은 과학책 혹은 과학에세이에 대한 서평을 모은 과학자를 울린 과학책 틈틈이 읽고 있다. 오늘은 여러 작가 중에서 과학 논픽션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지유 작가의 서평글을 읽었다.  호프 자런이라는 과학자가 랩걸 읽고 이지유 작가가 서평이었다.  오늘 내가 서평을 선택한 이유는 아무래도 다른 저자들이 읽은 책들 보다 책의 제목을 많이 들어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2017 국내에서 출판된 책은 식물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식물에 대한 과학적 발견 뿐만 아니라 과정을 그려내는 스토리텔링으로 인기를 얻었다. 책을 저자의 이력을 보니 지구물리학자로 보이는데, 하와이에서 화석삼림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분야에 대한 글쓰기와 여성 과학자라는 모델이 많은 독자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은 같다. 아울러 과학자로서 경험을 쌓은 이지유 작가의 이력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기에 더욱 책을 주목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지유 작가가 서평에서 관심을 부분은 과학 지식이나 험난한 과학적 발견의 서사, 혹은 여성 과학자로서 어려움을 극복한 승리의 과정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지유 작가가 서평에서 언급한 것은 과학자를 과학자로 만들어준 요소였다.   요소는 바로 호기심이라는 것이었다. 호기심은 자기를 둘러싼 모든 대상, 모든 세계가 자신에게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도록 하는 감수성으로 이해해볼 있을 것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한 이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과학 연구가 당장 우리의 삶과 직결되어야 하고, 쓸모가 있어야 한다면 인류가 달에 있었을까? 또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우주의 다양한 기본 입자들에 대한 정보도 여전히 가설로 존재했을 것이다. 쓸모를 갖춘 무언가를 얻는 일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쓸모를 얻는 과정에도 보다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아직 랩걸 읽지는 못했지만, 책을 읽게 되면 이지유 작가가 지적하고 있는 과학자를 과학자로 만들어주는 호기심 관한 관점도 염두에 두고 읽게 같다. 작가가 인용하고 있는 호프 자런의 연구는 되는 연구가 아닌연구라고 한다. 하지만 연구에는 돈이 필요하다. 모든 연구자들에게 공통되고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일 것이다. 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호기심과 연구비 마련이라는 현실적인 목표사이에서 고민한다. 호프 자런과 같이 호기심 쫓으려면 그만큼 어려운 여건과 비판적인 견해를 극복해야할 일이다.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앎에 대한 욕구, 의지 같다.

 



수능시험이 치러지고 오래되지 않았다. 요새 부쩍 주변 사람들의 자녀들에 대한 고민거리를 많이 듣는다. 학교 현장에 관한 이야기며, 학원에 대한 이야기까지 듣기만 해도 나의 학창 시절과 다른 장면들을 알게 되었다. 대학교에 가서야 삐삐라는 것을 보았던 시절이다. 내가 요즘들어 부쩍 안타까워하는 중의 하나가 공부 대한 오해다. 내가 의도하는 공부는 시험 공부 아니다. 자신을 위한 진짜 공부 학창 시절에 맛보았으면 어땠을까 아쉬워한다. 그리고 그보다 전에 혹은 공부를 하며 스스로가 앎에 대한 의지 발견하는 경험이 학창 시절에는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나는 이런 부분을 알고 싶다라거나, ‘평생 이것에 대해 천착해보고 싶다라는 뜻을 세우고 의지를 두텁게하는 말이다. 혹은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명이 물론 학업이 필요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 자신의 발견하고 이를 단단하게 다지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내가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도 늦었지만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진짜 공부 해보고 싶다. 오랜 시간 호기심이란 영역이 내게는 무관한 영역인 느껴지는데, 이제는 사회 경험과 독서 경험이 다시 호기심 되찾게 해주는 같다. 내가 겪은 일들, 사회현상은 이렇게 되었을까 궁금해보면 누군가는 반드시 고민한 발자취를 발견할 것이다. 아마도 거의 예외가 없을 것이다. 나는 다소 늦게 치열하게 살았던 다른 사람들의 발자취를 이제야 발견하고 따라가기 시작했을 뿐이다. 물론 늦게 시작한 것이 아쉽지만, 내가 보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지점에 호기심을 갖고 몸을 움직였을지는 의문이다. 이지유 작가가  랩걸에서 찾은 호기심 요소는 인생 후반의 화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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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베를린 - 분단의 상징에서 문화의 중심으로
이은정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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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베를린

이은정 지음 |  [창비]

 



겨울의 재스민차를 떠올리며

 

구동독 출신의 시인 라이너 쿤체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체제에 비판적이었지만, 그의 시는 매우 서정적이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독일 자유대학교에서 정치사상분야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이은정 교수의 신간 베를린, 베를린 읽으면서 쿤체 시인의 <한잔 재스민차에의 초대>라는 제목의 짧은 한편을 생각했다.  

 


들어오셔요, 벗어놓으셔요 당신의

슬픔을. 여기서는

침묵하셔도 좋습니다.

 


동독과 서독이 분단되어 대치하고 있던 시절, 동독 정부에 저항적이었던 사람들은 시를 문에 붙여 놓아 눈에 띄지 않는 저항의 표시로 삼았다고 독문학자 전영애 교수가 시인의 에서 언급한 있다. 쿤체 시인이 한국을 방문하여 국내 대학생과 함께 시와 음악을 통한 교감을 나누는 자리에서 학생이 시인의 연애담을 물었다. 시인이 학생의 질문에 본인의 연애담을 이야기해준 대목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시인이 정치적인 이유로 학위를 받기 전에 대학을 떠나 자물쇠 제작 보조공으로 일하고 있을 당시(1959), 베를린의 라디오 방송국은 쿤체 시인의 금지된 편을 방송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미래의 부인이 엘리자베트 쿤체 여사는 체코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감자를 깎고 있었다고 한다. 쿤체 여사는 체코에서 의사로 지내고 있었다.  방송이 나간 여러 달이 지나 쿤체 여사가 보낸 우편이 길을 돌아 쿤체 시인에게 도착했고, 이후 사람은 시와 음악에 대해서 장문의 편지를 주고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기 직전이었지만, 사람은 직접 만날 없었다. 체코와 접하고 있던 국경은 폐쇄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쿤체 부부가 경험한 삶의 단면을 끌어와 냉전과 분단의 맥락에서 바라보니 2 세계대전 이후 승전연합국이 구축해 놓은 새로운 정치질서의 구도 하에 개개인의 삶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실감나게 짐작해볼 있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특수성

 

승전 연합국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세계대전 이후 독일 지역을 동독(소련) 서독의 연방정부(미국, 영국, 프랑스) 영역으로 분할 통치하게 되었는데, 베를린 역시 도심 지역을 4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공동 관리하게 되었다. 특히 베를린은 동독의 영토 가운데에 위치한 대도시로서 소련이 점령하던 동독에 완벽하게 둘러싸인 일종의 섬과 같은 지역적 특수성을 지닌다. 오늘날 베를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베를린은 분단체제의 상징이면서 분단 극복의 상징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바로 베를린 장벽으로 상징되는 분단의 역사는 2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한 냉전 구도의 산물이다. 부분은 우리의 분단 현실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다만 독일이라는 공간이 대한민국과 달리 분할 통치 과정에서 전쟁이 없었다는 점은 이후의 나라 재건에 다행한 일이었다. 수백만 명의 사망자와 천만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을 양산한 전쟁을 겪은 우리나라와는 이렇게 다른 현실이 있었다.  

 


저자는 2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 건물의 3분의 1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독일 영역 내의 모든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음을 감안하면 부분은 베를린만의 특수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동독 영역 내부에 섬처럼 존재했던 도시는 50년대 , 60년대 초에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진영 사이의 대립과 기싸움으로 위기감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이 설치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이라는 특별한 공간은 정치적으로 분단되었으나, 사실상 완전히 분리된 적은 없었다 한다. 민간 차원에서 엽서 왕래하기 힘들고 사실상 단절되다시피 했던, 그리고 현실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우리의 경우를 비추어볼  어떻게 이런 조건이 가능할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저자는 베를린, 베를린에서 정치사적 관심에서 베를린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고 있으며, 동서 양측이 제한적이나마 지속적으로 교류할 있었던 정황과 우리의 상황을 곁들여 비교해보고 있기도 한다.    

 


 

베를린 장벽의 등장과 이후 상황

 

베를린 장벽은 1961 8 13 새벽에 철조망 형태로 설치되기 시작하여, 곧이어 콘크리트 벽을 세웠고, 28년이 넘은 1989 11 9일에 붕괴되었다. 베를린 장벽은 동독 정부가 소련의 승인을 받아 기습적이고 일방적으로 구축하며 시작되었다. 장벽 설치의 목적은 당시에 늘어나던 동독 주민들의 동독 탈출을 막고 이들을 가두기 위함이었다. 2 세계대전이 끝나 독일 영역이 베를린과 더불어 분할통치된 1945 이후부터 1952 11 까지는 베를린 주민들도 왕래가 가능했고, 생필품도 구하러 다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벽이 설치 동서 양측의 왕래는 거의 불가능해졌다. 여기서 저자가 더욱 주목하는 부분은 정치적으로 제한적이나마 삶의 연결고리는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부분이었다. 경제나 우편, 통신이나 문화교류는 여전히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정학적인 조건을 고려해볼 섬과 같았던 서베를린은 이러한 교류가 사실 대안이 아니라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보장받는 유일한 기회였을 것이다


 

저자가 동서 양측의 교류가 반드시 필요했다고 언급하는 사례 중에서 지하 연결망인 하수도를 있다. 2 세계대전 이전에 형성된 하수터널은 상당한 규모와 효율을 발휘하는 사회기반 시설이었다. 서베를린 하수의 대다수가 동베를린으로 흘러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장벽 설치 민간 차원에서 동서 양측의 기술적, 실리적 협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공간이 분리되었어도, 분리되지 않은 사회기반 시설을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진영의 접촉과 협업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느 진영이 하수터널을 막거나 폭파시켜서 모든 것을 분리시키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국민의 혈세를 모아 새로운 하수터널을 건설하는데 오랜 시간과 자금을 쏟아부었을 같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우리의 상황과 견주어 아쉬워하는 부분과 더불어 이런 부분들에 대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우리의 과오가 안타까웠다. 베를린의 역사를 통해 다른 진영에 있더라도 실리적인 결정을 위해 타협과 합리적 선택이 가능할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는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눈여겨보고 고민할만한 부분이라고 본다.   

 


장벽이 설치된 이후에도 동독 주민이 탈출하려는 시도는 계속 되었고, 과정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에게 총격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쿤체 시인처럼 체제에 비판적이던 시민들에 대한 압박도 물론 이루어졌다. 제한적이나마 우편 서비스가 유지되었지만, 모든 우편물은 검열당해야 했다. 저자는 80년대 초에 동독 주민들이 비밀경찰의 도청에 익숙해져 있었다고 했다. 특히 국제 전화는 이미 50년대 부터 도청당했던 모양이다. 쿤체 시인의 이야기가 담긴 시인의 에서는 동독에 있던 시인이 체코에 있던 미래의 아내 엘리자베트 쿤체 여사에게 청혼하기 위해 국제전화를 했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당시(1959) 해도 모든 국제전화가 도청당했다고 쿤체 시인은 언급한다. 특히 정보국은 시인처럼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일거수일투족 감시했다. 당시에 시인이 휴가로 시골에 갔을 물을 시에 양동이를 우물에서 길었는지까지 구동독 정보부의 기록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정보국이 남긴 자신에 대한 모든 기록과 증거물들로 작성된 자료집을 참고하여 시집이 파일명 서정시(1990) 라고 한다. 쿤체 시인의 사례를 떠올리는 이유는 베를린을 둘러싼 정치사적 장면에서 시인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삶이 어떠했는지 상상해보고 싶어서였다.

 


 

장벽의 구멍들

 

 암울하고 억압적인 조건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우리는 이제 장벽이 붕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당시의 정황을 되돌아보고 있는데, 장벽의 붕괴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은 이미 속에 다양하게 내재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민간차원의 문화교류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독일 최대의 라이프치히 박람회나 17세기부터 이어진 독일 최대의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장벽의 구멍 같은 역할을 했다고 저자는 언급한다. 앞서 말한 하수터널과 같은 사회 기반시설에 대한 동서 양측의 협력을 포함하여 민간차원에서의 물적, 비물질적 교류는 거의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책의 전반에서 저자는 장벽의 구멍 막히는 것을 방지하고 보다 많은 구멍을 만든 정치인으로서 브란트 수상을 주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당시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아데나워 수상의 단절 정책과 달리 서베를린 시장 시절부터 브란트는 공존 정책 강조하고 접근을 통한 변화’, ‘작은 걸음 정책 통해 베를린 주민들의 고통 완화를 위한 실용주의 노선을 택했다. 브란트 수상에 대한 저자의 일방적인 평가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란트 수상의 행보는 분단 독일의 통일과정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는 점을 느낄 있었다. 특히 61년에 장벽이 설치된 이후, 63 말에 이루어진 1 2 통행증협정을 통해 동서 베를린 시민 간의 왕래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려는 브란트의 의지를 엿볼 있었다. 분명히 당시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의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와 노력은 이런 결과를 낳을 있도록 그의 리더쉽에 있었다고 보인다. 물론 이런 결과를 얻을 있었던 것은 어느 한쪽의 바람만으로 되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당연히 동서 양측의 실용적인 협력의 태도에도 주목해야 것이다. 이런 행동의 바탕에는 무엇보다 베를린 시민의 고통 완화 우선 순위에 놓았던 정치인이 있었음을 독일인들은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경우 정부가 바뀔 때마다 대북정책의 급격한 변화로 인한 대화의 시도와 단절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 1970년대 초에도 여러 가지 협력의 분위기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4대국 협정’(1971 9) 통해 무력 사용을 금지하고 평화적 수단으로 분쟁을 해결하려고 했으며, ‘통과협정’(1971 12) 통해 서독과 서베를린 사이의 동독 지역을 통해 민간인 화물통과를 가능하게 있다. 나아가 여행방문협정’(1971 12)으로 66 이후 거의 중단되어버린 동독 동베를린 방문을 허용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이번 독서에서는 2 세계대전 이후 한국전쟁이 서독의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50년대 이후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으로불리는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지구 반대편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내게는 새로웠다. 다시 정리해보면, 60-70년대를 거치며 베를린이란 공간을 둘러싼 동서 양측의 접촉과 실용주의적인 문제 해결 시도 노력을 저자는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라는 표현으로 정리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더욱 성장한 서독은 동독에 다양한 방식으로 재정적인 지원을 해왔고, 동독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해본다. 분명히 우리의 정서와는 많이 다른 부분이 이러한 점들이다. 단순히 정서의 차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절실한 부분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장벽의 구멍 한편으로 영향을 주었던 요소는 68운동이었다. 저자가 근무하고 있는 독일 자유대학교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독일의 68운동은 독일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사건으로 평가된다. 특히 당시의 68세대 젊은이들은 나치 협조자들에 대한 침묵을 유지하는 부모 세대에 반대하여 더욱 목소리를 높인 세대라고 한다.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과 비슷한 면이 있을까하는 의문도 가져본다. 저자는 독일의 68운동이 대한민국의 1987년과 비교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분에 대해서는 이상 언급하지 않은 점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독일의 68운동과 우리의 1987년의 상황과 간단히라도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았으면 좋았을 부분이었다. 특히 이런 부분은 교과서에 자세히 나오지 않는 현대사의 장면이기에 더욱 아쉬웠다.

 


독일의 68세대의 사람이라면 아마도 독일의 작가 W.G. 제발트를 떠올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1968 당시 24살의 청년이었을 제발트는 부모 세대의 침묵에 분명히 불만을 품고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게 청년이 아니었을까. 소설을 비롯한 그의 다양한 글에서 직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은정 교수가 나치 전력으로 인해 경질되었던 인사들도 원래의 사회적 지위를 되찾았다 전하는 말에서처럼,  독일 사회에도 과거사 정리에 대한 침묵과 한계가 동시에 존재했던 같다. 그리고 이런 부조리한 모습들은 제발트와 같은 젊은 세대들이 비판적인 시각을 갖도록 하고, 이는 부모세대와 68세대 간에 갈등을 유발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 중요한 점은 동서 양측의 교류가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던 것처럼 68운동의 저항적 요소가 동독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68운동은 이후 70년대를 거쳐 신사회운동 녹색당 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요인은 1989 여름, 동유럽의 서독 대사관에 동독 주민들이 대거 진입한 대사관 난민문제가 결정적이었다. 상황에서 동독과 서독, 체코슬로바키아(동독 옹호) 헝가리(서독 옹호) 사이의 긴박한 외교협상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때에도 서독 정부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지만 동독의 요구를 최대한 고려하여 수용할 있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한 정황을 있다. 서독 정부 측의 합리적이고 성숙한 접근법을 주목해보게 된다. 나아가 대사관 난민 문제의 해결과정에서 이어진 대규모 촛불시위(1989 10)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될 같다.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시작된 촛불시위가 대규모 정치 집회로 발전하면서 동독 주민들의 바람이 모이고 이는 다시 동독 당국이 여행 자유화 조치를 내리도록 하는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베를린 장벽의 붕괴 과정에는 오랜 기간을 거쳐 쌓여온 구멍 요소들이 존재했고 요소들이 모여 장벽의 붕괴를 가져왔다.

 


 

베를린의 현재를 살펴보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오랜 시간동안 분리된 조직과 행정 단위의 통합, 그리고 사회기반 시설의 복구와 재정리 문제등은 불가피하게 따라오는 주요 문제들이었다. 베를린을 통일 독일의 수도로 정하는 과정에서도 이를 둘러싼 논란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독일 정치인들은 수도의 최종 결정 문제를 당론을 기본 입장으로 내세우고 고집을 부린 것이 아니라 의원 개개인의 합리적 판단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점이 돋보인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역시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런 모습들을 우리 상황과 비교해보면 안타까운 점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현재 있는 일과 조건을 들여다보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일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양측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우리가 시작할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해질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목표를 관철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 이를 수단화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려는 문제를 양측이 분명히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오늘날 베를린은 테크노 음악 팬들의 성지이기도하고, 유명 건축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젊은 인구가 늘어나고 예술가들이 모여 활동하며, 스타트업의 메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내가 한차례 놀란 점은 독일에서 수많은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2015년에만 100 이상의 난민이 독일로 유입되었고, 5 5천명이 베를린에 도착했다고 한다. 세계의 어느 대도시가 순식간에 늘어나는 인구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있는 행정인력이 있을까. 내가 놀랐던 점은 많은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운 사실이다. 많은 시민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난민의 정착을 도왔다고 한다. 우리는 점점 늘어나는 탈북자들도 제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물론 사회에 새로 등장하는 구성원들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시민들이 없을 없다. 하지만 베를린 시민들은 시리아와 중동 지여에서 몰려든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우려나 두려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결국 실천했다는 점이다. 우리의 탈북자 문제만 하더라도 우리는 피할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름을 인정하고 어떻게 하면 이들을 우리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있는지를 고민하고 행동해야한다. 이미 어려운 여건에서 봉사하는 시민들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베를린은 분단과 통합을 동시에 상징하는 도시이다. 특히 정치인 브란트가 서베를린 시장과 서독 연방정부의 수상을 지내며 접근을 통한 변화 철학을 반영한 신동방정책으로 평화와 공존을 추구한 행보에 주목해보게 된다. 물론 사람의 지도력 이면에 양측의 협력과 민간 차원에서 사실상 교류가 끊이지 않았던 점은 무엇보다 핵심적인 요소이다. 서독은 상당한 재정지원을 하며 대가를 요구하지 않은 반면, 동독은 다양한 방식으로 교류를 위한 조건을 완화했다는 저자의 지적도 우리가 귀기울여 들을 만하다. 다만 개인적으로 저자가 베를린을 바라보는 여러 방식과 정치사적인 국면을 우리의 경우와 보다 대등하게 비교하며 제시하는 작업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다양한 시대적 사건이나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유기적인 연결이 가능하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아울러 라이너 쿤체 시인의 삶을 일부 들여다본 것처럼 개별적인 주체들이 역사 속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도 곁들여 조명했다면 이들의 겪은 삶을 깊이 이해해볼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어느 나라든 정치라는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인간의 다양한 삶을 이해하여 이를 조화시키고 조율함으로써 최적의 공존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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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전영애 지음 |  [문학동네]





전에 읽었던 시인의 중에서 기억에 특히 남았던 부분은 독일의 시인 라이너 쿤체에 대한 부분이었다. 저자인 전영애(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 선생과의 따뜻한 만남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쿤체 시인이 방한하여 한국 학생들과의 교감을 나눈 이야기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쿤체 시인이 어느 한국 학생의 질문을 받고 대답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학생은 쿤체 시인이 지은  <자살>이라는 시를 언급하며 죽음 대한 시인의 생각을 물었다. <자살>이라는 짧은 시의 전문은 이렇다.

 


모든 문들 마지막

그렇지만 아직 번도

모든 문을 두드려본 없다.

 



시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시는, 자신을 자신을 자제하기 위한, 자신을 엄격히 지켜보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그렇게 아마 다른 분들께도 격려가 있지 않을까요. 누구도 이미 모든 문을 두드려 보지는 않았거든요. 인생은 본질적으로 아주 여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정은 오로지 고달픔입니다. 그런데 길을 자꾸 가노라면 사는 것이 만하게, 값지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옵니다. 지점들 사이의 구간이 길면 길수록 힘들게 느껴지지만, 삶이 살만하다고 느끼는 지점은 그만큼 소중하고 값지게 다가옵니다.시인의 (199)

 


시인은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의 경험을 지켜보면서 자살 대한 태도를 짧은, 어쩌면 하이쿠를 닮은 절제된 문장에 온전히 담았다. 젊은 나이에 자살한 사람들은 인생의 여정 앞에 닫혀 있는 문들 뒤에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과 기대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 시인은 시를 읽는 이들에게 고달픈 여정에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문을 한번씩 두드려보길 제안하고 있다. 죽음을 이야기했던 시인이 이제 인생의 행복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를 더한다.

 


정말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백분의 초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특히 남녀가 함께 산다는 것은 백분의 초에 다가가고자 함께 노력하고, 백분의 초를 향해 살아가고, 백분의 초를 위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가 해당되지 않는 순간이 있기는 합니다. 몹시 나이가 들었거나 불치의 병이 들었을 말이지요. 외에는 그런 순간은 언제나 계속 있습니다. 순간을 위해서 일하고 살고 생각해야 것입니다.시인의 (199)

 


우리는 나이가 들거나 불치병에 걸렸을 비로소 우리 삶에 그동안 행복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지 깨닫게 되지 않을까?   행복한 순간은 카메라 셔터 속도 만큼이나 짧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짧은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사는 방법은 순간을 위해 일하고 살고 생각하는 이라고 이해해도 될지 모르겠다. 쿤체의 부인 엘리자베트 쿤체는 체코 출신의 의사였는데, 사람의 소설같은 만남과 아름다운 인연을 가꾸어온 이야기를 모처럼 읽었다. 책에서 쿤체 시인과 부인에 대해 부분을 읽노라면 이들 부부처럼 시를 사랑하고, 시인을 극진히 대하며, 인간에 대해 깊은 신뢰를 보여주었던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정도다. 해를 마무리하며, 12월이 시작하는 삶에 대한 진실한 애정이 담긴 쿤체 시인의 말로 시작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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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독서

전성원 지음 |  [뜨란]

 


그렇게 나는 만들어졌다

 

가끔 내가 갖고 있는 책갈피 중에 올리버 색스가 표현을 들여다보곤 한다.

 

도서관에서 서가와 선반 사이를 오가며, 마음에 드는 책이라면 뭐든 골랐고, 그렇게 나를 만들어갔다.

 


나는 삶이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는 나이가 되었을 ,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경험보다 훨씬 늦게 도서관을 발견했다. 헌책방과 도서관은 분명히 삶에 위로를 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물론 나한테만 그럴까. 내가 늦게 장소를 발견했을 뿐이다. 이런 장소에서 무심코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 어느 부분에서 가벼운 충격이나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낄 때가 있다. 시인 장석주 선생이 고등학생일 정독 도서관에서 니체를 발견한 순간의 전율이나 충격은 아닐지 모르겠다. 나의 삶이 역시 불안하고 막막하다고 느낀 어느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펼처본 적이 있다. 콜필드가 맨해튼 밤거리를 배회하는 장면을 읽었을 , 안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오던 순간이 기억난다. 책이 예전에는 분명히 나를 위로해 만한 책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순간이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순간을 통해 무언지모를 위로를 받았다. 가끔 도서관에서 어슬렁거리며 책을 꺼내 살펴보기도 하는데, 이번엔 우연히 전성원이란 작가의 위의 독서라는 서평집을 발견했다. 저자가 읽고 중에는 내가 읽은 책이 거의 없었지만, 최근에 후쿠시마에 관한 도서들을 읽어보았기에 저자가후쿠시마 이후의 이란 책을 읽고 서평부분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저자의 서평은 약간 분량을 지닌 서평이었다. 하지만 천천히 읽어나가자 곧바로 마음에 들었다. 시중에 나온 가벼운 서평들과는 다른 점이 나의 시선을 붙들었다. 비교적 짧게 느껴지긴 했지만 저자는 후쿠시마에 관하여 꽤나 디테일한 사실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저자는 후쿠시마 이후의 읽으며 시인 파울 첼란을 떠올렸다고 했다. 저자에게 대상(후쿠시마와 파울 첼란) 어떤 이유로 이어졌을까. 저자는 파울 첼란으로 대표되는 홀로코스트의 기억(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 역시 파울 첼란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통해 홀로코스트와 원전을 작동시키는 힘이 다르지 않다라고 같다. 특히 101세로 사망한 일본의 수상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비롯한 일본 보수 세력이 1954 3 1일에 있었던 수소폭탄 실험(태평양의 비키니 섬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의 참치잡이 어선이 피폭되는 사건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핵발전소 건설을 위한 예산을 승인한 사례를 언급한다.  희생의 시스템이란 개념을 주장한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핵발전소 관련한 문제는 국가가 국민을 기만하고 무시하는 시스템으로서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은 결국 홀로코스트가 작동되는 메커니즘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저자는 떠올리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같다.

 

 


뜨거운 서평이란 이런

 

저자는 파울 첼란으로 대표되는 홀로코스트의 역사와 핵발전소의 접점을 찾아내는 것에서 나아가 한홍구 교수가 후쿠시마와 용산 참사를 연결시키는 장면에 주목한다. 결국 사건 역시 본질적으로 같은 논리와 시스템에서 나왔다는 한홍구 교수의 지적을 다시 곱씹고 있다. 저자의 문제의식과 후쿠시마 이후의 저자들의 문제의식이 만나는 지점을 들여다보였다. 나는 이번에 처음 저자의 글을 발견하고 읽게 되었는데, ‘뜨거운 서평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의 이면을 뜨겁게 바라보려는 노력이 느껴지는 묵직한 글이었다. 쉽게 읽히고 가벼운 글들을 찾곤 했던 나를 반성하게 해주었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현대사의 여러 장면을 직접 목격하며 삶의 부조리함과 모순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같다. 초등학생이던 저자가 담임 선생님의 병문안에 갔을 병원에서 마주친 군인들(1980 5월이었다) 보고 두려움과 의문을 품게 경험 역시 오늘의 그를 있게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삶의 이력을 보고서야 나는 그가 이토록 삶에 대해 깊은 애정이 느껴지는 뜨거운 글을 있다는 것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나는 다시 생각해보아도 이런 글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와 같이 사람과 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에 도달하기에 자신은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인문학자 김경집 선생이 서평 쓰기에 대해 언급한 대목을 읽어본 적이 있다. 김경집 선생은 따뜻한 시선과 냉정한 평가 겸비한 서평을 쓰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저자 전성원의 서평은 책에 대한 냉정한 평가 하는 것은 아니지만, 따뜻한 시선을 바탕으로 책에 언급된 현실을 본인이 직접 냉정하게직시하고 들여다보고 있다. 김경집 선생의 표현대로 시도하다가 평가를 위한 평가 어설프게 하는 보다는 전성원 선생의 뜨거운 서평 또한 좋을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에게는 위에서 만난 모든 삶의 마주침이 세상이라는 책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모비딕 작가 허먼 멜빌이 화자 이슈메일의 입을 통해 배를 타고 바다를 나가는 일이 나에겐 예일이자 하바드였다 말한 것처럼 말이다.  저자가 위에서 만났던 세상의 다른 책들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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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장회익 지음 |  [추수밭]

 


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 장회익 선생님의 60여년에 이르는 공부 결실이 책으로 나왔다. 바로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이란 이름으로 출간이 되었다.  저자의 존재를 알게 것은 거의 사반세기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어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녹색 평론이란 잡지의 짧은 한편을 읽어 주셨는데, 이야기가 인상깊었던 모양이다. 중국을 여행한 사람이 여행기 성격의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나는 잡지를 이따금 사서 부분적으로 읽곤 했는데, 어느 호에서 물리학자 장회익 교수의 글을 읽게 되었다. ‘온생명이란 단어가 보이고, 현직 물리학자가 물리학 이야기가 아닌 생명과 철학 이야기를 것을 보고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기억에 오래 남았던 것이다. 당시에 나는 막연하게 물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철학자나 평론가가 기고하는 성격의 잡지에 물리학자도 이런 글을 있구나하며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책을 거의 읽지 않았던 내가 군복무시절 갖고 있던 하나가 바로 저자의 삶과 온생명(솔출판사, 1998)였다. 내가 특히 주제에 대해 호기심을 느꼈던 이유는 거의 유일하게 학부 배운 지식이 책을 읽는데 조금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학부 1학년 생물학 수업을 들으면서 물리학자 슈뢰딩어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읽어보고 '약간'의 놀라움( 역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험했다. 이유는 자신의 전공분야를 넘어선 공공의 발언 탐구가 전문가 집단에서는 일종의 오지랖으로 지탄받기 일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는 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같다. 지금 책을 다시 펼쳐보면 장부터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 따온 문구로 시작하는데, 이제는 슈뢰딩어가 생명 현상에 대해 이해해보려는 관점과 태도를 조금 이해할 있을 같다. 아인슈타인이 유일하게 기대겠다고 말한 스피노자의 다시 말해 자연혹은 자연 법칙으로 있겠다. 슈뢰딩어는 물질에 관한 보편 법칙으로서 물리학의 눈으로 법칙() 입각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생명 현상을 설명할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스피노자의 내재론적 입장 탐구의 방법으로 이용하겠다는 선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아가 슈뢰딩어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1장을 시작하며 데카르트의 명제(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제시하고 있는데, 1장에서 생명에 대한 고전물리학자의 접근방식 내지는 태도를 마디에 담으려 것으로도 이해된다.


이번에 읽기 시작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이들 학자들의 문제의식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자연의 이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서양의 학문이 들어와 유학자들에게 전파되고 수용되기 이전에 우주와 사물의 이치에 대한 물음과 방법론을 제시했던 여헌 장현광(1554-1637) 선생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고 주목해볼만한 부분이다. 여헌 선생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우주설 여기에 실린 <답동문> 지었다. <답동문> 가상의 아이(동자) 등장시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화법처럼 동자의 천진스런 물음에 여헌 선생이 답변하는 형식을 취한 글이다. 여기서 동자가 질문에 앞서 하는 선언이   인상깊다.


 

이치를 캔다는 것은 모르는 데가 하나도 없게 후에야 비로소 캤다고 있습니다. (…) 천지 안에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고금의 사람들이 함께  들을 있는 것이고, 역시 있을 것입니다.”(50)

 


저자 장회익 선생은 대목에서 가지 근대학문의 정신을 언급한다. 하나는 점의 의혹 없이 철저히 지적 탐구를 수행하겠다 선언이며, 다른 하나는 탐구 활동에 성역이란 없고, 지식에 대해서는 무엇이나 물을 있으며, 내용은 누구나 있어야 한다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이 근대 과학, 근대 철학의 인식론과 궤를 같이 하고, 근대 서구 과학의 관심사와 상통한다고 의미를 정리하고 있다.

 

한편 저자는 사물을 꿰뚫어 본다 의미의 격물(格物) 대한 여헌 선생의 재해석에 주목한다. 먼저 대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보다 보편적인 원리와 연결 지을 소재를 찾아내야 한다 것을 주문하고, 이를 위해 자연 세계에서 접할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직접 눈으로, 귀로 파악해야함을 언급했다. 달리 표현하면 구체적인 현상에 바탕을 두지 않은 앎은 무용하다 입장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라야 이런 이치를 활용하여 오늘의 상황을 관찰하여 과거의 상황과 미래의 상황을 알아낼 있다 것이다. 바로 지점이 고대의 사고와 근대의 사고를 나누는 분기점이 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답동문> 쓰인 해가 1631년이다. 유럽의 물리 천문학자 라플라스가 고전 역학을 통해 현재 상태만을 관찰하여 과거와 미래의 모든 것을 산출할 있다 언급한 때보다 거의 2세기 이전이라는 것도 놀라운 이야기였다.

 


여헌 선생은 우주설 <답동문>에서 이치를 추궁한다는 방법론 제시하지만 구체적인 물음도 제기하고 있어 흥미롭다. <답동문>에서 똑똑한 동자는 땅이 공중에서 하늘의 () 의해 둘러싸여 유지되며 떨어지지 않으며 이는 대기를 보호하는 보호벽으로서 구각 있어야함을 말하며, 다시 구각은 어디에 붙어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 장회익 선생은 무거운 물체는 떨어져야 한다 인식의 틀에 주목하여 2차원의 평면에다 (중력에 의해) 추락하는 수직축(2D + 1D)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대한 인식과 어느 방향으로도 대등한’( 중력을 분리하여 어느 축방향으로나 물리법칙이 동일한) 3차원 공간(3D) 인식차이를 비교한다. (2D + 1D) 공간 인식 틀에서는 대지가 떨어지지 않는가 묻게 되며, (3D) 인식 아래서는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는가하는 반대의 물음을 도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데카르트와 뉴턴은 고전적인  (2D + 1D) 공간 인식을 벗어나 (3D) 공간 인식으로 나아가며 근대 과학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물에 대한 인식의 틀은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도 새삼 이해하게 된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기존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과 충돌하고 과학자 공동체 속에서 논쟁과 검증의 과정을 거쳐 극복되는 혹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행되는 과정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있었듯이 말이다. 그만큼 인식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번에 손에 들게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1장에서 가지 인상에 남는 부분은 여헌 선생이 18 우주요괄첩이라는 작은 책자를 만들어 이치를 추궁하려는 대상의 제목을 적어 두고 평생을 지니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참고했다는 점이다. 책자는 결국 커다란 학문을 하겠다는 소년의 당돌한 의지이자 학문적인 출사표이기도 것이다. 여헌 선생이 우주요괄첩 품에 넣고 다닌지(38 임진왜란을 만난 것도 포함하여)  60여년이 지나 평생 탐구해온 주제들을 엮은 것이 바로 우주설 <답동문>이라고 한다. 학문에 대한 이러한 발심 평생 놓지 않고 뜻을 세운 사실은 내가 아쉬움을 느끼기 시작한 부분이기도 하기에 여헌 선생 발심을 더욱 눈여겨 보았 같다. 2장에 나오지만 데카르트 역시 23세의 나이에 군인으로 복무하며 놀라운 학문 기반을 발견하고 진정한 학문에 전념하겠다는 각오를 다진 점도 여헌 선생의 모습과 유사한 면이 있다. 평생 공부꾼 장회익 선생님의 공부와 고민의 결과 역시 물리학이란 학문에 뜻을 둔지 60여년이 지난 올해 권의 책으로 나온 것도 여헌 선생의 모습과 오버랩되고 있다. 학창시절을 떠올려볼 , 평생동안 전념할 주제와 뜻을 세우는 공부를 했다면 어땠을까. 사족이긴 하지만 자라나는 세대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어쩌면 부모 카드를 통해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는 것보다 평생 지켜갈 만한 가치와 목표를 찾는 , 그것이 어떤 분야이건 간에 스스로 올바른 뜻을 세우는 일을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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