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품이 큰 나무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나무 아래 묻히고 싶어.
바다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그 나무는 바다 앞에있어야만 해.
살아서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마지막은 기필코 바다에서 바다까지 머무르기를. - P79

에른스트 얀들의 시에 "낱말들이 네게 행하는 것이 아닌 네가 낱말에 행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된다"는 구절이 있다. ‘행복‘이 우리에게 가하는 영향력에 휘둘리는 대신, 우리가 ‘행복’에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무언가가 바로 망각이기를 바란다.
그 낱말은 죽은 조상에게 맡기고 그만 잊자고, 할 수 있다면 ‘불행’도 잊자고.
기쁘고 슬플 것이나 다만 노래하자고. - P35

창문에는 이름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같은 것도붙고, 눈이나 돌멩이로 위장한 진심도 스쳐간다. 그것들은 숨겨져 있다가, 어두워진 창이 바깥 풍경을 지우고 내 얼굴을 비추면 그 위로 슬그머니 상을 겹친다.
그러니 나에게도 파로흐자드에게도 창문이 필요했던 이유는, 그것이 상상이고 이해이며 꼭 한 번은 거울이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앞에서는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는. - P132

봄이 짧다는 탄식은 어쩌면 봄꽃만을 바라보는 데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대개는 봄꽃 특히 벚꽃이 피어야 비로소 봄을 실감하는데, 벚꽃이 만발하는 기간은 열흘을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벚꽃이 지고 기온이 오르기 시작하면 습관적으로 이런 말을 내뱉는다. "금방 여름 오는 거 아냐? 중간이 없어, 중간이." 사실은, 중간이 있다. 꽃이 피고 지는 때만을 봄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매일 산책하는 사람들은 자연이 돌연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2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미 봄은 존재했다. 흙이 부풀어 올랐고 나무줄기의 색이 바뀌었다.
벌레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고양이들의 소요가 길어졌다. 동그란 물방울을 입안에서 굴리듯 지저귀는 새가숲에 새로 왔다. 봄은 단서들을 한껏 뿌리고 다녔건만,
도시의 건물 안에서는 감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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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아이는 무심하게 아버지의 뱃속에서 추위에 굳어버린 황금빛 덩어리를 꺼내 입안에 집어넣었다. 아이가 입을 벌렸을때 동네 사람은 그 입안에서 여우나 늑대와 같은 뾰족한 송곳니를 보았다.
배가 갈라진 젊은 남자가 동네 사람의 발목을 붙잡았다.
- 풀어주시오… - P166

물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소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으므로, 소년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 또한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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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을 찾으셨네요? 어떻게 구했어요?"
"아아, 거기 앉아 있던 할아버지 봤어요? 그분이 바다로 뛰어들었어요. 71세래요, 믿기지 않아요!"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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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라디오에서 레 미제라블 OST의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틀었는데, 음악이 나가는 동안 영화와 비행기 두 세계가 동시에 떠올라 너무나 풍성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내가 어느 공항으로 날아갈 때 그 영화를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 속에서 그 노래가 흐르던 때에 마침 기내식 서빙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기억난다. 이 비장하고 씩씩한 음악에 맞춰 조금씩 내게 가까워지는 기내식 카트의 움직임, 저 앞에서 승무원이 소고기인지 비빔밥인지 생선인지를 묻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중 하나를 선택하고, 카트는 조금 더 내게 가까이 다가오고 영화 속에서는 민중의 노래가 계속된다. 그러다 마침내 카트가 내 앞에 멈췄을 때 나는 재빨리 정지 버튼을 눌러 영화도 멈춰 세웠다. - P169

"저 사람들 인형 구했나 봐!"
내가 목격한, 휴대폰에 담긴 몇 장면은 이미 ‘결말 부분이었다. 그리고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보고 있었던 건 이 소동의 ‘위기‘ 쯤 됐다. 그 사이 ‘결정‘을 놓친 것이다. 그걸 유추해야 했다. 할아버지가 인형을 절벽 아래에서 구해온 걸까? 정황상 그런것 같았으나 확인할 길은 없었다. 이곳을 떠날 시간이기도 했다. 햇빛과 바람 때문에 수영복은 그새 말라 있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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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는 말 그대로 1호다. 그러니까 내가 ‘인공 반려자‘를 개발하고 시험 작동하는 일을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맡은 기계다. 물론 진짜 이름이 ‘1호는 아니다. 모델명이 따로 있고 회사에서 임의로 부여한 이름과 내가 시험 가동하면서 지어준 이름도 있다. 그러나 그런 건 전부 잊어버렸고 이제 와서는 별로중요하지도 않다. 나에게 첫 번째였으니까, 1호는 그냥 1호다.
안 켜지면 어떡하지…... - P126

세스는 1호가 켜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내 옆에 서서 조용히기다리고 있었다. 웃지도 않고 쓸데없이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 P129

나는 내 것이 아닌, 회사에서 받아와 시험 가동 중인 신형인공 반려자의 단단한 가슴에 꼭 안긴 채 그가 깊고 낮은 목소리로 흥얼거리는 가사 없는 곡조를 소리 없이 따라 불렀다.
안녕, 내 사랑안녕, 내 사랑… - P134

"나 이거 할 줄 몰라."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다.
"넘어질 것 같아."
「그냥 제가 하는 대로 따라오세요.」1호가 속삭였다.
「천천히.」화면에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가운데 1호는 영화의 마지막 삽입곡을 배경으로 나를 안고 느리게 부드럽게 춤추며 거실을 돌았다. 기계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달콤하게 슬픈 음악에 맞추어 춤추며 천천히 거실을 한 바퀴 돌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를 ‘인공‘ 반려자가 아니라 ‘반려자‘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 P137

11나는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침대 전체를 적시는 것을 느끼며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침실 창문 밖으로 셋이 밤의 거리를 걷는 모습이 보였다.
여섯 개의 다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가로등 아래를 지나갈 때 우연인지 알 수 없지만, 가로등 불빛이 흔들려 셋의뒷모습이 어둠에 가려졌다.
그것이 내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 P143

여자아이의 목에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남자의 아내는 어린딸에게 신경 쓰느라 아들이 손톱과 입가에 묻은 얼마 안 되는 피를 아깝다는 듯이 열심히 핥는 모습은 눈치채지 못했다. - P151

아들의 몸에서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금빛 액체를 받아 모으며 남자는 마음의 평화와 미래의 희망을 되찾았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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