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에 대하여 - 현대 일본의 본성을 묻는 20년의 대화
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한승동 옮김 / 돌베개 / 2019년 8월
평점 :
절판


책임에 대하여

: 현대 일본의 본성을 묻는 20년의 대화

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대담 |  한승동 옮김 |  [돌베개]

 

일본의 책임에 대한 오랜 물음의 대화

 

얼마전 일본에서 전시되고있던 위안부 소녀상작품의 전시 중단 소식을 접했다. 뉴스와 후속 기사를 보면서 사건의 양상이 내게는 이전과는 다른 맥락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최근에 서경식 교수의 저서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를 읽고난 이런 뉴스가 내게 달리 보였다고 말할 있겠다. 뉴스에서는 사건이 표현의 자유 침해한 것에 초점이 맞춰져 보도되고 있었다. 일본 내에서 소위 진보적이라고 자인하는 사람들도 뉴스에 보도되는 맥락만을 따져본다면 소위 예술인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되었다 방향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사회의 시민이 표현의 자유 보장받는 일은 응당 중요한 사안이다. 그리고 시민이 가진 기본권을 제한하는 경우는 사회 존립에 위협이 되지 않는 쉽게 제한 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 벌어진 사건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문제를 넘어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그리고 사태가 하나의 우려를 재확인하는 사례임을 알게 되었다.

 

뉴스에 보도된 사건의 배경은 일본군 성노예 끌려간 피해자들을 기억하는 작품 앉아있는 소녀상 일본 내에서 전시되는 가운데, 일부 일본인들의 반발과 주최측에 가해진 압력으로 작품의 전시가 중단된 것이었다. 내가 느낀 위기감은 표현의 자유문제에 국한되어 해결의 초점이 맞추어지면, 일본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식민주의 영향으로 결과한 사건의 본질이 회피되고 심지어 무화(無化)되는 상황으로 종결될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일본의 입장에서는 식민주의라는 본질을 건드리지도 않고, 표현의 자유를 위해 양보 필요가 있는가의 논쟁으로 소비될 있기에, 아베 정부에 동조하는 세력들에게는 편리한 변명으로 작용할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하는 구실이 마련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보도된 뉴스는 표현의 자유 억압문제에 관심이 맞추어지다보니 보다 본질적인 면이 소홀하게 다루어지거나 회피되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번 기회에 읽게 서경식 교수와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대담짐 책임에 대하여에서 바로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볼 있다.

 

서경식 교수와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 대담자들은 일본의 보수세력에 대항했던 리버럴파 지식인들이 보여준 식민주의에 대한 인식 외면하는 상황을 응답 책임의 회피 표현하고 있다. 90년대 이후 일본 사회의 비판적인 집단임을 자처하던 리버럴파가 몰락 내지는 자폭한 상황은 결국 아베 신조를 비롯한 강경파가 착실하게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기회가 되었다. 소녀상 전시 중단과 같은 사건이 일본 사회에서 계속 되풀이되는 이유는 일본 사회가 왜곡된 역사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강경파세력이 너무 비대해짐과 동시에 제한적이나마 비판적인 기능을 담당해왔던 일본의 리버럴파 지식인들의 붕괴에 가까운 무기력으로 비판기능이 제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이해해볼 있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의 리버럴파 지식인들에게는 보다 근본적으로 넘어설 없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바로 천황제 존재다. 일본사회는 천황 중심으로 어느 시기나 국민통합을 이루어내던 국가였기에, 천황에 대한 강력한 인정 정서에 기반하고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책임에 대하여에서 교수는 일본국의 본성에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식민주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일본 사회에서 천황이라는 단어가 수반하는 힘은 특별하다. 일본 국민과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천황=국가라는 도식 속에 스스로가 신민 되는데 이견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분명히 정치와 종교를 헌법상에서 분리하고 명시하고 있음에도, 일본의 패전 70년이 되어 가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천황에 대한 비판은 매국노가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는 제정된 헌법 상에 명시되어 있는 개인적 자유의 보장이 일본인들 스스로 간절히 원하여 누리게 시민적 자유라는 소중한 가치를 얻어낸 경험없이 연합군에 의해 주어진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 제대로 자유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후에 그나마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경험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기회를 여러 놓쳐 버린 것이 오늘의 전체주의적인 일본의 모습에 이르게 원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럼에도 천황은 평화주의자였다라며 본질을 흐리는 발언을 하거나, ‘요새 그런 이야기(민족, 식민주의) 하면 내셔널리스트라고 비난 받아요라는 말을 리버럴파로부터 듣게되는 상황이 것으로 보인다.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가 지적하는 희생의 시스템에는 과거로부터 여전히 지속되는 위안부나 조선인 징용공 문제 뿐만 아니라 현재 진행중인 후쿠시마 원전사고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가 있다. 대담자들은 모든 사례가 바로 식민주의의 과거 현재의 형태에 다름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사례들에 공통적인 특징은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희생에의 강요 정리해볼 있을 같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서경식 교수는 한결같이 해당 문제의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식민주의 지적하고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대담자는 일본국의 본질적인 식민주의 척결을 있었던 여러 시기를 일본 사회는 놓쳤다고 한다. 패전 이후 연합군에 의해 주어진 자유이긴 하지만 자국민 스스로가 천황제를 폐지하고 자주적인 국민으로서의 인식과 행동으로 이어졌다면, 아직까지도 이어져오는 여러 희생의 시스템 목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상당수의 진보적인 일본 지식인들은 천황제라는 장벽을 극복하지 못했고, 이런 정서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본의 전체주의시대가 도래하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풀이해볼 있다. 여기에는 일본의 정당 혹은 기타 정치 집단이나 매스 미디어 그리고 학계의 저항이 거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것이다. 다카하시 교수가 결과로 저항자는 가장 마이너인 입장으로 내몰리고 고립되어 버리는 이라고 말에서, 일본 내에서도 극소수인 대담자의 고립감과 어려움을 간접적으로나마 읽어낼 있었다.

 

전체주의 일본이 형성된 결과는 다시 일본인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고스란히 피해로 돌아오게 된다. 예를 들면 미일 안보체제는 일본의 헌법을 초월한 존재인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미군이 기지를 아무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것에서 나아가, 미군들의 일본인들에 대한 우월적인 태도는 오키나와 대학에 떨어진 미군 헬기 수습 과정이나 미군에 의해 자행된 오키나와 여성에 대한 성폭력 사건에서 뚜렷이 확인할 있다. 이런 사건이 발생한 이후 미군측은 일본 검찰과 경찰이 수사에 접근도 하지 못하게 했는데, 놀라운 것은 일본 정부가 이런 미국 측의 대처방식에 대해 항의나 사고 수습에 대한 의지 조차 없어 보였다는 점이었다. 내게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이에 대한 피해는 결국 자국민인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돌아가버리는 구조가 되었다. 자국민인 오키나와의 재산과 인명이 피해를 봤는데 뒷짐지고 구경만 하는 본토 일본인들과 정부의 행보는 충격적이었다. 결과 오키나와인들은 본토 일본인들에 의해 버린 취급을 받으며 다른 차별과 희생을 떠안게 되어 버렸다. 정황을 다시 정리해보면, 일본 사회의 식민주의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문제는 다시 자국민의 인권이 온갖 형태로 침해 받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있다.   

 

서경식 교수는 책의 일본어판 후기에서 2017 <치안 유지법> 적법하게 제정되었으므로 손해 배상도 사죄도 실태 조사도 하지 않겠다라는 법무대신의 국회 답변을 보고 일본은 마침내 데까지 왔다라고 판단했다. 1990년대 부터 일본의 반동기(리버럴파의 몰락과 강경파의 장기집권) 들어선지 사반세기가 지나자 이제는 국민과 국제적인 시선은 아랑곳 없이 자신들의 속내를 시원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런 말을 언론 앞에서 하기까지 그동안 얼마나 갑갑했을까.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아직 해결된 것은 없고,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할 문제와 마주하는 일이 남았다. 문제는 일본제품 불매운동이나 일본여행을 취소하는 문제에서 해결될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최근 일간지의 뉴스를 보니 일본의 관광객이 크게 줄어 위기의식을 느낀 여당 정치인(자민당 간사장)  우선 일본이 손을 내밀어 양보할 있는 것은 양보할 "이라고 말하며 동시에 우리(일본) 어른이 한국의 주장을 듣고 대응해 나가는 도량이 없으면 된다"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출처: 중앙일보] "한국에 양보할 하자"…관광객 급감에 온건파들이 움직인다   (2019 09 29일자 기사)

 [ https://news.joins.com/article/23589845 ]

 

우선 총재 다음 자리인 자민당 간사장 니카이 도시히로( 二階俊博·80) 이면에는 이번에 읽은 대담집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이 과거 식민주의 행보의 가해자라는 인식을 전혀 확인할 없었다. 아울러 한국에 대한 유아적인 우월의식에 젖어 있음을 확인할 있다. 특히 양보라는 말은 사전적 의미로 남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함 의미하는데, 그가 사용한 맥락에서의 양보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가 열등한 존재에게 관대함을 베푸는 행위의 맥락으로 감지된다. 나는 물론 양국의 경제적 교류가 정상화되기를 바라는 입장이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일본 제품 불매운동과 여파가 일본인들에게 보다 근본적인 국면에 대한 이해나 깨달음을 주는 데는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은 언젠가  끝나게 되겠지만, 일본인들이 전후 이래 학습된 사고 정지와 (천황제로의) 자발적 예종의 습관으로 공고화된 일본의 전체주의적인 본성에 일말의 영향을 미칠 있으리라는 기대에는 회의적이다.

 

책을 읽으며 가지 주목하게 것은(서경식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1990년대 들어 그나마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있었던 리버럴파의 몰락으로 시작된 일본 사회의 반동기 오늘날 일본형 전체주의가 이제 완성되었다 이야기하는 대목이었다. 여기에 아직 역사적인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내가 배운 점은 오늘날 일본의 전체주의 형성에 미국의 역할을 빼놓을 없다는 지적이었다.  이것은 서경식 교수가 국이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자국의 정책에 맞추기 위해 천황제를 잔존시켰기 때문”(255)이라고 지적하는 대목에서 확인할 있다. 나아가 전후 일본사회 재편의 양상이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 사회의 정치사회적 양상과 궤를 같이 한다는 , 그리고 중심에 공통적으로 미국의 존재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해방을 맞았을 , 도망갔던 한국인 검찰·경찰 세력이 미군정 국내 장악과 함께 다시 복귀한 사실, 이들이 해방된 공간에서 다시 정치적 역량을 확보한 사례는 일본의 경우와 매우 유사함을 발견한다. 이런 정국에서 우리는 친일파에 대한 파악과 처벌 과정에 중요한 골든 타임 놓치게 되었다. 상황은 일본도 다를 바가 없었다. 유사한 패턴의 배후에 미국이 보인 행보를 우리는 주목해야 것이다.

 

패전 일본 내의 정치적 상황은 역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1947 트루먼 독트린 이후 냉전 태세를 굳혀 가던 미국은 중국 공산화와 한국 전쟁을 계기로 일본 재무장을 핵심으로 동아시아의 냉전적 대결 체제를 본격화하면서, 군국주의 일본의 전쟁 범죄 처벌과 ‘평화 국가 일본’으로의 개조라는 기존 정책을 전쟁 범죄자 재기용과 일본 재무장, 이를 위한 일본 경제의 재건이라는 방향으로 급회전시켰다. 이것이 일본 패전 지금까지 70 년간 동아시아의 정세 흐름을 결정지었다.(302)

 

일본 사회 역시 패전 직후 미국은 천황제를 존속시키면서 전범자를 재기용하도록 방관하여 식민주의가 오늘날에도 건재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미구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특수를 일본이 누리게 해주면서 일본 사회의 전체주의화에 눈을 감았다. 그러므로 미국은 ·간접적으로 아시아의 평화유지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점과 일본 사회의 전체주의 형성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없을 것이다.

 

앞서 서경식 교수는 일본이 이제 아베 정권의 장기 집권으로 일본적인 전체주의를 완성했다고 했다. 동시에 데쓰야 교수는 제국 시기의 식민 지배 책임을 계속 부인함으로써 과거의 단절 극복하지 못하고 국제 지도 속에서 고립을 심화시키고 있다 지적한다. 이유를 데쓰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150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은 계속되는 식민주의를 통해, 근린 민족들과의 신뢰 관계를 구출할 없게 현실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닐까.”(284)

 

일본이 이렇게 무모하게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자처하면서도 자신만의 행보를 유지하는 것은 배후에 미국과의 유착 혹은 상당한 정도의 대미 의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상황은 결국 우리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도 적신호가 켜져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만 살려고 노력해도 그럴 없는,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일본 정부는 전근대적인 천황제를 폐지하고, 식민주의를 극복하여 일본인들이 헌법에 보장된 대로, 자유로운 개인적인 주체로서 존재할 있도록 해야만 것이다. 천황제의 종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일본 국민의 다수는 기꺼이 자발적으로 신민으로 회귀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발언대로, 자유민주주의의 이념과 천황제는 원리적으로 서로 양립하기 힘들다. 일본 사회에서는 일본정부를 비롯한 대다수 일본인들이 회피해왔던 책임 다시 바라보고 인식하는 과정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같다. 그래야 역사 수정주의 문제나 일본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되고 있는 모럴의 붕괴 계속 진행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을 있다. 국내에서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것은 이미 옛날의 일이다. 과거의 허물을 그만 들추라 논리로 대응하곤 한다. 이런 논리는 가해자, 기득권자가 가장 좋아하는 레토릭이라고 서경식 교수는 말한다. 보다 밝고 건강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피해자들이 언제나 함께하는 가운데 과거사 해결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사건의 진상이 명명백백하게 알려져야 하며, 후세는 이를 알아야만 한다.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는 행위는 미래에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마무리 대담자들을 다시 보며

 

다카하시 교수의 가차없는 일본 정부 비판을 보노라면 일본 사회에서 매우 보기 드문 인물임을 알게 된다. 과연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다수가 이야기하는 논리에 정면으로 반박을 하는 학자라면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우려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일본 내에서도 이렇게 극소수에 속하는 학자에 대해 서경식 교수의 평가는 남다르다.  

      

(다카하시 선생은) 대단히 중요한 장면에 있는 사상가라고 생각해요. 일본이라는 곳에서 그런 사람이 전혀 없다고 수는 없겠지만 이른바 아카데미즘과 현장이라는 것의 경계를 오가며 생각하는 , 소수파와 다수파의 경계에 서서 생각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205)

 

서경식 교수에 대한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신뢰와 평가 또한 남다르다.

 

서경식 선생은 언제나 나에게는 스승과 같은 벗이자 벗과 같은 스승이었다.”(286)

 

20 넘은 대화와 고민의 세월을 지내며 대담자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지닌 도반 셈이다. 그리고 소수의 입장이나마 끊임없이 소수의 입장에서 다수를 비판하고 의견을 개진하며,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의 왜곡된 시선을 갖는 이들이 펼쳐 놓은 문제점들을 지적해왔다. 이번 대담집 책임에 대하여에서는 일본 사회에 만연해있는 책임 회피 기작을 분석 비판하고 응답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 내에서 이 두 지식인의 입장이 소수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식민지 종주국으로서 일본 국민 다수에 내재되어 있는 식민주의적 심성과 싸우는 일에 오랜 시간을 바친 이들이기도 하다. 이들의 다음 세대에 이분들의 역할을 이어갈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더 많이 나와 한일간의 연대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데쓰야 교수가 후기에서 인용한 오키나와 이시가키지마의 시인 야에 요이치로 시로 마무리를 해보려고 한다.  

 

야에 요이치로의 시집(2017) 일독(日毒) 나오는 재인용.

 

대동아 전쟁 태평양 전쟁

300만의 일본인을 죽음으로 몰아갔고

2,000 아시아인을 괴롭히다 죽이고는 그것을

모두 잊었다는

의지 의식적 기억 상실

교활함 야비함 거무칙칙한

광기의 공포 그리고 나는

확인한다

실로 이것이야말로 지금 일본의 암흑을 통째로 표상하는 한마디

일독’(日毒)

 

 

서경식 교수: 여기서 일독’(日毒) 스스로 중독되어 제정신을 잃은 채로 타자에게 계속 재앙을 뿌려대는 모습을 의미한다.(11)

데쓰야 교수: 여기서 시인이 과제로 삼은 일독의 제거 메이지 유신 150년을 관통하는 일본의 식민주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의미한다.(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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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8] 설교단 (The Pulpit)

 

[8장의 기본 줄거리]

예배를 보러 고래잡이 예배당 들어온 이슈메일은 눈보라를 헤치고 들어온 목사의 행동을 관찰한다. 목사는 독특한 설교단으로 오르는 모습과 이후의 행동, 그리고 설교단 뒤에 걸린 커다란 그림을 관찰하며, 설교단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한다.  

 

 

소설의 화자인 이슈메일은 이번 8장에서 설교단의 보편적인 상징성 주목한다. 고래잡이 산업이 주를 이루는 이곳 뉴베드포드의 항구에 있는 고래잡이 예배당 있는 설교단은 우선 일반적인 계단이 없다. 대신 작은 배에서 배로 올라갈 사용하는 줄사다리를 달아 놓았다. 이제 우산도 마차도 이용하지 않고 눈보라를 뚫고 도착한 노인은 존경받은 교회의 매플 목사였다. 그는 젊은 시절, 작살잡이로도 일했던 사람이었으며, 일찍 성직에 몸을 담았다.    

 

이내 이슈메일의 시선은 설교단으로 향하는 목사를 따라간다. 줄사다리를 타고 높은 곳에 위치한 설교단을 오른 다음, 목사는 설교단 밖으로 걸쳐있는 줄사다리를 끌어 올리는 연극적 행위에 주목한다. 목사 스스로 작은 퀘벡 요새처럼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있을 것인가를 자문하는 것이다. 우선 이슈메일은 행위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행위는 바깥세상의 모든 세속적 인연과 관계로부터 정신적으로 잠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아닐까? 하느님의 충실한 종인 그에게 하느님 말씀의 고기와 포도주로 가득 설교단은 자급자족할 있는 요새, 성벽 안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 에렌브라이트슈타인인 것이다.

 

, 이슈메일이 생각해 설교단의 상징성은 8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설교단은 바로 세상의 선두이며,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 곳이라는 것이다. 다분히 미국적이라고 알려진, 혹은 미국을 만든 책으로 꼽히기도 하는 모비 정치와 종교가 헌법상 분리되어 있는 미국이 사실은 기독교를 믿는 백인들이 이끌어가는 곳이라는 미국의 본질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고 간주해도 같다. 여기에서 나아가 매플 목사는 하느님의 종인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세상의 선봉에 자가 것이다. 이슈메일은 세상이 항해를 떠난 배이며, 배의 형상을 설교단은  세상이라는 뱃머리라고 하며 8장을 마무리 짓는다.

 


 

예배당의 그림과 다른 상징성

 

8장에서 흥미를 부분은 설교단보다도 이슈메일의 시선이 스치듯이 지나가며 발견하고 있는 커다란 그림이었다. 설교단 뒷벽에 걸려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림에 대한 묘사와7장에서 잠시 언급했던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그림 <노예선The Slave Ship> 묘사와 매우 흡사하여, 나는 멜빌이 8장에서 터너의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주장해보고자 한다.

 

우선 터너의  <노예선 The Slave Ship> 그림(아래)을 먼저 보자.

 

(전체그림)


(오른쪽 아래 부분 확대 그림)


그림의 정확한 제목은 다음과 같다.

<Slavers Throwing overboard the Dead and Dying—Typhoon coming on > 이다.

 

제목을 거칠게 직역해보자면,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들을 밖으로 던지는 노예상인들 다가오는 폭풍> 정도가 같다. 그림은 캔버스에 그린 유화로, 터너가 1840년에 처음 전시한 그림이라고 한다. 위키피디아와 서경식 교수의 나의 영국 인문 기행 따르면, 토마스 클락슨(Thomas Clarkson) 저서 《노예 무역의 역사와 폐지  The History and Abolition of the Slave Trade 읽고 영감을 받아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림이 7장에서 언급했던 종호학살사건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위키피디아는 추측이 맞음을 확인해주었다. ‘종호학살사건 1781년에 영국인 선주가 노예를 자신의 재화라고 생각하고, 죽거나 건강하지 못해 죽어가던 노예들을 수장시켜 잃어버린 재화 대한 보험금 청구를 위해 저질러진 학살사건이었다. 사건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60년이 지나서도 터너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음을 있다.

 

전체 그림(첫 번째)을 보면, 그림의 가운데에 노을과 함께 해가 저물고 있으며, 왼편에는 검은 폭풍우와 이곳으로 향하는 배가 보인다. 그리고 그림의 아래, 바다에는 물에 던져진 노예들의 손과 발이 보이는데, 여전히 쇠고랑이 채워져 있는 모습을 있다. 그림의 오른 아래 부분을 확대한 부분 그림이 아래( 번째) 그림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바다의 물고기들과 상어들, 그리고 새들은 물에 빠진 노예들에게 달려들거나 주위를 배회하는 모습이 보인다. 여기에는 물고기, 상어 떼에 잡아 먹히는 쇠고랑 노예들의 쇠고랑 채워진 수족이 거센 파도 속에서 모를 보이고 있다. 

 

대략 그림을 파악했으니, 이제 모비 8장에 등장하는 설교단 뒤의 그림 관해 이슈메일이 묘사하는 대목을 살펴보자.

 

파도가 검은 바위에 부딪혀 눈처럼 하얗게 부서지는 해안 앞바다에서 무서운 폭풍우를 만난 호화로운 척이 묘사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찬 바람에 흩날리는 소나기와 굽이치는 먹구름 높은 하늘에는 태양이 작은 섬처럼 있고, 그곳에서 천사의 얼굴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빛나는 얼굴이 심하게 흔들리는 배의 갑판에 빛을 던져, 넬슨 제독이 빅토리 갑판에 박아 놓은 은판처럼, 부분만 또렷이 드러났다.

 

다시 묘사와 터너의 그림을 놓고 비교해 보면, 일치해 보이는 부분이 상당히 많아 보인다.  폭풍우를 만난 척이 검은 바위처럼 보이는 어두운 바다로 거친 파도를 힘겹게 헤치며 나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림의 가운데 보이는 태양이 개인적으로는 날개가 있는 천사의 형상으로 상상되어 보이기도 한다. 이슈메일은 죽음의 바다에 던져진 인간들의 처절한 모습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는다. 예배당의 의자에서 높은 곳에 위치한 설교단 뒤의 그림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대신 이슈메일은 끓어 넘치듯 분노하는 바다 멀리 척이 폭풍을 향해 나아가는 그림의 분위기를 읽어내는 것이다.  

 

다시 모비 7 읽기를 상기해보면, 1781년에 영국의 노예선 (Zong)에서 죽거나 죽어가는 아프리카 노예 132명을 수장시켜버린 종호학살사건 대해서 정리해두었다. 우선 멜빌은 현재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터너의 <노예선The Slave Ship> 그림 원본을 보스턴 미술관에서 보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보스턴 미술관은 1870년에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모비 딕》 집필하던 1850 시점에서 보스턴 미술관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말이 된다. 터너가 그림을 그리고 처음 전시한 연도는 1840년인데, 전시된 곳은 영국(런던에서 태어나 평생 런던에서 살았으므로 아마도 런던에서 전시가 되었을 것이다) 것이다. 작가정신 《모비 딕》버전에 기록된 허먼 멜빌의 행적을 따라가보면, 1839 20세의 혈기왕성하던 청년 멜빌은 영국 서부 해안의 도시 리버풀로 향하는 화물선에 급사로 승선했다고 나온다. 리버풀은 노동자들의 도시로 이곳에 도착한 멜빌은 대도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빅토리아조 사회의 명백한 불평등을 발견 한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직접 몸으로 부대끼며 세상을 배워나갔던 멜빌은 처음 영국의 공업도시 리버풀에 도착하고, 사회의 구조적인 양상을 목격하고 있다. 그러므로 터너가 자신이 그린 <노예선The Slave Ship> 영국에서 그림을 전시하던 즈음(1840) 멜빌이 영국을 처음 방문(1839-1840)했을 것으로 보이며, 당시 사회를 놀라게 했던, 혹은 논쟁적일 만한 그림에 대해 또는 화가 윌리엄 터너에 대해 멜빌이 들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물론 나의 추정일 뿐이다. 하지만 20세의 젊은 나이라고 해도, 리버풀에 처음 도착하여 리버풀이라는 도시에서 계급의 격차라는 문제를 알아볼 만큼의 예민함과 《모비 딕》3장에서도 짐작해볼 있듯이, 그림에 관심을 가졌던 멜빌이 터너의 작업에 대해 알았을 법한 감수성은 이미 갖추고 있다고 보인다.

 

다시 정리해보면, 1840년에 터너의 그림이 영국에서 전시되었을 , 멜빌이 그림의 원본을 직접 보았을 가망은 희박하다. 하지만 당시에도 그림을 모사하여 걸어두는 것이 흔한 유행이기도 했기에, 포경산업이 중심을 이루는 뉴베드포드의 예배당에 터너가 그린 그림, 폭풍우 속을 항해하는 배가 그려져 있는 (모사한) 그림이 설교단의 뒤에 걸려있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울러 영국의 공업도시 리버풀의 계급적 격차의 모습을 알아보는 감수성을 지녔던 20살의 멜빌이라면, 그리고 배를 타면서도 여가 시간을 온전히 책을 읽는데 할애하며 지식과 교양을 쌓아가던젊은 청년이라면, 수십년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종호학살사건 윌리엄 터너의 과감하고 논쟁적인 그림을 모르지 않았을 터이다. 아울러 노예제를 혐오했던 멜빌이  정치적으로 급진파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공명했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고 생각해본다.  

 

다시 작가 연보에 따르면, 이후 1840 즈음 고국으로 돌아온 멜빌은 서부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실패하고, 포경선 아쿠시넷호를 타게 되는데, 때의 경험이 바로 《모비 딕》 녹아들어가 훗날 수면으로 부상하게 된다.

 

 

터너의 노예선에 대한 외국 블로거의 해석

 

다시 터너의 노예선에 대해 궁금해하다가 터너의 <노예선> 그림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간단히 덧붙여두기로 한다.

 

[출처: http://www.the‐art‐minute.com/joseph‐mallord‐turner/ ]

 

글에 따르면, 블로거는 터너의 그림이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미라는 낭만주의 개념을 저버린 행위다라는 취지로 이야기한다. (참고: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미 대한 논의는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김동훈 옮김, [마티] 참고할 )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미 개념은 이미 모비 3 읽기 부분에서 이슈메일이 물보라 여인숙입구에 걸린 형체를 없고 불길해 보이는 그림을 보는 장면에서 잠시 언급했던 개념이다. 어쩌면 3장에서 여인숙에 걸려있던 그림도 역시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서 찾을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앞서 출처 부분에 소개한 블로거에 따르면, 숭고미 낭만주의의 개념에 범주화되어 있음을 있다. 그리고 개념은 자기 보존이라는 인간의 본능과 연관되어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숭고미 공포와 고통에 대한 생각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며 동시에 신과 자연의 권능(power) 보여주기에 우리를 압도하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터너의 그림 <노예선> 보자.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는 노예선 앞의 바다는 거센 파도가 일고 있다. 그림 자체는  종호학살사건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자세히 보지 않고는 세부 모습을 알기 어렵다. 대신 비극이 벌어지는 거센 바다의 격랑은 신의 분노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에드먼드 버크가 이야기한 숭고미 요소가 보인다. 하지만 터너는 숭고미의 낭만적 개념을 배반한다. 거칠게 일렁이는, 심지어 부글부글 끊어 오르는 듯한 바다의 표면은 죽은 노예의 시체와 바다에 던져진 병든 노예가 상어 떼의 습격으로 고통과 아우성, 피로 물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블로거는 강렬한 장면을 인륜을 저버린 인간에 대해 분노하고 못마땅해 하는 신의 분노를 포착하는 그림으로 이해한다. 인간을 압도하고, 심지어 두려움과 경외감을 느끼게 해주기도 하며, 신의 권능과 자연의 웅장함이 드러내는 숭고함’, ‘숭고미라는 개념은 인간의 탐욕과 인간성이 상실된 학살 행위로, 피로 물드는 바다의 그림을 통해 숭고함 얼룩지고 배반당하고 있는 것이다.       



 



[ 내용에 대한 무단 전재와 사용을 금합니다.]

 

 

 

[참고서적]

 

 

 

 그리고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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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닐 셔스터먼.재러드 셔스터먼 지음, 이민희 옮김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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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셔스터먼/재러드 셔스터먼 지음 | 이민희 옮김 | [창비]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고실험

 

인간의 조상은 상당히 오랫동안 생존 유일한 목표였던 시기를 겪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타고 가던 배가 태평양의 가운데에서 조난을 당해 수십일 가까이 표류하다가 급기야는 죽은 동료들을 잡아먹은 실화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안데스 산맥에 불시착하여 생존했으나 조난 당해 속에 넘게 갖혀 지내며 옆에 죽어 있던 사람들을 잡아 먹고 생명을 유지하다 구조되었던 사람들에 관한 실화를 우리는 알고 있다. 법과 규칙이 준수되는 현대 문명 사회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우리는 생존에 위협을 받는 나약한 존재다. 《드라이》 저자인 셔스터먼과 재러드 셔스터먼 부자는 심지어 우리 문명 사회에서 생존 최우선과제가 되는 상황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다. 수도관 공사나 물탱크 청소 등으로 반나절이라도 단수를 경험해본 이들이라면 물의 공급이 예고도 없이 중단되는 상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있는지 실감나게 구성해 내었다.

 

물공급이 중단된 배경은 물이 부족한 지역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에 공급되는 배수관에 흘러드는 물의 공급이 지역이기주의의 결과로 중단된 것이 발단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물공급 문제가 해결이 기미가 보이질 않자 대형 마트의 물과 음료 코너가 동이나고, 급기야는 사람들과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심지어 단수 2일차에 이미 병원행 급수차에 있는 물을 탈취하려다 총을 맞고 사망하는 사람이 발생한다. 물이 당장 필요한 사람들 중에서 탈수로 사망하는 사건이 이미 단수 3일차가 되기 전에 발생한다. 우리가 공기오염과 미세먼지로 맑은 공기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기 전까지 공기에 대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얼리샤도 그랬다.

 

예전에는 물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도 못하고 신경도 썼다. 언제나 자리에 있었으니까.”(16)      

 

우리가 일상에서 향유하는 모든 필수 생활요소와 물품은 우리가 결핍의 상황과 마주하지 않는 대상의 편리함과 가치를 생각해볼 기회가 흔치않다. 물은 응당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현금은 으레 현금지급기와 에서 나오는 줄로만 알게되는 것이다. 단수 조치는 지역끼리의 이기주의의 결과였기에 분명한 인재였다. 저자의 상상을 따라가다보면 실로 생각하기도 싫은 불편함과 바로 마주하게 된다. 샤워는 커녕, 용변의 문제로 인한 위생상의 문제가 곧바로 사람들을 취약한 상황으로 몰고감을 있다. 와중에 물을 갖고 있는 가정에 대한 시기심과 생존본능으로 작은 마을에서조차 반목과 다툼이 일어날 있음을 충분히 예상해볼 있다. 상당히 현실감있는 문제다. 특히 우물물을 퍼서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물을 나누어 쓰던 부모님의 세대까지만 해도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개울에서, 산에서 물을 길어다가 나누어줄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거의 모든 수자원은 기업이 소유권을 주장하고 병에 물을 넣어 생수를 파는 세상이 되었다. 물과 지하수는 오염이 되었고, 기업들의 과도한 지하수 사용으로 지하수가 줄었다. 우리가 만약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혼돈의 상태가 것임은 충분히 상상해볼 있겠다.

 

소설은 주인공인 얼리샤 집안의 부모가 단수 조치 물을 구하러 나간 , 큰딸인 얼리샤와 남동생 개릿, 이웃집 소년 켈턴이 얼리샤의 부모와 물을 찾아 떠나는 일종의 로드무비와 같은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장면마다 새로운 사건과 위기가 다가오기도하고 가장 어린 개릿의 실수로 전체가 위기에 처하기도 하는 안타깝고 긴장감을 자아내는 플롯이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재난이라는 거대한 상황에 휘말린 주인공들이 겪는 일종의 호러 소설이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셔스터먼 부자가 애초에 드라마나 영화제작을 염두에두고 구상한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문명 속의 인간에게는 언제나 자리에 있는 하나인 결핍이란 사태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어둠을 어떤 양상으로 끌어내 보일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있다. 책을 읽어나가며 그대로 물을 마시기 위해 이성을 잃은 워터좀비들이 보여주는 폭력성과 인간이 갖고 있는 어두운 면을 다채롭게 상상해볼 있을 것이다.  

 

 

해변에서 만난 소녀 재키가 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켈턴 집안의 비극을 보며 (켈턴의 )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의 피뢰침이었다”(208)라고 혼잣말하고 있는 것처럼, 상황에서 물의 가치는 가격을 따지기 힘들 정도가 된다. 탈수로 고통받는 주인공들 역시 워터좀비가 되어간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도덕적으로 보이던 얼리샤에게도 생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생존이라는 경쟁에서 2등은 무의미하다. 오직 생존 아니면 죽음이 있을 . 급기야 탈수 증상이 심해져 기력을 잃은 동생 개릿을 보며 얼리샤에는 이제 도덕 무의미해진 단계에 이른다.

 

동생을 살리기 위해 누가 죽어야 한다면, 얼마든지 물을 빼앗고 죽게 내버려 둘테다. 헨리가 맞았다.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돼야 때도 있다. 지금 나는 괴물이다.”(406)

 

속에서 불길이 일행을 뒤에서 바짝 따라오는 와중에 정신을 잃어가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노인에게 유일하게 남은 한잔을 빼앗아버리는 얼리샤의 모습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어두운 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자신의 혹은 가족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생존에 영향을 주거나 심지어 짓밟는 것이 정당한가, 혹은 윤리적인가하는 우선적인 문제와 마주하도록 한다.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있을 것인가? 우리는 심심치않게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표현을 접하곤 하지만 물이든 식량이든 우리의 생존에 지장을 줄만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을 , 소설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과 같은 괴물 되지 않겠다고 확신할 있을까? 소설 드라이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을 인간이 어떤 행동을 있을 것인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는 일종의 사고실험이라고도 있을 같다.

 

드라이 일주일 정도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단수 사태로 평범한 사람들이 인간성을 잃고 20만명의 생명이 사라져버린 재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직접적인 단수의 원인(지역 이기주의의 결과) 소설에 등장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을 파헤치고 있지는 않다. 애초에 이런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상존하는지를 고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의 방향은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과 윤리의 문제, 그리고 개개인의 투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영화나 드라마 제작을 염두에 두고 구상된 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단수 문제가 미국내 여러 사이의 정치적인 문제와 얽혀있으므로 보다 분쟁의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만약 문제가 국가 간의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있을까. 사고실험만으로도 보다 국가 전쟁이 발생할 있다고 상상할 있다. 실제로 환경운동가 반다나 시바의 저서 물전쟁에서 저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어떤 점에서는 물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경우 관심의 대상은 요르단강이다. 요르단강은 이스라엘,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과 요르단강의 서안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는 강이다. 요르단강은 이스라엘 물수요의 60% 공급하고 있기에 수자원을 확보하는 문제는 인종분쟁과 종교분쟁을 떠나 전국민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에는 언제나 물의 결핍에 대한 우려 내지는 두려움이 함께하고 있다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나일강은 어떨까. 나일강은 아프리카 북부지역의 10 국가(에티오피아, 이집트, 수단,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 부룬디, 르완다, 콩고공화국, 에리트레아 ) 지나는 강이다. 반나나 시바에 의하면, 지역은 이집트의 아스완댐 건설로 10만명의 수단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물분쟁을 가속화했다. 소설드라이에서는 미국 사이의 정치적 이기주의로 인하여 일주일간의 단수에 머물렀으나, 현실에서 나일강과 같이 다른 민족과 다른 국가가 얽혀있는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예상해볼 있다는 것이다. 물론 드라이에서는 보다 시스템과 국가 분쟁이라는 커다란 문제를 단순화하고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제에 초첨을 맞춘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물과 관련한 문제는 단순히 물부족으로 시달리는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을 돕는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여러 문제들을 논의해볼 여지가 있다.

 

한편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주인공 일행이 만나게 되는 새로운 인물인 헨리 어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자기계발 분야 구루들의 교훈을 끌어들이는 장면은 다소 어색한 부분으로 남는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워터좀비들이 인간성을 잃고 폭도로 변하여 한치 앞도 예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예컨대 헨리가 가지고 있는 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과정에서 위기는 기회이며, 진정한 부는 사고방식에서 나온다라는 식의 자기계발서들의 교훈을 꺼내드는 것이 소설의 전개과정과 인간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어색하게 다가왔다. 자신이 머무는 집에 침입한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감정에 굴복하지 말고, 감정을 이용하야 한다라고 침착하게 되뇌인다고 문제가 해결될지는 미지수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재난이 벌어지고 있는 형국에 이성적인 개인으로서의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행동 강령이 과연 도움이 것인지는 의문이다.

 

일상으로 돌아온 얼리샤가 스스로에게 묻는 대목이 기억난다. “정녕 우리네 삶이 예전으로 돌아갈 있을까?”(442) 재난을 겪은 이들에게 재난 전후의 삶은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재난의 고통은 온몸에 각인될 것이고, 사람들은 기억과 함께 살아가게 것이다. 워터좀비가 살아남았다면, 다시 이성을 갖춘 문명인으로 돌아와 도덕적인 상처를 어딘가에 묻은 살아가게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란 문제에 관심을 드라이 읽으며 나는 인간은 잔인한 동물이다라는 말을 가려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본성이 잔인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표현보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라는 측면이 인간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전제가 아닐까. 인간이란 주어진 환경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잔인해질 있는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 소설 드라이 전제하는 인간상의 모습에 적합하지 않을까 판단해본다. 소설은 인간이란 존재에 필수불가결한 부족한 상황이 되었을 이웃들이 워터좀비가 되어 잔인해질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점을 부각시켜준 흥미로운 사고실험이다.      

 



#드라이 #닐셔스터먼 #재러드셔스터먼 #이민희 #재난소설 #창비 #소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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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 미국 문학의 꺼지지 않는 ‘초록 불빛’ 클래식 클라우드 12
최민석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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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최민석 지음 | [arte]


 

학창시절, 그러니까 오래전에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처음 읽었다. 하지만 일말의 공감도 없었다. 읽었던 소설에 대한 내용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개츠비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지도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나는 부분은 갑자기 부자가 남자가 여자를 잊지 못해 스토커 내지는 변태 수준으로 과거의 여자를 생각하고 그녀를 궁금해하며 흥청망청 파티를 여는 장면 뿐이었다. 도대체 읽었던걸까. 개츠비가 도대체 위대한걸까를 궁금해하기도 전에 나는 수많은 독서인들의 찬사를 받은 소설이 이해가 되지 않아 나의 무식한 교양 수준을 탓할 뿐이었다. 그렇게 《위대한 개츠비》 나의 학창시절 이후 오랫동안 무명의 개츠비 잠수를 타다 앞에 나타났다.

 

소설가 최민석 작가가 피츠제럴드의 자취를 따라가며 일종의 취재를 겸한 여행 정리한 책이 이번에 만나게 《피츠제럴드》이다. 제목이 드러내듯 책은 인간 피츠제럴드에 대한 안내서라고 있다. 그렇다고 보다 포괄적이고 집요한 평전과는 다르게, 짧았던 피츠제럴드의 생애의 후반부를 대상으로 한다. 최민석 작가는 끊임없이 방랑하듯 살았던 피츠제럴드의 생애 중에서도 작가가 판단하기에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장소 곳을 선별하여 인간 피츠제럴드가 살았던 생애 어느 순간을 조명하고 있다. 책의 서문 피츠제럴드와 부분을 보자마자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글쓰기를 준비했을 최민석 작가의 마음가짐에 공감할 있었다. 여러 편의 소설집과 에세이집을 펴낸 작가이면서도 대한민국에서 글쓰는 ’, 소설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암시하는 생계형 작가로서의 고백을 따라가며 피츠제럴드 이전에 그가 어떤 마음으로 책을 준비했을지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저자처럼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지는 않지만, 박봉을 쪼개어 아내에게 전달해야하는 가장으로서의 모습을, 무엇보다 그의 문장에서 찾아낼 있었다. 물론 책의 후반에서 소설가인 저자도 처음 《위대한 개츠비》 읽었을 , 소설이 고전인가?’ 반문했다는 고백또한  《위대한 개츠비》 대해 다시 관심을 갖게 해준 요인이었다. 단순히 나의 독서 수준이 낮거나 난독증을 의심할만한 징후가 아니었음을 확인해 해주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 내가 타인의 삶에 대해 공감할 있는 데이터가 너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는 사회에 나와 살아가면서, 보다 보편적인 삶의 이해와 경험치들이 쌓임에 따라 이제는 《위대한 개츠비》 다시 읽더라도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희망은 얻은 셈이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는 19세기가 끝나갈 무렵(그러고 보니 그의 123 생일을 앞두고 있다)에서 20세기 전반을 살다간 사람이다. 젊은 시절에 1 대전의 시기를 겪었고, 유럽에서 일어나 끝난 전쟁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미국의 호황기였던 1920년대를 관통했던 인물이다. 특히 1920년대는 미국의 에포크’(좋은 시절)였다. 비록 20 내내 금주법의 시기였지만, 당시에 주류 생산을 급격히 줄인 결과, 오히려 술값이 내려갔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등장하듯, 밀주를 팔아서 부를 축적했던 이들 또한 있기 마련이다. 20년대는 또한 일명 재즈 시대이기도 하다. ‘아는 사람 초대되어 들어갈 있는 클럽의 비밀 공간에서 재즈를 듣고, 술을 마시며 흥청망청했던 당시에 끈적끈적하고 매캐한 공기 속에서 피츠제럴드가 하이볼을 손에 들고 자신의 야망과 상승욕구를 불태웠으리라 상상을 해본다.

 

피츠제럴드를 미국적인 작가라고 불렀을 , 표현의 함의는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우선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사회적 요소와 백인 중심 사회라는 키워드를 떠올려보게 된다. 아마도 피츠제럴드가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아버지의 친척 중에는 미국 국가를 작사한 인물이 있으며, 볼티모어 시에는 그의 동상도 있다고 한다. 바로 부계 쪽으로 명망있는 백인 가문이라는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으며, 모계 쪽으로는 1850년대 아일랜드 대기근 이후 미국으로 이민온 부유한 이민자들의 후손으로서의 연결고리를 모두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창시절 처음 《위대한 개츠비》 읽었을 아무런 감흥이나 기억나는 부분이 거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미국적이라는 키워드의 함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피츠제럴드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사회의 커다랗고 공고한 장벽과 처음 맞닿게 되는 프린스턴 대학 시절을 조사한 부분을 주목해본다. 나는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최민석 작가가 프린스턴에서 마주한 발견들을 따라가면서 돈만 있다면 귀한 신분이 있는 대한민국의 사회보다 철저히 근본적인 철옹벽이 둘러쳐져 있는 미국사회의 보수성과 배타성을 새롭게 있었다. 아들이 친구들과 점심먹을 공간을 짓는데 대략 20 원에 해당하는 기부금을 내는 가문들이 미국과 세계를 좌지우지하고 있고, 이들의 자녀들은 곳에서 대학생활을 함께하며 평생 사업을 같이 친분을 쌓아 것이다. 사실 저자가 소개한 피츠제럴드의 집안 역시 개츠비에 대한 설정처럼 가난한 환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어린 시절부터 프린스턴 시절에 이르기까지 강박에 가까울정도로 스스로를 상대화 시키며 자신이 결핍하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소설에서조차  미국인이라면 지느러미를 가지고 태어나야 한다”, “그들은 (미국인들은) 그렇게 태어난 셈이다. 돈이 지느러미다라고 써둔 것이 아니겠는가.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금수저와 흙수저를 이야기하지만, 이미 1-2세기 전에 자본주의 사회의 최전선인 미국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교훈을 이미 우리에게 주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일종의 돈많은 스토커 있었던 것은 데이지라는 여인 때문이다. 미국의 빈부격차를 극명하게 있는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어느 지역에 물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지역 이스트 에그(전통 명문가가 사는 , 데이지의 집이 있는 )’ 웨스트 에그(신흥 부자들이 사는 , 개츠비의 집이 있다)’ 있다. 소설에서 장소를 분리하는 물은 개츠비에게 장애물이자, 넘어야할 대상일 뿐이다. 개츠비에게 있어 물을 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라는 지느러미 필요하다. 속을 거스르든, 헤쳐 나가든 하기 위해서는 응당 지느러미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소설 밖에서 피츠제럴드의 또한 상당히 극적이었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특히 돈없는 가난뱅이라는 이유로 사랑을 이룰 없었던 피츠제럴드가 어떤 상처를 받았을지 짐작해볼 수는 있겠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점이 하나 있다면 상상할 있는 능력 테니까. 물론 피츠제럴드가 겪었을 법한 이런 현실은 극소수이긴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기에, 우리는 이런 부유하면서도 심리적으로 아픈 이들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가늠해볼 수는 있다.

 

피츠제럴드가 살아간 생애의 실마리를 따라간 이번 기회로 미루어 보면 그는 모든 소설에서 자신의 결핍과 상처를 어떤 방식으로든 글의 소재로 사용했음을 깨닫게 된다. 달리 말하면 최민석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피츠제럴드는 평생 자전 소설을 작가라는 간결 명료한 표현을 곱씹어보게 된다. 1 대전에 참전하기를 갈망하며 대기하던 와중에 전쟁이 끝나 헤밍웨이처럼 전쟁 영웅이 기회조차도 얻지 못했던 피츠제럴드. 이마저도 상처와 결핍이 되었던 그의 삶을 보면, 그의 소설은 작가 피츠제럴드 자신의 욕망을 대리 실현하는 공간으로서 사용했다고도 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전쟁에 참전하여 영웅의 모습으로 복귀하는 설정도 이러한 배경과 저자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따라서 피츠제럴드의 작품들을 단서로서 분석하면, 역으로 그의 결핍과 욕망이 어떤 식으로 투영되고 문자화되었는지를  파악할 수도 있겠다. 특히 최민석 작가가 소설의 화자인 닉이 피츠제럴드의 다른 페르소나로서 있다는 지적은 분명 《위대한 개츠비》 다시 읽어나감에 있어 중요한 키워드가 같다. 피츠제럴드에게 있어 개츠비가 계급이라는 벽으로부터 받은 결핍과 상처의 보상 기작이라고 한다면, 닉은 글을 쓰는 자로서 피츠제럴드의 욕망이 분출된 캐릭터라고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데이지가 젊은 시절 사랑의 실패에 대한 아픔의 기억을 통해 되살아난 캐릭터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피츠제럴드가 평생 자전 소설을 썼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며, 이건 하나의 강박에 다름아니라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된다.

 

  최민석 작가의《피츠제럴드》 읽으며 피츠제럴드의 삶을 조금 이해하다보니 다시 《위대한 개츠비》 읽어보고 싶어졌다. 다른 고전들은 경우에 따라 다를 있겠지만, 특히나 피츠제럴드의 경우는 자신이 써낸 작품이 자신의 삶과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고 있다. 잊혀진 작가로 알고 있던 피츠제럴드가 팔리지 않는 자신의 책을 사려고 서점을 방문했을 , 놀란 서점 주인들의 표정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그리고 피츠제럴드의 말년에 정신병원에 있던 아내 젤다에게 이제 나는 완전히 잊혔소라고 인정하며 써내려간 순간의 심정은 어땠을까. 피츠제럴드의 작품이 아닌 그의 삶을 따라가보며 44 이라는 짧은 생애에 응축된 인간의 고뇌와 상처를 가까이서 느끼고 공감하게 되었다. 이제 다시 그의 작품을 읽어보게 되면 소름돋을 정도로 솔직한 그의 내밀한 욕망을 이해할 있지 않을까. 최민석 작가의 말대로 위대한 소설은 일상을 살아내고 있을 존재감을 드러낸다라는 점을 믿어보고 싶다. 머나먼 이국 땅에 묻힌 작가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릴 아는 작가의 말이니까. 내게는 생애의 절반에 가까운 소설이 익는 시간 필요했던 모양이다. 최민석 작가의 진심과 도움을 빌어 나의 감각과 영혼 눈을 뜨는 순간을 나도 기대해보게 된다.                   

 

책이 인간 피츠제럴드를 이해하고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가까워지길 의도한 결과물이라면, 최민식 작가는 성공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책을 읽은 다음 이미 오래 전에 《위대한 개츠비》 읽었을 , 아무런 감흥이나 기억나는 대목하나 남아있지 않은 중년의 어느 초보 독자가 《위대한 개츠비》 주문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문학작품의 뒤에 정리되어 나오는 작가연보 수준이 아닌, 작가의 삶을 보다 생생하고 깊이 들여다보는 기회를 통해 작품과의 관련성을 함께 생각해보게 해주는 시도는 인간의 삶과 그의 작품을 통해 나의 모습도 발견할 있는 기회가 있겠다.

 

마지막으로 최민석 작가가 피츠제럴드의 작품 중에서 인용한 대목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을 재인용하며 마무리해본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오류의 왕관, 판도라의 상자였다. 자부심 가득한 뉴요커의 사람으로 올라갔던 나는 그곳에서 뉴욕의 빌딩 숲은 끝없는 연속이 아니라 유한하다는 사실을, 도시는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녹색과 청색의 무한한 자연으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난생처음 그토록 높은 곳에 올라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재즈 시대의 메아리》나의 잃어버린 도시중에서 재인용(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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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비치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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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비치

제니퍼 이건 (Jennifer Egan) 지음 |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뉴욕을 배경으로 소설은 이미 많이 나와있다. 하지만 제니퍼 이건의 소설 맨해튼 비치 대한 소개를 읽고 뉴욕을 배경으로 쓸만한 것이 남아 있을까하는 의구심은 곧바로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소설의 주요 배경으로 나온 맨해튼 비치 어디인지 궁금해졌고, 특히나 뉴욕의 브루클린에 해군 조선소가 있어서 항공모함을 만들기도 했다는 사실에 흥미를 가지게 것이다. 소설의 시대적인 배경은 금주법 시대(1919-1933) 끝난 시점, 미국의 경제 대공황(1929-1939) 시작되어 진행중이던 1930년대 초에서 2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의 1940년대 전반의 대략 10여년 전후의 시기를 아우르고 있다.

 

이번 기회에 새로 알게된 소설가 제니퍼 이건은 유명한 중견 소설가였다. 유명 잡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작가 선정되기도 인물로서 무엇보다 다양한 소설 형식을 실험해본 소설가라는 소개에 주목했다. 고딕소설의 형식 뿐만 아니라, 번에 140자로 한정된 트위터를 통해 SF스파이 스릴러를 연재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리고 이번에 읽게된 맨해튼 비치 역사성과 지역성이 강하게 드러난, 보다 복잡한 사회의 양상을 녹여낸 결과물이. 나아가 저자가 뉴욕이라는 지역의 역사에 대해 철저히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자료를 읽어낸 과정은 역사소설의 글쓰기가 어떠해야하는지를 살펴볼 있게 해주었다. 특히 다이빙 장비를 직접 착용해보거나, 최초의 여성 심해 다이버를 만나 인터뷰하고 구체성을 더한 과정은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해온 작가의 작업에 보다 신뢰감 있는 깊이를 더해 주었다고 있다.     



뉴욕, 특히 브루클린이라는 특정한 지역을 배경으로한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등장 인물들의 동선과 바라본 풍경이 어떤 것이었을까를 상상하며 지도를 찾아 재구성해 보았다. 소설의 지리적 배경이 되는 주요 장소는 물론 브루클린 남쪽의 대서양을 마주한 맨해튼 비치이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기나긴 해변으로 유명한 코니아일랜드 있으며, 소설의 주요 인물인 애너 케리건이 일하는 해군공창의 위치는 브루클린 북쪽이다. 바로 맨해튼 동쪽과 브루클린 사이를 흐르는 이스트강 굽이치는 곳에 해군공창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왼쪽에 점선으로 표시된 영역을 확대한 이미지를 오른쪽에 두었다. 소설책의 내지에 나와있는 해군공창 지도의 윤곽을 보면 여전히 모습을 유지하고 있음을 오른쪽 지도에서 확인할 있을 것이다. 참고로 스태튼아일랜드와 브루클린 서쪽의 좁아지는 부분이 소설에서 내로우스라고 표기되어 있고, 이를 중심으로 맨해튼 섬을 향하는 북쪽의 영역을 어퍼 베이’, 남쪽의 만을 로워 베이라고 한다. 대략 정도를 파악하면 인물들이 이동하는 동선과, 인물들이 바라보던 풍경의 위치를 상상하고 따라가면서 흥미있게 읽어갈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역적 상징성 - 계급과 문화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장치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인 애너 케리건과 그녀의 아버지 에디 케리건, 그리고 덱스터 스타일스는 1934 브루클린의 남쪽, 맨해튼 비치가 있는 곳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덱스터는 뉴욕의 여러 곳에 나이트클럽을 소유한 암흑가의 보스이며, 이탈리아 이민자의 후손이다. 이탈리아식 이름을 미국식 이름으로 바꾸고, 청교도의 후손인 은행가의 딸과 결혼하여 현재의 위치에 오른 인물이다. 에디는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후손으로서 지역 노동조합장을 맞고 있는 동료 더넬린의 백맨(bagman)으로 일하며 암흑의 세계에서 돈다발을 나르던 사람이었다.

 

암흑가의 보스 덱스터가 살고 있는 맨해튼 비치 서쪽의 저택가는 부유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며, 맨해튼 비치 사유지였기에 적어도 30-40년대에는 타 지역의 일반 거주자들이 들어올 없던 곳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부유하고 성공한 이들이 전유하던 공간이었으며, 흑인들이 전무한 앵글로색슨 백인들의 문화가 지배하는 지역이다. 반면, 맨해튼 비치의 서쪽에 위치한 코니아일랜드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 해변으로, 모든 거주민들에게 공개되어 있는 공유지였다. 특히 에디의 , 애너가 아버지로부터 수영을 처음 배운 곳도 이곳 코니아일랜드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서민들에게는 고향과 다름없는, 추억이 깃들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맨해튼 비치가 보다 백인들의 문화로 한정되어 있는 양상이라면, 코니아일랜드는 이탈리아인, 아일랜드인, 폴란드인, 유대인, 푸에르토리코 등의 카리브해 흑인들이 모여 삶을 나누던 다인종 문화가 형성된 장소로서 대비된다. 아울러 맨해튼 비치는 덱스터가 총을 맞고 사망하게되는 곳이기도 반면, 코니아일랜드는 에디 케리건이 추에 묶여 바다에 던져지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맨해튼 비치와 코니아일랜드는 각각 덱스터와 에디의 운명에 변화를 맞는 공간이기도 하며, 애너와 덱스터를 이어주는(맨해튼 비치의 보트 창고에서 사람은 밀회를 갖는다) 공간이기도 하다. 정도 정리를 하게되면 맨해튼 비치 지역이 갖는 함의가 쉽게 다가올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적/시대적 문제의식 - 성차별과 인종차별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나 있어 진부한 지적일지 모르겠지만, 맨해튼 비치에는 30-40 대에 동시대인들이 공유하던 문화적 유전자가 소설 속에 발현되어 있다. 특히 1941 12 7,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은 연합국에 본격적으로 합류하여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남자의 이었던 전쟁에 남자들이 입대하여 전선으로 가고, 후방에는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싶어하던 많은 여성들이 남게된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전쟁 물자를 제작하고 공급하기 위한 노동에 직접 투입되는데, 애너 역시 해군이 사용할 전함을 제작하는 해군공창에서 부품만드는 일에 투입된다. 어느 애너가 바지선에서 다이버 이후, 그녀는 다이버가 되기를 갈망하게 된다. 하지만 꿈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90킬로그램이 넘는 다이빙수트를 입고 작업을 해야하는 힘든 일에 여자들은 애초에 배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다이버들의 환경에서는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피부색으로 제한된 차별이었다. ‘남자이긴 하지만 흑인이었던 말리 역시 노동자들 중에서도 백인보다 멸시받는 다른 차별적 위치에 있었다. 애너의 아버지 에디가 선원으로 배를 타고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서 목도한 풍경은 인종 차별에 대한 보다 선명한 이해를 더해준다.

 

흑인이 하대 받는 모습이라면 에디도 익숙했다 - 웨스트사이드 부두에서는 이탈리아 출신이 흑인 취급을 당했고 흑인은 그보다 멸시받았다.”(458)

 

이런 사회 환경에 둘러싸여 살아가게 되면, 이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현실이 찾아올 있다. 다이빙팀에서 처음 일하기 시작하면서 허드렛일을 주로 하게된 애너(젠더의 굴레) 말리(인종의 굴레) 경우, 백인(주로 남성 백인)들이 애초부터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두고 시작했기에 현실에 도전하겠다는 생각이 점점 약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우 결과에 대한 모든 원인을 자기 자신, 개인에게 전가하게되는 집단 심리 원형을 찾아볼 수도 있다.

 

어떻게 마음이 약해지자 불공정한 처사를 결코 묵과하지 않는 감각도 무뎌졌다.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쪽이 기만당하는 것보다 어쩐지 끔찍했다.”(437)

 

이처럼 차별적인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지내다보면,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 심리가 하나의 패턴이 되어 여기에 순응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차별적인 현실을 분명히 감각하면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흔히 겪을 있는 심경의 변화일 것이다.

 

저자 제니퍼 이건은 여러 인물들의 주요한 문제의식과 갈망들을 놓치지 않고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여기에 가지 추가하자면 백인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존재하는 계급적 의식또한 발견할 있다. 백인 다이버 동료 배스컴은 약혼자의 부모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다이버 경력을 가지고 해군에 들어가기를 열망한. 이처럼 전시 체제 하의 군용 선박을 제작하던 해군공창에서, 힘든 노동이 예견되어 있는 다이버들의 세계에서 여러 인물들은 각자 나름의 욕망을 지니고, 이를 얻기 위해 현실에 맞서고 있다. 소설의 말미에 애너의 고모 브리앤이 무명의 상선 선원들 또한 훈장과 같은 명예도 주어지지 않는 처지에서 온갖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이야말로 영웅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다분히 미국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해군공창의 노동자들 또한 일상의 영웅이라고 말할 있겠다.

 

물론 애너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순응하기만 하는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따르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이다. 사실 애너는 전장에 나가 자신도 다른 남자들처럼 전쟁을 직접 겪고 싶었으나, 근본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 대신 다이버 생활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전쟁을 느끼고싶어했다. 남성들의 세계에서 이들의 조롱과 무시(“사령관이 말했다. 물리력이 필요한 일이나 극한 조건을 견뎌내야 하는 일은 전부 금지야. 그런 분야의 여자들은 조력자라고 ”(208))에도 아랑곳없이 다이버 되고 싶은 꿈을 위해 힘든 과정을 참아내 성취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애너의 운명은 이미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암시되고 있다. “애너는 부스러기, 어디서건 뿌리내리고 어떤 것도 견디는 잡초였다. 리디아가 고갈시키는 생명력을 애너가 온전히 채워주었다.”(39)  동생 리디아가 선천적인 장애로 몸의 굴레 속에서 평생 갖혀지냈다면, 애너는 자신에게 부여된 여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는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다. 아울러 애너는 남성의 가치관을 내면화해버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을 외면하는 친구 (“여자는 절대 일해선 안된다는 이이 신조거든. 여자란 남자를 어떻게 홀릴지나 궁리해야 한대.”(345)) 분명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자신만의 길을 간다. 그리고 상당수의 여성들이 가는 길을 벗어나는 일은 대가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녀의 삶은 전쟁의 삶이었다. 전쟁이 그녀의 삶이었다”(620)라고 평가되어 있듯이 여성들이 치러내야 했던 다양한 맥락의 전쟁을 소설에서 읽어낼 있었다. 물론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분투하는 이들이지만, ‘혁명 기도하는 영웅의 타입은 아니다. 이들은 평범하고 작은 영위하는 우리들의 분신에 가깝다.

 

 

, 바다가 지닌 상징성 - 삶의 양태들을 구분하는 경계로서의 공간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스콧 F.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도 역시 등장한다. 그러나 물이 상징하는 양상은 맨해튼 비치와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개츠비에게 장애물에 가까운 대상으로서, 오히려 이를 헤쳐가야하는 존재로 있을 같다. 물론 덱스터 스타일스처럼 개츠비는 풀장에서 수영하다가 주변에서 맞아 죽긴 하지만, 맨해튼 비치에서 물-바다가 지니는 상징성은 보다 강렬하고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바다는 죽음-(재생) 사이를 매개하거나 사이를 순환하는 통로 내지는 공간으로서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선 맨해튼 비치에서 바다는 소설의 주인공들이 은유적인 의미든, 문자 그대로의 의미든 간에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하고 . 애너에게 바다는 지상의 세계(차별적 현실)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바라던 (다이빙을 통해 전쟁을 보다 경험하는 ) 다가가는 길이 되는 공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던 것과 구별되는 (차별에 저항한 여성 다이버) 가까이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장소가 바로 바다였던 것이다. 한편 애너의 아버지 에디에게도 바다는 삶과 죽음의 기로가 되고 다른 삶에 이르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에디는 보호소 동기이자 성인이 되어 검사로 일하는 바트 시핸에게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전달했고, 조직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그는 덱스터의 부하들에 의해 의식을 잃고 무거운 추에 묶여 바다로 던져지는 것이다. 바다에 가라앉으면서도 에디는 난국탈출 스턴트맨이자 마술사였던 전설의 해리 후디니처럼, 몸부림을 통해 자신의 몸을 묶었던 사슬을 빠져나와 물위로 떠오른다. 지상의 세계로 올라오면서 그는 이전의 에디가 아니라 이제는 존재하지 않게된 사람으로서, 새롭게 태어난다. 에디는 마침 뉴욕에 도착해 있는 브라질 화물선의 화부(가장 밑바닥 임무를 맡은 이들) 되어 뉴욕을 떠나 선원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에디는 바다 속의 심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화하고 그림자의 세계/불법의 세계/도덕적 타락의 세계를 벗어던지게 되었으며, 스태튼아일랜드의 어부에게 구출되어 준법의 세계/양지의 세계로 새롭게 태어남을 가능하게 했던 통로는 바로 바다였던 것이다.   

 

에디가 상선(엘리자베스 시먼호) 3 항해사로 배에 올라 파나마운하로 향하던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고 조난당했을 ,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허우적대던 공간 역시 바다였다. 시기에 애너는 다이빙을 하며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굳건히 지켜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는 에디와 애너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로서의 역할도 겸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에서 주인공 이슈메일이 바다로 나가려는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 내지는 운명을 언급하는 대목이  1장에 나온다.

 

하지만 보라!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뛰어들기라도 것처럼 곧장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 이상하기도 하지! 육지 가장 끝자락에 서는 말고는 무엇도 그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다니.

-모비 1, 황유원 옮김, [문학동네]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덱스터의 장인인 노인장 기회가 때마다 물가로 나오려고 하는 자신을 보고 바로 모비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이 -바다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모비  맨해튼 비치역시 서로 상당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시 육지로  - 소설의 정서

 

소설모비 영미문학의 3 비극 하나라고 여겨지곤 하지만, 작품 전반에서 묻어나는 정서는 맨해튼 비치와는 분명 다르다. 책을 덮고 나서 내게 느껴진 정서는 오히려 제니퍼 이건의 소설이 슬픔 혹은 비애감'이란 정서에 가깝게 느껴진다. 설명하긴 쉽지 않지만, 모비 에선 에이해브 선장 자신이 추구하는 개인적 복수에 대해 동조한 등장 인물들에 대해 운명이 내린 벌과 같은 인상으로 다가온다면, 맨해튼 비치에서는 운명적인 한계를 분명히 자각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보편적인 체념이 느껴져서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이것은 작가가 의도했다기 보다는 피할길 없는 인간이란 존재로서 보편적인 삶의 한계를받아들여야만 하는 미약한 존재들의 삶이 느껴져서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필멸의 존재로서 언제나 삶-죽음의 경계를 위태롭게 걸어가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그림자의 세계 벗어나고자 하는 에디가 덱스터의 집을 다녀온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어린 딸을 바라보며 앞으로 번이나 아이를 안아올릴 있을까?라고 되뇌일 느껴지는 그런 슬픔 정서에 가깝다고 있다.

 

혹은 맨해튼 비치에서 소설을 관통하는 슬픔 정서의 정체는 빈곤이란 무형의 실체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뒤흔들 있으며, 파괴할 있는지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끊임없이 다가오고 오버랩되어 겹겹이 쌓이는 슬픔들, 혹은 불확실한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체화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을 지닌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보편적인 정서가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인간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피할 없이 끊임없이 줄타기를 계속 해야만 하는 존재들일 것이다. 작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에디와 애너와 같은 이들에게는 그나마 맨해튼 비치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다른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애너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에디의 껌딱지 처럼 따라다니기를 좋아하는 모습을 확인할 있다. “어디를 가건 , 의식하지 않을 때조차 애너는 아버지의 손아귀에 자기 손을 밀어 넣었다.”(282) 그렇다. ‘코니아일랜드 이용해야했던 사람들 사이에는 무엇보다 이런 인간에 대한 신뢰감 혹은 유대감이 남아있었다. 이건 맨해튼 비치 사람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소설의 마지막이 되는 배경은 대륙의 반대편, 캘리포니아에 있는 조선소 주변의 해변이다. ‘안개가 기억상실증처럼 도시를 집어삼키며에디와 애너 부녀에게 다가 오고 있을 , 무의식적으로 애너는 에디의 손을 잡으며 이리로 오네요라고 말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부녀 사람에게 안개처럼 다가오는 새로운 운명 앞에서 새로운 유대감이 형성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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