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를 ‘완벽’하게 쓰는 사람은 분명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다. 여기서 ‘완벽’이란 자신이 볼 때 더 이상 고칠 게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이런 면에서 난 많이 부족하다. 한 번도 초고를 완벽하게 써 본 적이 없으니까. 항상 글을 쓰고 나면 두세 번 이상 읽어 보는데, 읽어볼 때마다 고칠 게 눈에 띈다. 고치면서 글이 완성된다.

 

 

며칠 전, ‘단상(30) 마음과 관련해 생각한 것들’이란 제목의 글을 서재에 올렸는데 이 글도 고친 게 많았다. 한두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가 엉터리였다.

 

 

그럼 무엇을 어떻게 틀리게 써서 어떻게 고쳤는지를 공개한다. 첫째는 앞으로 틀리게 쓰지 말자는 뜻으로 나를 위함이요, 둘째는 글을 쓰는 우리 서재님들이 자신의 경우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 보라는 뜻으로 서재님들을 위함이다.

 

 

 

1. 자신 없는 표현은 삼가기

 

 

 

 

내 표현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겠다.1) 어쩌면 내 안의 감정과 이성의 충돌로 볼 수도 있고, 두 개의 마음의 분리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난 이런 경우 몸과 마음의 분리로 생각하곤 한다.

 

 

 

 

 

 

(고친 글)

이것에 대해 내 안의 감정과 이성의 충돌로 볼 수도 있고, 두 개의 마음의 분리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난 이런 경우 몸과 마음의 분리로 생각하곤 한다.

 

 

 

 

내 표현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겠다.1) - 이것을 뺐다. 이런 자신 없는 표현은 빼는 게 좋다. 독자는 자신감 없는 사람의 글을 읽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 것이다. 독자는 아마추어 의식을 가진 필자보다 프로 의식을 가진 필자를 좋아한다. 그래야 얻을 게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자신 없는 부분이 있다면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게 좋다.

 

 

 

2. 낱말을 통일하기

 

 

 

 

어쩌면 내 안의 감정과 이성의 충돌2)로 볼 수도 있고, 두 개의 마음의 분리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난 이런 경우 몸과 마음의 분리로 생각하곤 한다.

 

 

 

 

 

 

(고친 글)

어쩌면 내 안의 감정과 이성의 분리로 볼 수도 있고, 두 개의 마음의 분리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난 이런 경우 몸과 마음의 분리로 생각하곤 한다.

 

 

 

 

 

충돌2) - 를 ‘분리’로 고쳐서 낱말을 통일시켰다. 한 문단 안에서 ‘충돌’과 ‘분리’의 낱말이 섞여 있는 건 좋지 않아서다.

 

 

또 다음의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자신을 겨냥해서 모욕감을 주는 악성 댓글을 받았다고 하자. 이때 우리는 두 가지의 생각을 할 수 있다.3) 하나는 ‘당신의 악성 댓글 따윈 무섭지 않다. 나는 끄떡없다.’라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그의 악성 댓글의 위력이 없음을 증명하려는 태도. 즉 당신은 헛수고를 했다는 걸 보여 주는 태도다. 또 하나는 ‘당신의 악성 댓글로 인해 나는 정신적 타격이 심해 병원에 다닐 정도다. 그러니 당신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해야 마땅하다.’라는 태도.

 

 

 

 

 

 

(고친 글)

가령 자신을 겨냥해서 모욕감을 주는 악성 댓글을 받았다고 하자. 이때 우리는 두 가지의 생각으로 태도를 취할 수 있다. 하나는 ‘당신의 악성 댓글 따윈 무섭지 않다. 나는 끄떡없다.’라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그의 악성 댓글의 위력이 없음을 증명하려는 태도. 즉 당신은 헛수고를 했다는 걸 보여 주는 태도다. 또 하나는 ‘당신의 악성 댓글로 인해 나는 정신적 타격이 심해 병원에 다닐 정도다. 그러니 당신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해야 마땅하다.’라는 태도.

 

 

 

 

두 가지의 생각을 할 수 있다3) - 를 ‘두 가지의 생각으로 태도를 취할 수 있다.’로 고쳤다. 그래야 그 다음에 나오는 낱말인 ‘태도’와 맞아떨어지게 된다.

 

 

또 다음의 글을 보자.

 

 

 

 

상대방이 총을 빵, 하고 쏘면 총알을 맞지 않더라도 죽는 시늉을 해 주고 싶다. 상대방에게 우선 만족감을 주고 싶다. 그런데 그 다음에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통쾌함4)만을 누렸다면 어쩔 것인가.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겠다. 한 사람에게 만족감을 주었으니 내가 덕을 쌓은 거야, 라고. 좋은 일을 하면 복 받는다, 라고.

 

 

 

 

 

 

(고친 글)

상대방이 총을 빵, 하고 쏘면 총알을 맞지 않더라도 죽는 시늉을 해 주고 싶다. 상대방에게 우선 통쾌함을 주고 싶다. 그런데 그 다음에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통쾌한 만족감만을 누렸다면 어쩔 것인가.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겠다. 한 사람에게 만족감을 주었으니 내가 덕을 쌓은 거야, 라고. 좋은 일을 하면 복 받는다, 라고.

 

 

 

 

통쾌함4) - 를 보면 만족감과 통쾌함이 같은 의미로 쓰이면서 통일되지 않았다. 그래서 두 군데를 고쳐서 통쾌함, 통쾌한 만족감, 만족감 등으로 썼다.

 

 

 

3. 같은 방식으로 나열하기

 

 

 

 

한 사람에게 만족감을 주었으니 내가 덕을 쌓은 거야, 라고. 좋은 일을 하면 복 받는다, 라고.5)

 

 

 

 

 

 

(고친 글)

한 사람에게 만족감을 주었으니 덕을 쌓은 거야, 라고. 좋은 일을 했으니 복을 받을 거야, 라고.

 

 

 

 

5)는 같은 방식으로 나열해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 거야’로 통일해 고쳤다. 또 ‘내가’를 뺐다.

 

 

 

4. 독자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게 쓰기

 

간혹 글의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독자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필자의 입장에선 이런 것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 보면 몸과 마음은 두 개의 존재로 분리된다. 몸 따로, 마음 따로 반응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고친 글)

위대한 철학자들은 몸과 마음이 하나이기에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6) 하지만 내 경험으로 보면 몸과 마음은 두 개의 존재로 분리된다. 몸 따로, 마음 따로 반응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두 개의 존재로 분리된다고 쓰면, 혹시 다른 철학자들을 들먹이며 그렇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독자가 생길지 모른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6)의 문장을 넣었다.

 

 

다음의 글을 보자.

 

 

 

 

백화점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매장에서 맘에 드는 멋진 핸드백을 발견한다. 가격이 비싸다. 몸은 그것을 원하는데, 마음은 그것이 비싸니까 사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사지 않기로 했는데, 내 몸은 이미 그 핸드백을 어깨에 메어 보더니 어느새 계산대에서 그 핸드백의 값을 치르고 있다.

 

난 이런 경우 몸과 마음의 분리로 생각하곤 한다.

 

 

 

 

 

 

(고친 글)

백화점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매장에서 맘에 드는 멋진 핸드백을 발견한다. 가격이 비싸다. 몸은 그것을 원하는데, 마음은 그것이 비싸니까 사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사지 않기로 했는데, 내 몸은 이미 그 핸드백을 어깨에 메어 보더니 어느새 계산대에서 그 핸드백의 값을 치르고 있다.

 

이것에 대해 내 안의 감정과 이성의 분리로 볼 수도 있고, 두 개의 마음의 분리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난 이런 경우 몸과 마음의 분리로 생각하곤 한다.7)

 

 

 

 

‘몸과 마음의 분리’라고만 단정적으로 쓰면,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독자가 생길지 모른다. 필자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과 이성의 분리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고, 두 개의 마음의 분리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7)의 문장을 넣었다.

 

 

이것은 내가 쓴 다른 글이다.

 

 

 

 

이처럼 마음이 늘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면, 자신의 마음이든 타인의 마음이든 마음을 움직이는 게 가능하겠다. 우울·불쾌·슬픔·분노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 상태를 좋은 감정 상태로 돌리는 것도 가능하겠다. 의도적인 노력만 있다면 말이다.

 

 

 

 

 

 

(고친 글)

이처럼 마음이 늘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면, 자신의 마음이든 타인의 마음이든 마음을 움직이는 게 가능하겠다. 우울·불쾌·슬픔·분노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 상태를 좋은 감정 상태로 돌리는 것도 가능하겠다. 의도적인 노력만 있다면 말이다. 물론 예외가 있겠지만.8)

 

 

 

 

의도적인 노력만 있다면 자신의 마음이든 타인의 마음이든 마음을 움직이는 게 가능하겠다, 라고 썼는데,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독자가 있을 수 있다. 의도적으로 노력했는데도 상대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있을 테니까. 그래서 8)의 문장을 넣었다. 그러면 독자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독자는 말로써 직접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으나, 마음속으로 이 글은 틀렸어, 라고 생각한다면 그 글은 완벽한 글이 될 수 없으니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게 좋다.

 

 

5. 내가 최고로 치는 글은 이런 것

 

 

- 간결체의 문장이 좋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체가 최고의 문체라고 생각한다.

 

- 글은 경제성이 있어야 한다. 나의 경우, 글이 길어지면 그중에는 불필요한 문단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 없애는 작업을 한다. 문장도 마찬가지여서 많이 쳐 낸다.

 

- 좋은 글일수록 상당히 수학적이라고 생각한다. 치밀한 계산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뜻에서 그렇다.

 

- 재미와 유익함(또는 감동)이란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글이 좋다. 유익함이 없다면 글을 읽을 필요가 없고, 재미가 없다면 읽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 가장 좋은 글은 쉽게 읽히고 그 글이 담고 있는 뜻은 깊은 글이다. 반대로 가장 좋지 않은 글은 어렵게 읽히고 그 글이 담고 있는 뜻은 깊지 않은 글이다. 뜻이 깊은 글을 쓰려면 사유가 깊고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같은 글이 쉽게 읽히고 뜻이 깊은 글로 본다.)

 

- 현학적인 글을 경계한다. 초보자가 현학적인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 글을 읽자마자 빨려 들어가 딴 생각이 나지 않는 글이 좋은 글이다. 반대로 글을 읽다가 자꾸 딴 생각이 나서 여러 번 집중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글은 좋지 않은 글이다. 흡인력이 중요하다.

 

(이렇게 썼지만, 이런 나도 좋은 글을 못 쓰고 있다.ㅋ)

 

 

 

....................................................................................................

 

* 이 글을 쓰고 나서

 

 

글을 잘 쓰려면 글을 많이 읽고 많이 쓰는 노력이 필요하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무려 400번이나 고쳐서 썼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만큼 ‘노력’이 중요하다는 얘기겠다.

 

 

한때 문학이론서만 읽은 적이 있다. 또 한때 문장작법에 관한 책만 읽은 적도 있다. 아마 이런 부류의 책을 수십 권쯤 읽었을 것이다. 글을 잘 쓰고 싶어서 배우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런 책들이 그 자체로 재미도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이런 책들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여 추천한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오는 외래어가 부끄러운 사람”들한테 반갑고 힘이 될 만한 책. 한 달에 백 권도 넘는 책을 읽을 만큼 대단한 독서가인 최종규는 책을 읽으면서 ‘살려 쓰면 좋을 아름다운 우리 말’을 발견하면 따로 갈무리해 두고, 마찬가지로 잘못된 글, 나쁜 글, 불필요한 외래어나 외국어를 만나도 따로 갈무리해 두는 일을 오랫동안 이어오고 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뿌리 깊은 글쓰기: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를 선보인다.(알라딘, 책소개)

 

최종규님의 책을 통해 글을 올바르게 쓸 줄 아는 능력부터 키우는 게 좋다.

 

      



 

 

 

 

 

 

 

 

 

 

  <문장강화>. 이 책을 읽지 않은 작가는 드물 것 같다. 좋은 문장의 예문이 많이 들어 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을 모르고선 글을 잘 쓸 수 없다. 문학이 무엇인지 쉽게 설명해 준다.

 

 

 <유혹하는 글쓰기>. 글쟁이 친구가 꼭 보라고 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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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2-08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라면 어떻게 쓸까 하고 생각하며 이렇게 한번 적어 봅니다~


.. 이 일은 내 생각과 마음이 서로 다르다 볼 수도 있고, 두 생각과 마음이 갈라섰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난 이러한 때 몸과 마음이 나뉘었다고 생각하곤 한다 ..


감정과 이성은, 생각과 마음으로 나타낼 수 있지 않으랴 싶어요. 사지 않겠다는 생각과 마음은 벌써 가방 쪽으로 가서 손에 쥐고는 값을 치르고 만다는 모습.

'분리'틑 '나뉘다'와 '서로 다르다'와 '갈라서다'로 적어 보았어요~

페크pek0501 2012-02-09 11:31   좋아요 0 | URL
단상(30)을 쓰기 전에 생각과 마음을 각각 국어사전 찾아 보았는데, 두 낱말이 동의어로 쓰이는 예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두 가지를 함께 쓰면 헷갈리겠다 싶어 그냥 감정과 이성의 분리라고 쓰게 되었어요.ㅋ

분리, 라는 한자어보다 우리말이 더 좋은데, 되도록 한자어 쓰지 말라고 배우긴 했는데, 저는 압축의 맛 때문에 한자어를 쓰게 되는 것 같아요. 다음엔 '나뉘다'로 써 보겠습니다, 선생님...ㅋㅋ

인식하다, 인지하다, 이런 낱말도 즐겨 써요. 그것보다 더 좋은 말이 있는데도 말이죠. 배운 대로 하기도 힘들어요.ㅋ

어쨌든 <뿌리 깊은 글쓰기>가 많이 팔렸으면 좋겠습니다. ㅋ


숲노래 2012-02-09 20:47   좋아요 0 | URL
국어사전 뜻풀이를 믿지 마셔요.
제대로 풀이한 낱말은 아주 드물어요.

내 가슴을 믿으면서 낱말 느낌을 헤아리셔요.

생각과 마음은 비슷하지도 같지도 않아요.
'마음'은 내가 받아들이는 무엇이고,
'생각'은 내가 스스로 짓는 무엇이에요.
그러니까, 마음과 생각은 아주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이성'은 '생각'이 되고,
'감성'은 '마음'이 되지요.

마음으로는 무엇을 느끼고,
생각으로는 무엇이 어떠하구나 하고 스스로 갈무리하면서 지으니까요.

먼먼 옛날까지 아니더라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일본 한자말과 중국 한자말 없이 살아가며
'감성'과 '이성'을 어떻게 나타냈을까 하고
곰곰이 돌아보면 돼요.

인식하다 - 느끼다
인지하다 - 알아차리다

자리에 따라 달리 쓰기는 하지만, 밑바탕으로는 이렇게 헤아리며 쓰면,
스스로 좋은 말길을 찾을 수 있어요.

그리고, 잘 보면,
생각하다 - 헤아리다 - 여기다 - 살피다 - 돌아보다 -
톺아보다 - 가누다 - 가늠하다 - 살펴보다 - 짚다 - 되짚다 ...
'생각'을 일컫는 수많은 낱말은 자리에 따라 느낌이 달라요.

이 느낌을 홀로 곰곰이 따지면서 말씀씀이를 북돋아 보셔요~

페크pek0501 2012-02-10 10:27   좋아요 0 | URL
아, 된장님은 매우 높은 경지에 계신 것 같네요. 제가 오른 적 없는, 또 앞으로 오를 수도 없는 경지예요. ㅋ

님의 설명을 기억해 놓겠습니다.ㅋ

굿바이 2012-02-08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맛~!(이것은 부끄러워서 소심하게 지르는 비명입니다^^)

참으로 분하지만 저는 저런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아서
그냥 혼자 아무렇게나 끄적이고 잊어버립니다.
복기하면 쪽팔려서 성형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ㅋㅋㅋ

아참,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는 많은 분들이 좋다고 하더라구요. 실은 저도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 이참에 읽을까 싶습니다.

페크pek0501 2012-02-09 11:35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잘 쓰시면서 왜 그러세요? 부끄러운 비명이라니요...ㅋ

읽을 책이 한두 권이라야 말이죠. 인생은 짧고 읽은 책은 많다, 고 생각되어요. 저도 감기로 아파서 누워 지낼 때도 책은 꼭 끼고 있어요. 책 보다가 낮잠 자려고요. 책이 수면제의 역할도 해요. 그래서 님처럼 아파도 할 건 다 한다는 것이죠. 그것 너무 웃겼어요. 소리내어 웃었다니까요.

노이에자이트 2012-02-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읽어보고 무슨 뜻이지도 모를 글은 정말 짜증납니다.사람이 천재일 수는 없으니 쓰고 나서 더 다듬는 과정은 필수지요.Pek0501님의 글은 문장이 명료해서 이해하기 쉽습니다.머리에 든 것도 없는 인간들이 현학적인 글로 횡설수설하는 법이죠.

페크pek0501 2012-02-09 11:37   좋아요 0 | URL

예. 사람은 천재일 수 없고, 게다가 헤밍웨이 같은 대작가도 400번이나 고친다는데, 저 같은 범인은 더 말할 것도 없겠죠.
명료라는 호평은 감사하네요. 감사...

그런데 아직 사유가 깊은 글을 저도 써 보질 못했으니 만족의 경지란 얼마나 높은 곳인지를 헤아리게 되네요.

oren 2012-02-08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법'이나 '문장'을 제대로 구사하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몸과 마음의 분리'와 관련된 '괴상한 문장' 이야기를 '어제'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었는데, 그 글을 읽고나니 올바른 문장을 쓰는 게 더욱 어렵게만 느껴지더군요. ㅎㅎ
* * *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은 ‘나는 내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안다’는 문장이 문법적으로는 옳지만 내용적으로는 틀리다고 생각한다. 누가 바늘로 나를 찌르면 나는 ‘아야!’하고 직접적으로 반응하지 ‘나는 내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안다’는 등의 ‘괴상한’ 문장을 말하지 않는다. 반면에 타인의 비명이나 찡그린 얼굴표정을 보고 나는 그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비트겐슈타인은 위의 ‘토끼!’의 예에서 외침이 우리 몸에 대해 갖는 관계는 비명이 고통에 대해 갖는 관계와 흡사하다고 말한 것이다. 이때 외침과 몸, 비명과 고통은 실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외침의 경우 어떤 물체를 지각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패턴매칭), ‘토끼.’라고 발화하는 3단계의 인식행위가 아니라, 지각으로부터 외침까지 전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행위를 의미한다.

페크pek0501 2012-02-09 11:39   좋아요 0 | URL
오렌님, 저도 그런 글 본 전이 있어요. 같은 글은 아니고요, 우리가 평상시 하는 말도 틀린 게 많다는 걸 모아 놓은 글이었는데, 저도 깜짝 놀랐어요. 제가 쓴 문장에도 틀린 게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공부는 끝이 없고, 완벽함의 경지는 높고... 저는 그냥 하는 데까지 할래요. 욕심 부리지 않고요.ㅋㅋ 욕심 부리면 건강에 타격이 와요. 과로하면 안 되니까요.
언제나 좋은 말씀, 감사 드립니다. 요즘 오렌님께 배우는 게 많아요. 여러 가지로요. ㅋ

이진 2012-02-09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페크님.
저 지금 감동받아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려고 합니다.
어쩜 이리 좋은 글을 써주시다니.
오늘 이 글 읽으면서 반성많이 했씁니다. 저는 수정이라곤 귀찮다는 이유로 거의 안하거든요. 또 제대로된 글을 써본적도 없고 페크님께서 최고로 치는 글에 거의 속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많이 느꼈어요. 내가 쓸데없이 현학적은 아니었던가(솔직히 지식도 없지만) 일부러 글을 길게 보이려고 있는 말, 없는 말 다 쓰지는 않았나.
마침 또 글쓰기에 도움이 될만한 책도 찾고 있었는데 마지막의 책 소개는 정말 제게 뼈가 되고 살이 될 것 같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당.
안녕히 주무셔요 :)

페크pek0501 2012-02-09 11:41   좋아요 0 | URL
감동 받아 눈물이 주르륵이라... 이것 뻥이죠? 그러나 고마운 뻥이죠, 제겐...
그대에게 문학적 감수성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어요.ㅋ
잘 하고 계십니다. 나날이 발전하시는 소이진님이세요.

쉽싸리 2012-02-09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자기 공부네요.
아무래도 자주 고쳐야 좋은 글이 될것 같아요.
잘 고쳐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겠지만, 아무래도 고칠려고 하면 어떤 틀을 기반으로 해야하니까 공부도 많이 되고 결국 올바른 쪽으로 가깝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페크pek0501 2012-02-09 11:45   좋아요 0 | URL
쉽싸리님,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ㅋ

글을 고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문장작법 같은 책을 보면 공부가 되기도 하지만, 문장을 이렇게 써 보고, 또 저렇게 써 보고 해서 어떤 것이 나은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게 아닌가 싶어요.

어떤 게 더 세련된 표현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면 답이 나와요. 그 공부가 끝이 없어서 문제지만요. 그래도 완성을 향해 가야 하는 미완성의 우리는 노력해야지요. 그 노력을 즐기며 살아요, 우리.
또 오세요.

stella.K 2012-02-09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대단하십니다!!!
솔직히 저의 글에 상처를 가장 많이 주는 데가 알라딘 글쓰기 공간 같아요.
저는 글쓰고 다시 한번 읽으면서 문장이나 오탈자 한번씩 훑고 그냥 올려버릴 때가
많거든요. 올리고 다시 안 보는데 부득이하게 다시 볼 때가 있어요.
그럼 어찌나 화끈거리는지.
이 댓글 쓰면서 언니한테 흠잡히지 않을까 오글오글 합니다.ㅋㅋ

책이 인류에 등장하면서 초고가 완고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거라고 봅니다.
안중근 일대기를 다룬 <영웅>도 2년 동안 20번을 고쳤다고 해서 식겁했는데요 뭐.
근데 헤밍웨이는 무려 400번!
정말 도 닦는 마음이 아니면 글을 올리지 않는 것이 날 것 같습니다.
일필휘지란 말은 아예 없었던 말 아닐까요?

문장강화는 모셔만 두고 있고, 스티븐 킹은 정말 재밌어요. 아메리칸 스딸로 정말 잘 쓴 것 같아요.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아직 팔리고 있군요. 품절이나 절판으로 나올만도 한데.^^


페크pek0501 2012-02-10 10:30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흠 안 잡아요. 걱정마세요. ㅋㅋ
저는 남의 글을 읽을 때엔 좋은 부분을 찾으려고 애써요. 그래서 그걸 댓글에다 쓰는 걸 좋아하죠. 이런 문장이 좋았습니다 라고요. 누구에게서든지 배울 점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남의 글을 꼼꼼히 분석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읽을 글이 한두 개가 아닌데다가 또 가장 관심이 많은 건 자신이지 남이 아니니까요.

이런 저도 흠 많습니다. 예전에 썼던 글을 보면 확 지우고 싶다니까요.ㅋㅋ 요즘 쓴 글도 아마 시간이 흐르면 지우고 싶을지 몰라요. 옛날 흑백사진 보면 촌스럽듯이 말이에요.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요즘도 나오는 건 저도 신기해요. 사실 다른 책들도 추천하고 싶었는데, 제가 읽은 대부분의 책들이 품절이거나 절판이어서 소개 못 했어요. ㅋ

비로그인 2012-02-09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글이네요. 제가 자주 범하는 실수가 그대로 예시로 드러나있어요 ㅠ ㅠ

왜 소설에는 그런 문체가 많잖아요. 어쩌면... 이라든가, ...인지도 모른다. 그런 문체를 많이 접하다보니 허구한 글에다가 그 표현을 써먹는 것 같아요. 확신은 없는데 그럴싸하게 말하고 싶을 때 방어책으로요. 반성해야겠어요. 고쳐야되구요!

간결체가 가장 좋다는 건 저도 동감해요. 근데 막상 글 쓸때 잘 안 되요 ㅋㅋ 글쓰는 주제나 대상에 대해 '확실하게' 알지 못한 채로 글을 써서 그런거 아닐까요? 그러고 보면 쌩떽쥐베리 같은 작가들이 <어린왕자>를 썼을 때는, 정말로 순수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무언가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단해요...

그나저나 페크님은 글쓰기 관련 일을 하시나요?
이 글 읽으면서 국어선생님이 쓰신 글을 보는 느낌이 들었네요 ㅎㅎ

페크pek0501 2012-02-10 10:33   좋아요 0 | URL
아, 님의 질문을 듣고 보니 제가 글쓰기 관련 일을 한 것 맞네요.
학교교사는 아니었고 중고등학생들에게 글쓰기와 논술을 가르치며 돈 벌었어요. 결혼 전에는 잡지사 기자로 일했고, 결혼 후 자유기고가로, 일간지 리포터로 일했네요. 지역신문에 칼럼을 연재한 적도 있는데, 무식하면 용감해서 할 수 있었던 일인 것 같아요. 지금 보면 형편없어요. 아이가 아주 어릴 때 빼곤 늘 무언가를 하며 살았는데, 그게 다 글쓰기와 관련된 일이었음을 님의 질문 때문에 새삼 알았어요. 또 봐요. ㅋ
 

 

 

 

모든 앎은 ‘관찰’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알고 싶은 무엇이 있다면 그것에 대하여 관찰하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게 중요하다. 자신을 알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볼 일이다. 난 내 마음을 관찰 중에 있다.

 

 

마음과 관련해 내가 생각한 것들을 열거해 본다.

 

 

 

1. 몸과 마음이 분리될 때가 있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몸과 마음이 하나이기에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 보면 몸과 마음은 두 개의 존재로 분리된다. 몸 따로, 마음 따로 반응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나는 운동하고 돌아와 고단한 몸으로 침대에 눕고 나서 갈증을 느낀다. 몸은 물을 마시고 싶어 한다. 그런데 마음이 귀찮다고 한다. 너무 고단해 몸을 움직이기 싫다. 물을 마시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는 일이 귀찮은 것이다. 이럴 때 물을 마시고 싶은 몸과 물을 마시기 싫은 마음이 충돌한다. 그 결과 몸이 마음을 이겨서 물을 마시든지, 아니면 마음이 몸을 이겨서 물을 마시지 않게 된다.

 

 

이것과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내 몸은 물을 마시기 싫다고 한다. 물을 마시고 싶지 않을 때도 있으니까. 그런데 마음은 물을 마셔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루에 몇 잔의 물을 마셔야 건강에 좋은데, 오늘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물을 적게 먹으면 노화현상도 빨리 일어난다는 말이 생각나서 마음은 몸에게 빨리 물을 마시라고 재촉한다. 이럴 때 물을 마시기 싫은 몸과 물을 마셔야 한다는 마음이 충돌한다. 그 결과 몸이 마음을 이겨서 물을 마시지 않든지, 아니면 마음이 몸을 이겨서 물을 마시게 된다.

 

 

이런 경우도 있다. 나는 사우나를 하고 싶다. 그런데 날씨가 춥고 밖에 나가기도 싫어서 사우나를 포기하고 싶다. 그런데 몸은 사우나를 간절히 원한다. 땀을 빼는 사우나가 하고 싶은 것이다. 이럴 때 사우나를 원하는 몸과 사우나를 하기 싫은 마음이 충돌한다. 그 결과 몸이 마음을 이끌어서 사우나를 하러 갈 수도 있고, 반대로 마음이 몸을 이끌어서 가지 않을 수도 있다.

 

 

백화점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매장에서 맘에 드는 멋진 핸드백을 발견한다. 가격이 비싸다. 몸은 그것을 원하는데, 마음은 그것이 비싸니까 사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사지 않기로 했는데, 내 몸은 이미 그 핸드백을 어깨에 메어 보더니 어느새 계산대에서 그 핸드백의 값을 치르고 있다.

 

 

이것에 대해 내 안의 감정과 이성의 분리로 볼 수도 있고, 두 개의 마음의 분리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난 몸과 마음의 분리로 생각하곤 한다.

 

 

 

2. 물건을 살 때 정확히 판단했는지 모를 때가 있다

 

 

 

만약 물건을 산 당신에게 누군가가 “당신이 방금 카드로 긁은 그 물건, 정말 꼭 필요한 거 맞느냐”라고 묻는다면 당신의 대답은 어떻게 나올까. 이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책이 있다. 마틴 린드스트롬 저,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라는 책이다. 이 책은 사람들이 정말 필요해서 물건을 샀을까, 하고 묻는다. 물건을 살 때조차도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것.

 

 

이 책에 의하면, 기업은 소비자가 어디에 살고 있으며, 얼마를 벌고, 뭘 잘 먹는지를 다 알고 있다. 하긴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있으며, 자신의 소비를 기록하는 포인트 카드가 있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자신에 대한 정보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대로 자신의 지갑을 조종당하는 일이 가능하겠다. 또 이 책은 자존감이 높은 아이들은 비물질적인 것(성적이 올랐을 때의 성취나, 친구와 스케이트보드를 타러 갔을 때의 유대감 등)을 좋아하는 반면, 자존감이 낮은 아이들은 물질적인 것(새 옷이나 아이팟 등)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나는 물건을 사고 나서 정확히 판단해서 잘 산 것인지를 모를 때가 있다. 특히 옷을 사러 다니는 것을 귀찮게 여겨서 옷을 살 땐 한꺼번에 여러 벌 사곤 하는데, 이럴 때 후회하곤 한다. 이건 왜 샀지, 하면서.

 

 

 

3. 누군가가 괴롭혔을 때 드는 생각

 

 

 

누군가의 ‘악’으로 인해 괴로워질 때 직접 복수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 복수를 하지 않고 그가 스스로 괴롭길 바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가령 자신을 겨냥해서 모욕감을 주는 악성 댓글을 받았다고 하자. 이때 우리는 두 가지의 생각으로 태도를 취할 수 있다. 하나는 ‘당신의 악성 댓글 따윈 무섭지 않다. 나는 끄떡없다.’라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그의 악성 댓글의 위력이 없음을 증명하려는 태도. 즉 당신은 헛수고를 했다는 걸 보여 주는 태도다. 또 하나는 ‘당신의 악성 댓글로 인해 나는 정신적 타격이 심해 병원에 다닐 정도다. 그러니 당신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해야 마땅하다.’라는 태도.

 

 

앞으로 나는 후자 쪽을 따르려 한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나를 괴롭혔다면, 그의 목적, 즉 그가 나를 괴롭히고 싶었던 목적이 달성되었는지를 검토해서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해야겠다. 그러면 그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만족할 테고, 그 만족이 있어야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뒤에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할 수 있을 테니까.

 

 

상대방이 총을 빵, 하고 쏘면 총알을 맞지 않더라도 죽는 시늉을 해 주고 싶다. 상대방에게 우선 통쾌함을 주고 싶다. 그런데 그 다음에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통쾌한 만족감만을 누렸다면 어쩔 것인가.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겠다. 한 사람에게 만족감을 주었으니 덕을 쌓은 거야, 라고. 좋은 일을 했으니 복을 받을 거야, 라고.

 

 

 

4.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똑같을까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이 훌륭한 가정 주부가 되는 데 필요한 여섯 가지 요구 사항을 기입해 달라고 했다. 남편은 그 강좌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저는 그런 요구 사항에 놀랐습니다. 솔직히 말해 아내가 고쳐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는 여섯 가지를 적는 일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도 제가 고쳐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수천 가지는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입하는 대신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내일 아침에 대답을 하겠소’라고요.

 

 

다음날 아침, 저는 일찍 일어나서 꽃집에 전화를 걸어 붉은 장미 여섯 송이를 아내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꽃다발에는 ‘당신에게 고쳐 달라고 할 여섯 가지 일을 생각할 수가 없었소. 나는 지금 당신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오’라고 쓴 카드를 붙여 놓도록 했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도착했을 때 누가 저를 문 앞까지 마중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눈물을 가득 담고 있는 제 아내였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저는 아내가 요구한 대로 비판하지 않은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 데일 카네기, <카네기 인간관계론>, 64쪽~65쪽.

 

 

 

칭찬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상대가 아무리 자신에 대해 비판해 달라고 해도 그 속마음은 칭찬을 바라고 있다는 것.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똑같을까.

 

 

 

5. 나는 나를 모르겠다

 

 

남을 아는 것이 지혜(智)라면,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明)입니다.

 

- 노자, <도덕경>, 147쪽.

 

 

노자에 의하면, 남을 아는 게 지혜에 불과하다면, 자기를 아는 것은 사물의 깊은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라는 얘기다. 그만큼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어렵다는 얘기다. “너 자신을 알라”(소크라테스)라는 말이 있는데, ‘주제 파악’처럼 어려운 게 또 있을까 싶다. 아마 난 죽는 날까지 주제 파악을 못하리라.

 

 

나는 물욕이 없는 편이어서 허영심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애덤 스미스 저, <도덕감정론>을 읽고서다.

 

 

 

 

오만(傲慢)한 사람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지 않고, 마음속 깊숙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優越)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알아맞히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는 당신이, 그가 당신의 입장에 있을 때 자기 자신을 바라볼 그런 눈으로, 자기를 보아주기를 바란다.

 

 

허영심(虛榮心)이 많은 사람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여, 자기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는 자신의 우월성(優越性)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에게 그런 우월성이 있다고 당신이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483쪽~484쪽.

 

 

 

이 책을 통해서 조금씩 ‘나’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 나는 끝까지 나의 진실을 모를 수도 있겠다. 그냥 아는 데까지 알아볼 거야, 하고 생각해야겠다.

 

 

몇 년 전, 어떤 모임에 갔더니 누군가가 나에 대해 개성이 강하다고 했다. 튄다고도 했다. 놀라운 건 여러 사람들이 그 의견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평범한 내가? 기막히군. 그동안 없던 개성이 최근 갑자기 생긴 걸까?’

 

 

어쩌면 그들이 나를 잘 모를 수도 있다.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에 속한다.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아는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어떤 점을 지적당하면 당황하게 되는 건 흔한 일이다. ‘내가 그런가?’ 하면서 깨닫게 되는 일이 있다.

 

 

이런 말이 생각난다.

 

 

“사람은 우주는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 자신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은 그 어느 별보다도 먼 것이다.”(체스터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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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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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2-02-03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구절 참 좋아요. 어린왕자를 흉내낼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그 멀고 먼 소행성으로 돌아가서 보고싶어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말이죠~^^

페크pek0501 2012-02-04 00:0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굿바이님.

아, 어린왕자. 여러 번 읽었죠. ㅋ

비행기 조종사 되고 싶을 때 있어요. 하늘을 날으는 기분을 체험하고 나면 세상이 좀 달라보일 것 같지 않나요?

2012-02-03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4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2-02-04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건을 살 때'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이유는 가장 쉽게 속일 수 있는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답니다. ㅎㅎ
* * *
지적 겸손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자신이 잘 아는 분야에서 놀아라.
일치하지 않는 증거를 찾아내고 이를 잘 이용하라.
가짜 정확성과 가짜 확실성을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에 저항하라.
무엇보다도 절대로 자신을 속이지 마라. 가장 쉽게 속일 수 있는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 찰리 멍거

페크pek0501 2012-02-04 13:46   좋아요 0 | URL
아, 오렌님, 배 타고 오셨군요.ㅋㅋ

자기 자신을 속이기 쉽다는 글은, 제가 언젠가 제 글에서 인용해 본 적 있었어요.

“인간이란 늘 남에게 속기보다 스스로 자신에게 거짓말을 시키고 싶어하는 존재지요. 그리고 물론 남의 거짓말보다는 자신의 거짓말에 더욱 잘 넘어가고요.” - 도스토예프스키 저, <악령>에서.

찰리멍거의 글, 참 좋네요.

숲노래 2012-02-04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날 세상에서는
가게에 가서
참말 내가 바라는 것을
살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하면
이 말이 참 맞구나 싶어요.

페크pek0501 2012-02-04 13:47   좋아요 0 | URL

맞아요, 반가운 된장님. 시대의 요청에 따라 사기도 하고(스마트폰처럼), 또 광고에 현혹되어 사기도 하고, 없으면 창피해서 사기도 하고... 그런 것 같아요.
정말 인간은 무엇에 의해 늘 조종당하는 것 같아요. 저 위의 책 제목처럼요.

숲노래 2012-02-04 13:51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가게에는
'우리가 사야 한다'고 여기도록 강요받는 물건만 있지,
우리가 스스로 찾으려 하는 물건은 없다고... 할까요...

페크pek0501 2012-02-04 13:59   좋아요 0 | URL
맞아요, 된장님. 그거 잊지 말고 살아야겠어요. ㅋ

oren 2012-02-04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가 괴롭혔을 때 드는' pek님의 생각을 읽어보니 마치 '도덕철학자'의 생각을 엿보는 착각이 듭니다.ㅎㅎ '복수'와 '양심의 가책'에 대해서는 쇼펜하우어도 '인간의 본성'인 '선과 악'을 다루는 대목에서 빼놓지 않고 다뤄 놓았더군요.
* * *
복수심은 이미 악의에 가까운 것이고, 악에 이미 보복하고, 형벌의 특질인 장래에 대한 고려에서가 아니라 단지 일어난 것, 지나간 것 때문에 복수한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아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 행하고, 가해자에게 고민을 일으켜 놓고 보고 즐기는 것이다. 복수가 순수한 악의와는 다르고, 어떤 점에서 변호되는 것은 그것이 정당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

앞에서 말한 고뇌는 악의와 같은 뿌리, 즉 격한 의지에서 생긴 것이고, 악의와는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악의에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고통이 주어져 있다. 그것은 이기심에서 나온 단순한 불의든, 순수한 악의든 간에 나쁜 행동에서 느껴지는 것이며, 그 고통의 지속적인 길이에 따라 '양심의 가책(Gewissensbiss)' 또는 '양심의 불안(Gewissensangst)'이라고 불린다. (905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선과 악' 그리고 양심의 가책] 中에서

페크pek0501 2012-02-04 13:48   좋아요 0 | URL
도덕철학자라고요? 과찬의 말씀입니다. 고맙습니다.

그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보니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된 것 같아요.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자신에게 이득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 자신을 위해서(좋은 일 하면 복 받는다, 로) 결론을 내린 것이죠.


oren 2012-02-04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나오는 '오만한 사람'과 '허영심이 많은 사람'을 pek님의 글을 통해 다시 읽어보니 여전히 좋네요. 이번 기회에 '오만과 허영심의 결합'과 '허영의 과오'도 다시 찾아 읽어보니 여전히 좋습니다.(비록 무척 길지만 붙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붙이고 갑니다...)
* * *
오만과 허영심의 결합

오만과 허영심이 각각 그 자신의 특성에 따라서 행동할 때, 이들의 두드러진 특징을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그러나 오만한 사람은 흔히 허영에 차 있으며, 허영에 찬 사람은 흔히 오만하다. 자신이 정당하게 받을 자격이 있는 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해 주기를 바라며, 마찬가지로, 자기가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더 높게 평가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신이 정당하게 받을 자격이 있는 것보다도 자신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결점은 흔히 동일한 성품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양자의 특징들도 필연적으로 서로 혼동되고 있다. 우리는 이따금 허영심의 천박하고 주제넘은 과시(誇示)가 오만의 가장 악독하고 유치하고 가소로운 무례함과 함께 결합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어떤 특정한 성품을 어떤 것에 귀속시켜야 할지, 즉 그것을 오만으로 간주해야 할지 아니면 허영심으로 간주해야 할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여 흔히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492∼493쪽)


허영의 과오

나는 다만, 영예롭고 숭고한 것을 행하려는 갈망(渴望)과, 스스로를 존중과 시인(是認)의 적절한 대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갈망을 허영심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적정성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노력할 것이다. 심지어 충분한 근거와 이유가 있는 명예와 평판에 대한 애호, 진정으로 존중받을 만한 수단을 통해 존중받고자 하는 애호까지 허영심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전자는 미덕(美德), 즉 인성(人性)에서 가장 숭고하고 가장 위대한 격정에 대한 애호이고, 후자는 진정한 영광에 대한 애호로서, 이것은 앞의 것보다는 분명히 열등하지만 그러나 그 고상한 정도에 있어서는 앞의 것 바로 다음가는 격정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허영(虛榮)의 과오(過誤)가 있다. 전혀 칭찬받을 가치가 없거나 또는 그가 기대하는 정도로 칭찬받을 가치가 있지도 않은 특성에 대해 칭찬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즉 자신이 착용하는 옷이나 장신구의 시시한 장식 또는 동등하게 천박한 표현인 자신의 일상적인 행동거지에 근거하여 칭찬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확실히 칭찬받을 자격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님을 그 자신이 완전히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도 허영의 과오가 있다. 자신이 어떤 일에 전혀 중요한 인물이 아니면서 마치 자신이 그 일에 매우 중요한 인물인 것처럼 으스대는 골빈 멋쟁이(coxcomd), 자신이 결코 한 적이 없는 모험을 한 척하면서 그것에 대한 공로를 차지하려는 미련한 거짓말쟁이(liar), 자신에게 아무런 권리도 없는 책의 저자인 양 자처하는 우매한 표절자(剽竊者: plagiary), 이들 모두도 허영심이란 격정을 가진 사람들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분명히 표현되지 않는 존중과 시인(是認)의 감정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그런 감정 자체보다는 자신에게 행해지는 시끄러운 칭찬의 표현과 환호를 더 좋아하는 사람, 자신에 대한 칭찬이 귓가에서 앵앵거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직함(職銜)을 좋아하고, 인사받기 좋아하고, 방문 받기 좋아하고, 시중 받기 좋아하고, 존경받고 주목받기 좋아하는 사람, 이들 역시 허영의 과오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경박한 감정들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경우(즉, 진정한 미덕에 대한 애호와 진정한 영광에 대한 애호)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앞의 두 가지가 인류의 가장 고상하고 가장 위대한 격정들이라면, 이것은 인류의 가장 천박하고 가장 가져서는 안 될 격정들이다.(592∼593쪽)

페크pek0501 2012-02-04 14:00   좋아요 0 | URL
오만과 허영의 글은 오렌님의 서재에서 보고 제가 프린트해서 보았답니다. 반복해서 읽었죠. 그리고 그 글에 반해 도덕감정론을 샀다는 것이지요. ㅋ
도덕감정론이 많이 팔린다면 그건 오렌님 덕분일 텐데... 그것, 알라딘에서도 비봉출판사에서도 알아야 하는 것인데... ㅋㅋ

다시 읽으니 좋습니다.

프레이야 2012-02-04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먼 그 별로 가는 길이 참 쉽지 않아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제일 잘 모르는 존재 또한 나 자신인 것 같아요.
밝게 비춰 볼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어떨 땐 알고도 모르는 척 무시해야할 때도
있고 그냥 지나쳐 가야할 때도 있고 말이에요.
언젠가는 그 별까지 갈 수 있을까요?^^

페크pek0501 2012-02-04 14:01   좋아요 0 | URL
아, 향기가 나는 프레이야님.
끝까지 못가더라도, 제일 모르는 존재가 나 자신인 것 같다고만 생각하고 살아도 될 것 같아요. 그것도 큰 깨달음이고, 그러면 최소한 자만엔 빠지지 않을 테니까요.
어쨌든 ‘확신은 금물’인 것, 자주 느껴요. 반갑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02-04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계발서라면 뭔가 수준 낮은 책으로 무시하는 사람도 있죠.데일 카네기 같은...Ppek0501님은 고전적 인문서적도 인용하고 카네기 책도 인용하고...편견없이 골고루 독서를 해서 이런 글을 남기니 읽는 사람이 흡족합니다.

페크pek0501 2012-02-06 00:08   좋아요 0 | URL
아, 답글 늦어서 미안합니다. 오늘 바쁜 하루였어요.

카네기 인간관계론이 자기계발서라고 생각 않고 샀어요. 하도 카네기, 하길래
카네기의 명성이 왜 있는건지 궁금해서 샀어요. 궁금한 건 못 참아요.ㅋㅋ
카네기 책 중 특히 인간관계에 대한 책 같아서 샀지요.
그런데 생각보다 재밌어요. 심리학 서적도 그렇고 너무 원론적인 책보다 정통에서 비껴난 것들이 오히려 재밌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이것저것 끌리는 대로 읽을 생각이에요.
반가웠습니다. 또 봅시다. ㅋ

gimssim 2012-02-04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화점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매장에서 맘에 드는 멋진 핸드백을 발견한다. 가격이 비싸다. 몸은 그것을 원하는데, 마음은 그것이 비싸니까 사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사지 않기로 했는데, 내 몸은 이미 그 핸드백을 어깨에 메어 보더니 어느 새 계산대에서 그 핸드백의 값을 치르고 있다.'

- 끙! 이거 내 얘긴데. 사고 쳤다오. 조만간 페이퍼로 올려볼께요.


페크pek0501 2012-02-06 00:10   좋아요 0 | URL
아..., 오랜만에 방문하셨네요, 중전님. 반갑습니다.ㅋ
그때가 언제인가요, 무슨 상을 받으셨다고 해서 제가 댓글을 단 기억이 있어요.

공감하셨다니 반갑네요. 백화점에서 사고 치셨나보죠? ㅋ가끔 그러는 것도 괜찮다고 여겨요.(자주 그러면 곤란하지만...) 너무 계획적으로 사는 것, 재미없잖아요.
꼭 페이퍼로 올려 주세요. 기대되네요. 꼭 보러 가겠슴다.ㅋㅋ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중전님은 글을 쓰셔야 된다니까요. 제가 팬이잖아요.(사진도 좋지만...)ㅋㅋ

마녀고양이 2012-02-06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나를 알아야 장점을 활용하고 단점을 보완하며, 나를 알아야 현실적인 대처를 할 수 있고, 나를 알아야 평온을 유지하며 발전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정작 나를 들여다보는 자체가, 너무 괴로운 일이예요, 가끔은.

2. 악성 댓글, 또는 충고성 댓글 등등 말이죠,
저는 그 심리가 너무 궁금해요. 특히 daum과 같은 곳에 있는 기사에 달린 댓글들,
왜 그렇게 다는걸까 하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들어요. 그에 비하면 알라딘 서재는 양반이죠. ^^

페크pek0501 2012-02-07 10:32   좋아요 0 | URL
반가운 마고님, 안녕?
그런데 이 글의 추천수가 왜 32인지 저는 궁금하네요. 그냥 생각의 잡동사니들을 모아 봤을 뿐인데...ㅋ 그만큼 공감한다는 뜻?인가요. 오늘 보고 깜짝 놀람.ㅋ

자신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득과 관련된 것도 있지만,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어서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결점을 안다는 뜻도 되는데,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면 자꾸 남 탓을 하게 되고 남을 비난하게 되죠. 한마디로 민폐가 돼요. 예를 들면 어느 부분에서 자신의 열등감 때문에 오바해서 화를 내는 경우도 있는데, 그걸 자신의 열등감 때문에 오바했다고 생각 안 하고 상대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죠.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자신에게도 이득이 되고 남에게도 해가 안 돼요.

1번의 내용은 좋네요. 그렇게 정리가 되네요. 결국 자신을 알아야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
2번의 악성댓글은... 사람들은 남이 잘 되는 꼴을 보기 싫어하는 사악한 경향이 있는데, 그것도 부당하게 인기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겨냥하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건 제가 따로 페어퍼로 써서 올릴 예정임.)
어쨌든 과도하게 악성댓글을 단다면 그가 외로워서일거야, 라는 생각을 요즘 합니다. 에너지를 적합하게 쏟을 무엇을 찾지 못한데다가, 잘 되는 일은 없고, 외로운 게 아닌가 생각 들어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게 궁금해서 이쪽으로 공부를 해 볼 생각입니다. ㅋㅋ 글을 쓰기 위해 이책 저책 뒤지다 보면 조금 알게 될 것 같기도 해요. ㅋㅋ 반가웠어요.

마녀고양이 2012-02-07 10:40   좋아요 0 | URL
알라딘의 추천수가 글의 품질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지만,
저는 이 페이퍼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공감했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렇게 카테고리를 나누시는 자체가 전 항상 감탄스러워요. ^^

네, 외롭기 때문에 집착의 일부분으로 악성 댓글을 쓰는게 아닐까도 싶고
인정받고 싶거나 주의를 끌고 싶어서인 것도 같고.... 한번 연구하고픈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논문 한번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RISS 사이트로 날아갑니다, 저... 페크 언니, 쪼옥~

페크pek0501 2012-02-07 10:50   좋아요 0 | URL
아, 몰라요. 자꾸 호평을 해 주시면 어떡해요? 그럼 마고님이 더 좋아지잖아요. 에구에구... (나의 이 즐거운 착각질! 늘 착각질은 즐겁다.ㅋ)
 

 

 

 

언제부턴가 내 마음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일을 좋아하다가 싫어지기도 하고, 싫어하다가 좋아지기도 한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다가 싫어지기도 하고, 싫어하다가 좋아지기도 한다. 이렇게 마음이 바뀌는 일을 경험하고 나니 내 마음을 신뢰할 수가 없다.

 

 

또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장소나 환경에 따라 그것의 느낌이 달라지는 걸 경험한다. 예를 하나 들면, 병원에서의 식사가 그렇다. 나는 병실에서는 물론이고 병원 안에 있는 식당에서도 밥 먹기를 힘들어 한다. 평소 내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밥과 반찬이라 할지라도 병원에서 먹으면 맛이 없어 먹기가 괴롭다. 이렇게 먹는 장소에 따라 음식의 맛이 달라지는 것은 마음이 유동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마음에 따라 다르게 들리고, 같은 풍경이라도 마음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마음이 늘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면, 자신의 마음이든 타인의 마음이든 마음을 움직이는 게 가능하겠다. 우울·불쾌·슬픔·분노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 상태를 좋은 감정 상태로 돌리는 것도 가능하겠다. 의도적인 노력만 있다면 말이다. 물론 예외가 있겠지만.  

 

 

이와 관련해 세 권의 책을 뽑아 보았다. 내가 아주 흥미롭게 읽은 책들이다. 나는 이런 책들을 좋아한다.

 

 

 

 

1.

당신은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는가

 

 

 

 

 

 

알랭 드 보통 <불안>에서,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높은 지위’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며, 그래서 지위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불안’이 생기는 것에 주목하였다.

 

 

“우리가 사다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의 자아상(自我像)을 결정하기 때문이다.”(9쪽)

 

 

“지위로 인한 불안은 비통한 마음을 낳기 쉽다.”(9쪽)

 

 

그리하여 ‘지위로 인한 불안’을 없애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죽음을 생각하기이다. “죽음은 지위를 통해 우리가 얻으려고 하던 관심의 덧없음, 나아가 무가치함을 드러낸다.”(297쪽)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생각 옆에 갖다 놓으면 어떤 행동들이 하찮아 보일 수밖에 없다.”(301쪽)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 “(죽음으로 인해) 우리 자신의 유한성을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람의 죽음, 특히 우리가 큰 열등감과 질투를 느끼게 되는 업적을 쌓은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지위로 인한 불안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306쪽) 아무리 잘난 사람도 결국 죽게 된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갈망하는 ‘지위’라는 것도 별것 아닌 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둘째, 폐허를 보는 것이다. 폐허는 “어차피 모든 것은 사라질 운명”(316쪽)이며 “국지적인 승리는 가능하지만, 몇 년 정도 혼돈에 약간의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원시의 용액으로 돌아갈 운명”(316쪽)임을 말해 준다. 이처럼 “영원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들 가운데 중요하다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316쪽) 그러므로 폐허를 보고 나면 ‘지위’라는 것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셋째, 광대한 풍경을 보는 것이다. “광대한 풍경 역시 폐허와 마찬가지로 불안을 다독여 주는 효과가 있다.”(320쪽) “광대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사회적 위계 내에서 우리가 하찮다는 느낌은 모든 인간이 우주 안에서 하찮다는 느낌 안에 포섭되면서 마음에 위로를 얻게 된다.”(320쪽~321쪽)

 

 

이것을 정리하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또는 폐허나 광대한 풍경을 보게 되면 마음이 움직여서 불안(또는 불행)을 없애거나 덜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큰 불행을 겪은 사람이 여행을 하면 기분전환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도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겠다. 여행을 통해 광대한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

 

 

 

2.

당신은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는가

 

 

 

 

 

로버트 치알디니 <설득의 심리학>에서 ‘대조효과’를 이용한 어느 여대생의 편지를 공개한다. 그 여대생은 자신의 나쁜 성적을 부모에게 편지로 알리는데, 부모가 화가 덜 나도록 ‘대조효과’를 이용한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에게

 

 

집을 떠나 학교에 온 후로 자주 연락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 저는 지금 모든 것이 편안합니다. 이곳 기숙사에 입주하자마자 불이 나서 저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다가 골절상과 뇌진탕의 부상을 입었지만 이제는 거의 다 나아 괜찮습니다. 병원에는 단지 2주일 동안만 입원해 있었어요. 이제는 하루에 한 차례씩 두통에 시달리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정상입니다.

 

 

다행히 저의 기숙사에 불이 난 것과 제가 불을 피해 창문에서 뛰어내린 것을 기숙사 근처의 주유소 직원이 목격을 하고 저를 위해 증언을 해 주어서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화재를 발견하고 소방서에 연락했을 뿐 아니라 구급차를 불러 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답니다.

 

 

더군다나 그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저를 위문차 찾아와서 기숙사가 불이 나서 갈 데가 없다면 그의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도 좋다고 저를 초대하는 호의까지 보여 주었습니다. 사실 그의 아파트라는 것이 지하실의 단칸방에 불과했지만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었어요.

 

 

그는 매우 훌륭한 청년이어서 우리는 금방 서로 사랑에 빠졌고 장래를 약속했답니다. 아직 구체적인 결혼 날짜를 잡은 것은 아니지만 조금 있으면 제 배가 더욱 불러져서 보기 싫어지기 전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입니다.

 

 

놀라셨죠? 그래요 저는 임신을 했답니다. (…) 저희가 아직 결혼 날짜를 확정하지 못한 것은 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이의 질병이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못했고 저도 어쩌다 보니까 그 병에 전염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부모님은 그이를 우리 집안의 사위로 환영해 주시리라 믿어요. (…)

 

 

(이것에 이어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하하! 엄마, 아빠 이제 정말로 저의 최근 근황을 말씀드릴게요. 사실은 기숙사에 불이 난 적도 없으며 저는 골절상과 뇌진탕으로 병원에 입원한 적도 없어요. 게다가, 저는 남자 친구도 없으며 동거한 적도 없고 따라서 임신도 하지 않았지요. 물론 질병에 걸리지도 않았구요. 그러나 문제는 제가 미국사 과목에서 ‘D’ 학점을 그리고 화학에서 ‘F’ 학점을 받았다는 거죠(--!!). 매우 유감스러운 성적이지만 제가 건강히 학교를 잘 다니고 있으니 별 걱정은 하지 마세요.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샤론 드림

 

(46쪽~47쪽)

 

 

 

이 편지를 받은 부모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성적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리라.

 

 

 

3.

당신은 상술로 인해 마음이 움직인 적은 없는가

 

 

 

 

 

에릭 번 <심리게임>에서 인간의 내면에는 부모, 어른, 아이 등 세 가지의 ‘자아 상태’가 존재한다며 그 특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부모 - 부모 역할을 하는 인물과 닮은 자아 상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안에 자기 부모를 모시고 다닌다.)

 

 

어른 - 자율적으로 객관적 현실 평가를 지향하는 자아 상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안에 어른이 있다.)

 

 

아이 - 아동기 초기에 고착되어 지금까지도 활용하는, 미성숙한 아동기 흔적을 대표하는 자아 상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안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닌다.)

 

 

그리고 극적인 판매 게임으로, 상술로 인해 마음이 움직이는 경우를 소개한다.

 

 

판매원 : “이게 더 낫긴 한데, 고객님한테는 좀 부담스럽죠.”

주부 : “이걸로 하겠어요.”

 

(53쪽)

 

 

판매원은 어른으로서 두 가지 객관적 사실을 언급한다. “이것이 더 낫다.” 그런데 “당신은 이것을 살 형편이 안 된다.” 표면적 혹은 사회적 수준에서 보면 이 진술은 주부의 어른에게 말하고 있으며, 주부의 어른이라면 “두 가지 모두 맞는 말씀입니다.”쯤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면, 혹은 심리적 벡터는 노련한 판매원의 어른으로부터 주부의 아이를 향하고 있다. 판매원의 판단이 정확했다는 것은 아이의 대답이 입증하고 있다. 아이는 사실상 “가계부에 구멍이 나든 말든 이 거만한 친구에게 내가 누구보다 훌륭한 고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야 말겠어.”라고 말하는 것이다.(53쪽)

 

 

자기 안의 ‘아이’를 잘 지배하지 않으면 남으로부터 지배당하는 일이 생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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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1-28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내 마음'을 예쁘게 믿으면서
하루하루 즐거이 누려 주셔요~

페크pek0501 2012-01-28 23:07   좋아요 0 | URL
된장님, 아름다운 말씀 감사 드립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01-2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판매원의 사례는 경제학에선 베블렌 효과라고 하지요.경제학 서적도 재미있다는 것을 몸소실천해준 베블렌!

페크pek0501 2012-01-28 23:09   좋아요 0 | URL
아, 그렇습니까? 전 몰랐어요. 경제학 서적도 재밌는 것 많지요. ㅋ

늘 감사해요.

oren 2012-01-29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움직이는 문제'와 알랭 드 보통이 불안의 원인으로 지적한 '지위에 대한 갈망'을 결부시켜 놓은 글을 읽어보니, 스티븐 핑커가『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책에서 '지위'에 관한 문제를 그토록 여러 페이지에 할애하여 자세히 설명한 이유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창고에서 '지위'라는 단어를 검색해서 이 글과 연관이 있겠다 싶은 내용들을 덧붙여 봅니다.

* * *

서열과 지위


인간에겐 엄격한 서열이 없지만, 모든 사회에서 사람들은 특히 남자들 사이에 일종의 서열 관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서열이 높은 사람은 의견의 우선권이 있고, 공동의 결정에서 발언권이 크고, 대개 공동의 자원을 더 많이 분배받고, 아내와 애인을 더 많이 거느리고, 다른 남자들의 아내와 더 많이 성관계를 맺는다. 남자들은 지위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동물학 교과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법들과 인간에게 고유한 방법들을 이용해 지위를 획득한다. 싸움을 잘하는 남자들은 더 높은 지위를 얻고, 외모가 매력적인 남자들도 높은 서열을 얻는다.(764쪽)

지위

지위는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남들을 도울 수 있는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다. 그런 자산에는 아름다움, 독보적인 재능이나 전문성, 유력자들의 신뢰, 그리고 무엇보다 부가 포함된다. 지위를 뒷받침하는 자산들은 대용이 가능하다. 부는 인맥을 만들고, 인맥은 부를 만든다. 아름다움은 (선물과 결혼을 통해) 부로 전환되거나, 중요한 사람들의 주목을 끌거나,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구혼자를 끌어들인다. 그러므로 자산 소유자는 단지 자산 소유자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후광이나 카리스마를 발산하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총애를 받고 싶어한다. 사람들이 당신의 총애를 원하게 만들면 항상 편리하므로, 지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간절히 원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하루의 시간은 정해져 있고 아첨꾼들은 누구에게 빌붙을지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지위는 어디까지나 한정된 자원이다. A의 지위가 높으면 B의 지위는 낮을 수밖에 없으므로 사람들은 경쟁을 해야 한다. (766쪽)

간통의 심리

여자들은 남편보다 애인을 고를 때 외모와 힘을 더 중시한다고 보고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외모는 유전자의 품질을 보여 주는 지표다. 그리고 여자들은 불륜 관계를 맺을 때 일반적으로 남편보다 지위가 높은 남자를 고르는데, 지위를 뒷받침해 주는 자질들은 거의 틀림없이 유전이 되는 것들이다.(명망 있는 애인에 대한 안목은 첫 번째 동기인 자원 얻어내기에도 도움이 된다.) 우수한 남자와 성관계를 하면 여자는 또한 결혼 시장에서의 거래 능력을 테스트할 수도 있다. 이것은 차후에 직면할 그런 거래의 전주곡이 되거나, 결혼 생활에서 자신의 입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사이먼은 성관계와 관련된 성차이에 대해, 여자는 남자가 어떤 면에서 우수하거나 남편을 보완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성관계를 하고,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기 때문에 간통을 한다고 요약한다.(737쪽)

경쟁자

세계 어디에서나 사람들은 권위, 찬성, 존엄, 우월, 명성, 존경, 체면, 지위, 탁월함, 위신, 지위, 존중, 평판, 신분, 고매함 등으로 불리는 그림자 같은 실체를 거머쥐려고 애쓴다. 사람들은 리본과 한 조각의 금속을 목에 걸기 위해 굶주리고, 목숨을 걸고, 재산을 탕진한다. 경제학자 소스타인 배블런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너무 많은 생활필수품을 희생하기 때문에 마치 '고상한 정신적 필요'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지위와 미덕이 매우 밀접하다는 것은 다음의 단어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기사도 정신이 있는 chivalrous, 귀족적인classy, 품격이 있는courtly, 신사다운gentlemanly, 명예로운honorable, 고귀한noble, 위엄 있는princely. 정반대의 단어들도 마찬가지다. 버릇없이 자란ill-bred, 비천한low-class, 천한low-rent, 비열한mean, 역겨운nasty, 무례한rude, 인색한shabby, 천한shoddy. 개인의 사소한 외양에 대해서도 우리는 옳은right, 선량한good, 예절에 맞는correct, 흠잡을 데 없는faultless 같은 도덕적 비유로 그 멋을 표현하고, 볼품없이 입은 자를 비난할 때에는 대개 죄악을 가리키는 어조를 동원하여 초라한tacky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예술사가 쿠엔틴 벨은 그런 태도를 '의복 도덕성sartorial morality'이라고 칭했다.(757쪽)

명예(honor)

자기를 무시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칼로 찌르는 빈민가의 폭력배는 특정한 사회의 산물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문화에서 비슷한 유형이 발견되는 보편적 인물이다. (영어를 포함하여) 많은 언어에서 명예honor라는 말은 불가피할 때는 피를 보더라도 모욕에는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는 결의를 의미한다. 많은 식량수집 사회에서 소년은 살인을 한 후에야 남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한 남자의 존경은 살인을 입증하는 증거의 수에 비례하고, 그에 따라 머리 가죽 벗기기나 머리 사냥 같은 관습이 탄생한다. '명예로운 남자들'의 결투는 미국 남부의 전통이었고, 많은 남자들이 결투를 통해 지도자의 지위에 올랐다. 10달러 지폐에 새겨진 알렉산더 해밀턴 재무장관은 아론 버 부통령과의 결투에서 목숨을 잃었고, 20달러 지폐에 새겨진 앤드로 잭슨 대통령은 두 번의 결투에서 승리했고 그 밖에도 여러 번 결투를 도발했다.(763쪽)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中에서

oren 2012-01-29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제가 가끔씩 떠올리는 방법은 (아담 스미스로부터 배운 것이지만) '하나의 영속적 상황과 다른 영속적 상황과의 차이를 별 것 아닌 것으로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 * *

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

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은 하나의 영속적 상황과 다른 영속적 상황과의 차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탐욕(貪慾: avarice)은 가난과 부유함 사이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야심(野心: ambition)은 개인적 지위와 공적 지위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허영(虛榮: vain-glory)은 무명(無名)의 상태와 유명(有名)한 상태의 차이를 과대평가한다. 이러한 종류의 사치스런 격정의 영향하에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처해 있는 실제 환경에서 불행하고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흔히 그가 어리석게도 감탄하는 처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회적 안정을 교란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해) 조금만 살펴보아도, 인간생활의 일상적인 모든 상황에서 교양 있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평온하고, 마찬가지로 기뻐하고, 마찬가지로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통상의 여러 가지 상황들 중에서 어떤 상황은 다른 상황보다 더욱 바람직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신중(愼重: prudence) 또는 정의 (正義: justice)의 법칙들을 위반해 가면서까지 격정적인 열의를 가지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며, 또는 후에 가서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회상할 때 느끼게 될 수치심과, 자신의 부정한 행위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회한(悔恨)으로 마음의 장래의 평정까지 파괴해 가면서까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275∼276쪽)

- 아담 스미스(Adam Smith),『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中에서

oren 2012-01-29 0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움직이고 다스리는 수많은 방법' 가운데 (프로이트와 C.G.융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현대심리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쇼펜하우어로부터 배울 수 있는 내용들도 덧붙여 봅니다.
* * *

모든 불행과 고통에 있어 우리에게 가장 효과적인 위안은 자기보다 더욱 비참한 자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153쪽)

우리를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은 그 일의 객관적인 진실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즉 사물에 대해 우리가 하는 해석을 관장하는 주관적인 진실이다. 이것을 에픽테토스는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견해다"라고 말했다.(303쪽)

우리는 자기보다 잘사는 사람보다 못사는 사람을 더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재앙이 일어났을 때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를 주는 것은 우리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불행한 등료들'과 어울리는 일이다.(416쪽)

이미 변경할 수 없게 된 불행한 사고를 냈을 경우, 이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거나 미리 방지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자꾸 후회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은 고통을 조장하며, 결국에는 자학에 빠지게 되므로 차라리 다윗 왕처럼 할 일이다. 왕은 자식이 병으로 누워 있는 동안에는 여호와께 기도와 애원으로 성가시게 했으나, 자식이 죽어 버리자 거문고를 튕기며 이에 대해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손쉽게 체념할 수 없는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필연적이며, 피할 수 없다는 대진리를 자각함으로써 숙명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제일 좋다.(418쪽)

자기 혼자서는 모든 소망 중에서 극히 작은 한 부분밖에 손에 넣을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재앙은 모든 사람들이 당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언제나 잊지 말고 우리의 소망에 하나의 목표를 세워 욕구를 억제하고 분노를 막아야 한다. '그대들은 절제하고, 참고 나가라.' 이것이 하나의 법도이다. 이를 무시하면 재물도 권세도 자신에 대한 우리의 비참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다. 이를 주제로 해서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노래했다.

모든 일을 손쉽게 처리하는 방법은
현자의 글을 읽고 석학에게서 배우는 것.
탐욕도, 불안도, 무익한 기대도
그대를 이제 괴롭히지 않으리니 ······.
- 《서한집》 1;18의 96 (424쪽)

- 쇼펜하우어, 『세상을 보는 지혜』 中에서


페크pek0501 2012-01-29 12:43   좋아요 0 | URL
아, 감탄사 연발합니다. !!!!!!!!!!!!! 그리고 감사 드립니다. 댓글을 세 개씩이나, 그것도 길게 써 주셔서 썰렁하던 제 서재가 꽉 찬 느낌이 드네요.ㅋ

제가 다 아는 책들이라서 더 반갑네요.ㅋ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사진 않았지만 네이버의 '오늘의 책'리뷰를 읽고 알았어요. 여기에도 좋은 글이 많네요. 명예를 위해 결투를 해서 목숨을 잃기도 한다 - 는 것은 <불안>에도 나옵니다. 그깟 명예 때문에 목숨을 거는, 이런 점이 저는 인간의 우스꽝스러운 점으로 읽혀요. 인간의 본질 같은...

애덤 스미스의 글은 저도 밑줄을 쳐 놓았던 부분입니다. 지금 확인하고 웃습니다. ㅋㅋ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견해다"라고 말한 에픽테토스의 말, 외워 놓고 싶은 문장이군요.(어디다 적어 놔야지...ㅋ)

아, 이 말씀 진작 드리고 싶었어요. 오렌님의 이미지 사진은 참 멋있어요. 꼭 오렌님이 배를 타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댓글 쓰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켜요. 물론 이곳에도 배를 타고 오신 것 같고요. 멋진 상상 아닙니까. ㅋ

아, 그리고 아쉬운 점은 댓글도 잘 쓰면 추천 누르기가 있어야 하는 건데,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말로(그냥 말로만) 제가 추천을 한 번 눌러 드리겠습니다. 댓글에 추천을 꽉~~~^^^:)

oren 2012-01-30 02:24   좋아요 0 | URL
"마음을 바꾸거나 다스리는 법"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건 아무래도 고대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아닐까 싶은데, 세네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책들을 읽어보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범접하기 어려운 경지' 같아서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그래서 에픽테토스의 『불확실한 세상을 사는 확실한 지혜』라는 책도 구입해 놓고 있는데 (매우 얇은 책이지만) 여태 읽어보지 못하고 있답니다.

'명예'를 위해 어리석게 '결투'를 하는 '한심한 풍경'은 쇼펜하우어에게도 너무나 인상적이었던지 그의 책 『삶의 예지』에서 너무나 '지겹도록' 길고도 상세하게 '철학적으로' 고찰해 놓았더군요.

'마음을 바꾸기 위한' 얘기들을 이래 저래 떠올려 보니 문득 평생동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애를 썼던 몽테뉴 생각도 많이 납니다.
* * *
몽테뉴의《수상록》에 대한 독후감(1984. 9.18)
(관련글 ☞ http://blog.aladin.co.kr/oren/4070322)






페크pek0501 2012-01-30 14:01   좋아요 0 | URL
아, 오렌님은 글씨를 꽤 잘 쓰시는군요.(저는 내용보다 필체를 더 눈여겨 봤음) 혹시 학창시절에 모범생에다가 우등생이셨나요? 아무래도 그런 듯해요.

저는 몽테뉴의 <수상록>은 혜원출판사의 것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 보니 이런 글에 줄이 쳐져 있네요. "한 사람에게 이로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해롭다" - 즉 우리 마음 속의 소원은 대부분이 타인에게는 손해가 되는 일이라는 것이죠. 저는 이런 깨달음을 주는 글에 미쳐?요. 다시 꼼꼼히 읽어야겠어요. 좋은 인용문도 많이 나오죠.

다음 페이퍼엔 '마음'에 대한 제 생각의 글을 쓰려 해요. 제 생각 많이 담아서요. 구상은 끝났는데 잘 될지는 써 봐야 알겠어요. 사실 그걸 쓰고 싶었는데 저의 생각 짦음을 들킬까 봐 이 페이퍼엔 제 생각 쓰기를 자제했다는 것...이죠. 이렇게 전 자신감이 없답니다.ㅋ 며칠 뒤 다시 배를 타고 놀러 오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의 하찮은 글의 댓글에 님의 필체까지 공개해 주신 점, 감사할 뿐입니다. 호호~~

oren 2012-01-30 23:33   좋아요 0 | URL
"한 사람에게 이로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해롭다"는 말은 '불가피성'을 띠고 있어서 '필연'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몽테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가장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지만, (좀 더 범위를 넓게 확대해서 바라본) 다윈의『종의 기원』에서도 무수한 생명체들이 결국 '개체의 보존과 번식'을 위해 '다른 개체'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잡아 먹습니다'. '생의 의지'가 작동하는 한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식물은 물과 공기와 여러 원소들을 소비한다는 차원에서) 어쩔 수 없는 필연이지요.

다윈보다 좀 더 앞선(출생으로 따져보나 대표적인 저작의 집필과 출판으로 따져보나) 쇼펜하우어도 '다윈의 주장에 버금갈 정도로' 이 '생명의 필연'에 대해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 *
우리는 자연의 도처에서 항쟁, 투쟁, 그리고 승리의 교체를 본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의지와의 근본적인 분열을 한층 더 명확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의지의 객관화에서 각 단계는 다른 단계의 물질, 공간, 시간과 투쟁한다. 기계적, 물리적, 화학적, 유기적인 여러 현상은 각기 자신의 이념을 구현하고 싶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발현시키려고 애쓰면서 인과성의 실마리를 따라 서로 물질을 탈취하려고 하므로 지속적인 물질은 끊임없이 그 형태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싸움은 모든 자연 속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 자연은 이 투쟁을 통해서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만약 사물 속에 투쟁이 없다면, 모든 것은 하나일 것이다"라고 엠페도클레스는 말하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제5권) 왜냐하면 이 투쟁이야말로 의지와 자신과의 근본적인 분열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보편적인 투쟁이 가장 명백하게 보이는 것은 동물계이며, 동물계는 식물계를 그 영양으로 갖고, 또 각 동물은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고 영양이 된다. 즉 그 이념을 나타낸 물질은 다른 이념을 나타내기 위하여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되며, 각 동물은 다른 동물을 끊임없이 파괴함으로써만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생에 대한 의지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고 여러 가지 형태로 자신의 영양이 되고 있지만, 결국 인류는 다른 존재를 제압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을 자기가 사용하기 위한 제품이라고 본다. 그러나 제4권에서 언급할 작정이지만, 그 인류도 자신 속에 투쟁, 즉 의지의 자기 분열을 무서울 정도로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고, '인간은 인간에 대한 늑대(homo homini lupus)'가 되는 것이다.(671쪽)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의지의 객관화 과정' 中에서

페크pek0501 2012-01-31 12:41   좋아요 0 | URL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를 읽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나요. ㅋㅋ오래 전에 읽어서요.

제가 <어느 독서광의 노트>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 아무래도 진짜 독서광은 제가 아니라 오렌님 같아요. 감탄!감탄!ㅋㅋ

그래서 오렌님을 독서광으로 임명합니다.(제게 이런 권한은 없지만요...)

배멀미는 안 하시는지...ㅋㅋ

sslmo 2012-01-29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페이퍼와 이 페이퍼의 댓글들과 댓글의 덧글들을 꼼꼼히 읽은 저로서는,
위 글 모두를 캡쳐해서 꽝꽝꽝 추천을 한 백만개 쯤 날리고 싶어요.
글이 논리정연하고 차곡차곡 반듯한 진행이네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근데, 마음을 움직이기 전에...제 마음 좀 어딨는지 찾아주시면 안될까요?@@

oren 2012-01-30 01:29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께서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 여기까지 오셨군요. ㅎㅎ
'마음'이야 제 스스로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이고, 가고 싶은 대로 가는 법일텐데, 궁금한 건 늘 '어디에서 어디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 * *
"인간의 마음이란 한 번 새로운 생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면 절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 올리버 웬델 홈스

페크pek0501 2012-01-30 14:04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도 잘 모르는데, 님의 마음을 어떻게 찾아 드릴까요?ㅋㅋ

아, 저도 님을 배워요. 한 백만 개쯤의 추천이라..., 참 스케일 크십니다. 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죠. 이런 글은 한 20개쯤 추천을 날려야 하는 건데, 라고... 그런데 이젠 백만 개라고 해야 겠어요. 양철나무꾼님을 따라 해서...ㅋㅋ

굿바이 2012-01-30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k0501님의 글을 읽으면서 깨달은 건데요 저는 어떤 노력도 잘 안하는 것 같아요.
제 마음도 타인의 마음도 그냥 그렇게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것 같아요.
게으른 것이 원인인지, 겁이 많은 게 원인인지, 둘 다 해당되는 건지 따져봐야 겠어요.

페크pek0501 2012-01-30 14:0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ㅋ
마음이란 그냥 그렇게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사는 게, 속 편하지요. 그럴 수만 있다면요. 또 어떤 면에서는 그래야 될 것도 같고요.
또 뵈요. !!!!ㅋ 고맙습니다.

마태우스 2012-01-30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그언니 안녕하세요
움 저 여대생의 편지를 읽고 부모님이 안도했을 거 같진 않네요.
너무 엄청난 얘기들을 많이 써놓았고,
나중에 뻥이야,란 말을 듣고도 분이 안풀릴 것 같은데요
제가 너무 인색한가요^^

페크pek0501 2012-01-30 14:19   좋아요 0 | URL
페크언니, 라고 하셨습니까? 크하하하하하하...
왜 저를 이렇게 웃기십니까? 다행히도 커피를 다 마셔서 빈잔이 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지난 번처럼 쏟을 뻔했는데...ㅋㅋ

님이 인색하신 건 아닌 것 같고요,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요. 사람의 따라서 다를 테니까요. 하지만 이런 건 상상의 문제로 볼 수 있을 듯해요. 아이의 성적이 나쁘면 더 나쁜 상황(예를 들면 어디 다쳐서 병원에 실려 갔다든지 하는...)을 상상하면 기분이 나아진다는 교훈 얻을 순 있을 것 같아요. 이 글을 통해서요.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면 좀 나아지는 걸 경험합니다.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것, 빈말이 아닌 것 아시죠?

마녀고양이 2012-01-30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릭번의 <심리게임>은 제가 토요일에 주문한 책인데,
언니네 서재에서 보다니,, 하고 신기해하고 있어요.

마음이라, 마음이라,,, 저는 오늘 같은 날은, 제 마음 없애버리고 싶어요.
왜 이리 벌렁거리는지 모르겠어요, 오늘 내내. ㅠㅠ

페크pek0501 2012-01-31 12:43   좋아요 0 | URL
<심리게임>, 재밌어요. 탁월한 주문되시겠습니다. 저도 님의 서재에서 정보 갖고 왔어요. ㅋㅋ 나도 사야지, 하면서...


아이리시스 2012-01-31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안녕.
우리 마고님을 위로해주세요.
그리고 저도 응원해주세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갑자기 뭔 소리인지;;)

페크pek0501 2012-01-31 12:43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은 제가 응원 안 해도 잘 하고 계십니다. 늘 그렇게 하고 계세요. 늘 지금처럼... 오늘 제가 누가 온다고 해서 시간이 없어서 님의 그 긴 글을 꼼꼼히 못 보는데, 다음에 보게 될 거예요. ㅋㅋ

잘잘라 2012-01-31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랭드 보통의 불안,을 읽어봐야겠어요^^

페크pek0501 2012-01-31 12:44   좋아요 0 | URL
아, 메리포핀스님,
<불안>을 탐독해 보세요. 저는 이런 책에 열광한답니다. 한 가지 주제로 어떻게 한 권의 책을 만들었는지를 감탄했답니다.ㅋㅋ 좋은 독서 되실 거예요. ㅋㅋ
 

 

 

 

살다 보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하거나 기분이 상할 때가 있다. 그럴 때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이 상황을 범인(凡人)의 눈으로 보지 말고 ‘작가적인 눈’으로 보자고.

 

 

그러면 그 생각만으로도 다소 위안이 된다. 작가적인 눈은 세상을 뒤집어 볼 줄 아는 눈이 아니던가. 그래서 음지를 양지로 생각하기도 하고, 실패를 성공으로 생각하기도 하는 게 작가적인 눈이 아니던가. 무엇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여 새로운 가치를 탄생시키는 그 눈을 닮고 싶다. 그 눈으로 세상을 보면 항상 봐 왔던 세상이 다른 세상으로 보일 것 같기 때문이다.

 

 

작가적인 눈이 가지는 ‘새로운 시각’은 중요하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일도, 기분이 상한 일도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나면 달라져 보이니까. 나쁜 ‘위기’가 좋은 ‘기회’로 보일 때가 있는 것처럼.

 

 

요즘 난 ‘작가적인 눈’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내가 닮고 싶은 ‘작가적인 눈’을 살펴보기 위해, 그와 관련된 글들을 골라 보았다. 내가 인상 깊게 읽은, 좋은 글들이기도 하다.

 

 

 

 

1.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에서, 소설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체로 이런 대답을 한다고 썼다.

 

 

“소설가란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인간입니다.”(19쪽)

 

 

소설가가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이유는, 판단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자기만의 방을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방을 마련하고, 그곳으로 사람들을 불러 편안한 의자에 앉히고, 맛있는 음료를 내놓고, 상대가 그곳을 아주 마음에 들게 하는 것. 마치 자기만을 위한 장소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445쪽)

 

 

그래서 독자가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하루키가 만든 방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고, 독자가 그 방을 아주 맘에 들어 한다는 것은 작가와 독자가 마음이 통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세상사를 서로 나눠 가진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독자가 그 방에 있는 동안엔 세상을 작가의 눈으로 볼 수 있다. 즉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하루키가 세상을 보는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자신이 쓰고 싶은 책에 대해서는, 프란츠 카프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밝히고 있다.

 

 

“생각건대, 우리는 우리를 물어뜯거나 찌르는 책만 읽어야 한다.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여야만 한다.”(459쪽)

 

 

책이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는 게 카프카의 생각이며 동시에 하루키의 생각인 것이다. 그 정도로 독자에게 강한 충격을 주려면 어떤 책이 되어야 할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뻔하지 않음’을 담고 있는 내용의 책이어야 하겠다. 낯선 세계 또는 의외성이 있는 세계로 안내하는 책이면 될 것 같다. ‘세상의 비밀’이 담겨 있는 책이면 될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고착된 생각의 언 바다를 깰 수 있으면 된다. 우리 안에는 얼마나 많은 고정관념과 편견이 고착되어 있는가. 이렇게 고착되어 있는 것들을 깨려면 ‘작가적인 눈’이 필요하리라.

 

 

 

 

2. 알랭 드 보통, <불안>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소설이란 장르에선 ‘작가적인 눈’이 어떻게 나타날까. 이에 대해 언급한 책이 있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세상을 보는 소설가의 시각은 보통 사람들의 시각과 다르다는 것에 주목하며 이렇게 썼다.

 

 

“소설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표준 렌즈, 즉 부와 권력을 크게 확대해 보여주는 렌즈를 인격의 특질을 확대해 보여주는 도덕적 렌즈로 바꾼다. 도덕적 렌즈로 보면 높고 강한 사람은 작아지며, 잊혀져 뒤로 물러나 있던 인물이 오히려 크게 보일 수 있다. 소설의 세계에서 덕의 움직임은 물질적 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부자이고 품행이 단정하다고 해서 곧바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고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곧바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180쪽~181쪽)

 

 

때로는 “첫째가 꼴찌 비슷해지고, 꼴찌가 첫째 비슷해진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1834)에서 우리의 공감이 이끌리는 사람은 호화로운 집에 사는 마담 드 뉘싱겐이 아니라 더러운 하숙집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이빨 빠진 고리오 영감이다. 하디의 <미천한 주드>(1895)에서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은 옥스퍼드의 연구원들이 아니라 대학의 석상을 수리하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석공이다.”(182쪽~183쪽)

 

 

이와 같이 소설은 감추어진 삶의 목격자이기 때문에 지배적인 위계 관념에 상상의 평형추 역할을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점심 준비로 바쁜 하녀가 보기 드문 감수성과 도덕적 위엄의 소유자인 반면, 시끄럽게 웃음을 터뜨리는 은광 소유자 남작의 마음은 시들고 역겨울 수 있다.”(183쪽)

 

 

“그러나 우리는 이런 교훈을 잊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 내면의 가장 좋은 부분이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한 외적인 성취로 표현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다.”(183쪽)

 

 

이처럼 소설은 현실에서 우리가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인간의 감추어진 어떤 모습을 부각시켜서 그것의 가치를 드러낸다. 눈에 띄지 않아 올바르게 알 수 없는 일들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이런 ‘세상의 비밀’을 포착하는 게 작가적인 눈이다.

 

 

* <불안>의 인용문 페이지는 구판의 책에 따라 표시함.

 

 

 

 

3. 박완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수필에서는 ‘작가적인 눈’이 어떻게 나타날까.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수필은 저자가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보게 된 ‘마라톤’에 대한 글이다. 모두들 1등으로 달리는 마라토너만을 향해서 응원하는 데 반해 저자는 꼴찌에게 응원의 박수갈채를 보낸다.

 

 

“(꼴찌로 달리는) 푸른 마라토너는 점점 더 나와 가까워졌다. 드디어 나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표정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느꼈다. 여지껏 그렇게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을, 그렇게 정직하게 고독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가슴이 뭉클하더니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는 20등, 30등을 초월해서 위대해 보였다. 지금 모든 환호와 영광은 우승자에게 있고 그는 환호 없이 달릴 수 있기에 위대해 보였다. (…) 나는 용감하게 인도에서 차도로 뛰어내리며 그를 향해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환성을 질렀다.

 

 

그리고 저자는 마라톤에 대해 새롭게 생각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마라톤이란 매력 없는 우직한 스포츠라고밖에 생각 안 했었다. 그러나 앞으로 그것을 좀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것이 조금도 속임수가 용납 안 되는 정직한 운동이기 때문에. 또 끝까지 달려서 골인한 꼴찌 주자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 무서운 고통과 고독을 이긴 의지력 때문에.

 

 

이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꼴찌로 달리는 마라토너에게도 관심을 갖고 그의 비밀을 발견해 내는 것이 작가적인 눈이다. 그에게서 무서운 고통과 고독을 이긴 의지력이 있다는 점을 알고 응원할 수 있는 게 작가적인 눈이다.

 

 

 

 

4. 유치환, <깃발>

 

 

 

 

 

 

시에서는 ‘작가적인 눈’이 어떻게 나타날까.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유치환, <깃발>

 

 

 

이 시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지금껏 몰랐던 ‘깃발’의 비밀을 알게 된다. 깃발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기도 하고,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기도 하고, ‘순정’이기도 하고, ‘애수’이기도 하고,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이기도 하다. 이처럼 깃발을 단순히 깃발로만 보지 않고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게 작가적인 눈이다.

 

 

 

 

 

* 맺는말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에서 보듯,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우리 안의 고착된 생각들)를 깨뜨릴 줄 아는 게 ‘작가적인 눈’이다.

 

 

<불안>에서 보듯, 부와 권력을 중요시하는 게 아니라 인격의 특질을 중요시할 줄 아는 게 ‘작가적인 눈’이다.

 

 

<골찌에게 보내는 갈채>에서 보듯, 골찌에게도 응원의 박수갈채를 보낼 줄 아는 게 ‘작가적인 눈’이다.

 

 

<깃발>에서 보듯, 한 가지의 사물을 다양한 모습으로 볼 줄 아는 게 ‘작가적인 눈’이다.

 

 

이 네 가지의 공통점은 ‘다양성’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다양성을 지향한다는 것은 어떤 고정관념과 편견에 갇히지 않는 일이다. 자유롭게 사고하는 일이다. 어떤 것에 대한 비밀의 ‘진실 찾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소설가들은 자신의 생각을 커다란 주제로 삼지 않는다. 그는 더듬거려 가며 실존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을 밝혀 보려고 애쓰는 발견자이다.”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란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의 비밀’이겠다. 작가적인 눈을 가지고 세상의 비밀을 많이 알게 될수록 세상의 진실에 더 가까이 가고, 세상의 진실을 더 이해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 진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만큼 행복해지는 일이며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고 믿는다.

 

 

물론 ‘작가적인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작가적인 눈’으로 세상을 봐야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어떤 세계든 어떤 사물이든 시각에 따라서 아주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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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17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권력은 이야기를 가진 자라는 걸 최근 <부러진 화살>을 보면서 깨닫 게 됐어요.
특정 분야를 잘하는 사람은 그 분야만 잘해요. 그런데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 그들 보다 우위에 있죠. 권력 참 무서운 건데.ㅜ
작가들이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참 순수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언니도 잡문집 읽으셨군요. 이책 의외로 읽은 맛이 쏠쏠한 것 같아요.
물론 어느 부분은 건너뛰긴 했지만.ㅋ

페크pek0501 2012-01-17 16:23   좋아요 0 | URL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작년에 사 두고 이제야 읽었어요. 그의 소설은 몇 권 읽었는데, 에세이는 처음 봤어요. 하루키는 사유가 깊은 뛰어난 작가라기 보단 매력적인 작가 같아요. 그러니까 교과서에 실릴, 역사에 남을 작가가 아니라 동시대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작가라는 거죠. 그가 매력이 있든지 아니면 어떻게 글 써야 독자들을 매료시킬지를 알든지, 둘 중 하나 같아요.

하루키도 좋지만 전 알랭드보통이 더 좋아요. <불안>은 분석력이 뛰어난 책으로 흥미롭게 읽었어요. '불안'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인간을 그만큼 통찰한다는 걸 보는 게 즐거웠어요. 아마 알랭드보통의 책들 중엔, <불안> 과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을 듯해요.

루쉰P 2012-01-17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은 글이라 이렇게 정체를 드러내고 댓글을 쓸 수 밖에 없군요. 페크님이 써 준 글은 왜 내가 소설을 읽는가에 대한 답도 되는 거 같아요. 예전에는 소설에서 답을 찾으려고 독서를 했던 것 같아요. ㅋㅋ 마치 시험 보듯이 말이에요. 근데 그게 아니라 내 시각은 편안히 내려놓고 작가의 시선을 부드럽게 즐길 수 있는 것이 독서이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요. 그와 나의 사상의 접점을 찾아보기도 하구요. ㅋㅋㅋ 제가 고전이라 위대한 작가라 할 지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저보다 몇 십배 높은 시각에서 바라보기 때문은 아닐지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하 페크님 글 너무 좋아 좋아 ㅋ

페크pek0501 2012-01-18 13:09   좋아요 0 | URL

늘 호의적으로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런 글은 저 같은 사람들이 좋아하죠. 문학의 '문'자만 들어가도 좋은 사람들... 문학에 대해 논하는 글은 무조건 좋아하는 사람들...
그래서 한때 문학이론서를 수십 권 읽었어요. 재밌었어요.

문학의 '문' 자만 들어가도 좋은 사람들 중엔 우리 루쉰님도 포함될 듯해요.ㅋㅋ

프레이야 2012-01-17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페이퍼가 너무 좋아 한참 머물게 되어요.
작가적인 눈으로 세상 보기,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네요. 세상의 비밀을 볼 수 있는 눈, 저도 갇혀있지 않은 눈이어야겠어요.
전 김영갑 사진 작가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보고도 이와 비슷한 걸 느꼈어요.
제주 사람은 여기 뭐 찍을 게 있다고..라고 눈만 뜨면 카메라를 들고 들판을 다니는
그에게 핀잔과 염려를 줬지만 그 풍광 속 비경을 엿보고 영원히 담은 그는 그 대가로
루게릭을 얻었을까요?
위에 쓰신 박완서님이 수필도 참 좋습니다.^^

페크pek0501 2012-01-18 13:07   좋아요 0 | URL
반가운 프레이야님.
닉네임이 참 좋습니다. 프레이야, 라고 발음하는 순간, 상큼한 향기가 풍겨져 나오는 느낌이에요. (여신인가요?)

지난번 님의 좋은 글을 저도 잘 읽었답니다.

다음엔, 프레이야님의 서재에서 뵙겠습니다. ㅋㅋ

프레이야 2012-01-18 22:56   좋아요 0 | URL
호호~ 좋은 느낌을 주는 이름이라 저도 기분 좋아요.^^
그 닉은 사실 예전 것에서 바꾼 것인데 여기 알라디너 한 분이 주신
이름이에요. 북구의 여신 이름이랍니다. ^^

페크pek0501 2012-01-19 13:25   좋아요 0 | URL
여신의 이름이 맞군요. ㅋ

또 뵈요, 프레이야님... 상큼한 향기가 나는...ㅋ

oren 2012-01-18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k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마치 최근에 나온 '어느 신간의 일부분'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ㅎㅎ

다소 엉뚱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한편으로는 '작가적인 눈'은 곧 '어린아이의 눈'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결국 (다른 숱한 책에서도 지적했듯이) 시인이나 작가 혹은 예술가들은 '어린아이의 눈'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반면, 작가가 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눈'을 잃어버리고 난 뒤에 (쇼펜하우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척 사나운' 세상과 마주치며, 결국 '삶의 난동'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 * *

"사람의 두뇌는 일곱 살쯤 되면 상당히 커지며, 지능도 그 무렵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외부 세계를 인식하려고 한다. 인식의 대상인 외부 세계는 매우 신선한 느낌을 준다. 모든 것이 생기발랄해 보이기 때문에 유년시절은 그대로 하나의 아름다운 서사시가 된다. 사실 모든 시와 예술의 본질은 플라톤이 말한 바와 같이 이데아(사물의 실체)를 붙잡는 일, 다시 말해서 개체를 통하여 보편적인 것을 직관하는 일이다"

"또한 유년시절의 환경과 체험이 언제나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 무렵에는 외부 세계가 선명하게 드러나 하나하나의 사물이 대표적으로 보이며, 직관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유년시절에는 환경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눈앞에 나타나는 사물을 그 종류 가운데서 유익한 실재로 인식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인식보다는 의지의 힘에 의해 움직이므로 외부의 사물은 대부분 고뇌를 안겨 준다. 요컨대 모든 사물은 인식의 눈으로 보면 매우 선량하고 아름답지만, 의지의 눈으로 보면 무척 사나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후자보다는 전자의 편에 속하는 것이 유년시절의 특징이다.

이 무렵의 인간은 사물의 아름다운 일면만을 알고 두려운 점을 모르며, 우리 자각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에 순수한 그 사물 자체 또는 예술에 묘사된 것과 흡사하여 매우 선량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므로 온 세계가 에덴동산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누구나 한 번쯤은 으레 행운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절을 벗어나면 차츰 인식보다 의지가 생활의 중심이 되어 생활의 대상으로서 선과 미를 의욕의 대상으로 삼는다. 즉, 사물과 의지의 여러 가지 반작용이 일어나 괴로운 운명에 시달리면서 '삶의 난동' 속에 빠져 들어간다."


페크pek0501 2012-01-18 13:0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그래서 "시심은 동심"이란 말이 있나봐요. 사물을 처음 보는 눈으로 낯설게 볼 때 예술작품이 탄생한대요.

우리 아이가 어릴 때 하늘에 떠 있는 반달을 보고, 엄마 누가 저렇게 높이 올라가서 반달을 접었지?, 하더라고요. 그때 한참 종이접기 하고 놀 때인데 달마저도 누가 반으로 종이접기한 걸로 알더라고요. 그게 시심이고 동심인 것 같아요. ㅋㅋ 그런 시각은 이미 어른들은 힘들죠. 예술가들에겐 가능하겠지만...

좋은 글, 천천히 읽으며 감상했어요.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2-01-18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 언니, 항상 감탄하며 읽는 글들입니다.

적절하게 사회성에 적응하면서도,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지나치게 새로운 눈만 추구한다는 것 역시 위험하니까요.
그렇다고 지나치게 안주하는 것 역시... 균형이 역시 문제구나 싶어집니다.

최근 들어, 자신 내면으로만 파고들어
사회나 타인에 대한 배려나 공감, 이해를 못 하여 자신 또한 고생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고 있기에 더욱 생각이 많습니다...

페크pek0501 2012-01-18 20:3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새로운 눈만 추구해도 역시 인간은 기존의 눈으로 봐 왔던 것을 완전히 버리지 못할 것이므로, 그냥 새로운 시각의 추구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해요. 저 역시 말은 이렇게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에요.

마녀고양이님은 이 방면으로 생각을(공부를)많이 해 보신 듯해요. 균형, 공감, 이해 등 사용하시는 낱말만 봐도 알 수 있지요. ㅋㅋ


아이리시스 2012-01-18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것도 말하기 힘든 게 보통 사람인데 소설가나 예술가들은 창조하고 비틀기까지 하니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어요. 여러 텍스트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페크님의 페이퍼도요.

1월 시작이 어제인데 벌써 절반이 지나갔잖아요. 저도 독서에 좀 열올려야 이런 글 쓸 수 있을까요? 책 읽는 시간은 사치 같으면서 TV는 잘도 보고 앉아있어요. 이런ㅠㅠㅠㅠㅠㅠㅠㅠ

페크pek0501 2012-01-18 20:5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창조와 비틀기, 어려운 일이지요.
소설의 경우 에둘러 쓰는 일이라 저처럼 직설화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직설화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칼럼을 써야 하죠.

독서? 늘 하고 계시잖아요. 영화도 꽤 챙겨 보시는 것 보고 놀랐어요. 충분히 잘하고 계십니다요... ㅋㅋㅠㅠㅠㅠㅠ

마태우스 2012-01-18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은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돋보일 수밖에 없다는 걸 님의 글과 댓글들을 보면서 재확인합니다. 책으로 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추천합니다. 21번째예요. ^^

페크pek0501 2012-01-19 13:24   좋아요 0 | URL
책으로 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셨다고요? 호호~~~ 일단 감사합니다.

음~~ 책, 내고 싶죠. 그런데 글이 아직 멀었으니 이러고 있어요. 글을 119편을 올렸는데, 글을 그 정도로 써 본 사람이면 자신의 역량을 자신이 가장 잘 알게 되죠. 아무리 주위에서 호평을 해도 흔들리지 않아요. 저는 앞으로 더 많이 깨지고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써야 해요. 갈 길 멀어요.

그래도 생각은 죽기 전에 한 권은 내겠지, 하고 있어요. 이렇게 미래에 책을 낸다고 생각하고 살면 마음이 풍성해지고 삶도 풍성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제게 힘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히히~~

신지 2012-01-21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은 절제되고 정돈된 글을 쓰시면서 좋은 생각을 정확하고 쉽게 전달하시는 것 같아요. 큰 장점인 듯 해요.

그러고보니 지난번에 인사했을 때가 명절 때(추석 때인가..)였던 것 같네요. 이번에도 집에 다녀오기 전에 들렀습니다. 명절 잘 보내시고, 새해 좋은 일만 있으시길 바랍니다. ^^^

페크pek0501 2012-01-24 00:58   좋아요 0 | URL
어머낫, 이게 누구신가요? 오랜만에 보는 닉네임, 오래만에 보는 이미지 사진이네요. 무척 반갑습니다.

답글이 늦어 미안합니다. 3일 전에 대구에 갔다가 오늘밤 늦게 돌아왔어요.

추석 때라면 으음~~ 넉달 동안 잠적하신 셈이네요. 서재활동을 중단하셨나, 했어요.ㅋ 어쨌든 컴백?하신 것 같아 반가워요.

신지님도 새해 좋은 일만 있으시길 바랍니다. ^^^ 또 뵙기를...

순오기 2012-01-27 0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을 읽으면 생각쓰기라는 게 어떤 건지 실감이 됩니다.
'책은 도끼다'를 제목으로 삼은 박웅현이 인용한 카프카의 글을 여기서 또 만나는군요.^^
꼴찌에게 갈채를 보낼 줄 아는 마음결을 나도 갖고 싶어요.

페크pek0501 2012-01-28 12:54   좋아요 0 | URL
아, 언제나 반가운 순오기님.

카프카의 글, 유명하죠. 저도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인용한 적이 있는 글이에요. 책은 도끼다, 를 읽어셨군요. 저는 못 읽었어요. 평은 좋던데...

참, 출연은 어떻게 되셨나요? 꼭 글로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가서 볼게요.ㅋㅋ

순오기님에 비하면 난 너무 게이름뱅이... 이 게으름뱅이가 오늘은 새 글을 올릴 거예요. 후~후~
 

 

1. 시간 : 벌써 2012년 1월로 넘어섰다. 새 달력을 걸었고 나이 한 살 더 먹었다. 가끔 흘러가는 시간이 두렵다. 앞으로 시간이 바퀴가 달린 듯 빠르게 달려가서 어느 새 내가 폭삭 늙어 버릴 것 같아서.

 

 

 

2. 친구 : 그래도 다행이다. 나만 늙는다면 억울할 것을, 같이 늙어갈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들을 보며 위안 삼는다. 내 늙음의 서글픔을 친구들 말고 누가 알아줄 것인가. 부모님에겐 자식의 도리로써 늙음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고, 남편에겐 부질없는 어리광이 될 것 같아 말할 수 없고, 자식들에겐 내 마음을 공감하기 어려울 터이니 말할 수 없고. 결국 친구들에게만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은 내 마음을 알아줄 터였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나 보다. 친구 없는 사람이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고. 같은 시대를 같은 나이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3. 올해의 독서 계획 : 어느 서재인님의 서재에 들어갔더니 자신이 일 년 동안 읽은 책의 권수를 적어 놓은 글이 있었다. 그 서재인님은 남들이 일 년 동안 읽을 책을 한 달에 읽는 듯했다. 그만큼 많은 양의 책을 읽고 리뷰를 올린 분이다. 그 성실성에 저절로 존경심이 생겨 댓글을 남기고 왔다.

 

 

나도 한때는 다독을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나는 다독의 즐거움을 포기한 지 오래다. 다독을 하려면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한 것 같다. 첫째,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 책을 많이 읽으려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하며 시간 관리를 잘 해야 한다. 시간이란 관리를 소홀히 하면 그냥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 나가는 모래알과 같기 때문이다. 둘째, 몸이 건강해야 한다는 것. 책을 많이 읽어도 병이 나질 않아야 하므로 몸의 건강은 필수다.

 

 

그런데 나는 그 두 가지 조건에서 실격이다. 우선 부지런하지 않다. 아니 부지런하기가 싫다. 일 년 전만 해도 아주 바쁘게 살았는데, 그 바쁜 일들을 정리하고 난 지금의 생활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 이제 그 생활로 되돌아가서 살게 된다면 살지 못할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생활이 마냥 한가롭기만 한 건 아니다. 지금도 바쁘긴 마찬가지라는 생각마저 든다. 책을 읽으려고 마음먹지 않으면 하루가 그냥 지나가 버릴 정도다. 그리고 몸에 탈이 잘 난다. 어느 날 하루에 책 한 권을 다 읽었더니 병이 났다. 내가 지금 공부하다가 병이 날 나이는 아니다. 고시생도 아니고.

 

 

그래서 결심했다. 이젠 한 달에 4권의 책을 읽고 4편의 글을 쓰기로 하고 무리하지 않기로.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므로.

 

 

 

4. 기억해 두고 싶은 글 : 애덤 스미스 저, <도덕감정론>에서 좋은 글을 발견하여 그것을 인용해서 쓴 글을 서재에 올린 적이 있다. 바로 이 글을 인용했다.

 

 

“도둑놈이 어떤 부잣집의 물건을 훔치는 경우, 그는 부자는 이 물건이 없더라도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비록 도둑을 맞더라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어떤 악(惡)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간부(姦夫)가 자기 친구의 처(妻)를 유혹해서 간통을 하려는 경우, 그가 자신의 음모를 감추어 그 남편의 의혹만 사지 않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가정의 평화만 깨뜨리지 않는다면, 자신은 어떤 악(惡)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이처럼 교묘하게 꾸며낸 생각들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행하지 못할 정도로 흉악한 범죄행위는 하나도 없게 된다.” - 애덤 스미스 저, <도덕감정론>, 327쪽.

 

 

참 탁월한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교묘하게 꾸며낸 생각들’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못할 일이 하나도 없게 된다는 뜻이겠다. 이 글이 좋은 까닭은 이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앞으로 자신을 성찰할 시간을 갖게 될 것 같아서다. 예를 들면 친구의 단점에 대해 충고를 할 경우, 충고하는 사람이 자신이 ‘교묘하게 꾸며낸 생각들’에 굴복한 것인지를 성찰하게 될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충고를 하는 건 다 너를 위해서야.’하면서 상대방의 단점을 상처 받을 정도로 마구 늘어놓고서, ‘아픈 만큼 성숙해질 테니 나는 친구를 위해 좋은 일을 한 것이고 어떤 악도 행하고 있는 게 아니다’라고 여기는 것을 경계하게 될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참 좋은 글을 썼다. 꼭 기억해 두고 싶은 글이다.

 

 

 

5. 나쁜 댓글 : 나도 악성 댓글을 받아 봤다. 이런 댓글은 방문자 수가 많은, 인기 있는 파워블로거만 받는 걸로 알았다. 악성 댓글이 달렸다는 건 곧 그 글쓴이가 사람들로부터 주목 받고 있음을 말하는 게 아니던가. 그런데 방문자 수가 많지 않은, 별로 인기도 없는 내 서재에서 악성 댓글이 출현한 것은 좀 어이없었다. 당황스러웠다. 그 분에 대한 예의상 그 댓글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겠고, 내 글이 말이 안 된다는 내용의 댓글이었다고만 밝히겠다. 그런데 나는 그 댓글에서 그가 말하지 않은 메시지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가 말하지 않았지만 내게 전달된 메시지는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당신의 글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았다. 다음부턴 이런 글 따위는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상대가 비밀 댓글로 썼으므로 나도 비밀 댓글로 이런 답글을 달았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셨군요. 잘 알겠습니다. 제 글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내가 쓰고 싶은 답글은 이런 게 아니었다. 사실은 요렇게 쓰고 싶은 충동을 잠시 느꼈다.

 

 

‘제 글이 못마땅하신 모양인데, 저 같으면 그런 글이 있는 서재에 다시는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아요. 웬 관심이십니까?’

 

 

요렇게 썼다는 게 절대 아니다. 충동을 느꼈을 뿐이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정도의 댓글은 악성 댓글이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악성의 정도가 약하고 또 예의를 갖추고 쓴 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내 기분을 상하게 할 목적이 아니고 진심으로 내가 잘못 쓴 부분을 지적해서 내가 앞으로 신중하게 글을 쓰길 바라는 목적으로 썼을 것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만약 그렇다면 감사해야 할 일이다. 또 하나 감사할 일은 그 댓글을 공개하지 않고 비밀 댓글로 남긴 점이다. 나를 악의로 공격하고 싶었다면 비밀 댓글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여러 서재를 다니면서 악의적인 악성 댓글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예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글쓴이가 불쾌감과 모욕감을 느낄 만한 글이었다. 이럴 때 나는 궁금하다. 악성 댓글을 쓰는 사람이 그런 글을 쓰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지, 또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러고도 어떻게 삶을 살 수 있는지.

 

 

 

6. 좋은 댓글 : 내 글에 가장 찬사를 보내 준 댓글이 있다.

 

 

‘역시 보통 분이 아니다 싶었는데, 이런 대단한 글을 써 주시네요. 어느 정도 내공이 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요?’라고 쓴 아무개님의 비밀 댓글이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글을 쓰고 싶었다. 물론 장난삼아서다.

 

 

‘역시 탁월한 분은 탁월한 글을 알아보시네요.’라고.

 

 

그런데 이렇게 쓰면 얼마나 재수 없고 밥맛 떨어지겠는가. 그래서 다음과 같이 답글을 썼다.

 

 

‘과찬이십니다. 고맙습니다.’라고.

 

 

 

7. 언젠가는 알게 된다 :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어리석은 존재라고 말하겠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무지해서 착각을 잘 하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본다.

 

 

하지만 사람은 언젠가는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다고 믿는다. 그 당시엔 알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젠가는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알게 된다. 또 그 당시엔 알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젠가는 자신이 어느 정도로 못났는지도 알게 된다. 내가 경험함으로써 안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인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어떤 착각을 한다고 해도 안심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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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07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페크 언니는 참!
나 같으면 정말 언니가 써 주고 싶었던 그대로 썼을 것 같아요.
그렇게 싫으면 안 보면 되는 거지 꾸역꾸역 보고 그런 댓글을 달 건 뭐란 말입니까?
비단 그 사람만이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정말 이 비판하고 단죄하는 게 좀 사라져야 하는데 언제쯤 가능할런지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니 저도 좀 찔리네요. 어디가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ㅜ

페크pek0501 2012-01-08 20:04   좋아요 0 | URL
에그에그... 제가 보기엔 스텔라님도 마음 약해서 세게 못 나가실 것 같은데요.

으음~~, 저도 어디선가 이상한? 댓글을 쓰고 있을지 몰라요. ㅋㅋ

숲노래 2012-01-08 0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들 스스로 얼마나 좋은 삶과 목숨인가를 느낀다면 참으로 기쁘겠어요..

페크pek0501 2012-01-08 20:04   좋아요 0 | URL
예, 이 추운 날 따뜻하게 지내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 갖겠슴다. ^^

그리고 된장님의 댓글 매일 달기 계획을 저도 따라하겠어요. 호호...

숲노래 2012-01-09 02:24   좋아요 0 | URL
네, 참말 따스한 날씨는
고마운 축복이에요.

페크pek0501 2012-01-09 13:27   좋아요 0 | URL
된장님의 또 다른 닉네임은 따스함이세요, 따스함님.ㅋㅋ

이진 2012-01-08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페크님의 글을 못마땅하다고 하였단 말입니까...
저는볼때마다 감탄을 내뱉는걸요.
그 증거로 매달 이달의 당선작에도 당선되시지 않습니까 ㅋㅋ
페크님도 인기블로거시라니깐요~

페크pek0501 2012-01-09 13:26   좋아요 0 | URL
와우, 제가 인~기~블~로~거? 란 말입니까? 푸하하~~~
이러면 또 소이진님이 좋아지잖아요. 아휴~~~

듣기만 해도 좋습니다. 인기라는 게 거품과도 같이 쓸데없는 것이긴 하지만 인간이란 그렇게 무의미한 것에서 의미를 찾는 존재니까요.

그런데 제가 인기가 있다한들(있다고 치고) 소이진님의 인기만 하겠습니까? 모두들 님을 아주 좋아하시던데요.
(아, 남들이 보면 우리 둘이 '놀고 있네' 하겠네요.ㅋㅋ)그만 해야지... 반가웠어요. 또 봐요. 새 글 올리시면 당장 달려가서 흔적을 남기겠음...ㅋ

잘잘라 2012-01-09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께 나이 먹어가는 친구가 있다는게 새삼 든든하게 느껴져요^^ 1,2,3,4,5,6,7. 일곱 번 웃고 일곱 번 공감하고 일곱 번 추천.. 추천은 한번만 하고 갑니당~ ^^

페크pek0501 2012-01-09 13:28   좋아요 0 | URL
아, 일곱 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엔 몰랐어요.
제가 쓴 글이 7번까지 있네요. 히죽~ 웃었음.

일곱 번 웃으셨다니 감사해요. 늘 재밌는 글 쓰고 싶지만 그게 안 되죠. ㅋㅋ
그러나 언젠가는 재밌는 글, 꼭 쓰고 말 거예요. 다음의 새 글이 궁금해질 만큼 재밌는 글을요.

프레이야 2012-01-09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분차분 하나씩 '나'와 '우리'를 생각하며 읽었어요.
새해 정말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또 하게 되네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렵지도 않겠지요.
첫인사 새해인사와 더불어 드립니다. 좋은 글 자주 뵈어요^^
새해 복 담뿍 받으세요.~~

페크pek0501 2012-01-10 14:00   좋아요 0 | URL
첫인사, 고맙습니다, 환영합니다. 많인 본 닉네임이라 낯설지 않네요. ㅋ
이 변변치 못한 글에 댓글 남겨 주시니 황송하네요.

저도 글을 많이 써서 유능해 보고 싶은데, 사람마다 능력의 크기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유능하지 못해서인지 유능한 사람을 좋아해요. 예를 들면 서재의 달인이 되신 분들... 크하하~~

4년 연속 서재의 달인님께서 오셔서 영광으로 생각한답니다. 또 뵈요!!!!!!

아이리시스 2012-01-10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진짜 싫으면 물러가라고 공개글로 댓글을 함 달아볼까ㅋㅋㅋ 생각해봐요. 그 정도는 돼야 장인정신ㅋㅋㅋ 인정을 하죠. 다들 책을 그만 사겠다는데 심지어 저는 사고싶은 책 참지말고 그때그때 사자, 이렇게 다이어리에 적어놨다니까요ㅋㅋㅋ

친구가 좋긴 한가봐요. 나이 들수록 자식도 남편도 저 멀리멀리 호호호.

페크pek0501 2012-01-11 14:06   좋아요 0 | URL
남편들은 여자들이 늙었다고 하면 공감 못해요. 저희 부부는 동갑인데, 여자들은 사오십대를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반면 남자들은 자신이 한창때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얘기가 안 되죠. 또 부엌일의 피로감도 공감 못해요. 이럴 땐 친구들이 제일이죠.

그렇지만 아이님은 꼭 결혼하시기 바랍니다. 남편이 있다는 것은 영원한 내 편이 한 명 있다는 것이거든요. 만약 친구와 싸웠다면 남편은 아내 편을 들어줄 겁니다. 또 친정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가장 큰 위로를 해 줄 사람도 남편이랍니다. 친구는 멀리 있어서 도움을 요청할 때만 위로해 줄 수밖에 없어요. 육체가 멀리 있다는 건 마음도 멀리 있는 거예요.

서로의 인생을 죽는 날까지 책임져 주는 부부의 관계가 멋지지 않나요?(어, 쓰고 보니 결혼 예찬론자가 되었네.ㅋ)제 딸들도 꼭 결혼시킬 거예요. 참고하시길... 앞으로 물어 볼 일이 있으면 물어 보세요. 이 부분에선 해 줄 말이 많습니다. ㅋ

아, 중요한 한 가지, 여자를 구속하는 남자보단 여자에게 자유를 주는 남자가 남편감으로 좋습니다. 또 여자를 이기는 것에 관심 없는 남자가 좋아요. 호호~~

마녀고양이 2012-01-10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처음에 누군가가 <인기 블로거>라고 해서 너무 당황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타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걸까 아니면 그냥 인사치례일까 하구요.
그담에 어떤 서재에 처음으로 놀러갔는데, "아니 마녀고양이님이 이런 곳에" 라고
하신 분께 다시 한번 당황했구요..... 물론 그분들은 선의셨습니다, 감사하기도 했어요.

제가 서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사람마다 악성 댓글의 정의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당연히
잘못은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그대로 행하십니다. 그걸 악성이라 생각하지 않으시지요. 그런데 그걸 받는 사람은, 그 글의 형식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뉘앙스가 다르거든요. 재미있는 것은, 악성 댓글 또는 비난이나 힐난성의 댓글을 달았던 분의 서재에 비슷하게 댓글을 달면, 달았던 분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기분나빠하고 상처받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받는 입장의 악성 댓글은 비슷하고,
쓰는 입장의 악성 댓글은 다른거 같아요... 제 생각에는 비판은 해도 좋으나
예의는 지켜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용이 옳다 해서 형식을 아무렇게나 취해도 되는건 아닌거 같아요. 결국 상처받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

그러니 말은, 아무쪼록 예쁘게 하고 사는게 제일 좋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페크 언니, 제가 말을 예쁘게 하나요? 네?

페크pek0501 2012-01-11 14:09   좋아요 0 | URL
예, 예쁘게 하십니다. ㅋㅋ 저도 동감이에요. 잘못된 글을 지적할 땐 예의를 갖추면 좋겠고 그리고 비밀 댓글로 해 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말 맞습니다. 악성 댓글 다는 입장에선 의도가 다를 수 있으나 상대편의 기분은 똑같이 나쁜 것.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 특징이 있어서... 다시 말해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관대해서 자신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해서요. - 마고님의 좋은 관찰력이었음.ㅋ

아, 마녀고양이님은 인기 블로거 맞습니다. 저도 처음에 저의 서재에 방문하실 때 같은 느낌이었어요. 인기 블로거가 이런 데 오시다니... 그런 느낌?...ㅋㅋ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하루의 방문자가 백 명 넘으면 인기블로거라 생각해도 될 것 같은데요. (저는 며칠 합쳐야 백 명 된다는...크크)

순오기 2012-01-12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달 4권, 4편의 리뷰~~~~ 많은 게 꼭 좋은 건 아니니까요.^^
님의 글은 항상 저를 돌아보게 합니다~~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12-01-13 13:03   좋아요 0 | URL
반가운 순오기님, 고맙다니요.ㅋㅋ
순오기님이 늘 인기 블로거로서 그 자리에 계신다면 저야말로 고맙겠습니다.
저도 늦지 않았다는 희망을 얻으니까요. 늘 그 모습으로 계세요. 늘 지금처럼... ㅋ

저도 글을 쓰면서 저를 많이 돌아보게 됩니다. 글쓰기는 마음의 점검이지요.


노이에자이트 2012-01-14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나이면 남자보다 여자가 더 일찍 늙는다고 의사들도 말하더군요. 어떤 여자의 블로그 글에 "이제 나이를 먹고 늙으니 운운" 하는 내용이 많아서 저는 그 여인이 최소한 50은 넘었고 혹시 60대인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는데 알고 봤더니 이제 사십대 초반이더라고요.사십대 후반이나 오십대에 접어든 여인이라면 사십대 초반이 그런 소리한다고 언짢아 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여자는 사십줄에 접어들면 이제 늙었구나 하고 푸념하는 사람이 꽤 많다고 해요.

페크pek0501 2012-01-15 12:52   좋아요 0 | URL
ㅋㅋ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미모를 많이 따지고, 그 미모가 젊음과 직결된 문제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흰머리만 해도 남자들은 멋있거든요.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 대학교수님들, 멋있잖아요. 그런데 흰머리 있는 여자에게서 멋을 느껴 본 적이 없어요.(안타깝게도...ㅋ)물론 염색약이 있긴 하지만요...

남자분들은 좋으시겠어요? ㅋ

노이에자이트 2012-01-15 16:02   좋아요 0 | URL
그런데 남자들도 30대 중반 넘으면 배 나오고 목소리도 변하기 시작하죠.옷으로도 망가진 몸매를 못감추는 거죠.바지가 계속 내려간다든가, 엉덩이가 펑퍼짐해진다든가 합니다.

남자 목욕탕 가보면 배는 불룩 나오고 상체와 사지가 빈약한 몸매가 많아요.

제가 아는 사람들은 교수나 그런 직업을 가진 이는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요즘은 남자도 외모를 가꾼다지만 그래도 남자는 여자만큼은 외모에 집착하지 않는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2-01-16 16:40   좋아요 0 | URL
늙음에서 체형은 생각 못 했네요. 우리 남편은 결혼 전이나 지금이나 체중이 같아서요. 저도 그렇고요. 살이 안 찌는 체질들이라서...ㅋ


2012-01-18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19 1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