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식은 도로 맞은편의 건물들 사이로 사위어가는 황혼을보고 있었다. 황혼(黃昏)을 다른 말로 염혼(昏)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그것을 알게 된 후 그는 석양을 볼 때면 어둠 속에서 죽은 사내의 몸을 씻기고 옷을 입히고 염포(殮布)로 묶는불타는 손을 상상하곤 했다. - P263
그러나 뜻밖에 동영은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보다 먼저 동식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수화기 속에서 그의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동식은 태연을 가장했다. "제가 문동식입니다만......" "나야, 형." - P265
황혼병(黃昏病), 혹은 귀소본능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 P267
머리를 헤집어놓았다. 동식은 완전한 통증을 배웠으며 그것을 아는 사람은 오만해질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육체의 무력함과, 그 무력한 육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아는 자 앞에서는어떤 희망도 그리 눈부시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 P271
소리 질러 녀석을 제지하기도 했다. 열 끓는 몸으로 일어나녀석의 다리를 붙안기도 하였다. "어딜 가는 거냐 이 자식아."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녀석은 동식이 울부짖음에 지쳐다시 쓰러져 잠들기를 기다리면서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녀석이 돌아왔다. - P274
"없어. 언제 나갔는지 모르겠다. 계속 지키고 있었는데. 아까 참에 잠깐 채소 트럭이 와서 나갔다 온 것밖엔." - P277
"형아, 아부지가 바다 보여준대, 이담 소풍에 꼭 보여준대애." - P280
"지금, 누구를 기다리세요?" 어머니는 망연하게 동식을 올려다보았다. 동식은 까닭 없이 화를 내고 있었다. - P283
그 집요한 촉수들의 번쩍임이 자신의 두려움을 우롱하기라도 하는 듯 희고 정갈하다고 동식은 생각했다. - P286
"파도치지 않는구나." "그래, 원래 그래." - P291
그것은 마치 수많은 목선들이 이곳에 닻을 내렸다가 썩어가고 남은 풍경 같았다. 오랜 항해 끝에 돌아왔으나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하고 끝내 뭍에서 떠밀린 배들이 닻을 버려둔 채망망대해 속으로 사라지고 난 흔적 같기도 했다. - P294
얼핏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누구나 비정하다고 말할 만한 그무표정 속에서 입술 안쪽을 악물고 있는 어금니의 모양을 분별할 수 있었다. - P297
동식은 어머니의 목마른 시선이 닿은 곳으로 성급히 몸을돌렸다. 불타는 닻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한 사내의 검붉은 그림자가 그 속에서 너울너울 춤추며 걸어 나오는모습이 보였다. - P300
여수의 사랑』의 주인공들이 영현, 동걸, 정선, 자흔과 비슷한 질환을 앓고 있음을 떠올릴 때, 이 시절 한강의 소설 세계는 1990년대 중반 젊은 시인들의 내면을 차지했던 음울한 집단적 무의식을 연상시킨다. 그러니 다시금 반추해보자. 그때그 시절, 무슨 일이 있었던가? 기형도의 시가 ‘상징적 죽음‘의형식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P305
이러한 이야기로 인해 여수의 사랑』은 삶이란 죽음의 육체화이거나 그 수행이라는 명제로 나아가는 듯하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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