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요람 Cat’s Cradle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지음 | 김송현정 옮김 | [문학동네]

 

 

[1]

소설은 나를 조나라고 부르라라는 대목으로 시작한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 문장을 패러디하며, 기독교의 <구약성경> 등장하는 모티브 또한 함축하고 있는 문장이다. 소설을 읽어나가며 저자가 정말 독특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흥미가 더해졌는, 블랙 유머와 생태주의의 시선을 잇는다는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보다는 좀더 수월하게 접할 있었다.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이야기 전개에도 중간 중간 작가는 진지한 마디를 알게모르게 툭툭 던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특이한 여행 제안은 하느님이 제공하는 무용 수업이다.”(85) 라는 위트가 들어있는 문장이 하나의 예이다. 나는 이러한 문장이 특히 재미있다고 느꼈는데, 장편소설 <고양이 요람>(1963) 시점에서 21 후인 1984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던 작가와 과연 동일한 인물일까 궁금해졌다. 어쩌면 문장에도 전쟁의 복판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전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미국, 팍스 아메리카나의 사회를 바라보는 저자의 냉소가 묻어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본다. 

 

 

[2]

저자의 연보를 보다보면 저자 자신의 생애도 <고양이 요람> 주인공 조나, 존처럼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생화학을 공부하던 코넬대 재학시절 대한민국의 남학생들 처럼 군대에 입대하고 기계공학을 공부하기도 했던 커트 보니것은 <호밀밭의 파수꾼> 저자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처럼 2차대전에 참전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독일군 포로에 잡혀 드레스덴으로 끌려갔으며,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으로 도시가 불타는 와중에도 가까스로 살아남은 저자의 ---(저자가 소설에서 설정해놓은 사이비 종교인 보코논교 용어로 숙명, 필연적인 운명) 다른 이야기를 예비하는 것이었다. 커트 보니것의 인생을 흔들어놓았던 때의 체험은 다른 사람들처럼 허무주의로 빠지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 대한 애정을 품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를 커트 보니것은 전쟁의 경험을 통해 절실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그토록 무관심한 인간을 적이 없소.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동처럼 차갑게 죽어있는 자들이 너무나 많소. 이따금 그게 세상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92)

 

저자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이 지식에 대한 욕구만 있는 지식인, 도덕적인 책임은 회피하는 과학자들의 문제를 미국의 핵폭탄을 연구하는 과학자라는 설정을 통해 보다 극적으로 제시한. 문득 휴머니즘이라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애정의 정신을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절실하게 이해할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3]

언젠가 경제학을 전공한 사진가 세바스티앙 살가두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 적이 있다. 사진가 경력의 대부분을 세계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 학살 현장 난민 캠프 현장에서 보냈던 살가두는 르완다 난민 학살을 경험하는 것을 끝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안전히 잃어버린 했다. 그리고 마음에 병을 얻고 카메라에서 손을 한동안 놓았던 것이다.

 

살가두가 방문한 난민 캠프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우리가 당장 한반도에 전쟁이 발생하는 경우, 포화를 피하여 피난민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많은 이들이 아프리카의 난민 캠프에서와 같은 환경에 처해지는 것은 피할 없는 결과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도 제주에 난민 문제와 관련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있지만, 문제에 대한 결론을 바로 내리지는 않아도 공적인 대화의 장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할 사항이라는 생각을 한다. 모든 나라에서 난민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난민 수용 여부에 대한 도덕성이나 우리의 처지에 대한 판단을 떠나, 인간이 타인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행위가 아닐까. 인간(人間)’이라는  이 매우 철학적인 용어를 고려할 , 인간은 '인간 사이의 관계' 형성을 통해 서로 의지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질적인 이유로든 정신적인 이유로든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통해 문득 문득 드러나는 작가의 인간에 대한 관심, 애정이 느껴졌다.

 

 

[4]

소설은 알듯 모를듯 매우 다양한 이슈들이 화자인 조나의 지나가는 말투를 통해 다루어진다. 미국의 세계 패권주의, 나치즘, 지식인과 과학자의 사회적/도덕적 책무, 진짜와 가짜의 문제, 종교의 본질, 미국의 매카시즘이 50-60년대에 남긴 , 비트 세대로 대변되는 미국의 저항운동, 여권 문제 등등에 대한 저자의 폭넓은 관심이 보니것 특유의 신랄한 유머에 묻어 나오고 있다. 무거운 사회문제 뿐만 아니라 저자는 문학의 역할 내지는 기능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고 있다.

 

나는 아버지 캐슬에게 물었다. “선생님, 문학이 주는 위안을 박탈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죽을까요?”

하나겠지. 심장 경화 아니면 신경계 위축.” 그가 말했다.

어느 쪽도 그리 유쾌하진 않을 같군요.” 내가 말했다.

그렇소. 그러니, 젠장, 사람 모두 제발 계속 글을 쓰시게!” 아머지 캐슬이 말했다.’ (276-277)

 

 

[5]

옮긴이는 책의 제목 고양이 요람 상징하는 것이 사람들 스스로가 행복과 위안을 주기 위해 만든 모든 종류의 거짓이라고 풀어주고 있다. 이는 밀란 쿤데라가 <참을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야기 했던 키치와도 닮은 구석이 있다. ‘고양이 요람이든 키치이든 모두 진짜에 해당하는 대상 또는 진실이 아닌 허구 내지는 모조품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다. 대량복제가 가능해진 산업사회의 제품/결과물(모조품) 우리는 나의 개성을 표현해주는 물건이라 착각하고 살아가며 이를 욕망한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진실을 대면할 무엇을 선택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고양이 요람>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호니커 박사의 난쟁이 막내 아들 뉴트가 실뜨게를 하다 문득 대화 상대방에게 고양이가 보이세요? 요람이 보이세요? 묻는 대목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화자들이 사회의 진실에 대면하는 순간 대화 상대방에게 묻는 절차를 빌어 우리 독자에게도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손에 걸린 실을 보고 요람 같이 생겼는지혹은 요람 속에 고양이가 보이는지 사람의 상상력 선택 달려있을 것이다. 뉴트는 대화 상대자에게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내지는 '무엇을 보고 싶은가?’ 묻고 있는 것이다.

 

보니것은 고양이 요람 선택 기로에서 어느 입장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아마도 어떤 규칙이나 관점을 정하여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더없는 죄악이 아닐까 생각하는 듯하다. 이유는 소설의 커버 페이지에 나온 일명 <보코논서> 구절에 실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책의 어떤 내용도 진실이 아니다.

그대를 용감하고 친절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는 포마(무해한 거짓말) 따라 살지어다.

<보코논서> 15

 

관점에서 선언 성경에 등장하는 핵심, 사랑 다른 표현으로도 읽힌다. 다시말해 세속적인 사랑의 개념차원을 넘어 인간에 대한 애정, 배려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타인에게 강요한다거나, 특정 집단/기득권 층에만 유리한 법의 제정은 없는 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교조적인 장치가 될 뿐이다. 차라리 타인을 배려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포마'가 오늘 나오 타인의 하루를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커트 보니것의 소설은 사이비 종교 보코논이라는 설정과 저자의 유머를 통해 숙성된 매우 기독교적 배경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며, 인간 관계의 핵심적인 비결을 알려주는 비전(秘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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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 하버드 법대, 젊은 법조인이 그린 법정 실화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원제: THE FACT OF A BODY: A MURDER & A MEMOIR)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레즈네비치(Alexandria Marzano-Lesnevich)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이상한 기억상실이 때때로 나를 급습했다. 나는 안에 해결되지 않은 어떤 것이 있음을 그래서 알았다.”(325)

 

 

미국 최고의 명문 하버드대 법대를 재학중 인턴자격으로 살인사건과 접하게 저자 알렉산드리아는 남자 아이를 살해한 가해자 리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의 이러한 선택적인 기억상실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 자신의 몸이 기억하는 특정한 사건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처음 경험하는 공백 경험은 아마도 신체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을 이를 완화하려는 신체의 반작용으로 이해된다.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살인 사건과 자신의 비망록이 혼재된 독특한 글쓰기를 보여주는 책이다. 실제 사건에 대해 방대한 자료들을 읽고 검토한 후에도, 생생한 사건을 보여주기 위해 현장에서 실제로 나누었을 법한 대화를 상상하기에 주저함이 없다. 아울러 , 그리고 그녀의 글쓰기는 너무나 솔직하기에 오히려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비롯하여, 가족의 치부를 담담하고도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특히 저자가 어린 시절 겪었던 성추행의 경험을 끊임없이 반추하며 자신을 공개하고 있다. 책의 서술방식은 개인의 유일무이한 경험과 아픔의 기억에 기반하기에 독창적이면서 유일한 글쓰기이며 그만큼 인상적인 이유다.

 

 

 

책의 구조와 중심사건에 대해

책에서 중심이되는 사건은 실제 일어났던 일들을 기반으로 한다. 하나는 아동 성추행으로 이미 번이나 실형을 살았던 리키 랭글리가 출소 1 5개월 만에 동네 여섯 아이 제레미를 살해한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다른 하나는 저자의 어린 시절 가정에서 겪게된 성추행에 기반한다. 사건이 엄연히 별개의 사건임에도 저자가 되새기며 제공하는 양상의 이면에는 밀접한 관계, 다양한 접점이 존재한다. 영화의 플래시백 기법처럼 현재와 과거의 장면을 번갈아 오가며 별개의 사건을 조금씩 드러낸다. 결국 저자의 의도에 따라 사건은 결국 어느 지점에서 유사점을 지니고 있음을 독자에게 깨닫게 해준다. 따라서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본적으로 현재와 과거(살인자와 저자의 현재와 과거) 왕복해가며 마치 깨져버린 도자기의 파편들을 줍는 과정처럼 기억의 편린들을 모으는 작업이기도하다.  

 

 

저자가 오랜 시간 써내려가면서 수없이 떠올렸을 기억들은 현대 인간의 삶에 영향력을 주는 굵직굵직한 여러 이슈들을 관통한다.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뿐만 아니라 사형제도 인권에 대한 주제, 삶의 모순으로 보이는 진실의 문제, 가족이란 무엇이며, 개인의 자존감 문제와 같은 우리 삶에서 만나는 보편적인 주제에 폭넓게 맞닿아 있다. 알렉산드리아가 청년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살인 사건의 재판과정과 자신의 문제들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결국 인간이 삶에서 경험하는 폭넓은 경험을 아우른다. 저자는 이러한 성찰을 다양한 국면에서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의 역할과 태생적 한계

우선 알렉산드리아가 떠올리는 자신의 어릴 기억과 리키 랭글리 사건이 맞닿는 접점은 아동 성추행 관련이 있다. 살인 피의자 리키 랭글리는 아동 성추행이라는 과거의 흔적 이외에 살인이라는 죄목이 추가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반면  저자의 과거는 자신이 성추행 피해자이며 가해자가 바로 할아버지라는 사실에서 리키 사건과의 접점이 위치한다. 자각의 순간으로부터 사건은 결코 분리될 없는 하나의 특이점으로 수렴하기 시작한다.

 

 

법이란 지구상에 개체만이 존재하고 살아갈 경우에는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러 인간이 모여 살아갈 각각의 구성에게 각각의 진실이 존재한다고 해도 개별적인 진실이 구성원 간에 상호인정이 안되고 충돌이 발생할 경우 문제가 된다. 비전문가의 관점에서 법이란 무엇인가를 따져보면, 법은 인간 사회가 혼란에 빠지지 않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준거가 되는 장치란 생각을 한다. 다만 법은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고 한계를 인지하는 또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우리의 근현대사를 잠깐만 살펴보더라도 권력을 가진 사법부의 수장이 정치 권력에 복종할 국민들이 어떤 고난을 겪을 있는지 있는 사례가 적지 않다. 법집행은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법을 알고 이를 활용할줄 아는 이들만을 위한 사회를 조성하는데 악용될 있는 여지를 포함한다. 사법부가 독립적이어야하며, 법이 제시하는 기준과 법관의 양심에 충실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저자 알렉산드리아는 리키 랭글리 사건과 같은 사건이 사회를 휩쓸고 제정된 새로운 법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실효성을 갖는지 반문한다. 성범죄자의 신상을 지역사회에 공개한다고 하지만, 이러한 정보가 지역사회에 전달/공지되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있음을 지적한다. 한편 저자 자신에 대해 성추행을 일삼았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법의 제재를 받지 않고, 혹은 경계의 대상에서 빠져버린 사람들이 있게 마련임을 지적한다. 나아가 사회가 엄한 법을 적용한다고 해도 범죄율이 줄지 않을 있다는 점도 간과하면 안된다. 법의 제정이 범죄 발생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할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재 음주운전 사건으로 음주운전자에 대한 법률을 엄하게 정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움직임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법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제제를 가하는 힘보다는 사건이 일어났을 이를 제재하는 기능이 크다는 점을 인지해야할 같다. 보다 중요한 일은 근본적인 원인을 차단해나가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이번 음주운전자 처벌관련한 법이 엄하게 변경되는 것과 함께 취지에 대한 공감대, 그리고 희생자 가족에 대한 공감대도 함께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가 제레미의 사후 제정된 성범죄자 신상공개와 관련한 법률이 시행된 20년이 지나도 성학대율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지적하는 대목은 분명 법의 본질과 관련한 중요한 고찰임을 염두해두어야 것같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우리는 기억이란 현상이 뇌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책에 등장하는 여러 장면만 보더라도 사람의 삶에서 기억이라는 것은 뿐만 아니라 전체를 통해 각인되고 저장된다는 점을 수긍할 있게 된다. 실체로서의 몸은 여기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정신현상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몸전체를 통해 기억이 전해지며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게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리키의 어머니 베시가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리키를 임신하고, 리키는 베시가 받아 먹는 각종 약과 치료용 엑스레이에 숱하게 노출된다. 게다가 베시가 임신 마신 상당한 위스키도 리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놀라운 일은 리키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오스카의 교통사고 현장에 대한 꿈을 리키는 어린시절 계속하여 꾸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살인자 리키는 어쩌면 어머니 베시 뿐만 아니라 가족의 모든 아픔을 몸에 고스란히 간직한 태어난 사람이기에 조금 다른 관점에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억이란 내가 임을 인식하는 출발이되기에 내가 라는 자기동일성을 확인하고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반면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은 시간을 거듭하여 자신을 괴롭히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알렉산드리아가 할아버지로부터 당한 성추행 때문에 몸에 흉터는 성인이되어서도 그녀를 붙들어 매고 있다.  거식증 같은 증세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가 가한 성추행의 기억은 오히려 저자에게 이를 잊게함으로써 스트레스를 완화하려는 몸의 메커니즘에 영향을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인턴으로 루이지애나 로펌에 갔을 , 리키의 이름을 듣고도 곧바로 잊는 장면은 아마도 리키의 사건이 자신의 과거와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한 몸의 망각기작이었을 같다. 리키의 이름은 잊고 싶은 할아버지의 기억과 만나는 접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 흉터가 남았다. 흉터가 통증을, 칠흙 같은 기억 상실을 뛰어 넘는 증거가 아닐까? 끝나버린 기억 너머의 증거가 아닐까?”(392)

 

저자가 법조계를 떠나 오랜 세월 다시 루이지애나로 돌아와야만 했던 이유가 루이지애나라는 지역이 주는 느낌 때문이라 언급했다. 특유한 장소성과 기후 등이 저자에게 주는 모든 느낌과 감정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시작하며 인용했던 저자의 언급은 분명 자기 자신만이 해결할 있는 실마리를 자신이 쥐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머리가 아닌 몸에 각인된 느낌들은 현재의 저자와 과거의 저자를 연결하는 매개체였다. 마찬가지로 리키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읽고 알렉산드리아는 비로소 리키와 그의 가족을 상상할 있었고, 그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414)라고 기록했다. 자신의 몸에 각인된 흉터로 할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로부터 리키를 사람으로서 바라볼 있게 되었던 것이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출발점은 바로 한번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다.

 

 

 

사형제도를 둘러싼 여러 장면들

자신도 저자처럼 사형제도를 반대한다. 하지만 저자의 고백을 읽으니 나도 그녀처럼 사형제도를 반대한다는 착각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가족이 비슷한 일을 겪었다면 나도 사망한 제레미의 어머니인 로렐라이처럼 아들을 살인한 리키를 위해 구명운동을 있을까? 아마 나는 그렇지 못할 같다. 알렉산드리아의 독백처럼 나도 변호사가 있는 자질은 부족한 모양이다. 한편 로렐라이는 리키를 용서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다만 자녀를 가진 어머니의 입장에서 리키의 어머니 베시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된 자로서 자녀가 죽는 일을 리키의 부모가 맞이하지 않도록  노력한 것이 맞을 것이다. 이러한 심경은  실제 사형수의 구명운동을 벌인 노력을 담은 영화 <데드 워킹 Dead Man Walking>에서 수잔 서랜든이 연기했던 인물인 헬렌 프리진 수녀의 마음가짐과도 다르지 않을 것같다.

 

로렐라이는 베시에게 자기 자신의 모습이 보여서 리키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다른 여인의 아들이 목숨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447)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의외의 인물이 있는데, 다름아닌 영국인 변호사 클라이브 스태퍼드 스미스이다. 그는 평생 미국의 사형제 폐지를 위해 헌신한 사람으로서 공로로 영국 여왕의 훈장도 수여받은 인물이다. 정황상 그는 살해당한 제레미의 어머니와 함께 리키의 구명운동을 위해 헌신하여 살해사건이 일어난 10년만에 형량을 교수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낮추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리키의 감소를 위해 변호하는 일을 하게된다. 법은 사회의 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최소한의 테두리라는 생각을 하지만 언제나 그러한 바램에 맞추어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법도 나름의 역할 외에 틈새가 있기 마련이고, 틈새로 무고한 사람들이 제재를 받거나 나아가 사형과 같은 중한 벌을 받게 되는 일도 있다. 그러한 부작용을 줄일 있는 균형은 클라이브 변호사와 같은 인물들이 담당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살인자를 사람의 인간으로 있는가는 저자가 말한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있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몸에 각인되는 기억 떠올려보면 우리가 어떤 삶을, 어떤 경험을 과거에 했는지에 따라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달라질 있다.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란 우리가 과거에 경험했던 모든 일들을 동원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이 지은 죄가 무겁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할 있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로렐라이가 리키의 구명운동을 하기 시작한 시점은 아들이 살해당한 8년이 지난 시간이었다. 시간 동안 그녀는 리키와 그의 과거, 그리고 리키의 가족에 대한 사실들을 끊임없이 돌이켜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숙고의 시간 이후 로렐라이는 마침내 리키를 인간으로서 바라보는 계기가 있었을 것이며, 그를 용서는 아니더라도 화해할 있는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과정을 저자도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기억, 할아버지의 추행과 자기 가족과의 유사성을 비교하며 자신의 과거와 비로소 대면할 있는 준비를 마련해나갔던 것이다.

 

 

 

나가며 자신과 화해하기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짚어보자면 저자 알렉산드리아가 어린 시절 몸에 남겨진 오랜 상처를 발견하고 아픈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아픔을 치유해가는 과정을 떠올리게 된다. 과정은 자신이 접했던 살인 사건을 통해 실마리를 찾고 사건이 결코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과정이었다고 수도 있다. 저자는 자기 안에 해결이 안된 무언가 인식하고 정체를 파악하는 여정에 오른다. 결국 자신의 내면에 상처받고 꽁꽁 숨어 있던 내면의 아이 찾아내고,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번역자가 사용한 표현인 팩트로서의 (fact of a body) 실재하는 신체, 외부의 자극에 왜곡없이 기억하는 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의 뇌는 과거에 경험했던 내용을 왜곡하여 기억할 있지만, 고통이라는 자극을 몸이 겪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바로 우리의 몸은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는 거짓없는 저장매체로서 기능하며 이것이 엄연한 팩트로서의 되는 것이 아닐까.

 

 

아울러 알렉산드리아가 살인사건을 접하고, 로렐라이의 사형수 구명운동을 보면서 느꼈을 혼란스러운 심정을 떠올려본다. 또한 가족의 침묵 속에 법의 제재를 받지 않고 삶을 마감하였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후유증 결국 저자 자신의 흉터와 함께 남아 무언가 해결이 안된존재로서 여전히 남아있던 것이다. 저자는 결국 자신을 돌아보며 흉터와 아픔의 기억에 주목하였다.

 

내게 과거는 땅속에서만 있는 아니었다. 과거는 몸에 있었다.”(383)  

 

저자의 할아버지 역시 어렸을 성추행 피해자였다는 , 결국 할아버지 역시 피해자이자 가해자 였음을 알게된 , 할아버지를 좀더 이해하게 되었던 같다. 알렉산드리아가 리키의 가족과 리키에게 들었을 감정의 동요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움직임은 할아버지와 자신에게로 확장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무덤 앞에서 젊고 앞날이 창창했을 커플의 모습부터 나이 모습, 그리고 지금은 땅속에 묻힌 모습을 상상하며 강한 놀라움의 충격을 받는다. 우리는 모두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여러 시간의 중첩을 통해 자신을 관통해 나간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 사건이 시간과 공간의 이질적인 요소들의 중첩 속에서 순간 강하게 알렉산드리아를 관통해 나갔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받는 상처, 특히 외상이 아닌 모든 이들의 내상은 결국 개별자의 기억과 벌이는 싸움에 다름아닐지도 모른다. 몸에 각인된 기억의 상처는 두뇌에 기억되는 왜곡될 있는 상처와 달리 살아있는 평생 몸의 주인과 함께할 것이다. 저자는 20 가까이 이어지는 살인사건 재판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기억과 조우했다. 과정에서 자신의 내밀하고 아픈 기억을 밖으로 꺼내 놓고 대면했다. 책은 저자의 솔직한 자기 고백의 비망록이자 저자가 살아가는 생에 가장 중요한 국면을 다룬 저자의 분신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픔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마주대하고 손을 내밀어 과거와 화해하는 일만 해도 상처받은 내면의 아이를 다독거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수 있게 힘을 주는 일이 아닐까. 책을 덮으면서 저자의 짧은 독백 마디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사람은 자기를 자기로 만든 경험을 지니고 다닌다.”(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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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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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소설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진희 저/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저 / 느낌이있는책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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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er)

셰익스피어 원작 | NT Live(국립극장 상영) | 연출 니콜라스 하이트너

 

입장하며

연극 관람은 오래간만의 일이다. 대학시절 아서 밀러의 희곡세일즈맨의 죽음 인상깊게 이후로 20 년이 지났지만 원작에 비교적 충실한 연극을 기회가 없었다. 아니 연극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말이 적확하겠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문학작품을 거의 읽지도 않았기에 연극인들이 그저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으로만 치부했던 같다. 이제 중년이 되어 오래간만에 다시 보는 연극은 청년 시절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잠자리에 들때면 가끔씩 내가 내일 아침 깊은 숨을 내뱉으며 다시 일어날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삶의 유한성을 보다 느끼게되는 나이. 지금 다시 되돌아보니 모든 연극(희극, 비극을 포함하여) 기본적으로 비극 속에서 잉태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마저 하게 된다. ‘모든 존재는 필멸한다 전제가 연극의 기본 정신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모든 연극은 인간이란 존재의 삶에서 길어낸 비애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출하는 행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연극배우들은 반드시 다독가는 아닐지언정 분명히 정독가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나의 고전을 수십 읽고, 작품 속의 인물이 되려고, 부단히 자신의 자아와 일으키는 충돌을 경험하며 작품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보게된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 영국 국립연극단이 공연한 실황 녹화 작품이다. 현대적인 연출로 셰익스피어의 원전을 무대에 올렸다. 작품을 보기 전까지 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나 카이사르에 대해 아는바가 없었기에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제목과 달리 브루투스가 주인공인지도 알지 못했다. 이번 연극은 원전과 마찬가지로 카이사르가 장군으로서 반역자로 치부된 폼페이우스를 물리치고 로마로 개선하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브루투스가 죽음에 이르는 데까지의 서사를 다루고 있다.   

 

 

브루투스일까?

연극이 시작하고 가지 의문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는 작품을 영웅 카이사르가 아니라 카이사르를 배신한 암살자로 알려진 브루투스에 주목을 하게 되었을까? 카이사르의 마지막도 충분히 비극의 주인공이 있었는데 말이다. 셰익스피어는 1 독재를 포함한 황제정치에 반대했기에 암살이라는 거사의 주동자인 브루투스를 주목했던 것일까. 연극에서 브루투스가 사용하는 책상에 독재자였던 스탈린(Stalin)’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이름이 적힌 책들이 놓여 있었던 것은 극단 연출자의 의도일 것이지만 셰익스피어의 의도를 세심하게 드러내려는 노력 같아 보였다. 혹은 셰익스피어가 승자의 기록으로만 남는 역사에 거부감을 느끼고 암살자/배신자라는 이름을 얻은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새롭게 조명하려고 했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셰익스피어는 남다른 안목과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였을 같다. 가지 분명한 것은 셰익스피어가 독자 혹은 관람객에게 정답을 주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선택의 자유를 주려고 했을 같다는 점이다. ‘사실 진실 유사해보이면서도 분명 다르듯, 역사적 사실은 하나일지 모르나 진실은 무한할 있다고 본다. 카이사르의 진실과 브루투스에 유의미한 진실은 분명 다르다. 셰익스피어는 연극을 관람하는 우리에게 과거사의 단면을 보여주고, 보다 다양한 진실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모든 연극은 인생의 유한성이라는 대전제로부터 자유로울수 없다.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모든 역사는 어김없이 되풀이된다라는 일종의 강박이 연극이라는 오래된 예술을 지속하게 해주는 동력이 아닐까한다. 오늘 끄집어내는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이러한 또는 연극의 대전제로부터 분기된 구체성에 다름 아닐 것이다.

 

 

역사가들이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그려내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야심만만하고 단호한 성격의 인물이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중심이 공화정 형태의 로마에서 절대권력을 갖는 황제가 되기를 야망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원로원의 보수파와 충돌하는 일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탄탄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숱한 정적(政敵) 보이지 않는 대결 국면 속에서 성장했을 것이다. 후대인들은 영웅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들의 견해에 따라 브루투스의 파멸을 배신자가 겪게되는 역사의 인과응보로 치부하기 쉽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어김없이 반복되는 상투성의 전형이다. 셰익스피어는 아마도 이러한 상투성과 거리를 두기로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배신자/암살자 혹은 패배자의 진실을 새로이 들여다보기로 의도하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브루투스에게도 카이사르 암살에 대한 충분한 명분에 주목했고 이를 상상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존경하면서도 그를 암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셰익스피어는 브루투스의 입을 통해 명예와 공익때문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셰익스피어가 브루투스의 진실이다. 셰익스피어의 관점을 통해 떠오른 생각은 역사라는 무형의 실체가 개개의 인간들에게 요청하는 소속에의 강요이다. 예컨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떠올려보자. 작중 인물들은 어떤 명분(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개인들이었으며, 역사 속에서 어느 편이든 소속하도록 선택할 것을 강요받는 상황에 놓여있다. 어느 시골 마을 사람들은 낮에는 국군 편이 되어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이적행위자를 밀고할 것을 폭압적으로 강요받는다. 그러나 밤에는 빨치산의 영향력 아래 이들 편이 되기를 선택해야만 하고 적대행위를 하는 이들을 신고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과 유사하다. 브루투스의 명예과 공익이라는 대의는 분명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것이며, 역사에서 선택의 경계를 만들어낸다. 브루투스의 암살 행위는 로마 시민들에게 카이사르의 1 독재, 황제정치를 반대할 것을 요구하며 입장을 선택할 것을 요청하는 정치 행위로 있겠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성난 군중으로부터 달아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일당은 세력을 규합하여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이끄는 연합군과 맞서 필리피 평원에서의 전투를 치른다. 2차례에 걸친 전투를 치르며 브루투스 측의 패색은 점점 짙어지게 된다. 수세에 몰린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는 이제 자신들이 운명의 요구에 의해 각자의 입장을 선택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카시우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생일날 자결을 하고, 브루투스 역시 부하의 도움을 구하여 카시우스가 길을 따른다. 필리피 평원의 결전이 있기 전날 브루투스는 자신의 막사에 나타난 카이사르의 망령과 조우하고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감했던 것이다. 이들은 결국 자신의 명예를 위해 그리고 역사의 요구에 의해 분명한 정치 행위를 실행해야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카이사르라는 당대의 영웅을 암살한 공모자들 역시 각자 상당한 능력을 지닌 비범한 인물들이었으나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시대와 역사의 산물임을 부인할 없다.  

 

 

시인킨나의 죽음에 주목하며

이번 실황녹화 연극에서 잠시 지나가듯 처리된 시인킨나의 죽음 장면을 명분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본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카이사르의 죽음을 애도하러 가던 시인킨나는 안토니우스의 추도사로 흥분한 군중에게 죽임을 당한다. ‘시인킨나는 카이사르를 암살했던 공모자킨나와 동일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군중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이다. 어이없는 죽음을 다룬 짧은 장면을 셰익스피어가 추가했을까? 나는 점이 궁금해졌다. ‘시인킨나의 죽음이란 사건은 분명 카이사르의 암살사건이나 브루투스의 파멸과 어떤 개연성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셰익스피어는 지적인 개개인이 모여 군중이 되었을 집단이 보여주는 무감각한 잔인성을 몸소 겪고 체험했기 때문에 이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인간 집단의 잔인성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인간만이보여주는 폭력성이라 있다. 그리고 이런 폭력성은 앞서 브루투스가 공언한 명예와 공익이라는 명예를 위해 희생하는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가지 주의할 점은 인간의 폭력이 인간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막연히 인간이란 잔인한 동물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이를 기정사실화 한다. 그러나 이는 진실이 아닐 있다. 적어도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져있는 일본의 영장류학자 야마기와 주이치의 저서 <인간 폭력의 기원>에서 저자는 줄곧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의 폭력은 대체 어디에서 기원하고 있는가? 집요하게 묻고 답을 구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잔인한 폭력 행위에 대한 그의 결론은 인간의 폭력 행위는 본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다시 밝히자면 인간이란 생물이 보여주는 폭력은 여타 영장류가 보여주는 폭력의 층위와 결이 다르다라는 것이다. 다른 영장류들은 본능에 따라 먹이 또는 번식의 유리함을 얻기 위한 위력 행사의 과정인 반면, 인간에게는 다른 층위, 명분 대의 같은 허구의 실체에 복종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새롭게 발현되는 잔인성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러한 인간 행위의 양상이란 결국 집단이 내세우는 가치(이데올로기, 명분, 대의 등등) 위해 구성원들이 헌신하는 사회성, 이타성에 기인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만이 갖는 폭력의 잔인성 설명해주는 본질이란 생각도 해본다.

 

 

다시 시인킨나의 죽음으로 되돌아가본다. 그가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인간집단이 공유하는 명예혹은 대의 대한 집단의 이타성이 잘못 발현된 사례로 읽힌다. 집단의 이타성은 무형의 경계(또는 대의) 만들고 안과 밖을 구분하며(편가르기), 경계 밖의 존재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잔인성을 표출한다. 이슬람 문화권에 존재하는 명예살인이라는 행위는 어느 가족 혹은 집단이 침해받은 명예 대한 복원 욕구, 집단에 대한 헌신(이타성)이라는 반작용의 결과로 있을 같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진화생물학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시인킨나가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분명 셰익스피어가 작가로서 인간 본성에 대해 관심있고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었으며,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지녔다는 의미로 읽혔던 것이다

 

 

브루테! (et tu Brute!)

암살 공모자들로부터 일격을 받고 쓰러진 상태에서 브루투스와 대면한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남겼다는 유명한 대사이다. 줄곧 영어로 말하던 카이사르 역의 배우도 대사만은 라틴어 그대로 전달했다. 직역하자면 그리고 브루투스도!정도가 것이다. 대사를 들었을 나는 신뢰받던 브루투스의 배신과 카이사르에 대한 도전 행위가 다름아닌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변용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결코 넘을 없을 같던 강력한 대상(카이사르) 혹은 권위에 대한 도전 행위는 부친살해 모티브를 닮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역사에 존재했던 영웅들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영웅들 대부분은 어느 시점에서 자신들이 극복해야하는 거대한 상대와 대결해야하는 운명을 공통적으로 지녔는지도 모른다. 그런 연후에라야 상대를 이겨내거나 새로운 기회를 잡게 되었을 것이다. 강력한 황제 권력을 염원하던 카이사르를 극복함으로써 자유와 해방 같은 대의를 추구하는 일은 오늘날까지도 되풀이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재현으로 있지 않을까.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새롭게 조명한 소설이었다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 영웅 카이사르에 배신한 반역자 브루투스를 새롭게 주목한 작품으로 이해해볼 있을 것이다. 누군가 셰익스피어로부터 얻은 접근법을 유사하게 적용해보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낼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2007 미국의 도움으로 독재자가 되었다가 다시 미국에 의해 운명을 달리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진실을 새롭게 들여다본다면 하나의 비극을 만들 있을 것이다. 오히려율리우스 카이사르 현대적으로 새롭게 재해석하고 각색하는 경우라면 바로 우리 시대의 인물을 대상으로 작품을 만들 수도 있겠다. 그러면 이러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변용이 역사에서 여전히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있을 것이다.

 

 

퇴장하며

셰익스피어의 비극율리우스 카이사르 원전으로하여 현대적인 연출기법으로 재현한 NT Live <줄리어스 시저> 나의 예상과 달리 오히려 원전에 매우 충실한 같다. 물론 록콘서트를 연상하게 하는 연극의 도입부나 독특한 연출방식이 현대적으로 적용된 부분은 있지만 원전의 의도와 줄기를 변형하거나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로마 시대의 문화를 충실히 복원하지 않고 시대성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는데 그친다. 따라서 일부 소품의 변화를 주는 수준을 넘지는 않았다. 각본 자체에 대한 현대적인 재해석이라기 보다는 원전의 기본적인 의도를 오히려 충실하게 반영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판단은 연출의 범위나 방식을 어떤 범위에 한정하고 어떤 관점에서 판단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있을 것이다. 이번 연극의 연출은 한정된 공간을 효과적이고 짜임새있게 활용한 참신한 진행기법에 많이 고심한 흔적을 엿볼 있다. 연극의 무대는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것처럼 사방에서 있다. 로마 시민으로도 참여하는 관람객들은 제레미 벤담의 원형 감옥 연상케하는 무대 주위에서 모든 장면의 목격자가 되거나 연극의 참여자로서 함께한다. 아울러 관람객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을 모의하는 현장에서 공모자들의 대화를 엿듣거나 암살장면을, 그리고 시인킨나가 성난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우리는 영상 화면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가지가 안타까웠다. 영미권에서는 여전히 자신들의 선조가 남긴 문학 유산(비록 고어이긴 하지만) 직접 1 자료로 읽어내고, 연극이나 저술에 활발히 재해석하고 이용하는 반면, 우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별히 훈련받지 않는 이상 조상이 남긴 한문 서적을 읽어내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깞다. 그나마 번역된 작품도 풍부하지 않은 같다. 우리에게는 박지원이라는 조선시대 대문호가 있으나 번역이 되지 않으면 그의 산문 한편 읽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때 이슬람 문명은 고대 그리스 문화 유산을 활발히 재해석하고 찬란한 문화를 일구어 내었다. 당시 미개했던 서유럽 문명이 이슬람 서적 문물을 대대적으로 들여와 이를 번역하고 공부함으로서 이슬람을 극복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 반면 우리는 훌륭한 언어를 가지고도 다양한 지혜를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듯하다는 자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나 이번에 보게 NT Live공연이 광고문구처럼 브루투스가 파멸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어김없이 반복될 당신의 속에서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가? 혹은 당신의 마지막이 어떻게 마무리되길 원하는가?’ 우리에게 묻고자하는 같다. 결국 메멘토 모리’, 필멸의 존재로서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끊임없이 원전이 재해석되고 연극이 공연되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강력한 주제에 대해 정답없는 답을 구하는 행위라고 있겠다란 생각을 해본다. 혹은 연극이란 호모 사피엔스의 결코 끝나지 않을 고뇌의 흔적이자 몸부림일 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 우리가 그럼 당신은 어떻게 것인가?라는 질문과 대면하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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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댈러스 캠벨 지음, 지웅배 옮김 / 책세상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진짜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원제: AD ASTRA: An Illustrated Guide to Leaving the Planet)

댈러스 캠벨(Dallas Campbell) 지음 | 지웅배 옮김 | [책세상]

 

 

맑은 저녁 깊고 어두운 하늘에 촘촘이 박힌 별을 바라보고 경외감이 들지 않은 이가 있을까. 대도시에 사는 주민들은 이제 도시의 불로 밝아진 밤과 빌딩숲으로 좁아진 시야로 하늘을 보는 이가 드물다. 밤에는 별을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지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늘 만나게 책은 영국의 배우이자 과학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댈러스 캠벨의 <진짜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하 <히치 하이커>)이다. 책을 읽으면서 받은 저자에 대한 인상은, ‘우주 여행/우주 개발에 관한 진정한 덕후 아닐까 하는 점이다. 이는 물론 비난의 말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도 하고 있다는 관점에서다. 책은 특정 분야의 기술적인 사항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여행과 관련한 얇고도 넓은 잡학 사전같은 인상을 준다. 책의 원제목을 참조해보면 지구를 떠나는 일과 관계된 가이드이다. 책은 다양한 맥락에서 우주 여행에 관계된 풍부한 그림과 사진을 곁들인 저자의 스크랩북 같다.

책을 읽으며 문득 오래전 기억하나가 되살아났다. 유치원에 가기 전의 나이였으므로 6 정도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 방에 있던 흑백TV 통해 보았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 역동적인 이륙 영상이었다. 장면은 나에게 충격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나는 용어는 몰랐지만 과학자 되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 물론 당시에는 아이들 상당수가 아직은 과학자 꿈이라고 말하는 때였으므로 나도 그런 사회의 분위기 탓일 지도 모른다. 내가 과학을 공부하게 것도 컬럼비아 이륙 영상으로부터 받았던 가슴 벅찬 감흥의 기억과 분명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히치 하이커>에도 나오는 로켓 과학자의 선구자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의 인용구를 수첩에 적어 다닌 기억도 났다. 누군가가 어떤 일에 사명을 갖고 평생 매진하는 일에는 사람의 어린 시절,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계기가 분명히 있었다고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해볼 있다. 소련 로켓 과학의 시조로 불리는 치올코프스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우리가 아는 베른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인생이라는 길고도 짧은 여행을 줄곧 의미있게 해주고 나아가는 방향을 설정해주는 것은 무엇보다 젊은 시절에 영향을 받은 영감 상상력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누군가에게 <히치 하이커> 이러한 영감을 주거나 하나의 계기가 될만한 책일 될지도 모르겠다.

 

도전의 역사 탈출 시도

우리에게 천체의 운동에 관한 케플러 법칙으로 알려져있는 천문학자 케플러가 소설(< somnium>(1608)) 적이 있다는 것도 <히치하이커> 통해서 처음 알게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소설에서 케플러는 달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을 상상했다는 점이다. 인간이 천체를 관찰하고, 이를 대상화하며 당대(케플러의 시대) 지배적이던 신과의 관계에 대해 회의했던 소수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나아가 지구를 떠나 달에 가는 여행을 꿈꾼 이들은 계몽의 시대였던 17세기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도 확인할 있어 흥미롭다.

최근에 읽었던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도 이와 관련한 예를 떠올려 본다. 연암 선생이 조선 사신을 따라갔던 열하에서 곡정이라는 청나라 학자와 나눈 곡정필담편에는 연암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천체에 관한 의문을 거내는 대목이 나온다. 연암은 달이 비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 있다.

지금 땅덩어리 겉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비유하자면 유리거울일 것입니다. 만약 달세계에서 지구의 빛을 바라본다면 역시 지구의 모양은 응당 초생, 보름, 그뭄이 있고, (이하 생략)…

- <열하일기> (김혈조 옮김/돌베게)  2 402

이미 연암의 시대만 해도 달에는 옥토끼와 두꺼비 살고, 여인이 비파를 타는 인식의 수준을 벗어나 달에서 지구를 때의 지구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치를 따지고 있다. 연암처럼 당대에는 이미 우주를 대면하고 회의하는 지식인들이 있었다는 말로도 해석된다. <히치하이커> 16, 17세기에 이런 회의하는 지식인들의 바탕 위에 18, 19세기에는 인류가 우리 자신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정황을 보여준다. 우선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땅으로부터 벗어나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의 사례로 몽골피에 형제 열기구 실험(1783) 있다. ‘하늘에 오르다라는 의미의 몽토시엘이라는 이름의 양을 열기구에 태우고 실험을 했다고 한다. 이는 분명 20세기 중반 소련의 우주개발에 여러 동물들을 투입하는데로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있다. 외에도 인간이 지구를 떠나 하늘로 나아가기 위한 꿈과 노력의 발자취를 책에서 보여준다.

생명체로서 인간이 우주라는 공간에 노출이 되었을 입는 우주복에 관한 대목은 보다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저자 댈러스 캠벨이 정리해놓은 우주복 개발의 역사와 요건들, 만화 캐릭터 탱탱 애벌레 수트와 같은 자료들에 저자의 덕후스러움이 묻어난다. 우주복은 기본적으로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내용 기밀복이 있는가 하면, 생명유지 기능이 특히 중요한 선외활동용 우주복은 의복 개발의 첨단을 이룬다. 우주복 개발 연구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작가 로버트 A. 하인라인의 SF소설 <우주복 있음, 출장가능>(최세진 옮김, 아작)에서는 하인라인의 우주복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발견할 있다. 비록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스토리의 힘은 떨어지고 있긴 하지만 전반부의 우주복에 대한 여러 사항들을 기술하는 대목은 매우 흥미롭다. 책은 우주를 여행하고 싶은 히치하이커들을 위한 소장 목록에는 반드시 들어있을 법한 책이다. 

 

 

우주 개발의 흑역사

우주 개발의 역사는 상상력으로 촉발된 목표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과 동물이 희생된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우주인을 태우기 전에 여러 동물들을 우주발사체에 태워 우주 공간으로 내보내었고, 많은 동물들이 과정에서 희생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모르기 때문에 해봐야 안다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침팬지나 원숭이, 강아지를 비롯하여 , 거북이, 고양이, 심지어 달팽이를 비롯하여 완보동물 불리는 미세한 벌레 또한 실험의 대상이 되어 우주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과정에서 상당수의 동물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희생되었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우주로 나간 우주인이 불의의 사고로, 복귀할 예기치 못한 문제로 목숨을 잃은 사건들도 있었다. 누군가가 처음 시도해보지 않는 이상 우리는 나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발전 과정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위험을 대면하는 일은 어쩌면 인간만이 감수하는 특징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작가 어니스트 헤멩웨이가 인간만이 위험을 (알면서도) 감수한다 취지의 말을 적이 있다. 위험에 직면하고 이를 감수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기울인 노력을 통해 우주 개발은 나아갈 있었다.

하나 주목해보는 항목은 우주 개발 과정에서 존재했던 성별에 따른 참여와 기회의 불평등의 문제다. ‘여자가 우주에 있을까?’ 소제목의 글에서 저자는 글을 당시를 기준으로 우주로 나간 우주인 553 여성이 60명이었다고 한다. 60년대 이미 머큐리 프로젝트에 참가할 여성 우주인으로서 베티 스켈턴 등의 훈련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 주요한 우주 개발의 역사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것은 분명해보인다. 단순히 수적인 차이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며, 이는 우주 개발 분야에 국한된 사항도 분명 아니다. 특히나 여성에 대한 차별이 백인지식층에 의해 구조적으로 이루어졌던 미국이 우주 개발의 역사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해온 만큼 배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탓도 분명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예컨대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성비를 놓고 개발도상국과 미국의 사례를 비교분석한 자료(코렐리아 파인 <젠더, 만들어진 >) 보면 개발도상국에서 컴퓨터를 전공하는 여학생이 평균 50% 이상인 반하여, 미국에서는 15%수준에 불과하였다. 결과는 미국에서만 유독 여학생들이 컴퓨터 공학을 선택하지 않는 비율이 높고, 이것은 여성이 이러한 분야를 선택하는 일을 꺼리는 사회심리 구조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이러한 여학생 비율은 최근 50% 육박하는 구조를 보인다는 최근의 조사결과와 비교해보아도 이것이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고무적인 사실은 이러한 성구별적사회심리가 보다 완화되고 있다는 신호일 것이다. 더글러스 캠벨에 의하면 가장 최근 우주로 올라간 우주인 여덟 성비는 남녀 모두 절반씩이었다고 하니, 앞으로는 우주인을 여러 태울 있는 우주왕복선의 시대에 보다 다양한 배경과 성비에 따라 지원이 가능해질 것이다.  

 

 

다음 히치하이커를 기다리며

우리는 모두 지구라는 우주선을 타고 있는 우주인이다.책에 나오는 유럽우주국장 요한디트리히얀’ 뵈르너 교수와의 인터뷰 중에서 인용한 대목(309)이다. 인간이 문장을 입밖으로 있게되기까지 오랜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어려운 삶을 살았을까. 이러한 인식은 분명 거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만이 우주의 주인이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류는 이전의 상태로 더이상 되돌아갈 수는 없다. 지구를 떠나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시각의 전환은 우리에게 이전과는 다른 인류가 되도록 해주었다. 우주에 진출하려는 인간의 노력으로 어쩌면 우리는 한층 거대한 우주 앞에 겸손해졌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인류는 달에 기지를 건설하고 화성을 거쳐 토성이나 목성의 위성으로 여행을 있는 날이 것이다. 다만 현재로서는 소수의 인간만이 지구 우주에서 지구를 있는 정도의 기회를 갖는다. 어려운 우주인 자격을 취득하거나, 우주여행 경비를 지불할 경제력이 있거나. 그리고 인류의 나머지 대다수는 어쩌면 사뮤엘 베케트의 부조리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나오는 마지막 대목처럼 그러한 운명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  사뮤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옮김, 민음사) 158

지구에서 움직이지 않는/못하는대다수의 인간은 그러므로 끊임없이, 그리고 여전히기다리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우주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고, 우주 발사체 이륙 과정을 보러가거나 우주 캠프에 참여하는 , 심지어 우주복을 제조하는 회사에서 실제 우주복을 구입하는 등의 덕후스러운노력들을 앞으로도 누군가는 계속 이어갈 것이다. 한때 소련의 강력한 로켓 엔진 에네르기아보다 훨씬 강력한 로켓 엔진을 개발하거나, 우주여행을 위한 자이로스코프, 관성자동항법 장치 등의 개발하는 꿈을 가졌던 나의 젊은 시절은 지나갔다. 하지만 누군가는 <히치하이커> 들여다보며 새로운 관심분야를 발견하고 꿈을 갖게될지 모를 일이다. 작가 리처드 바크의 청소년 소설의 고전 <갈매기의 >에서와 같이 다른 갈매기보다 좀더 높이 날고자 노력하는 갈매기 조나단과 같은 사람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나아가 높이 나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우주로 나아가고 싶어했던 사람도 언제나 존재해왔음을 알게되었다. 우리는 새롭게 등장할 다른 히치하이커 기다리고 있다.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우주인이라는 점이다.

 

 

#과학책

#교양과학

#우주과학

#진짜우주를여행하는히치하이커를위한안내서

 

(147면)

"우리는 대기권이라 불리는, 공기로 이루어진 바다의 밑바닥에서 살아간다."

▶간단하지만 또 다른 인식의 전환이 될만한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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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 가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6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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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 장선정 옮김 | [비채]

 

 

 

하나의 가족

오늘 만난 <좀도둑 가족>이라는 장편소설은 어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서 개봉된 고레아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의 원작 소설이다. 그런데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일상적이지는 않다. 가족끼리 서로 이름을 부르는 서양과 달리 일본 영화인데도 구성원들은 서로를 아빠, 엄마, 할머니 등으로 부르지 않고 서로의 이름으로 부른다. 그것도 본명이 아닌 각자가 선택한 이름으로.

 

린이 린이 아닌 것처럼 노부요는 노부요가 아니며, 오사무도 오사무가 아니다. 아키를 포함해 집에 사는 가족은 하나같이 이름을 갖고 있었다.(129)

 

책을 읽기 시작하면 가족으로 보이던 한지붕 식구들의 관계가 일반적이진 않다는 것을 바로 있다. 이들은 피로 연결된 가족이 아니었다. 이들은 본래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진 아웃사이더 같은 존재들이 헤쳐모여이루어진 집단이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무심한 , 서로 예의차리지 않고도 할말 다하는 이들은 여느 가족 못지않게 가슴 속에 따뜻함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사람다움 모습들은 무엇보다도 각자 선택한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로의 존재감은 선택한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나 서로가 남남인 이들은 각자 나름의 추억 혹은 의미를 갖던 존재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각자가 선택한 이름을 서로 불러주는 행위는 팔을 활짝 펴고 상대방을 환대한다는 의미와 다름이 아닐 것이다. 과거에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건 간에 현재 있는 그대로, 상대방의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좀도둑 가족 피로 엮인 가족은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있다. 자신들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나온 이들은 자신의 가족을 영영잃어버린 인물들이 모여 선택한 하나의 가족이야기라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 가족이라는 집단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애증의 관계 같은 . 멀리 있으면 그리운 존재이면서도 가까이 있으면 서로에게 말못할 상처를 주기도하는 가까우면서도 집단이 가족이다. 영화든 책이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줄곧 가족이란 주제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할머니 하쓰에의 말처럼 서로가 선택한 관계가 (가족보다) 끈끈한 아닐까. 인생의 숱한 희노애락을 겪었을법한 할머니 하쓰에는 피가 이어지지 않아서 좋은 것도 있지 않아?”(185)라고 책을 읽는 우리에게 직구를 날린다. 서로에게 가장 상처를 있는 존재가 가족이라는 점에서 수긍할 있는 반면 가족이니까어려움을 이겨내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어느 쪽이 옳다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는 질문이다. 정답은 없으니까. 다만 원작에 충실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상투적이긴 하지만 분명 가족이라는 집단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는 점이다.

 

 

 

현대 가족이 처한 사회에 관한 보고서

<좀도둑 가족> 21세기 어느 날을 살고 있는 사회 구성원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기도하다. 이따금 들어오는 공사장 일을 전전하며 지내오는 오사무. 결국 공사장에서 다리를 다쳐 하기 싫은 일마저 끊긴 상황에 닥치고, 산재보험으로 보상을 받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사회의 투명인간 같은 혹은 잊혀진 존재일 뿐이다. 그가 그나마 유일하게 꾸준히 하는 일은 쇼타와 함께하는 쇼핑’, 동네 마트에서 물건을 슬쩍해오는 일이다.

 

한편 동네의 영세한 세탁소에서 고참이긴 하지만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노부요의 독백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실감나게 드러낸다. 나는 가난에 허덕이는 쪽일까. 앞은 내리막길일까. 그저 운이 없는 것뿐일까.(144)  벗어나기 힘든 가난 앞에서 자신의 운이 없음을 자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은 분명 많은 이들이 공감할 있을 터이다. 현대 사회에서 보여주는 가난은 모두가 가난하던 절대적 가난의 모습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어느 신문의 칼럼을 보니 70년대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서울의 집값은 300 이상이 올랐지만,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대략 15 올랐다는 내용을 기억이 난다. 결국 경제적 도움을 있는 가족, 부모님이 없는 구성원들은 평범한 직장을 다녀서는 평생동안 결코 자기 집을 자신의 힘으로 마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미국의 실천 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에서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월마트의 사례로 이야기해준 있다. 그는 책에서 10 년전(2000년대 초반) 기준으로 당시 월마트 CEO 월마트 정규직 최저 임금의 ‘170만배수준을 받고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현대 자본주의의 빈부 격차는 이정도까지 벌어져있는 상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최저임금 인상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며 이를 반대하고, 모든 경제 신문과 상당수의 기업인들이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난한다. 언제나 서양의 선진국의 사례를 들먹이며 비판적인 주장을 하던 이들도 최저임금에 대해서는 선진국 사례를 참고하는 이들은 드물다. 아울러 사회가 안고있는 보다 근본적인 경제구조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고, 사회의 기초 체질을 개선하는 일에 문제의식을 갖고 일을하는  시도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환경에서 풍요로운 도시에 사는 빈민 가족은 운이 없는것이 맞다. 그리고 안타까운 것은 노부요의 말대로 앞으로도 가난에 허덕일 이라는 점이다.     

 

이런 가난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선택하여 구성된 헤쳐모여가족의 유일한 구원은 할머니 하쓰에의 사망한 남편의 이름으로 나오는 연금이다. 매달 11만엔 남짓한 돈을 부정수급하는 일은 가족들에게는 유일하게 안정적인 수입원이다. 그마저도 하쓰에는 파칭코로 상당부분을 탕진하긴 하지만 말이다. 오사무는 공사장에서 다리를 다친 이후로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정기적으로 마트에서 쇼핑 하거나 차의 유리를 깨서 물건을 훔치는 일을 하기도 한다. 노부요는 안정적이지 못한 직장에서 고액 고참 근로자라서 해고 통보를 받는다. 회사에서는 낮은 임금을 받는 외국인 노동자를 대신 고용했기 때문이다. 부분도 사회구조의 주도권을 얻지 못한 계층이 어떻게 사회에서 점점 난민화되어가는 지에 대한 가지 사례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한편 집에서 교과서 읽기를 좋아하는 쇼타는 등교하는 또래 아이들을 보며 집에서 공부할 없는 아이들이나 학교에 가는 이라고 오사무로부터 들은 말을 주문처럼 되뇌인다. 가정폭력과 무관심 속에 방치된 주리는 선택된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 쇼타와 주리는 전통적인 가족의 테두리에서 소외된 아이들이 겪을 있는 일들의 단면을 드러내준다. 이처럼 소설은 등장 인물들이 겪는 일상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작품을 완성하기 까지 10여년 고민했다고 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비교적 짧은 장편소설에서 현대인이 안고있는 사회의 주요 문제점들을 담아낸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사는 곳에 온기를 더하는 일을 빼놓지 않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책을 읽지 않거나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 스포일러가 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는데, 어쩔수 없었다. 보다 자세한 줄거리는 여기서 생략하겠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선택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 오사무가 사는 집을 방문한 쇼타가 하루밤을 오사무와 같이 보내고 다음 버스를 타고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오래간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아빠와 아들의 모습같다. 오사무는 쇼타를 태우고 떠나는 버스를 바라보다 문득 버스를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오사무는 순간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것이 아닐까. 핵가족이 되다못해 원자화된 오늘날 가족의 모습에서 피로 연결된가족의 의미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부모님 세대가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와는 분명 다르다. 대가족이 모두 모여 살면서 나이 많은 형제가 어린 동생들을 부모대신 돌봐주는 풍경은 이제 이상 보기 힘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개개인 각자가 생존을 위해 분투해야만 하는현실에서 그나마 서로를 받아들이고 버팀목이 되어줄 있는 것은 서로가 선택한 가족 있는 새로운 역할이 아닐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부담이되거나 상처를 주는 일이 있다면, 이보다는 오히려 좀도둑 가족처럼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임이 새로운 형태의 가족으로서 대안이 수도 있겠다.

 

이러한 상황을 좀더 확장해보면 오늘날 사람들이 가족보다는 동호회 같은 모임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이런 모임에 의지를 하게 되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소설에 나오는 가족처럼 이들은 온라인에서 각자가 선택한 서로의 닉네임을 불러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비슷한 관심사와 주제를 가지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구성원들이다. 오프라인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으며 위로와 격려를 나눈다. 어쩌면 오래동안 지속되는 동호회 모임은 이미 하나의 가족으로서 기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시 매맞는 가정에서 방치된 여자 아이 주리를 자신의 딸처럼 받아들이고 아끼는 노부요는 자신이 주리를 낳지는 않았지만 주리의 엄마였다 형사에게 항변하는 대목이 나온다. 대목은 자녀를 소유물처럼 여기고 인격으로서 대우하지 않는 많은 부모들을 떠올리게 해준다.  노부요가 하던 대사는 피로 이어진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현대의 가족을 되돌아보게 한다. 해체되는 가족들에게 돌을 던지고 비판의 눈초리를 던지는 일을 잠시 접어두고, 저자는 내막을 들여다 보려고 흔적에 나는 무엇보다 인상을 받았다. 서로가 선택한 가족의 내부에서 상투적인 시선을 과감히 걷어버리고, 이들을 이해해보려고 하는 시선에서 무엇보다 저자의 온기를 느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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