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 탐서주의자 표정훈, 그림 속 책을 탐하다
표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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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남은 , 당신 곁의

 표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혼자 남은 , 당신 곁의 그림 속의 인물이 들고 있는 책이 무슨 책일까하는 궁금증에서 비롯되었다. 저자 표정훈은 2 권의 장서가 있는 자신의 서재에 혼자 남은 , 책이 그려진 화보집을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음직하다. 저자가 밝히고 있는 책의 방향에서 짐작할 있듯이, 독자는 저자의 궁금증을 따라가며 그림 속의 인물, 인물을 그린 화가를 둘러싼 다양하고 흥미로운 사람과 책의 이야기 만나게 된다. 책에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여러 그림이 등장하는데, 그림 속에는 언제나 책이 등장한다. 하지만 대개는 그림 속의 책이 어떤 책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대신 저자는 그림이 그려진 시기를 중심으로, 화가가 알고 있었을 법한 책이나 그림의 인물이 읽었을 법한 책의 제목을 다양하고 폭넓은 지식을 통해 추정해 내고 있다. 마치 셜록 홈즈가 것처럼, 그림 책이 어떤 책인지 추리해나가는 것이다.

 

혼자 남은 , 당신은 무엇을 것인가. 스마트 폰과 TV드라마의 맹공에도 살아남아 당신 곁에 있게 책을 펼쳐 보면 새로운 세상과 만난다. 책에 소개되어 있는 화가 윤덕희의 그림 <독서하는 여인>처럼, 온전한 휴식으로서의 독서도 가능하고, 독자의 정신을 벼리는 독서를 있겠다. 보기 시작하면 끝이 때까지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되는 드라마처럼, 다음에 읽게 책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책에 소개된 에피소드를 읽어나가면 좋겠다.

 


나를 위로하고 그대를 위로하다

 

혼자 남은 , 당신 곁의 에는 그림을 중심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중에서 화가 고흐가 그린 그림으로부터 시작해본다. 저자는 독서광 고흐에게 무엇보다 위로가 되었던 것은 소설이었다고 한다. 언젠가 고흐가 남긴 편지, 특히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노라면, 고흐가 마주했던  고난을 일부나마 엿볼 있었다. 특히 강한 자기애와 현실에서 비롯된 자기비하가 항상 맞물려 나타나는 고흐의 자의식을 발견할 때면, 자신의 일부를 보는 같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고흐의 곁에 소설 남아 그를 위로해주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던가. 책에 등장하는 고흐의 그림 <석고상, 장미꽃, 소설 권이 있는 정물>에는  제목이 적혀있는 권이 등장한다. 바로 기드 모파상의 소설 벨아미 콩쿠르 형제의 제르미니 라세르퇴였다. 대개의 그림에 책은 부수적인 정보를 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고흐가 그린 그림에는 권이 가운데에 배치해있고, 책의 제목이 명백히 기재되어 있다. 책들은 그만큼 고흐에게 의미있는 책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굳이 권이 책일까?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고, 가족의 배척을 받는 분위기에서 언제나 홀로 느낌을 받았을 법한 고흐에게 권의 소설이 무엇보다 그에게 위로가 되었법하다. 게다가 수수께끼같이 그림 속에 여인의 토로소 석고상과 장미꽃이라니. 저자 표정훈은 그림에 보이는 권의 책을 통한 상징성 읽어나간다. 석고상, 장미꽃, 소설 이란 , 생명과 죽음의 본능, 그리고 이야기 있을지 모른다”(164)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저자가 내세우는 상징성으로 파악해보는 방식보다 단순한 이해를 선호한다. 정보(책의 제목) 주어진 권이 그림의 가운데 배치되어 있다는 점으로, 소설이 화가에게 갖는 중요성을 생각해보는 일이다. 특히 소설에 어떤 공통점은 없을까를 생각해봄직하다. 저자가 소개해주고 있듯이, 소설은 여성의 지난한 삶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있을 같다. 공교롭게도 소설에는 남성들(특히 유혹하는 남성들) 의해 (벌거벗은 석고상처럼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낸채) 육체적 쾌락 충족의 대상으로 농락당하고 급기야는 외면 받는 여성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아마도 도덕적 감수성이 극도로 예민했던 고흐는 소설이나마 고통받는 여성들을 생각하며 장미를 놓아두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고흐가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와 비루한 현실의 살아낼 수밖에 없는 여인들을 연민하고 이들을 위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믿고 싶다. 바로 고흐 자신에게 위로를 소설의 여인들에게 보내는 위로와 연민의 장미 꽃을 건네는 . 비록 그림 뿐이었지만, 무엇보다 진심을 담아 보내는 위로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책을 불태우다

 

책을 찬찬히 읽어나가다보면 놀라운 그림들을 많이 보게 된다. 특히 15세기 말에 그려진 페드로 베루게테의 그림 < 도미니크와 알비파> 보면서 동양의 진시황만 책을 불태운 것이 아님을 알게된다. 그림은 기득권을 가진 종교 세력에 의해 이단으로 지목된 교단의 서적을 파괴하고 제거하도록 이들을 불태우는 폭력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책을 파괴하거나 불태우는 행위는 문자를 읽어 있는 식자층의 사상을 통제하고 공포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사건에서도 농서 등을 제외하고 각종 서적을 불태웠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수백명의 유생들도 생매장 당했다고 하니, 이만저만한 폭력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책을 불태우는 일이 오래 전의 일만은 아니다. 20세기 들어 알려진 분서사건 또한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1933 5 10, 나치 독일이 광장에서 자행한 분서사건은 비독일적이라고 지정된 책들을 대상으로 했다. 저자에 따르면 마르크스를 비롯한 공산주의 계열의 도서, 하인리히 하이네, 에리히 케스트너, 하인리히만, 베르콜 브레히트 많은 독일 작가들의 책이 불에 타버렸다고 전한다. 여기서 나의 흥미를 것은 독일의 소설가 W. G. 제발트가 소설 이민자들(‘막스 페르버, 233) 사건을 보도한 독일 신문의 보도 사진이 나온다는 점이었다. 바로 사건 당일(5 10) 저녁,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 광장에서 비독일적으로 지정된 책들을 불태우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제발트는 사진이 조작된 것임을 소설 화자의 입으로 언급한다.  당시 책을 불태우던 시각이 저녁이었기 때문에 너무 어두워서 사건 현장의 모습을 제대로 찍을 없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전에 같은 광장에서 개최된 집회 행사의 사진에 거대한 연기기둥을 만들어 넣었다는 것이다. 제발트의 소설은 소설이기는 하지만, 소설에 사용된 사진과 사진의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제발트가 직접 주인공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수집한 사실에 입각하여 쓴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보도된 신문 사진은 조작된 것으로 판명난 사실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책을 불태우며 사상을 통제하는 행위에 더하여, 책에 등장하는 사진, 책의 내용이 독자를 얼마나 기만할 있는지 또한 보여주고 있다. 권력을 지닌 이들이 사람들을 분서 대변되는 가시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통제할 있음과 동시에 조작 거짓 내용을 유포하는 방법을 통해 비가시적이고 조용한 대중 통제 방법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어떤 매체인지 우리에게 존재를 드러내고 영향을 주는 방식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사례로 읽을 있겠다.

 


책장을 보면 사람을 있다

 

저자는 이광수의 무정나오는 경성학교 영어교사 이형식의 책장을 묘사한 대목을 인용한다. ‘새로 사온 책을 읽기로 유일한 벗을 삼는이형식은 독서가라는 칭찬을 듣고, 학생들의 존경 받는다. 이유가 책장에 정리되어 있는 어려운 영문 도서와 독문의 금박 입힌 도서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책장에 꽂힌 책을 통해 주인을 짐작할 있음 말하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도 견해에 공감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나아가 좀더 구체적으로 도서 주인의 욕망을 읽어 있다고 생각한다. ‘욕망이란 한편으로 결핍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예로, 연암 박지원 선생이 청나라를 다녀와 3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정리했던 열하일기에서 청나라를 방문한 조선 사대부들이 북경 책방거리 유리창에서 책을 사오는 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필사와 돌려보기 이외에 책을 자유롭게 구하기 힘든 시절, 나아가 모든 책을 국가에서 편찬하는 시스템을 유지했던 조선의 현실에서 유교 경전을 구하는 일은 전문 브로커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브로커 역할을 했던 이들이 청나라 사신 행렬을 따라갔던 상인들이나 사대부들이었다. 이들이 사신 행렬을 따라 사들여왔던 서적들로 사대부들은 자신의 서재를 자랑삼아 꾸미게 것이 유행이 것이다. 만약 조선 후기 사대부들이 만들어 놓은 서재를 살펴볼 있다면 우리는 서재의 책들을 통해 이들의 욕망과 결핍의 자의식 또한 읽어낼 있었을 것이다.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이유로, 나는 소박한 책장을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보여주기 민망함을 느끼곤 한다. 경우는 소장의 빈약함 때문이 아니라 내가 욕망하고 내가 결핍을 느끼는, 때로는 내가 열등감을 갖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타인에게 거침없이 읽히기 때문이다. 타인이 책장을 때면 나는 으레 꼭꼭 숨겨둔 나만의 속물근성과 숨겨둔 욕망을 들킬 것만 같아 부끄러운 것이다. 어떤 사람의 책장 전체를 유심히 있다면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읽어낼 있다는 저자의 말은 그래서 공감하게 된다.

 


책을 덮으며

 

  혼자 남은 , 당신 곁의 에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특히 화가 소포니소바 앙귀솔라나 샤틀레 후작 부인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자화상을 그리며 자신의 그림 속에 혼인하지 않은 처녀 자신이 그린 소포니소바 앙귀솔라라고 적어 넣은 화가를 상상해본다. 그리고 때가 1554년임을 상기해보라. 저자는 그림 속의 문구를 하나의 인간 선언으로 읽어내고 있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을 살다 여인은 글쓰고 책읽고 연주하고 그릴 아는 여성임을 당당하게 드러냈고, 자신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임을 선언했다.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세계관이 오히려 구식으로 느껴질 만큼 멋진 여성의 자취를 만났던 기회였다.

 

이것만이 아니다.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연인이자 후원자였으며 학문적 반려였던 샤틀레 후작 부인이 뉴턴의 프린키피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았다는 또한 눈여겨 볼만한 짜릿한 사례였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이 번역이란 언어의 치환 혹은 표현 대체하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원문 도서에 대한 내용을 읽고 이해하고 깊이 생각한 후에 덧붙일 있는 것이 주석이다. 사학자 박상익이 번역은 반역인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외국의 고전 문헌을 우리말로 옮기고 주석을 다는 행위가 대학원에서 학위로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을 떠올려 보게 된다. 국내의 학계가 제대로 번역 연구작업(주석 달기를 포함한) 대해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풍토가 계속 되는 우리 문화의 수준이 표피적인 수준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까 우려가 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샤틀레 후작 부인이 번역한 프린키피아  프랑스 학계에서 표준 프랑스어판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21세기에 사는 우리를 더욱 분발하게 해준다.        

    

책을 천천히 읽어나가며 책에 소개된 그림을 둘러싼 인물들(화가와 그림 인물) 그림 책이야기를 능숙하게 써내려가는 저자의 글쓰기에 상당히 매료되었다. 단순한 배경지식과 정보들을 모으는 것만으로 내놓기 힘든 결과물이다. 그림 점마다 화가와 대상의 삶과 당대의 현실이 교직하는 지점을 저자는 날카롭고 흥미롭게 찾아내고 고찰한다. 여기에 저자의 경험과 깨닳음이 더해져 앎의 기쁨과 지혜를 독자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저자가 자신의 장서가 있는 서재에 혼자 남아 현실과 거리를 내면을 성찰하는 관조의 순간 상상해보게 된다.




밤이다.
구석방에 홀로 있다.
그런 당신 곁에 책이 있다.
혼자이되 외롭지 않으리라. - P5

"노년의 가낭 큰 어리석음은 젊은이들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어리석음이다." - P40

"그림 읽기와 소설 읽기는 시선의 놀이다." - P52

"그녀의 어떤 성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녀의 다른 성품에 기뻐할 것이라"
- <코란>(무슬림이 수집한 하디스, no. 1469) - P127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 그것을 피하거나 무시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정면으로 마주하며 숙달하고 정통해야, 즉 무언가를 ‘마스터해야‘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지며 나아가 새로운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창조할 수 있다. 아무나 스타일을 창조할 수 없듯이, 아무나 책을 찢을 수 없다." - P207

"독서는 세상과 타인을 좀 더 깊이 넓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지만, 그것의 가장 깊은 차원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 독서는 곧 자기 성찰이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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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죽음 1~2 세트 - 전2권 -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함지은 북디자이너 / 열린책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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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 지음 |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인시피트 - 누가 죽였지?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죽음’, ‘탄생 소멸 운명을 지닌다. 우리는 태어남 대해 나름의 이해를 갖고 있지만, ‘죽음 누구나 피해갈 없고, 보다 생경한 경험일 수밖에 없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폭넓은 호기심을 보여주었던 작가, 독특한 소재와 기발한 발상이 녹아있는 작품을 발표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이번엔 죽음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개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통해 알게된 베르베르는 언젠가 내가 써보고 싶었던 글쓰기를 보여주었던 작가였다. 이번에 발표한 죽음 추리소설 작가이자 몽상가인 주인공 가브리엘 웰즈 죽음부터 시작한다. 웰즈의 영혼은 추리 소설의 형식을 빌려 죽음 영역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을 누가 죽였는지알아내기 위해 수사를 진행한다. 소설의 시작은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이름은 빨강 유사한 모티브를 갖고 있다. 파묵의 소설에서는 다양한 화자 등장하지만 죽은 화가의 영혼이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고 자신을 누가 죽였는지 궁금해하며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죽음 가브리엘 웰즈도 파묵의 소설에 등장하는 화가처럼 자신이 죽게 경위를 추적하는 형식을 지닌다. 소설이 죽음이라는 진지한 주제로 시작하고 있지만, 작가 자신의 독특한 개성은 소설 전반을 통해 다르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웰즈의 영혼이 살인자를 찾는 과정에서도 간간이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통해 인간의 죽음 관련한 기묘한 역사적 사실들을 곁들이며 죽음이라는 소재에 흥미를 더하고 있다.

  

소설 주인공이자 화자이기도 가브리엘은 기독교에서 하느님의 전령으로 알려진 대천사와 이름이 같다. 특히 성경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태어날 것이라는 수태고지 하고 있기도 하다. 다른 맥락에서 본다면 대천사 가브리엘의 이미지는 소설의 도입부에 나오는 죽음 이미지보다는 탄생 이미지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윤회와 환생의 구도를 기반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고려할 가브리엘은 새로운 탄생 예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기대를 해보게 된다.    

 


 

소설보다 작가 - 베르나르의 유머와 문제의식

 

소설의 전개는 평이하고 약간의 반전이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다. 다만 여기서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같다. 소설의 사건을 따라가며 내가 눈여겨 보게 부분은 소설을 통해 솔직하게 드러나는 작가 베르베르의 면모들이었다. 특히 옮긴이가 지적하고 있듯이 작가 스스로를 농담과 자조의 대상으로 삼는 유머 감각은 베르나르의 개성이라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관통하고 있지만, ‘죽음이라는 현상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는 여전히 요소에 무게가 수밖에 없다. 베르베르는 죽음 둘러싼 진실들을 다르게 이야기하는 위트를 보여준다. 영매 뤼시의 애인, 사미의 행방을 추적 조사하던 할아버지의 영혼이 죽은 아파트 관리인의 영혼과 협상하는 장면이 예이다. 사미의 행방에 관한 정보를 주면 관리인의 영혼이 환생할 브라질 축구 스타 태어날 있는지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약속하는 모습은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욕망을 가지며 흥정도 하는 영혼들이라니. 베르베르는 사후세계에도 나름의 규칙과 질서가 있는 것으로 상상하지 않았을까.

 

한편 소설의 제목인 죽음 대해 작가가 시도한 다양한 생각들도 엿볼 있다. 영매 뤼시가 죽음을 일체의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럽고 유약한 것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 정신만 간직하게 됐다고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사후세계와 윤회에 대한 색다른 생각들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소설은 이런 구도 하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태어난 모든 이는 죽음을 피해갈 없기에 죽음 역설적으로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우리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중요한 일들을 계속 미루기만 하면서 살았다 후회할 것인가? 이런 고민은 지금 순간 삶이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해 지향점과 실마리를 준다. “마지막 순간에 얻는 깨달음을 가지고 죽은 자들이 조금 있다면..”(1 58)이라고 죽은 웰즈의 영혼이 후회하는 부분이 그러하다. 걱정과 두려움은 삶에서 중요한 일들을 미루는데 가장 핑계거리인지 모른다. 모기에 물리는 것은 정말 싫은 일이지만, 할아버지의 영혼이 말하고 있듯이 이것이 죽음의 장점이 되기에는 삶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사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영혼들에게 무료라는 점은 솔깃하긴 하지만 말이다. 베르나르는 이렇듯 무거운 주제를 가벼운 위트로 우리의 돌아보게 해주기도 한다. 계기가 심각하고 진지하기만 하는 문학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좀더 진지한 저자의 고민으로는 연명치료 안락사 관련지을 있는 삶의 관한 문제에 주목해본다. 작가 개인적으로 할아버지의 연명치료 대한 경험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환자의 의지와 반하여 삶을 연장하는 문제에 대해 우린 어떤 태도로 바라보고 실천을 해볼 있을까. ‘존엄이라는 상태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삶을 누릴 중요한 키워드가 있다. 소설 속에서 웰즈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는 대목에서 잠시 생각해볼 있었던 주제이다. 과거에 집에서 맞던 죽음 이제는 병원에서 처리되는죽음의 외주화 현상이나, 현대 의학의 도움으로 장기간 이루어지는 연명 치료에 대해 베르베르의 관심을 엿볼 있다. 아울러  멈추는 순간을 스스로 결정하지도 못하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1 212)라고 할아버지의 영혼이 반문하는 대목은 안락사문제와 연결지어 수도 있다. 인간의 죽음이란 문제에 정답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존엄을 갖춘 이란 어떤 것일까가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소설의 여러 부분에서 베르베르가 죽음 대해 했던 가볍고도 진지한 고민들을 발견할 있었다. 나아가 저자의 특기인 상상력과 관련한 문제의식도 소설의 주요한 구성 요소다.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면, ‘상상력 문체진영이 서로 비물질 차원의 전투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에서 상상력진영은 상상력이 주요한 특징인 장르문학을 대표하고, ‘문체진영은 제도권 작가들의 문학을 대표한다. 장르 문학을 중심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베르베르의 입장에서는 제도권 문단에서 평하는 사항들을 익히 들어왔을 터이다. 따라서 웰즈의 영혼이 문단의 평론가들을 장르 문학을 하위 문학으로 취급하도록 배운 사람들”(1 145)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프랑스 문단에 대한 베르베르의 비판인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웰즈의 소설 권을 출판해준 편집자 빌랑브뢰즈가 웰즈에게 했던 말처럼 정말 프랑스에서는 비평가의 지지를 받거나 대중의 지지를 받거나 하나일까? 문제는 작가로서 베르베르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부분일것 같다. 다만 부분이 양립불가능한지는 별개의 문제일 있다. 일례로 프랑스 작가 피에르 르메트르의 오르부아르같은 작품들은 문학상과 대중성을 인정받은 소설로 알려져 있다. 다만 문단의 인정과 대중 독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경우가 희소할 뿐이다. 상상력 진영과 문체 진영의 대결 끝에 최초의 드루이드 투안의 영혼이 개입하여 설교하는 대목은 문학이란 무엇인가 대해 생각거리를 던져주기도 한다. 다시 말해, ‘내용과 형식은 상반되는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는 , ‘모든 문학이 존중받는 다양성 수호되어야 한다는 투안 영혼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의 내용보다는 무엇보다 작가 베르나르의 면모, 작가로서의 고민과 문제의식을 더욱 친밀하게 느끼고 공감할 있었다.

 


 

소설의 전개 아쉬운 점들 - 그런데 혹시 아니라면?

 

소설의 전개상 아쉬운 점들은 군데 있었다. 특히 웰즈의 영혼이 자신의 살인자를 추적 조사하는 가운데 가정부 마리아 콘셉시온은 조사하지 않았을까를 예로 있다. 웰즈가 사망하기 전날 , 웰즈는 가정부가 만들어주는 단백질 음료를 마셨지만 콘셉시온을 용의 선상에 올려 조사하는 과정은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웰즈의 영혼이나 뤼시가 용의자들을 찾아가 대화하면서도 이들을 용의자로 의심할만한 실마리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럴 듯한 계기없이 뤼시와 할아버지가 살인사건 수사에서 돌연히 손을 떼기로 선언한다던지, 뤼시가 사미와 재회하여 아이를 갖기 위해 애지중지하던 고양이를 떠나보내려하는 상황은 아무리 모성성이 강하다고 해도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작가 베르나르가 과거에 발표했던 나무 개미 같이 독특한 소재와 시각, 기발함을 여운으로 남았던 것과는 달리 죽음 이전 작품에 비해 다소 부족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웰즈의 소설을 읽은 코난 도일의 영혼이 웰즈의 작품을 평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아이디어는 훌륭한데 엄격함이 부족해. 아직 등장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다루지 못했어.”(2 97)

 

사실 평가는 죽음 읽어나가는 동안 내가 했던 생각과 유사했다. 코난 도일의 입을 빌어 추리 작가인 웰즈의 소설에 대한 인상을 말하고 있는데, 이런 평가는 베르나르의 작품에 대한 프랑스 문단의 평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런 평가를 소설의 가운데 집어넣어 저자가 갖고있는 문제의식을 솔직하게 드러내보여주는 듯하다. 분명 베르베르는 장르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들어온 평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면, 애초에 죽음이라는 소설이 사건들과 인물의 내면, 그리고 소설적 구조의 정밀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것인가. 일련의 사건들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가 떨어지고 개연성이 부족해보이는 전개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주목하고 있는 점은 다른데 있다면?   

 

만약 타고난 이야기꾼, 베르베르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들었음직한 평가들을 소설 속에서 드러내고자 했다면, 그야말로 베르베르적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는 틀림없이 소설의 원고를 보며 이를 간파했을 같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평을 코난 도일의 입을 통해 의도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스한 내용이 노파의 영혼의 입으로 또다시 등장한다. 2 282-283 참조). 이쯤되면 나는 소설이 죽음 소재로하여 어른들을 위해 준비한 하나의 동화이자 유머가 아닐까 믿게 되었다. 그리고 제도권 문학에 대한 베르베르의 저항심과 자조적이고 넉살 좋은 유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오히려 베르베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당당함이 느껴졌다. 당연히 제도권 문학의 기준으로 장르소설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어가며 베르베르가 배치해놓은 이런 단서들을 만나다보니 소설의 구조니 전개의 미흡함이니 하는 판단은 접게 되었다. 평론가는 생업을 위해 글을 쓰지만, 독자들은 즐거움을 위해 책을 선택할 것이다. 최후의 판단은 독자들이 일이다.  

 

 

 

엑스플리시트 - 나는 누구이며 태어났나?

 

소설을 읽고 남은 인상은 소설 전체가 죽음 소재로, 독자들에게 건네는 기나긴 유머가 아닐까 하는 점이다. 물론 소설 전체가 유머만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관통하면서도 가볍게써내려가되,  작가 자신의 문제의식 또한 놓치지 않고 표출해낸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베르나르가 슬며시 언급한 화제들에는 죽음 둘러싼 문제의식이 보인다. 예를 들어, 장기간 병원에서 이루어진 할아버지의 연명치료 경험은 소설 속에서 비중있는 부분으로 활용되고 있다. 개개인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할 있는 안락사의 관점에서도 죽음 생각해볼 있다. 소설이지만 이러한 화제를 통해 인간을 존엄하게 만들어주는 조건이 무엇인가에 대해 베르베르의 생각을 발견할 있었다.    

 

영혼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며, 환생하지 않으면 끝없이 떠돌게 된다 저자의 설정도 흥미롭다. 나아가 프랑스 심령술의 창시자 알랑 카르데크의 영혼이 브라질에 있다는 할아버지 영혼의 말은 시사하는 바도 크다. “떠돌이 영혼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도 자기를 가장 기억해 주는 곳에서 지내.”(267) 부분에서 나는 애니메이션 <코코> 떠올렸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처럼 현세에서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같다. 반대로 누군가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누군가 존재는 비로소 무화된다. 그러므로 할아버지 영혼의 말처럼 떠돌이 영혼들은 정말 자신을 기억해주는 곳에서 지내고 싶어하지 않을까.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웰즈의 영혼은 도입부에서 등장했던 누가 죽였을까? 질문 대신, 이제 나는 태어났지? 묻고있다. 영혼이긴 하지만 자신의 존재 이유 궁금해하는 것이다. 소설 전체를 떠올려 저자는 죽음에서 시작하여 이유를 지향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아마 소설 뤼시의 설득에 넘어가 다시 환생하기로 결정했던 웰즈의 영혼처럼, 소설은 죽음에서 다시 ’, ‘새로운 탄생 예비하며 끝을 맺는다. 마치 대천사 가브리엘이 새로운 수태고지 하러 마리아에게 것처럼, 웰즈의 영혼은 자신이 삶에서 배운 교훈을 독자에게 고지하고 있다. 웰즈가 말해주는 여섯 가지 교훈은 다소 교조적인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기에 간간이 음미해볼 만한 내용이다.      

 

소설을 읽고 나는 일단 오라 구멍이 뚫리지 않도록 자신을 존중하고 돌보는 일이 우선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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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는 구절들

 

[1] 사랑에 관한 구절들

 

어릴 부모한테 받은 뽀뽀가 마치 포커칩과 같아서 어른이 되어 사랑이라는 포커 게임을 그걸 있다고 했어요. 어릴 받은 포커 칩이 많을수록 게임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1 94)

 

영매인 뤼시가 가브리엘 웰즈의 영혼에게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재미있는 표현이다. 아이들에게 해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대신 아이들은 포커 게임과 포커 칩을 모를 있으니, ‘포커 대신 블루마블게임의 황금열쇠카드 중에서 생일선물 카드 우대권’, 혹은 무인도 탈출같은 카드를 얘기해주어도 되겠다.

 

 

사랑은 지능에 대한 상상력의 승리고, 결혼은 경험에 대한 기대감의 승리다.” (1 209)

 

웰즈의 할아버지 이냐스 웰즈의 영혼이 자신의 인생을 웰즈의 영혼에게 이야기해주는 대목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는 바로 와닫진 않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절반의 진실과 절반의 유머를 담은 말이란 생각을 해본다. ‘사랑이란 관념은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발명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결코 논리로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베푸는 자에게 보다 사랑이 돌아가는 . 그러므로 사랑은 상상력의 영역에 속한 것이 맞을 지도 모른다. 처음 결혼을 해보는 사람에게 결혼에 대한 기대치는 무엇으로도 꺾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 결혼을 해본 경험이 있는 이에게도 결혼하냐?’ 묻는 일은 무의미하다. 새로운 사랑을 찾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기대는 경험을 무색케하는 놀라운 현상인 것이다. 아니면 번번히 아픈 경험에 대한 기억이 마비가 되는 것이거나.

      



[2] 인생의 경험과 관대함에 대한

 

인간은 자신의 어두운 면과 맞부닥뜨려 봐야 비로소 그것에서 벗어날 있어요.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질러봐야 고칠 있는 거예요. (…) 실수없이 앎에 도달하는 불가능해요. 경험은 오랜 시간에 걸쳐 퇴적물처럼 쌓이는 거죠.” (2 198)

 

뤼시와 돌로레스의 영혼이 사미에게 해코지를 하려 하자 드라콘의 영혼이 개입하며 하는 말이다. 특별한 말은 아니지만, 부분을 읽는 동안 학창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혈기왕성하던 시절, 나만의 생각이 옳다고 믿었던 행동들,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고 상처를 주었을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말하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성찰하지 않는 사람들에나 해당하는 이야기 아닐까. 중요한 것은 실수를 해보고 경험치가 쌓이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마음가짐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관대한 마음가짐을 가질 있는 사람은 분명 젊은 시절에 많은 시행착오와 실수를 해본 사람일지도 모른다. 베르베르 역시 작가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관찰해온 결과 관대함 대한 통찰을 우리에게 넌지시 이야기해준다. 실수를 저지른 타인에게 우리가 돌을 던지지 않는 관대함을 가진 사람은 어쩌면 과거의 실수를 통해 어떤 종류의 이른 사람의 태도일 것이다. 내가 미숙하던 시절을 끊임없이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를, 그리고 타인에게 관대해야하는 이유를 슬며시 일깨워준 구절이다.

 



  [3] 문학의 본분과 문학인의 지향점에 대한

 

문학을 권력의 도구로 여기는 잘못된 생각일세. 문학은 교육과 성찰과 오락의 도구지. 작가인 자네들이 일은 의식의 고양이야. (…) 나는 모든 문학이 예외 없이 존중받고 수호되야 한다고 믿게 됐네. 다양성이 우리의 힘이야. 특정 문학의 우월성을 고집하는 어리석은 것일세.” (2 )

 

상상력 문학 진영 제도권 작가 진영 영혼들과 등장인물들의 영혼이 비물질 차원의 전투를 하며 대결하는 장면에서 최초의 드루이드 투안의 영혼이 설교하는 대목이다. 투안의 영혼은 나쁜 문학과 좋은 문학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것을 이야기한다. 특히 문체 중심의 문학과 상상력 중심의 문학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학이란 이름 아래 시도되는 모든 노력들은 존중받아야한다고 말이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우린 생각보다 다양성이 부족한 환경에 놓여있음을 깨닫곤 한다. 상대방의 의견이 나와 다르다거나 심지어 거슬린다는 이유로 제거하고 배척해야할 대상으로 삼는 태도도 보인다. 소설이긴 하지만 작품 속에서 작가의 문제의식이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는 베르베르가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를 이렇게 드러내는 것을 흥미롭게 주목해본다. 작가의 다원주의적 시각 관대함 요즈음 내가 자주 하게되는 고민들과 맞닿아 있다. 투안의 표현대로 문체를 중시하는 제도권 문학만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소설을 읽으며 즐기는 동안 작가의 고민과 문제의식을 접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런 부분을 만나게 되면 작가에게 보다 가까워진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작가는 분명 어느 (species) 갖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내부의 다양성이라는 교훈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과 사회도 다르지 않다. 짧은 순간이지만 책을 읽으며 옆길로 빠졌다가 다시 돌아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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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는 문장들 - 걷기 좋은 유럽, 읽기 좋은 도시, 그곳에서의 낭만적 독서
강병융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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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는 문장들

강병융 지음  |  [한겨레출판]




책을 읽고 떠오른 이미지가 있었다. 눈부신 햇빛이 쨍하고 내리쬐는 , 서부의 초원을 배경으로 어떤 기교를 드러내거나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 사진집을 생각했다. 로버트 애덤스(RobertAdams)라는 사진가의 완전한 시간 완전한 장소 Perfect Times Pefect Places 라는 제목의 사진집이었다. 세상의 모든 중심은 바로 사진가 자신이며, 풍경은 보는 이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가로부터 세계를 향해 마음의 창이 활짝 열려 있다. 밋밋해보이는 수평선, 나른한 낮의 단조로운 풍경이 완벽한 시간, 완벽한 장소라니.

 


사진집의 제목이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사진 프레임에 간간이 등장하는 존재들 때문이다. 사랑하는 대상들이 바로 사진가의 곁에 있기 때문이다. 사진가 곁에는 바로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반려견이 있어 함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풍경도 이들과 함게 바라볼 있다면 순간이 바로 완벽한 시간, 완벽한 장소임을 증거하고 있다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이야 말로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다.

(95)

 


이번에 만나게 강병융의 도시를 걷는문장들에서 문장의 여운으로 돌연히 사진집을 떠올렸던 것이다. 분명 사진집은 저자의 말에 들어맞는 여운을 주었다. 다만, 아름다움 사랑하는 대상과 나누는 전제조건이 아니라 결과로 수도 있겠다. 사랑하는 , 사랑하는 대상이 곁에 있어서 세상이, 내가 혹은 함께 바라보는 세계가 아름다운 아니겠는가.

 


나에게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면, 나를 중심으로 감수성은 세계를 행해 활짝 열리는 것이 아닐까. 내가 사랑하는 이가 있고,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생각해주는 이가 있다면 지금 곁에 있지 않아도 좋다. 혼자라고 해도 그리움의 여운을 주는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터이다.

 


저자는 여행의 중심에 자신 있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유럽의 여기 저기를 많이 다니는 저자는 대부분의 여행이 출장과 관련된 짧은 여행이다. 느긋하게 여행 자체를 목적으로 것이 아니기에 저자는 여행지에서 잠깐의 여유를 찾는 나름의 방법을 보여준다. 특히나 이런 여행에는 시간적인 제약이 따르기 때문에 일상스러운 여행 수밖에 없고, 저자는 여기에서 자신만의 기쁨을 찾고있다. ‘너도 너의 행복과 기쁨을 찾길바란다 저자가 말하는 이유다.

 


저자가 크로아티아의 어디에선가 읽은 마스다 미리의 <뭉클하면 안되나요?>에서 잠시 멈추었다. 마스다 미리가 썼던 표현처럼 사소한 일상에서 뭉클함 느끼는 일은 겉으로 보는 것보다 많은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일상에서 뭉클사라지고 있다면, 당신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충고하고 싶다. 여행은 그곳에서는 감동을, 돌아와서는 뭉클선사할 것이다. 우리가 떠나는 이유는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이다.”(97)

 

우리는 여행을 통해 우리의 일상과 다른 비일상을 경험한다. 반면 저자는 삶은 어디에 가도 같은 삶이고, 우리는 어디에 살든 결국 비슷할 것이라는 최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삶의 구체성에서 다름 보는 것은 여행이 주는 기회이자 선물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아가 삶의 보편성 확인하는 단계는 살림살이의 표피, 일상의 화이트 노이즈 걷어내고 나면 보이는 것들일 테다. 결국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어 행복하고,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게 되면 슬퍼지는 것은 모든 지구인의 보편성 아니겠는가. 나이들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삶의 유한성을 느끼는 순간, 나보다 죽음이라는 이별에 가까워지는 부모를 보며 안타까워하고, 장난꾸러기 아이들을 보며 뭉클 하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벗어나 마주할 있는 우리 삶의 보편성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어디에 살든 우린 결국 비슷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뭉클함을 느끼기 위해선 일상에서 뭉클 근육 키우기 위한 삶의 기술 각자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당부일지도 모른다. 임제 선사가 말처럼 결국 내가 있는 곳이 바로 내가 주인이 되는 자리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속한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허물며 자신만의 뭉클 근육 키우고 있음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뭉클 근육이 있으면 좋다. 그러니 바쁜 일상을 살아갈 지라도 각자 하나씩 마련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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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자리에

(원제: Everything In Its Place)

올리버 색스(Oiver Sacks) 지음 | 양병찬 옮김 |  [알마]

 



도서관 읽으며 아날로그는 에피파니의 경험을 예비한다

 

언젠가 아날로그(analogue) 에피파니(epiphany)라는 단어를 써둔 메모지를 최근에 발견한 적이 있다. 내가 단어를 써두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책상 앞에 메모지를 붙여 놓고 있다가 이유를 다시 깨닫게 순간이 있다. 바로 신경과 전문의로 활동하며 수많은 글을 썼던 올리버 색스의 모든 것은 자리에 Everything In Its Place 읽을 , 메모지의 진실을 다시금 기억하게 되었다. 자서전 온더무브 On The Move 자신의 인생을 연대기적으로 돌아보며 정리한 글이라면 책은 자신이 평생을 걸쳐 애착하던 모든 대상 담았다. 생소한 의학용어가 등장하곤 하지만 올리버 색스의 글쓰기와 옮긴이의 정성어린 주석을 통해 용어에 집착하지 않는 충분이 읽어 나갈 있다.

 

중에서  도서관편을 보면 올리버 색스가 어린 시절 좋아하던 자신의 실험실외에 아버지의 서재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면이 책으로 빼곡히 들어찬 아버지의 서재에서 어슬렁거리며 발견 책들과 책들을 읽으며 저자가 경험했던 달콤하고 강렬한 희열을 전한다. 3-4 이미 읽는 법을 익힌 올리버 색스에게 부모님의 서재는 어린 시절 기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말한다. 짜여진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학교보다 도서관에서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는 올리버 색스는 아마도 이러한 자신만의 주도적으로 찾고 발견하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직 도서관에는 많은 책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상 물성을 가진 책을 찾지 않는 새로운 디지털 세대 위해 책들을 줄곧 보관하지는 않을 같다.

 

올리버 색스가 1990년대에 이르러 느낀 변화도 바로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였다. 도서관에서 책을 쌓아 놓고  책을 읽곤 하던 올리버와 달리 젊은 학생들은 서가를 외면하고 컴퓨터로 도서를 검색해서 바로 찾아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는 오래된 책을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먼지가 쌓여 있던 도서들을 처분하고, 넘쳐났던 서가가 썰렁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런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정말 오래된 고서들이 파손되거나 보관의 어려움 때문에, 그리고 관심있는 이들에게 접근성을 높이는 방안으로 디지털화가 도움이 되는 점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이 디지털화되었기에 책을 처분해도 된다는 생각을 올리버는 일종의 분서갱유 비유한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  Fahrenheit 451에서 책을 소유하는 모든 시민을 죄악시하고 책을 말그대로 불태우는소설 속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던 올리버에게 책과 정기간행물까지 사라진 대한 상실감은 대단히 컸을 터이다. 태어나서부터 태블릿을 손가락으로 넘기는 새로운 디지털 세대 올리버가 느꼈던 상실감을 이해할 있을까. 이것은 나만의 노파심일까?

 

무엇보다 올리버처럼 도서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흥미로운 책을 발견하는 경험, 권의 책으로 인해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게되는 가능성을, 디지털 도서관을 이용하며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20여년 중고서점에서 잠시 일할 때를 기억한다. 마침 중고서점에서는 찾는 책을 검색할 있게 전산 목록을 만드는  데이터베이스화 과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사실 책을 거의 읽지 않았던 때이고, 약간의 관심만 있었을 때였다. 1년에 읽는 책이라곤 4-5 정도 되었을까. 중고등학교 학교 도서관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중고서점에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느 위치에 어느 분야가 주로 모여 있으며, 어떤 책이 있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이후 내가 좋아하게 인문분야 책장에 주로 관심을 갖고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책을 재배열하기도 하며 일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때의 경험이었을까, 나는 검색으로 원하는 책을 찾더라도 책방 주위를 배회하며 서가마다 정리된 책들을 구경하곤 다. 그리고 그 결과 내가 호기심을 가지게 된 주제를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는 어린시절부터 도서관에 머물며 책이 꽂힌 대부분의 서가를 거닐면서 우연하고 새로운 책과의 만남을 즐겼다.

 

잠시 잊고 있었던 아날로그 에피파니 이야기로 돌아가본다. 언젠가 내가 단어들을 메모지에 적어둔 이유는 아날로그 (종이에 인쇄된) 신문과 디지털 신문을 생각해보다가 떠오른 단어였다. 내가 신문 구독을 언젠가부터 중단하게 이유는 사실 요즘 신문 구독자가 줄어들다보니 새벽에 배달되던 신문이 출근시간이 한참 지나 배달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피곤에 지쳐 저녁에 집에 돌아와 맞는 신문을 읽을 기력이 없을 때가 많았다. 신문만 점점 쌓여가고, 신문을 보관하는 공간이 부족하기에 가족들의 원성만 높아져갔기 때문이다. 디지털 신문의 장점은 원하는 과거의 기사를 검색하여 효율적으로 찾아볼 있다는 점이 내게는 가장 장점으로 보인다. 반면  1면부터 종이를 넘기며 훑어보게 되는 아날로그 신문에서 나는  새로운 사건, 흥미로운 책이나 행사에 관한 정보, 사회의 이슈들을 우연히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올리버 색스의 도서관 경험과 비교하긴 힘들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신문을 훑어보면서 관심이 가는 부분을 줄을 쳐가며 읽고, 스크랩하였고, 관련된 책을 찾아보거나 사회의 현상에 의문을 가져보던 때가 나의 호기심이 최고로 성장했을 때였다. 새로운 생각거리, 지식 습득의 기회를 만들게 되는 우연한만남이 아날로그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가능했다. 자신의 관심과 호기심에 따라 산책하고 소요하는 과정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나는 아날로그 매체와 디지털 매체 사이의 우월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가 내게는 전혀 다른 매체로 다가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매체는 서로가 갖는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 보완적일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이유로 내가 메모지에 아날로그 에피파니 적어두었던 것인데, 한동안 잊고 있다가 올리버의 책을 읽다가 다시 이러한 에피파니 순간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나로서는, 도서관에서 책은 물론 정기간행물까지 사라진 대해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물리적인 책에는 대체될 없는 무엇, 겉모습, 향기, 중량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67)  

 

서로 보완적일 있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방식을 함께 구비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이라는 명목 하에 아날로그 매체를 곧바로 폐기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까. 올리버 색스도 정기간행물과 책의 물성이 우리 몸과 상호작용하며 각인되어버린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아울러 물성을 가진 매체를 통해 호기심을 불러내는 우연한만남의 가능성을 상실해버린 허탈감을 말하려 했을 것이다. 책을 읽는 강력한 즐거움은 많은 책을 읽는 것에 있지 않다. 나는 중년이 되어 좀더 진지하게 독서를 생각하면서, 많은 책을 읽고 싶은 생각에 조바심을 적이 있다. 이제는 주변에 책을 많이 읽었다고 은근히 자랑하는 이들을 보아도 부럽지 않게 되었다. 늦게 독서를 시작한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어온 독서가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는 노릇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올리버 색스처럼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저작을 우연한기회에 발견하고 인생의 ’,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만나는 경험을 소망하게 되었다. 느릿느릿 소요하며 좋아하게 혹은 흥미를 유발한 책들을 우연히 만나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나아가 저자의 존재를 느끼며, 책을 읽고 읽음으로써 온전히 나의 것이 되는 경험을 있기를 바란다. 디지털 매체를 통해 정보를 효과적으로 찾아내고, 화면을 통해 어디서든 수많은 책에 접근할 있을 몰라도, 디지털 매체를 통해 우연한 만남, ‘에피파니 순간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에 디지털 매체와 다른 아날로그 매체만의 고유한 성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인들이 최상의 혜택을 얻기위해서는 아날로그 매체와 디지털 매체를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이해하고   매체들이 공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매체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디지털 매체가 아날로그 매체를 대체하는 성격이 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여기에 새로운 지식과 지혜에 대한 우연한 만남, 그리고 에피파니 순간이 아날로그 매체에만 예비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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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부스의 유럽 육로 여행기 - 동화 속 언더그라운드를 찾아서
마이클 부스 지음, 김윤경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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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부스의 유럽 육로 여행기

(원제: Just As Well I’m Leaving: To the Orient with Hans Christian Andersen)

마이클 부스(Michael Booth) 지음 |  김윤경 옮김 |  [글항아리]



어린 시절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이야기를 듣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어릴 그림동화책을 읽었던 기억으로 다시 완역된 동화를 읽어보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경우가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아도 상당히 잔인해 보이는 사건들이 즐비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어릴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진 그림동화책에는 물론 이런 이야기들이 제외되었을 것이다. 영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마이클 부스의 경우도 나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같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가지 환경적인 요인과 개인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정말 안데르센의 발자취를 찾아나섰다는 것이다.

 

여행기의 저자 마이클 부스는 배우였던 덴마크인 배우자를 따라 덴마크로 이주하게 되면서 모든 사건을 예비하게 된다. 덴마크어 어학원에 다니며 과제로 나온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읽은 부스는 경험처럼 과연 안데르센의 동화가 이런 배경과 맥락을 갖고 있었나하는 깨달음과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던 모양이다. 물론 동화 자체에서 시작한 관심은 물론 작가인 안데르센 인물 자체로 옮겨간다. 안데르센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를 맞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사람과 분리하여 생각할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안데르센은 꾸준히 일기를 썼기에 후대 사람들이 안데르센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더욱 이해할 있게 되었다. 부스는 안데르센이 1842년에 출간한 시인의 바자르 A Poet’s Bazaar라는 여행기를 읽고, 안데르센이 여행했던 발자취를 따라가보기로 결심한다. 평생 여행을 다니고 여행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다시 여행을 꿈꿨던 안데르센의 발자취를 따라 계획을 세우며,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의 끼를 발산할 궁리를 하게 것이다. 책에서 부스는 덴마크의 코펜하겐을 시작으로 유럽의 7개국 8 도시를 안데르센의 기록에 따라 방문해나가고 있다.

 

 

안데르센의 여행 중독 혹은 배경

 

글로 성공을 하게 안데르센이 자신의 돈을 모두 부어 일이 바로 여행이었다. 안데르센이 좋아한 독일의 문호 하이네와 괴테가 오랜  여행을 글로 남겼듯이 안데르센도 숱한 여행을 하며 이를 글로 남겨놓았다. 당시에는 이미 문호와 좋은 가문의 귀족들이 유럽을 여행하는 그랜드투어 이미 유행했을 터이고, 안데르센도 이런 여행을 꿈궜을 것이다. 각국을 다니며 왕과 귀족을 만나고 친분을 넓히고 교류하는 , 생각만 해도 근사하다. 다만 단순히 안데르센이 성격상 여행을 좋아한다거나 여건이 되었기에 떠난 같지는 않다. 부스는 안데르센이 남긴 일기와 여러 서신 등을 통해 여행을 떠났던 동기에 주목하고 있다. 지극히 귀족 중심적이고 배타적인 덴마크 지식인 사회를 견디기 힘들어 했던 정황을 저자는 더욱 파고든다. 당시 덴마크 지식인들은 듣보잡노동자 출신이었던 안데르센의 글에 대해 혹독한 비난을 했었고, 인정욕구가 무척이나 강했던 안데르센에게는 좁은 우물에서 비난이라는 직격탄 세례를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부스의 평가대로 안데르센의 여행은 불행의 도피처 되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폭발적으로 넓혀주었던 계기가 되었던 같다.  

 

순간을 소비하고 모든 것을 보려고 애쓰며 항상 쉬지 않고 움직인다.”(301)

 

, 여행, 여행이란! 가장 행복한 운명이다! (…) 그렇다, 여행은 우주 만물의 강박 현상이다.”(63)

 

지금처럼 여행이 쉽지 않은 19세기에 안데르센은 모든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욕으로 여행에 임했음을 짐작할 있다. 덴마크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또는 상영된 자신의 연극에 대한 비난과 거리를 안데르센은 타국에서 유명인사를 만나기도 하며, 자신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환대를 받는다. 여행 중에는 생소한 장소와 환경에서의 익명성을 통해 타자가 되어버린 고립감을 극복하기도 하며 여행을 했다. 마이클 부스는 자신의 특기인 유머와 위트로 새로운 장소에서 좌충우돌하며 안데르센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 여기서 안데르센 자신이 남긴 자서전과는 다른 3자의 시선에서 안데르센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다 분명히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여행은 분명히 안데르센에게 다른 학교이자 자신의 숨을 쉬게 해주는 구원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넓은 세상을 자신의 학교로 삼았던 안데르센은 여행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찾을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여행은 자신의 심기증과 까탈스러움,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경험하고 싶은 기회, 심지어 성적흥분까지도 느낀다고 기록할 정도로 그에게 여행이란 안데르센이라는 인물을 만들어준 하나의 정체성이라고 있다.

 

 

안데르센이라는 인간을 다시 생생히 그려내다

 

안데르센은 거의 평생 혼자인 살았어요.”(360)

 

마이클 부스가 안데르센의 여행 경로를 따라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했을 , 부스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심리학자 미르토의 말이다. 그녀는 안데르센의 고독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부스가 그려내는 안데르센은 너무나 독특하고 복잡한 인물로 보인다. 그가 그려낸 안데르센이라는 인간은 귀족도 아닌 노동자 집안 출신으로 스스로 자신의 길을 부단히 개척했던 사람, 언제나 인정욕구에 메말라 있고 허영심이 대단하면서도 겸손하기도 했으며, 심각한 심기증을 갖고 있던 사람, 성적으로 모호한 잠정적 양성애적 성향을 갖고 있던 사람이다. 말만 들어도 단순하지 않아보이는 안데르센은 글쓰는 재능과 같은 장점 외에 수많은 단점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부스는 그를 애정어린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다.

 

안데르센이 형식에 참신한 문학적 상상력과 미묘한 재치를 가득 더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이야기 수집가도 해내지 못한 , 다시 말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을 해냈음을 알게 되었다.”(37)

 

과거의 인간을 이해한다는 말은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긍정한다는 의미이기도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장점과 단점( 판단 기준 자체도 영원한 것이 아님에야) 모두를 인정하고 사회의 규범이나 도덕을 사람에 대한 결정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거나 강요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어떤 사람을 이해한다는 말은 쉽지만 말의 무게에 걸맞게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마이클 부스는 안데르센이 했던 여행기를 읽고, 경로를 따라가며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마이클 부스는 안데르센의 면모를 군데군데에서 재미있게 표현하면서도, 복잡한 인물의 속내를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면모를 균형있게 지적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신경증에 걸린 공주와 자만심이 강한 쇠똥구리, 사랑에 우는 인어공주, 미운오리 새끼를 하나로 합쳐놓은 인물이었다.”(51)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인생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친 주머니에 것을 꺼내 놓으라고 사람이었다. 그는 100퍼센트 자기 의지로 행동한 인물로서, 유년 시절의 가난과 (제독과 국왕들의 전유물이었던) 국제적 명성이라는 눈부신 사이에 놓인, 극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장애물들을 차례차례 해체해 나갔다.”(172)

 

원래 안데르센은 동화작가가 아니라 희곡작가로 성공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희곡작가보다는 위대한 동화작가로 후대에 남아있는 그는 사실 우리가 주로 어린 시절 동화책을 접하기 때문에 성인이 일반 독자들의 정당한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측면도 무시할 없다. 올해는 안데르센이 14살의 나이에 뜻을 세우고 성공하기 위해 코펜하겐으로 입성했던 1819년도 부터 정확히 200년이 되는 해이다. 유명 발레리나를 찾아가 무턱대고 앞에서 춤을 추다가 쫓겨난 이야기나, 덴마크 물리학자 외르스테드의 도움으로 자신에게는 2 아버지가 되는 자선가 요나스 콜린을 만나 교육을 받을 있게 이야기, 그리하여 자신의 인생을 역전할 계기를 만든 이야기들  각각은 에피소드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오늘날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공장에서 규격품을 만들어내듯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키워내는 우리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안데르센이 살았던 삶에는 분명 누구나 흉내내기 힘든, 것의 삶이 그대로 베어있다. 안데르센은 자신의 상상력 속에서 살아가고 자신의 꿈을 이루어간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마이클 부스의 에피소드들

 

책을 읽는 재미는 분명히 마이클 부스가 새로운 장소에서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따라가는데 있다. 저자는 낯선 도시에서 현지 사람들과 부대끼고, 때로는 이들의 불친절함에 소심한 복수를 계획하기도 하며, 때로는 유곽을 찾아가서 안데르센의 성적 취향을 궁금해하는 솔직함과 천진난만함을 보여준다. 그뿐만아니라 로마에서 덴마크 대사와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쫓겨난 대한 소심한 복수로, 로마에 방치되다시피 크누트 예배당(덴마크 성인을 기념하는 예배당) 관리 실태에 대해 비난을 하기도 한다. 불친절한 카페 종업원에 대한 복수로 독자에게 카페 주소를 공개하며 여기를 지날 소변을 보라고 것에서도 저자의 유머를 충분히 발견할 있다. 물론 부분에서 다소 과장된 유머가 있거나 혹은 문화적인 차이로 정확히 전달이 안되는 부분이 보이긴 하지만, 부스는 안데르센의 여행 경로를 따라가며 인물의 면모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점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나아가 모든 과정은 안데르센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여행 중에 저자가 기록해 놓은 생각들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한다.

 

500페이지가 넘는 여행기이긴 하지만 마지막 다뉴브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어머니와 조우한 다뉴브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의 에피소드는 다소 지친 마음을 충분히 보상해줄만큼 재미있다. 작가가 재미있게 각색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선상에서 부스와 어머니가 나누는 대화만 보아도 작가의 어머니 또한 작가 못지않은 유머와 위트가 있는 같다. 한편 안데르센은 로마는 나를 아름다움에 눈뜨게 해준 곳이다라고 로마에 대한 가치와 호감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부스는 로마를 방문하여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다. 안데르센에게 만족스러움과 흥분을 가져다준 이탈리아, 특히 로마에서의 경험과 부스가 안절부절 못하고 불편해하며 소심한 복수까지 하는 장면을 비교하여 읽다보면 흥미로웠다. 부스의 여행기는 독특한 입담과 유머로 재미있는 여행기를 남긴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마이클 부스처럼 히데오 역시 일본 혹은 한국을 비롯하여 주변국을 여행하며 사회를 관찰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재치있는 에세이를 남긴 있다.

 

거의 2세기 전에 안데르센이 자신을 이해해주지도 받아들여주지도 못하는 고국을 떠나 여행을 시작했던 것은 한편으로는 고생길의 시작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운명의 길을 열어주었다. 안데르센이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고향 오덴세를 떠나 코펜하겐에 입성한 이후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행은 익숙한 것과 결별하는 의식이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인식의 지평선을 확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확장의 폭은 사람마다, 어떤 경험과 지식을 얻고, 어떤 사유를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여행과 다른 점은 새로운 장소, 새로운 문화 유산을 접하는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이들과 교류하는 점이 다른 같다. 오늘날의 여행을 지식의 성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데,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은 다른 차원에서 여행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기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관점에서 부스가 안데르센을 따라가며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한 여행이 우리에게 보다 흥미를 주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배우자의 고국에서 살기위해 익숙한 영국을 떠났던 부스가 안데르센의 발자취를 따라 다시 덴마크를 떠난 것만 보아도 부스는 안데르센 못지않은 노마드가 아닐까. 끝으로 안데르센이라는 복잡하고 흥미로운 인물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면, 안데르센 자신이 남긴 상당한 양의 자서전과 함께 마이클 부스의 여행기를 함께 읽어보면 좀더 입체적으로 인물을 이해해볼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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