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완벽한 시작 - 알, 새로운 생명의 요람 사소한 이야기
팀 버케드 지음, 소슬기 옮김 / Mid(엠아이디)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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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완벽한 시작>

(원제: The Most Perfect Thing)

버케드(Tim Birkead) 지음 | 소슬기 옮김 | MID

   달걀파동을 겪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조류독감(AI) 소식을 접했다. 우리 사회는 가장 완벽한 영양 지니는 완전 식품이라는 달걀의 수난 시기를 겪고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달걀을 비롯한 새알은 생물의 진화 단계에서 포유류 이전 상태로 여겨지는 조류들의 생명을 담고 있는 씨앗이다. 새알은 생명의 근원 뿐만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준 개체에 대한 인큐베이터이다. 아울러 난각 내부와 외부를 분리하면도 동시에 외부로부터 물질이 유입되어야하는 구조를 숙명적으로 타고난 존재이다. 알에서 우리의 조상이 태어났다는 신화만 보더라도 알이라는 존재가 생명의 근원임을 어렵지 않게 수긍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보다 근원적인 생명에 대한 인식과 맞닿아 있다.

   저자인 버케드 교수는 40 넘게 바다오리를 연구한 전문가라고 한다. 분명 이토록 오래, 평생을 새와 새알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에게는 나처럼 짜장면 위에 계란 후라이 하나 쯤은 있어야지라고 생각하고 마는 사람과는 달리, 달걀 하나도 다르게 다가올 것같다. 저자가 이토록 평생을 주제에 관해 천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적인 해답을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특히나 바다오리 연구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바다오리가 해양오염에 취약한 종이라는 , 따라서 바다오리의 알을 포함하여 생태 전반을 이해하는 일은 바다오리 보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바다오리는 해양 먹이 사슬의 중심을 차지하고, 북반구 해양 생태계의 대들보가 되는 조류라고 중요성을 재차 강조한다. 바다오리를 이해함으로써 이들을 보존하고 싶은 것이 저자의 희망이라는 것이다. 이쯤되면 저자의 연구에 대한 진지한 사명감과 중요성을  충분히 납득할 있다. 일반적인 조류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단지 새알에만 집중하여 3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쓴다는 것은 보통의 사명감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가장 완벽한 시작> 새알에 관한 많은 과학적 사실을 담고 있다. 버케드 교수는 절벽을 타고 내려가 절벽에 걸쳐있는 바다오리 수집가들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알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논의를 꾸준한 회의와 질문으로 기술하고 있다. 계속해서 알이 그러한 무늬를 가지게 이유와 진화적 의미를 추적해 나감과 동시에 알의 흰자와 노른자, 알의 내부의 생태학으로 시선을 이동하며 우리에게 친절하게 새알에 대한 많은 사실들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하지만 자체에 대한 지식 못지 않게 알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 예컨대 새알 수집의 역사까지도 언급하며 새알에 관해 보다 다양한 면모와 지식을 전해주는 책이다. 특히 새알 수집은 1600년대 시작되어, 18-19세기에 수집이 많은 이들에게 인기였다는 점을 알게 된다. 안타까운 점은 수집의 역사는 수탈의 역사였으며, 다시금 인간의 탐욕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매일같이 정도의 달걀을 섭취하는 나로서도 책을 읽기 전에는 새알에 대해 그리 대단할 것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인상깊게 느끼게 점은 저자 버케드 교수가 자신의 연구 분야에 대한 무지 누누이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도 책은 새알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는 이상으로 버케드 교수는 선배 연구가들의 결론에 대한 회의와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40 이상 바다오리를 연구한 세계적인 전문가임에도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여전히 많은 것들에 대해 무지’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우리 나라 학계의 풍토를 떠올려보면 매우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나는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연구를 신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19)

놀라운 점은 지난 수십 동안 알에 대해 그토록 많은 연구를 했음에도 우리가 답할 없는 문제가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다.”(133)

   책에서 저자는 바다오리 알의 모양에 대한 논의를 상당히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바다오리는 알을 바위 절벽의 좁은 공간에 위태롭게 올려놓고 품는 모양이다. 그리고 알의 형태는 서양의 배처럼 쪽이 뾰족하고 다른 쪽은 좀더 뭉툭하고 둥근 형태를 지니는 것이 특정이다. ‘알의 모양에는 대개 목적이 있다.’라는 선배 조류학자의 주장을 인용하기도하며 저자는 바다오리 , 나아가 알이 다른 모양을 갖는 이유에 대한 집요한 질문을 붙들고 오랜 기간 연구를 해온 것을 있다. 하지만 저자의 고백은 우리가 알의 모양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는 점을 고백하기도 한다. 책을 읽어도 결국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 여전히 가능성 있는 대답은 많겠으나 저자의 견해를 포함하여 문제는 결국 수수께기로 남는다.  

조란학적으로 광신적인 언동이 수세기 동안 있어왔음에도 우리는 알이 그렇게 생겼는가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아는 것이 없다.”(103)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저자는 새알이 가장 완벽한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저자에게 완벽이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새알이 완벽하다는 것은 여러 압력 사이에서 최적의 타협을 결과라는 측면에서의 이야기이다. 선택 압력이 변하면 지금 완벽한 것도 미래에는 완벽하지 않을 있다.”(335)

   여기에서 저자가 말하는 선택 압력이라는 것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어느 생물 종이 특정한 방향으로 자연 선택이 이루어지도록 추동하는 자연의 조건(환경)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있다. 바다오리에게 선택 압력 상당히 극적인 변수다. 바다오리에게 노출된 다양한 번식환경은 알의 크기와 형태, 색에 다양한 선택 압력을 미쳤으며, 새와 알은 압력에 반응하여 진화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자로서 나는 새알을 완벽한 것의 표본, 또는 적어도 새알에 가해지는 다양한 선택압력을 완벽하게 절충한 결과물이라 생각한다.”(332)

   결국 저자에게 갖는 완벽이라는 개념의 상대성은 진화라는 유동적인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새알이 진화의 관점에서 완벽하다는 저자의 의미는 여러 외부 조건이 영향을 미치고 이들이 서로 균형과 조화 이룬 상태로서의 완벽함으로 이해해도 같다.

   새알이 완벽한 존재로 언급되는 다른 맥락으로서 여러 조류가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고 지켜가는  환경을 생각해보게 된다. 새알이 생명의 시작이 되는 요건을 갖춘 존재로 완벽 것은 지구 상에서 거의 100도에 가까운 온도 차이를 갖는 폭넓은 환경에서 생명을 지켜가는 존재로서의 기능때문이다. 황제 펭귄은 영하 50도에 이르는 남극의 겨울에 번식하며, 그레이걸(grey gull) 기온이 영상 50도가 넘는 칠레의 사막에서 알을 품는다고 한다. 이처럼 새알은 다양하고 극한 지구 상의 환경에서 생명을 잉태하는 인큐베이터로서 극한 자연의 선택 압력에 반응하고 진화하여 존재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존재라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오랜 기간동안 새의 생태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는 버케드 교수가 장기적인 생태학 연구에 대한 중요성을 역설하는 대목은 특히 새롭게 느껴진다. 바다오리 연구에 25 이상 지속되던 정부의 지원금이 끊기자 시각 예술가와 공동 작업으로 기금을 마련하는 노력은 환경문제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 부족한 국내의 실정을 고려하면 눈여겨보게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바다오리에 대한 장기적인 생태학 연구가 우리 환경의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이야기하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수긍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DDT 사용으로 생물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에도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 <침묵의 > 저자 레이첼 카슨의 목소리는 이처럼 과학 연구의 결과를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버케드 교수의 노력 속에 살아남아 있다. 책은 단순히 자신의 오랜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발표하는 과정을 넘어, 과학자의 사회적 의무와 역할에 대한 하나의 모델로서도 눈여겨볼만 하다고 본다. 공공의 자금을 지원받는 과학연구는 연구 결과가 다양한 형태로 다시 대중에게, 일반인들에게 전달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중요할 같다. 나아가 과학자가 나서서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이 중요함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 

참고

   책의 안쪽 표지에 보이는 저자의 사진에는 자신의 얼굴보다 훨씬 새알을 들고 있는 사진이 보인다. 새알은 아마도 저자가 지난 천년 동안 멸종해버린 마다카스카르의 융조(elephant bird, 몸무게 400 kg)’ 알일 같다. 이유는 우선 저자가 손에 들고 있는 정도 크기의 온전히 보관된 공룡알은 남아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며, 하나는 BBC 자연다큐멘터리 진행으로 유명했던 데이비드 아텐보로우(David Attenborough) 다큐멘터리 시리즈 멸종된 새의 새알 조각 파편을 복원하여 보여주는 영상을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방송인이었으며 자연주의자로서 알려진 데이비드 아텐보로우가 젊은 시절 알수집을 하기도 했다는 언급이 책에서도 나오고 있다. 

(내가 영상참고: http://www.bbc.co.uk/nature/life/Elephant_bird#p00dzfyy)

: Jigsaw Puzzle영상 클릭  

영상에 나오는 젊은이가 바로 현재 아흔 살을 넘긴 데이비드 아텐보로우의 청년시절 모습이다. 영상에서 젊은 데이비드가 이미 멸종된 융조의 난각 조각 퍼즐을 원주민 아이로부터 구입하여 이를 다시 맞춘 , 초원 어딘가를 응시하는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아마도 거대한 새의 멸종은 백년 밖에 안된 것으로 추정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새의 멸종은 아마도 인간에 의해 이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19면)
"나는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연구를 더 신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133면)
"놀라운 점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알에 대해 그토록 많은 연구를 했음에도 우리가 답할 수 없는 문제가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다."

(327면)
"어떤 적응도 완벽하지 않다. 그 이유는 진화하는 것들은 항상 여러 선택 압력 사이에서 타협을 해야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332면)
"생물학자로서 나는 새알을 완벽한 것의 표본, 또는 적어도 새알에 가해지는 다양한 선택압력을 완벽하게 절충한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335면)
"완벽은 상대적인 것이다. 새알이 완벽하다는 것은 여러 압력 사이에서 최적의 타협을 본 결과라는 측면에서의 이야기이다. 이 선택 압력이 변하면 지금 완벽한 것도 미래에는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


(339면)
"장기적인 생태학 연구는 우리 환경의 미래에 대한 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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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wland (Mass Market Paperback)
Alfred A. Knopf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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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wland>

Jhumpa Lahiri 지음 | Vintage Books

   우연한 기회에 알게된 소설이다. 굳이 익숙하지도 않은 영문 소설을 손에 넣은 것은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이공계 출신으로 줄곧 기술서 같은 책만 읽어오던 나에게 영문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언젠가는 읽어보겠지하는 생각만 하던 차에 읽게 나의 번째 시도였다. 어휘도 문제였지만,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읽을 있을까하는 마음과 호기심이 발동했더랬다. 읽고 나서 줌파 라히리의 문장들에 대한 인상을 떠올려보자면, 우선 그녀의 문장은 상당히 (정성이 깃들어) 계산되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장이 매우 간결하고 리듬감이 느껴진다는 의미에서다. 모든 문장이 그러하진 않겠지만, 소설읽기의 초보자가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그녀의 글쓰기 실력이 상당하기 때문아닐까. 문장이 길어져 여러 이미지(심상) 혼재되어 나타나는 장면에서 더욱 라히리의 문장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는 같다. 간결한 문장의 나열로 독자가 순간적인 이미지들을 문장을 따라가며 떠올릴 있다는 . 인상적이었다. 모르겠다. 이런 글쓰기 방식이 이미 너무도 흔한 테크닉인지는영문학 문장을 직접 많이 접해보지 않았기에 아마도 나의 인상은 아직 성숙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강한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줌파 라히리는 인도계 미국인 작가로서 1967 생이므로 현재50세가 되었다. 그녀는 인도 북동부 벵갈지역의 후손이며 런던에서 태어난 2 미국으로 가족이 이민온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 69 즈음이 것이다. 2015 7월부터 미국 프린스턴 대학 Creative Writing학부 교수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같은 학부에 있는 노벨 문학상 수장자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 교수와도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이며, 프린스턴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던 코넬 웨스트 교수(Cornel Ronald West: 철학자, 활동가, 교수) 영향도 받지 않았을까 라히리의 문장을 읽으면서 이들을 떠올렸다. 특히 외국 열강(특히 영국) 벵갈지역의 수탈역사를 언급하며 가난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 장면은 코넬 웨스트 교수가 역설하던 세계의 가난에 대한 대담의 모습을 닮아있다고 느낀 것은 나만의 지나친 비약은 아닐 같다. 

   소설에 대해 줄거리를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인도 벵갈지역의 가족이 70여년 겪게되는 인생사를 담은 장편소설로서 소설 배경은 제국주의가 마무리되던 시기부터 현대까지를 아우른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와 지역이, 그리고 가족 개인이 겪는 인생의 모순이 그려져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영국의 영향을 지배적으로 받던 20세기 초반의 영국 특히 벵갈지역의 상황이었다. 벵갈은 인도 동북부의 지역으로서 히말라야 산맥의 동쪽 끝자락 기슭에 있다고 있을텐데, 국경을 통해 네팔, 중국과 접해있다. 라히리의 묘사를 통해 나는 40 인도 대학생들에게도 종류의 공산주의 지지운동을 알게되었다. 하나는 마르크스-레닌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 학생 동맹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 공산당의 노선을 지지하는 마오이스트(모택동 지지자)들의 동맹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충돌, 그리고 외국세력의 권력과 질서유지를 위해 복무하던 공무원(경찰 )들에 대한 폭력적인 테러 행위 등의 배경이 소설에 나오는 가족들이 휘말리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하나 확인하게 인도의 역사는 1940 국가의 벵갈지역 쌀수탈로 인하여 수많은 벵갈지역 주민들이 흉년이 아님에도 굶어죽은 일이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은 인도계 미국인 교수  마두스리 무커지(Madhusree Mukerjee) 교수가 저술한 <Churchill's Secret War: The British Empire and the Ravaging of India During World War II>에서 주로 다루고 있다고 알고 있다. 물론 나는 읽어보지 않았으나 영국의 수상 처칠이 일본군의 벵갈지역 침입을 우려하여 벵갈지역의 쌀수탈을 지시한 상황, 그리고 불과 1-2 만에300 (추정치) 가까운 벵갈 지역 주민들이 굶어죽게한 주요 원인이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는 소개를 기억이 난다. 소설에서는 물론 우리가 위인전에서 많이 보았던 처칠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훌륭한 정치인이 가져온 결과에 대한 평가는 보다 신중하게 다양한 점을 고려해야할 것임은 분명하다.  

   다시 소설로 돌아간다. 책을 힘겹게 읽으면서 줄곧 소설의 제목 The Lowland(저지대) 대해 의미를 되돌아보았다. 줌파 라히리가 묘사하는 저지대는 역사적인 성소가 아니라 소설 주인공 가족이 사는 벵갈 지역 주변의 습지대를 가리킨다. 말그대로 저지대는 우기(몬순) 비가 오면 물이 있던 웅덩이가 전체의 거대한 웅덩이가 되고 습지를 이루어 풍성한 생명을 품는 땅이다. 비가 습지를 뒤덮는 풍성하고 두텁게 덮히는 히야신스 이불은 버려진 땅처럼 보이는 저지대의 축복이다. 또한 저지대는 소설 주인공 수바쉬(Subhash) 우다얀(Udayan) 형제의 놀이터이다. 서로 다른 기질의 형제가 끈끈한 가족의 연결고리로 하나가 되기도 하는 저지대는 소설에 묘사되듯, 개의 웅덩이가 비가오면 하나로 연결되는 곳이기도 하다. 반면 곳은 우다얀의 죽음을 목격하는 장소이자, 형제의 가족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장소이기도 하다. 소설의 후반부에 저지대는 개발의 논리에 밀려 새로운 상업타운이 들어서고, 비가오면 웅덩이가 슾지가 되어 생명이 풍성한 땅을 없는 잊혀진 땅이 되어간다. 과거에 곳에서 있었던 형제 가족이 저지대에서 만들었던 추억,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저지대의 변화와 함께 묻혀지고 잊혀지는 운명을 맞는 장소이다. 부분은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볼 너무나 닮은 점이 많고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바로 굴절된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희생되었던 사람들, 묻혀진 역사와 너무도 닮아있기 때문이다.

   주제넘은 짐작인지 모르겠지만, 소설의 특징으로 눈에 보이는 하나는 소설 인물들의 내면과 생각들을 드러내는 부분이 눈에 띈다. 장마다 주인공 화자가 다르며, 각자의 내면을 저자는 이들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하듯 드러낸다. 각자가 다른 입장에서 자신의 생각과 내면을 해당 주인공에 밀착하여 바라보고 있기도하면서 어느 순간 저자는 이들과 거리를 두기도 한다. 화자의 전환과 거리 설정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매우 정성들여 계산되어있다는 인상을 받으며, 또한 줌파 라히리의 글쓰기 방식이자 실력이 아닐까. 라히리의 문장은 우리 말로 번역되어 있어도 수월하게 읽혀질 것이다. 다만 작가의 섬세한 문장을 직접 영어로 읽게 부분은 새로운 발견이기도 했다.

   소설에서 주요 인물로 나오는 형제 수바쉬와 우다얀 모두와 결혼하게 되는 여인 가우리(Gauri) 매우 중요한 존재인 같다. 어떤 면에서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같은 캐릭터 같기도 하면서 내면을 기술하는 점은 서로가 닮아 있는 점도 느껴진다. 우리가 사회에서 제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약속 그리고 관습을 벗어나게 되는 인물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잣대를 들이댈 있겠는가. 가우리가 역사의 희생자로서 또는 어떤 점에서는 무언가의 가해자로서 선악이나 무엇이 옳고 그름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노년의 가우리가 런던 출장 중에 갑자기 고향 벵갈 지역에 가서 자살충동을 느끼며 난간에 기대었을 드러나는 내면의 독백이 안나 카레니나가 열차에 뛰어 들기 위해 역으로 가는 도중 마음 속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생각의 혼재 양상이 너무도 닮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부분은 소설의 말미에 우다얀이 총살당하기 직전 소설 화자가 우다얀이 되어 그의 내면을 드러내는 부분에도 해당된다.  

   소설은 4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임에도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준다. 저자의 가족이 경험했을 법한 인도 현대사의 굴곡과 잔해는 나의 가족이 경험했을 대한민국 현대사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고 느낀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더욱 강한 인상과 느낌을 남기고 있다. 인도 벵갈지역의 저지대는 이제 개발되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에 휩쓸려 사라지고 없다. 잊혀진 . 망각된 기억과 사람들이다. 비가 오면 생명을 풍성하게 품고 히아신스가 두텁게 덮이는 웅덩이는 이제 사라져버렸다. 줌파 라히리는 역사책을 써서 우리에게 잊지말것을, 그리고 우리를 계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 근현대사의 줄기 속에서 인도 가족이 겪는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역사와 이러한 희생의 역사가 있었음을 우리에게 각인시켜주고 있다. <The Lowland> 강렬하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소설 이야기도 작가의 문장도 모두 그러하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대상인지 새삼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은 직후의 느낌은 인간으로서의 인생이 덧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울하고 심심한 인상이 우리 인생에서 보면, 너무나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강렬한 진실이 아니겠는가. 오늘 나에게 주어진 것이 소중한 것임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빨간펜으로 필사해놓은 문장이 있다.

Of the three women in Subhash’s life – his mother, Gauri, Bela – there remained only one. His mother’s mind was now a wilderness. There was no shape to it any longer, no clearing. It had been overtaken, overgrown. She’d been converted permanently by Udayan’s death.”(258)

**우다얀이 저지대에서 총에 맞아 죽는 순간에 대한 인상이 강렬하게 남는다.

For a fraction of a second he heard the explosion tearing through his lungs. A sound like gushing water o r torrent of wind. A sound that belonged to the fixed forces torrent of the world, that then took him out of the world. The silence was pure now. Nothing interfered.”(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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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
윌리엄 데이비스 킹 지음, 김갑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윌리엄 데이비스 킹지음 | 안기순 옮김 | 책세상

 

 

끊임없이 발견하고 보관하는 남자의 수상록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집요하게 수집하는 남자의 에세이를 접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극무용과 교수인 저자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우리가 흔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 대상을 사들이는 수집가가 아니다. 한때는 타인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를 뒤지기도 하고, 버려진 쇠붙이를 가져와 광이 때까지 집요하게 문질러대기도 하던 사람이었다. 책의 제목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열정적으로 수집한다.’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고 번역된 용어의 다른 표현은 아마도 무가치한 ’,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의미한다고 있겠다.

     책의 시작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당시 43세이자 교수였던 저자는 이혼을 앞둔 암울한 상황이 전개된다. 아마도 이혼에 앞서 아내의 집에서 자신의 짐을 챙겨 나오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저자가 7 써내려 개인적인 수집기이자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들여다본 성찰의 흔적이다.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수집하며 무언가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처받은 자존감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타인의 존중받기를 원하는 분열적인 자화상이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7년간의 자기 기록 과정을 거쳐 책이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50세가 저자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마무리되는 희망적인 책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수집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선 저자의 수집관은 매우 독특하다. 무언가를 수집하기 위해 돈을 들여 구입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수집할만하다고 생각할만큼 가치있는 대상을 수집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이 말하는 자신의 수집행태는 매우 독특하다.

 

수집 행태는 시장에서 외쳐대는 대상물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다른 수집가들과 다르다. 나는 없고 빈약하고 실용적 가치가 없는 물건들에 반응한다.”(99)

 

나는 (…)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어떤 것에 끌린다.”(99)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반응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요한 관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어쩌면 타인이나 사회가 의도한 욕망이 개인에게, 우리에게 투사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계적으로 물신화된 가치체계에 익숙해져 무비판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가치있다고 믿는 어떤 대상은 의식화된 사회의 욕망이 아닐까. 반면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끌리고 반응하는 것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자기 가신에 대해 알기 결과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신에 대해 솔직한 사람이 나타낼 있는 솔직한 반응들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대상들에 반응하는 행위는 현대 예술에서 작품과 관객사이의 반응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근대 예술에서 우리가 작품을 , 우리는 작가의 의도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고, 작가는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일종의 텍스트로 제한하여 관객에게 제시하는 점이 특징이었다고 있다. 반면 현대 예술에서는 작가가 텍스트를 배제해버렸거나 아니면 최소한으로 제한하여, 작가의 의도롤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 또는 관람자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 보다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경험과 배경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과정이 마치 저자가 무가치한 대상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느껴진다고 것은 바로 이런 특징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43세의 교수이었지만, 중년의 초입에 이혼이라는 인생의 고비를 건너는 상황이었다. 저자에게 수집행위는 이러한 인생의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약과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폭넓게 공유되는 수집 충동은 극도로 풍요로운 물질사회에서 우리가 받은 깊은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다수가 각자의 개인사에서 받는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수집이 그런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효과는 충분할 정도로 좋다.”(26)  

 

비록 도착적이고 모순적일지라도 수집이 여전히 수집인 이유는, 수집가들에게서 흔히 관찰되는 보상의 패턴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집은 잃어버린 사랑을 채워준다.”(99)

 

     평생 수집을 하면서도 중년이 저자가 자신의 중년기 7 써내려간 독창적인 기록물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둘러싼 맥락에서 소환되고 재해석되고 있다. 저자는 개인적인 차원과 비개인적인 차원에서 수집행위를 다름과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개인적 수준에서 수집은 사랑과 사랑의 상실에 대해 말해준다. 또한 수집은 자기 가치와 자기 혐오에 대해 말해주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서투름에 대해 말해준다. 비개인적 수준에서는 20세기 말이라는 시대의 풍요과 과도함에 대해 말해준다.”(215)

 

결국 솔직하게 개인의 부족함을 고백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보고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놓치지 않고 있는 저자의 모습을 엿볼 있다. 

 

     저자의 수집행위는 우표수집으로 시작했지만, 어릴 어머니가 애써 모은 우표들을 동생과 함께 못쓰게 만든 중단했던 모양이다. 반면 쓰레기통을 뒤지고, 쇠붙이를 주워오거나 자신이 소비한 식표품의 라벨을 수집하는 행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되고 소모되는 개인의 저항적인 의미로서도 의미를 확장해서 있을것 같다. 부분은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야기하는 무한긍정적이고 자기소모적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표출할 있는 저항적이고 부정적인 자기 존재의 확인 절차와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버전으로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우리가 세계를 소비하듯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를 통제하는 방식 하나가 바로 수집이다. 우리는 가치를 지배함으로써 정체성을 긍정하게 된다.”(26)     

 

바로 우리를 소비하는 걸신들린 세계 뼈속까지 내면화된 물신화, 상품소비주의적인 우리의 무비판적인 삶에 대해 우리는 No라고 말할 있는 부정성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내가 판단한 이유이다. 개인이라는 인간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수반될 것이다. 저자의 수집을 통한 저항행위 다음에서 엿볼 있다.

 

나는 컬렉션의 불필요함과 가치 없음에 집중함으로써 컬렉션의 가치와 필수성을 찾아내려고 했다.”(316)

 

     저자에게 수집이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가 되고 있다. 저자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없는, 때로는 저자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행위이지만 저자에게 자신을 성찰하는 도구이자 대상이 되고 있다. 책의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과 수집의 의미를 성찰한다.

 

 

수집광의 수상록  몽테뉴적 자기 성찰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500여년 전의 사람이 자신에 대해 성찰한 글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테뉴의 수상록인데,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에서도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다. 물론 책에서는 수집이라는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점이 좀더 다른 부분일 수는 있겠다. 몽테뉴는 자신의 화려한 귀족의 신분과 법관, 보르도 시의 시장을 지낸 배경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고 자신을 들여다본다. 저자 윌리엄 교수도 역시 자신의 작은 키를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자신의 열등함을 드러내기는 서슴지 않는다.

 

사실 때로는 사전 삽화 컬렉션이 자신보다 가치 있다는 생각도 든다. (…) 나는 컬렉션을 질투한다. (…) 나는 종종 자신이 중년의 비평가로서, 망설이는 사람으로서, 망가진 채로 남겨진 어휘 사전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낀다.”(283)

 

     물러남의 대가라고 몽테뉴를 표현한 어느 출판사의 홍보문구를 기억이 난다. 물러남은 아마도 몽테뉴의 소심함 드러내주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는 인물로서 자신과 거리두기 대가라는 의미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멀찌감치 두고 들여다보는 사람을 의미할 터이다. 혼란과 비극의 시대 가운데서 어느 특정 사상이나 인물에 경도되어 살아가지 않았던 몽테뉴에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란 상당히 메말라 보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몽테뉴의 인간 관계는 사심을 초월한 보다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주체적인 관계맺기의 모습이라고 수도 있겠다. 윌리엄 교수에게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엿볼 있다.

 

내가 품는 의혹은 (…) 수집이라는 것도 대부분 관계를 맺기 보다는 관게에서 물러나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222)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자신의 수집물(또는 행위) 무엇을 반영하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고 있다. 연극무용과 교수답게 저자는 자신의 연극에 관한 인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이야기한다.

 

분노와 욕망이, 그리고 정체성의 탐구가 물건들 사이에서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드라마는 하나의 인식에 도달한다. 인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Anagnorisis라고 불렀던 것으로, ‘다시 알기또는 자기 자신에 관해 알기 뜻하며, 비극 형식의 본질 하나다.”(314)

 

     개인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며 저자가 보여주는 자기 성찰의 절정은 바로 시리얼 상자 에피소드라고 생각한다. 어느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딸과 함께 자신이 수집한 1579개의 시리얼 상자를 자신이 학과장으로 있는 학과의 강당으로 가지고가서 바닥에 초대형 퀼트처럼 펼쳐놓았다. 자신의 창고에 모아 두었던 종이상자들을 펼쳐 배열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짐으로서 개인의 정체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예술이 되었다. 다시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물들이 세상에 노출되어 연결됨으로써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1500여개의 종이 상자들은 윌리엄 교수와 딸이 먹어치운 시리얼 상자였다. 가족이 거부할 없는 물질사회에서 살아온 삶의 흔적이자 이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세태를 반영하기도 하는 1 사료로서의 역할도 하는 대상물인 셈이었다. 개인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남긴 존재 증명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윌리엄 교수도 무가치한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는 어떤 유의미한 특징을 이미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앞서 저자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자신에 대해 알기라는 과정은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태어남 뿐만 아니라 죽음도 있다는 인식에서 자유로울 없을 것이다. 저자 역시 자신이 죽고나면 자신의 컬렉션이 어떻게 될까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궁금해하고 있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삶의 유한성을 반추하며,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로서 자신의 수집물들에 대한 행방을 역시 고민한다.

 

어떤 인간 존재도 다른 어떤 존재를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말로 어던 인간 존재도 뭔가를 진정으로 소유할 없는데, 죽음이 소유를 휩쓸어가기 때문이다.”(361)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수집품이 유용한 물건들이 아님을 알기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임도 안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수집물들이 스미소니언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며, TV프로그램 소품으로나 쓰이길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윌리엄 교수는 자신의 물건들이 아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아이들이 부분에서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딸들 역시 아버지의 수집물들을 물려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대목이 흥미롭다. 물론 아직 어린 나이를 떠올린다면 결정은 언제든 바뀔 있겠으나,  저자는 강요하지 않고 아이들에 대한 희망을 단순히 덧붙이고 있다.

 

내가 물려주는 것들 가운데서 아이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면 좋겠다. 희망컨대, 아이들이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을 찾아내면 좋겠다.”(336)

 

     어디서든 나름의 기쁨 찾아낼 아는 능력은 개인의 세계관과 마음가짐에 달려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번성기는 바로 마지막 , 나머지 모든 것의 날이다. 창조에 뒤따르는 휴식은 뭔가가 되기를 멈추는 순간이고, 그것은 죽음의 리허설이다. 휴식의 본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알고 느끼는 방식이다.”(350)

 

수집은 소유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행위이고, 타자성을 통제하는 훈련이며,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기념비적 건물로서 사후의 생존을 보장하는 일이다.”(90)

 

     어떤 의미에서 저자의 수집품들은 자신의 일부이자 인생의 축약품으로서 자식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연속성으로서의 바램과 희망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별적이도 무가치해보이는 사물들이 오랜 시간 동안 모이고, 주인에 의해 끊임없이 분류가 되고 정리되고 하면서 수집물의 전체는 낱개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서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수집가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본능으로서 연속성을 보장받는 방법이기도 것이다. 다시 저자의 자기 성찰 과정을 상기해보면 몽테뉴의 자기 탐험과 성찰 행위와 매우 유사함을 깨닫는다. 세계에 저항하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존재를 느끼고 깨닫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로서 저자의 수집행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거울과 창문과 같은 수단으로서의 수집행위

     글의 초입에 언급했던 수집이 저자에게 갖는 의미로 다시 돌아가본다. 저자가 분명히 언급하고 있듯이 수집 자신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거울 기능을 가지면서도,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외부에서 들여다볼 있는 창문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의 경우처럼 평생동안 무의식적으로 쌓아가는 수집물이 주는 역할은  예술활동을 통해 보편적으로 기능하는 자기 성찰 수단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시에서처럼 내가 예술을 자신을 바라보는 창문으로 이용한 경우는 드물었다.”(146)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이라는 수단은 자아의 확장수준으로 이어졌다.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컬렉션을 사랑하고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208)

 

컬렉션은 중년이 나를 그린 그림이다. 수집을 한다는 것은 중년을 서술하는 것이다.”(209)

 

나는 메타포들을 수집한다. 나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서 자신의 비유적 형상을 그려낸다.”(238)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의할 뿐인 권의 . (사전삽화 컬렉션 ) 표현하지 않는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281)

 

     이처럼 여러군데에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수집이라는 행위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끊임없이 묻고 스스로 대답하고 있다. 인간의 다사다난한 인생을 하나의 박물관으로 생각해볼 , 윌리엄 교수가 말하는 수집이란,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되는 행위라고 말할 있을 것이다. 대상물을 지속적으로 분류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평가하는 행위가 평생 지속된다.

     누구나 수집행위는 본능이라고 말할 있겠다. 실례로 무형이기는 하지만 우리 안의 모바일 기기로 사진을 찍고 이미지를 소유하는 행위를 떠올려볼 있을 것이다. 거의 매일 우리는 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결과물들을 폴더에 소유한다. 윌리엄 교수의 수집물처럼 낱개로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판단할 없다. 반면 이러한 수집물들이 평생동안 모이고, 분류되어 하나의 집합체로서 특징을 띠게 되면 자체로 새로운 생명력을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의 매일 찍은 사진들이 어느 사용자에 의해 분류되고, 재배열되고 관리된다면 사진들은 새로운 형태로서 생명력을 가질 있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진들 어떤 특정 주제하에 선별된사진들은 더욱 주인의 의도를 반영하는 자아의 확장 버전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수집물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윌리엄 교수에게 있어 수집은 자아의 표출 도구이자 자신을 성찰하는 수단이라고 정리할 있겠다.

 

 

글을 마무리하며

     글을 읽으며 확인하게 되는 것은 수집행위 과정은 수집가에 대한 실존적인 자기 발견 수단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책을 수집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책장을 들여다보면 책의 목록을 통해 수집가의 욕구와 욕망을 상당히 읽어낼 있다. 사람의 관심사가 무엇이고,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사람의 열등감은 무엇이고, 어떤 것에 대한 결핍을 인지하고 있을까 하는 점들도 그러하다. 영어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한 이는 영어 관련 책이 많을 있고,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유독 부분에 대한 책을 많이 구입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수집의 양상은 보다 의식적인 측면이 강하다. 반면 윌리엄 교수의 수집 형태는 상당히 무의식적인 자기 표출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에는 저자의 누나와의 관계(오랜 시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로부터 받은 상처 내지는 트라우마가 반영되어 형성된 것일 있다. 하지만 저자는 수집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보살피기도 하였다. ‘수집행위는 자신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효과도 보여주었다. 물론 직간접적으로 결혼생활에도 영향을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모은 1570여개의 시리얼 종이상자, 800개가 넘는 우편봉투 속지 컬렉션, 6000장이 넘는 명함 등은 의식적인 수준을 넘어 저자의 무의식이 투영된 어떤 실체, 저자의 분신을 보여준다고 있다.

     최근 들어 부쩍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고, 대부분은 생활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버리고, 정리하여 간단하게 살라고 하는 /운동이 활발히 눈에 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간소하게 살라고 하는 현대사회에서 윌리엄 교수와 같은 수집광의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많은 이들이 간소하게 살라고하는 유행 동조하는 가운데, 저자처럼  싫다라고 과감하게 자신의 견해를 말할 있는 부정성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토록 많은 것이 제공되는 세상에서 최소한으로 소유하고 살을 빼는 것은 이중의 박탈처럼 보일 있다.”(26)

 

     누구나 여행이 부정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회만 된다면 여행은 반드시 해야하고, 개인의 성숙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 말한다. 반면 나는 여행이 싫다.’라고 말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도 그렇게 말하기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행이 좋다라는 점은 수긍을 하면서도 다수의 집단적인 견해 앞에서 자신의 부정 드러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책을 덮으며 내가 이해하는 저자의 수집행위는 바로 자신을 드러내고 집단적인 견해에 도전하는 행위와 다름아니다.

     내가 윌리엄 교수처럼 상당한 수집품을 소유했다면, 나는 거대한 컬렉션을 어떻게 처리하게 될까. 나는 모든 것에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이 있다는 진리에 따른 것같기도 하고 결국은 그렇게 하기 힘들것 같기도 하다. 왜나하면 자신도 윌리엄 교수처럼 집요함과 애착, 물건에 대한 끈질긴 욕망을 갖는다는게자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불교의 만다라 예술과도 같이 정성들여 완성한 자신의 모래 그림들을 순간에 손으로 쓸어버리는 것처럼 컬렉션도 임종 전에 소각장에서 모든 컬렉션이 불에 타오르는 것을 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소멸과 함께 나의 정체성의 연장이었던 컬렉션도 (nothing) 속으로 사라진다는 행위로서 말이다.

     책은 수집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남자의 이야기이자, 불완전한 존재를 자각하는 자화상을 그린 결과물이다. 아울러 유별난 개인의 행위를 통해 우리의 통념을 뒤집어 있게 해주기도 하며, 우리 자신에게 삶의 실체를 자각하게 해주고 질문을 던지는 책이기도 하다.

 

 

 

 

 

 

 

 

 

 

 

 

 

 

 

(22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수집한다. 그것도 무척 열정척으로."

(30면)
"나는 발견하고 보관했다."

(26면)
"수집은 사물에서 질서를, 보존에서 미덕을, 모호함에서 지식을 발견한다."

(33면)
"대개의 경우 수집의 정수는 그 세상을 미니어처 형태로 소유하는 것이다."

(208면)
"궁할 때나 의기양양할 때나 그 컬렉션을 사랑하고 또 증오하면서도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281면)
"좀처럼 말이 없는 하나의 세계를 정으할 뿐인 한 권의 책. 그 책(사전삽화 컬렉션북)은 표현하지 않는 내 자아를 표현하고 있었다."

(238면)
"내가 풀칠을 하며 바친 시간들, 내 끈적거리는 손가락으로 그 섬세한 종이들을 서툴게 다루던 시간들에 대해 당신이 나를 존중해주면 좋겠다."

(66면)
"수집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과거로부터의 대상물들이 현재에 수집되어 미래를 위해 보전된다. 수집은 현존을 처리하는 한편, 욕망의 미스터리들을 하나하나 연쇄시킨다."

(95면)
"나는 (유진) 오닐의 모든 책, 오닐과 관련된 모든 책을 다음 컬렉션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책들로부터 중력의 법칙을 배웠다. 중량감이 생긴다는 것은 곧 정체성을 갖는 것이었다. 더 많은 오닐을 (그리고 더 많은 헤비메탈을) 소비할 수록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126면)
"수집은 종종 그 시스템의 부조리, 가치라는 것이 자유 시장 안에서 과도하게 자유를 행사한다는 부조리를 드러낸다. 수집가들은 물질적 세계가 미친듯이 박쥐 똥을 싸지르는 순간들을 주시하고, 그 똥더미에 구더기를 싸지른다."

(170면)
"수집 충동은 죽음에 맞서는 투쟁이고, 그런 투쟁에서 돈은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316면)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부유한 남자의 전형인 동시에, 많은 것을 가진 가난한 사람의 전형이다. 바로 여기에 오이디푸스의 패러독스가 있다."
"충분히 성장한 컬렉션은 그 수집가를 초월해서 나아간다. 컬렉션은 그 자체의 정체성을 짊어지게 되는데, 그건 마치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와 같다. "

(337면)
"수집은 내가 내 삶을 붙들고 있는 더 큰 패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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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결정짓는 다섯 가지 선택
로버트 마이클 지음, 안기순 옮김 / 책세상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인생을 결정짓는 다섯가지 선택>

로버트 마이클 지음/안기순 옮김/책세상

                        

 

 

책은 사람들이 일생동안 만나게 되는 혹은 반드시 고민할법한 인생의 결정 사항 5가지를 중심으로 할아버지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후배들에게 조언해주는 책이다. 경제학자 답게 수많은 연구결과를 반영하고 있으며 광범위한 통계 자료를 제시한다. 다만 연구의 대상과 통계 자료의 표본이 미국인들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인생의 중요한 다섯가지 결정에 도움이 될만한 고려사항들을 깊이는 얕지만 세부적인 사항까지 언급하고 있다.

   저자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 사항 5가지로 꼽은 것은 학교교육’, ‘직업선택’, ‘배우자선택’, ‘부모되기’, ‘건강습관 관한 사항이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라고 흔히 말하곤 한다. 저자가 선택한 인생의 5가지 결정사항은 사실 온전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국면마다 서로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치고, 연관되어 있는 사항이다.

   예를 들어 학교교육과 직업선택은 현대 사회에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의 대학교육은 인간의 정신적 성숙을 돕는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직업을 갖기 위한 사설학원화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도 모자라서 정부는 평생교육 장려하고 자격증 제도를 만들어 국민들을 교육시장의 소비자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극단적인 예를 들면 대한민국에서 현재 매년 1 4-5000 수준의 박사를 배출하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는 달리 좀더 극단적으로 대한민국에는 박사 실업자가 많이 양산되고 있다고 한다. 그나마 이공계 분야는 상황이 낳은 편이나, 인문계 박사들은 가정을 갖고 부모가 되어 자녀를 양육하거나 하는 과정이 더욱 열악한 상황에 직면해있다. 이런 점들은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통계 지표인 고학력 일반적으로 높은 소득 얻는 경향과 맞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배우자선택과 부모되기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주제이다. 책의 옮긴이는 부분을 각각 결혼을 해야할까 아이는 가져야할까라는 제목으로 장에서 논의하는 방향이 상당히 왜곡될우려가 있다. 혹은 마케팅적인 관점에서 현재 대한민국에서 많은 관심을 가질 있는 세부 주제 가지를 장의 전체 제목으로 사용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점은 저자의 의도를 왜곡시킬 있기에 다소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책에서 저자도 언급하듯이 파트너로서의 배우자를 전통적인 이성 배우자 뿐만 아니라 동성인 배우자도 범주에 무리없이 포함시킨다. 할아버지 경제학자(1942 )로서 미국에서 민감한 주제인 동성 결혼이나 동성 부모 가족의 양육에 대한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 점은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도 이제 매년 결혼하는 커플의 10% 이상이 국제결혼이고, 다문화라는 개념이 사회에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사회의 변화가 지속되고 다양성이 근래에 들어 급증한다는 증거로 있겠다.

   인생의 여러 결정 사항에 대해 경제학자로서 조언하고 있는 저자는 본인의 세계관에 따라 경제학적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파악하는 듯하다. ‘시간 비용에 대한 투자’, ‘불확실성’, ‘외부효과’, ‘주인-대리인 관계’, ‘수익률 등의 용어로 독자의 선택을 돕고 있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국면에서 경제학적인 판단기준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과연 충분한가 혹은 옳은 것일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예컨대 대학교육을 이야기할 , 저자는 교육을 하나의 투자개념으로 바라본다. 사실 대학입시 원서를 제출하는 시기가 되면 국내 언론에서도 적성, 혜택, 학과 분위기 등을 고려하여 4 투자해도 좋을 곳을 선택하라 기사를 싣는다. ‘투자라고 하면 수익률 같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러한 경제학적 관점이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되면 학내 인문학과의 축소 폐지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이러니컬 것은 현재 대한민국은 인문학 열풍 한가운데에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맨큐의 경제학 필두로 우리에게 익숙한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의 중심지 시카고 대학의 명예교수이다.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저자가 평생 내면화한 신자본주의적 가치에 기반하여 어떻게 하면 '합리적' 근거로 선택의 기로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것인지 조언하고, 체제에 가장 합리적으로 순응하여 살아갈 있는 무난한 선택의 길로 안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점이다. 책의 전반적인 느낌은 노경제학자가 딸에게 전해주는 노파심어린 충고이다.

   저자의 경제학적 세계관을 인생의 국면에 적용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계속 등장한다.  저자가 양육의 결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에서 어머니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없다면 모유수유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모유수유가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는 일보다 좋다는 점은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까. 그런데 저자는 모유수유가 돈이 들지 않는 가장 값싼 방법이므로 아이에게 모유수유를 권하는 것인지하는 생각을 하게한다. 경제학자다운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모유수유를 권하는 근거로는 빈약해보인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저자가 건강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저자가 말하는 건강 정의는 어떤 점에서보면 매우 플라톤적이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다시말하면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에서 진정한 실체와 실체의 모사인 그림자적 측면을 말한다. 우리의 현실은 그림자에 해당하고, 저자가 말하는 건강 상태는 바로 유일한 진실의 실체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건강 정의를 다른 말로 이해해보면 매우 기능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체의 모든 부분이 조화롭고 정상적인 역할 해내는 상태만이 저자의 건강범주에 들어갈 있을 듯하다. 다시말하면 저자는 사람이 건강한 상태는 신체에서 측정된 수치가 정상적 범위 내에 속해있을 경우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수많은 크고 작은 병에 걸리고 고통을 경험하기도 한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병치레를 하는 것도 크게  건강 범주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했다. 앓고 온전히 회복하는 일도 결국은 건강한 상태로 봐야할 듯한데, 이부분은 단지 나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다.  

     책내용만을 보고 저자에 대해 짐작해보면 저자는 온건한 보수성향의 백인 가정에서 교육을 받은 인물이 아닐까한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이 발생한 후인 1942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저자는 어려운 시기에 태어났지만 저자의 가치관은 50-60년대 호황기 백인 중산층 가족 가치관의 전형인듯하다. 건강을 이야기하며 프랭클린을 인용하는 것도 어떤 점에서보면 저자가 종교에 대한 표면적인 편견은 없으나 청교도적인 가치관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프랭클린으로 대표되는 청교도적 윤리관은 근면, 절제, 검소 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일찍자고 일찍일어나면 건강해진다.’라는 프랭클린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건강 관한 장에서 저자에 대해 분명히 청교도적 가치의 영향을 느낄 있다. 아울러 동성 결혼과 양육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논의의 카테고리에 포함시킨 점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신선하게 다가왔다.

   저자의 가치관은 <사피언스의 미래>라는 책에서 이루어진 토론의 참석자인 매트 리들리와 스티븐 핑커의 관점과 너무나 유사한 같다. 매트 리들리와 스티븐 핑커는 과학자이고, 사회에 대한 모든 인식과 판단 기준은 절대적으로 수치와 자료에 기반하는 같기 때문이다. 이들이 참여한 토론의 주제는 인류의 미래는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대한 것이었으며, 상대편 토론자는 알랭 보통과 맬콤 글래드웰이었다. 알랭과 맬콤은 인문학을 공부한 이들로서 인류의 미래는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인간의 정신적 가치에 중점을 두어 토론을 진행해나갔다. 반면 매트 리들리와 스티븐 핑커는 인류의 미래는 절대적으로 낙관적이며, 모든 통계와 수치가 이를 증거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전문가는 경제학자였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결정짓는 다섯가지 선택> 저자인 로버트 마이클은 경제학자이자 공공정책 분야의 권위자 답게 방대한 통계자료를 인용한다. 통계자료에 대한 이견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료를 해석하고 이를 어떠한 의도를 갖고 견해를 표출하게 때에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새삼 환기하게 된다. 저자의 조언은 수긍이 가는 부분도 많지만 사실 저자의 조언은 전문가이기에 있는 조언이라기보다는 인생의 선배로서 있는 조언일 것같다. 상식적으로 이미 주변의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어본 조언들이 많기 때문이다.

(책을 덮으며)

책에는 할아버지 경제학자가 후배들에게 해주는 조언들이 가득하다. 다만 인생의 여러 국면에서 판단할 기준을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다소 제한적인 조언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모든 선택의 행위를 투자, 그리고 선택이 잘되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수익률 된다면, 기대한 수익률이 나오지 않았을 경우 개인의 선택은 틀린 것이 된다는 것일까. 저자가 제시하는 각각의 중요한 선택에서 반드시 존재하는 불확실성 떠올려본다면 독립적인 성인 된다는 것은,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노력하되, 자신의 선택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결정의 순간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불확실성을 최소화는 선택을 하여 자신의 삶에 주도적으로 관여함을 의미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제시하는 모든 통계와 진심어린 조언들 뒤에는 결국 인생의 주인인 본인이 모든 국면에서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져야한다는 점을 깨닫는 일이다. 

   독자가 인생의 단계에서 선택의 기로에 직면해 있을 , 저자는 수많은 선택의 길이 있음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개개인의 사정은 모두가 다른 ! 결국은 여러 주제를 언급하기는 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선택의 가능성의 수에 반하여 지극히 원론적인 선택시 고려사항만을 전달해 있을 뿐이다. 결국 각자의 인생에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은 책을 읽는 독자들이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죽음 문제와 마찬가지로 보편성을 공유하면서도 지극히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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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본 길이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책을 읽고 뒷풀이를 글로 끄적끄적 남겨보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람사이의 관계나 사람의 일들이 무인도에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책을 읽고 잠깐 잠깐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을 온전히 붙잡아둘 건실한 기억력도, 그나마 붙들은 생각들을 제대로 표현할만한 재주도 없다는 생각에 여러 책들을 그저 읽고 잊기에 바쁜 나날들이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너무 주지 말고 더도말고 A4용지 이내로, 그리고 무형식의 글이라도 기록해보자하는 생각이 들었다. 곳에서 짧은 전세 계약기간이 지나고 다시 새로운 곳에서 다른 전세입자로서 생활을 시작했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좀더 정리가 되고 안정을 찾으면 책읽는 시간도 좀더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래서 편히 손에 집어든 책이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 < 가본 길이 아름답자>였다.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작가들의 에세이나 산문집에 쉽게 눈길이 가지 않는다. 자유로움과 잡스러운 주제를 편하게 들려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도 무난하게 읽어가지만, 그렇다고 애착이 가는 정도는 아니다. 대신 작가들의 작품을 오히려 좋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짧은 독서경험이지만 반대의 경우, 작가의 작품(소설)보다 작가의 에세이를 좋아하는 예외적인 경우가 나에게 있었는데, 작가는 제프 다이어라는 영국작가였다.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을 읽을 때도 사실은 그리 기대를 하고 읽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마음 편히 읽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2010년에 출간된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은 작가의 작품을 아직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흥미있게 읽었다. 50 당시 한국전쟁이 발발할 즈음 서울대생이었던 작가가 전쟁 발발 직후 변해버린 삶의 조건에서 어떤 삶을 살아온 분이었는지 보다 이해할 있었던 산문집이었다. 특히 세대와는 전혀 다른 삶을 겪어낸 분이기에 작가의 전쟁 체험과 가족사, 사람들이 살림살이에 대한 기록은 미래의 세대들에게는 소중한 유산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전쟁통에 운좋게’ PX 취직이 되어 알게된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 그리고 서울대생으로서 기고만장하고 무례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반성하며 성숙하게 사연이 인상깊다. 박수근 화백의 추모전에서 만난 나무와 연인이란 제목의 그림이 작가에게 영향에 대한 뒷이야기 등은 작가의 작품에서 전혀 없는 내밀한 고백이기도 하다. 산문집에는 작가와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연, 그리고 박경리 선생과의 각별한 인연이 소개되어 있어 작가의 삶에 대한 이해를 있다.

   2 책들의 오솔길에서 만나는 작가의 독서감상도 흥미롭다. 신문에 연재했던 작가의 책읽고 후의 이야기 작가 스스로 독후감 아니라고 말한다. 글들은 단지 책을 읽다가 오솔길로 새버린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기자기한 오솔길을 거느리고 있어 쉬엄쉬엄 쉬어갈 있는 책읽기 작가의 의도이다. 작가가 읽은 권에 대해 간결하게 적어나간 글들은 독자가 따라 읽어나가기에 부담이 없고, 솔직하여 어느새 작가를 따라 오솔길을 걷는 기분이 된다. 이러한 능력도 결국은 작가의 오랜 필력에서 나온 것일테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손자, 손녀를 평범한 할머니로서 작가의 솔직함을 보는 즐거움이 책의 매력적인 하나가 아닐까. 앞에서 언급했지만 무엇보다도 작가의 유년시절의 기억과 전쟁의 경험에 대한 에피소드는 나를 비롯한 젊은 세대들에게도 소중한 기록이라 생각한다  

 

 

‘작가가 시를 읽는 이유들‘
215면)

"글을 쓰다가 막힐 때 머리도 쉴 겸 해서 시를 읽는다. 좋은 시를 만나면 막힌 말꼬가 거짓말처럼 풀릴 때가 있다. 다 된 문장이 꼭 들어가야 할 한마디 말을 못 찾아 어색하거나 비어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시를 읽는다. 단어 하나를 꿔오기 위해, 또는 슬쩍 베끼기 위해. 시집은 이렇듯 나에게 좋은 말의 보고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 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숩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 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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