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Moby-Dick or, The Whale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7] 예배당(The Chapel)

 

[7장의 기본 줄거리]

뉴베드퍼드의 일요일 아침, 아침 식사를 하고 산책을 다녀온 이슈메일은 낸터킷으로 떠나기 전날 마지막 일요일인 당일에 예배당에 들른다. 예배당에 앉아 쪽에 미리 있던 퀴퀘그를 발견하고, 예배가 시작하기 전의 분위기와 예배당을 둘러보며 죽음과 실체에 대한 생각을 하는 , 이것 저것 생각에 잠긴다.

 

 

낸터킷으로 가는 배를 타기 전날, 이슈메일은 일요일 아침에 아침 식사를 하고 산책을 나갔다 여인숙에 돌아온다. 이슈메일은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고래잡이 예배당 들른다. 진눈깨비가 섞인 강한 바람을 뚫고 들어간 예배당에서 이슈메일은 곧바로 죽음 분위기를 감지한다. 예배당에 사람들의 표정에서 말못할 이들의 슬픔의 징후를 읽어내며, 예배당 내부에 있는 대리석 추모비를 살펴보며 유족들의 슬픔을 상상해본다. 예배당 내에 있는 추모비에 적힌 이름들의 주인공은 모두 포경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대리석의 주인들은 모두 실종상태 였던 . 이들의 시신이나 뼈도 추스리지 못한 유족들이 예배당에나마 추모비를 세웠다.

 

검은 테를 두른 대리석 밑에는 줌의 재도 들어 있지 않으니, 공허는 얼마나 쓰린가!”(70)   

 

이슈메일은 예배당에 사람들의 표정과 추모비를 통해 이들의 심경을 상상하고 공감하고 있다.

 

 

모든 것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이슈메일은 인간의 행동에서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은 면들, 부조리해 보이는 면들, 무언가 어긋나 있는 행동의 양식들, 인간들의 아이러니를 지적하며 모든 것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슈메일이 열거한 것들 가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생명보험회사는 무엇 때문에 불멸의 인간에게 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인가. 6천년 전에 죽은 옛날의 아담은 아직도 꼼짝하지 못하고 영원히 마비된 얼마나 치명적이고 절망적인 혼수상태 속에 누워 있는가. (…) 모든 것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나는 문장 생명보험회사는 무엇 때문에 불멸의 인간에게 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인가 대한 물음을 통해, 생명보험과 노예선에 대해 언급한 서경식 교수의 나의 영국 인문 기행 떠올렸다. 책에는 영국의 화가 *터너 (J.M.W. Turner, 1775-1851) 유명한 그림 <, 증기, 속도>외에 <노예선-다가오는 태풍> 나오며(터너는 노예폐지론자 였다고 한다) 이어서, 1781 발생한 (Zong) 학살사건 대한 설명이 나온다


당시의 영국에는 노예무역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나,밀무역은 계속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와중에 1781 영국 노예선 (Zong)호에 아프리카 노예들을 싣고 가는 도중에 종호의 선원들이 살아있는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 132명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소유주가 밝힌 학살의 주된 이유는 식수부족이었다고 했다. 식수가 부족한데 노동력이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 넣었을까? 이유는 바로 노예가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주는 노예 전체를 부족한 때문에 죽게하는 것보다 건강이 나쁜 노예들을 바다에 처분하고, ‘손실 대한 보험금지급을 위해 재판을 청구했던 것이다. 여러 번의 재판을 거쳐 나온 판결은 노예는 가축과 마찬가지로 소유물이므로, 보험회사는 보상금을 지불할 의무가 있다 것이었다. 이후 1780 후반을 기해 노예폐지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고 하는데, 멜빌 역시 노예폐지를 지지하는 입장을 모비 에서도 여러 군데 (간접적으로) 확인할 있다. 작중의 이슈메일이 지적하고 있듯이,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처럼 인간의 아이러니와 모순을 쉽게 떠올려 있겠다. 노예와 보험의 역사는 노예가 일종의 생산자본 일종으로서 노예의 비인간화 과정을 통해, 수량화될 있는 교환 가치로서 사용된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멜빌이 종호 학살사건 염두에 두고 이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사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슈메일의 지적하듯 문장도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다.

 

*터너: 그러고보니 터너가 사망한 해(1851)는 허먼 멜빌이 모비 출간한 해이기도 하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그러나

 

이어서 예배당에 앉아 생각에 잠긴 이슈메일은 죽음/ 실체 관해 생각을 더해 나간다.

 

그래, 고래잡이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야. 아차! 하는 순간에 인간을 영원의 세계로 처넣고 마니까.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우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잘못 생각해온 같아. 여기 지구상에서 소위 그림자라고 불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진정한 실체 인지도 몰라. 우리가 영적인 것을 바라봄에 있어서 그것은 마치 굴조개가 바다 밑에서 태양을 바라보면서 흐린 가장 맑은 공기 생각하는 것과 같을지도 몰라. 몸뚱이는 나은 존재의 찌꺼기일 분인지도 몰라.

 

우울한 분위기의 예배당에서 자신도 고래잡이배를 타러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모험임을 다시금 상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다시 쾌활함을 되찾고, 이를 배를 타라는 운명의 권유 받아들이고 있다. 이슈메일은 이렇게 고래잡이배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예배당의 침울한 분위기에도 아랑곳 없이 배를 반드시 타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시 다지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굴조개의 비유 멜빌이 선원으로서의 경험에 기반한 인간의 어리석은 미망(迷妄)’ 대한 탁월한 비유라고 이해된다. 존재의 찌꺼기(흔적) 신체는 불완전한 존재로서 인간의 정신보다 하위에 위치한 대상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인간 자신의 죽음 대한 운명은 아무도 모르는 존재이기에 이슈메일은 ‘(고래잡이가 죽음의 위험이 있다 한들) 아무렴 어떤가?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라는  태도를 갖게 된다.  

 


여기서 원문(영어)’ 관련하여 가지 발견한 사항들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 원문을 보면 흥미로운 표현이 나온다.

 

여기 지구상에서 소위 그림자라고 불리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진정한 실체 인지도 몰라.

Methinks that what they call my shadow here on earth is my true substance.

 

우리가 영적인 것을 바라봄에 있어서 그것은 마치 굴조개가 바다 밑에서 태양을 바라보면서 흐린 가장 맑은 공기 생각하는 것과 같을지도 몰라.

Methinks that in looking at things spiritual, we are too much like oysters observing the sun through the water, and thinking that thick water the thinnest of air.

 

몸뚱이는 나은 존재의 찌꺼기일 분인지도 몰라.

Methinks my body is but the lees of my better being.

 

 

멜빌이 모비 집필하던 시기는 1850 여름부터이다. 당시에 사용되던 영어 중에서 Methinks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단어는 물론 ‘me + think’('나는 ~ 생각한다/ 생각에는~'과 같은 정도가 될 것 같다) 해당하는 단어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단어가 멜빌이  모비 집필하기 전에 탐독했던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아 의도적으로 구성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실제로 멜빌이 셰익스피어를 알게된 것은 그에게 정말 변화를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멜빌은 단어와 용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나는 문장들이 셰익스피어에 대한 일종의 숨은 오마주가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좀더 신빙성과 이해를 더하자면, 작가정신에서 나온 모비 김석희 번역가가 옮긴이의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작품을 집필할 무렵 멜빌의 독서량은 놀랄 만큼 늘어났고, 앞에서 말한 고전 작가들 이외에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와의 결정적인 만남이 있었다. 만남이 없었다면 모비 지금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와 비교할 만한 동시대 작가라고 멜빌 자신이 평가한 내서니얼 호손과의 만남이 있다.

 

 

추가로 이에 대한 근거는 단어에 대해 찾아보다가 발견한 가지 사항에 대해서도 보완된다.

 

하나는 1591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III.i) 다음의 문장이 보이기 때문이다.

methinks the truth should live from age to age,”

 

다른 하나는 1599 역시,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32)에도 다음의 표현이 나온다고 한다.

“The lady doth protest too much, methinks.

 


다시 정리하면, 완전한 문장의 앞에 흔히 쓰이거나, 종종 완전한 문장의 마지막에 덧붙이는 형태로 셰익스피어가 기록이 보인다. 옮긴이의 지적대로 멜빌은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탐독했을 것이고, 17-18세기 당시의 문어체를 사용하였기에, 영어 전공을 하지 않은 독자로서는 사실 읽기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일부 문장을 접해보고 받은 인상은 멜빌이 모비 에서 써나갔던 문장들이 상당히 리듬감이 있고, 시를 읽는 듯한 느낌 혹은 래퍼가 가사를 읊는 느낌마저 들 때가 종종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지엽적인 번역문제이긴 하나 나라면 어떻게 것인가를 생각해보다가 노트하게 되었다.

번째 영문에서 thick water thinnest of air 대한 우리말 표현에 대한 생각이다. 물론 나는 번역의 오역이나 틀린 점을 수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판단하기에 다른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를 고민해보았다.

 

우선 굴조개의 비유표현에서, 작가정신 버전의 김석희 번역가는 ‘thick water’ 흐린 , ‘thinnest of air’ 맑은 공기 표현한 반면, 문학동네 버전의 황유원 번역가는 ‘thick water’ 뿌연 , ‘thinnest of air’ 맑은 대기 표현했다.

 

일단 표현들이 서로 대응하는 구조임을 생각해볼 , 나라면 ‘water air’ 각각 물과 공기’(자연의 기본 요소로서의 대상) 내지는 바다와 대기’(지구 구조의 부분으로서의 존재) 쌍이 되도록 맞추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thin air라는 표현을 생각할 ,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대기가 희박해지는상황을 떠올려보면, ‘밀도라는 구심점으로 상반되는 표현을 찾을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thick water’ 짙은 바다,  ‘thinnest of air’ 희박한 대기 말이다. 이렇게 표현해 놓고 보니, 사실 번역가들의 표현이 무난해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분명히 번역가들은 이런 표현 하나에도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보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간단한 표현 하나를 붙잡고 생각만 해보아도, 앞으론 내가 직접 검토해보기 전에는 번역가들의 작업에 무턱대로 번역이 좋지 않다고 말하지는 못할 같다. 특히나 현대 영어가 아닌 표현들이 많이 보이는 모비 과 같은 작품들의 경우에 더욱 그렇다.

 

 

참고문헌

[1]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2] 《일러스트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 록웰 켄트 그림 |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3] 나의 영국 인문 기행 - 서경식 지음 | 최재혁 옮김 | [반비]

[4] Moby-Dick or, The Whale Herman melville지음 | [Penguin Classics]

[5]  Methinks 대한 출처: https://en.m.wiktionary.org/wiki/methinks#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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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9-06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년 전인가 <모비 딕>을 한 번
읽어 보겠노라고 중고 서점에서
책을 사다가 시작해서 딱 요기
까지 읽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읽기 시작해야 하나요 ^^

초란공 2019-09-06 14:12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 <모비 딕>을 ‘작가정신‘의 아셰트클래식으로 만난 것이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워낙 포경선과 고래에 관한 설명이 많이 나오는데, 아셰트 클래식 버전은 상당부분에 대해 그림과 설명이 있어서 분량은 더 많지만 이해가 잘되고, 재미있게 읽었어요. 강추입니다. 몇 개월 걸려서 겨우 한 번 읽긴 했지만,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번에 문학동네서 나온 ‘록웰 켄트‘ <일러스트 모비 딕>은 그림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일러스트 그림 자체가 상당한 매력이 있네요. 주석도 좀 더 풍부하고 만듬새가 좋네요.
 

서밍업

(원제: The Summing Up )

서머싯 지음 | 이종인 옮김 |  [위즈덤하우스]

 

지난 번에 《달과6펜스》 대한 인상을 기록하면서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가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의 모습에 근접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60 중반에 이른 자신을 삶을 되돌아보며 남겼던 회고록 《서밍업》에서 서머싯 몸은 바로 자유인과 죽음에 관한 단상을 스피노자를 언급하며 시작하는 대목이 나온다. 다시 보니 서머싯 몸은 칸트도 읽은 모양이고, 과학자의 저서들도 읽고 생각을 남겨두기도 하는 , 폭넓은 독서를 했음을 있었다. 특히 죽음 대한 강박이 있었던 같다. 8 당시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2 아버지는 폐암으로 사망한다. 당시 파리의 공기가 어떠했는지 모르겠으나 모두 폐에 생긴 병으로 잃고, 자신도 폐결핵으로 청년 시절 고생하는 기록이 보인다. 어쨌든 어린 아이로서 부모의 젊은 시절을 기억할 있을만한 나이에 부모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어린 서머싯 몸에게 죽음 불가해하면서도 너무나 강력했던 기억으로 남게 되었을 같다. 아이러니하게 91살에 세상을 뜨긴 했어도, 그는 평생 죽음의 강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짐작해보자면, 서머싯 몸이 스피노자의 저작 중에서 인상깊게 영향을 받았을 부분은 《에티카》 4 후반에 나오는 자유인과 노예 관한 언급이 아니었을까. 스피노자의 자유인은 합리적인 이성 명령에 따르는 사람이다. 몸은 《서밍업》에서 스피노자는 자유인은 죽음에 대하여 필요한 만큼만 생각한다고 말한다라고 시작하는 글을 썼다. ‘ 필요한 만큼이란 말은 상당히 모호하긴 하지만, 죽음에 대한 강한 집착과 강박 혹은 죽음이란 진실에 대한 외면, 회피 또한 어리석은 일이라고 지적한다. 《달과6펜스》 에서 화자가 스트릭랜드와 대화하는 도중에 이렇게 묻는 대목이 나온다.

 

화자: “죽음에 대해 생각해 적이 있나요?

스트릭랜드: “내가 ? 그게 중요하단 말인가?

 

40 중반의 작가 서머싯 몸이 《달과6펜스》 집필하고 출간(그러고보니 올해가 소설이 나온 100주년되는 해이다)하는 과정에서도 죽음 문제를 떨칠 없었던 모양이다. 등장 인물끼리 죽음 대해 이야기를 붙이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고민이 60대의 서머싯 몸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있다. 어쩌면 몸은 인간이란 존재가 피할 없는 필멸 문제에서 자신은 어떻게 이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것인가를 응당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작가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으로서 우리도 죽음이란 문제에 대한 생각들은 하나의 운명이 되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스트릭랜드는 내일이란 없는 사람이라고 있다. 내일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집착보다 당장 오늘 그림을 그림으로써 생의 의미를 구하는 인물이 아닐까. 화자가 갑자기 가정을 버리고 사라져버린 스트릭랜드를 찾아와 설득하려고 시도하는 대화에서 스트릭랜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스트릭랜드: “ 과거를 생각지 않소. 중요한 것은 영원한 현재뿐이지.” 

(…)

화자: “지금은 행복하십니까?내가 물었다.

스트릭랜드: “그렇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스트릭랜드를 자유인에 가깝다고 판단한 이유는 그가 현실의 굴레로서 축이 되고 있는 가정, 다시 말해 처와 아이들을 버리고 떠나버린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트릭랜드를 자유인에 가까운 인물로 생각했던 이유가 현실을 벗어버리고 떠났기 때문으로 오인할 여지가 있겠단 생각이 드는데, 이런 행동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자유인은 인식의 상태를 전제로 하는지도 모른다. 스트릭랜드는 인습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보기에 극도로 무례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예의를 차려야하고, 친절함을 가장하며, 사회가 기대하는 구성원의 어느 역할 따라 살아갈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무례라는 개념과 이기적이라는 개념은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 스트릭랜드는 이러한 관습의 영역을 초월한 사람이며, 그럼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물론 스피노자가 이야기했던 국가 대변되는 공동체 내에서 자유로울 있는 조건과 부합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 자신에 대한 구원의 문제 뿐만 아니라 그의 윤리학이 기대하는 타인과의 관계 대한 조건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스트릭랜드는 고독 속에서 문둥병에 걸려 죽어간다. 사람들은 이런 그의 운명을 동정하겠지만, 본인은 그렇게 인식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기력이 있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며 그저 지속해나가는 것일 뿐이었다. 분명히 서머싯 몸은 과정과 마무리의 중요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듯하다.

 

《서밍업》에서는 인간 개개인의 실존적인 행위를 패턴으로 표현하는 같다. “ 패턴의 용도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런 없다고 대답하겠다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이든) ‘패턴의 요점은 완성되어야 한다는 이라고 말한다. 스트릭랜드는 완전하진 못했지만,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삶이 갖는 실존적 의미로서의 패턴 완성해나가는 , 그리고 이건 개인의 구원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 생각 거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스트릭랜드는 스스로를 구원했던 인물로서 봐야한다는 것이 현재 결론이다.  

 

 

 

참고

다른 책에서 발췌하여 인용한 문장에 대한 쪽수를 적어두지 않은 이유로 나는 김경욱 작가의 소설 위험한 독서에서 저자가 각주로 밝힌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문장을 보고 따라해보았다. 그는 인용에 대한 출처를 일부러밝히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의도적인 불친절이 못마땅하거든 앞으로의 각주를 무시하면 일이다. 목마른 우물을 것이니. 만에 하나 정확한 출처가 궁금하다면 해당 책을 찾아 문장부터 읽어볼 일이다. 인용된 문장을 발견할 때까지, 정말로 그런 문장이 있기나 것인지 확인할 때까지. 무슨무슨 영화의, 이러저러한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던 특정한 벤치나 삼나무 길을,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섬이나 계속을 실제로 찾아나서는 수고에 비하면 짚고 헤엄치는 격일테니, 부디 당신의 독서가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를.

 

자유인 관해 생각해본 글에서 독서의 자유 선언하는 문장을 지나칠 없었다. 글의 인용을 확인하기위해 스스로 책장을 넘기며 확인하는 자유를 회복하는 일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도서관에서 서가와 선반 사이를 오가며, 마음에 드는 책이라면 뭐든 골랐고, 그렇게  나를 만들어갔다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해주었던 올리버 색스 할아버지의 지혜처럼, 어쩌면 무모하게 보이는 아날로그적인 행위를 통한 독서는 내게 다른 자유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을 통해 새로운 인식의 세계로 나아갔던 올리버의 자유 독서또한 다시 생각하니 상당히 인상적이다. 지금은 전산화되어 검색을 통해 바로 책을 찾아 보면 되지만, 분야만 정해져 있지 정리가 되어있지 않던 헌책방에 대한 기억이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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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한승동 옮김 / 돌베개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희생의 시스템 - 후쿠시마/오키나와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 한승동 옮김 | [돌베개]



일본의 오키나와는 지금까지 앞에 번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내가 처음 오키나와라는 이름을 들었던 것은 군복무 시절이었다. 이따금씩 국내에 도착하는 미공군 수송기가 출발한 곳이 바로 오키나와 였던 것이다. 당시 내게 오키나와라는 섬은 머나먼 태평양의 어딘가에 있을 환상의 섬이었을 뿐이었다. 번째 오키나와를 만나게 것은 나의 신혼여행지가 오키나와 였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을 공항의 쪽에 정렬되어 있던 군용기들을 보며 군복무 시절을 떠올렸다. 오키나와 섬을 돌아보며 미해군 기지와 과거 미해병대의 상륙작전(이제 보니 오키나와 전쟁 당시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관한 안내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번째로 만난 오키나와는 류큐(琉球) 왕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열하일기(김혈조 옮김, 돌베개)에 나오는 류큐 왕국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조공국으로 등장한다. 한편 명나라 시절(1621-1627) 왜구가 류큐를 공격하여 왕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데려갔다. 류큐의 태자는 왕인 아버지를 데려오기 위해 보물을 싣고 떠났다가 표류하여 제주에 도착한 기록이열하일기 등장하기에 과거의 오키나와를 만났던 적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를 통해 다시 현재의 오키나와와 만나게 되었다. 신혼여행 보았던 조용하고 평화로운 오키나와의 역사 속에는 수많은 현대사회의 모순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문제는 무관하게 보이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만나게된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이하《희생의 시스템) 사실 최근에 출간된 서경식 교수와 데쓰야 교수의 대담집 책임에 대하여 읽는 도중에 알게된 도서였다개인적으로는 책임에 대하여 대담집이고 관련지식에 부족함을 느껴, 후쿠시마와 오키나와와 관련한 주제들의 배경 이해를 위해 희생의 시스템 먼저 읽게 되었다. 책은 저자 데쓰야 교수가 2011 3 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한지 8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마무리가 글이다. 그는 기간 동안 후쿠시마 현의 피해지역 여러 곳을 수차례 방문하고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집필을 했다 특히 데쓰야 교수는 바로 원전사고가 후쿠시마 현에서 태어나고 유소년기를 보냈기에 사고 현장을 둘러보고 글을 쓰는 과정이 보다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책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희생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일본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한다. 겉으로는 자연재해의 피해로만 보일 있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모습과 평화로워 보이는 오키나와와 연관된 문제가 희생 관점에서 서로 통하는 이야기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희생의 시스템이란

 

우선 희생이란 관점에서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말하는 희생의 시스템개념에는 일반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희생의 시스템에서는 어떤 () 이익이 다른자() 생활(생명, 건강, 일상, 재산, 존엄, 희망 ) 희생시킴으로써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희생시키는 자의 이익은 희생당하는 자의 희생 없이는 생기지 않고, 유지되지도 않는다. 희생은 통상 감춰져 있거나 공동체(국가, 국민, 사회, 기업 ) 소중한 희생으로 미화되고 정당화된다.” (161) 원전이 '희생의 시스템'인 이유는 희생당하는 대상(원전 주변 거주민들의 생활과 건강, 주변의 자연 ) 볼모로 희생시키는 주체(원자력 마피아-정치가, 관료, 학자, 전문가, 원전 유치 지역 유치에 관여한 관료들) 이익을 취하는 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의 경우는 어떤가. 1879 류큐 처분이라는 이름 하에 오키나와는 일본 최초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의 전통과 오키나와 언어의 사용을 금지당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받았다. 태평양 전쟁 이후에는 일본의 쇼와 천황이 천황제 유지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미군에 의한 오키나와 기타 류큐 제도에 대한 군사점령을 승인했던 것이다. 오키나와 거주민들의 의견에는 아랑곳없이 본토 일본인(야마토 일본인) 미국의 상호 합의 하에 미군은 오키나와에 지속적으로 주둔하며 기지를 건설하였다. 오키나와인들의 희생을 통해 본토 일본일들과 일본정부, 미국은 분명한 이득을 취하고 있기에  희생의 구도 찾아낼 있다. 전일본 인구의 1% 해당하고, 면적으로 보면 전체 일본 면적의 0.6% 불과한 오키나와에 현재 일본에 건설된 미군 전용시설(기지) 74%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본토와 오키나와 사이의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후쿠시마와 마찬가지로 오키나와 문제 역시 희생의 시스템 속한다.   

 

 

희생의 시스템에 잠복하는 희생의 논리와 식민주의

 

데쓰야 교수의 희생의 시스템개념에서 희생당하는 대상 존재는 필수요소이다. 희생의 모습이 통상 감춰지거나 그렇지 못하는 경우 소중한 희생으로 전화되는 독특한 논리 구조를 보여준다. 전형적인 논리 구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있겠다. 희생자들은 대다수 국민의 (예컨대 도덕적 타락) 속죄하기 위해 죽었으며, 이들의 희생(‘소중한 희생’) 있었기에, 대다수 국민의 죄가 속죄되고 도덕이 회복된다는 서사 구조를 갖는다. 마치 기독교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죄많은 백성을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고 죽어간 구도와 았다. 일본의 근대 기독교인이자 무교회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의 천유론은 논리상 이런 희생 서사구조를 따르기에 여타의 천벌론과 다를바가 없다.

 

후쿠시마의 현의 사례를 희생의 논리 구조 대입해보면,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희생은 천벌 혹은 천유의 결과였으며, 희생을 통해 도덕적 결손의 대가를 지불한 셈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속죄를 위한 기회를 얻고, 도덕적 균형의 회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논리가 된다. 자연의 대재앙과 원전 사고와 같은 인재를 통한 희생자들의 죽음에 도덕적 의미 가세되어 생존자들의 이상을 이해 이용되는 구조라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일본 일부 사회 지도층에 의해 하나의 신념처럼 공유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과연 희생자의 대상이 누가 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저자는 문제에 대해 살아남은 이들이 죽은 이들을 일방적으로, 죄가 있어서 처벌받은 존재로 간주하고 그렇게 이야기할 있는 것인가, 이것이 근본적인 문제일 것이다”(119) 라고 반문한다.    

 

데쓰야 교수는 1923 발생한 간토 대지진 당시 6,000명에 이르는 조선인 희생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우치무라 간조는 간토 대지진을 천벌로 간주하고, 대지진을 통해 일본의 천지는 일소됐다. 속죄를 통해 국민의 양심이 회복되었다라고 주장한다. 조선의 기독교 동향에 관심을 갖고, 조선 기독교인들과 교류도 하던 그가 간토 대지진 당시 벌어진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해 고려한 흔적은 없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희생의 논리에는 희생당한 대상(사람들과 자연, 전통과 문화 ) 대해 감정이 거세된 같은 무감각함을 찾아낼 있다. 심지에 이런 희생의 논리에서는 일본에 가해진 원폭 투하를 심지어 위대한 번제 표현되고 있기도 하며, 소중한 생명 죽음으로 세계의 평화를 회복할 있었다는 논리에까지 나아갈 있음을 저자는 분석해낸다. 희생의 논리 단순히 천벌, 천혜의 문제가 아니라 가해자들의 희생에 대한 감각을 둔화시키거나, 감수성을 아예 무력화시킬 여지가 있기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전후 독일의 작가 W.G. 제발트가 출간한 강연집 공중전과 문학 떠올려 본다. 책에서는 영국과 미국 등의 연합군에 의해 1940년대 전반, 독일 전국의 도시가 철저히 파괴되고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60 명으로 추산,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 10 여명의 6배에 달함) 발생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제발트는 홀로코스트로 600 이상의 유대인과 반대자들을 처형한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자각과 패전국의 수치심 등으로 독일 내에서 연합군에 의해 발생한 희생을 철저히 외면하는 독일인들의 집단 심리를 추적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괴의 결과로 발생한 거대한 폐허에 대한 관심을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새역사 건설 대한 동기로 대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독일인들의 경우, 자국 희생자들에 대해 시종일관 침묵과 외면, 망각을 통한 심리에 갖히고 가려져 있음을 보여주었다. 반면 일본의 경우는 좀더 적극성 갖는다고 있을까. ‘존귀한 희생 도덕성 회복을 위한 대가로서, 자기도취적 매개 구조를 통해 신일본 건설 나아가고 있음도 찾아볼 있다. 더불어 희생자들에 대한 진정한 애도의 결여는 독일의 경우와 유사함을 있다. 데쓰야 교수는 이와 관련하여 '일본 나르시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일본인들과 아베 정권의 관심사인 도쿄 올림픽 준비와 관련하여 언론에 등장하는 슬로건에서 이 점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희생의 시스템에는 보다 근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주의적 사고가 바탕이 되어 있음을 있다.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로 불거진 전후 일본의 희생 양상에는 식민주의구도가 이미 역사적으로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있다. 앞서 언급한 류큐 처분조치를 통해 일본의 최초 식민지가 오키나와는 본인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받았다. 여기에 천황중심으로하는 식민지 교육을 강행했다는 점도 야마토 일본인들의 식민지화·동화 정책을 통해 확인할 있다.   1947년에 일본국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한 '오키나와에 대한 천황의 메시지'는 어떤가. ‘러시아의 위협, 러시아의 내정 간섭에 대한 우려로 미국이 오키나와 기타 류큐 제도에 대한 군사점령을 승인한다 메시지는 전후 미일 안보체제가 오키나와를 희생양으로 삼은 희생의 시스템임을 다시금 반증한다. 따라서 오키나와는 미국와 일본, 양국의 공동 합의하에 존재하는 식민지에 다름 아니다. 희생의 시스템 희생의 논리 최근 한일 갈등의 발단이 일제 징용문제에 적용해보아도 여전히 희생의 시스템 갖고 있는 근본적인 식민주의적 성격을 여실히 찾아낼 있다.       

 

비슷한 논리로 저자는 후쿠시마 문제에서도 무의식적인 식민주의 찾아내고 있다. 도호쿠전력의 관할지에 도교 전력이 관할하는 원전 2기를 포함하여 10기의 원전이 있다는 , 그리고 원전에 대한 리스크를 후쿠시마 현민들이 짊어지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이익은 간토 지방, 도쿄 전력 관할지에서 향유하고 있는 구조를 찾아낼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이것은 수도권(중앙) 비롯한 도시부와 지방 사이에 일종의 식민지 지배 관계가 성립돼 있다는 보여주는게 아닐까?(171) 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원전 시스템의 리스크는 지방에 넘기며 도시부 주민들이 이익을 향유하는 구조 통해 차별적인 식민지적 구조가 있음을 있다는 말이다.  

 

 

나가며 - 희생없는 사회는 가능할까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는 희생의 시스템 통해, 별개의 사건으로 보이는 후쿠시마 원전 문제와 오키나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통해 공통된 식민주의적 성격을 읽어내고 있다. 비판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저자의 온전한 시각을 통해 현재 심해지고 있는 한일 갈등의 국면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에 대해 보다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일본인들의 집단적인 심리에는 어떤 논리가 흐르고,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의 시각으로 분석한 일본의 식민주의적 구조를 읽어내는 일은 무엇보다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저자는 희생의 시스템 통해 일본 지배층의 행동 양식과 사고를 소개해주고, 무엇보다 희생의 시스템 자체를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 점을 강조한다. 원칙적으로 공감하게 되나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희생없는 사회가 가능할까라는 물음에 어쩔수 없지 않나라는 태도만큼 무책임하고 위험한 반응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가 어쩔 없는 일이었다 발언한 규마 후미오 방위대신의 발언처럼, 또 다른 규마 후미오를 만들어내는 단초가 뿐이다. 이러한 정치인들과 관료가 우리의 지도자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그리고 대다수 일본인처럼 무의식적인 식민지주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희생의 시스템 역량을 줄여나가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는 군사기지나 원전의 리스크를 한없이 제로에 가깝게 수렴시켜 가는 그런 정치적 선택은 충분히 가능하며, 그것을 지향해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189)라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희생의 시스템에는 무엇보다 그리고 언제나 주변화된 희생자들이 존재함을 깨닫는다. 후쿠시마 현민들이 그렇고, 복구 작업이나 잘못된 피복선량기준으로 지금도 상당한 양의 방사선에 피복되는 주민들의 2 피해자들이 있다. 오키나와에서는 오키나와 주민 위에 군림하는 미군 관계자들과 주민들의 부당한 피해에 침묵하는 일본 정부로부터 외면당한 희생자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후쿠시마와 오키나와를 비롯하여 희생의 시스템에는 이처럼 문제와 관련된 정보의 은폐와 대화 소통의 부재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도 주목해봐야 같다. 희생의 시스템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어도,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논의에 배제되고 주변화되었던 이들을 초대하는 일을 출발점으로 삼을 있을 같다. 언젠가 다시 오키나와에 기회가 있다면, 오키나와의 지형과 자연, 오키나와 사람들의 모습이 분명 다르게 보일 것이다.




덴마크 육군 대장 프리츠 홀름의 ‘전쟁절멸 보장 법안‘
"전쟁이 시작되면 10시간 안에 다음과 같은 순서로 최전선에 일개 병사로서 파병된다. 첫째, 국가원수. 둘째, 그 남성 친족. 셋째, 총리대신(총리), 국무대신(각료, 국무위원), 각 부의 차관. 넷째, 국회의원. 다만 전쟁에 반대한 의원은 제외. 다섯 번째, 전쟁에 반대하지 않았던 종교계 지도자." - P88

철학자 야스퍼스의 말
"재난을 알아차렸고, 예언도 했고, 경고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면, 그리고 행동했더라도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통용되지 않는다. - P93

"동일본 대지진은 하늘이 오사카에게 내린 은헤였다"
(오사카 부의회 나가타 요시아키 의장의 천혜론) - P96

"이런 국가익찬체제(국가총동원체제), 아래로부터의 파시즘, 신국(神國) 사상은 국가의 역할을 비대하게 만들고 신들린 듯 정신 나간 ‘일본‘ 이데올로기를 고취하면서 다시 큰 과오를 불러들일 우려가 있다." - P136

"자신(야마토 일본인)이야 말로 오키나와인에게 안보 부담을 과도하게 떠넘기는 장본인이라는 것을 대다수 일본인들이 망각해 왔다고 할 수 있다. (...) 대다수 일본인들은 스스로의 식민지주의에 무의식 상태인 것이다."
노무라 고야 (히로시마 슈도대학 교수)의 저서 <무의식의 식민지주의> 중에서 재인용 - P161

"희생의 시스템에서는 어떤 자(들)의 이익이 다른자(들)의 생활(생명, 건강, 재산, 존엄, 희망 등)을 희생시킴으로써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희생시키는 자의 이익은 희생당하는 자의 희생 없이는 생기지 않고, 유지되지도 않는다. 이 희생은 통상 감춰져 있거나 공동체(국가, 국민, 사회, 기업 등)의 ‘소중한 희생‘으로 미화되고 정당화된다." - P161

"식민자와 식민지(의 사람들)의 관계는 바로 ‘희생시키는 자‘와 ‘희생당하는 것‘의 관계다." - P161

"오키나와는 잠자고 있지 않았다. 전후에 늘 그랬다. 그것을 모르는 것 자체가 바로 식민주의 그 자체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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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황태연 옮김 | 비홍출판사

제4부 정리66-정리73을 위주로 한 단상들

: 자유인과 노예에 관한 생각

스피노자는 《에티카》4부에서 감정이 갖는 힘, 내지는 감정의 역량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 정리 66의 주석에서는 자유인과 노예를 언급한다. 스피노자가 자유인과 노예를 구분하는 기준은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가’ 아니면 ‘감정이나 의견에 의해서만 인도되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스피노자에게 자유인은 ‘자기 이외의 아무도 따르지 않고,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을, 그런 까닭에 가장 많이 욕구하는 것들 만을 행하’는 사람이다. 반면 노예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이 대부분 모르는 것들을’ 행한다. 제3부에 등장하는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인 코나투스(conatus) 개념으로 말하면, 자유인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도록’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에 근접한 사람으로 생각해본 인물은 《달과 6펜스》의 찰스 스트릭랜드이다. 서머싯 몸은 후기 인상파 화가 고갱의 삶을 기반으로 이 소설을 썼다. 소설 속의 스트릭랜드는 앞길이 보장되고 편안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증권 중개인이었지만, 마흔을 넘긴 어느 날 부인과 두 아이들을 떠나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오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였다. 사람들은 스트릭랜드를 도덕적인 이유로 비난했다. 자신의 본분을 잊고, 그것도 가차없이 가족의 인연을 끊은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나아가 그림에 탁월한 재능도 없던 사람이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는데 모든 것을 버릴 필요까지야 있었을까. 사람들은 스트릭랜드를 비난하고 조롱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게 조롱과 비난을 보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물론 스트릭랜드가 《에티카》에 제시된 ‘자유인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스트릭랜드가 냉철한 이성의 지도에 따라 결정했던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세인들이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스트릭랜드의 이기심은 분명히 ‘자기애에 기초한 이기심’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다.

스트릭랜드는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의 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록 마흔이 될 때까지는 ‘6펜스’의 세계, 곧 세속과 물질의 세계, 관습과 타성적 욕망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기대되어진 ‘역할’을 맡아,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 대긴 했으나, 그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스트릭랜드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열망을 억누르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스피노자의 ‘노예’처럼 살아왔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서 화자인 이슈메일이 ‘이 세상에 노예 아닌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다’라고 말한 맥락과 유사하다.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예속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스트릭랜드는 문명의 관습이 자신에게 부여한 책임을 수행하며 ‘체제 안의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천둥 벼락과 같은 계시’를 받았는지 모른다. 스트릭랜드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 잘 정돈되고 편안한 삶을 모두 벗어던지고 스스로 ‘체제 밖, 달의 세계’로 튕겨져 나간다. 관습의 울타리를 벗어난 그에게는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비난하는지는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스트릭랜드를 인도했던 그 무언가가 ‘이성’(제2종 인식)이 아니었다면, ‘직관의 인식’(제3종 인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 속에서 일관되게 감정이 거세되어 보이는 인물, 스트릭랜드가 어떤 감정이나 의견에 인도된다고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트릭랜드는 스피노자가 말한 자유인의 조건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자기 이외의 아무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것(그림 그리기)을, 그러므로 가장 많이 욕구하는 것 만을 행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편 스피노자는 자유인의 ‘능동적인 정서’로서 ‘인식(understanding)하는 한에서 정신에 관계하는 감정에서 생기는 활동’인 ‘정신의 힘’을 제시한다. 이 정신의 힘에는 용기(tenacity, 정신의 강인함)와 아량(nobility, 고귀함에서 나오는 친절, 배려)이 있다[제3부 정리 59의 주석 참조]. 스피노자에 따르면, ‘용기’는 이성의 지령에 따라 자신의 존재(being)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욕망이다. 그리고 ‘아량’은 이성의 지령에 따라 타인을 돕고 이들과 친교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욕망으로 정리하고 있다. 스트릭랜드는 분명 스피노자의 용기로 ‘6펜스’의 세계를 벗어나 자신이 유일하게 원하고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그림 그리기’를 위해 ‘달의 세계’로 자신을 던져넣는다. 다만 스트릭랜드가 스피노자의 ‘완전한 자유인’이 되기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들과 친교를 맺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일 것이다. 여기에 이야기의 비극성이 위치한다. 그는 인습과 구속의 세계를 벗어나지만 타히티의 완벽한 고독 속에서 문둥병에 걸려 죽어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해간다.

정리해보면 스트릭랜드는 스피노자의 자유인에 불완전하지만 상당히 부합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제4부 정리 73에서 언급된 내용("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고독 속에서 보다는 공동의 결정에 따라서 생활하는 국가 내에서 더욱 자유롭다.")에는 정확히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드물다.")이 전하듯 스피노자의 자유인이 되기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소설에 구현된 찰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코나투스에 따라 살았던 인물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비록 고독과 문둥병 속에서 죽었지만, 고독과 죽음은 자유인인 그에게 무의미했다. 스트릭랜드는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고 자신을 구원했던 사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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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의 과학 - 하나의 세포가 인간이 되기까지 편견을 뒤집는 발생학 강의
최영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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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학연구를 통해 세포의 놀라운 잠재성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러한 지식은 우리의 편견을 바로잡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학문적인 연구는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여기에는 연구수행자의 인식의 한계, 편견이 개입될 수도 있다. 책의 처음에 언급된 수정란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저자는 수동적인 난자, 무기력한 난자 편견을 지적해주었다. 난자는 101일이 넘는 치열한 경쟁을 거치며, 수정을 유도하기 위해 나름 화학 신호를 열심히 내보낸다는 등을 알게 되었다. 분명히 남성 위주의 현상 해석은 과학적인 사실을 계속해서 알아내고, 끊임없이 나누는 과정을 통해 편견을 바로잡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책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저자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의 문제를 언급한 부분 흥미로웠다. 저자에 따르면 배아 발달과정 초기에 인간은 남녀 생식기 어느 쪽으로도 발달할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인간에게는 모두 남성 여성 결정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이었다. 특히 SRY유전자라고 하는 유전자가 성별을 결정하게 되는데, 세포가 SRY유전자를 읽게되면, 남성 결정유전자들이 차례로 활성화되고, 반대로 여성 결정 유전자들은 발현이 억제된다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 몸이 각자의 결정된 성을 유지하기 위해 평생동안 세포들이 노력한다는 점이다. 실험을 통해, 성결정 유전자를 제거하니, 암컷의 난소 세포가 고환으로 변했다는 연구결과는, 점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백과사전적인 책에는 남자로 살다가 어느 시기에 여성화되어버린 사람의 사례를 적이 잇는데, 이것이 마법이나 신의 저주가 아니라 실제로 드물지만 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식을 통해 성소수자들의 생물학적인 특징을 이해해볼 있지 않을까.

 

플라톤의 향연에는인간의 가지 형태의 원형들(-, -, -) 등장한다. 원형 인간이 신들의 노여움 때문에 둘로 나뉘어 지금의 남자와 여자로 되었다는 이야기말이다. 그런데 생물학을 이해하면 신화적이고 은유적인 이야기가 단순히 상상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본다. 저자는 우리 인간은 남녀 모두의 잠재성이 있다는 , 우리의 몸이 결정된 성을 유지하도록 평생 노력한다는 , 그리고 안의 다른 성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그럼 우리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물을 , 이런 생물학적인 지식도 철학적 성찰에 분명히 영향을 있다. 우리 인간은 가지 성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고 수십 억의 인간이 각자 동일한 성의 잠재성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므로 그만큼 다양한 성적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 분포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상 비정상 기준을 과연 정할 있을까? 문제는 생명을 어느 단계에서부터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처럼 정답이 없다. 그런데 가지 확실한 점은 100% 정상 남자이거나, 100% 정상 여자라는 개념은 환상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정상 남자 정상 여자사이에 무수히 많은 다양한 양상의 성을 지닌 사람들이 존재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남성성과 여성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며, 어느 쪽이 좀더 우세한지에 따라 수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말이다. 따라서 성의 문제에 있어서 정상 비정상 문제는 종교의 문제도, 정책입안자의 문제도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정상 비정상이라는 환상은 생물학 지식을 통해 부조리함을 알아차릴 있을 것이다. 저자가 우리의 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포들이 평생 노력한다는 위의 연구는 성의 정의, 성의 유동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79)라고 언급에서 나는 성소수자 것이 본인들의 의지나 도덕적 타락 등의 문제가 아니며, 생명체의 다양성 메커니즘으로 이해할 있다고 생각한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아도 이런 다양한 성소수자 모습들은 생명체가 다양성을 위해 마련한 기작의 한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부분에 대한 저자의 언급이 있었다면하는 아쉬움은 있었으나, 기고문의 성격상 제약은 있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생물학적인 사실은 흥미로웠다. 그리고 지금 순간에도 몸의 세포들은 유전자의 정보에 따라 성의 발현 특징을 유지하기 위해 쉼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나아가 언제는 몸에 어떤 이상으로 인해 성결정 유전자에 변형이 발생하면, 내가 여성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철학적인 시각에서 인간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과정에도 분명히 생물학 연구의 결과를 고려해야할 같다. 플라톤과 같은 고대의 철학자들은 지금과 같은 생물학 지식이  없었을지라도 상당히 예민하고 명민한 관찰자였음이 분명하다. 은유적이나마 인간의 특징을 파악하고 분류하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발생학을 비롯한 생물학의 연구를 통해 우리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하게 되면 인간이 인간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을 있지 않을까? 수많은 편견이 영향력있는 지식인들에 의해 형성되고 사회에 영향을 미쳐왔음을 역사기록에서 흔히 확인할 있다. 그러므로 편견을 바로잡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력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도 발생학은 사람들의 편견을 바로잡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있으며, 그래야한다고 믿는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하나의 세포에서 수백 개의 세포로 구성된 온전한 개체로 변화되어가는 현상은 우리 몸이 하나의 소우주라는 표현이 결코 진부한 것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사람의 세포 내에 있는 2만여 개의 유전자들이 만들어내는 소우주인 우리는 모두 경이로운 존재인 것이다. 유전자에 기록된 정보에 따라 하나의 세포가 수많은 세포로 되면서 다양한 기능이 분화하고 복잡한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배아의 분화과정에서 초기 대칭성이 어느 순간 깨어지고, 몸의 좌우 비대칭이 형성되는 기작은 상당히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였다. 특히 발생학 분야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발생 과정은 다른 동물들의 발생 과정과 크게 다를바 없으며 공통점을 지닌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그러면 인간이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는데 도움을 있지 않을가. 아울러 우리가 거대한 자연이라는 우주 속의 일부라는 점을 인식하는데 기여를 있다고 생각한다. 세포가 지닌 다양한 발달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생명체의 몸이 지금 모습대로 이루어진 , 그리고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은 생명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있다고 본다. 탄생의 과학 발생학자의 지식을 일반 독자들과 나누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다만 인간 혹은 생명체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인 견해를 들을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았을 것같다. 이제 과학분야의 기본 지식 없이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한다는 것은 분명 한계가 존재하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탄생의 과학 나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일반 독자로서 더욱 주목하게 되는 책이다.



"과학의 목표란 점진적으로 편견을 없애는 것"
- 닐스 보어 - P31

"하지만 난자도 경쟁을 합니다. 그것도 아주 치열하게 말입니다. 이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경쟁이 배란 전에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 P26

"사실 우리 세포에는 성별에 관계없이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만드는 데 필요한 유전자들이 모두 존재합니다." - P77

"중요한 것은 이런 성 결정 기작이 ‘평생‘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우리 몸은 선택된 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성별에 따라 생식기 구조와 호르몬 수치가 정해진 이후에도 내 안의 다른 성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 P78

"다만 2018년, 중국에서 탄생한 세계 최초의 복제 원숭이는 인간 복제 배아의 탄생이 결코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예고합니다." - P109

"몸 속 각종 기관들의 위치를 잡아주는 머리와 꼬리, 배와 등,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비대칭 덕분에 지금 여기, 내가 존재합니다." - P166

"두 세포가 만나 하나의 세포가 되고, 다시 이 세포가 하나의 인간으로 발달하는 과정. 셀 수 없이 많은 물질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구조들, 이곳에서 저곳으로 바쁘게 움직이거나 듬직하니 한 곳에서 지표가 되어주는 세포들, 이 모두가 정해진 규칙과 정해지지 않은 환경에 반응하여 쉴새없이 자기 몫을 해내는 시간. 이렇게 기억에 없는 기적, 내가 빚어집니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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