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받다 북클럽 자본 시리즈 7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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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 받다 

강연 독서 후기

[북클럽 자본시리즈] 7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마르크스 거인의 출현을 알아보다

 


19세기 자연주의 소설의 효시가 작가 에밀 졸라는 목로주점에서 유럽 모더니티의 도시 파리에 거주하는 하층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형적으로 있는 인구 이동의 양상은 농촌 지역의 인력이 도시로 몰려드는 현상이었다. 소설의 주인공 제르베즈는 시골에서 미혼모로 아이를 낳아 연인 랑티에와 파리로 상경한 여인이다. 랑티에는 바람을 피우고 제르베즈를 버린다. 아이들과 남게 제르베즈는 세탁부가 되어 열심히 일하며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지만, 도시는 홀로된 젊은 여인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함석공 쿠포의 끈질긴 구애로 결혼을 하게된 제르베즈는 이웃집 청년 구제의 짝사랑이기도 하다. 소설의 내용은 여기서 그만 얘기하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현실이 흥미롭다. 에밀 졸라가 소설에서 묘사한 시대는 공장의 기계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정황을 담았다. 공장에는 거대한 기계 도입되어 노동자들은 해고당하기도 하며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하던 상황이었다. 공장의 생산 과정에 기계가 도입되어 발생하는 노동자의 소외 현상을 소설에서 발견할 있다. 기계의 도입에 따른 노동자의 대량 해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노동자들이 기계의 출현에 위협을 느끼던 분위기를 고스란히 살펴볼 있는 것다. 소설의 어느 장면에서는 숙련공 구제가 기계와 경쟁을 벌여 승리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인간의 승리 아니라 근소한 차이였다는 점이다. 잠깐 동안의 대결에서 인간이 기계보다 효율적으로 일할 있을지 모르지만, 피곤을 모르는 기계 앞에 언제나 월등한 결과물을 생산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간이 승리한 경쟁이었지만 석연치 않은 승리였던 것이다.

 


상품 생산과정의 분업화로 달인 이들 숙련공들은 기계의 도입으로 해고당하면 무용한 존재로 전락한다. 이번 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 받다 저자 고병권 선생의 표현에 따르면 가지 일에 익숙해진 숙련노동자들은 직장을 떠나면 존재적 변형 경험하게 된다. 무기력하고 소외된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한편 소설 목로주점에서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우울증에 다름없는 무기력증에 빠져버린 제르베르를 비롯한 주인공들은 돈을 버는 대로 모두 맛있는 음식과 술로 배를 채우며 삶을 소진하고 그렇게 살다가 사라지는 존재로 그려진다. 사회의 부품과도 같은 존재로서 살아가는 도시 하층민의 삶은 자본가가 지배하는 삶의 양식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다. 작가 에밀 졸라는 이러한 도시 하층민의 일상과 이들이 처한 암울한 상황을 세심하게 소설에 담아냈. 바로 시대상이 아마도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주목하고 있는 현실과 부합할 같다.

 


 

자본가의 갈망과 절대적/상대적 잉여 가치에 대해

 

이번 일곱 도서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노동일 관련되어 있다. 노동일은 지난 6권을 떠올려보면, ‘하루 노동시간 의미하며, ‘필요노동시간’ + ‘잉여노동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시간, 노동일을 연장하여 많은 잉여수익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 노동자에겐 물리적, 생물학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노동자는 하루 24시간 이상 일할 없으며, 생명을 가진 존재이기에 휴식과 수면, 영양 섭취, 화장실 이용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활동으로 실제 노동일은 더욱 짧아질 수밖에 없다. 자본가의 욕망 추구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자본가가 노동일(혹은 잉여노동) 연장하여 잉여가치를 얻으려는 노력은 곧바로 제약에 부딪히게 된다.

 


이런 제약 조건 속에서 자본가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잉여노동을 늘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를 실행할 있는 방법은 필요노동 시간을 줄여 잉여노동시간 분을 많이 확보하는 길이 있다. 여기서 필요노동시간을 줄인다는 말은 노동력의 가치 줄인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가능한 경우는 여러 산업 부분에서 생산성 혁신 통해 동일한 노동시간에도 많은 상품들을 만들어 내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면 노동시간을 강제로 늘려 얻는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대신,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려 실질적인 필요노동 시간의 여분을 줄임으로써 추가적인 잉여분을 자본가가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잉여분의 가치를 상대적 잉여가치라고 마르크스는 언급했다. 여기서 중요한 조건은 여러 산업 분야에서 생산력이 크게 증가해야한다는 전제다. 그래야 생활수단의 가치(: 노동자들의 생활 필수품 가격) 떨어지게 되어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질 있다는 점이다.

 


개념의 구체적 사례로 마르크스는 특별잉여가치(혹은 추가잉여가치) 제시한다.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특별잉여가치는 특정 기업의 노동생산력이 평균에 비해 월등히 높을 경우 해당 자본가가 추가로 얻는 잉여가치 의미한다. 마르크스가 가정하고 있는 자본가는 사업을 통해 사회에 이익이 되는 활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의 사업은 본질적으로 공익의 목적이란 없거나 2차적인 목적일 뿐이다. 자본가에겐 우선 이윤이 생겨야 계속 사업을 이어갈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자신의 이익을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란 전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자본가들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합법적으로사업을 해나가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문제 하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임금격차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에서 피터 싱어는 우리의 먹거리의 윤리학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더하여 기업의 윤리를 짧게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월마트의 사례를 들고 있다. 2003 현재, 월마트의 CEO 리스콧의 연봉은 기본급 보너스, 스톡 옵션을 포함하여 1740 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10년이 지났지만, 현재 환율로 계산해보면 200억이 넘는 연봉을 받은 것이다. 당시 월마트에서 일하는 풀타임 정규직 조합원의 연봉이 1 8천달러 수준이었다고 하니, 연봉 격차는 960배를 넘고 있다. 책의 1부와 2 끝에서 각각 언급하는 월마트의 사례를 통해 싱어는 월마트의 저렴한 상품 가격이 다른 누군가에게 비용을 전가한 결과일 있다 점을 언급하기도 한다. 우리의 경우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모습을 찾아 있다. 대기업에 부품 혹은 물품을 공급하는 중소기업의 공급업자들은 대기업의 비용절감 전략의 대상이 된다. 월마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말하는 갑의 횡포는 월마트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특히 월마트는 노조를 배제했었고, 4 가족의 조합원이 연봉으로는 빈곤선 이하의 기준이었다. 2005 기록에서 월마트 종업원 자녀의 거의 절반이 건강보험에도 들어있지 않거나 국가 의료보조를 받는다고 했다. 이를 버지니아 유뱅크스의 저작 자동화된 불평등 소개된 현실을 떠올려보자면, 국가의 금전적 지원을 받는 수혜 대상자에겐 사생활의 노출과 엄격한 규정의 준수를 강요 받는 상황으로 이들에게 되돌아오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피터 싱어는 자신의 저서에서 월마트에서 음식을 먹는 일도 상당한 윤리적 문제 내포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강화된 노동과 착취의 진보, 그리고 거인 노동자의 탄생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 노동자의 노동일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특히 노동법이 제정되기 전의 19세기에는 나이 어린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15시간 이상 노동을 해야 했다고 한다. 마르크스가 자본 출간한 1800년대 후반에는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10시간 정도 언급했다고 한다. 현재 우리는 8시간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니 좀더 줄은 셈이다. 이처럼 생물학적 존재로서 노동자들은 노동일을 연장하는데 한계가 있다. 대신 자본가들은 노동의 강도를 높여 노동 생산력을 높이고자 한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채플린은 컨베이어 벨트 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나온다. 채플린은 연장을 들고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나사를 조이며 작업을 무한 반복하고 있다. 그는 다른 생각을 틈이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컨베이어 벨트의 속력이 빨라진다. 노동의 강도가 빨라지는 것이다.   

          


영화에선 개인 노동자로서 노동강도가 증가하여 노동 생산력을 증가하는 상황을 보여주었지만, 여러 노동자들이 함께일함으로써 추가 생산력을 발휘할 있다. 하나의 완성된 상품을 만들어내는데 많은 사람들을 투입하면 노동의 세분화가 이루어진다. 개별 노동자가 모여 하나의 상품을 만드는데 거대한 노동자 되어 상품 생산에 추가적인 효율을 발휘하게 된다. 추가 생산력을 통해 추가적인 잉여를 만들어내지만, 추가 잉여가 노동자들에게 지불되는 일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 책에서 여겨 보아야할 지점은 마르크스가 주목했던 바로 이런 지점들이 아닐까. 이번 책의 제목인 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받다 표현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다.      

 


개별 노동자가 거대한  전체 노동자 일부로서 부품화되는 것이다. 업무의 세분화에 있어서 끝판왕은 소련식 테크노크라시의 사례일 같다. 미국의 역사학자 로렌 그레이엄은 자신의 저서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에서 스탈린의 집권 이후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교양 교육이 사라져버렸다고 진단한다. 그레이엄 교수가 만난 소련 엔지니어 중에는 제지 공장용 베어링전공으로 학위를 받은 이가 있었다. 그러니까 같은(특정) 기계의 동력 파트나 다른 부품에는 세분화된 다른 학위가 주어지는 것이다. 저자가 인용한 기록에는 이런 내용도 보인다.

 

경공업 위원회는 기계 종류별로 압축기를 담당하는 엔지니어링 전공을 만들었다. 중공업 위원회는 유성 페인트와 비유성 페인트를 다루는 엔지니어를 위한 별도 과정이 필요하다고 고집했다. 농업 위원회는 개별 농작물을 담당하는 농학자, 개별 동물을 다루는 수의사를 키워냈다.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124

 

다른 기록도 보인다.

 

소련 엔지니어링 교육에서 전공 분야가 급증했던 것은 전통 엔지니어링 분야를 끊임없이 세분했기 때문이었다. 기계공학은 관련 전공 수십 개로 나뉘게 되어, 심지어 농기계, 공작기계, 주조 설비, 자동차, 트랙터, 비행기 엔진 세부 전공이 생겨났다. 금속공학에서는 구리와 합금을 다루는 전문가를 따로 양성했고, (…) 엔지니어링 파편화는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124

 


서양의 과학사가들이 평가하듯 소련의 지나치게 세분화한 전공 엔지니어 양성은 전체의 일부로서만 기능하는 인력을 양성했다. 중앙 정부에서 어떤 일이나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구성원들은 아무런 의문이나 개선의 여지 없이 자신이 맡은 업무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모습들은 과도한 전체주의 혹은 독재체제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출간된 《북클럽 자본7권의 중심 화두는 노동자들이 모여 협업을 하면서 도출되는 전체 노동자혹은 거인 노동자 존재가 것이다. 다수의 노동자들이 모인 거인 노동자 단순히 개별 노동자들의 수가 더해진 산술적인 결과만이 아니라 무언가 놀라운 일들을 더하여 해낼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별적인 인간은 사회적 인간’, 다시 말하면 인격이 축소된 평균적인 노동자로서 파악되는 인간으로 특정된다. 책의 후반에서는 매뉴팩처의 분업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간다. 채플린의 영화처럼 개별 노동자는 전체 공정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그저 앞의 일만을 전체 공정의 리듬에 맞춰 처리해내야 한다. 따라서 평생 가지 기능을 해내는 숙련노동자 탄생하게 되는 것이 매뉴팩처 분업 시기부터라고 한다. 이런 여건에 우리 몸이 맞추어져 신체의 변형이 일어나고 직업병이 발생하는 것도 바로 시기부터라고 있다. 개별 노동자는 거인 노동자의 일부로서 주어진 기능만을 담당할 , 여기에 새로운 생각이나 의견을 가질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결국 상황은 노동자들의 존재, 노동자들의 몸이 자본가의 부속물이 되어버린다는 점을 마르크스는 말하고 싶었던 같다.

 


특히 마르크스는 이런 양상이 노동생산력의 혁신으로 자본가는 추가 잉여를 얻게 된다는 점과 맞물려 있음을 중요하게 지적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바로 지점에 주목하고, 현상을 파악하는 모습이 바로 마르크스가 많은 후대사람들에게 여전히 놀라움을 안겨주는 이유가 것이다. 자본 썼던 마르크스가 어떻게 사회를 바라보았는지 책을 읽으면서 점점 알게 되고, 동시에 놀라움도 더해간다. 사회 현상에 대한 명민한 관찰이 군데 저서에 드러나는 경우는 많지만, 전반을 통해 자신이 파악한 현상 이면의 양상,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책을 통해 이렇게 유기적이고 치밀하게 담아 놓을 있었을까 놀라게 된다. 마르크스의 사상에 동의하는지의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다.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을 진지하게 파악해보지 않고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이가 있다면, 사람은 단순히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라고 만하다. 오늘날 자본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새롭게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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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 (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9] 설교 (The Serman)


 

[9장의 기본 줄거리]


고래잡이 예배당 들어온 매플 목사가 배의 선두 모양을 설교단위로 올라간 이후 예배가 시작되었다. 자리정리를 하고 기도를 목사는 요나의 이야기를 담은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시작한다. 목사는 성경에 나오는 요나가 구원받은 이야기 통해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기쁨을 얻을 것을 주문한다.

 




이번 9장의 배경은 고래잡이 예배당이며, 매플 목사는 구약 성서의 요나서 나오는 이야기를 담은 찬송가를 부르며 설교를 시작한다. 설교의 소재는 역시 요나서 나온 이야기이다. 목사는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려던 요나의 구원과 기쁨에 대한 이야기 통해 교훈을 주고자 한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은 요나에게 어서 도시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외쳐라 주문한다. 요나는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하늘의 명에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도망치려 했다. ‘인간이 만든 타고 머나먼 카디스(오늘날의 스페인에 위치) 떠나고자 했던 것이다. 요나가 하느님을 피해 배를 타고 도망치려던 부두는 요파(Joppa)’라고 되어 있다. 매플 목사는 요파가 현대의 자파(Jaffa)’라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자파라고 하면 가지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자파에 얽힌 이야기


자파(Jaffa) 현재의 지도상으로 지중해의 동쪽 해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도시로 북쪽의 대도시 하이파(Haifa) 남쪽 이집트 경계 근처의 가자(Gaza) 지구 사이의 중앙에 위치한 해변 도시다. 아래 지도를 보면 이스라엘의 지중해 해안에 자파(Jaffa) 확인할 있으며, 지중해의 서쪽 반대편에 스페인이 있음을 있다. 상당한 거리다. 요나는 이렇게 곳이라면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칠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래 사진들은 내가 올해 출장업무로 잠시 들렀던 이스라엘의 자파 지역 해변가 모습이다. 해변의 남쪽은 자파의 지역(해안 절벽이 있는 부분) 위치하고, 해변의 북쪽은 여러 나라의 대사관들과 호텔이 모여 있는 현대적인 관광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방문한 시기는 2월이었으므로 북반구의 겨울이었지만, 이곳에는 커다란 야자나무가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은 이곳이 겨울에 풍요롭다고 했다. 들판은 푸르렀다. 대신 여름에는 메마르고 황량하다고 했다. 방문한 자파지역은 날씨가 맑았지만 비가 왔다가 해가 비치기를 반복했다. 이곳의 기후는 으레 그렇다고 한다. 변덕스러운 기후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신들을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고대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을법하다







 

'야파' 혹은 '자파'라는 지명을 듣고 지명이 등장하는 문헌이 생각났다. 독일 작가 W.G. 제발트의 이민자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174-180) 보면 지명이 나온다. 소설에서는 화자 할아버지의 비망록에 나온 행적을 따라가는 구도를 취하고 있는데, 터키를 지나 레바논 지역을 지나는 대목이었다. 기억으로는 서쪽 항구도시 자파 지역에서 동쪽의 예루살렘까지 차로 2시간 정도면 있었는데, 아델바르트는 말을 빌려 12시간을 달렸다고 나온다. 아마 제대로 길이 없고, 언덕과 계곡이 많은 지역이라서 그랬을 법하다. 이들이 쓰레기로 즐비하며 똥을 밟으며 걸어갈 밖에 없다라고 묘사하는 예루살렘의 거리는 자파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낮은 언덕들이 많았다. 소설의 화자는 언덕 사이의 협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오늘날 협곡들은 대부분 천년의 역사가 남겨놓은 폐기물로 가득하다. 어디서나 오물들이 흘러 든다. 그래서 수많은 우물의 물은 이제 마실 없게 되어버렸다. 한때 실로암의 못으로 불렸던 샘물은 이제 썩은 웅덩이나 오물 구덩이에 지나지 않으며, 수렁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온다. 매년 여름 도시를 덮치는 전염병의 원인이 바로 독기일 것이다. 코즈모는 도시가 너무 역겹다고 거듭 말한다.” 


자파든 예루살렘이든 황량하고 불결한 여름에 특히 전염병이 창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신을 거역하고 예수를 죽이는데 일조했다고 비난받았던 유대인들에게 불결한 삶의 조건과 무시무시한 전염병의 징벌이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것일까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의 원형이라는 영감을 제공했던 이탈리아의 문인이자 정치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평전 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루시 휴스핼릿 지음, 장문석 옮김, 글항아리](815)에서도 자파 나폴레옹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폴레옹은 1798 이집트 원정을 떠나 인근 지방을 공략했는데, 바로 자파에서 페스트가 돌아 프랑스 병사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1799 3 11 전염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병원을 방문, 희생자들을 위로했다고 전해진다. 평전의 저자 루시 휴스핼릿은 나폴레옹이 실제로 희생자들을 만지거나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퇴각하여 희생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한다. 사실이 어떻든 간에 이야기는 나폴레옹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는 이야기로 자주 회자되는 유명한 이야기다. 이야기는 나폴레옹의 측근 혹은 숭배자들, 후대인들이 만들어낸 신화임을 우리는 알지만, 서구인들에게는 유명한 이야기이고, 여러 문헌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이다. 동양의 고사성어에 배경이 되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나폴레옹을 숭배하던 후대의 단눈치오가 사례를 지도자가 자신을 광고하는데 기가막히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 홍보의 달인단눈치오가 이야기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궁금해진다.  평전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에서 부분을 인용해본다.

 

(단눈치오) 페스트가 피우메에 창궐했을 태연히 병원을 방문함으로써 일찍이 자파에서 나폴레옹이 그랬듯이 질병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서 명성을 날린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814)

 


이탈리아 정부와 대항하여 북부의 피우메 지역에서 자신만의 도시를 세우고 일종의 괴뢰정부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단눈치오. 이탈리아 역사상, 아니 세계사적으로도 특이하고 독특한 인물의 행보에도 나폴레옹 얽힌 이야기를 자신에게 활용하는 천재성을 지녔다. 그리고 배경에 바로 자파 관련한 이야기가 있었다



 

자파라는 지역에서 있었던 나폴레옹과 페스트의 이야기는 롤랑 바르트의 저서에도 등장한다.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에 관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기록인 밝은방에서 스쳐가듯 나폴레옹의 자파 이야기 언급한다.

 

예컨대 보나파르트가 방금 자파의 페스트 환자들을 만졌다. 그가 손을 떼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진은 순간적인 작용을 이용하여 빠른 장면을 결정적인 순간 속에 부동화한다.”(49)

 


밝은방현장에서 포착하기 제목의 14장에서 바르트는 사진을 감상자에게 상처를 주는 요소인 푼크툼과는 다른 충격 주는 요소를 이야기한다. 사진이 전해주는 놀라움 충격이라는 범주를 다섯가지로 정리했다. 중에서 시야의 일부에만 초점을 있는 인간의 주시성과 다른 사진의 특성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자파와 나폴레옹의 이야기 언급한 것이다. 사진을 보면 사진가가 주목한 대상, 예컨대 나폴레옹이 페스트 환자를 만지고 손을 떼는 장면 외에 인화를 시야의 구석에서 발견되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회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알려진 이라고 바르트는 이야기하지만 회화와 사진의 기본적인 차이는 시간성의 전개가 개입되어 있는지의 여부가 것이다. 화가는 바르트가 누멘(영력)이라고 표현한 능력으로 순간의 동작을 표현하지만, 과정에는 시간의 흐름이 개입되어 있다. 반면 사진에는 순간에 모든 것이 고착화되어 인화물에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간의 흐름이 개입되지 않는다. 다만 회화나 사진에서는 사람의 눈이 주시할 있는 영역을 벗어난 부분에서 새롭게 느껴지는 이질감과 같은 놀라움의 충격 주는 것인데, 바르트는 사진의 이러한 특성을 고찰하면서 자파와 나폴레옹의 유명한 이야기를 언급했던 것이다.

 



자파와 관련한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하고, 다시 매플 목사의 설교로 돌아가본다. 자파 부두에서 배를 타고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나려던 요나는 우여곡절 끝에 뱃삯을 내고 타르시시로 달아나려 했다. 타르시시는 오늘날 카디스라고 부르는 지브롤터 해협, 그러니까 요나는 지중해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인 스페인 남쪽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다(지도 참조). 아무런 짐도 없던 요나로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선원들은 요나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멜빌은 매플 목사의 설교를 빌어 당시 사람들에게 이미 익숙해진 황금만능주의라는 세상의 원리를 비판하고 있다. 매플 목사는 선장은 상대가 무일푼일 때만 사람의 범죄를 폭로하는 탐욕스러운 사람이라고 하며, ‘ 세상에는 죄인도 돈만 내면 여권 없이 자유롭게 여행할 있다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마침내 요나는 통상 운임의 배를 요구하는 선장에게 운임을 치르고 승선한다. 참고로 구약 성경의 요나서에는 이렇게 자세한 사항은 나오지 않는다. 설교자의 상상이 가미된 이야기로 보면 되겠다.


 

소설 속에 묘사된 요나는 비싼 운임을 냈지만, 선장은 문이 잠기지 않는 데다 홀수선보다 밑에 있는 구멍같은 좁은 방을 요나에게 배정한다. 홀수선은 배의 수위를 알아보는 표시로, 여기서 요나가 배정받은 홀수선 아래의 방은 해수면 아래에 위치한 방이라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해 창문도 없이 외부의 풍경도 없는 방이기도 하다. 이윽고 출항한 배는 무서운 폭풍우를 만나 요동치고, 깊은 잠에 빠졌던 요나를 선장이 깨운다. 배의 선원들은 이들이 처한 모든 위기가 도망자 혹은 죄인이라는 의혹이 있는 요나 때문임을 의심한다. 요나는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과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은 사실을 고백한다. 선원들은 요나를 동정하면서도  폭풍우가 가져온 난국이 요나 때문인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결국 요나는 선원들에 의해 바다에 내던져지게 된다. 매플 목사의 해석에 따르면 고래의 모습으로 변한 하느님이 요나를 삼키고 바다 한가운데 데려가는 것이다. 고래 뱃속에서 회개한 요나는 지옥의 있다가 고래가 다시 공기와 땅이 있는 곳으로 올라와 요나를 밷어버린다. 홀수선 아래(심연의 세계) 있던 요나는  폭풍우 속에서 바다로 내던져지고, 이어서 고래 속에 삼켜진 요나는 다시 바라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과정을 겪는다. 바다라는 심연 공간, 회개의 공간, 지옥의 공간에서 세속의 세계, 빛이 있는 육지, 구원의 공간으로 나오는 구조에 주목해볼 있다


 

이제 매플 목사의 설교는 클라이막스에 도달한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에게 화가 있을 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동시에 오직 주님을 받드는 이에게 최고의 기쁨 함께 한다고 말하며 신에게 귀의하라는 교훈으로 설교를 마무리한다. 이제 조만간 각자 목숨을 기나긴 고래잡이 생활을 시작해야하는 사람들에게 매플 목사가 신에게 모든 것을 믿고 신에게 귀의하라는 설교는 유일하게 기댈 있는 안식처가 것이다. 이들은 목사의 설교를 의심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요나의 구원과 기쁨을 통해 오히려 이들의 운명을 책임지는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가지 , 지난 8장에서 나는 매플 목사의 설교단 뒤에 걸려있던 폭풍우 그림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의 <노예선> 그림과 많이 닮았다는 점을 이야기 했다. 폭풍우 그림은 이번 (9)에서 목사가 이야기하는 설교 (성경의 요나서’) 격랑의 바다에 던져진 요나의 이야기와 연결이 되고 있으며, 다시 병들거나 죽은 흑인 노예들이 바다로 던져지는 장면이 담긴 터너의 그림을 연상케한다. 물론 이러한 모티프는 작품으로서 모비딕 결말과도 연결되며 일종의 복선으로서 사용되고 있음을 짐작해볼 있겠다.

 


 



 

참고서적


[1] 모비딕 허먼 멜빌 지음/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2] 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 루시 휴스핼릿 지음/장문석 옮김 [글항아리]

[3]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 [대한성서공회]  요나서

[4] 이민자들 W.G. 제발트 지음/이재영 옮김 [창비]

[5] 밝은방 롤랑 바르트 지음/김웅권 옮김 [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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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베를린

이은정 지음 |  [창비]

 

 

[독서 일기]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와 만남을 통한 신뢰 구축에 주목한다


우리의 문화와 역사가 아닌 주제에 대해 우리의 연구자와 저술가들이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펴낸 결과물은 언제나 반갑다.  다시 말해 번역을 거치지 않고, 우리나라 연구자가 소화하고 판단하여 나온 글과 연구물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은 우리 나름의 지식과 지혜로 이어지기에 점점 기대를 하게 된다. 우리 나름의 관점이란 프리즘을 통해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우리 사회의 지적 성숙도를 높여줄 있기 때문이다. 국내의 어려운 출판 시장과 독서 인구의 감소라는 우려에도 이번에 읽고 있는 베를린, 베를린 같은 도서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한편 베를린, 베를린 독일에서 오래 생활하며 연구를 해오고 있는 이은정 교수의 연구 결과물이지만, 학술서적이라기 보다는 대중교양서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오늘까지 절반정도 읽었는데, 책이 대중서라고 해도 다소 아쉬운 점은 남아있다. 문학이나 소설이 아닌 이상 이런 성격의 도서에 참고문헌이나 주석, 그리고 용어 색인 정도의 구성을 갖추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직 국내 연구자들이 대중교양서를 저술할 이런 부분에 관심을 크게 두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출판사의 정책 때문인지 모르겠다. 우선 책의 구성면에서 살펴볼 이런 부분이 눈에 보인다. 도서의 주제는 흥미로운데 구성상 미흡해 보이는 점이 있기에 많이 아쉽기 때문이다. 참고문헌이나 주석 등의 구조가 갖추어 져야 개인적으로 나중에 다시 참고를 하거나 찾아볼 내용이 있을 , 혹은 참고 문헌을 알고 싶을 추적하여 도움을 받을 여지가 있을 것이다


 

내용에 관한 보다 자세한 감상은 나중에 리뷰에서 고민하겠지만, 특히나 역사에 무지한 나로서는 2 세계대전 이후 베를린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건들이 상당히 흥미롭다. 다만 서술방식면에서 우선 시간순으로 전개가 되고 있지만, 베를린이 겪어온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배경 설명이 유기적인 이야기로 엮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반복 설명되는 부분은 내용을 되새김하기에 좋은 반면, 비교적 얇은 도서에서는 보다 간결하게 진행하면서 사건 간에 보다 유기적인 설명이 있다면 더욱 효과적이고 재미있게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며 읽을 있을 같다.

 


아직 책을 절반밖에 읽지 못했지만 베를린이란 공간의 특수성에 대해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2 세계대전 이후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의해 분할 통치된 독일의 동독 지역 가운데 베를린이 섬처럼 자리하고 있다. 베를린이 다시 4개국(승전연합국) 의해 분할 점령된 내막에 대한 점은 사실 자세히 알진 못했다. 아마 내가 학창시절 세계사 시간에 많이 졸아서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나온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수도 있겠다. 어쨌든 오늘 독서를 통해 저자가 전달하는 간결한 설명으로 배경이 되는 역사를 이해할 있게 되었다. 특히 베를린 주민들이 겪은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민감한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물론 베를린의 상황은 이들이 여러 가지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리고 정치경제적으로 냉담한 분위기 속에서도 유형, 무형의 교류는 거의 항상 지속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같다. 저자는 특히 분단을 겪고있는 대한민국의 분단 상황과 베를린의 분단 상황을 비교하며 차이점을 부각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분단된 독일이 통일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민간 차원에서 교류가 끊이지 않았고, 협상을 시도했다는 점은 처음 알게 사실이다. 독일인들은 저자가 제시하는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원칙을 통해 동독과 서독 정부가 수용하고 노력을 했다고 전한다. 물론 동독의 경우, 서독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아져갔지만 서독 측에서도 동독이 끝없이 요구하는 경제적 지원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기 보다  인내심을 갖고 경제적인 지원을 지속하여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해결책을 모색한 점은 분명히 우리가 고려하고 배울 만한 부분일 것이다.

 


물론 베를린의 상황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구체적으로 다른 점이 많다. 베를린은 동독 정부가 관할하는 영토의 가운데에 섬처럼 존재하는 특수성에, 도시가 분할되어 동서 베를린 양측이 상당기간 왕래를 하고 있던 상황도 무시할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현실과 조건에 맞는 합리적인 방법을 궁리하고 모색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여겨 볼만한 것은 만남 없이 신뢰를 쌓을 없는 법이다”(177)라는 원칙이다. 어렸을 적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뉴스에서 기억이 있다. 감격한 베를린 시민들이 장벽 위에 올라가 기쁨을 나누거나 무너뜨리는 장벽의 모습을 인상 깊게 보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 이전에 이미 오랫동안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람들은 제한적이나마 서로 만나 교류하고 교감했고, 실용적인 해결책을 찾아왔다는 점이 책의 전반을 읽는 동안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 이해된다.   

 


2 세계대전이 끝난 독일은 기본적으로 유럽에서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와 미국, 영국, 프랑스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진영의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특수한 공간이 되었다. 이런 기본적인 구도는 한국전쟁으로 대표되는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냉전 구도가 발현되었다는 점이 유사하다. 다만 대한민국은 불행하게도 전쟁이 발발하여 남과 북이 분단되었고, 엽서 왕래하기 어려웠던 시간을 오래 인내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하는 분단 상황과 우리의 상황 사이의 차이점이다. 그러므로 독일인들이 겪은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차이점에도 주목하고 화해와 공존의 실마리를 찾아야 것이다. 특히 베를린 주민들이 베를린을 중심으로 수많은 문제점을 제한적이나마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분리가 불가능한 사회적 인프라망 존재했다는 점이다. ‘공존을 통한 협력 대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기회라고 대목에서 나의 아쉬움과 부러움이 교차했다. 우리에겐 없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남은 책의 절반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베를린 장벽 붕괴와 통합의 과정) 다루어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베를린과 독일 현대사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기대가 남아있다. 우리가 라인강의 기적으로 부르는 서독 정부의 경제 부흥은 분명 동서 대결 구도 속에서 서방세계의 물적 경제적 지원과 더불어 한국 전쟁 특수로 인한 경제 부흥에 힘입은 크다는 점도 주목해본다. 세계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더불어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진행된 냉전 구도의 영향이 전방위 적인 위력을 발휘했음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독일작가 W.G. 제발트는 작가 나름의 독특한 소설 양식을 통해 전후 독일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많이 드러냈지만, 사회의 이면에는 나름의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노력들이 많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특히 정치인 브란트(서베를린 시장과 연합정부 수상을 역임한 인물) 원칙, 베를린 시민의 고통을 완화한다 원칙을 통해 이루어진 경험이 통일된 독일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은 우리가 여겨 볼만한 점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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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으로

(원제: Reader, Come Home )

매리언 울프 지음 |  전병근 옮김 |  [어크로스]

 




읽는 에서 저자인 매리언 울프는 난독증과 창조성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책에서 뇌의 가소성(plasticity)’이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되었던 같다. 독서를 하게 되면 뇌의 여러 부위가 활성화됨을 알게 되었다. 뇌의 신비함은 이런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신경 세포의 연결 방식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일 것이다. 저자는 수많은 지성인들 중에 (말이 아닌) 글을 늦게 깨우친 사람들, 심지어 난독증으로 읽기에 어려움을 가졌던 사람이 많음을 언급하고 있기도 한다. ‘읽기 행위가 우리의 유전자에 예비된 기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문화적으로 익히고 만들어주어야 하는 기능이라는 말이다


 

요즘 모든 부모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아이들이 언제부터 글자를 배우고 책을 읽도록 해야 것인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조카들이 여럿 있는 경우도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독서에 관한 사항에 보다 관심있게 주목해 지켜보고 있다. 왜냐하면 돌도 지나지 않은 조카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의 화면에 몰입한 손가락으로 영상을 넘기며 보거나 전화를 하는 광경을 사람이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당장은 아이가 울지 않고 조용히 있으니 부모는 안심하지만, 스마트폰의 화면이 아이의 관심을 붙들 유일한 수단이 되고 있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면 어렸을 때부터 전화기를 소유하면서 화면과 또다시 떨어질 없는 사이가 되고 만다. 나는 매리언 울프의 책을 읽고나서 이런 부분이 염려스러웠는데, 최근에 출간한 두번째 다시, 책으로 바로 이런 부분에 대한 염려와 고민이 담긴 결과물이라고 보인다. 아직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중에서 젊은 세대의 공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눈에 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공감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대다수가 몰랐던 불안한 현실입니다. (…) 지난 20년간 젊은이들의 공감 능력은 40펴센트 감소했다고 합니다. 특히 지난 10 사이에 말입니다.”(88)

 


어딘지 익숙한 내용이 아닌가. 물론 여기서 나는 흔히 요즘 젊은이들은 이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일반화하기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주변 지인들로부터 젊은이들에게 무언가 공통적인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기 시작했다. 이런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런 의문을 저자인 매리언 울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연구자들도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대한민국에서만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이 보이고 있다. 저자가 언급한 터클 교수의 말에 따르면 젊은 세대가 온라인 세상에서 현실 속의 대면 관계를 희생시킨 것이 공감 능력을 급감시켰다 한다. 이어서 저자는 결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개인적 정체성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생각까지 바뀌고 있습니다(89)”라고 이야기한다. 광고의 카피문구나 과학자들이 하는 중에 기술이 사람들을 연결시킨다 표현이 있다. 그러나 인터넷 기술을 통해 사이버 공간에서 물리적 연장(extension)으로서의 연결성은 증가했지만 마음(공감) 이러한 기술의 전개방식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술이 사람들 사이의 연결을 증가시켰지만 한편으로 기술이 사람들 간에 거리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저자가 책에서 이야기하는 공감은  타인을 동정하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나아가 타인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에도 관계한다고 이야기한다.  뇌영상 연구를 통해 느낌-사고의 신경망 전체가 공감에 관여한다는 결과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특히 우리가 어떤 소설을 읽는다고 , 다시 말해 집중해서 읽을 , 우리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묘사를 감각적으로 상상할 있게 되고, 심지어는 등장인물들의 느낌과 행동 관련된 영역도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소설 속의 인물, 혹은 실생활에서 상대방에 대한 공감능력은 이런 독서를 통해 분명히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개인적으로 보았을 어렸을 때부터 연극 활동 한다면 책을 깊이 읽고 타인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을 폭넓게 키워나갈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사를 외움으로써 몰입과 텍스트에 대한 깊이 읽기의 바탕이 되고, 이를 행위와 감정을 상상하고 이를 표현하는 행위를 통해 저자가 이야기하는 공감하는 뇌를 형성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정에서 작품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작품의 의미에 대해 계속하여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에 연극에 참여한 경험은 없는 이들에게는 책을 깊게 몰입하여 읽으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공감하며 읽는 과정으로 효과를 얻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나, 저자는 내부의 배경 지식 외부 지식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내부의 배경 지식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책을 깊이 읽고 얻은 지식과 느낌의 경험 모두를 의미한다고 이해된다. 그리고 외부 지식 (진위가 명확하지 않은) 검색을 통한 정보나 인터넷 뉴스 등을 염두에 두면 같다. 저자는 점점 내부의 배경 지식 줄어들고 외부 지식 대한 의존도가 커져가는 상황을 우려한다. ‘외부 지식 대한 의존도가 크다는 것은 진위 구분기능이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있다. 부분은 최근에 읽은 미치코 가쿠타니의 저서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에서 사실 거짓 정보혹은 개인적인 의견 가려지는 현상과 연결 지을 있겠다. 가쿠타니는 이런 현상을 포스트모더니즘 대한 비판으로 접근하고 있다. 대다수가 가쿠타니의 견해를 비판하고(예를 들어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한다 같은 비판) 동의하지 않아도 나는 그녀가 용기 있게 제기하는 의문의 방식이 마음에 든다. 99.9% 주장하는 어떤 결론 혹은 암묵적인 사회의 공통 관념에 대해 딴지를 걸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가 받아들이는 외부 지식 과연 맞는지에 대해 검토해보라는 요구를 받게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외부 지식 점점 의존하게 되는 현상을 저지할 있는 관점이자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책읽기의 전문가 답게 매리언 울프는 책을 깊이 읽기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우리의 배경지식과 깊이 읽기의 호혜적 관계 주목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부분을 역설적으로 어휘의 마태 효과 설명하고 있다. 저자가 의도하는 마태 효과 신약 성서 마태 복음(25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어휘의 부익부 빈익빈효과라고 있다. 달리 말하면 책을 폭넓게 제대로 읽은 독자는 앞으로의 읽기에 적용할 자원이 점점 많아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적용할 자원이 적어져 추론과 연역, 비유적 사고의 기초가 부실해지고 결국에는 가짜 뉴스든 날조 뉴스든 불확실한 정보의 희생물로 전락하기(97)”쉽게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책을 제대로 깊이 읽으면 우리가 가짜 뉴스의 희생물이 위험을 줄일 있다는 의미가 된다.

 


매리언 울프의 글은 번역과 무관하게 술술 읽히지 않는다.  특히 읽는 조금 읽기 힘들었는데, 아마도 생소한 분야의 개념에 접해서 그런 것이기도 하고, 군더더기 없이 촘촘하게 얽힌 저자의 글쓰기 방식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번에 나온 다시, 책으로 읽기 편하다. 아무래도 저자의 번째 책을 공들여가며 읽어서 수도 있다. 그녀의 대로 번째 책을 천천히 깊게 읽은 경험을 통해 내부의 배경지식 조금 마련되었고 이어서 새로운 지식이 들어와 이해되는 과정에 도움이 것일 수도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읽는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는 분명 다르다고 말할 있겠다. 독자로서 책을 읽는 과정은 저자와 대화하고 질문하고 토론하는 과정이어야 하는 것이 중요한지 신빙성 있게 다가온다. 아직 책을 읽어가는 과정이지만 오늘 하루 메모해둔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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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쓰기 어떻게 시작할까

이정하 지음 |  [스토리닷]

 



요즘은 개인 미디어시대라고 한다. 개개인이 지식콘텐츠를 생산하고, 유포하여 공유할 있는 수단과 방법을 갖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활발하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유투버들도 이러한 맥락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는 보다 오래된 지식 공유의 출발점이라고 있다. 도서를 출판하는 일은 물론이고, 근래까지 활발했던 편지 쓰기도 생각해볼 있다. 학창시절 숙제로 많이 하던 일기쓰기 또한 전세계인에게 공통된 오랜 글쓰기 방법이라고   있다. 어떤 방법에 관한 도서들을 많이 찾지는 않지만, 동네 도서관에서 책들을 구경하다 우연히 책쓰기 관한 주황색 책을 발견했다. 요새 자서전 쓰기 활동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한데, ‘책쓰기 이렇게 열거했던 다양한 글쓰기의 종착지 같은 활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쓰기 어떻게 시작할까> 책쓰기를 염두에 예비 작가에게 전달하는 간결한 같은 도서다. 요새 온라인 글쓰기 플랫폼과 같은 공간에서 규칙적으로 모아둔 글들을 책으로 출간하기도 한다. 저자는 책을 내려면 우선 해당 책을 쓰는 이유와 독자가 누구일지를 고민하라고 전한다. 나는 어떤 일을 시작도 하기 전에 일이 될까?’부터 염려하는 스타일이다. 스스로 신중한 이라고 말하고, 타인들은 쓸데없는 걱정이 많다라고 표현한다. 도대체 듣보잡 이야기를 누가 들어줄 것인가. ‘엄숙하고 진지하고 재미없어보이는 , 밋밋한 경험밖에 없는 이야기를 과연 누가 읽어줄지 생각하면 자신감 곡선이 곤두박질 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이야기야말로 가장 독창적인 책의 소재라고 입을 모으기도 한다. 다른 작가들이 대체할 없는 유일무이한 나만의 경험이 녹아난 글을 쓰면 된다는 것이다. 밋밋하고 보잘것없는 삶에서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는 것은 글쓰기 과정이 나를 들여다보는 과정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시인 장석주 선생은 저서 <글쓰기는 스타일이다>에서 졸렬한 글을 있는 용기’, 이를 꾸준하게 밀고나가는 능력을 재능이라는 취지로 언급했던 같다. 자신에게 천부적인 문재(文才)’ 없다면,  많은 문인들이 해온 글쓰기 방법을 적용하여 글쓰기 연습을 하면 된다. 그리고 활동에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기반은 예외없이 독서 것이다. 책을 쓰기 위해 이미 다양한 책들을 꾸준히 읽고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책쓰기 어떻게 시작할까>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책을 써내기 위한 실천 팁을 나누는 책이라고 보면 것이다. 다만 저자가 해당 분야의 지식에 정통하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인간의 지식과 기억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저자는 책에 담는 정보의 사실 여부를 점검하고, 저작권 문제를 검토하라고 주의를 주기도 한다. 아울러 예비 작가가 글을 짓는 특별한 재능이 없다면 매일 써보고, 메모하며, 자신이 글도 끊임없이 읽어보고 평가하는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책의 중간 중간에는 현재 여러 책을 출간하며 활동하는 저자 세명의 글쓰기/책쓰기조언도 담겨 있다. 매일매일 상당한 양의 글을 써서 올리고, <새로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등과 같은 사전쓰기와 <시골에서 읽는 즐거움>등의 책을 펴낸 최종규 작가는 조언으로 책쓰기를 생각하지 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책쓰기 이야기하는 책에서 책쓰기를 생각하지 이라니. 무슨말일까. 최종규 작가는 글쓰기/책쓰기 무게 중심을 이야기 하고 있다. ‘글을 우리의 삶을 즐겁게 가꾸는 길에 얹도록 하라 말이다. 말은 평범하게 들리지만 사실 매우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말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이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언급한 삶이 예술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된다라는 표현과 본질적으로 같은 말일 것이다. ‘글쓰기와 책쓰기이전에 우리의 삶에 무게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기교와 명분에 우리의 삶이 잠식당하거나 균형을 읽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글쓰기/책쓰기활동은 삶의 기쁨에 동참하는 활동이 되어야한다는 말이다.

 


책의 뒷부분에는 책을 쓰려는 독자/예비작가들에게 보다 실용적인 정보를 주고 있다. 인세에 관한 이해를 돕는다거나 출판사에 자신의 원고를 투고할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출간계획서의 작성요령에대해서도 담고 있다. 관련 내용은 도서를 참고하면 것이다. 자신의 원고가 어느 정도 완성이 예비 저자에게 가지 중요한 사항은 원고투고 전에 출판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라는 점에 주목해본다. 출판사마다 관심을 두고 있는 글의 방향이나 일종의 출판사별 취향, 혹은 결이 다를 것이다. 투고한 원고가 출판으로 이어지는 비율을 사실 매우 낮다고 한다. 저자는 원고를 투고하기 전에 출판사에서 선호하는 글이 어떤 것인지 출판사의 성격을 파악하는 일을 보다 중요하게 지적하고 있다. 초보 작가들이 간과하기 쉬운 팁인 같다.

 


우리는 매일매일 수도 없이 타인과 소통을 하고있다. 온라인 메신저를 통해 가족과 친구와 끊임없이 문자를 주고 받기도 한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는 비문인 표현들이 많이 오고 가는 상황이지만, 우리는 문장 혹은 글의 형태를 통해 매일 타인들과 생각을 주고 받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완결된 글이 담긴 책을 씀으로써 일상적인 소통을 넘어서 우리의 정신적인 성숙을 가져다줄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지식의 증가만이 아닌 나와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가 책의 앞부분에서 말하고 있듯이, 책쓰기는 독자가 누구인지를 고민하고, 무형의 독자와 시도하는 대화 행위이기 때문이다. 책쓰기는 모든 이들을 위한 활동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자기 나름의 독창적인 이야기를 책쓰기를 통해 타인과 나눌 있다. 나눔 행위가 책쓰기 가장 중요한 목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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