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물보라 여인숙(The Spouter-Inn)

 

모비 마라톤’ - 모비 3 천천히 읽기

 

[3장의 기본 줄거리]

추운 겨울 저렴하게 잠잘 곳을 찾아 전전하던 이슈메일은 물보라 여인숙이라는 음침하고 바람이 들이치는 여인숙에 들어간다. 불길해보이는 유화와 거대한 고래 턱뼈가 장식된 현관을 지나 술청(public room) 들어간 이슈메일은 성경에서 저주받은 요나(Jonah)’ 같은 이름을 쓰는 여인숙 주인에게 하룻밤 묵을 방을 요청한다. 마침 방이 모두 있어서 요나는 이슈메일에게 침대가 있는 방에서 작살잡이와 침대를 쓰라고 권한다. 추운 겨울 이상 여인숙을 전전할 없어 이를 수락하게 된다. 커다란 침대에서 잠들 무렵 찾아온 퀴퀘그라는 이름의 작살잡이는 식인종이었다. 와중에 이슈메일은 여인숙 주인 요나의 중재로 퀴퀘그에 대한 편견을 깨고 침대에서 단잠을 자게 된다.

 

 

3장의 주요 사건은 이슈메일이 물보라 여인숙에 들어가 곳을 찾는 과정에서, 우연히 침대에서 밤을 보내게 되는 식인종 작살잡이 퀴퀘그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퀴퀘그는 남태평양에서 작살잡이로 몸에 문신을 고래의 향유로 처리한 뉴질랜드 원주민의 머리를 팔러 나간 상황이었다.모비 놀라운 점은 소설의 중간중간에 지금부터 170 정도 전의 작가가, 백인들이 사람의 피부에 대해 갖고 있던 보편적인 사고 방식과 확연히 다른 에피파니(순간에 다가오는 깨달음 같은 ) 순간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가 미지의 작살잡이에 대해 부당한 편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잠시만 기다려보자.”(51)

 

식인종에게 붙들려 강제로 문신을 당했다는 어느 백인-그도 역시 고래잡이였다- 이야기가 기억난 것이다. 작살잡이도 바다를 항해하다가 그와 비슷한 일을 당한 분명하다고 나는 결론지었다. 결국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것은 그의 표면일 뿐이다. 사람은 어떤 피부를 가졌든 관계없이 정직할 있다.” (56)

 

이런 생각들을 노예제가 존재하던 시기에, 그것도 백인의 집단에 있던 사람이 으레 있는 사고는 분명 아닐 것이다. 이슈메일이 잠시만 기다려보자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순간이 바로 에피파니의 순간이며 반성적 사고의 순간일 것이다. 멜빌은 내가 내린 결론, 내가 판단이 과연 옳은가라고 반문할 아는 소양을 갖춘 인물이다. 그렇다고 해도 당시에 백인 작가가 사람은 피부색과 무관하게 정직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1장에서 세상에 노예가 아닌 사람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던 것처럼 당시의 시대 상황 속에서 놓고 , 상당한 논란의 여지를 남겼을 같다. 하지만 작가 허먼 멜빌은 어떤 사람인가. 몰락해버린 자신의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지금으로 말하면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에 거친 바다로 나가 배를 타기로 사람이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1장에서 언급한 있는 대가를 받은 에는 신분이나 피부색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가난한 이들이 당시 경제 공황의 여파로 더욱 극심한 곤궁 속에서 살아가던 , 젊은 남자들이 있는 일로서 배를 타는 일은 나름의 보상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충족시켜줄 창구가 되었을 것이다. 멜빌의 경험은 당시에 많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경험을 했으며, 멜빌과 같은 성찰적인 사고를 있는 이들에게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도 놀랍고 한편으로 귀담아 들을 만한 지혜를 모비 통해 우리에게 남겨놓았다고 있겠다.

 

소설을 읽다가 흥미로운 부분은 무언가 불쑥 지나가듯 작가가 자신의 의식을 문장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마침내 문신으로 가득한 새로운 룸메이트 퀴퀘그가 등장한 , 이슈메일은 그의 몰골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친다. “결국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것은 그의 표면일 뿐이다.”(56)라고 말하는 것이다. 원서의 표현으로는 ‘outside’ 번역자는 표면으로 옮겼다. 결국 상대방의 겉모습 보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멜빌의 판단이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소설 속의 이슈메일은 온전히 멜빌의 분신은 아니기에 일반적인 백인의 편견을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 3장에서 화자인 이슈메일이 퀴퀘그라는 인물을 만나면서 백인들의 시선을 보여주며 멜빌의 인식과 처음으로 충돌하고 있는 장이기도 하다.

 

(퀴퀘그) 30 전쟁에 참전했다가 속옷 대신 고약을 처바르고 전쟁터에서 방금 탈출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다리도 짙은 초록색의 청개구리 떼가 어린 야자나무 줄기를 뛰어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얼룩덜룩했다. 그가 남양에서 포경선을 타고 기독교 국가에 상륙한 혐오스러운 야만인인 것은 이제 분명해졌다.”(58)  

 

백인들의 사회, 특히나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는 미국과 같은 서양 문명의 사람들이 이교도를 바라보는 무의식적이고 일반적인 시선으로 이해할 있겠다. 따라서 다시 정리해보면 3장에서는 새로운 인물 하나를 자연스럽게 소개하면서 등장 인물의 면면을 재미있는 에피소드 속에서 보여주며, 동시에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만남을 준비한 장이다. 상징적으로는 서양 문명에 속한 사람과 비서양 문명의 사람이 만나는 자리, 이들의 삶과 문화가 충돌을 시작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의 만남에서 우여곡절 끝에 사람이 같은 침대에서 단잠을 자며 마무리하는 모습은 재미있는 장면이면서도 의미심장하다. 특히나 이슈메일이 여인숙의 현관에 있던 거대한 턱뼈를 통과하여 들어온 것을 떠올려본다면, 둘은 마치 거대한 괴물 리바이어던, 혹은 성서에 나오는 요나의 이야기처럼 고래 뱃속에서 이루어지는 서구인과 비서구인의 만남, 우정이 시작되는 장면이라고 바라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부분은 다시 말하면 저자가 자신을 소설 속에서 불쑥 드러내는 부분인데, 3장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퀴퀘그) 나와 똑같은 인간이야. 내가 사람을 두려워했다면, 같은 이유로 사람도 나를 두려워했을 아닌가. 술에 취한 기독교도보다는 취하지 않은 식인종과 함께 자는 나을지도 몰라.”(61)

 

170 가까이 과거에 이러한 말을 있었던 것도 놀랍지만, 부분도 멜빌이 자신이 남태평양 마르키즈 제도의 식인종족 타이피족과 수개월간 생활했던 경험이 없었다면 이런 문장은 나올 없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멜빌은 함께지내던 타이피족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탈출했다고 하는데, 그의 이러한 경험을 고려한다면, 문장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게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멜빌 자신의 목숨을 경험을 통해, 그리고 살아남았기에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문장을 나는 좋아하게 되었다.

 

 

식인 풍습과 야만 대한 시각

 

우리가 고전이라고 하는 작품을 읽다 보면 은연중에 지나치는 부분이 바로 식인 풍습 관한 사항을 만나게 되곤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분은 내게 흥미를 주는 주제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수록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정체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멜빌은 135장이나 되는 소설의 앞부분인 3장에서 이미 퀴퀘그라는 식인종 등장시키고 있다. 게다가 퀴퀘그가 밤늦게 돌아다니는 이유가 고래의 향유로 처리를 뉴질랜드 원주민의 머리를 기념품삼아 백인들에게 팔러다니고 있다는 설정은 독자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무척이나 자극한다. 나는 부분에서, 그리고 3장의 마지막 부분, ‘술취한 기독교도보다 멀쩡한 식인종과 침대에서 자는 것이 낫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수상록 몽테뉴를 떠올렸다. 분명하게 예상해볼 있는 사실은 멜빌도 몽테뉴의 수상록 읽었다는 점이다. 모비 표지 다음에 바로 나오는 어원편을 지나 발췌록 보면 멜빌이 수상록 읽고 고래 관해 언급한 부분을 발췌한 부분이 나온다.

 

짐승이든 배든, 다른 것들은 모두 괴물(고래) 아가리, 무시무시한 심연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당장 삼켜져서 모습을 감추지만, 오직 바다모샘치만은 그곳으로 안전하게 물러가 잠자리로 삼는다.(14, 재인용)

[미셸 몽테뉴의 에세(수상록) 수록된 레이몽 스봉의 변호’]    


지금 부분을 다시 읽어보면서 떠오른 생각은 3장에서 이슈메일과 퀴퀘그가 여인숙의 침대에서 자게 되는 에피소드는 마치 부분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여인숙에 있던 고래의 턱뼈를 통과하여 여인숙 내부(고래 뱃속) 들어간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바다모샘치마냥 고래의 심연에서 안전하게 잠자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심연이라고 하는 장치는 무지와 죽음의 세계를 상징할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 근원적인 공포를 주는 개념의 한가운데에서 이슈메일과 퀴퀘그는 마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것을 맹세하는 부부처럼 침대에서 우정을 나누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심지어 여인숙의 주인장 별명을 요나라고 설정해둔 것도 생각을 더욱 그럴듯하게 하지 않은가.

 

잠시 옆길로 빠졌지만 다시 식인의 풍습으로 돌아오면, 몽테뉴 역시 흥미로운 점을 기록하고 있는 대목이 나온다. 몽테뉴의 수상록(동서문화사판, I, 218면부터)에는 식인종에 대하여라는 항이 있는데, 스키타이 족을 예로 들면서 이들 전사 각자는 자기가 죽인 적의 머리를 전리품으로 가져와 자기 문에 매달아 두는 습속을 언급하고 있기도하다. 마치 남태평양의 식인부족에서 서양문명을 보기위해 자신의 부족을 떠나왔던 퀴퀘그의 행동처럼 말이다. 물론 스키타이 족의 행위는 몽테뉴가 지적하고 있듯이 먹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극단적인 복수를 보여주기 위함이긴 하지만 말이다.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유럽에 발을 들여놓은 식인종 3명과 만나 대화하는 대목이 나오는데(이후에 정확한 부분을 찾게 되면 다시 언급해보겠다), 이들과 대화하며 이들을 야만인으로 보기보다는 다른 풍습을 가진 이들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알아낸 사항들을 기록한 대목도 있다. 멜빌이 모비 쓰면서 읽었던 수많은 책들과 자신의 30 상당시간을 보낸 바다에서의 경험을 통해 몽테뉴의 책을 읽고 공감하는 바가 많았을 것같다. 수상록을 다시 들쳐보며 눈에 띄는 부분은 몽테뉴가 사람들이 자기 습관이 아닌 것을 야만적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들을 야만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이 그 자체로 여느 상태로 나가며 이루어 놓은 성과를 야만이라고 부르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오히려 우리의 기교로 사물을 그 평범한 질서에서 틀어 변경해 놓은 것들을 차라리 야만이라고 불러야 할 일이다.

[미셸 몽테뉴의 수상록, (동서문화사, 222) ‘식인종에 대하여’]    

이 표현이 다소 어려운 듯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당히 흥미롭고 놀라운 표현이다. 마치 현대를 살고 있는 내게 나의 편견을 지적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 그대로의 것, 문명화되지 않은 것을 야만이라고 부르고 있던 것인데, 몽테뉴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과연 야만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게 해주고 있는데, 몽테뉴는 자연의 순리대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을 인간의 잔꾀와 기술로 이 자연의 질서를 변경시키는 것이 오히려 야만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반문하고 있다. 허먼 멜빌이 수상록을 읽다가 이 부분에서 자신의 작고 깊은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기지 않았을까 싶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몇몇 고전을 읽으면서 발견하게되는 인류의 식인풍습에 대해서 점점 관심이 많아지게 되었다라고 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나치 정권의 유대인 학살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사실 번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대 유대교의 풍습에서 어린아이를 제물로 삼아 불에 태워 신에게 바치는 의식으로서의 번제말이다. 이를 히틀러의 나치는 자신들의 민족주의와 결부시켜 만들어낸 유대인 학살로서의 의미로 사용했는데, 이 용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결국에는 인류의 유아살해 내지는 식인풍습의 흔적과 만나게 된다.

 

식인풍습과 관련하여 동양의 기록도 보인다. 청나라를 수개월간 여행하고 《열하일기》(1783)를 남겼던 박지원 선생도 중국 도사들이 어린 아이를 먹는 풍습에 대해서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열하일기》에서 재미있는 부분만 많이 접할지 모르지만, 박지원 선생은 여러 군데에서 이 식인풍습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여러 자료와 함께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다시 고민을 해볼 생각이다. 식인풍습은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할 때 한번쯤 만나게 되는 주제가 아닐까한다.  

 

 

여인숙 현관에 있는 그림이 주는 불길한 전조와 숭고미

 

3장에서 이슈메일이 물보라 여인숙 현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발견하는 것이 한쪽 벽에 걸려있던 커다란 유화 이었다. ‘불가사의한 그늘과 그림자들의 집합체 보였던 그림의 정체에 대해 이슈메일은 궁금증을 갖는다. 마치 마녀 시대에 야심 있는 젊은 화가가 저주받은 혼돈의 세계를 나타내려고 듯한 그림, 정체불명의 그림을 유심히 뜯어보는 장면이 페이지 넘게 지속되고 있다. 마치 괴물과도 같은 무언가 길고 유연하고 불길해보이는 검은 덩어리 가닥의 푸르고 희미한 수직선 위에서 떠돌고 있는 형상에서 이슈메일은 상상할 없는 숭고함 있다고 까지 말한다. 그림의 정체에 대해 더욱 궁금해진 이슈메일은 여러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만 그가 생각하는 화가의 의도를 정리하면 다소 불길한 내용이다. 이슈메일의 해석은 곶을 돌다가 허리케인을 만나 좌초한 배의 돛대에 성난 고래 마리가 선체를 뛰어넘으려다가 돛대에 꽂힌그림이라는 것이다. 황당하기도하고 기발하기도 이슈메일의 평가는 결국 무서운 장면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마치 소설의 방향이나 결말과 관련이 있는 불길한 전조가 아닐까 생각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슈메일이 여러 공상을 하며 그림의 의미를 알아내는 과정은 마치 스위스 정신과 의사가 개발했다는 '로샤(Rorschach) 테스트'를 닮았다. 오늘날 검사 방법이 얼마나 신뢰성을 얻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추상적인 그림을 보고 자유 연상을 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심리적 특성을 알아낼 있다는 것이 검사의 목적일 것이다. 정체불명의 , 신의 섭리에 의해 이슈메일이 바다로 다시 나가게 1장의 사연을 떠올린다면 멜빌이 3장의 시작을 정체모를 유화에다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는 것은 소설의 기본적인 전말에 대한 저자의 의도를 추측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한편 멜빌이 사용한 숭고함(sublimity)이란 개념에 주목해 보게 된다. 용어 뒤에 숨어 있는 역사적 맥락은 연구해볼만할 주제라는 생각을 적이 있다. 우리가 숭고함이란 단어를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는지 떠오르는 대로 언급해보자면, 나는 우선 니체가 알프스 산맥의 실즈 마리아에서 보았다는 거대한 구름바다를 떠올리곤 한다. 니체가 영원회귀사상을 떠올렸다는 알프스 산맥말이다. 동시에 독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가 그린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 떠올리곤 하는데, 바로 인간이 대자연 앞에 섰을 느끼는 그런 압도감과도 같은 것일까 생각해본다. ‘숭고미 대해 미학자들이 책을 쓴다면 아마도 권을 써도 모자를 같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790) 유명한 영국 보수주의의 기수 에드먼드 버크는 숭고 개념과 미학적 개념에 대해서 저서(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남긴 것으로 알고 있다. 멜빌은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저서와 숭고미에 대한 저서를 읽지 않았을까 상상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숭고함이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아마도 버크의 저서에 나와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 버크의 저서들을 읽어보진 못했으므로, 서적들은 앞으로 내게 남은 숙제가 될터이다. 멜빌은 모비 집필하면서, 그리고 20대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보내면서 망망대해에서 거대한 해양동물과 마주친 경험, 자연의 숭고함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을 다시금 기억해 냈을 것이다.         

 

모비 3장은 다소 편이다. 하지만 멜빌은 소설이 나아갈 불길한 전조에 대한 짤막한 암시와 새로운 등장인물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제시해주고 있는 장이기도 하다.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멜빌의 글쓰기 방식은 불쑥불쑥 저자 자신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부분을 조규형 교수는 영미 문학, 어떻게 읽는가: 감성과 실천(2019)에서 사건의 전개와 더불어 이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로 구성되어 있다’(196)라고 정리한다. 결국 이슈메일의 입을 통해 멜빌의 사유가 드러나는 대목을 나는 좋아하게 되었다. 엄청난 독서량을 통해 고래와 포경업에 관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망라한 부분을 앞으로 지나게 것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부분을 되풀이해서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기록해 두려는 사항은 모비 읽으며 내가 반응한 흔적을 입자 검출기처럼 기록해두자는 것이다. 생각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자연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이를 들여다볼 것이다. 마치 멜빌이 모비 집필하면서 그랬을 처럼 말이다.  

 

 





[참고도서 자료]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Moby-Dick or, The Whale, Herman Melville, [Penguin Classics]

수상록(I), 미셸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동서문화사]

영미 문학, 어떻게 읽는가: 감성과 실천, 조규형 [세창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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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1-08-14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미문학 어떻게 읽는가_는 어때요? 초란공님

초란공 2021-08-14 08:51   좋아요 1 | URL
제 기억으로는 평론가들처럼 어렵게 쓰지 않아서 저는 좋았습니다. 다만 책이 두께에 비해 작품을 여럿 다루기 때문에 글이 좀 짧다고 느꼈다랄까요. 좀 더 길었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아쉬웠어요.

수이 2021-08-14 09:33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찾아볼게요 ^^
 


모비 마라톤’ - [2] 여행가방(The Carpet-Bag)

 

지난 1장을 읽고 두서 없는 글을 보니 앞으로 어떤 식으로 써야할지 걱정스럽긴 하다. 다시 변명을 해보자면 앞으로 적어 나갈 나의 독후 기록들은 결국 그때 그때 모비 천천히 다시 읽으며 내가 반응한 결과의 모음일 뿐이다. 훗날 글을 보고 유치한 생각들에 새삼 부끄러움이 든다면 나름대로 의미있지 않을까. 그동안 그만큼 생각이 달라지거나 자라났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아무튼 이러한 작은 바람을 가지고 계속 해보려고 한다.

 

지난 1장을 다시 떠올려보자면 1장은 독자가 쉽게 지나칠 있지만 중요한 정보들을 많이 담고 있다. 소설의 화자인 이슈메일의 내러티브가 곧바로 시작하며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 공간적인 정보를 풀어 놓는다. 1장의 제목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에서도 암시하고 있듯이 자신이 고래잡이배를 타려고 바다로 향하는지에 대한 동기를 설명하는데, 물이 내포하는 근원적인 마력을 포함하여 자신이 책임 있는 자리가 아닌 일개 선원으로 배를 타려는 이유에 주목해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고래잡이 배를 타려고 하고 당시에 포경업의 주도권을 육지에 있는 뉴베트포드에 건네주고 쇠락해가는 낸터킷 섬에서 굳이 출항하려는 이유를 신의 섭리 기대고(청교도적인 배경을 찾아볼 있다) 있기도 하다. 아울러 1장을 마무리하며 멜빌은 덮인 거대한 산처럼 거대한 유령 같은 고래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있는 대목에서 소설 전체의 방향, 소설의 어조를 어떤 느낌으로 설정할 것인지를 살짝 드러내고 있는 같다. 특히나 주는 공허함, 무지 혹은 무지에 대한 공포, 숭고함, 불가항력적 신비와 섭리와 같은 이미지와 오버랩되며 모비 딕의 숨결을 미리 느끼게 해주고 있다.

 

2장의 줄거리를 간단히 정리해본다. 이슈메일은 맨해튼을 떠나 코넥티컷주 뉴베드퍼드에 도착했다. 때는 12월의 어느 겨울 , 매서운 추위로 유명한 미국 동부의 겨울 밤이었다. 이슈메일은 당시에 포경산업의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기 시작하며 번성하던 뉴베드퍼드에서 고래잡이 배를 있었지만, 이제는 쇠락해가던 낸터킷 섬으로 건너가서 고래잡이 배를 타기로 결심한다. 이슈메일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낸터킷은 오랜 역사를 지닌 포경업의 발상지이며, 미국에서 최초로 고래의 시체가 해안에 떠밀려 이었다. 게다가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통나무배를 타고 고래를 잡으러 처음 출격한 이었다. 실제로 멜빌이 20 초반에 포경선을 탔을 뉴베드퍼드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낸터킷 주민이자 작가인 너새니얼 필브릭(Nathaniel Philbrick) 사악한 , 모비 보면, 멜빌이 낸터킷 섬에 대한 묘사를 보면 낸터킷 섬에 와보진 않았으리라 말한다. 따라서 멜빌의 경험은 뉴베드퍼드에서 출항한 것에 기반하지만, 소설 속의 극적인 묘사를 위해 자신만의 낸터킷섬을 구상했으리라 보는 편이 설득력이 있다.

 

다시 줄거리로 돌아와서 늦은 밤에 도착하여 낸터킷섬으로 떠나는 배를 놓친 이슈메일은 이틀밤을 머물고서야 다시 낸터킷섬으로 떠나는 배를 있기에, 가벼운 주머니를 의식하며 저렴한 숙소를 찾기 시작한다. 흑인 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군데를 전전하다 이슈메일이 발견한 여인숙은 피터 코핀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물보라 여인숙이었다. 코핀이 뜻하기도 한다는 것을 멜빌은 다시 일깨우며 소설의 불길한 전조를 예고하는 듯하다. 2장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슈메일이 여인숙에 들어와서 겨울 외풍이 휙휙 느껴지는 초라한 여인숙에서 옛날 어느 작가가 남긴 말을 떠올린다.

 

유로클리돈이라는 폭풍에 대해서 생각할 , 바깥쪽에만 성에로 덮인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느냐, 아니면 안팎에 서리가 내려 있고, 민첩한 죽음의 사자만이 유리를 끼울 있는, 창틀도 없는 창문으로 밖을 관찰하고 있느냐에 따라 놀라운 차이가 있다.”(42)

 

붉은 비단옷으로 몸을 감싼 부자 영감 다이비즈는 말하겠지. 유로클리돈?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서리가 내려서 정말 멋진 밤이군. 오리온자리의 별들은 얼마나 밝게 빛나는가. 북극의 오로라는 얼마나 아름다운가!”(42)

 

옮긴이의 주석에 따르면, 유로클리돈은 지중해의 강한 북동풍으로 매섭고 차가운 바람을 의미할 테다. 바깥쪽에만 성에로 덮인 유리창은 난방이 되는 방을 뜻할 것이다. 안팎에 서리가 내려 있는 방은 난방이 거의 안되는 외부와 내부의 온도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법한 그런 방을 뜻한다. 따라서 추위로 거동도 하기 힘든 사람이 아닌 죽음의 사자만이 유리를 끼울만한 그런 방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과의 차이를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멜빌은 여기서 인간의 보편적인 습성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따뜻한 방에서 추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별들은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겠는가. 하지만 난방이 안되는 곳에서 추위에 덜덜 떠는 사람들에게는 이럴 겨를이 없다. 흥미롭게도 멜빌은 이슈메일의 입을 머리 속에서 추운 겨울 난방이 안되는 이들이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도를 한다. 혹은 추운 겨울 밖에서 떨고 있을 사람들의 입장을 떠올려보고 있다.

 

하지만 나사로는 무슨 생각을 할까? 푸르뎅뎅하게 손을 웅대한 오로라쪽으로 들어올린다고 해서 손을 녹일 있을까? 나사로는 여기보다 수마트라 섬에 있고 싶지 않을까? 적도를 따라 길게 몸을 눕히고 싶지 않을까?”(42)

 

멜빌은 유복한 상인집안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스코트랜드 , 어머니는 데덜란드 계의 명문가였다. 하지만 멜빌이 성인이 때까지 유복한 집안의 자녀였다면 이런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2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고 가족이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가족은 외가로 옮겨가 살게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멜빌은 우리의 나이로 따지면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생의 나이에 학교를 중퇴하고 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19 상선의 선원으로 바다로 나아가는 멜빌의 삶을 떠올려보면, 청소년기에 거친 사회로 나가 스스로 책임지는 삶을 배워야 했던 그가 바라본 사회의 모습들은 모비 구석구석에 각인되듯 드러나고 있다. 그대로 자신이 난방이 되어 창문 밖에만 성에가 끼어있는 에서 살다가 어느 갑자기 창문 안팎에 서리가 내리는 환경에서 지내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이 멜빌에게 사회의 다양한 층위를 있는 눈을 갖게 해주었던 같다. 멜빌은 사회 구성원 각자가 처해있는 입장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할 아는 작가였고, 그래서 내게는 더욱 놀랍고 새롭게 발견하는 재미를 주는 것이 바로 모비 이기도 하다.  

 

이어 이슈메일은 신발에 얼어붙은 얼음을 털어내고, 물보라 여인숙 어떤 곳인지 알아보기로 하자.”(43)라고 3장의 내용을 예고하며 독자를 여인숙 안으로 끌어들인다.

 



 


[참고도서 자료]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각가정신]

사악한 , 모비 , 너새니얼 필브릭(Nathaniel Philbrick), 홍한별 옮김, [저녁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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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전과 문학 (Luftkrieg und Literatur)

W. G. 제발트 (W. G. Sebald) 지음 | 이경진 옮김 | 문학동네

 

[독후기록-메모]

 공중전과 문학 (Luftkrieg und Literatur) 》을 읽고 메모한 사항들

 


이 책에는 크게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하나는 <공중전과 문학>, 다른 하나는 <작가 알프레트 안더쉬>라는 제목의 글이다. 옮긴이의 소개에 따르면 <공중전과 문학>1997년 취리히 대학의 초청으로 네 번에 걸쳐 작가로서 강연한 내용을 후기와 함께 묶은 것이며, <작가 알프레트 안더쉬>1993년 세계문학 계간지에 발표한 논문을 수록한 것이라고 한다. 우선 배경정보를 비롯하여 익숙하지 않은 이 강연원고와 처음 들어보는 독일 문학 원로 안더쉬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을 담은 읽을 때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40년대에 연합군에 의해 독일의 주요 도시에 대대적인 폭격이 이루어진 전모에 대해 사실 처음으로, 그 실상에 대해 피부로 느꼈다. 일본의 히로시마아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던 원자폭탄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보다 대략 6배 이상되는 사망자를 낸 이 대대적인 폭격으로 전후 독일 시민들의 집단 기억 속에 어떤 모습으로 이 사건이 방치되었는지를 조금 생각해본 기회가 되었다


나는 표면상 독일인들이 그대로 일본인들과는 달리 세계2차 대전 중에 유대인들에게 가한 홀로코스트의 만행에 깊이 반성하고 전후 이를 기억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해온 것으로 이해했으나, 아웃사이더 독일 작가 제발트의 비판과 지적을 통해 전후 독일 사회의 집단 무의식에 어떤 불편함이 있었을지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죄책감을 느끼지만 이를 드러내어 반성하고 후손에게 이야기해주지 않는 독일인들의 행태에 제발트는 염증을 느꼈던 모양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러한 기회마져도 전무하다시피 했다는데 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 <공중전과 문학>에서 제발트는 독일 정신분석학자 미처리히 부부의 표현대로 전후 독일 사회가 애도할 줄 모르는 무능력에 빠져 있었음을 환기시키고, 독일 사회, 지식인들의 행태를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다.     

 

옮긴이의 친절한 설명에 따르면 제발트는 고통의 시대, 절망의 시대에 문학의 본령은 역사적 현실을 기록하고 탐구하고 애도하는 있다고 본다.(209) 정리해준 표현에 제발트의 행방을 가늠해 있겠다. 번째  <작가 알프레트 안더쉬>는 독일 문단의 원로 안더쉬를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다. 국내에서 판매하고 있는 그의 작품과 함께 소개되는 안더쉬의 경력에는 공산당 청년연맹에서 활동하다가 나치 정권에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된이력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력만 본다면 안더쉬는 나치 정권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지성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발트의 눈에 비친 인간 안더쉬는 시대의 상황에 맞게 자신의 유리한 상을 만들어낸 타협주의자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유대인 안겔리카 알베르트를 아내로 맞아 가정을 꾸렸지만, 19422월부터 부인 안게리카와 두 딸과 별거한 후 곧바로 이혼을 강요하여 194336일 이혼 절차를 마무리 한 사건 정황을 들여다보면 안더쉬의 면모를 좀더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안더쉬는 이혼 절차가 마무리 되기 직전인 1943216나치스 제국문예부에 입회하기 위해 신청서를 내며 가족관계 항에 이미 이혼이라고 기재했던 것이다. 제발트에 의하면 입회 구비 서류에는 반드시 배우자 출신증명서가 첨부되어야 했던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안더쉬의 개인적인 재능을 별도로 하고, 안더쉬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나치정권에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된 이력만으로 한 인물을 판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40년대 초에 나치 정권의 권력이 정점에 있을 때, 안더쉬가 내친 유대인 부인 알겔리카와 두 딸의 운명은 제발트의 표현대로 어떤 위험이 닥쳤을지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일테다(160). 이미 19426월에 안더쉬의 장모는 뮌헨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체코의 테레진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돌아올 수 없는 길에 올라 있었다고 한다. 안더쉬의 동생 마르틴 안더쉬도 형에 대해 자신의 개인적 발전을 더 중요시했다(161)는 표현을 사용한 정황이 보이는 것을 보면, 안더쉬라는 인물이 좀 더 다르게 보일 것이다.

 

제발트는 안더쉬에 대한 비판을 마무리하며 한 방 더 먹이고야 만다.

 

안더쉬는 기본적으로 항상 후방에 있는 남자였다. 그러니 1970년대 초에 그가 스위스인이 된 것도 당연한 귀결이다.(193)

문학작품은 내면생활을 감싼 외투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저급한 안감은 어디에서나 드러나는 법이다.(194)  

 

안더쉬가 전후 자신의 소설에서 유대인들을 내세워서 이들의 문제를 드러내려고 노력했는지 모르겠지만, 제발트가 지적하고 있듯이 자신의 온 몸과 마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하지 않은 작품에서 독자의 진심어린 공감을 얻기는 힘들다. 어쩌면 안더쉬의 작품이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 점은 아직 안더쉬의 작품을 읽어보진 않았으므로 내게 주어진 숙제로 기억해 두어야겠다.  

 

끝으로 책의 뒤에 수록된 관련 인물 정보란을 읽다가 놀라운 부분을 발견했다.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마가레테 미처리히, 알렉산더 하르보르트 미처리히에 대한 인물 정보가 담긴 부분에서 이런 표현이 보인다.

1946 연합군으로부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관찰하되 전범 의사들의 집단 책임을 무마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임무를 요구받는다. 그러나 그는 전범 의사들의 책임을 숨기지 않고 기술한 보고서를 제출했고, 보고서는 <인간 멸시의 독재>(1947)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지만 잊혔다.”(225)

 

부분이 내게 암시하는 내용은 연합군 혹은 미군이 일본의 전범 의사들에게도 동일한 논리를 적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나치에 복무한 독일인 의사들이 집단수용소에서 수행한 숱한 인체실험의 결과를 연합국에 전해주는 대신 이러한 요구를 미처리히 부부에게도 했을 같다. 마찬가지로 미군은 일본 731부대에서 행한 잔혹한 인체실험 결과들을 입수하면서 동일한 요구를 하는 움직임은 없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게 것은 미국의 물리학자 맥어웬이 SF소설 <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 Spiral> 그러한 정황이 생각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떠올렸던 내용이었다


공중전과 문학 (Luftkrieg und Literatur)은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다시 환기해주고 있다. 역사는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올 수 있으며, 과거의 역사에서 얻은 교훈이 없다면 역사는 허탈하지만 계속 반복될 뿐이라는 점이다. 과거에서 배운 교훈을 통해 더 낫게 현재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기억이 집단의 기억으로, 집단의 교훈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부끄러운 과거를 다시 조명하고, 해석하고 비판하고 그 함의를 나누고 기록되어 끊임없이 이야기되어야만 한다는 명제를 새롭게 확인해보게 된 계기였다.  




오늘날 이차대전 막바지 몇 해 동안 독일 도시들이 겪은 초토화 규모를 그 절반만이라도 제대로 떠올려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그 초토화의 참상이 어떠했는지를 깊이 생각해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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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비딕

허먼 멜빌 지음  |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1]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Loomings)

 


모비 마라톤 시작하며

 

올해는모비 Moby-Dick 우리에게 남겨주었던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 태어난 200주년 되는 해이다. 중년이 되어 처음 읽어보는 모비 읽으면서 정말 놀라운 책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설에서 주인공인 이슈메일이 고래잡이 배를 타는 코넥티컷 주의 낸터킷이란 섬은 당시에 이미 포경업의 발상지라는 위상만 남기고 산업이 내리막길을 향하던 곳이었다. 현재 낸터킷 섬에서 매년 개최한다는 모비 마라톤이라는 행사의 이름을 따서 (행사에 참여는 못하지만) 나도 모비 다시 읽기 해보려고 한다. 행사에서는 참가자들이 쉬지 않고 일간 모비 읽는다고 하는데, 나는 이와 반대로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135개로 이루어진 () 대한 독후기를 남기는 일을 꾸미게 되었다. 그러므로 모비 읽은 후에는 135편의 독후집을 남기는 일이다. 길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하나의 () 읽으면서 나의 특기인 옆으로 새기, 딴생각하기 모아놓은, 무척이나 쓸모없지만(?) 흥미로운 여행이 같다.   

 

우선 어릴 읽었던 아동문고판 모비 보면 고래나 포경업에 관련한 자세한 지식은 모두 빠져있고, 줄거리만 나와있다. 나는 거대한 장편 소설을 문장으로 어떻게 요약해볼 있을까 생각해본다. 아마  커다란 고래를 스토킹하다가 소설의 화자를 제외한 모든 이가 몰살당한 이야기정도로 정리해볼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전체 작품을 읽는다는 일은 쓸모없어 보이는 부분이라도 저자의 의식을 따라가는 행위이기에 무의미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안개비가 내리는 우산 없이 돌아다니다 어느 순간 옷이 흠뻑 젖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이제 나의 쓸모없는 시도에 대한 의미부여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문장부터 따라가보려 한다.

 

1장에서는 인물과 시작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등장한다. 자신을 이슈메일이라 소개하고, 고래잡이 배를 타러 낸터킷 섬으로 가는 길에 배를 놓쳐 뉴베드포드 항구에 일간 머물러야 하는 상황을 전한다. 여기서 자신이 고래잡이 배를 타러 바다로 왔는지, 그리고 일개 선원으로 지원하는 이유를 비롯하여 화자의 인물됨을 있는 단서를 멜빌은 마련해두었다. 참고로 독후 마라톤의 모든 번역은 작가정신출판사의 김석희 번역가의 번역을 따르려고 한다.

 


 

문장 ‘Call me Ishmael’ 대해

 

언젠가 어느 영문학과 교수님이 번역소프트웨어를 놓고 문장으로 농담을 했던 기억하고 있다. 어느 유명 회사의 번역소프트웨어로 문장을 넣었더니 내게 전화해줘, 이슈마엘이라고 했다나. 물론 딥러닝과정을 통해 좀더 개선할 여지는 있겠지만, 아직 상황 판단이나 맥락에 대한 정보 혹은 수혜자의 의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그것도 구체적으로), 모든 작업에 대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힘들다는 깨달음을 주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문학사상 유명한 문장 순위에 오를 만한 문장에 대한 번역을 김석희 번역가는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라고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라고 해두자라는 표현이 주는 미묘한 뉘앙스를 좋아한다. 말하자면 화자의 이름이 정말 이슈메일인지 아닌지 보다는 보편적인 상징을 지닌 인물임을 드러내주고 있는 같아서이다. 옮긴이 주석에 따르면 이슈메일 구약성서 <창세기> 나오는 이스마엘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했다. 이스라엘인의 조상 아브라함 그의 하녀였던 하갈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엘 아브라함 본처인 사라역시 아들을 낳자 집에서 쫓겨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마엘 방랑자또는 세상에서 추방당한 라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지고, 따라서 소설의 이슈메일역시 이러한 보편적인 상징성을 지닌 인물로 있겠다. 오랜 세월 세계를 떠돌았던 유대인의 모습이 마치 구약성서에 예정된 신의 섭리의 일부로서 보일 있겠다는 점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다시 보면 이슈메일 운명은 이미 소설의 문장에서 이름지어짐 통해 고난과 역경이 준비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있겠다.

 

과거 스페인에서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 Recongquista)’으로 알려진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유대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디아스포라로서 살아야만 했던 운명을 소설의 문장을 읽다가 떠올려 보았다. 조사를 해보니 레콩키스타 이미 700년대 초부터 시작하여 15세기 (1492)까지 7세기 동안 , 현재 스페인 지역의 이베리아 반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이슬람국가를 축출하고, 기독교 국가의 영토를 회복하려고 했던 운동을 가리키는데, 과정에서 구약성경에 비중을 두는 유대교 역시 탄압의 대상이 된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로 개종을 하거나 아니면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야만 하는 선택의 기로에 있었으며, 결과 자신이 독실한 유대교인임을 드러내지 않거나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과 이를 거부하고 유럽 전역에 유대인들이 퍼져나가게 되는 실마리를 제공한 역사적 사건이다.

 

 

세계를 방랑하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생각해본다

 

오늘날 유대인들의 영향력은 한계를 가늠하기 힘들다. 인류의 유산(서양 문명에서) 속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유대인들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중세 시대의 국토회복운동과정에서 특히나 고통받았을 유대인들은 유럽 전역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영향을 우리는 고스란히 받고 있다. 스페인에서 네덜란드로 건너간 유대인들의 후손에는 철학자 스피노자도 있고, 수상록으로 알려져있는 프랑스인 몽테뉴 또한 모계 쪽에 유대인의 핏줄이 있다. 한편 여러 사상가가 철학자, 문인들 또한 유대인들이 많이 있는데, 예를 들어 한나 아렌트,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도 유대인이었다. 이탈리아인 프리모 레비도 조상들이 이탈리아 북부(토리노) 이주해와 정착한 유대인의 후손이었고, 다른 이탈리아 문인 나탈리 긴츠부르크나  카프카 역시 프라하의 유대인이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유명한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어떤가. 현대 물리학의 기반을 마련한 아인슈타인도 유대인이었으며, 양자역학의 기반을 마련한 닐스 보어도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었으며, 줄리안 슈윙어나 리처드 파인만(리투아니아계 유대인) 또한 유대인의 후손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언어학자 촘스키나 신경과학 의사였던 올리버 색스는 어떤가. 영국에서 성장한 올리버 색스는 유대인으로서 그는 우리에게 감명깊은 글을 남긴 있다. 밖의 수많은 유대인의 후손들이 생의 흔적을 많이 남겨놓은 셈이다.

 

언젠가 유대교 신비주의혹은 영지주의(Gnosticism)’ 대한 이해가 되면 이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와 관련한 자료를 읽다가 내가 흥미있게 기억하는 부분은 작가 허먼 멜빌과 카뮈 또한 영지주의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았다 대목이었다.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멜빌이 모비 에서 구약성서 많이 의지하는 것을 지적하며 이는 멜빌 집안의 청교도적인 배경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멜빌이 간접적으로 영향받은 영지주의적인 배경을 고려할만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부분은 기회가 되면 이해를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물과 상상력, 물의 마력

 

굳이 시인이자 과학철학자인 바슐라르를 언급하지 않아도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근원을 마련해준 물질이며, 따라서 모든 생명체의 고향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겠다. 1장에서 화자인 이슈메일은 나를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나는 바다로 나가게 됨을 설명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는 없지만, 물이 끌어당기는 마력 대해 화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가령 당신이 시골에, 호수가 많은 어느 고지대에 있다고 하자. 어느 길이든 마음에 드는 오솔길을 골라서 걸어간다고 하자. 당신이 택한 길은 십중팔구 골짜기로 내려가 시냇가 웅덩이에 이르게 것이다. 웅덩이에는 마력이 있다. 가장 얼빠진 사람을 가장 깊은 몽상 상태에 빠뜨린 다음, 사람을 일으켜 세워서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게 해보라. 지역에 물이 있다면, 사람은 틀림없이 물이 있는 쪽으로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 누구나 알다시피, 명상과 물은 영원히 결합되어 있다.”(32)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화자 자신이 물에 끌리는 정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잡지 못해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도 곁들이면서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우리 인생의 모습에 비교하기도 한다. 물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잡을 없는 삶의 환영이자 모든 것의 열쇠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불가피하게 이런 근거없는 실체를 쫓는 존재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며, 실체임을 저자는 간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엉뚱한 생각이긴 하지만 멜빌은 낮은 곳으로 향하는 본성을 주목해본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고지대의 호수에서 흘러내린 물이 낮은 곳의 웅덩이로 모이게 되는 물을 언급한 대목 뿐만 아니라 바다로 나갈 일개 선원으로 간다라고 말하며 선장이나 요리사 등의 직책을 맡은 자리 아닌 정직한 노동을 하는 자리가 자신이 편하게 지낼 있는 자리임을 표방하고 있다. 이러한 실마리들은 일면 저자 멜빌이 삶에 대해 가진 무의식적인 태도와도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권위나 사회의 규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이를 이용하거나 활용하는 위치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 자세로도 읽혀진다. 이런 태도는 세상에 노예 아닌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다’(35)라고 언급한 대목에서 더욱 보강되고 있다. 부분은 특히나 당시 미국이 노예문제 몸살을 앓고 있었으며, 모비 출간된 시점(1851) 남북전쟁(1861-1865) 발발한 시점과 동떨어진 시간이 아니듯이 문장은 당시에 논란의 여지가 많았을 것으로도 보인다. 실질적인 의미에서든, 상징적인 의미에서든 멜빌이 1장에서 밀어넣은 문장은 노예제도 대한 문제의식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으며, 사회 규범에 대한 반발심 발로로 수도 있겠다. 당시 사회 통념을 벗어나 현상의 본질을 보려는 멜빌의 지성을 엿볼 있는 대목이었다.

 


 

정당한 대가를 받는 일과 미국적 가치관의

 

옮긴이가 언급하고 있듯이 멜빌은 없는 신의 섭리에 세계를 맡기고, 앞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겸허하게 행동해야 구원받는다 청교도적인 흐름 속에서 있었으며, 보다는 자유로운 신흥 교리를 주장하는 유니테리언 파에 속했던 아버지의 영향도 물론 무시할 수는 없을 같다. 아무튼 낮은 곳에 겸허하게 임하려는 청교도적인 자세는 본성과도 상당한 친화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나아가 거대한 있는 바다로 나아가며 자신은 일개 선원으로 배를 타려는 이유를 이러한 맥락 속에서 정당화하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일반 선원으로서 대가를 받는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대가를 받는 -이것을 무엇과 비교할 있을까? 돈이야말로 지상의 모든 악의 근원이고, 부자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없다고 우리가 진지하게 믿고 있음을 생각하면, 사나이가 멋진 활동으로 돈을 받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36)

 

대목은 성경에 나온 바대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없다는 명제와 돈벌이라고 하는 현실적으로 상충하는 문제가 미국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해결되어 가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보여주기도 한다. 내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이런 국면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도 확인할 있다. 신교도(프로테스탄트)들의 경제활동과 도덕적인 모순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로서 정당한 노동이라는 전제에 주목했던 정황을 여기서도 엿볼 있다. 모비 지극히 미국의 정신을 담고있는 소설이라고 한다면 이런 부분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현대의 미국인들에게, 특히 부를 거머쥐고 있는 미국의 기독교인들에게 도덕적인 정당성을 부여한 맥락을 확인해볼 있다는 말이다.

 

아울러 이슈메일이 고래잡이 배를 타게된 또한 이미 오래 전에 계획된 신의 섭리 표현한 것도, 그리고 이를 다르게 운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경찰관으로 표현하고 있는 부분도 청교도적인 정신 흔적이라고 있을 같다. 어쩌면 신비주의적인특성을 포함하는 이런 대목은 미국의 기업인이 성공하여 부자가 되면 이건 분명 신의 섭리이므로 정당성을 부여받는 심리와도 연결지어볼 있다.거대한 사기극에서 이원석은  미국적인 자기계발의 배경과 등장을 이야기 하는데, 19세기 미국의 정신세계를 언급한다.시크릿으로 대변되는 신비적 자기계발 언급하며 미국적 자기 계발 맥락을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는 신비적 자기계발 다른 하나는 윤리적 자기계발 계보이다. 저자 이원석에 따르면 윤리적 자기계발 청교도의 토양 위에서 이신론의 줄기가 뻗어나고 이에서 자조사상이 피어난 이며, ‘신비적 자기계발 유니테리언과 초절주의를 경유해서 시사고 운동으로 모습이 드러난 ’(52)이라고 하였다.  벤자민 프랭클린으로 대변되는 정당한 노동 대한 대가를 당연시하는 , 근면할 것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은 윤리적 자기계발 계보와 관련지어보면 , 모비 에는 이슈메일이 일반 선원으로 고래잡이 배를 타고 고된 노동으로 받는 대가에 대해 긍정하고 있는 모습이 겹쳐 보인다. 하지만 자신이 바다로 나가 고래잡이 배를 타려고 하는 지에 대해서는 이런 신비주의적 분위기 에도 기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분명히 이런 윤리적이고 정신적인 태도는 유럽인들의 태도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이런 모습들은 오늘날 미국인들의 말과 행동에서 여전히 찾아볼 있는 특징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비 1장은 쉽사리 지나치기에는 다양하고 중요한 정보를 주고 있는 부분으로 천천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현재성 현재 미국의 오래된 미래

 

1장을 읽다가 한번 놀란 대목은 이슈메일이 신의 섭리 의해 고래잡이 배를 타게된 이유를 언급하며 운명 삶이라는 연극의 무대감독으로 비유하면서 제시한 연극 프로그램이었다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전

이슈메일 아무개의 고래잡이 항해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투


대목(37) 현대 미국의 행보 와도 너무나 닮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히나 전세계에 대한 영향력이 커져버린 미국 사회에서 중요한 행사이자 하나의 되어버린 미국 대통령 선거를 떠올리게 한다. 아울러 아직도 미국이 개입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문제들을 생각해보면 모비 그토록 다양한 현대적 맥락에서 비유와 상징을 통해 해석될 있는지, 면면을 찾아볼 있는 실마리가 이미 1장에 들어있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고래의 불길한 이미지 죽음에 대한 예견일까

 

1장을 마무리하며 멜빌은 유령 같은 고래의 이미지로 여운을 남기고 있다.

 

목표를 향해 나를 내몬 멋진 공상 속에서 둘씩 짝을 지어 영혼의 깊은 곳으로 헤엄쳐 들어오는 고래의 끝없는 행렬이 보였다. 그리고 행렬 한복판에, 하늘로 우뚝 솟은 덮인 산처럼 두건을 거대한 유령이 하나 떠다니고 있었다.”(38)

 

여기서 나는 하늘로 우뚝 속은 덮인 이미지를 어디서 보았을까 궁금해졌다. 1장에 앞서 책에 소개된 미국 포경선 헨리 롱펠로호의 항로와 이슈메일이 타게될 피쿼드호의 항로를 참조해보면 상선 선원이자, 해군의 선원, 포경선을 탔던 허먼 멜빌은 아프리카를 지날 킬리만자로의 덮인 산이나, 일본 근해를 지날 눈이 덮여 있던 후지산을 적이 있지 않았을까 상상만 해보게 된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점은 백색 주는 공포와 불길함에 대한 연관성 혹은 암시이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죽음 천착한 작가라고도 불리는데, 그만큼 죽음이라는 문제가 톨스토이에게 인생의 문제였다는 반증일 것이다. 특히 광인의 수기에서  주인공이 하인과 멀리 떨어진 곳의 영지를 매입하러 가는 길에 머물었던 하얀 에서 경험한 발작증세와 겨울 속에서 사냥을 하다 사방이 눈으로 덮힌 벌판에서 길을 잃고 경험했던 발작에 대한 묘사는 톨스토이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여기에서 백색 주는 상징은 죽음 혹은 죽음에 대한 공포 암시하고 있다고 있겠다.

 

마찬가지로 1장의 마지막 부분에 멜빌이 언급해 놓은 하늘로 우뚝 솟은 덮인 떠다니는 거대한 유령으로 표현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내게 다가왔다. 흰색 고래 떠올리게 하는 묘사로부터 죽음으로 이어지는 불길한 암시를 저자가 설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1 독서를 마무리하며

 

1장을 아주 천천히, 생각을 하며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적어가다 보니 앞으로의 독서 후기를 적는 일이 만만치 않겠다는 불길한징조를 보게 된다. 이렇게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건만, 모비 저술 구조를 다시금 생각해보면, 스스로도 권에 대한 독서 후기를 이렇게 느린 속도로 읽으며 길로 새는 일이 어쩌면 책과 닮아 있다는 위안도 가져본다. 어쨌거나 과정은 동안 해왔던 독서 경험을 정리하는 장으로 활용하는 계기가 같기도 하다. 아울러 과거에 읽었던 다른 책들과 새롭게 연결 지으며 새로운 독서 신경을 만들어가는 기회가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모비 읽으며 느꼈던 놀라움을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고 기록해두고 싶었던 바람인지도 모른다. 모비 마라톤 올해 안에 끝낼 있을까 하는 고민을 잠깐 하기도 했지만 이상 문제를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어쨌든 재미있는 경험이 되지 않을까.  

 


 

[참고도서 자료]

모비 ,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각가정신]

나의 서양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창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지음, 박성수 옮김, [문예출판사]

<위키 백과> 영지주의중에서 현대의 영지주의항목 (https://ko.wikipedia.org/wiki/영지주의)

거대한 사기극, 이원석 지음 [북바이북]

이반 일리치의 죽음/광인의 수기, 레프 톨스토이 지음, 석영중·정지원 옮김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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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지 2019-05-29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리게 읽으며 연결 짓기를 통한 학문적 독서 후기가 시선을 끕니다. 소논문을 들여다보는 듯해요.

초란공 2019-05-29 12:21   좋아요 1 | URL
떠오르는 대로 쓰다보니 메모만 해두고 방치해둔 모양새같기도 합니다.^^ 두서없는 글을 읽어주셔 고맙습니다.
 
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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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민자들》

(원제: Die Ausgewanderten)

W.G. 제발트(W.G. Sebald) 지음 | 이재영 옮김 | [창비]

 



역사는 실증적인 방법에 따라 만들어진 기억이고, 신화적 시간을 폐기하는 지적인 순수 담론이다. 그리고 사진은 확실하지만 덧없는 증언이다.

 

프랑스의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이기도 했던 롤랑 바르트가 사진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를 펼친 《밝은 방》에서 만난 적이 있는 구절이다. 독일의 소설가 W. G. 제발트가 《이민자들》 읽은 남게된 여운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제발트가 생전에 남겼다는 4권의 소설집 권으로서 《이민자들》 접하게 되었는데, 권만으로도 나는 이미 제발트의 독자 되어버린 듯하다.

 

《이민자들》 4개의 짧은 소설을 담고있다.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제목이 암시하듯, 어떤 이유로든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특히 독일인 제발트가 주목하고 있는 이민자들은 독일계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에 대한 가혹한 인종말살 정책을 펼쳤던 조상의 후손으로서, 독일인 제발트가 담고 있는 주제는 매우 드문 시도라고 있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끌려갔던 강제 징용 노동자들이나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어느 일본인이 이토록 절제되고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면, 이러한 시도가 얼마나 드문 것인지 이해가 것이다. 다만 제발트는 자신의 조상이 유대인들에게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 자세히 밝히지는 않는다. 제발트는 살아남은 이들’, 특히 고향을 떠나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화자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 속에서 여러 사진을 놓고 사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시도라고 했다. 이번에 읽은 소설 《이민자들》또한 제발트가 실존인물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실제 사진을 통해 이들의 삶을 재구성하는 형태를 띤다. 그러므로 옮긴이가 언급한바와 같이 소설은 실제와 허구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제발트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진을 통해 소설로 재구성했다면, 여기에서는 많은 이들이 나의 이야기 받아들일 있는 보편성을 찾아볼 있을 것이다. ‘진실 여부 문제보다 우리는 기억들을 잊지 않고 다음 세대로 들려줄 있는지가 중요해보이는 이유다. 바르트가 사진은 확실하지만 덧없는 증언이라고 , 사진은 사람이 정말로 존재했다 놀라운 사실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모든 것이 사라질 운명(보다 확실하게는 지구 멸망의 시점에) 갖고 있기 때문으로 이해해볼 있을 것이다. 제발트는 실존 인물들 혹은 풍경을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보면서 바르트가 떠올렸던 덧없음 마찬가지로 곱씹었을 것이다.

 

 

사자(死者) 귀환’,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고통】

 

소설의 단편 헨리 쎌윈 박사 파울 베라이터 주인공들은 공교롭게도 자살한 인물이다. 헨리 쎌윈 박사는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이민자로,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다 영국에 도착하여 정착한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파울 베라이터는 조부모 명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3/4 아리아인, 1/4만이 유대인) 젊은 시절 공부를 마치고 교사일을 시작하자마자 쫒겨난 경험이 있다. 반면 아리아인의 피가 섞여 있었기에 6 기갑포병대에서 복무해야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야기 모두 유대인으로서 고향을 잃은이방인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 가해자도 아닌 이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했을까?

 

헨리 쎌윈 박사는 열심히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고 공장주의 딸과 결혼하여 평생동안 넉넉하게 살았지만, 자신의 혈통때문인지 부인과의 관계는 점점 소홀해졌다. 쎌윈 박사의 고백대로 시간이 지날 수록 향수병이 심해진다는 그는 정원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점점 고독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7살에 리투아니아의 마을에서 이민길에 오른 그였지만 봤던 풍경의 기억은 쎌윈 박사의 몸에 각인되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젊은 시절 깊은 우정을 나눴던 베른의 등산안내인 요한네스 네겔리의 돌연한 사망소식은 쎌윈 박사의 기억에서 평생 지울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방인으로서 타지에 오래 살았지만 어린 시절 각인된 환경을 그리워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인 같다. ‘기억이라는 것은 어쩌면 본래 고독한 존재인 인간이 기댈 있는 버팀목인지도 모른다. 리투아니아의 고향 마을도, 요한네스 네겔리도 결국은 쎌윈 박사의 기억으로 들어온 대상들이기에 쎌윈 박사의 고통은 단순한 고향 상실의 문제는 아닐 터이다. ‘관계의 존재 인간이 고독하게 살아갈 수는 있어도, 인간이 의지하는 무엇에 대해 인위적인 혹은 불가항력적인 단절 개입한다면 삶의 의미를 잃게될 수도 있지 않을까. 쎌윈 박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불가항력의 단절로 부유하던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기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소울메이트와 같았던 사람이 돌연 자신의 삶에서 사라려버렸다. 그리고 자신은 살아남았지만, 자신을 붙들어주는 끈이 끊어져 세상과의 모든 연결 고리가 사라진 순간 살아남은 이들은 고통스런 기억 기억의 고통 평생 마주해야하는 운명을 지닌다.  

 

쎌윈 박사의 사망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자는 72 만에 빙하에서 요한네스 네겔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된다. 이에 화자는 사자(死者)들은 이렇게 되돌아 온다라고 말한다. 쎌윈 박사는 죽음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고, 반대로 네겔리는 죽음의 장소였던 빙하라는 심연으로부터 다시 올라오는 현상은 기억 매개로 해서 나름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사자(死者) 귀환모티브는 파울 베라이터에서도 찾아볼 있다. 파울은 화자의 초등학교 은사인데, 나치의 등장으로 실향민이 독일인이다. 파울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의 화자에게 전해주는 란다우 부인이 화자에게 사진 앨범을 보여주자, 사람의 기억 통해 망자들이 소환되고 있다.

 

앨범에 담긴 사진들을 보다보면 죽은 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같기도 했고, 우리가 그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같기도 했다.”(61)

 

《밝은 방》에서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의 사망 직후 어머니의 어릴 모습이 담겨있는 온실 사진을 보며 사진의 본질을 거듭 생각했고, 자신이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느끼기도 한다. ‘카메라 앞에, 그리고 사진사 앞에 그리고 , 나의 어머니가 정말로 있었고, 어린이가 바로 나의 어머니라는 사실 깨닫는 것이다. 소설의 화자도 란다우 부인의 앨범을 보면서 어릴 기억하던 은사의 모습과 자신이 모르던 은사의 모습을 맞춰가며 사람의 존재를 다시 회상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그림 자체에 시간의 흐름을 수반하고 있는 그림과 달리 순간 포착된 사진이 오랜 시간 뒤에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힘일 터이다. 다시 말해 살아남은 들은 기억을 통해 고통 불러오고, 이를 다시 고통스럽게 기억해야하는 자들이다.  

 

 

【이민자들의 잃어버린 고향 이타카(Ithaca)

 

소설이 담고 있는 편의 소설 중에서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나오는 아델바르트는 유일하게 유대인이 아니다. 하지만 산업화되어버린 삶의 조건 속에서 실업으로 고향을 상실한 인물이다. 아델바르트는 소설 화자 어머니의 외삼촌이었다. 아델바르트는 실업 ,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유대인 은행가의 집사로 일했다. 화자가 아델바르트의 삶을 조사하고 찾아가면서 알게되는 사실 중에 아델바르트의 말년의 모습에 특히 주목해본다. 그는 집사 생활에서 은퇴한 자진해서 뉴욕 () 이타카 시에 있는 정신병원에 들어가 말년을 보내기로 한다. 특히 50년대 초에 미국에서 유행하던 전기충격 요법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과도한 충격요법으로 몸과 정신이 망가져 결국 죽음을 맞게 된다.

 

아델바르트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화자에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은퇴한 정신과 의사인 에이브럼스키 박사였다. 에이브럼스키 박사가 기억하고 있는 아델바르트는 극심한 우울증을 비롯하여, 이와 통상적으로 함께하는 육체적인 퇴락현상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박사의 말로는 아델바르트가 거듭 세상에 작별인사를 하는 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당시에 이미 나는 아델바르트 씨의 그런 태도가 실은 자신의 사고능력과 기억능력을 가능한 근본적이고 철저하게 말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143)

 

말하자면 일반적인 우울증과는 달리 자신의 정신을 의도적으로 파괴 또는 정화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1950년대 정신치료를 위해 전기 요법을 사용한 목적 또한 전기충격을 통해 일종의 기억 저장장치로 보았던 뇌를 포맷하기 위함이었던 것임을 염두해 둔다면 좀더 이해가 간다. 아델바르트가 기꺼이무시무시한 정신충격 요법을 받아들였는지 소설 속에 명확히 나오지는 않는다. 가지 짐작해본다면, 아델바르트가 유대인 은행가 코즈모의 집사로 일하던 세계 여러 곳을 함께 여행하며 보았던 무언가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산업화의 진행으로 파괴되어버린 인간다움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은 단서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어느 나라에 가든, 지구상의 어디를 가든 다를 바가 없다. 자동차와 부띠끄 상업, 그리고 온갖 방식으로 점점 확산되어가는 파괴중독증으로 인해 살아남은 곳이 없다.”(147)

 

결국 아델바르트는 실업으로 고향을 잃게된, 후기 산업사회의 디아스포라라고 있다. 상황이 유대인 가문의 집사라는 설정으로 접목이 되어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항상 함께 다니던 주인 코즈모 또한 이민자이기 때문이다.

 

인물은 결국 각자 타지에서 삶을 마감했던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아델바르트가 자신의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했던 정신병원이 있던 곳이 뉴욕 () 이타카(Ithaca)라는 장소이다. 이타카는 사실 그리스에 있는 섬의 이름이면서, 호메로스의 저작 《오딧세이》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여 페넬로페와의 신혼생활을 중단하고 전쟁에 참전한다. 그는10 동안 전장에서 보내고, ‘트로이의 목마계책으로 승리한 귀향길에 올랐지만 바다의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서 다시 10 지중해를 해매는 운명을 맞는다. 이런 맥락을 고려해보면 제발트가 설정해둔 소설 속의 공간 이타카는 타지에서 떠도는 이들, 이민자들이 오랫동안 가지 못했던 고향의 은유로서 사용된 것은 아니었을까. 아델바르트의 비망록을 해독하며 그의 자취를 따라가보는 화자는 그리스의 이타카 섬을 지나는 대목도 잠시 나오는 , 부분도 잃어버린 고향에 대해 다시금 환기시키는 장치로 이해된다.

 

아델바르트가 마지막으로 전기충격 요법을 받았던 , 진료시간을 어긴 그를 찾아간 에이브럼스키 박사에게 창밖을 바라보던 아델바르트가 해준 마디는 상당한 여운을 준다.

 

나비 잡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무심결에 잊어버린 모양입니다.(146)

 

내게 나비 잡는 사람 이미지는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순수한 존재로서, 그리고 보호받고 지켜야될 존재 혹은 가치로 다가온다. 인간다움이 존재할 있는 고향을 암시할 같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전세계가 획일화되고, 파괴되어가는 인간의 조건 속에서 현대인들은 모두 고향을 상실한 존재와 다름 없다는 메시지이기도 같다. 그러므로 이는 상징적이긴 하지만 아델바르트가 정신병원이 있는 이타카 이유이기도 것이다.

 

 

【트라우마의 공간, 그리고 망각에 대한 저항행위들】

  

번째 소설 막스 페르버 화자는 스위스 인으로 영국에 이민가기로 하고 맨체스터에 도착한다. 여기서 우연히 만난 화가가 바로 막스 페르버였다. 페르버는 나치를 피해 실향민이 유대인으로, 페르버의 부모는 나치의 유대인 강제 이송 열차를 타고, 나치에 의해 살해되었다. 페르버가 기억하기 싫어하는 고통 중에는 나치에 의해 부모님이 살해된 후에 소식을 들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 페르버가 받은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는 평생을 안고 살아야하는 숙명이 되었다.

 

이따금 나를 엄습하는 단편적인 기억의 영상들은 차라리 강박관념들이라고 해야 것야. 내게 떠오르는 독일이란, 머릿속의 광상(狂想) 같은 것이네. (…) 내게 독일인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무시무시한 얼굴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자네도 알아야 하네.”(229)

 

페르버의 강박관념 결국 그의 몸에 반복적으로 각인되어 트라우마가 되었을 터이다. 몸에 각인되어 지울 없는 상처. 그건 페르버가 맨체스터라는 공간을 보자마자 몸이 반응했던 이유이기도 것이다. 다시 말해, 맨체스터라는 공간은 페르버라는 개인의 트라우마를 환기하는 공간으로 작동한다. 세계로 확산된 산업화의 발상지였지만 어느덧 무연탄색으로 시커멓게 덮여버린 도시, 만성적인 가난과 몰락을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도시로서 맨체스터는 페르버가 앞으로 줄곧 살게 도시였다. 산맥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원형극장의 바닥처럼 보이는 도시는 가라앉고 있는 도시 이미지를 주면서도 다른 심연(abyss) 이미지를 암시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헨리 쎌윈 박사에서 등산안내인 요하네스 네겔리가 추락했던 빙하 이미지와 상통한다. 네겔리의 빙하도 역시 죽음을 마주하는 공간이자 사자가 귀환하는 공간로서의 이미지를 준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에서도 아델바르트가 죽음을 맞이하는 이타카의 정신병원 바로 막스 페르버 맨체스터와 같이, 죽음을 맞이하고 망자를 소환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소설의 어느 주인공도 결국 자신들이 받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자신만의 심연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가지 주목해볼만한 부분은 파울 베라이터에서 파울이 자살하는 공간이 철로 라는 것과, ‘막스 페르버 맨체스터를 바라볼 느꼈던 장면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자살행위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하나의 행위로 전달하는 메시지의 성격이 있다고 본다. 일종의 사회적 메시지인데, 파울이 누웠던 철로의 공간은 어쩌면 과거에 수많은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날랐던 기차가 가던 길의 모습과 오버랩되고 있다는 말이다. 제발트에 따르면 철도에서 끝을 보다라는 의미가 원래 철도에서 평생 직업을 찾다라는 의미이긴 하지만, 독자로서 나에게는 철로가 파울에게는 돌아오지 못한 가족의 운명을 환기해주는 기호로 보인다는 점이다. 파울은 어쩌면 자신의 일부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던 상처와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자신의 일부가 아리아인이라는 이유로 기갑포병대에서 나치를 위해 일했던 자신을 속죄하기 위한 행위로서 철로에 누웠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파울의 철로라는 공간 또한 헨리 쎌윈 박사 요한네스 네겔리의 빙하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에서 아델바르트의 이타카 정신병원 함께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있던 사람이 죽음 마주하고, ‘사자의 귀환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보아도 무방할 같다.   

 

페르버가 몰락하고 있던 맨체스터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살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밤낮없이 나오던 굴뚝의 연기는 전쟁을 경험한 페르버가 전쟁터에서 불타오르던 인간성 몰락과 문명 파괴의 모습, 유대인 수용소에서 끊임없이 시체를 태우던 굴뚝의 풍경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게 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몰락하는 거대한 원형극장처럼 생긴 맨체스터 역시 빙하’, ‘철로그리고 이타카의 정신병원 일맥상통하는 구조를 보인다고 있겠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페르버가 폐기종으로 죽어가는 상황도 결국 밤낮없이 나오던 굴뚝의 연기로 몸에 또다른 상처에 다름 아닐 것이다.

 

독일인으로서 저자 제발트는 소설의 여러군데에서, 이야기를 전해주는 소설 인물의 입을 통해 소설 속에 개입하는 부분이 있다. 많은 독일인들이 선조가 했던 일들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하게 방치하거나 심지어는 은폐를 하려고 했는지를 지적하는 대목이다.

 

파괴의 시간이 지나간 뒤에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침묵하고, 모든 것을 감추고, 때로는 실제로 잊어버리기도 했는지요. 그런 것은 그들이 그전에 보여주었던 비열한 태도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는 것이에요.”(65)  

 

말은 파울 베라이터의 말년에 대해 이야기 해주던 란다우 부인의 지적이다. 평범한 독일인들도 전후 자신 또는 선조의 행위에 대해 침묵하고 은폐하려 했던 정황을 독일인의 입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자살과 함께 침묵 사회적 메시지를 주는 행위로서 이해될 있다. 결국 독일인 후손들의 침묵 선조의 행위와 마찬가지인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제발트의 비판인 것이다. 이러한 제발트의 개입은 막스 페르버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화자는 페르버의 가족이 묻힌 유대인 공동묘지를 방문하는데, 대목에서 화자는 저자의 생각을 직접 개입하여 독자에게 전달한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독일인들의 정신적 빈곤과 기억상실, 그리고 과거의 흔적을 철저히 지워버린 그들의 교묘함으로 인해 머리와 신경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또렷하게 의식할 있었다.”(287)

 

화자는 유대인 공동묘지를 방문한 , 묘비에 새겨져있는 사자(死者)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읽고 있다. 행위는 보다 적극적으로 망자를 소환하는 의식이기도하고, 망각하고자 혹은 은폐하고자하는 동료 독일인들에 전하는 제발트의 메시지이자, 제발트가 요청하는 집단적인 망각에 대한 저항 행위일 것이다.

   

책을 덮어도 제발트가 담담하게 전해주는 이야기들의 여운에는 나를 위로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제발트가 실제로 관심을 갖고 만나고 사진을 수집하고, 이야기를 들었던 이들은 모두 한때 분명히 존재했던평범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들 모두 죽었으며, 이들은 모두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고향을 상실한 살아갔던 사람들이었다. 이유가 나치에 의해서든, 산업사회가 소외시킨 결과였든 간에 말이다. 제발트는 실존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우리에게 전해주는 소설 속의 화자 같은 역할을 한다. 그의 이런 노력 속에는 평범하지만 삶을 살았던 이들의 아픔에 주목하였기에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 허우적대며 부유하는 나를 위로해주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 모두는 이타카라는 고향을 상실한 지구의 이방인이자 이민자일 것이다. 어쩌면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의 고향은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낸, 이미 어디에도 없는 으로서의 유토피아로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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