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연인들은 서로 사랑하니까 만난다.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만남은 지속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둘의 사랑의 크기가 똑같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두 사람은 상대보다 더 사랑하는 쪽이 되거나 덜 사랑하는 쪽이 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더 사랑하는 자일까?

 

 

알랭 드 보통 저, <우리는 사랑일까>와 롤랑 바르트 저, <사랑의 단상>을 읽고 나니 그 답이 보였다.

 

 

 

 

 

1. 노력하는 자가 더 사랑하는 자이다

 

 

연인 관계에서 둘 중 누가 더 사랑하는 자일까. 이를 알기 위해 ‘두 사람 중 누가 더 노력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면 된다.

 

 

<우리는 사랑일까>에 이런 글이 있다.

 

 

....................

(전화 통화로) 대화가 펼쳐지는 어느 지점에서, 앨리스(여자)는 자신이 가지 않으면 에릭(남자)은 자기 집에서 나오지 않으리라는 감을 잡았을 것이다. 저녁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은 그 남자의 욕망은 아주 작고, 분명히 그녀의 욕망보다 약했다. 그 남자는 혼자 있는 것마저 감수할 테지만, 그녀는 쉽게 그러지 못했다. - 그래서 노력하는 일은 그녀의 몫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사랑일까>, 371쪽.

 

 

 

 

연인들이 바라는 것 중 하나가, 둘의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상대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을 때가 있는지 모른다.

 

 

“나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싶어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상대보다 더 노력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상대보다 더 사랑하는 자이다.

 

 

 

 

 

2. 기다리는 자가 더 사랑하는 자이다

 

 

두 연인 중에서 누구에게 권력이 있을까. 당연하게도 덜 사랑하는 자에게 권력이 있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사랑을 더 받는 자에게 권력이 있다.

 

 

....................

스탕달은, 애인 사이에서는 언제나 한쪽이 상대방을 더 사랑하며, 그래서 두 사람 관계의 권력이 인지되기 마련이라는 비관적인 견해를 밝혔다.

....................<우리는 사랑일까>, 172쪽.

 

 

 

 

연인 관계에서의 권력은 ‘기다림’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주로 기다리고 있는 쪽보다 기다리게 하는 쪽에 권력이 있다.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썼다.

 

 

....................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 기다리게 하는 것, 그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요, “인류의 오래된 소일거리이다.”

....................<사랑의 단상> 67쪽~68쪽.

 

 

 

 

기다리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과도 같은 것. 기다리는 자가 더 사랑하는 자이다.

 

 

 

    

 

 

 

 

 

알랭 드 보통 저, <우리는 사랑일까>

롤랑 바르트 저, <사랑의 단상>

 

 

 

 

 

 

 

 

 

 

 

 

 

 

3. 연인에 대해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더 사랑하는 자이다

 

 

연인들은 서로 상대를 얼마나 알까. 몇 년 연애를 했다고 해서 친숙한 사이라고 해서 과연 상대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친구와 연인을 비교한다면 친구보다 연인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

앨리스는 사랑하는 남자(에릭)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그 남자의 행동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에릭은 처음 만난 날과 똑같이 복잡해 보였다. 그 첫 만남에서 그녀는 그 남자를 ‘안’ 줄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주장할 수 없었다. (…) 그리고 예상할 수 없고, 끊임없이 질문과 해석이 뒤따르는 불안정 상태에 힘이 빠졌다.

....................<우리는 사랑일까>, 149쪽

 

 

 

 

앨리스처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연인이 어느 날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연인인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면, 롤랑 바르트가 한 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

“아무리 해도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은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라는 뜻이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해독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 역시 당신을 해독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단상>, 196쪽.

 

 

 

 

누구에 대해 의문을 품고 골똘하게 생각하는 건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상대를 사랑할수록 상대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아질 것이고, 상대가 자신을 사랑할 거라는 믿음이 약할수록 상대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연인에 대해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더 사랑하는 자이다

 

 

 

 

 

4. 피곤하다는 말을 듣는 자가 더 사랑하는 자이다

 

 

함께 있을 때 상대로부터 “당신을 만나면 한순간에 나의 모든 피로가 풀려요.”라고 말하는 걸 듣고 싶은 게 연인일 것이다. 반대로 상대로부터 듣고 싶지 않은 말 중 하나가 이 말일 것이다.

 

 

“오늘 좀 피곤해요.”

 

 

피곤하다는 상대의 말을 들은 연인은 마음속으로 “어떻게 나를 만나면서 피곤함을 느낄 수 있지?”하는 생각을 하며 울적해질지 모른다.

 

 

....................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앨리스, 지금은 밤 1시 30분이에요.”

“그래서요?”

“이런 토론을 시작할 때가 아니라는 거죠. 왜 매사를 복잡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지 모르겠어요. 뭘 알고 싶은데요? 내가 왜 청혼하지 않는지?”

에릭은 반대편으로 돌아눕고 베개에 머리를 고쳐 뉘었다.

“사랑을 나누면서 당신은 날 똑바로 보지 않아요.”

“앨리스, 부탁이에요. 이런 얘기는 내일 하면 안 되겠어요? 지금 피곤해요.”

....................<우리는 사랑일까>, 256쪽~257쪽.

 

 

 

 

상대가 피곤하다고 말하면 잔인하게 들리는 게 사랑하는 자의 마음이다.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하지 않음을 전달하는 말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나는 이미지를 변질시키러 오는 것은 모두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의 피로를 두려워한다. 피로란 경쟁 대상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것이다. 어떻게 피로에 대항해 싸울 수 있단 말인가? 나와 그 사람을 연결하는 이 유일한 끈인 피로를, 사랑에 지친 그가 ‘내게 주기 위해’ 조각조각 자르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내 앞에 놓인 이 피로의 꾸러미를 어쩌란 말인가?

....................<사랑의 단상>, 167쪽.

 

 

 

 

상대의 피로와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걸 아는 연인은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피곤하다(피로하다)는 말을 듣는 자가 더 사랑하는 자이다

 

 

 

 

 

 

 

 

**********************

마광수 저, <마광수 인생론 - 멘토를 읽다>에서 저자는 말한다.

 

 

“청춘시절에 연애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평생토록 ‘비퉁그러진 성격’을 갖고서 살아가게 된다.”(41쪽)고. “‘숫총각, 숫처녀 박멸 운동’을 벌여야만 그때 비로소 자유로운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다.”(41쪽)고. 그리고 연인 관계에서의 ‘정신적 사랑’이란 ‘육체적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육체적 쾌락’을 강조한다. 육체적 쾌락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장(場)인 이 생태계에서 원칙적으로 지고지순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46쪽)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헌신적인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랑은 그 속을 벗겨보면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헌신적 사랑은 이기심의 또다른 가면일 뿐이다.(47쪽)

 

남녀가 서로 사랑하며 연애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절대로 ‘하늘의 축복’이 아니다. 연애는 언제나 피 튀기는 ‘심리전(心理戰)’의 양상을 띠고 있다.(49쪽)

 

연애는 그 사람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지만, 한없는 ‘줄다리기’의 연속이라서 동시에 극심한 피로감도 안겨 준다.(51쪽)

....................<마광수 인생론 - 멘토를 읽다>

 

 

 

 

 

 

 

 

 

 

 

 

 

 

 

 

 

 

 

 

 

<우리는 사랑일까>와 <사랑의 단상>를 읽으면서 연애는 ‘피 튀기는 심리전’이고 극심한 피로감을 안겨 준다는 <마광수 인생론 - 멘토를 읽다>의 글에 공감하였다. (그러므로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은 연애를 삼갈 일이다.) 연애가 ‘피 튀기는 심리전’이 되고 극심한 피로감을 안겨 주게 되는 이유는, 사랑이란 감정이 유동적이기 때문이고 상황에 따라 더 사랑하는 자와 덜 사랑하는 자로 나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연인 관계에서뿐 아니라 부부나 친구 사이에서도 더 사랑하는 자와 덜 사랑하는 자로 나뉜다.)

 

 

우리가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사랑을 더 하는 쪽과 사랑을 덜 하는 쪽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고 싶을까. 우리는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기 바라면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을 것이다. 설령 질투로 인해 고통이 따른다고 해도.

 

 

혹시 어떤 관계에서 자신이 더 사랑하는 쪽에 있다고 해서 울적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예를 들면, 한 여자를 몇 년 동안 짝사랑을 하던 한 남자가 드디어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그래서 두 사람이 사랑을 하는 자와 사랑을 받는 자로 나뉜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 여자보다 그 남자를 부러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여자보다 그 남자가 더 행복해 보일 것이므로.

 

 

달콤한 행복은 사랑을 받는 데에 있지 않고 사랑을 하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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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심리상태들의 강도에 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2-11-06 00:38 
    <더>와 <덜>의 구별사람들은 보통 감각, 감정, 열정, 노력과 같은 의식의 상태들이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어느 한 감각이 같은 성질을 가진 다른 감각보다 두 배, 세 배, 네 배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음을 확언한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정신물리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정신물리학의 반대자들조차 다른 감각보다 더 강한 감각, 다른 노력보다 더 큰 노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리하여 순전히
 
 
숲노래 2012-10-27 0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을 그으면서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을 나눌 만한가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글로 쓰고 책으로 내는 사람이 있고... 또 읽는 사람이 있으니 ^^;;;

사랑할 뿐인 삶일 테니까요.
스스로 즐겁게 누리는 사랑스러운 삶일 테니까요.

페크pek0501 2012-10-27 16:58   좋아요 0 | URL
된장 님, 반갑습니다. 님 덕분에 무플을 면했네요. 감사드립니다.
님에 대한 답글은 제가 올린 글 <싱거운 후기>로 대신하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프레이야 2012-10-27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늘 이렇게 몇 권의 내용을 비교분석해가며 읽고 생각정리하고 쓰시고,
놀라워요. 참 좋습니다.^^
저 위의 두 권은 저도 좋아하는 책이에요.

-우리가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사랑을 더 하는 쪽과 사랑을 덜 하는 쪽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고 싶을까. 우리는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기 바라면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을 것이다. 설령 질투로 인해 고통이 따른다고 해도.-

특히 이 부분에 공감해요.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피곤하고 힘든일이란 점도요. 그만큼의 감정과 에너지를 쏟아붓는 일이니.
더 사랑하는 자가 약자,라는 대사 영화 '음란서생'에서도 나왔지요.^^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왕비를 지극히 사랑하여 질투하고 집착하는 왕이 하는 말...

여긴 하루종일 비가 내려요. 추적추적... 몇 개씩 달려있는 나뭇잎이 다 젖었어요.
전둥번개도 치고 아까 대낮부터도 하늘이 어둡네요.
그래도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자요^^

페크pek0501 2012-10-27 18:02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 님, 고맙습니다. 저에게 힘을 주시네요.
으음~~ 점점 자신이 없어져서 글 쓰면서 힘이 빠지고 그래요.

몇 권의 책 내용을 비교분석했다는 평은 과분하고요, 그냥 읽다 보니 두 권의 책이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배열해 본 것입니다. ㅋㅋ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프레이야 님을 보면서(올려진 글의 제목의 목록을 보면서) 아, 부럽다, 했어요.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저, 졌어요. ^^

다크아이즈 2012-10-28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이며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찍이 토마스 만이 토니오 크뢰거에서 가르쳐 준 이 단상을 연애중이거나 치열한 연애를 거쳐온 사람들에게 말해봐도 공감 못 얻는 이 분위기를 어찌할까요? 피폐한 상처만 남을 뿐인데도 사랑은 주는 거기 때문에 충분히 행복하다는 그릇된 학습 위안 같은 거가 아닐까 생각해봤답니다.

더 사랑하는 자들이 연애의 이런 기본 심리(아닌 정직한 상식!)를 알고 덤비면 덜 상처받을 수도 있을까 해서 저는 아들이 대학생 되면 이런 책을 마구 선물할까 합니다. 기질 상 이백오십프로 사랑에 지고도 그게 사랑이라 문밖에 서성일 부류 같아서요. 하기야 암만 알고 덤벼도 지 맘대로 안 되는 게 사랑이니 별 도움이야 되겠습니까.


페크pek0501 2012-10-30 00:1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를 읽고 인상 깊어서 리뷰를 쓴 적이 있어요.

저는 연애 심리를 잘 나타내어 준 책으로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꼽습니다. 이 책을 보고 연애 심리를 좀 알게 되었어요. 하긴 안다고 해도 실전에선 아마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니 젊은이들에게 읽으라고 해도 큰 효과는 없을 듯해요. 차라리 나이가 들어서 그 책을 읽어 봐야 좀 알게 된다고 할까요.
사랑도 결혼도 어렵습니다. 그런 어려운 관문을 잘 통과할런지, 저도 우리 애들을 보면 걱정될 때가 있어요. 마음 다치는 일이 생길까 봐, 말이죠.ㅋㅋ

"사랑에 지고도 그게 사랑이라 문밖에 서성일 부류 같아서요."- 이 문장 참 맘에 드네요. ^^
긴 댓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oren 2012-11-06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페크님의 이 글을 보자말자 참으로 '도발적인' 제목의 글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었답니다. 아무튼 쉽게 답글을 달 수조차 없게 만드는 그런 인상을 잠시 받았었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두 연인이 언제나 서로를 향해 '더'나 '덜'에 대해서 예민한 촉각을 곤두세울 수도 있고 그래서 언제나 피곤할 수도 있겠지만, 누가 더 사랑하는 것일까를 글로 표현한다는 건 하여튼 여간 어려운 글이 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부터 들었거든요.

사랑하는 연인관계에서 '더'와 '덜'을 따진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관계'에서나 있을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겠구요. 그런 측면에서 저는 '된장님'의 댓글에 적극 공감을 느끼게도 되더군요.

아무튼 뒤늦게 제가 긴 댓글을 달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심리상태들의 '더'와 '덜'에 대한 한 탁월한 철학자의 통찰을 (페크님의 글에 기대어) 정리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 먼댓글로 쓴다는 것도 아울러 말씀드릴께요.

덧) 10월 마지막주에 '가을산행' 때 '필례약수터'를 막 지나자말자 '더덜'이라는 제목의 팬션 같은 집을 발견했는데, 그 집 주인이 더도 덜도 말고 '더덜'과 같은 그런 집을 상상하고 이름을 달았다면 정말 대단한 이름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답니다. (관련글 http://blog.aladin.co.kr/oren/5940503)

페크pek0501 2012-11-06 19: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님의 댓글에 대한 답글은 오늘 올린 <싱거운 후기>로 대신하겠습니다. 쓰다 보니 길어져서요.

추신.
먼댓글을 받으니 영광스럽습니다. ㅋ
 

 

 

 

이번 글이 이 서재에 150번째로 올리는 글이다. 100번째로 올린 글이 지난 해 9월이었으니 거의 13개월 만에 150번째가 된 것이다.

 

 

나는 시간에 쫓기면서도 왜 블로거 활동을 중단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내게 있어 블로거 활동은 연애이고, 도박이고, 실속이 없는 짓인 줄 알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즐거운 취미 활동이기 때문이다.

 

 

“불행만큼 인간이 전념하는 대상이 또 있을까.”(알랭 드 보통)

“불행만큼 인간이 전념하는 대상은 즐거움이다.”(pek0501)

 

 

 

 

 

1. 블로거 활동은 연애다 : 블로거 활동(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타 블로그의 글을 읽고 댓글을 쓰는 것을 포함한 활동을 말함)을 하면서 연애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만나지 못하면 연인이 궁금한 것과 같이 블로그도 그렇다. 며칠 동안 블로그에 들어오지 못하면 궁금하다. 연인과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하듯, 블로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하다. 연인과 연애하면 다른 모든 것들이 시시해지듯, 블로그와 연애하면 다른 모든 것들이 시시해진다. 연인과 작별하면 마음고생을 해야 하듯, 아마 블로그와 작별하게 된다면 마음고생을 하게 될 것 같다.

 

 

블로거 활동을 좋아하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의 즐거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창의성으로 인한 즐거움이다. 글을 쓸 때마다 내가 기획하고 내가 구성하고 내가 마무리 작업까지 해야 하는 창의적인 글쓰기는 재미있다. 또 하나는 평가로 인한 즐거움이다. 매번 글을 올릴 때마다 추천의 수와 댓글의 내용으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글쓰기는 재미있다. (최근 즐겨찾기의 수가 5명이 늘었는데 그중 4명은 비공개한 블로거였다. 이것도 평가로 본다.) 원래 가장 재밌는 놀이가 창의성이 있으면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놀이가 아닐까. 연애를 할 때 상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옷차림에서부터 언행에 이르기까지 창의적으로 연출하는 재미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연애를 하겠는가. 블로거 활동도 마찬가지다.

 

 

 

 

2. 블로거 활동은 도박이다 : 블로거 활동은 중독성이 있다는 점에서 도박과 같다. 화투를 치는 도박꾼은 돈을 따면 그 재미로 또 화투를 칠 것이며, 돈을 잃으면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또 화투를 칠 것이다. 블로거도 글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으면 그 재미로 또 글을 쓸 것이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또 글을 쓸 것이다. 결국 도박꾼도 블로거도 똑같이 그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블로거들은 돈을 매번 잃으면서도 화투를 치는 도박꾼과 같다. 그러므로 아무리 불미스런 일로 이곳을 떠난 블로거라도 우리는 그에게 위로의 말 대신 축하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른다.

 

 

“당신의 중독이 치료된 것을 축하합니다.”라고.

“시간을 빼앗기고 몸이 축나는 블로거 활동을 끝낸 것을 축하합니다.”라고.

“블로거 활동을 했던 시간에 지금은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하겠지요.”라고.

 

 

 

 

3. 블로거 활동은 실속이 없는 짓이다 : 블로거 활동(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블로거들의 활동)은 금전상 아무런 이득이 없는, 실속이 없는 짓이다. 그 시간에 만약 돈을 버는 일을 한다면 훨씬 실속이 있는 일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블로거 활동을 한다. 디스크라는 병이 생겨도, 안구건조증이 생겨도 그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고 싶은 일이니까.

 

 

누군가에게 허점으로 인해 마음이 끌리는 일이 많다. 평소에 철두철미한 사람이 우산 챙기는 걸 깜박 잊었던 일을 말하는 것을 보면 갑자기 그가 좋아진다. 구멍난 양말을 신어서 창피해 하는 사람을 보면 그를 위해 따뜻한 웃음을 지어주고 싶다.

 

 

만점의 시험지, 일류 대학, 최고로 유능한 사회인…, 이런 것들만을 지향하는 이 사회가 삭막하게 여겨질 때마다 나는 허점이 있는 사람이 좋아진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실속이 없는 블로거들이 나는 좋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 김재진 작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伴侶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략)

 

 

 

 

 

 

 

 

 

 

 

 

 

 

 

 

 

4. 블로거 활동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 블로거 활동을 하게 되면 댓글을 통해 여러 이웃들을 만나게 된다. 이런 이웃들과의 만남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소외감과 고독을 상당히 덜어 준다. 그래서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것이 블로거 활동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저의 개인적인 느낌을 쓴 것입니다. 좋은 이웃들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

추신.

내 일기장에 적혀 있는 것.

실속을 따지지 말 것. 그냥 블로거 활동 그 자체를 즐길 것. 인생, 별거 아니다. 죽을 때쯤, 그땐 참 즐거웠노라, 라고 말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주 잘 산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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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2-10-16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pek0501님께 바라건대, 불꽃같은 블로거 생활보다 장작불, 화롯불같은 블로거 생활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페크pek0501 2012-10-17 12:45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고 싶어요.
마립간 님도 이곳에서 오래 뵙길 바랍니다.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숲노래 2012-10-16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으로 이득이 안 된다지만,
'마음'에 도움이 되면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면,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이득이라 하겠지요.

언제나 즐겁게 삶을 일구시기를 빌어요.

페크pek0501 2012-10-17 12:4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된장 님. 블로거 활동을 열심히 하면 몸은 좀 고단해도 풍성해지는 정신세계와 따뜻해지는 마음을 가질 수 있으니, 이것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2-10-16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근한 구들장 온기 같은 블로거가 됩시다요!! ㅎㅎ
마음에서 즐거우면 되는 것이죠.^^

페크pek0501 2012-10-17 12:48   좋아요 0 | URL
예, 프레이야 님. 인생의 최종 목표는 행복한 삶이라는 것, 잊지 말자고요.
참, 알랭 드 보통의 말은 제가 님의 페이퍼에서 살짝 가져왔다는 것, 아시죠?
님도 필요하시면 제 페이퍼에서 살짝 가져가셔도 됩니다.(있을까 모르겠지만요.ㅋㅋ)

카스피 2012-10-16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정말 공감이 가는 글입니당^^

페크pek0501 2012-10-17 12:49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 공감하시는 1인을 만나 반갑고 고맙습니다.

oren 2012-10-17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거 그 어떤 시대에도 일찌기 경험해 보지 못했던 '소통 과잉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저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을 통해 끊임없이 서로 '소통'하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힌 모습들을 보노라면 한편으로는 '혼자'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몸부림 같다는 생각도 가끔씩 하게 됩니다. (며칠 전에 축구선수 기성용은 인터넷을 쓸 수 없는 환경을 '지옥같다'라고 표현할 정도였죠)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철학적으로 깊이 깊이 탐색했던 사람 가운데 하이데거도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가 아직까지 살아서 오늘날 어마어마한 사용인구를 지닌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봤더라면 뭐라고 말했을지 도무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것 같네요.

* * *

가까움에 대한 본질적인 경향

거리를 없앰은 거리를,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의 멂을 사라지게 함을, 가까워지게 함을 말한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거리를 없애며 존재한다. 그는 그가 무엇인 그 존재로서 그때마다 존재자를 가까이에서 만나도록 해준다. 거리를 없앰은 멂을 발견한다. 이 멂은 거리와 마찬가지로 현존재적이지 않은 존재자에 대한 범주적 규정이다. 그에 반해서 거리를 없앰은 실존범주로서 확고하게 견지되어야 한다. 도대체 존재자가 현존재에게 그것의 멂이 발견되는 한에서만 세계내부적인 존재자 자체에서 다른 것과 관련되어서 "거리"와 간격이 접근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존재자들 가운데 어떤 것도 그것의 존재양식상 거리를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단지 거리를 없앰에서 발견되는 측정 가능한 간격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거리없앰은 우선 대개 둘러보는 가깝게 함, 조달함으로서의 가까이 가져옴, 예비해놓음, 손안에 가짐이다. 그런데 존재자를 순수하게 인식하며 발견하는 특정한 방식들도 가깝게 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현존재에는 가까움에 대한 본질적인 경향이 놓여 있다. 우리가 오늘날 다소 강요되듯이 함께 행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속도상승은 멂을 극복하도록 몰아세운다. 예를 들면 "라디오 방송"과 함께 현존재는 오늘날 일상적 주위세계의 확장과 파괴라는 방법으로써 그것의 현존재의 의미를 아직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세계'의 거리를 없애고 있다. (149쪽) - 『존재와 시간』中에서

페크pek0501 2012-10-18 15:03   좋아요 0 | URL
오렌 님이 애덤스미스, 쇼펜하우어, 키케로에 이어 이번엔 하이데거의 글을 배에 싣고 오셨네요. 멋집니다. 이 배를 타면 가지 못할 곳이 없을 것 같군요.ㅋㅋ
하이데거의 저작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를 거론하는 책들은 많이 읽어서 마치 그의 저작을 읽은 것처럼 착각이 듭니다.
책을 읽다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이 하이데거를 비롯해 마르크스, 프로이트, 다윈, 에리히 프롬인 듯해요. 이들의 저작은 다 읽었는데 하이데거는 못 읽었네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언어가 인간의 생각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고 무척 감탄했었어요.(저, 원래 감탄 잘 해요. 제 특기죠.ㅋㅋ)

이 가을, 오렌 님이 사진과 단풍과 더불어 가장 멋지게 이 계절을 보내실 듯 생각됩니다. 행복한 가을 보내세요.

순오기 2012-10-18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공감 백배!^^
하지만 요즘은 교육쇼핑(?^^)에 동참하느라 한동안 소홀했어요.
행복한 가을 되시기를...

페크pek0501 2012-10-18 15:06   좋아요 0 | URL
순오기 님, 반갑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저는 워낙 게으름뱅이 블로거이기 때문에 요즘이 아니라 늘 조금만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만...(남이 볼 땐 게으름뱅이이지만 저 나름대로는 하느라 하는 거예요. 킥킥...)
워낙 바쁘시게 사시는 분인 것, 방문자들도 잘 알 겁니다.
님도, 행복한 가을 보내세요. 바쁘신 일 끝내시고 빨리 원위치하시길... 그래야 순오기 님이죠. 파이팅!!!!!!!!! 또 봐용^^

글샘 2012-10-18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한 구들장같은 서재가 되시길 빌면서...
pek 님이 읽으심 홀랑 빠질 책 하나 알려드릴까요?
일본에서 천 년 전에 헤이안 시대에 궁녀가 쓴 '마쿠라노소시'란 책 보셨나요?
한번 읽어 보시면... 왜 권했는지... 아실랑가? ㅋ

페크pek0501 2012-10-18 15:10   좋아요 0 | URL
글샘 님, 오랜만이군요.
오늘은 옛 친구들을 만나는 기분을 들게 합니다.
조용한 구들장같은 서재가 꼭 될꼬예요.(될 거예요.)
아마 제가 가장 오래 남는 블로거가 되지 않을까, 예측해 본다는...ㅋ

아, 그 책, 180쪽밖에 안 돼서 좋습니다. 누가 추천하시는데, 안 읽겠습니까.
요즘 읽는 책들이 거의 300쪽이 되어서 그 정도의 쪽수라면 앉아서 떡먹기입니다.(누워서 떡먹기는 어려워요.ㅋㅋ)
꼭 구입해서 읽고 그 감상을 님의 서재에 댓글로 남기겠습니다. 그런데 이 게으름뱅이가 언제 읽으려나요. 으음~~~ 책이 밀려 있어서 말이죠. 그래도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읽고 그 흔적을 남기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해도 달력 몇 장 안 남았네요. 슬프다..... 떠나는 모든 것들은 슬픔을 잉태하는 것 같아요. 또 봐용^^

글샘 님 - "왜 권했는지... 아실랑가? ㅋ"(끝에 높여서 읽기)
페크 님 - "왜 권했는지... 아실랑다.ㅋ"(끝에 낮추어서 읽기)
 

 

 

 

1.

대학생 시절에 어느 여자고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간 적이 있다. 한 달간 2학년을 맡아 가르치게 되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능숙한 선생으로 보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교단에 서면 긴장이 되어 표정이 굳어지곤 하였다.

 

 

2주일쯤 지난 뒤, 담임선생님이 학생들한테 교생인 나에게 편지를 쓰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대부분의 교생들이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기 마련이어서 나도 내 인기를 확인하게 될 그 편지들을 은근히 기대하였다. 그러나 편지를 하나씩 뜯어보던 날, 나는 깜짝 놀라며 실망하였다. 숙제로 제출한 그것들은 나의 바람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내 인상이 차갑다, 냉정해 보인다, 깍쟁이 같다 등의 글을 적었던 것이다. 교사답게 보이는 데에만 치중하다보니 내 얼굴과 말투가 그들에겐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 평가에 어찌나 실망이 되던지 그날 하루 종일 우울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질문을 하기 위해 손을 들었는데 이때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내가 그 학생에게 다른 학생의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다. 그것도 그 학생을 잘 안다는 듯한 말투로 말이다. 그 바람에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이에 당황한 나는 말을 더듬었고 얼굴까지 빨개졌다. 능숙한 선생님으로 보이고 싶었는데 한순간에 바보 같은 선생님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같은 또래의 학생들은 정말 비슷비슷해 보였다. 당혹해 하는 내 모습이 안됐던지 학생들은 하나 둘씩 위로를 해 왔다.

 

 

그날 이후로 나의 인기는 조금씩 올라갔다. 내 실수로 인해서 오히려 학생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기가 오르자 자신감이 생겨 덜 긴장해서 재밌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해 줄 수 있었다. 유머와 관련한 이야기와 내 연애 이야기도 해 줬는데, 그들은 무척 재밌어 했다. 이야기를 더 해 달라고 조르기도 하였다.

 

 

교생실습이 끝날 때쯤, 나와의 작별이 아쉬워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도 있을 정도로 나는 인기 있는 교생이 되어 있었다. 나의 인기를 증명하는 건 바로 그들이 내게 준 ‘선물’이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사진과 내게 쓴 편지를 한 권의 앨범에 담아서 내게 주었던 것. 그 선물에 나는 감동하고 말았다. 어느 교생도 그렇게 정성스럽게 만든 선물을 받지 못했다. 교생들은 그런 나를 부러워했다.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그 앨범엔 그 당시 60명쯤 되는 학생들의 사진과 편지가 들어 있다.

 

 

학생들과 친해지기 시작한 건 학생의 이름을 잘못 부른 나의 실수로 인해서다. ‘실수’라는 건 나쁜 것으로 여겨지지만 때론 이 나쁜 것이 이로운 일을 만들기도 한다. 나쁜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이다.

 

 

이 밖에도 내가 살면서 ‘나쁜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라는 걸 깨닫게 하는 일이 참 많다. 또 하나 예를 들면 둘째 아이를 낳던 날, 첫 딸에 이어 두 번째도 딸이어서 그땐 무척 섭섭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남매인 것보다 자매로 자식을 둔 게 더 좋다는 생각이다. 그때와 달리 시대가 변해 딸을 선호하는 세상이 된 것도 그 이유이지만, 무엇보다도 자매는 자랄 때도 그렇지만 결혼을 하고 난 뒤에도 친구처럼 지내는 것을 주위에서 봐 왔기 때문이다. (반면에 남매는 결혼을 하고 나면 친하게 지내며 살기 어려운 것 같다.) 그리고 아들보단 딸이 더 부모를 챙긴다는 점에서도 딸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딸을 낳아 실망한) 나쁜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2.

내가 책을 읽는 즐거움엔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의 글을 읽고 공감하는 즐거움, 그리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의 글을 읽고 새로운 걸 배우는 즐거움. 여기선 전자의 즐거움에 속하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내가 깨달은 것과 똑같이 깨달은 이를 책에서 만났다. 바로 위화 저,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라는 책이다.

 

 

먼저 이 책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야겠다. 이 책은 인민, 영수,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 홀유 등 열 개의 단어를 중심으로 한, 열 편의 에세이로 중국의 40년 동안의 모습을 보여 준다. 저자는 1960년에 출생, 문화대혁명 시기에 성장기를 보냈다. 그는 “이 책에서 나는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라고 했듯이, 독자로 하여금 그의 일상 속의 일화를 들여다보게도 하고 중국의 역사를 들여다보게도 한다.

 

 

독자마다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이 다 다를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 첫 번째 이야기

저자(위화)가 중학생이던 시절엔 책이 귀했다. 그래서 책을 돌려 가며 읽었다. 모든 책들이 수천 개의 손을 거쳐서인지 심하게 낡은 상태의 책을 볼 수밖에 없었는데, 어떤 책은 앞부분의 10여 쪽 정도가 찢겨 나간 책도 있었다. 그는 책 제목도 몰랐고 작가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 채로 책을 읽었고, 또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나는지도 모른 채 책을 읽었다.

 

 

..............................

결말이 없는 이야기들은 나를 훈련시켰다.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못했다. 마침내 나는 스스로 이야기의 결말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 이야기의 결말을 지어내고 이렇게 내가 지어낸 이야기에 감동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위화 저,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81쪽~82쪽.

 

 

 

그 시대엔 파손된 책으로 독서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저자로 하여금 상상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 파손된 소설들이 처음으로 저자의 창작 열정에 불을 붙여서 여러 해가 지나 마침내 작가가 될 수 있게 도와주었으므로 결국 나쁜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 두 번째 이야기

저자의 아버지는 외과의사인 동시에 공산당의 말단 간부이기도 했다. 문화대혁명 초기에 저자는 간부였던 친구 아버지들이 타도 대상이 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에 아버지에게도 그런 액운이 닥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저자의 아버지는 지주 집안의 이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일정한 직업 없이 빈둥거리던 건달이라서 그저 먹고 마시며 노는 것밖에 몰랐으므로 집안은 점점 기울어갔다.

 

 

..............................

이렇게 기울어가던 집안은 1949년에 이르자 2~3백 무 정도 남아 있던 땅마저 전부 팔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렇게 자신의 지주 신분마저 팔아버린 셈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중국 전체가 해방되었을 때 할아버지는 총살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전화위복으로 지주의 아들이라는 오명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 물론 나와 우리 형도 할아버지의 건달 생활에 따른 격세의 수혜자가 되었다.

 

..............................위화 저,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116쪽.

 

 

 

할아버지가 건달이어서 집안이 기울어갔던 것은 그 당시엔 분명 나쁜 일이지만, 그 때문에 훗날 목숨을 구할 수 있었으니 나쁜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 세 번째 이야기

저자는 스물두 살 무렵, 한편으로는 치과의사로서 사람들의 이를 뽑으면서 한편으로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글쓰기는 나중에 더 이상 이를 뽑지 않기 위해서 한 것이었다. 직업을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

여러 해가 지나 중국의 비평가들은 나의 언어 서술이 매우 간결하다고 칭찬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건 내가 아는 한자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나의 작품이 영어로 번역, 출판되자 미국의 한 문학 교수는 영어로 번역된 나의 언어가 마치 헤밍웨이의 언어 같다고 말했다. 나는 내 농담을 미국으로 수출하여 이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헤밍웨이도 아는 영어 단어가 그리 많지 않았나보군요.”

농담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인생은 종종 이렇다. 때로는 단점에서 출발한 것이 갈수록 장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장점에서 출발한 것이 갈수록 단점이 되기도 한다. 마오쩌둥의 말을 빌리자면 “좋은 일이 변해 나쁜 일이 되고, 나쁜 일이 변해 좋은 일이 된다”라고 할 수 있다. 방금 한 농담을 계속하자면 나와 헤밍웨이는 마오쩌둥이 말한 것 중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변한 경우에 속할 것이다.

 

..............................위화 저,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136쪽~137쪽.

 

 

 

 

**** 문학의 힘이란 이런 것

위의 세 가지 이야기는 교생실습 때의 나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나쁜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한다. 나와 저자는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언어, 다른 문화’임에도 똑같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문학의 힘이다.

 

 

..............................

어떤 독자로 하여금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언어, 다른 문화에 속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느낌을 읽을 수 있게 하는 힘 말이다. (…)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문학이다.”

 

..............................위화 저,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109쪽.

 

 

 

 

3.

프로 야구를 좋아해서 야구장에 자주 가던 때가 있었다. 특히 9회 말에서 점수의 반전이 일어나서, 내가 응원하던 팀이 역전의 승리를 거둘 때의 그 짜릿한 통쾌함 때문에 ‘야구는 9회 말부터’ 라는 말을 좋아했다.

 

 

인생이란 스포츠와 같다,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스포츠가 어느 팀이 이길지를 예측할 수 있지만 점수의 반전이 일어나서 우리의 예측을 뒤엎기도 한다는 점에서 인생은 스포츠와 닮았다.

 

 

우리가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당장엔 알 수 없게 만드는 ‘삶의 반전’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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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10-09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생 시절과 여고 교실에서의 교생실습에 얽힌 추억담이 너무나 풋풋해서 좋네요. 그런데 저는 이 글을 읽는 내내 엉뚱하게도 '노년에 대하여' 글을 남긴 키케로가 자꾸만 떠올랐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년'을 두려워하거나 한탄하지만, 키케로는 '노년은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인물인데, 페크님의 이번 글과 나름대로 유사한 점도 있는 것 같아요.ㅎㅎ
* * *
노인의 경우에는 쾌락의 쑤석거림 같은 것은 그리 크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아예 바라지도 않는다네.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괴롭힐 수가 없지. 이미 노쇠기에 소포클레스는 아직도 성생활은 즐기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멋지게 대답했다네.
"이런 맙소사! 거칠고 포악한 주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처럼, 거기서 빠져나오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는 중이오."
· · · · · ·
노년에, 말하자면 육욕과 야망, 투쟁, 적대감, 그리고 온갖 욕망에 대한 복무 기간이 끝나, 마음이 스스로 만족하는, 이른바 마음이 자기 자신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정말 연구와 학문이라는 양식이 얼마든지 있다면, 한가한 노년만큼 즐거운 것도 없다네.
- 키케로,『노년에 대하여』 中에서

페크pek0501 2012-10-10 14:10   좋아요 0 | URL
"정말 연구와 학문이라는 양식이 얼마든지 있다면, 한가한 노년만큼 즐거운 것도 없다네."
이 글에 공감합니다. 언젠가는 주름이 많이 생길 날이 올지라도
저는 책을 읽는 즐거움과 한가한 시간만 있다면 늙음을 서럽게 여기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중요한 건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와 함께 늙는 일인 것 같아요. 꼭 독서가 아니더라도요.

반가웠습니다.^^

프레이야 2012-10-09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그래그래 끄덕끄덕ᆢ이러며 읽었어요. 완전 공감ㅎㅎ 교생 때의 이야기는 참 훈훈하네요.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면서 살아가는 게 사람이고 그것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는 거 같아요.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이, 세상에 나를 키우지 않은 건 없구나, 열화같았던 내 여름을 함께한 대상을 비롯해 내 지난 어리석음까지도 날 키우는 재료였구나 하는 거에요. 위화의 저 책도 담아갑니다.^^

페크pek0501 2012-10-10 14:14   좋아요 0 | URL
예, 프레이야 님, 이 책 좋아요. 저는 개인의 일상을 통해 보여 주는 한 나라의 역사 이야기가 재밌더라고요. 이 책이 중국에서는 출판 금지라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의 소설은 출판이 되었으나 이 책은 비허구성의 책이기 때문이죠. 개인의 삶을 다루기 때문에 그 배경이 되는 역사가 더 애절한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전화위복, 이란 말을 제가 좋아합니다. ㅋㅋ

다크아이즈 2012-10-09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이 책 샀는데, 정말 좋네요. 허삼관매혈기 안 읽었는데 위화의 이 <비허구성 글> 덕분에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세상엔 왜 이리 잘 쓰는 작가들이 많은 걸까요?

페크pek0501 2012-10-10 14:17   좋아요 0 | URL
아, 손님이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저도 위화의 책은 처음 읽은 거랍니다. 워낙 명성 있는 작가라서 궁금해서 구입하게 되었어요. 이미 일간지를 통해 이 책에 대한 소개를 읽어서 어떤 책인지 짐작할 수 있었어요. 저도 이 저자의 다른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잘 쓰는 작가, 정말 많아서 기죽으며 읽게 돼요. 그러나 즐거운 기죽음이에요.ㅋㅋ 책을 산 것을 후회하게 하지 않으니까요.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2-10-10 0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새벽, 제가 이 글에 얼마나 위안을 얻고 가는지 언니는 모르실거예요. ^^

페크pek0501 2012-10-10 14:18   좋아요 0 | URL
아, 달여우 님.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저도‘삶의 반전’에 위안을 받으며 사니까요.
삶이 수학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이라면 얼마나 숨막히겠습니까.
때로는 꼴찌가 일등이 되는 역전의 기회가 숨어 있는 삶을 사랑합니다.
앞으로 자주 보아요. 제가 응원하고 있는 것, 아시죠?

마립간 2012-10-10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잘 읽고 갑니다.^^

페크pek0501 2012-10-10 14:2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마립간 님.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군요.
이젠 아주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느껴지는데요.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12-10-10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1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2-10-10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님글을 읽으니 저도 고 1때 본 교생 선생님이 생각나네요^^

페크pek0501 2012-10-11 15:23   좋아요 0 | URL
저도 고등학교 때 교생 선생님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프로의식이 있는 선생님처럼 보여서 정말 선생님 같았거든요. 제가 그 선생님을 흉내 내고 싶어나 봐요.ㅋㅋ 말하자면 저의 롤모델이 되었던 거죠.
카스피 님, 오랜 만에 뵈니 반갑군요.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숲노래 2012-10-11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k0501 님이 생각한 '능숙한 교사'란 바로 '긴장된 몸'으로 학생을 마주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모습이 되었으리라 느껴요. 스스로 내 모습을 바라고 그리는 대로 나타나니까요.

그런데, 아이들 앞에서 '능숙한 교사'가 될 까닭이란 없어요. 이제 잘 아실 텐데요, 아이들 앞에서 '능숙한 부모'가 될 까닭도 없어요. 그저 '사랑스러운 어버이'가 되면 즐겁고, 동무들 사이에서도 '서로 사랑스러운 동무'로 지낼 때가 가장 즐거워요. 교사 또한 '서로 사랑스럽게 마주하는 사람(어른)'이라면 가장 즐겁겠지요.

겉(지식)으로는 능숙한 교사(교생)로 아이들 앞에 서려 했지만, 마음속(생각)으로는 아이들하고 마주할 때에 사랑스러운 교사이기를 바랐으니, 나중에 '잘못' 이름 부르는 일을 빚었겠지요. pek0501 님 스스로 학생 때에 느낀 '내가 좋아하며 사랑할 만한 교사' 모습을 스스로 빚었으리라 생각해요.

페크pek0501 2012-10-11 15:27   좋아요 0 | URL
아, 된장 님이 좋은 말씀을 해 주셨어요.
그땐 제가 대학생인 때라 어려서? 그런 거예요.
고등학생들과 나이가 몇 살밖에 차이가 안 나기 때문에 선생님답게 보이는 걸 중요시했어요. 또 학교에서도 그렇게 교육시켰고요.
물론 지금은 안 그래요. 요즘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다정하고 재밌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 합니다. 논술 수업 시간이 참 재밌다, 라는 말을 듣는 게 제 목표랍니다. 사랑스러운 선생님이면 더 좋겠지요.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2012-10-11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2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종교를 배우다

 

가이 해리슨 저, <사람들이 신을 믿는 50가지 이유>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타 종교의 경전을 읽어보지도 않고 자기들의 신앙 체제가 다른 것들보다 월등하다고 믿는 것은 마치 다른 팀과 한 번도 경기를 해 보지 않은 축구팀이 자기들이 대회의 우승자라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그리고 신에 대한 예배가 넘쳐나는 가장 종교적인 국가들이 세계에서 가장 불안하고 폭력적이고 가난하다는 것.

 

 

다른 팀과 경기를 해 보지 않고는 자신의 축구팀의 실력을 알 수 없듯이, 종교 역시 타 종교에 대해 공부해 보지 않고는 자신의 종교가 월등하다는 것을 알 수 없다는 지적이다. 또 가장 종교적인 국가들이 사랑과 평화가 있는, 살기 좋은 국가가 되어야 할 텐데, 그 반대로 가장 불안하고 폭력적이고 가난한 국가라는 지적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몇몇 종교만을 다루지 않는다. 긴 역사 속에서 모든 신은 동등하다며, 다음과 같이 일침을 가한다.

 

 

“물론 세상의 종교들은 좋은 점도 많이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종교의 어두운 점이 지나치게 간과되는 것을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어린이 교육이나 새로운 치료법의 개발, 여성의 안전과 평등, 그리고 과학의 발전과 같은 것들을 위협하고, 세계 평화에 악영향을 미친다면 그 주장은 반드시 도전받아야만 한다.”(<사람들이 신을 믿는 50가지 이유>)

 

 

 

이 책은, 저자가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에 대한 일반적인 답변 50가지를 모아서 그것들을 조목조목 따지고 분석하면서, 그 이유들이란 게 믿을 게 못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책이다. 그 50가지 이유 중엔 신이 나를 보호해 주기 때문에, 심판이 두렵기 때문에, 라는 이유도 있다.

 

 

이것을 읽으니 다음의 글이 생각났다.

 

 

“우리는 자식과 부모를 사랑하고, 배우자들에게 충실하며, 친구들에게 진실하고, 공동체에 이바지하며, 우리가 속한 집단에 헌신한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까닭은 사전에 그것들이 어떤 가치와 장점이 있는지 따져보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 아니라, 직감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고, 가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지를 논리적으로 따져보고 고민하는 사람은 위의 인간관계에 ‘적응하지 못했음’을 드러낼 뿐이다. (…) 따라서 신성한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아주 중요하다.”(존 브록만 엮음, <위험한 생각들>)

 

 

우리가 속한 집단(종교 집단도 가능함)에 헌신하는 것은 그것이 올바른지를 논리적으로 따져 봐서가 아니라 직감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고 가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란다. 이것을 우리는 ‘실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종교’하면 떠오르는 건 ‘과학’이다. 그 둘의 세계는 서로 반대의 편에 있으므로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신념은 종교적인 사람들이 합리적인 설명에 실패할 때, 그러한 명제를 믿기 위하여 서로에게 주는 면허증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과 종교의 차이는, 새로운 증거와 주장을 냉정하게 고찰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가에서 생긴다. 그 구별은 명백하고, 필연적이지만, 아직도 곳곳에서, 심지어 상아탑에서마저 묵살되고 있다.”(<위험한 생각들>)

 

 

 

 

 

 

 

내게 확고한 종교관을 갖게 해 준 책은 A. J. 크로닌 저, <천국의 열쇠>이다. 이것은 프랜치스 치셤 신부의 생애를 보여 주는 이야기로, 회고하는 형식의 소설이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단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쪽 문을 택했듯이 새로 오시는 선교사들은 또 다른 쪽의 문을 택했다는 것이 다르지요. (…)”(<천국의 열쇠>)

 

 

치셤 신부는 자신의 종교만을 최고의 위치에 놓지 않고 어느 종교에도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있다고 말한다.

 

 

“(…) 어떤 것인가 하면 확고한 믿음만 가지면 결코 지옥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그렇지요. 불교도든 회교도든, 또한 도교를 믿든……선교사를 죽인 후 그 고기를 먹어 버렸다는 식인종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부끄럽지 않게끔 자신의 삶에 성실한 자세를 갖는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지요. 최후의 심판 때에 결코 신의 존재를 알 수 없노라 대답하는 사람들에게도 진노의 채찍을 내리지는 않으실 겁니다. 아마 ‘여기를 보아라, 네가 그토록 부정하려 했던 나와 천국이 있지 않느냐. 자, 들어오너라’하고 말씀하시겠지요.”((<천국의 열쇠>)

 

 

이 글을 읽고 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이런 내용이 아직까지도 내 머릿속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 책을 참 오래 전에 읽었는데도(2000년에 읽었다) 지금도 이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건 그만큼 내 마음속에 깊게 각인된 소설이어서다. 주인공 치셤 신부를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가질 수 있었던, 유익한 독서 경험이었다.

 

 

 

 

 

2. 기도의 효과

 

일 년에 몇 번쯤 절에 간다. 지난 5월의 석가탄신일에도 어머니와 함께 절에 갔다 왔다. 절에서 기도할 땐 나의 가족은 물론 친정 식구들과 시집 식구들이 건강하고 무탈하길 비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기도는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기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만약 그들 중 누구라도 큰 병에 걸린다면 내가 편히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문병을 가야 하고, 약값에 보태 쓰라며 얼마의 돈을 건네야 하고, 안부를 묻는 전화를 자주 해야 하고, 환자로 인한 걱정을 달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내가 아프지 말고 무탈하게 살아야 한다. 한마디로 ‘서로의 삶에 폐를 끼치기 없기’가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이기심으로 기도를 한다고 해도 기도는 아름다운 것이다. 기도란 인간의 가장 겸손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가 아니라 ‘운명아 도와 줘, 나 여기 있어’와 같이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가장 낮은 마음으로 엎드려 비는 것이니까. 나의 경우에 기도의 제일의 효과는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기도한 내용에 대해 최선을 다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절에 갔다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3. 종교와의 거리

 

종교에 너무 깊게 빠진 광신도들이 인생을 망치게 된 신문 기사를 접할 때가 있다. 종교에 대한 믿음도 지나치면 독이 되나 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할지라도 나쁜 쪽으로 왜곡하여 읽는 독자에겐 그 책이 독이 될 수 있듯이,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나는 종교인들 중에서 타 종교를 존중할 줄 아는 종교인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은 광신도가 되지 않는다.

 

 

종교에 대한 믿음은, 공자가 말한 것과 같이 “(정도가)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과유불급:過猶不及)”고 생각한다. 좋은 종교라고 할지라도 종교에 지나치게 빠진 사람에겐 이로운 종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종교가 이로운 종교인가, 해로운 종교인가 하는 것은 그 종교를 믿는 신도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말이 된다. 거리, 여기서 중요한 건 ‘거리’이다. 이 세상의 모든 관계는 적당한 거리를 필요로 하지 않던가. 부모 자식 간에도 그렇고, 부부 간에도 그렇고, 연인 간에도 그렇듯이, 종교와 신도와의 관계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것이다.

 

 

생각도 습관처럼 굳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고정관념의 노예가 되고 편견의 노예가 된다. 어떤 것에 대해 머릿속에 박혀 버린 생각을 지우고 좀처럼 새로운 생각을 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이런 우리에게 때에 따라선 자신의 생각(종교에 대한 생각)을 수정할 줄 아는 열린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지성인다운 태도가 아니겠는가. 지성인에 대해 러셀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실 단지 자신의 의견을 취한다고 해서 지식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식인이란 이러저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타당한 논거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교조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다.”(버트런드 러셀 저, <런던통신 1931 - 1935>)

 

 

‘교조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종교도 한 가지만 보지 말고 다른 종교를 비교하며 종합적으로 보는 균형 감각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4. 좋은 인생이란

 

며칠 전 <탈무드>라는 책에서 ‘인생의 비결’이란 글을 읽었다.

 

 

한 사나이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목청 높여 소리쳤다.

“여러분, 인생의 비결을 팝니다! 필요하신 분 없으십니까?”

사나이의 외침에 사람들이 인생의 비결을 사기 위해 너나없이 모여들어 순식간에 북새통을 이루었다. 사람들 틈에는 랍비도 몇 사람 끼여 있었다. 시장에 모인 사람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사나이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디 인생의 비결을 사 가십시오. 인생을 보람 있고 참 되게 사는 비결은 바로 여러분의 혀를 주의하는 겁니다.”(<탈무드>)

 

 

좋은 인생의 비결은 혀를 주의하는 것. 이 말은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한다는 뜻이다. 누군가에게 표독스레 내뱉은 한마디의 말이 그에겐 평생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다. 또 무심코 흘린 말도 그럴 수 있다.

 

 

어떻게 사는 게 좋은 인생인가. 종교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말로 인해 누군가를 불행에 빠뜨리지 않는 게 좋은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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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9-25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잘 살아가면 '좋은 삶'이에요. 혀이든 무엇이든 모두 스스로 잘 살아가느냐를 말하는 대목이에요.

종교와 과학은 갈래가 다르다 하지만, 밑바탕은 둘 모두 같아요. 믿음이 종교가 되고, 삶이 과학이 되면, 종교와 과학은 모두 권력과 독재가 되지요. 종교가 언제 어디에서 왜 생겼고, 과학이 언제부터 진보와 발전을 대변하는가 하는 뿌리를 헤아리면, 둘은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속내가 똑같은 줄 깨달을 수 있어요.

아이들은 모두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까닭이란, 어른 누구나 모두 하느님이란 뜻이에요. 다만, 어른이 되며 스스로 사회 제도권에 스스로 톱니바퀴 되어 들어가니, 어른은 스스로 하느님인 줄 잊거나 내버린 셈이에요.

모든 사람이 서로 같은 하느님인 줄 아는 일이 '믿음'이고, 이 믿음을 비틀어서 '지옥과 구원과 기도'를 만든 제도권 권력이 종교예요. 종교인이 스스로를 깨닫는다면, 이이는 이녁 종교조차 얼마나 허울이고 껍데기인 줄 알아차릴 수 있어요. 곧, 천주교이든 개신교이든 불교이든 겉옷을 벗고 알맹이를 찾아서 홀가분해지겠지요.

...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니, 잘 헤아리며 느껴 보셔요 ...

페크pek0501 2012-09-25 13:14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잘 헤아리며 느껴 볼게요. ^^
이렇게 길게 쓰는 것,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제가 댓글을 써 보니까 , 어려운 걸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댓글을 소중히 받아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프레이야 2012-09-25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좋은인생관에 끄덕끄덕하며 혀단속, 생각단속,마음단속 잘하며 살아겠구나 새삼 느껴요. 러셀의 인용구 마지막 문장도 새깁니다. 믿되, 내믿음을 의심하라, 이 정도 뜻이 될까요. 기도의 본성에 대한 말씀에도 공감해요. 낮게 엎드린 절박한 마음이 기도겠지요. 진정한 기도를 잊고 산 것 같아요. 오늘밤엔 잠시라도 나만의 기도를 하고 그런 마음으로 잠을 청해야겠어요.^^

페크pek0501 2012-09-26 15:00   좋아요 0 | URL
예 맞아요. 백 퍼센트의 확신은 금물이라는 것이죠.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자만하지 않게 살 수 있을 듯해요.

기도, 저도 잊고 살아요. 다급할 때만 기도를 하는 경향이 있어요.ㅋ 절에 자주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질 않네요.
절에 들어서면 우선 절 입구에서부터 기분이 좋아져요. 나무들이 많아 맑은 공기가 느껴지고 자비의 공기가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제가 다니는 절이 멀어서 좀 가까운 곳을 알아 두려 하고 있어요.
반가웠어요, 프레이야 님. 추석 잘 보내세요.

oren 2012-09-26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아주 가벼운 필치로 사뿐사뿐 써내려간 글이어서 읽기가 참 좋네요. '서양종교'에 관해서라면 이미 그 핵심적 존립기반인 '신의 존재증명'에 관한 수많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그 오랜 믿음 때문에 앞으로도 오랫동안 인류의 생각을 '계속 지배'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페크님께서 인용해 주신 러셀의 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타당한 논거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교조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페크pek0501 2012-09-26 15:01   좋아요 0 | URL

“'종교'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아주 가벼운 필치로 사뿐사뿐 써내려간 글이어서 ...”
- 이런 호평을 해 주시다니요. 고맙습니다. 그냥 아는 데까지 쓴 것이라, 더 많이 알았다면 더 좋은 글이 될 수 있는 건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글은 딱 자신이 아는 만큼만 쓰는 것 같아서 공부가 많이 필요하단 생각이 듭니다.

oren 2012-09-26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읽었던 쇼펜하우어의 몇몇 책에서도 '종교'에 관한 '인상적인' 구절들을 참 많이 발견했는데 몇 가지만 덧붙여 보고 싶네요.

* * *

"불교 체계는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은, 모든 시간 이전에 있었고 모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창조한 유일한 신적 존재를 알지 못한다. 이런 이념은 불교에 전혀 생소하며 불교 서적에는 이에 대한 최소한의 흔적도 없다."(238쪽)

"중국에서는 마호메트 교도도 기독교도도 신성의 이론적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중국어 낱말도 찾지 못했다. ······ 물질로부터 독립적이고 물질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으로서 신, 영혼, 정신이라는 단어들은 중국어에는 전혀 없다. ······ 이런 사유 과정은 언어 자체와 매우 밀접하게 얽혀 있어서 창세기의 첫 구절을 광범위하게 고쳐 쓰지 않는다면 실제로 중국어가 되도록 중국어로 번역할 수 없다." 바로 그래서 스톤턴 경은 1848년에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데서 신이라는 단어를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출판했다.(240쪽)

-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中에서

* * * * *

그것이 그래도 더 이전에 알려졌더라면!

말하자면 칸트가 왔고, 이미 60년보다 더 이전에 『순수이성비판』이 저술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기독교의 세기 동안 신의 현존을 위해 세워졌고, 세 개로만 가능한 증명방식(존재론적, 우주론적, 자연신학적 신 존재 증명)으로 소급되는 모든 증거들은 절대로 요구되는 것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그 결과 누구도 칸트의 주장에 대해 결정적인 반박을 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 결과로 신의 현존에 대한 증거들이 완전히 신용을 잃었고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 일은 자명한 것이어서, 그것을 증명하려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이런, 이런, 이런! 그것이 그래도 더 이전에 알려졌더라면! 그랬다면 사람들은 수 세기 동안 그 증명을 위해 애쓰지 않았을 것이고, 칸트는 그것을 이성비판의 모든 무게로 부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157쪽)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中에서

페크pek0501 2012-09-26 15:04   좋아요 0 | URL
쇼펜하우어의 '종교'에 관한 구절들을 옮겨 주시니 매우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좀 어렵군요. 으음~~ 쇼펜하우어의 저작은 세 권 읽었는데, 이런 구절은 보지 못한 것 같군요.
<쇼펜하우어 인생론>이란 책이 가장 맘에 들어 곁에 두고 애독하고 있답니다. 제게 글감을 많이 주는 책이랍니다.

추석 잘 보내시고 자주 글 올리시길 바라겠습니다. (아, 최근에 올리신 멋진 사진들 잘 보았답니다. 추천만 누르고 왔답니다. 9번째 추천은 저예요.ㅋㅋ)

노이에자이트 2012-09-26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속에서도 치셤의 신앙관 선교관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등장하잖아요.기득권을 가진 성직자뿐 아니라 인습화된 신앙에 물든 일반신자들도 그런 반응을 보일 겁니다.

페크pek0501 2012-09-27 09:47   좋아요 0 | URL
아, 님도 읽으셨군요. 저는 이 책을 (제 독서목록을 보니까) 2000년 7월에 읽었더라고요. 줄거리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고 치셤 신부의 훌륭한 말만 기억이 나요. 인품이 훌륭하다고 할까요. 그런 곳에 밑줄이 많이 그어져 있어요. 하서출판의 책으로 읽었는데 이곳 알라딘에선 책 이미지를 찾을 수가 없더군요. 오래되어서인가 봐요. 이 책에 반해 크로닌의 다른 책을 읽은 게 <성채>인데 이 책도 좋았어요. 크로닌의 전집을 사고 싶을 정도로 팬입니다.

제게 드라마 작법이란 책이 있는데, 이 책 제1장의 제목이 '드라마는 갈등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드라마뿐만 아니라 소설도 마찬가지겠죠.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작가란 갈등을 제시하고 그 갈등을 풀어 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겠죠.

반가웠어요. ㅋ

2012-10-05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7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쓴 글 - 제목은 ‘억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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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함

 

 

나는 잠이 없는 편이라 졸음을 귀하게 여긴다. 오늘 아침 식구들이 다 나간 조용한 시간에 졸음이 느껴졌다. 이 기회를 잡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더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침대가 차갑게 느껴져 이불을 덮어도 추웠고 소변이 마려웠다. 그래도 움직이기 귀찮아서, 또 잠이 달아날까 봐 화장실에 갔다 와야 하는데, (침대에 깔려 있는) 전기장판의 스위치를 켜야 하는데, 라고 생각만 하고는 옆으로 누워 웅크린 채로 5분쯤인가 잠들었다. 그리고 잠이 깨졌다. 깨어나서 길게 편히 자기 위해 화장실에 갔다 오고 전기장판의 스위치를 켜고 다시 누웠다. 이제 잠만 자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잠이 오질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잠이 들지 않았다. 결국 몇 번 뒤척이다가 잠들기를 포기하며 일어나고 말았다. 잠깐 잠들었다가 깼을 때 불편한 대로 그냥 다시 잠을 청할 걸 그랬다 싶었다. 괜히 몸을 움직여 화장실에 갔다 오고 전기장판의 스위치를 켰나 보다 싶었다. 이럴 때, 참 억울한 느낌이 든다. 푹 자고 싶었는데,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깊게 빠져들 것 같았던 ‘달콤한 잠’을 놓친 기분….

 

 

그때의 억울함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내 돈을 떼어먹고 도망친 빚쟁이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가 놓쳤을 때의 기분.

오랜만에 깨끗이 세차했는데 그날 비가 세차게 쫙쫙 쏟아지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의 기분.

내가 산 로또 복권이 거액으로 당첨된 복권의 번호와 한 자리 수만 다른 것을 알았을 때의 기분.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내릴 곳을 1초 차이로 놓치고 건너편으로 가서 되돌아가는 지하철을 타야 할 때의 기분.

어느 깊은 산속의 여행지에서 한 잔의 커피밖에 없는데, 그것을 한 모금 마셔보지도 못하고 실수로 땅에 다 쏟았을 때의 기분.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끝)

 

 

 

 

 

.......................................................

<추신>

 

이 글의 제목을 잘못 지은 것 같다. 제목을 '잃어버린 잠' 또는 '오늘 아침에 놓친 것'이라고 썼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중요한 건 아니라서 고치지 않기로 했다. 아니 이건 나에게만 중요한 문제이리라. 남에겐 하찮게 잃히는 글이라도 글쓴이에겐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것이므로. 글이란 그 글을 쓴 사람의 자식과 같은 존재이므로. (이 말을, 글 쓰는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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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09-20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다보면 누구한테 하소연도 할 수 없는 그런 억울함이 엄습할 때가 참 많은 거 같아요.
제 경우엔 지리산 정상 혹은 설악산 정상 등지를 힘겹게 올라간 뒤에, 동반자들과 함께 '술 한잔' 나눌려고 폼 잡다가, 술병이 바람에 속절없이 자빠질 때가 제일 억울하더라구요. 땅에 스며든 술을 건져올릴 방법도 없고, 어디 술을 사러 나설 수도 없구요. 오늘도 지인들과 2차로 '술 한잔'을 더하는 자리에서, 딸랑 남은 와인 한병이 쓰러질까 조마조마 했다는... 운동도 하고 1,2차에 걸친 술자리도 가졌던 만큼 쏟아지는 잠을 청하러 이만 가봐야겠어요. 졸음을 참았던 '오늘밤'이 내일 아침에 더이상 억울하지 않게요.

페크pek0501 2012-09-20 13:31   좋아요 0 | URL
"술병이 바람에 속절없이 자빠질 때" - 제가 듣기만 해도 억울한 일인 걸요.
누군가가 이렇게 소리치지 않으셨나요. 아, 피 같은 술이!!!...

ㄱ님을 따라서 짧게 써 본 것인데, 저로선 문장 연습 또는 글감 얻기 연습인 페이퍼예요. 그러니 글의 수준을 가늠하진 마시어요. 또 방문해 주시니 (1,2차 술 자리도 갖고 바쁘실 텐데...) 황송합니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