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칼럼>
더 추락할 게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 부제 : 고 노무현과 엄행수
이번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5월 23일) 소식을 접하며 행복의 조건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그 높은 권좌에 오르지만 않았다면 자살하는 죽음에 이르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평범한 삶을 살았더라면 좋은 생애를 살았을 것이라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최근 어느 일간 신문(5월 14일자)에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게재되었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안정적인 성공을 이뤘다는 내용이었다. 이 연구는 하버드 의대 정신과의 조지 베일런트 교수가 주도한 것으로, 미국 하버드대 2학년생으로 전도유망했던 남학생 268명의 일생을 72년간 걸쳐 추적해 본 것이다. 연구 대상자의 약 3분의 1은 정신질환을 한때 겪었음을 알아냈다. 하버드 엘리트라고 해서 다 좋은 인생을 산 것은 아니었던 것. 이 연구에서 행복하게 늙어가는 데 필요한 요소는 7가지로 추려졌다. 그 첫째가 ‘고통에 적응하는 자세’였고, 교육과 안정적 결혼, 그 밖엔 금연ㆍ금주ㆍ운동ㆍ적당한 체중 등의 건강을 위한 것들이었다.
이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행복의 조건의 으뜸이 ‘고통에 적응하는 자세’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곧 ‘고통을 견디는 능력’의 유무를 말할 것이다. 이 연구에 근거해서 생각할 때,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 중엔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한때 이어졌던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도 고통에 견디는 능력이 중요함을 깨닫게 한다. 물론 자살의 원인은 본인만 아는, 더 복합적인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더 추락할 게 없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할 수 있다
박지원 저, <예덕선생전>이란 작품에 매력적인 인물 두 사람이 나온다. 한 사람은 엄행수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그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똥을 져 나르는 일에 종사한다. 그는 남이 그에게 고기 먹기를 권하면 ‘허허, 목구멍을 지난 다음에야 나물이나 고기나 마찬가지로 배부르면 그만이지, 하필 값비싸고 맛 좋은 것만을 먹을 것이 무어냔 말이오’하고 사양하며, 또 새 옷 입기를 권하면 그는 ‘저 넓디넓은 소매돋이를 입는다면 몸에 만만치 않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면 다시금 길가에 똥을 지고 다니지는 못할 것이 아니오’하고 사양한다. 그는 더럽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자기 삶에 불만이 없고 분수를 지키며 평화롭게 산다.
또 한 사람은 선귤자인데, 그는 남들이 모두 무시하는 엄행수를 존중한다. 그에 의하면, 엄행수는 하는 일이 더럽고 신분은 미천하지만 마음이나 행동은 의롭기 때문에 존경할 만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엄행수를 ‘예덕 선생’이라고 부른다. 선귤자는 말한다.
“나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 차린 음식이 너무나도 먹을 것이 없을 땐, 반드시 이 세상에 나보다도 못한 가난뱅이가 있음을 생각했네. 그러나 이제 저 엄행수의 경지에 이른다면 무엇이라도 견디지 못할 것이 없겠지.”
엄행수는 더 이상 추락할 게 없는 사람이기에 오히려 행복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는 챙겨야 할 가족이 없으니 가족으로 인한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권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명예도 없다. 그러므로 근심도 없다. 그저 배고플 때 먹는 한 끼의 식사와 달콤한 밤잠이면 충분한, 그런 삶을 산다.
중요한 건 삶이 아니라 삶에 대응하는 방식
엄행수의 삶을 통해서 보면 행복의 조건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어둠 속에서 빛이 더 밝듯이, 불행 속에서 더 아름답게 꽃 피울 수 있는 게 행복이라는 역설도 가능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인의 삶 자체가 아니라 그 삶에 대응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것이 행복 또는 불행의 인생길로 갈라놓는다.
명예가 실추되는 일로 또는 다른 불행한 일로 큰 고통을 받을지라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게 과연 최선일까, 그러한 시련을 새 인생을 사는 계기로 삼을 수는 없을까, 이렇게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볼 것이다. 자살로 죽느냐 굳건히 이겨내고 사는냐의 선택이 바로 삶에 대응하는 방식의 문제이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후회를 하기도 한다. 그만큼 인간은 부족함이 많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미 반성과 뉘우침으로 얼룩져 불행해진 사람에 대해선 그 누구도 마음의 돌을 던질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나 역시도 어리석은 행동으로 괴로워 할 때가 있는데, ‘난 왜 이리도 어리석을까’하면서도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내가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은 모습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이번 전직 대통령의 자살 사건은 국민들에게 많은 충격과 슬픔을 안겨 주었다. 그동안 있어 온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공통점은 세인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높은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명예 훼손과 같은 일로 ‘추락’할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추락한 자의 비애를 ‘자살’로 마무리한 그들의 고통스런 마음을 헤아려 보며 엄행수가 떠올랐다. 그를 통해서 더 이상 추락할 게 없는 밑바닥의 삶이어서 오히려 불행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엄행수는 행복의 조건 따윈 갖추고 있지 않은 삶을 살면서도 불평 없이 사는, 아름다운 덕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존경스럽고 본받고 싶어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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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무엇을 단정하거나 확신하는 것은 위험하다’라는 깨달음은 ‘독서’가 준 선물이었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것은 결국 살면서 갖게 될 이런 저런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늘은 이렇게 글을 썼다. 하지만 내일 쓰는 글은 오늘과 다른 견해를 가진 글이 될 것이다. 사람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닌, 흐르는 물과 닮았기 때문이다.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성’의 인생을 사는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