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칼럼> 삼각관계에 놓인 연인들의 사랑


유부남이 서로 사랑한다고 느끼는 딴 여자와 함께 있다가 아내에게 들켰다면 그 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여러 경우가 있을 것이다. 첫째, 이왕 이렇게 된 것, 아내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노라고 고백하고 이혼한 뒤 딴 여자를 택한다. 둘째,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내에게 잘못을 빌고 딴 여자와의 관계를 청산한다. 셋째, 아내에겐 딴 여자와의 관계를 끝냈다고 말하고 여전히 만나고 다닌다.


자신이 만나고 있는 연인이 어떤 상황에 놓인다고 가정할 때 그 연인이 취할 태도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연인을 깊이 이해한 것이 된다. 반대로 “당신이 그럴 줄 몰랐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면 그 상대를 깊이 이해한 게 아니다. 사람은 타인을 얼마나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얼마 전에 아침드라마(‘미쓰 아줌마’)를 보게 되었는데, 한 가정에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가, 남편이 여자후배와 방 안에서 단 둘이 다정하게 있는 것을 본 것이다. 남편과 여자후배는 회사에서 함께 근무하며 연애를 하던 사이였다. 또 아내와 여자후배는 서로 아는 사이이기도 하다.


남자는 여자후배와 사랑에 빠진 듯 달콤한 키스를 하기도 하는데, 아내에게 둘의 관계를 들키자 당황하며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다. 여자후배를 급히 내쫓아 집 밖으로 내보냈으며 어떻게든 아내의 마음을 달래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다. 그렇게 쫓겨난 여자후배는 당연히 기분이 나빴다. 그 일로 충격을 받은 아내는 가방을 챙겨 가출한다. 남자는 여자후배에게 전화하여 혹시 가출한 아내가 거기에 가지 않았는지를 묻고, 여자후배는 자기를 걱정해서 전화한 게 아니라 마누라 걱정 때문에 전화한 남자에 대해 잔뜩 화가 난다. 분하고 불쾌하기까지 해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마저 생긴다.


여기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세 사람들이 착각하는 모습이다. 아내는 다른 남편들이 모두 바람을 피운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남편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게 착각임을 알았고, 여자후배는 아무리 그의 아내에게 들켰다고 할지라도 남자가 백팔십도로 변해서 자신을 집에서 내쫓을 줄 몰랐으며, 또 남자는 미혼시절 아내에 대해 자신이 가졌던 열정적인 사랑이 지금은 변했음을 간과하고 그 여자후배와의 사랑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결국 그 부부는 이혼을 하고 남자는 여자후배와 결혼하기로 한다).


연인이 서로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의 의미에 대해 서로 얘기해 볼 필요가 있다. 혹시 남자가 느끼는 사랑과 여자가 느끼는 사랑의 의미가 다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별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같은 성별일지라도 사람에 따라 다르기도 할 것이다.


사랑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 사랑이란 함께 있고 싶은 것에 대한 열망과 그리움일 수도 있고, 그 상대를 위해 뭐든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일 수도 있다. 그 누구를 사랑할 경우, 그 상대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랑은 전자보다 후자에 가깝다. 만약 상대를 행복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불행하게 만드는 사랑이라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마치 독약이 든 사랑과 같다. 이런 사랑을 받는 것은 누구나 반갑지 않을 것이다.

후자의 사랑처럼 상대를 위해 뭐든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이 드라마에서 남자와 여자후배는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라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우선 여자후배는 아내에게 들켜서 마음의 지옥으로 떨어져 버린 그 남자의 마음을 헤아려서 따뜻한 위로를 해 주어야 그게 사랑이 아닐까. 남자는 이런 곤란한 상황에 있게 한 여자후배에게 미안해 하고 내쫓김을 당하게 만든 일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해야 그게 사랑이 아닐까. 그런데 두 사람은 아내에게 들킨 그 사건 직후, 마치 그동안은 달콤한 꿈의 세계에서만 연애를 하다가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듯 이기적인 인간으로 변신하고 만다. 남자는 행여 가정이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여자후배는 자신의 상한 기분만 생각한다. 서로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고 자신의 입장만 중요한 것이다. 이런 감정과 생각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서영은 저, <먼 그대>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여주인공은 일요일마다 방문하는 유부남을 기다린다. 둘 사이에서 딸을 낳았으나 그의 아내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녀는 그 남자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나 조금도 남자를 원망하지 않는다.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남자에게 자기가 직장에서 받은 월급을 모조리 털어 주고, 거기다가 모자라면 빚까지 얻어다 준다. 어느 날 남자는 물주를 만나겠다며 그녀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한다. 그녀는 이모에게서 그 돈을 구해 남자에게 준다. 남자는 돈을 받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녀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본다. 그녀의 사랑법은 그랬다.


“사랑은 그것이 희생일 때 이외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에 적합하지 않다(R. 롤랑).”는 말처럼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은 ‘희생’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을 눈에 보이는 효과로 판단한다면 우정보다는 증오에 더 가깝게 보인다(라로슈푸코).”는 말에 공감할 것 같다. 사랑을 하면 무조건 아낌없이 주는 태도를 갖기보다, 자신이 준 사랑에 비해 돌아오는 사랑이 작다고 생각되면 우선 화부터 나고 분노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화가 많이 나면 날수록 더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마치 부모를 사랑하듯, 자식을 사랑하듯, 형제를 사랑하듯, 연인을 또는 배우자를 사랑해야 해야 한다. <먼 그대>라는 소설 속의 그녀처럼 말이다. 만약 그녀와 같은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한쪽 배우자가 어떤 이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는 달콤한 연애로 행복해 하기보다 그 삼각관계에 괴로워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다른 한쪽 배우자 역시 분노를 느끼기보다 그런 괴로운 사랑에 빠진 배우자에게 연민을 느껴야 마땅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배우자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그런 괴로운 사랑을 하게 되다니…, 가엾군요.”라고.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랑이란 <먼 그대>라는 소설 속의 그녀가 가진 희생적인 깊은 사랑이 아니라 다소 이기적이라고 할 만한 얕은 사랑일 듯싶다. 사랑이란 상대를 위한 사랑이기보다 자기를 위한 사랑에 지나지 않아서, 다만 그와 함께 있고 싶은 감정이, 그를 소유하고 싶은 생각이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모든 유형의 기본이 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사랑은 '형제애'라고 말했듯이, 모든 남녀관계에서의 사랑은 형제애로써 ‘정’의 탑을 둘이 쌓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정을 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처음엔 설렘과 그리움으로 연애를 시작하지만 시간에 따라 그런 뜨거운 감정은 퇴색한다. 그 대신 함께 있는 시간이 만드는 ‘정’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쌓는 ‘정’의 탑이 얼마나 견고한 것인지가 관건이 된다. 서로 아끼면서 배려해 주는 횟수가 많을 때 그 탑은 튼튼할 것이고, 싸우는 일이 잦아져서 정떨어지는 횟수가 많을 때 그 탑은 허물어질 것이다. 그 탑이 허물어질 때 연인은 이별을 하고 부부는 이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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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그들은 사랑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1.


언제나 상대를 조금은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것, 이것이 끊임없는 갈망이 되어 행복한 사랑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 의심은 언제나 사라지지 않으며, 절대 지루해지는 법도 없다. 또한 매우 열중하게 되는 것도 특징이다.

- 스탕달 저, <스탕달 연애론 에세이 Love>에서.


스탕달에 의하면, 서로를 믿는 안전한 사랑보다 의심하는 불안정한 사랑이 사랑을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  
 
2.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랑은 그때그때 상대의 물음에 응답하려는 의지입니다. 사랑의 모습은 변합니다. 행복해지는 것이 사랑의 목적이 아닙니다. 사랑이 식을 것을 처음부터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부부에게는 부모 자식 같은 혈연관계가 없습니다. 원래는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이 세상을 떠나면 비탄에 잠기고 상대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모습을 바꾸면서 서로 속에 존재하고 그렇게 쌓인 것이 자기 인생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따라서 사랑이 성취되었는지 어떤지는 인생이 끝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 강상중 저, <고민하는 힘>에서.


 강상중 저자에 의하면, 사랑은 언제나 진행형이어서 사랑에 대해 뭐라고 단정할 수 없다. 죽음이 둘 사이를 갈라놓을 때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3.


만약 내가 한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세계를 사랑하고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당신을 통해서 세계를 사랑하며, 당신을 통해서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에리히 프롬 저, <사랑의 기술>에서.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 이외에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때, 그것이 그들 사랑의 강렬함의 증거라고까지 믿고 있는데 이것은 오류이며,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료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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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한 책들>


서영은 저, <먼 그대>

스탕달 저, <스탕달 연애론 에세이 Love>

강상중 저, <고민하는 힘>

에리히 프롬 저, <사랑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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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관계에 관한 것으로 어떤 책이 있나>


조너선 프랜즌 저, <자유> : 이 소설은 남편을 배신하고 남편의 오랜 친구와 부정한 관계를 맺는 주인공 패티의 이야기다.



'자유'는 가장 통속적이며 그래서 가장 본질적인 인간관계를 다룬다. 배우자의 배신과 불륜, 그리고 용서. 남편 월터를 배신하고 남편의 오랜 친구 리처드와 부정한 관계를 맺을 때 주인공 패티는 결코 어떤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덧없는 욕망에 단단히 붙들린 패배자에 불과함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욕망의 대상을 향해 돌진할 자유가 없다면 자신의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느낄 뿐이었다. 왜곡된 자유에 대한 대가는 혹독했다. 결혼은 붕괴됐고 패티는 자신이 냉소해 온 월터와의 관계가 사실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굳건하고 핵심적인 요소였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자유와 책임의 관계를 묻는 가장 이지적이며 설득력 있는 장편.   

- 조선일보(2011. 6. 20.)에서


 참고로, 조너선 프랜즌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매우 좋아하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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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6-28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네요~~~~
내 남편만은~~~~~ 이런 착각은 하지 않고 살려면,
집에 들어오면 내 남자, 집 밖에 나가면 남의 남자라고 생각하라든가요.^^
추천해주신 책 살펴볼게요~~ 고마워요!!

페크pek0501 2011-06-28 23:2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추천은 제가 더 신세를 지고 있는 걸요.^^^

otillia95 2011-08-05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쌤 저 혜원이요 ^^ ㅠㅠ 넘 늦게 왔네요 ㅎㅎ 딴애들이랑은 연락하세요~^^
음,,, 내용이 어려워서,,,ㅋㅋ 걍 잠깐 왔다가 가요~
이멜로 답장 주세요^^

페크pek0501 2011-08-07 23:37   좋아요 0 | URL
와우, 반가워라. 김혜원이군.ㅋㅋ 혜원이란 이름이 또 있어서 잠시 헷갈렸어요. 그게 누군지 알지요?

이게 얼마만인가요? 아직도 럭키아파트에서 사나요? 난 서울로 이사했답니다. 으음, 혜원이는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겠군요. 키도 많이 컸겠는데요.

다른 학생? 가끔 이메일로 인사하는 학생들이 있지요. 혜원이와 함께 수업한 학생 중에도 연락하는 학생이 있답니다. 그런데 내가 이메일을 늦게 보고 답장을 늦게 해서 미안했답니다. 반가워요 또 연락해요. ~~

참, 백혜원이 김혜원의 안부를 궁금해 하네요.

아침에혹은저녁에☔ 2017-04-30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탕달의 책을 발견하고 검색해 보니 있어 읽고 갑니다

페크pek0501 2017-05-02 12:30   좋아요 1 | URL
저도 오랜만에 이 글을 읽었답니다. 님 덕분에요.
벌써 6년이나 된 글이군요.

미쓰 아줌마, 라는 드라마를 봤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저는 안 봤는데요. 그런 드라마 몰라요, 할 뻔했어요. 이번에 이 글을 보지 않았다면.
<먼 그대>라는 작품도 읽지 않았어요, 할 뻔했어요. 이번에 이 글을 보지 않았다면.

제 기억력이 그 정도입니다. ㅋ
제가 쓴 옛 글을 저도 읽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침에혹은저녁에☔ 2017-05-02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 내는 동안 옛 생각에 잠겨서 추억을 더듬다 보면 글을 쓸 때의 감정이 되살아 날지 모르겠네요
좋은 추억으로 남기를 바라며
하루 하루 가 다른 요즘을 느끼면서 행복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페크pek0501 2017-05-04 13:05   좋아요 1 | URL
님이 행복하셨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댓글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아침에혹은저녁에☔ 2017-05-0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읽는것 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 드립니다^__^

페크pek0501 2017-05-04 13:41   좋아요 0 | URL
옙~~ 감사합니다.
 


단상(16) 사치의 행복과 무소유의 행복과 즐김의 행복


1.

사치의 행복 : 가끔은 사치하고 싶다


<사치와 문명>이란 신간이 나왔다. 이 책은 동서고금 문명을 ‘사치’라는 키워드로 분석한 것으로, “사치는 유용성에 앞서고, 인간적이며, 필수적이며 영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치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류 문명 발전의 견인차라고 주장하는 책이다(조선일보, 2011. 6. 11.). 사치가 없다면 세상 발전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아 책장에서 찾아보았더니 마광수 저, <자유에의 용기>라는 책에 ‘사치에 대하여’라는 글이 있었다. 이 글에 의하면 사치욕구의 발로가 여가의 증대와 맞물려 ‘일할 의욕’을 만들어 냈고, 그것은 ‘소비의 미덕’으로 이어져 유통의 발달을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민중들은 그들이 영원히 ‘민중’으로만 머물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신분상승을 이룩해 ‘귀족’이 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대중적 귀족의 출현을 인정하고 대중적 사치를 인정하는 사회는 경제발전의 속도가 빠른 반면, 민중들을 계속 검약(儉約)과 절제의 윤리로만 순치(馴致)시키는 사회는 경제가 침체될 수밖에 없다. 사치스럽고 귀족적인 소비가 인정되지 않는 사회구조 속에서는 일반 대중들이 땀 흘려 일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소련이나 동유럽국가들의 경제가 붕괴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마광수 저, <자유에의 용기>에서.


 

사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두 권의 책이 반가웠다. 내가 사치로 인해 부끄럽게 여겨졌던 일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발 관리’를 몇 번 받으러 다닌 일이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와 발의 피로를 느끼던 때에 그 광고지를 보게 되어 가게 되었다. 지압과 마사지로 발의 피로를 풀어 줌으로써 몸의 피로를 시원하게 풀어 주어 건강하게 해 준다는 광고 문구가 꽤 유혹적이었던 것. ‘발 관리’를 받기 위해선 한꺼번에 돈을 내고 회원가입을 해야 했다. 이것은 내 생활수준에 비추어 보면 ‘사치’에 속한다. 평소엔 검소한 편이지만 가끔은 이런 사치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알뜰하기만 한 삶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문을 통해 대학 등록금이 없어 휴학을 하는 학생들에 대한 기사를 보거나 텔레비전을 통해 힘들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방송을 볼 때면 나의 ‘발 관리’의 사치에 대해 반성하는 마음이 생기곤 했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돈이 없어 불행한 삶을 사는데 나는 하지 않아도 될 ‘발 관리’를 받으러 다니는 사치나 누리며 살고 있다니,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사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이 두 권의 책을 보니 반갑고 안심이 되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 같은 세상은 물론 위험하다. 하지만 그것의 긍정적인 면도 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 같은 환상은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되고 나면 더 이상 일하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 된다면 더 이상의 경제발전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삶의 질적 향상도 없을 것이다. 훗날 부자가 되어 사치하며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하게 한다. 고급 자동차와 외제 골프채를 갖고 싶은 욕구, 멋진 호텔 같은 집에서 살고 싶은 욕구, 세계여행을 하고 싶은 욕구, ‘발 관리’나 ‘얼굴 마사지’와 같은 서비스를 받고 싶은 욕구가 없다면 사는 게 좀 싱겁지 않겠는가.


때로는 사치에 대한 욕구가 생활의 활력을 주리라. 물론 지나친 사치라면 독이 되겠지만.



2.

무소유의 행복 : 버림으로써 행복하다


많이 가질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교통난과 주차난이 심각한 서울에서 사는 사람들 중에는 자동차를 가지고 외출해서 불편했던 경험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때로는 자동차를 소유함으로써 행복한 게 아니라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행복할 때가 있다.

난초 두 분을 정성스레 기르던 분이 계셨다. 그 분은 그 난초를 위해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높이곤 했다. 그러던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그분은 외출 중에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있음을 알고 문득 난초가 생각났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외출했던 것이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 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 버린 것 같았다.


그때 그 분은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난초에게 너무 집념해 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난초를 안겨 주었다. 비로소 그 분은 얽매임에서 벗어나서 날 듯 홀가분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 분이 법정 스님이시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향(向)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 법정 저, <무소유>에서.




무소유의 행복을 느껴 본 사람이라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사치의 행복보다 무소유의 행복이 더 좋은 이유는 사치의 행복이 자신 혼자의 행복인 것에 반해 무소유의 행복은 이웃과 나눌 수 있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무소유의 행복은 자기만이 아닌, 우리들 모두의 행복을 지향한다. 

 

3.

즐김의 행복 : 행복은 즐기는 것이다


사치의 행복은 이웃을 생각할 때 마음이 불편해지는 행복이다. 이웃에게 미안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사치의 행복으로 늘 만족하기란 불가능하다.


무소유의 행복은 정신 수양을 필요로 할 만큼 쉽게 갖지 못할 행복이다.


내가 갖고 싶은 행복은 ‘즐김의 행복’이다. 현재를 즐기며 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아무런 즐거움 없이 현재를 참고 견디며 사는 것에 반대한다. 예를 들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절약하며 저축을 하는 삶을 살더라도 현재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하는 사람은 세 번 향락한다고 한다. 노동 자체에서, 노동의 결실에서, 그리고 노동한 뒤의 휴식에서.


연예인들 중에는 정상에 올랐던 위치에서 인기가 떨어져 아래로 추락하면 우울증을 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연예인뿐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노동의 결실만을 중요시해서 일의 결과에 따라 행복과 불행 사이를 오간다. 다시 정상을 향해 올라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시간을 즐길 수 있다면 우리 삶이 덜 외롭고 덜 불행할 텐데.

“어떤 것을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공자) 이것은 곧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뜻도 된다. 이처럼 공자도 즐기는 상태를 최고의 경지로 봤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든 그 시간을 즐기는 게 행복의 비결. 우선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하겠다. 구두쇠가 불행한 이유도 즐기지 못해서라고 한다. “구두쇠들은 가진 것을 결코 즐기지 못하고 잃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플루타르코스)


논어에 이런 글이 있다. “배우고 제때에 그것을 복습하는 것은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 벗들이 먼 곳에서 오는 것은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논어) 

 

 

 


 

 

 

 

임어당 저, <생활의 발견>에는 ‘행복한 한때’가 어떤 때인지를 알게 해 주는 글이 있다.  
 

 



 

  


 

  



예를 들어 내 경우라면 참으로 행복한 한때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잠을 푹 자고 나서 아침에 깨어 새벽 공기를 마시면 폐가 부풀대로 부푼다. 그러면 마음껏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고 싶어져서 가슴 근처의 피부나 근육에 기분 좋은 운동의 감각이 일어난다. 따라서 일도 할 수 있겠다는 그런 한때. 손에 파이프를 들고 의자에 발을 뻗고 있으면 담배 연기가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그런 한때.


여름 여행길에서 목이 탄다. 아름답고 깨끗한 샘이 있어서 물이 솟아오르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온다. 구두와 양말을 벗어버리고는 펑펑 솟아오르는 그 얼음 같이 찬 물 속에다 발을 담그는 그런 한때.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은 뒤에 안락의자에 턱 기대앉는다. 같이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서로 꼭 맞는 사람들뿐. 흥겨운 청담(淸談)이 꼬리를 물고 경쾌하게 자꾸만 흘러나온다. 몸도 마음도 이처럼 천하태평스런 한때.


어느 여름날 오후, 지평선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한 15분만 있으면 초여름의 소낙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비를 맞고 싶은데, 우산을 안 들고 비오는 데 나가기도 어색하다. 그래서 급히 벌판 한가운데로 뛰어나가서 소낙비를 맞고는 흠뻑 젖어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 사람들에게는, 뭘 비 좀 맞았는데… 하는 한때.


- 임어당 저, <생활의 발견>에서.



나도 임어당의 글을 흉내 내어 다음과 같이 써 보았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거리의 사람들은 재빠르게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그 풍경을, 나는 비 한 방울 맞지 않는 집에서 창문을 통해 내다본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어떤 책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을 보고 싶게 만든다. 궁금해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새벽까지 책을 읽고 나서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난다. 이런 게으른 자유의 행복이 얼마만이냐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건강을 위해서도, 몸 관리를 위해서도, 기분전환을 위해서도 운동은 필요하다. 땀 흘려 운동을 하고 난 뒤 흠뻑 젖은 몸으로 샤워를 한다. 우선 얼음물 같은 찬물로 여러 번 얼굴을 적시며 ‘아, 시원하다’라는 느낌을 즐기고 난 뒤에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한다. 샤워를 마치고 나면 갈증이 난다. 이럴 때 냉장고에서 꺼내 시원한 물을 들이킨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외출하기 전,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내 모습을 아이에게 보이며 “나 어때?”라고 묻는다. 아이는 “그냥 사십대 아줌마 같지 뭐.”라고 답한다. 나이는 못 속이는 모양.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얘기를 해 주었더니 친구들이 일제히 까르르 웃는다. 한 친구가 묻는다. “넌 어떤 말이 듣고 싶었는데?” 나는 답한다. “아가씨 같다는 말.” 이 얘기를 듣자 또한번 친구들이 일제히 까르르 웃는다. 이것도 즐겁지 아니한가.



즐기려고 마음먹으면 실제로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이 많아진다.  



요즘 장마철이다. 비가 와서 습하다고 불평하지 말고 비가 와서 공기가 상쾌함을 즐기자. 행복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자의 것이 아니므로. 행복은 그것을 느끼는 자의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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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15) 어른이 된다는 것 외  


1.

어른이 된다는 것


인간의 고독을 알기 시작하면 어른이 된 것이다.

비가 오는 걸 좋아하게 되면 어른이 된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는 게 흥미 없어지면 어른이 된 것이다.

라면을 먹는 게 싫어지면 어른이 된 것이다.

병원 주사가 무섭지 않게 되면 어른이 된 것이다.

죽음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어른이 된 것이다.

타인의 약점을 포용할 수 있으면 어른이 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 생기면 어른이 된 것이다…. 또 뭐가 있을까.


홍은희 저, <삶의 시간들>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인간의 기본감각을 구성하는 것은 시각, 촉각, 청각, 미각, 후각이다. 젖비린내가 가시고 사내냄새가 나는 것만으로 어른이 다 됐다고 하기엔 미흡하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변화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나는 오감의 변화를 거쳐 마지막으로 어른을 완성하게 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마음씀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따금씩 얼굴을 마주하는 먼 곳에 있는 이들보다도 늘 서로 부대끼며 사는 이들을 배려할 수 있어야 비로소 어른이 됐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홍은희 저, <삶의 시간들>에서.




이 글에 따르면 어른이 되는 시점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생길 때라고 한다. 내가 생각할 땐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 객관적으로 보며 의식할 수 있어야 어른인 것 같다. 예를 들면 화가 날 때, 자신의 감정에만 취해 화를 낼 게 아니라 상대가 자신의 그런 모습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헤아리며 감정을 자제할 줄 알아야 어른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사람은 아마 커피숍에서 혼자 누군가를 기다릴 때조차도 누가 봐도 아름답도록 좋은 모습을 연출할 것이다. 마치 거울 앞에 있는 것처럼 ‘자기 점검’을 할 것이다.  

어른이 되기 어렵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는 알고 살아야겠다. 각자가 바람직한 어른이 될 수 있는 기준 하나는 가져야겠다. 어른다운 어른이 되기 위해서. 
 

2.

그의 1%의 단점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서 유난히 단점이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처음엔 잘 몰랐던 어떤 점이 언제부턴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그것만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99%의 좋은 점마저 없애 버리는 상황이 되고 마는 것이다. 바로 그 1%의 단점이.
  

그 1%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다. 이렇게 예를 들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다 좋은데 그 1%의 단점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만약 만날 때마다 꼭 한 번 이상의 거짓말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친구로서 만날 수 있을까. 또 어떤 사람은 다 좋은데 그 1%의 단점이 험담을 하는 것이다. 만약 만날 때마다 꼭 한 번 이상의 험담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친구로서 만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다 좋은데 그 1%의 단점이 잘난 척을 하는 것이다. 만약 만날 때마다 꼭 한 번 이상의 잘난 척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친구로서 만날 수 있을까.

이런 성격적 단점을 얼굴의 점으로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다. 두 남녀가 만나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 얼굴에 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 그것을 발견했을 때 그 점은 개미보다 작아 보였으며 그 점이 있어도 그녀는 그 남자가 좋았다. 한 마디로 그녀는 그 점이 그 남자의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감정도 변해서 어느 시점부터 그 점이 점점 크게 보이더니 급기야 개미보다 작았던 점이 오백 원짜리 동전 크기로 보이면서 보기 싫어졌다. 그의 1%의 단점이 그의 99%의 좋은 점을 다 덮어 버렸다. 그녀는 남자를 만날 때마나 자신의 변심 때문에 괴로웠다. 결국 그녀는 그와 결별했다. 

 
이럴 경우 그녀는 그 남자가 상처를 받을 게 가엾어서 싫어도 억지로 참고 만나야 할까. 결별한 그녀에게 우리는 마음의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 1%의 단점이 그 나머지 99%를 무색하게 하는 이런 상황에 우리는 이별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물론 단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완벽한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자꾸 어떤 단점이 눈에 띄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우리는 그 상대를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단점을 고치라고 충고를 할 수도 없다. 사람의 어떤 점은 하나의 습관이 되어 버려 그것을 없애는 게 쉽지 않다. 오히려 충고함으로써 그 상대의 기분만 상하게 할 가능성이 많다. 결국 어떤 단점이 크게 거슬리기 시작하면 그 인간관계는 끝장나고 마는 게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나에게도 물론 단점이 있다. 그런데 알면서도 고쳐지질 않는다. 그 이유를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찾았다. ‘인간이란 언제 어디서든 이성이나 이익이 명령하는 것에 따르기보다는 하고 싶은 짓을 제멋대로 하고 싶어 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참 공감 가는 말이다.   




인간이 추악한 짓을 하는 것은 오직 자기의 참 이익을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것은 대체 누구인가? ~ 아아, 이 얼마나 유치한 생각인가! ~ 인간이란 자기의 참된 이익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밀어젖히고 아무에게도 아무것에도 강제되고 있지 않은데도 다른 모험의 길로 돌진하는 법이다. ~ 다름 아니라, 인간이란 언제 어디서든 이성이나 이익이 명령하는 것에 따르기보다는 하고 싶은 짓을 제멋대로 하고 싶어 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설사 자기 자신의 이익에 반대되더라도 하고 싶은 걸 어쩌겠는가. -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그런데 아까 말한, 그녀와 헤어진 그 남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답은 간단하다. 그 점을 큰 단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여자를 만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분명히 있다. 짚신도 아름답게 봐 주는 이가 있는 법이니까. 연인관계에서도, 친구관계에서도.  

3.

어떤 신문을 구독할 것인가

 

내가 구독하는 신문은 안티팬이 많이 있는 신문이다. 안티팬들은 이 신문을 보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어느 신문을 보냐고 물으면 신문의 이름을 말하기가 부담스럽다. 그래서 다른 신문으로 바꿀까를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냥 보기로 했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이 신문의 편집방식에 익숙한 나로서는 다른 신문을 보는 게 불편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 신문은 자주 새로운 변화를 꾀하며 도전하는 정신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며 만들어 가는, 볼거리가 풍성한 신문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셋째, 이 이유가 제일 중요한데, 사설을 읽으면 나와 생각이 다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생각이 같은 신문을 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생각의 차이를 경험함으로써 사고의 균형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경영학의 대가 톰 피터스는 말했다. “두 사람이 업무에 대해 항상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은 불필요한 사람이다.” 신문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나와 생각이 같은 신문은 불필요한 신문이다.


(만약 같은 사안에 대해서 다른 신문의 반응이 궁금해지면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4.

읽은 책 중에서 인상적인 글


R. M. 릴케 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외롭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외로움이란 어렵기 때문이죠. 그것이 어렵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외로워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외로움에도 가치가 있음을 안다면 외로운 시간에 위로가 될 것 같다.


R. M. 릴케 저, <아름다운 여인들에게>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행복하고 충만한 처지에 있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진지하고 깊이 인식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삶에도 그 나름대로 불행으로 인한 이득이 있음을 안다면 삶의 위안이 될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값싼 행복과 고결한 고민과 과연 어느 쪽이 좋을까?”


이 글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사색의 기회를 가짐으로써 좋은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답을 쉽게 얻을 수 없을 것 같다. 고결한 것은 좋아하지만 값싼 행복을 물리칠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 하지만 자신의 삶이 아니라 자식들의 삶을 생각해 본다면 답은 쉽게 나온다. 자식들이 고결한 고민 따위는 하지 말고 값싼 행복에 만족하며 살았으면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마음고생을 하는 건 싫기 때문이다 품위와 품격은 좋아하지만 그 무엇보다 행복이 우선 아닐까. 


5. 

아직 미래가 남아 있다

 

또 여름이다. 이번 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왜 그리 여름은 빨리 오는지 모르겠다. 작년 여름이 석 달 전쯤이었던 것 같은데 벌써 1년이라니. 시간에 바퀴가 달린 것만 같다. 그 바퀴가 이젠 두렵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은 늦여름이다. 늦여름은 지루하던 더위가 끝나서 아침과 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목덜미를 간지럽게 해서 좋다. 8월 말이나 9월 초의 날씨가 그렇다. 그런 날 해질 무렵에 산책을 하고 싶다. 더위를 무사히 넘긴 자의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걸을 수 있는 늦여름.

언제 이 여름이 가려나. 내 마음은 벌써부터 늦여름을 기다리고 있다. 비록 만족하는 현재를 살고 있지 못하더라도 우리에겐 아직 미래가 남아 있다.


“당신은 어떤 미래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당신이 기다리는 것이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는 날입니까, 회사에서 승진하는 날입니까, 책 내는 날입니까, 사랑하는 이와 만나는 날입니까, 다이어트가 성공하는 날입니까,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입니까,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날입니까, 남에게 꿔 준 돈을 받을 날입니까, 아니면 실컷 웃는 날을 기다립니까?”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기다림을 갖고 있을 것이다. 미래를 향해 우리가 기다림을 갖는 것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그 무엇이 미래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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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14) 애인, 친구, 책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라면


1. 애인, 친구, 책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라면


얼마 전, ‘세바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여러 연령층의 사람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를 맞히는 퀴즈가 있었다. 그 중 재밌는 퀴즈가 있었는데, ‘평생 애인 없이 살기’와 ‘평생 친구 없이 살기’ 중에서 어떤 것을 사람들이 선택하는지를 알아맞히는 것이었다. 답은 ‘평생 애인 없이 살기’였다. 조사한 사람들 중 70% 이상의 사람들이 애인보다 친구를 더 중요시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아마도 애인에 비해서 친구가 더 자신에게 잘 해 준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 같다. 애인과 싸우거나 결별할 때 또는 외로울 때 위로를 해 주는 것은 친구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렇게 아는 게 아닐까. 애인은 가끔씩 적대적인 관계에 있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애인은 늘 내 편일 수 없다는 것을.


만약 사람들에게 애인, 친구, 그리고 한 가지 더 넣어 책, 이렇게 세 가지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라면 어떻게 될까. ‘평생 애인 없이 살기’, ‘평생 친구 없이 살기’, ‘평생 책 없이 살기’ 중에서 가장 끔찍할 것 같은 인생을 고르라면 결과가 어떨지 궁금하다. 이 중에서 ‘평생 책 없이 살기’가 가장 끔찍할 것 같다는 사람도 꽤 있을 듯하다. 나도 여기에 속한다. 책이 없는 세상은 살맛이 나지 않는 세상이 될 것 같다.



애인은?

애인이 있어서 좋은 점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기쁨과 달콤한 설렘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쁜 점은 상대에 대한 의무가 따른다는 점이다. 연애를 하면 언제든 상대가 불러내면 아무리 외출이 귀찮은 날에도 만나러 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혹시라도 나가지 않으면 상대는 섭섭해 하거나 화를 낼 것이다. 또 생일 같이 특별한 날은 꼭 챙겨 줘야 하고, 아플 땐 더 마음을 써 줘야 하는 의무가 있다. 물론 사랑에 빠지면 그런 의무를 다하는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통계에 의하면 오래 사귈수록 달콤한 설렘도 점점 퇴색한다고 하니, 오래 사귀면 애인으로 인해 귀찮게 여겨지는 일이 생길 듯하다. 결국 둘 중 더 좋아하는 쪽이 있기 마련이고, 더 성의 없는 쪽이 있기 마련이어서, 한쪽은 화를 내고 다른 한쪽은 화를 풀어 줘야 하는 관계가 되기 쉽다. 혹자는 ‘연애’하면 떠오르는 게 ‘스트레스’라고 했다. 아마 가장 많이 싸우는 인간관계가 연인관계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괴로움을 동시에 주는 게 애인이란 존재가 아닐까.

친구는?

친구는 애인에 비해 기쁨을 덜 주지만 스트레스도 덜 준다. 애인에 비해 서로 관심이 적기 때문이다. 관심이 적어서 싸울 일도 많지 않다. 친구의 좋은 점은 늘 그 자리에 있어 준다는 점이다. 애인은 한동안 만나지 않으면 저절로 이별이 되지만 친구는 소원하게 지내다가도 언제든 만나면 예전의 친숙했던 친구관계로 돌아가게 된다. 단점은 무관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친구보다는 애인이나 가족을 더 챙기기 때문에 섭섭할 때가 많이 생긴다.

책은?

그러면 책은 어떠한가. 애인이나 친구를 만나는 일과 비교하면 책을 만나는 일엔 의무도 없고 섭섭함도 없다. 그저 새로운 책을 대할 때마다 새로운 즐거움이 생길 뿐이다. 싫증이 날 새도 없이 새 책은 매일 쏟아져 나와 설렘이 이어진다. 한번 책의 달콤한 열매를 맛본 사람은 그 맛을 잊을 수 없어서 자연히 책의 세계로 빠져 들게 된다. 독서만큼 값이 싸면서도 오랫동안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없으며(몽테뉴), 독서하는 사람은 참된 벗, 친절한 충고자, 유쾌한 반려자, 충실한 위안자가 없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M. T. 바로).



책으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자질

나에게 재능이 있다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자질이다. 나에게 그 자질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에 속한다. 책을 읽으면 어떠한 잡념도 사라지고 곧장 몰입하게 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행복하다고 여길 것이다. 행복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타인에 대해 시기하지 않고 너그러워진다는 점이다. 시기심이란 자기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공연히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므로,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공연히 시기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행복한 독서광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돈 많은 친구를 만나면, “넌 부자가 되거라, 난 책으로 행복할 테니.”라고 생각하고, 옷을 멋지게 잘 입는 친구를 만나면, “넌 멋쟁이가 되거라, 난 책으로 행복할 테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만약 ‘부자인 것’과 ‘책이 주는 행복’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독서광들은 아마 ‘책이 주는 행복’을 택할 것이다. ‘멋쟁이인 것’과 ‘책이 주는 행복’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역시 ‘책이 주는 행복’을 택할 것이다.


책은 참 잘생겼다고 느낀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볼 때면 또는 책이 방바닥에 쌓여 있는 것을 볼 때면 나는 그것의 잘생긴 외양에 감탄하곤 한다. 이보다 더 잘생길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무리 전자책의 출현으로 인해 종이책의 종말을 논한다고 해도 한 장 한 장 넘기는 종이의 질감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러셀에 의하면 독서의 두 가지 동기는 독서를 즐기는 것과 읽은 책에 관해 자랑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이미 책에 매료된 사람은 즐거움을 얻으면서 동시에 자랑거리를 갖게 하는 책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2. 이달에 구입하고 싶은 책


<아렌트 읽기>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제자가 쓴 것으로,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3단계로 나누어 조명한 책이라고 한다. 그동안 여러 책에서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하는 글을 많이 읽어 온 나로서는 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한 권의 책으로 그의 저작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정신의 삶>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아 구입하고 싶다.



나치 시대 독일의 공무원이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어떻게 태연히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할 수 있었을까? 이상주의적 신념을 가진 소시민을 살인기계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 세기적 비극의 기원을 '생각 없음'에서 찾았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가장 뛰어난 제자이자 독보적인 아렌트 전기를 썼던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이 스승의 사상을 차근히 짚어간 아렌트 해설서이다. 

아렌트 사상을 크게 3단계로 나누어 확장되고 전개되는 사상의 궤적을 파악해내고 있다. 정치의 파괴부터 정치의 회복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아렌트의 주요 저작 3종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정신의 삶>을 꼼꼼히 읽어내며 이 사상의 흐름을 통해 현대 세계의 정치 상황들, 이라크전쟁이나 일본의 역사왜곡 등의 민감한 사안들을 조명하고 있다. - <책 소개, 알라딘에서 발췌>


 

<한나 아렌트의 저작들>
  

 

 

 

 

 

 

3. 책과 관련하여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

새 책의 빳빳한 질감을 느끼는 것,

책에서 외우고 싶을 만큼 좋은 구절을 발견하여 연필로 밑줄을 긋는 것,

책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드는 것,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할 책을 고르는 것,

반값 세일의 책을 구입하는 것,

집에 배달된 책의 포장지를 뜯는 것,

책의 첫장을 펼치는 것,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서 그 다음에 읽을 책을 책장에서 고르는 것,

찌개가 끓는 동안 식탁에서 시집을 뒤적이는 것,

여행을 떠나는 날에 가방에 넣을 책으로 무엇이 좋을지 생각하는 것,

밖에 비가 오고 있음을 느끼며 책을 읽는 것,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책을 읽는 것,

독서노트를 사러 문구점에 가는 것,

독서광인 친구를 만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내가 알고 있는 책 정보를 누군가가 묻는 것,

책에 대한 정보가 많은 블로그에 들어가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 :

책 보다가 잠든 뒤에 전화벨 소리를 듣게 되는 것,

창문으로부터 들이친 비에 책이 젖는 것,

책이 구겨지는 것,

내가 아끼는 책을 누군가가 빌려 달라고 하는 것,

한참 재밌게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외출할 일이 생기는 것,

아끼던 책이 오래되어 종이가 누렇게 변색되는 것,

책 읽으며 안구건조증이 느껴지는 것,

전자책의 편리성을 알리며 종이책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신문기사를 보는 것,

불황으로 문을 닫게 된 출판사나 서점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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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13) 책을 통해 본, 인간의 욕망이 낳은 것들


1.


김윤희 저, <이완용 평전>이란 신간이 나왔다. 저자가 이완용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책이어서 그를 그저 매국노로만 알던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게 해 줄 것 같다. 매국노로 살았던 그의 삶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저자는 “이완용은 그저 ‘매국노’로서가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할 줄 모르는’ 또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호명하는 가치에 호응할 줄 모르는’ 인물로서 비판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조선일보, 2011. 5. 28.).


이 책에서 새로 밝혀낸 것에 대해 저자는 “그의 생활은 탐욕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대 제2의 갑부였지만 생활은 대체로 검소했다. 취미도 붓글씨에 문방사우 수집 정도였다. 돈 버는 것에 대해 창피해 하지 않아 직접 채소 농사에 투자해서 돈을 벌어보이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신문을 통해 이 책의 소개에 대한 글을 읽으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그 누군가의 전부가 아니라 그저 일부일 수 있다는 것. 더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나쁜 점은 우리 인간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일 수 있다는 것. 예를 들면,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공통점이 아니던가.


쇼펜하우어 저, <사랑은 없다>에는 이런 글이 있다.




누구에게나 ‘우주의 멸망과 자신의 멸망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고 물어보아라.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심지어는 전쟁이 일어나 국가에 존망의 위기가 닥쳐도 ‘그럼 나는 어떻게 되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하고 제일 먼저 자신의 이해타산을 떠올린다. - <사랑은 없다>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히생활자의 수기>에는 이런 글이 있다.




세계가 파멸하는 것과 내가 차를 마시지 못하게 되는 것과 어느 쪽이 큰일인가! 설사 온 세계가 파멸해 버린대도 상관없지만, 나는 언제나 차를 마시고 싶을 때 마셔야 한다. -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우리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즐거움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까. 만약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평생 커피를 마실 수 없는 것’과 ‘다른 나라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까. 만약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평생 술을 마실 수 없는 것’과 ‘다른 나라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까. 이것에 대한 답변이 어떨지는 이런 질문으로 확연히 짐작할 수 있다. ‘평생 술을 마실 수 없는 애주가’와 ‘다른 나라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 중에서 누가 더 불행한 삶을 살까.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큰 지진이 일어난 것에 대해선 며칠만 지나면 잊고 말 것이다. 자신의 불행이 중요하지 타인의 불행 따윈 안중에 두지도 않는 게 인간 아닌가. 

<이완용 평전>을 통해 이완용의 삶을 들여다보면 뜻밖에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그 결론이 궁금하다. 나의 결론도 독자들의 결론도 궁금하다.

2.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원작, 제프리 S. 크래머 엮음, <주석 달린 월든>이란 신간이 나왔다. 소로우의 <월든>이란 책에 대한 안내자 역할을 해 줄 책이라고 한다.


소로우가 인용한 고대 경전부터 그리스 신화, 논어 등 동서양 고전의 출전을 파악하고, 현대의 작가와 학자들이 인용한 소로 관련 내용까지 덧붙였다(조선일보, 2011. 5. 28.)고 한다.



요즘 하우스 푸어(House Poor)란 말이 신문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불 능력으로 감당 못하는 집을 산 사람들’을 말한다. 하우스 푸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집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난하다. 집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한 돈을 갚느라 가난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하다.


일찍이 소로우는 미래에 하우스 푸어와 같은 사람들이 출연하는 세상이 오리라고 예견했던 것일까. 이미 그는 세속적인 성공만을 위해 숨 가쁘게 사는 문명사회의 사람들이 과연 행복한가를 스스로 묻게 만드는 글을 남겼다. 그것이 1854년에 출간된 <월든>이다.  






사람들은 그릇된 생각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은 조만간에 땅에 묻혀 퇴비로 변한다. 사람들은 흔히 필요성이라고 불리는 거짓 운명의 말을 듣고는 한 옛날 책(성경)의 말처럼 좀이 파먹고 녹이 슬며 도둑이 들어와서 훔쳐 갈 재물을 모으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러나 인생이 끝날 무렵이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만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인생이다. - <월든>에서.






지금 남부와 북부에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려고 눈을 번뜩이는 악랄한 노예주인들이 수없이 많다. 남부의 노예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도 힘들지만 북부의 노예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노예감독일 때이다. - <월든>에서.






오늘 모든 사람들이 진리라고 받아들이고 묵과한 것이 내일에는 거짓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 <월든>에서.





‘오늘’은 50평짜리의 비싼 아파트에서 은행 빚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갖고 사는 게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내일’이 되면 잘못된 생각으로 판명될지 모른다. 그 50평의 아파트에서 사는 것보다 그보다 싼 30평의 아파트에서 살면서 빚 없이 저축하며 마음 편히 사는 게 좋은 삶이라는 것을 깨달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로우는 실제로 문명을 등지고 월든 호숫가에서 원시적인 삼림 생활을 했다. 그 생활을 <월든>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미 <월든>을 읽은 나로서는 <주석 달린 월든>이 궁금해진다. 독자들의 호응도 어떨지 궁금하다.


3.


모파상의 소설 <목걸이>이란 작품이 있다. 여주인공인 가난한 L부인은 남편과 함께 파티에 가기 위해 친구로부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빌려서 하고 간다. 파티가 끝나 집에 돌아와 거울에 선 그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른다. 목에 당연히 걸려 있어야 할 목걸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오는 도중 그 목걸이를 잃어버린 것이다.    

    
  
 

 

 

 


궁리한 끝에 그들 부부는 어느 보석상에서 그 잃어버린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아주 비슷한 것을 사서, 빌렸던 친구에게 돌려준다. 목걸이의 가격은 매우 비쌌으므로 그들은 빚을 졌고 10년 동안 심적, 육체적으로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10년이 지나자 빚을 다 갚았다.


어느 날 L부인은 우연히 거리에서 자기에게 목걸이를 빌려 주었던 친구를 만나게 되어,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그 친구에게 들려준다. 그때 L부인은 그 친구로부터 이런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아, 가엾어라. 내 목걸이는 가짜였단다. 기껏해야 5백 프랑밖에 되지 않는 것인데…….”


L부인이 파티에 가기 위해 값비싼 목걸이를 친구에게 빌리기까지 한 것은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중요시해서다. 이렇듯 겉치레를 중시하는 허영심은 우리의 삶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옷을 구입할 때 값싼 옷 대신 비싼 옷을 사는 이유가 옷감이나 색상, 디자인 등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단지 유명 메이커의 옷이기 때문이라면 이것도 허영심이다. 또 승용차를 구입할 때 소형차 대신 중형차를 구입하는 이유가 더 안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과시하고 싶기 때문이라면 이것도 허영심이다.


L부인처럼 생활필수품이 아닌 고급 목걸이를 필요로 할 때가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목걸이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


4.


최근 악성 댓글로 괴로워하다가 자살한 사람이 있었다. 위치 추적이 가능한 스마트폰과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CCTV로 사생활 침해 논란이 생겼다. 이것들은 과학의 발전으로 생기는 폐해다. 지진이나 원전사고만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게 아니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예전엔 없었던 나쁜 일들이 자꾸 생긴다. 이렇게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들이 앞으로 또 얼마나 생길까.


과학의 발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까. 휴일이 없는 과학의 발전이 나는 두렵다. 도대체 과학은 이 세상을 어디까지 끌고 갈 것인가. 그곳에도 사람 냄새가 나긴 할까. 이쯤해서 인간의 욕망에 끝이 있었으면 좋겠다.


러셀 저, <런던통신 1931-1935>에 이런 글이 있다.




교구 목사 오피미언 박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과학에 대한 길고 통렬한 비난을 마무리한다. “과학이 인류에게 끼친 해악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날이 저물 것이다. 인류를 절멸시키는 것이 과학의 궁극적인 운명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 <런던통신 1931-1935>에서.





 

5. 


요즘 스마트폰 사용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언젠가는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은 사회로부터 고립을 당할지 모른다. 나 역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소로우가 될 자신이 없기에, 언젠가는 스마트폰을 구입하게 될 것이다. 스마트폰이 위치 추적까지 된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조차도 결국 구입하고 말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씩 어떤 문화의 ‘노예’가 되어간다. 그렇다면 행복한 노예일까, 불행한 노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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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2011-06-1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울림을 주는 글입니다. 저도 스마트폰이나 갤럭시탭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듭니다. 그러다 새로운 기계조작법을 익히는게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고 있지요. 어떤 문화의 노예가 되어간다는 말이 실감이 나고 소름끼치기도 하네요. 나중엔 인류의 지배자가 문명이나 문화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페크pek0501 2011-06-13 18:02   좋아요 0 | URL
며칠 전 친구를 만났는데,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었어요. 스마트폰 사용자들끼리는 무료로 제공되는 통신서비스가 있다며 저보고 스마트폰을 사라고 하더군요. 제 핸드폰에 통신하면 사용료가 많이 든대요. 이런 말을 여러 사람으로부터 듣게 되면 결국 저도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스마트폰을 사게 될 거예요. 혼자서 왕따 당하지 않으려면 이 시대의 문화를 부지런히 쫓아가야 할 듯...ㅋ 세상이 천천히 바뀌었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