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기가 되는 쓸모 있는 경제학 - 넛지부터 팃포탯까지, 심리와 세상을 꿰뚫는 행동경제학
이완배 지음 / 북트리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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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기가 되는 쓸모 있는 경제학

이완배 지음 | [북트리거]

 

 

인간의 삶이란 인류의 등장 이래 원래부터 팍팍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정도면 괜찮은 것인지 혹은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져볼 때가 있다. 복잡한 현대 사회를 무난히 헤처나가려면 너무나 많은 것들을 부수적으로 알아야만 것만 같다. 모든 기술을 뒤늦게 접하고 언제나 따라가기 바쁜 나는 아날로그 주의자라고 변명은 하지만, 첨단 기술에 익숙한 이들의 삶을 보아도 현대인으로서의 삶은 여전히 팍팍해보인다. 인간이 태어나서 사망할 때까지 거쳐야하는 통과의례를 제대로 거치는 일도 쉽지 않은 것이다. 학업, 취직과 결혼, 육아 등등의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과 의식주와 같은 삶의 기본 양식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는 작은 단위의 개개인에서부터 국가단위의 삶을 지배하는 경제활동이 자리잡고 있다. 경제는 공부하기 어렵다거나 싫다고 하여 담을 쌓고 사회를 수는 없는 분야이다. 경제는 이제 현대인이 어느 정도는 알아야할 상식과도 같은 분야가 되었다. 심지어 무인도에서 혼자 사냥을 하며 먹고 산다고 해도 결국 희소 자원 얻을 있는 보상(음식), 식량을 구하는 효율성을 따지는 이상, 그리고 최소한 사람 이상 살아가야 하는 경우, 부족한 자원의 분배와 교환 활동이 있는 이상 우리의 삶은 경제활동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서두가 이렇게 길어진 것은 현직 경제 분야 기자가 대중에게 쉽게 소개하는 경제서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다. 이완배 기자가 저술한 삶의 무기가 되는 쓸모 있는 경제학은 독자들에게 주류 경제학과 다른 인간관에 기반한 행동경제학이라는 분야를 소개한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을 이기적인 결정을 하는 존재로 보는 주류 경제학과 다른 인간관을 바탕으로 사회의 경제현상을 설명하는 분야다. 기존의 주류 경제학에 대항하는 비교적 새로운 시도라고 이해된다. 무엇보다 행동경제학은 심리학과의 긴밀한 연계와 학제간 연구를 통해 자리잡고 있는 분야로 보인다. 곧 인간이 언제나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가정에서 벗어나 인간은 실수도 할 수 있고, 비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행동경제학은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주류 경제학과 다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이기적이기만한 존재가 아니라 이타적인 존재이므로 타인을 위해 손해를 보기도 하고, 집단을 위해 개인이 손해를 보면서도 협동을 하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본문에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여러 경제학 이론은 복잡한 수식을 배제한 심리학 이론처럼 느껴진다. 최근 생물의 진화에 대해 현대 생물학이 제시하는 다양한 담론 중에서 인간의 이타성에 대한 부분이 주목을 많이 받고 있는 것 같다. 행동경제학도 이렇게 최근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경제학과 긴밀한 학제간 연구를 통해 탄생한 경제분야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다양한 인간의 행동과 심리에 대한 경제학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우선 책의 전반을 바라볼 때 우선 떠오르는 생각은 인간이 정말 복잡한 존재라는 점이다. 심리학과의 학제간 연구로 자리를 잡은 행동경제학이 제시하는 연구들은 복잡해지는 인간 조건을 중심으로 반응하는 인간 군상에 대한 현상론이라는 인상을 처음 주었다. 물론 저자가 복잡한 경제학의 수식과 분석론을 걷어내고 대중을 위해 쉽게 정리한 사항만으로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무모하거나 턱없이 부족해보일 수 있겠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점은 인간에 대한 관점을 주류 경제학과 달리 좀더 유연하게 두고 있다는 점이다. 스놉 효과처럼 인간이 사치품을 구입하는 행위는 빈부격차와 계급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면 나오기 힘든 설명일 것이다. 차별성(또는 개성)은 오히려 자본주의적인 개념에서 발명된 인간의 욕망에 기인할 것이다. 빈부격차가 점점 더 심해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놉 효과는 더욱 강력한 설명이 될 것 같다. 아울러 동수저, 흙수저 사람들이 금수저의 소비를 욕망하는 사이 우리의 삶은 더욱 팍팍해지지 않을까. 자아 고갈 이론의 교훈이 전해주듯, 우리의 욕망을 통제하는데 물리적인 에너지가 많이 들긴 하지만 반복 훈력을 통해 통제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순환오류처럼 느껴지지만, 자본주의는 계급과 상관없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욕망하라는 메시지는 보낸다. 흙수저들은 자본주의 구조가 끊임없이 개개인에게 강요하는 차별성을 견뎌내기 위해 인내하고 통제력을 발위해야만 한다. 그리고 여기에 흙수저들의 삶이 팍팍해지는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라는 관점의 연장선에서, 인간이 언제나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 복잡함에는 타고난 본성의 측면 말고도 인간이 속한 집단이나 살고 있는 환경의 영향 또한 지배적이기도 하다. 곧 인간은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다른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도덕적인 사람들도 환경만 조성이 되면 타인에게 잔인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루시퍼 이펙트의 필립 짐바르도 교수의 연구처럼, 인간은 어떤 규정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인간은 외부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현대 심리학의 연구에 힘입은 인간에 대한 충격적인 이해는 우리가 어떤 사회, 집단에서 마법의 완장을 차게 되면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이 점은 불법주차한 차가 어떤 상황과 환경에 있을 때 다른 결과를 줄 수 있다는 범죄의 경제학에서도 일맥상통하는 교훈을 준다. 나아가 프리모 레비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처음 겪은 동료 유대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폭력, 프란츠 파농이 이야기한 수평 폭력은 동일한 맥락에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일깨워 준다. 분명 심리학의 영향을 긴밀하게 주고 받아 등장한 행동경제학은 보다 단순하게 인간을 바라보았던 주류 경제학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보다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저자의 소개대로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이타성 가진 존재이며 협동하는 존재라고 바라본다. 결국 경제학이 다른 종류로 나뉜다면 이는 각각이 갖는 인간관 어떠하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이성에만 관심을 두던 주류경제학에 인간의 감성, 심리적인 요인을 추가로 고려하여 주류 경제학과의 차별성을 내세운다. 여기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지극히 복잡한 인간 개체와 인간 사회의 모습을 고려해볼 때다. 이성에 주로 주목하던 주류경제학이나 여기에 인간의 심리를 고려한 행동경제학은 크게 보아 배다른 형제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다시말하면 경제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행동을 관찰할 고려할 변수(parameter) 하나 추가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문외한이기에 용감하게(?) 의문을 가져보게 된다. 나아가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심리라는 추가 변수를 도입함으로써 사회경제 현상을 관찰하고 결론을 내리기 위한 어떤 집단심리의 전형 가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상당수가 입으면 다시 벗기 힘들다는 꽃보다 화려한 등산복 입고 둘레길을 걸으시는 부모님들을 떠올려보자. 행동경제학은 이런 현상에 문장으로 결론을 있는 집단의 심리를 이미 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사회현상은 분명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고 전제한 주류 경제학이 설명하기 힘든 부분일 것이다.  

 

 

     한편 행동경제학이 심리학과 긴밀한 교류를 통해 발전되는 것은 결국 기업 마케팅에 매우 유용할 같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 삶의 무기가 되는 쓸모 있는 경제학에서 쓸모 누리는 주체가 팍팍하게 살고 있는 평범한 우리들이 아니라 기업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분명 인간의 심리를 반영한 행동경제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좀더 넓혀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소비자의 집단심리를 관찰하고, 기업의 판매전략을 세우는데 오히려 유용한학문은 아닐런지. 인간의 심리를 고려한 게임 이론 기반한 경제학을 알면 우리는 보다 주체적으로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그렇지만 통상적으로 보았을 , 행동경제학자들이 분석의 대상으로 보는 인간 내지 인간 집단의 대상 그리고 혜택을 받을 있는 대상이 빈곤층 아닐 같다는 점이다. 과연 행동경제학은 빈곤층의 삶에 무기가 되고 쓸모를 전해줄 있을까? 집단의 소비 심리에서, 명품에 집착하는 이들을 다룬 스놉효과 베블런 효과 대상으로 빈곤층 기본적으로 배제될 것이다. 이는 빈곤층과 무관한 현상일 것이다. 마시멜로 테스트처럼 개개인의 노력이 인생을 바꾸는 것보다 부모를 만나는 것이 성공에 유리하다라는 다소 허망한 결론을 알게된다고 우리의 삶에 무기로 사용할 있는 점이 있을까는 의구심을 갖게된다.  앞서 언급한 자아 고갈 이론처럼 자본주의가 개개인에게 차별성 강요하는 메시지(혹은 광고) 끊임없이 보내고 있을 ,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통제하기 위해 부단히 노오력해야만 한다. 어찌보면 행동경제학은 우리에게 팍팍한 삶을 벗어날 방도를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다. 행동경제학은 우리에게 무기를 주는 대신 현재 놓여있는 문제를 개개인이 해결하도록, ‘해결책의 개인화 맞추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행동경제학은 팍팍한 삶을 벗어날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분야는 아닌 같다.  

 

 

행동경제학은 지극히 합리적이라고 알려진 사람이 실수를 하고, 사기를 당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됨을 알려준다. 아무리 천재적인 경제학자든, 철학자든, 심리학자든 이들의 연구는 인간 개체 인간 사회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결론을 얻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학자들이 제시하는 각종 이론들은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인류가 쌓아온 지혜의 보고에 이미 내재하던 인간관 간단히 모형화한 실험을 통해 자신의 말로 정리한 것은 아닐까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현대인의 삶은 과거보다 복잡해지고 다양화해졌으며, 첨단기술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소재의 등장과 이를 둘러싼 인간 사회의 동력학 관찰하고 분석하지만, 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그리 복잡하거나 새롭지는 않은 같다. ‘하늘 아래 새로운 없다 말처럼, 인류가 관찰하고 경험해온 지혜를 그렇게 많은 현대의 경제학자들이, 지구 역사 이래 최초로 제시하는 이론일 것인가. 그렇다고 믿기는 힘들다. 경제 이론의 결론이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은 이미 오랜 문학작품과 철학서에서 발견할 있을 같다. 그러므로 내가 행동경제학을 좀더 알게되어 저자의 말대로 삶이 보다 나아질 있는지, 아니면 기업의 매출 증대에 더욱 도움이 있는 학문인지는 앞으로 좀더 지켜보고 판단해야할 숙제가 것이다.

 

 

 

#네이버원탁의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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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 - 시인, 호색한, 전쟁광 걸작 논픽션 15
루시 휴스핼릿 지음, 장문석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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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 시인, 호색한, 전쟁광》

(원제: The Pike: Gabrielle D’annunzio, Poet, Seducer, and Preacher of War)

루시 휴스핼릿(Lucy Hughes-Hallett) 지음 | 장문석 옮김 | [글항아리]

 

 

 

 

 

 

[1] 단눈치오는 어떤 사람인가?

 

사람의 이면을 온전히 글로 묘사한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단눈치오와 같은 인물에게 가지 키워드 만으로 인물을 특정짓는다는 자체가 무리가 아닐까한다. 단눈치오는 17 시인으로 자신을 먼저 세상에 내놓았다. 단테, 페트라르카, 레오파르디를 위대한 이탈리아의 시인으로 꼽았던 단눈치오는 16 이미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편지를 썼던 언어의 귀재이기도 했다. 반면 여성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니고, 세상에 있는 모든 재화를 소비할 것처럼 게걸스럽게 가산을 탕진하며 인간으로서 누릴 있는 모든 가능성을 시도한 사람이기도 했다.

 

저자는 단눈치오의 다채롭고 복잡한 명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그는 성적으로 난잡한 연인이자 고급스런 탐미주의자, 호전적인 민족주의자, 이탈리아 건축물의 복원 캠페인에 나서는 호고주의자, 최초의 비행기에 몸을 싣고 창공으로 비상했을 뿐만 아니라 연대적으로는 도저히 믿기 힘든 크고 소음이 심한 자동차를 타고 토스카나의 길들을 누빈 근대성의 찬미자였다.”(352)

 

진술에 단눈치오라는 인물의 가지 주요 특징이 간결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타인의 제안에 거절을 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도 어려움을 느끼던 인물이 삶의 모험에는 불나방처럼 단호히 자신을 던져 넣는 모습은 자체로 매우 분열적이다. 저자는 부단하고 분열적이기까지 인물의 특징을 책에서 크게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자연과 신화를 서정적으로 노래하는안전한 단눈치오와 자신을 따르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세상을 피로 흠뻑 적시라고 요구하며 위험한 애국주의와 영광의 이상을 내세우고 강탈 행위의 서막을 열어젖힌위험한 전쟁광 단눈치오. 가지 상반된 페르소나는 분명 사람의 것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의 시기는 사람들에게 어느 노선을 취할 것인지 강요하곤 한다. 종교 전쟁에서는 신교의 편에 것인지 아니면 구교의 편에 것인지, 교황과 왕권의 대결에서는 교황의 편에 것인지 아니면 왕권을 지지할 것인지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혹은 냉전의 시기에 자본주의의 편에 것인지, 공산주의의 편에 것인지를 개개인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단눈치오는 이런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잠시 어느 노선을 지지한 적은 있어도, 어느 편의 선봉에 서서 이들의 명령을 받는 일은 거부했다. “내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노래를 불러야 한다면, 나는 일용한 양식을 포기할 것이다.”(543) 단눈치오라는 인물은 이처럼 혼돈과 폭력의 세기에 스스로 특정 노선에 한정되지 않는 특이점으로서 끊임없이 부유했던 인물이었다. “나는 개인주의자이고 그렇게 남을 겁니다. 철저하고도 극단적으로 말이지요.”(342) 사회주의를 찬성했다가 이를 비판하며 자신만의 길을 선택한 단눈치오는 본인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어느 노선에 투항하기를 거부한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다.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했던 단눈치오는 17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한 , 자신이 말을 타다 낙마해서 요절했다는 가짜뉴스를 익명으로 신문사에 투고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유명인사로 만드는 자기 홍보의 달인이기도 했다. 단눈치오가 피우메로 입성하여 권력을 잡은 가장 먼저 자신의 보도 부서 만든 일은 그에게 지극히 당연한 절차였다. 단눈치오에게 가장 우선하는 관심사는 자기 자신이었다. 단눈치오의 행동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동인은 모든 관심사가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구심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단눈치오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세심한 신경을 쓰거나 자신의 연인이 어떤 옷을 입는지 관여하고, 값비싼 여러 수집품들로 실내를 장식하는 행동을 이해할 있다. 나아가 단눈치오가 탐미주의자이면서 지극한 쾌락주의자였다는 저자의 평가 또한 수긍이 것이다.

"나는 이탈리아의 '탁발승'도 아니고, 또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아. 그저 내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을 뿐이야."(824면)

단눈치오는 1년 남짓한 피우메 정부 시절 이후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의 마지막 은둔처 '비토리알레'에서 말년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 기간에는 특히 무솔리니의 감시와 선물을 동시에 받게 된다. 단눈치오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하지는 않는다. 반면 무솔리니는 단눈치오를 여러 번 방문하여 단눈치오가 무솔리니를 지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대중에게 심어주기위해 노력했다. 파시스트 정권은 이러한 기회를 철저히 이용했다. 사실 현실 정치에 무관심한 단눈치오는 자신이 원하는 일이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향유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전부였는지 모른다. 단눈치오는 말년에 집에서 은둔한 채 44권에 달하는 전집 출간 작업을 하며 비교적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

단눈치오는 비행기가 세상에 나온지 채 15년도 안된 시기에 이미 비행에 매료된 인물이기도 했다. 심지어 대공포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의 상공을 날아 폭탄을 떨어뜨리거나 선전물을 투하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는 일에 스스로 극적인 배역을 선택하여 맡았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배역을 할 때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보호해야겠다는 어떤 욕구도 없었다. '삶이란 목표를 향해 던져져야 할 작살과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 중요한 것은 오직 다음 번의 예정된 출격이었고, 그것만이 '전부'였다."(532면) 이 책의 원제 <The Pike>가 암시하듯,  '' 또는 '작살'의 이미지는 단눈치오가 자신의 삶에 대해 갖는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호'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하나의 상징으로서 ''(기사 또는 궁수의 이미지)이자 본인 스스로를 창의 목표물(희생자) 곧 '순교자'(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이미지)로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 루시 휴스핼릿이 단눈치오에 대한 평전을 기획하면서 떠올린 주제 이미지가 바로 창과 순교자가 아닐까.

 

 

[2] 단눈치오의 시대

 

단눈치오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단눈치오가 태어나기 직전인 1861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공식 출범했다. 시기의 이탈리아는 통일 이탈리아에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구심점 중의 하나가 국왕을 중심으로 힘을 모을 있는 강력한 민족주의였다. 단눈치오가 젊은 시절 민족주의에 그토록 경도되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리발디의 추종자가 이탈리아가 위대한 민족으로서의 지위를 입증하려면 피의세례 필요하다 외쳤듯이 외곬수적인 민족주의는 구성원의 희생을 예비하며, 이들의 요구한다. 특히 19세기 , 번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통해 이탈리아의 호전적인 민족주의가 힘을 크게 얻은 정황을 휴스핼릿은 묘사하고 있으며, 단눈치오의 시대에 나라 전체가‘거대한 전쟁’으로 향해가는 배경을 포착하여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단눈치오의 피우메 정부 시절 이후, 그리고 1 대전이 끝난 이탈리아 내부는 그야말로 혼돈의 상태였다. 정부와 군대에 대한 분노와 불신으로 이탈리아는 분열 양상을 보였으며, 정치적 불안 증세가 심화되었다. 재정침체와 전쟁으로 국채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에 실업자가 넘쳐나던 국면이었다. 이렇게 사회가 아노미 상태에 있던 상황을 탈출할 있는 대안으로 주목받았던 것이 파시즘이었다. 히틀러의 나치즘도 비슷한 맥락에서 파악할 있다. 파시즘의 지도자였던 인물 이탈로 발보의 견해에 따르면 파시즘은 전후 남은 분노를 표출할 대안적 출구를 제공하였으며, 이탈리아를 사회주의 혁명으로부터 구했다”(635)라고 하며 파시즘의 당위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과 전체주의적 독재체제의 출현은 양상에 있어서 많은 부분이 파시즘과 나치즘이 공유한다. 독일의 경우도 1 대전 이후 국내 정치경제적 불안 요소가 만연해 있던 위기상황에서 국민들의 절망과 분노를 표출할 기회를 마련했다. 무솔리니가 파시즘을 구현해내었듯이, 히틀러의 나치 독일도 파시즘의 강령을 비롯한 많은 부분을 가져다 충실히 활용했다. 여기에서 나치와 파시스트들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던 인물이 바로 단눈치오라는 사실이다.

 

책은 놀라운 초인’(비호감이긴 하지만) 일대기를 조명한 책이면서 동시에 인물이 살았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세계사의 부분도 함께 아우르고 있다. 단눈치오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의 세기는 산업혁명 이후 급속한 발달을 가져온 기술의 혜택을 받아 인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던시기였다. 기차를 타고 장거리를 여행하거나, 전신을 이용하며 대서양 너머로 소식을 전하고, 커다란 증기선을 이용하여 대서양을 건너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여러 차례 미래주의 운동 주목하고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1902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는 프랑스의 < 피가로> 1면에  미래주의 선언 게재했다. 마리네티는 선언을 통해 새로운 세기를 열며 산업혁명의 성공적인 결과물, 특히  매끈한 금속, 강력한 기계, 빠르고 효율적인 것을 다음과 같이 찬미했다.강철 철로를 달리는 열차 속에서, 강물과 바닷물을 가르고 나아가는 속에서, 그리고 노동과 부를 낳는 모든 기계 속에서 경이로운 아름다움이 잉태되고 있다.(420) 미래주의자들의 이러한 표현들에서 퇴폐주의적이고 상징주의적인 움직임은 분명히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무모한 젊은이들의 주의를 끌었을 것이다. 

 

마리네티가 단눈치오와 만날 있었던 접점 당시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자동차와 비행기(모두 강력한 엔진과 빠른 속도를 상징한다) 대한 관심에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시대의 분위기와 정서는 많은 지식인들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르셀 프루스트나 앙리 베르그송 등도 에어쇼를 보고 감명을 받거나 에어쇼를 보기위해 여행을 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미래주의자들의 주장을 보면 이들의 미래 산업혁명의 시대가 낳은, 매우 자본주의적인 발명-개념으로 이해된다. 과거와 현재에 대한 비판은 있을지언정, 다가오지 않은 미래, 특히 인간이 이룩할 성취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느껴진다. 이러한 무모함은 현재를 살아가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마리네티가 피우메 시절 단눈치오 곁을 떠난 이유도 결국 사람이 생각하는 미래 접근하는 태도 또는 관점에 메워질 없는 간극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눈치오는 자신의 영광 위해 오히려 지극히 철저하게 현재를 살고’, ‘현재에 집착했던인물이었다면, 마리네티는 단눈치오처럼 몽상가였지만 미래주의자들의 무모함과 산업기술에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기술문명의 힘과 잠재성은 오히려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보여주던 폭력성과 호전성에 부합했던 같다. 그러므로 분명 단눈치오와 마리네티 사이에 미래 보는 관점에 간격이 존재할 수밖에 없을 같다. 현실정치에 기반을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현재를 기반으로 장밋빛 미래를 약속할 있었다면, 단눈치오는 어쩌면 미래에 무관심한, 오로지 자신의 현재적 관심을 유지하고 현재를 향유하는데 보다 근본적인 관심이 있었던 같다. 물론 전쟁 정화 수단으로 보고 전쟁이 유럽의 위생학이라고 주장한 마리네티의 견해에 단눈치오는 분명히 공감을 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눈치오에게는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우선 전제가 되어야하며, 이것이 마리네티의 공감을 얻지 못했을 같다.

 

19세기 후반 통일 이탈리아가 강력한 구심점을 민족주의로부터 구했다면, 20세기 들어 호전적인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평화를 지향하던 사회주의가 대척점에서 힘의 균형을 어느 정도 유지했던 같다. 저자 휴스헬릿은 민족주의를 지향하고 라틴민족 우수성을 확인하고 싶어하던 호전주의자들과, 신중하고 평화를 지향하던 사회주의자와의 대립이 심심치않게 존재하며 꿈틀대던 당대의 이탈리아를 세심하게 그려내었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민족주의 사회주의의 대립 구도는 급속하게 균형을 잃게 된다. 파시스트 정권은 공갈협박과 폭력을 통해 통해 등장하여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제거하며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정황도 분명히 확인할 있었다.

 

단눈치오가 살았던 시대는‘조국’이라는 절대 기호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하여금 개개인의 희생을 요구했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19세기가 낳은 신낭만주의 성향의 젊은 시인이 점차 민주주의 정부에 도전하는 급진주의적 우파 반란선동가로 변모하는 모습을 묘사해내고 있다. 개인으로서 인간은 당대의 사회와 시대 속에서 만들어지기마련이다. 모든 인간은 이들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피우메 정부 시절 단눈치오가 기초했던 정치 조직의 모든 면모를 철저히 표절했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는 단눈치오를 예수의 등장을 알린 세례자 요한처럼 파시즘의 메시아로 만들어 놓았다. 예수의 잉태를 수태고지한 천사 가브리엘의 이름을 지닌 단눈치오는 파시즘의 잉태를 수태고지한 인물로도 이용된 셈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를 성실히 참고한 히틀러의 나치 정권 또한 단눈치오가 의도치 않게 만들어둔 문화의 착실한 수혜자였다. 단눈치오는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히틀러의 나치즘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들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셈이다. 지금은 우리에게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로 통용되는 홀로코스트 사실 유대교에서 짐승을 통째로 구워 신에게 바치는 번제 의미했다. 단눈치오의 문학적 상상력은 자신의 피우메 시절 피우메를 가장 아름다운 번제(holocaust) 도시 명명한 데서 정점을 찍었다. 파시즘의 성격에 인종주의가 강하게 결합한 나치즘은 분명 단눈치오의 상상력을 흡수하며 용어 홀로코스트에서도 주목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파시즘의 등장이 단눈치오 사람에 의해 형성된 것은 아니다. 휴스핼릿은 파시즘이 예외적인 역사 운동의 기형적 산물이 아니라 유럽의 지적·사회적 삶에 깊이 뿌리내린 경향들로부터 유기적으로 성장해 나온 어떤 것임을 알게 된다.(16)라고 하며 사회적 맥락을 잊지 않고 언급한다. 모든 현상은 당대의 시대와 사회가 구성원들 함께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낸 결과물로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단눈치오가 누누이 주장하던 자신의 정치 기조, ‘시학의 정치 피우메에서 꿈꾸었던 자신의 유토피아는 철학자- 국가를 통치해야한다고 주장했던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 더하여 단눈치오가 니체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해볼만 하다. 현재 신보수주의 불리는 네오콘 사상적 기반 또한 다름아닌 플라톤 니체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세계, 순수한 진리의 세계 몽상가 단눈치오가 주목했던 이상향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역사이래 서양인들의 정신구조를 지배해온 패러다임이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세상에 하나의 진리 존재한다는 일원론적인 시각과 부합하며, 유일신을 상정하는 서양의 기독교와도 모순되지 않는다. 단눈치오가 매료되었던 세바스티아누스역시 황제를 섬길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도록 강요받았고, 세바스티아누스는 신을 믿기로 하여 순교자가 되었다. 서양문화의 이러한 단일성 배타성 정신구조는 플라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단눈치오의 정치적 사유에 토대를 제공한 다른 인물은 니체였다. 단눈치오는 여러 철학자들의 견해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를 내놓았는데, 니체로부터는 엘리트주의 니체의 저술에서 보이는 선언문의 형태, ‘초인 이미지와 디오니소스적 생명력에 대한 관심,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정황을 저자 휴스핼릿은 기록하고 있다. 나는 신보수주의자들이 단눈치오의 사상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단눈치오의 정치적 사유와 신보수주의자들이 기반하는 사상가들이 플라톤과 니체라는 점에 주목해보고 어떤 연관성을 찾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100여년 단눈치오가 의도치 않게 뿌린 씨앗은 분명 파시즘과 나치즘에 이용된 있다. 역사 속에서 돌연변이를 거치고 구체성을 띠어 현재의 신보수주의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부분이 있으리라 충분히 예상할 있겠다.

 

 

 

[3] 저자의 균형 감각과 글쓰기

 

시대를 관통하듯 자신을 몸소 시대 속으로 던져넣으며 살았던 단눈치오. 인물의 다층적인 인물됨과 시대 상을 900페이지가 넘는 원고에 담는 , 그것도 지루하지 않게 담아내는 작업을 마주하는 일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대체로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책의 첫머리는 인물의 정치적 삶에서 정점을 이루던 시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저자는 단눈치오가 활동했던 극적인 시기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저자의 연극적 상상력으로 독자들은 단눈치오가 활동했던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돈의 시대상을 함께 목격하는 것같다. 어느 순간 독자들은 단눈치오가 시인으로 등단하던 17 당시로 돌아간다. 등단한 젊은 시인은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자신이 낙마하여 사망했다는 거짓 뉴스를 퍼뜨리게 된다. 독자는 단눈치오가 만들어내는 거짓 뉴스의 생산 현장을 상상하게 된다.

 

개인의 인간적인 면모만을 살펴보았을 , 단눈치오는 단연코 호감을 주는 인물은 아니다. 그는 대의를 위해 사람들의 희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전쟁광이면서, 숱한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던 호색한이자, 무분별한 낭비가이고, 정치 지도자로서는 현실 감각이 전무한, 신뢰하기 힘든 몽상가였다. 그러나 저자가 이러한 인물을 조명하는 방식은 매우 신중하면서도 균형잡혀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저자는 단눈치오를“단순히 혐오스럽거나 광적인 인물로만 치부될 없으며 (…) 완전히 정상인 존재”라고 평가한다. 단눈치오를 비판하면서도 저자는 그의 문학성과 예술적 재능, 그리고 섬세한 감수성을 충분히 조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상적인 인간으로서 인간의 복잡다단한 층위를 보여주려고 의도했음을 읽을 있다. 물론 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우선 단눈치오가 남긴 방대한 양의 수첩때문이기도 하다. 휴스핼릿의 구체적이고 섬세한 인물 묘사는 분명 메모광 단눈치오가 남긴 유산에 힘입은바 크다. 단눈치오에게는 글쓰기의 모든 원천과 글감이 결국 자신이 보고 관찰한 모든 것을 담은 수첩 안에 있었다. 저자 역시 방대하고 자세한 단눈치오의 메모를 따라가며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것이다.

 

그의 공적인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전체적인 윤곽을 가늠할 없는 모자이크 조각처럼 미세한 관계들을 포함한 사적인 삶과 공존했다.(524) 저자가 평가하는 단눈치오의 삶의 양태(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의 공존) 단눈치오의 삶을 담은 책의 글쓰기 방식과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단눈치오라는 인물의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을 모자이크 조각처럼 번갈아가며 독자에게 제시하여, 방대한 글이 가져올 있는 지루함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책의 차례를 다시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 1부는 단눈치오의 정치적 경력이 정점이던 시기부터 시작하여, 시인으로 등단하던 시절, 그리고 스스로 전설을 만들던 인물의 주요 시기를 스케치하듯 빠른 전개로 보여준다. 2부에서는 단눈치오의 다양한 면모를 구성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여러 키워드를 장의 제목으로 하여 인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니체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하는 엘리트주의 초인”, 그리고 디오니소스적 생명력에 대한 열망을 암시하는 생명 같은 ()  설정해놓은 부분을 있다. 혹은 자신의 출신 성분에 대한 단눈치오의 생각을 엿볼 있는 () 고향”, 단눈치오가 되고자 했던 귀족 대한 취향, 그리고 단눈치오가 유달리 관심을 보였던 혹은 페티시적인 대상을 암시하는 순교”, “질병”, “”, “속도등과 같은 장들도 인물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3부에서는 1부에서 보여주었던 정치 경력의 정점기에 전쟁 영웅으로서 활약하던 시기와 피우메 점령 시기, 그리고 물러나 말년의 은둔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끌어내며 인물의 일대기를 마무리짓고 있다. 정치 무대에서 물러난 , 단눈치오는 은둔지 비토리알레에서 자신만의 세계 속에 매몰되어 살아갔다. 코카인과 아편, 수면제 진통제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면서 무솔리니가 종종 보내주던 선물을 받거나 장군 서열로 진급되면서 자축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다. 단눈치오가 파시스트 정권에 길들여지며 잊혀져가는 말년의 모습은 당시 이탈리아의 권력을 점점 장악해가는 파시즘 세력의 행보와 교차되며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정리하며

개인은 누구나 당대의 사회 속에서 태어나기 마련이다.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개개인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단눈치오의 분열적이고 극단적인 이면들은 마치 혼란스러웠던 시대상을 닮기도 했다. 특히 책은 단눈치오라는 인물이 허물어져가는 모습과 함께 1 세계 대전 이후 정치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광기로 치닫고 있는 이탈리아 사회를 묘사해내고 있다. 역사의 가운데에 스스로를 던져 세상과 긴밀하게 호흡하던 단눈치오는 스스로 전설이 되었다. 세상의 주목을 받았던만큼, 단눈치오는 점점 권력을 잠식해들어오는 파시즘 정부에 모든 것을 강탈당하듯 이용되기도 하였다. 무솔리니 파시즘의 거의 모든 현현은 단눈치오의 상상력에 기원한다. 나아가 나치 독일에도 단눈치오의 상상력은 바이러스처럼 전이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나아가 플라톤과 니체로부터 받은 사상의 관점에서 단눈치오의 상상력은 소멸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신보수주의에도 이어지고 있지 않은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니체와 단눈치오에게 동시에 영향을 인물이 바로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옙스키라고 저자는 언급했다. 가지 궁금해지는 것은 그렇다면 니체의 초인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 나오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미지에서 영향을 받았을까 하는 점이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단눈치오의 소설 <무고한 존재>(문학과지성사, 윤병언 옮김, 7쪽에서 인용한 부분을 재인용함)에서 단눈치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의 정의는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세상의 어떤 법정도 나에게 판결을 내릴 없을 것이다.바로 초월한 인간’, ‘정복되지 않은 ’, ‘초인으로서의 인물상과 유사한 맥락이 증거이다.    

 

정확히 기억 나지는 않지만 어느 문인이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걸고 스스로를 들이밀며 시를 쓰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던가. 시인으로서 단눈치오는 이처럼 자신의 존재를 걸고 처럼 세상을 향해 스스로를 밀고나가며 삶을 살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단눈치오는 어쩌면 평생을 자신이 꿈구는 문학적 환상의 영역에서 살아간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19세기라는 시대의 무대에서 스스로 주인공을 맡아 공연하는 연극 배우이자 광대이기도 했으며, 세계 최고의 나르시시스트로 보아도 무방할 같다. 물론 단눈치오를 미화하거나 현재의 도덕적 기준으로 그를 소급하여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의 판단기준 너머에 존재했던 사람이다. 옮긴이는 단눈치오를 가리켜 초인으로서 지상의 맥락을 벗어난 기호라고 표현했다. 그는 탈맥락화된 기호-인간이었다는 말이다. 현실 정치에 뿌리는 내리고 있던 무솔리니와는 달리 실천으로서의 정치와 무관했던 단눈치오는 어디에도 안착하여 뿌리를 내리지 않는 부유하는 기호였기에 오히려 파시즘에 도구로서 이용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단눈치오는 분명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우리가 어떤 교훈이나 배움을 얻을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는 인간이 누릴 있는 가능성의 극한을 시도해본 사람이자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마도 저자 루시 휴스핼릿이 단눈치오에 주목하고 오랜 시간을 책에 할애한 이유가 바로 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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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가게 고양이는 삼청동 골목을 누비는 고양이었다. 문 밖에서 빼곰 고개를 빼서 갤러리 안을 들여다본다. 날 쳐다보면서 문열어달라는 모양으로 울어댄다.

문을 열자 잽싸게 들어온 녀석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 그림과 사람을 구경하다 곧바로 낮잠을 자기 시작....

한동안 낮잠을 잔 후 볕이 좋은 곳에 앉아서 어슬렁거리기 시작. 햇볕 쬐며 나와 마주보기 15분...^^;;
다시 뒤돌아서 면벽수행(?) 한 15분...
갤러리에 나타난 손님은 오후의 햇살을 즐길줄 안다. ^^

갤러리 대표님이 말씀하시길, 이전에 이녀석은 계단 중간에 이렇게 앉아있거나 낮잠을 잔 적이 없었다고...

내가 만만한 것이구나 ...ㅋ

오늘 나타난 “내 눈에 예쁜 것”



#삼청동고양이 #갤러리포트폴리오 #GalleryPortfolio #내눈에예쁜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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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전시 관련 소식입니다.

서울 3호선 안국역에서 정독 도서관 올라가는 골목길에 있는 

작은 갤러리 Gallery Portfolio에서 열리는 소소한 그림 전시 입니다.





<내 눈에 예쁜 것>

윤영주 개인전




기간: 2019.04.02 (화) - 04.08 (월)

장소: Gallery Portfolio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3길 72번지(안국동 1901) 







 

전시 포스터 이미지









 

엽서 이미지











액자 이미지

 

 

 

 


 


 

갤러리 포트폴리오

(전시 준비 마무리된 모습)



 




갤러리 포트폴리오 오시는 길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정독도서관 가는 골목길로 올라오시면 됩니다.

이니스프리 건너편, 경복궁빵집 옆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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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맑음 - 청소년과 함께 읽는 5.18 민주화 운동 이야기 창비청소년문고 33
임광호 외 지음, 박만규 감수, 5.18 기념재단 기획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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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8, 맑음

임광호/배주영/이민동/정수영 지음  |  [창비]

 

 

지난 3 11 88세의 전두환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법정 앞에 섰다. 2017 4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5.18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하여 전두환은 시민단체와 유가족에 의해 고소되었고 불구속 기소로 재판받게 되었다.

(참고 기사 출처: 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232160#08gq )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이처럼 여전히진행중이다. 이번 재판에서 전두환은 법정에서 사과없이 5.18 당시 헬기의 기총소사는 없었다고 여전히 주장했다. 참고로 기사에 따르면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와 검찰 조사 등을 통해 5.18당시 헬기 사격은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이미 입증되었다. 기사는 나치가 집단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죽인 일이 없다고 주장했던 어용 역사가의 주장에 맞서 법정에서 진실을 두고 공방했던 실제 사건을 토대로 제작된 영화 <나는 부정한다> 떠올리게 했다. 영화는 진실을 왜곡하려는 집단에 맞서 역사를 올바른 사실을 기억하고 다음 세대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는 기회를 주었다.

 

 

오늘은 현직 중고등학교 교사들이 모여 청소년을 대상으로 5.18 민주화 운동(이하 5.18)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5 18, 맑음> 만난다. 책은 크게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전반부는 5.18 전후의 국내 분위기와 5.18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간결하게 기술하고 있고, 후반부는 역사의 진실 찾기노력에 대해 국내외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며, 5.18이후 시민들이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책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5.18 증언하는 세세한 자료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5.18 당시의 상황에 대해 모르고 있던 일반 독자에게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시간이 모든 문제의  약은 아니다]

이번 재판 기사를 보고 역사의 사건으로 세기 가까이 지나 관련자를 법정에 세운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여전히 진실을 부정하고 있는 책임자들의 한결같은 태도 역시 대다수 시민들의 마음을 더욱 헛헛하게 만든다.  사람이 대개 괴로운 일을 겪고나면 주변에서 시간이 답이다라고 말해주곤 한다. 일면 수긍하게 되는 말이긴 하지만, 인간이 겪는 모든 괴로움에 대한 해결책은 분명 아닌 같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의 경우, 특히 5.18 같이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겪은 경험은 경험자(생존자 혹은 유가족)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기 마련이다. 몸에 각인된 기억은 평생을 걸쳐 살아남은 이들을 괴롭히고 삶을 갉아먹을 있는 존재다.

 

 

5.18 당시 임신 8개월인 어느 부인은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배속의 아이와 함께, 예기치 않은 죽음으로 가족 곁을 떠났다.   근처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중학생 아이들이 공수부대가 총에 맞아 죽기도 했다. 계엄군에 직접 총을 들고 맞서 싸우지는 못해도 시민 부상자들을 위해 헌혈을 했던 어느 여학생은 헌혈 귀가하다 총에 맞고 다시 병원으로 실려온 사례도 있었다. 당시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평생 얼마나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야 했을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5.18 사람 사람의 희생자로 인해 유가족들은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광주 시민,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집단에 던진 트라우마를 낳은 역사적 사건이다. 특히 공권력의 정점인 국가의 군대 조직을 무방비 상태의 무고한 시민들에게 어떤 예비 조치도 취하지 않은 휘둘렀기에 더욱 충격을 준다.

 

 

많은 기성세대들은 떳떳하지 못했던 집단의 과거를 들추어내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당연히 예상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집단이 공유하는 트라우마는 진실을 덮는다고 하여 잊혀질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특히나 전두환 회고록 처럼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사람이 회고록의 주장으로 진실이 드러나거나 집단의 트라우마가 해소되길 기대하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반면 아직도 직장에서 업무로 만나게되는 어르신 중에는 아직도 5.18 빨갱이 소행으로 진압과정에서 희생자가 생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놀랄 때가 있다. 가짜뉴스에 세례를 받고, 정보가 신념 내지는 교리가 되어버리면 정말 이런 사람들이 존재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5.18 더더욱 현재진행형인 역사라고 말할 있다. 유가족 이들의 친구 동료들에게는 시간을 약으로 삼아 과거를 덮는 것으로 개인과 집단의 트라우마가 치유되기 보다는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 회복을 시작으로 하여 진실을 기억하고 공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

 

 

 

[우리가 있는 일이란]

책을 읽으며 평범한 시민으로서 우리가 5.18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우선 역시 5.18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체적인 이해를 갖지는 못하였지만 <5 18, 맑음> 통해 역사적 사건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처럼 막연하게 5.18 알던 사람들은 우선 5.18 대해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일반 시민으로서 있는 번째 선택일 같다. 희생자들과 유가족의 아픔에 공감하고 손을 내밀어 맞잡아 주는 일도 있지 않을까. 책에 소개된 아르헨티나의 오월광장어머니회 광주의 오월어머니집과의 연대도 그러하고, ‘5.18엄마가 4.16엄마에게보내는 메시지 또한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응원의 손을 내미는 일이다. 언론은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독자 사이를 매개하는 필터의 역할도 하고 있으므로, 시민들은 언론의 기능을 이해하고,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언론의 기사를 보다 비판적인 안목으로 판단하는 시민의 태도 또한 필요하다.

 

 

책에서 저자들은 언론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 하며 기자를 소개하고 있다. 나는 5.18현장을 최초로 담은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의 이야기를 막연하게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책에 힌츠페터에 대해 보다 자세히 소개가 되어 그가 남긴 사진 장과 진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알게 되었다. “우리 독일인이 2 대전 저지른 만행을 기억하는 만큼 5.18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84)라고 언급하기도 했던 그는 기억하기 중요성을 알았던 기자였다. 책의 저자들도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언론은 진실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킬 있는 존재이면서도, 시민들을 연대하게끔 해주는 도구, 매개체의 역할도 한다. 힌츠페터 이후 다른 국내외 기자들의 사명감과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만큼의 세부사항이 전달되어 공유되지 못했을 것이다. 올바른 언론의 역할을 이해하고 의식있는 언론이 사회에 본분을 있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2부에서 특히 주목하게 부분은 일반 시민이자 탄광의 카나리아같은 역할을 하는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글을 쓰는 문인들을 비롯하여 영화감독들 그리고 화가와 음악가들은 5.18민주화 운동을 모티브로 하여 각자의 재능을 발휘했다. 저자는 책에서 예술의 사명을 밝히고 있는데, 하나가 기억의 재현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사명 예술 자체보다는 예술가의 것으로 보는 편이다. 예술가들이 담당하는 기억의 재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앞서 언론의 역할이 연대를 위한 도구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듯이, 예술가들 또한 자신의 작업을 통해 감상하는 시민들에게 다른 정서적인 연대를 촉구한다고 있겠다. 어쩌면 언론은 이성적인 연대, 예술가들은 감성적인 연대 가능하게 해주는 창문이 된다고 있다. 특히 예술가들은 사회 현상에 대해 아무런 사리없이 바라보고, 비판할 있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표현이 글이든, 영상이든 혹은 음악이나 그림이든 예술가들은 모두 집단의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론을 비롯하여 예술가의 역할은 개인 집단의 역사를 간직하므로써 집단의 기억을 강화해주며, 집단의 감수성을 예민하게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존재라고 말할 있겠다.

 

 

 

[글을 나가며 - 이제 다시 시작이다]

5.18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압 작전명이었던 화려한 휴가 같은 이름의 영화 <화려한 휴가> 처음 보았을 받았던 충격, 영화 <박하사탕> 보았을 받았던 충격을 기억한다. 나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너무나 모른 살아왔음에 부끄러웠던 기억도 난다. 이후 나는 예술인들이 남긴 작업들을 통해 5.18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번 <5 18, 맑음> 통해 보다 많은 참고 리스트를 갖게 되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5.18 대해 좀더 알아가는 ,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개인으로서 소박하게나마 있는 일이란 생각을 한다.

 

 

책을 읽으면서 반인륜 범죄에 공소시효란 없다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는 모리스 파퐁 재판부분이 또한 기억에 남는다. 사건 또한 내가 모르던 것이었는데, 파퐁은 비시 정부 시절 나치에 적극 협력했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비시 정부 시절 당시 파퐁은 보르도 지역 유대인들 16,000 명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보냈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은 87세의 파퐁을 법정에 세웠다. 법정에서 그는 명령을 수행했을 공무원으로서 의무를 다했다.”, “나는 위에서 시키는 일을 했고, 나치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몰랐다.”(178)라며 무죄를 주장했다고 한다. 진술은 한나 아렌트가  기록하고 있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진술과 너무나 흡사하다. “(아이히만) 자신이 맹세한 대로 모든 명령에 복종했고, ‘자신이 의무를 항상 완수하는데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다고 주장했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58) 아이히만도 역시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최종 해결책 위해 성실히일했던 공무원이었다. 파퐁이나 아이히만 역시 집단 속의 개인으로서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말인데 논리가 이들에게 일말의 면책 사유가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사례는 내게 우리가 스스로 비판적인 사유와 주체적인 결정을 내릴 있는 입장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있는가를 또한 있기도 하다.

 

 

의식있는 사회 각계층의 노력으로 5.18 기록한 각종 기록물들이 201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도 많은 숙제가 남아있다. 굴곡진 역사 속에서 희생된 많은 사람들에 대한 명예 회복과 살아남은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같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을 한다. 5.18 사례는 우리가 살펴보아야할 과제의 출발점이 있을 것이다. 오늘 만난 <5 18, 맑음> 통해 여러 희생자와 유가족의 목소리를 들을 있었다. 나는 여러분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으로 마무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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