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마누라들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꼴을 본다면 어떨까요? 제발이지 마누라들이 수용소에 잘 있으면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을 몰랐으면 좋겠소."

그 말을 듣자 아내 생각이 났다. 빙판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수없이 서로를 부축하고,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면서 몇 마일을 비틀거리며 걷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지금 아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때때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하나둘씩 빛을 잃어 가고, 아침을 알리는 연분홍빛이 짙은 먹구름 뒤에서 서서히 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아내 모습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아주 정확하게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녀가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녀가 웃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진솔하면서도 용기를 주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실제든 아니든 그때 그녀의 모습은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났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시를 통해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고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됐다.

‘천사들은 한없는 영광 속에서 영원한 묵상에 잠겨 있나니.’

그때도 내 마음은 여전히 아내의 영상에 매달려 있었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아내가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만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때서야 깨달은 것인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사실 그때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아내 모습을 떠올리는 일에 나 자신을 바쳤을 것이다. 나와 그녀가 나누는 정신적 대화 역시 아주 생생하고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 주오. 사랑은 죽음만큼이나 강한 것이라오."

이렇게 내면세계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수감자들은 멀리 과거로 도피해 자기 존재의 공허함과 고독감 그리고 영적인 빈곤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며 과거 일들을 회상했다.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작은 해프닝이나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 향수 어린 추억이 그들을 성스럽게 만들었으며, 때로는 이상한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도 했다. 그들의 세계와 그들의 존재가 현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영혼은 그리움을 향해 먼 과거로 달려갔다.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 어쩌면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 우리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곤 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Et lux in tenebris lucet.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얼어붙은 땅을 파면서 서 있었다.

바이올린이 흐느끼는 소리에 나도 덩달아 흐느꼈다. 바로 그날은 어떤 사람이 24번째 생일을 맞는 날이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다른 편 막사에 누워 있다. 어쩌면 겨우 몇백 야드 혹은 몇천 야드에 불과한 거리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로 갈 수 없는 그곳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내 아내였다.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려는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고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에서도 이런 삶의 기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번 유추해 보자.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소한 것에서 느끼는 상대적인 행복

이 말은 곧 아주 사소한 일이 큰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다음 점호는 기합 행렬로 바뀌었다. 오랜 여행의 긴장도 풀지 못한 채 우리들은 밤을 꼬박 새우고 이튿날 아침 늦게까지 꽁꽁 언 채로 비를 맞으며 밖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행복했다. 이 수용소에는 굴뚝이 없고, 아우슈비츠는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은총에도 고마워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이를 잡을 시간을 준다는 것도 반가운 일이었다. 물론 이를 잡는 일 자체는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이를 잡으려면 천장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린 추운 막사에서 옷을 벗고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잡는 도중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아 전등불이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만약 이 시간에 이를 제대로 잡지 못하면 하룻밤의 절반을 꼬박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병에 걸려 병동에서 졸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뻤는지! 그곳에서 보낸 이틀이 그리고 그 이후에 주어진 또 다른 이틀이 내 생명을 보존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작업반에 들어갈 경우, 짧은 시간 내에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내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수용소에서 사람 목숨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감정이 무뎌진 수용소 사람들도 병든 사람을 이송할 때에는 이곳에서 인간 존재가 얼마나 철저하게 무시당하는지를 느꼈을 것이다. 다 죽어 가는 병자의 몸은 바퀴 두 개 달린 수레에 던져진다.

사람은 글자 그대로 번호가 됐다.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번호’의 생명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그 번호 이면에 있는 것, 즉 그의 삶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 된다. 그의 운명과 그가 살아온 내력 그리고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수용소에 살아남은 사람들, 여전히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데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해야만 했다. 그들은 절대로 감상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이 전적으로 감시병들의 기분─ 운명의 노리개라고나 할까? ─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 자신을 환경이 강요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말없이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것은 삶을 위한 악수가 아니라 삶과 작별하는 악수였다.

"잘 듣게. 오토, 만약 내가 집에 있는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자네가 아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전해 주게. 내가 매일같이 매시간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게. 두 번째로 내가 어느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 세 번째로 내가 그녀와 함께했던 그 짧은 결혼 생활이 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여기서 겪었던 그 모든 일보다 나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전해 주게."


오토.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아직 살아 있나? 우리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자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자네 아내를 다시 만났나? 그리고 기억하나? 자네가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는 동안에도 내가 자네에게 내 유언을 한마디 한마디 외우게 했던 것을.

오후가 됐는데도 환자를 실어 나르기로 한 트럭이 오지 않았다. 대신 갑자기 수용소 문이 닫히고, 어느 누구도 도망칠 수 없도록 철조망에 대한 감시가 강화됐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수용소와 함께 불태워질 운명에 처한 것처럼 보였다. 내 친구와 나는 두 번째로 탈출 계획을 세웠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시간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 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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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노력은 다르다

우리 동네 이발소 사장님은 평생 머리를 만졌는데 왜 커트 실력이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을까.

미국의 심리학자 안데르스 에릭슨Anders Ericsson에 따르면 답은 ‘신중하게 계획된 연습’에 있다. 이것은 축구 선수가 킥, 드리블, 패스만 정교하게 반복하는 것처럼 부족한 부분을 골라 집중적으로 하는 연습을 말한다.

신중하게 계획되지 않은 보통의 연습은 오래 한다고 해서 실력이 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상실의 시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건 노력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일 뿐이야.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그런 게 아냐. 노력이란 좀 더 주체적이고 목적을 가지고 하는 걸 말해."
당신의 공부를 생각해보자. 당신은 노력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뇌에서는 각성 상태를 만드는 오렉신Orexin이라는 호르몬이 나온다. 오렉신이 줄어들면 집중력이 사라지고 졸음이 온다. 그런데 음식을 먹으면 몸 안에서 혈당 수치가 높아지고 급격히 높아진 혈당 수치를 낮추기 위해 인슐린이 분비된다. 문제는 인슐린 수치가 높아지면 오렉신의 분비량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배가 부르면 쉽게 졸음과 피로가 올 수밖에 없다.

반대로 배가 살짝 고픈 상태에서는 그렐린Ghrelin이라는 호르몬이 나온다. 그렐린이 분비되면 기억력이 증가하고 뉴런 간의 연결이 30%쯤 촉진된다. 기억력의 증가와 뉴런 연결 향상. 즉, ‘머리가 잘 돌아가는’ 상태다. 공복 상태에서 두뇌 집중도가 올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늘 배부르게 먹는 수험생이 공부를 잘하기 쉽지 않은 이유다. 맛있는 음식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공부를 위해서라면 조금 배고픈 상태가 유리하다. 두뇌의 만족과 위장의 만족 가운데 당신은 주로 무엇을 선택하는가.

안정은 움직임 속에 있다. 팽이는 계속 도는 한 쓰러지지 않는다.

"균형이란 환상이다. 균형을 인생의 목표로 정한다면 영원히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미국 기업인 멜린다 브라운Melinda Brown의 말이다.

그러나 무수한 거절은 성공 이후의 그들을 더욱 빛나게 하고, 거절 편지는 그들의 스토리에 날개를 달아준다.

"출판사의 거절 통지서를 모아놓으면 당신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통쾌한 복수를 할 수 있다. 많이 모아놓을수록 나중에 정말 대단한 수집품이 된다." 영국의 작가 앤 루니Anne Rooney의 말이다.

지금 당신의 공부가 궤도에 오르지 않았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당신의 형편없는 점수와 숱한 불합격 통지는 단지 거절 편지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거절 편지는 ‘당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고작 ‘당신의 이번 원고’에 대한 것이다. 훗날 당신이 쓸 월계관이 화려한 것은 당신이 겪은 무수한 실패들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5가지 이유를 떠올렸다. 이제 여기에 이어 당신만의 이유를 생각해보자. 당신은 포기하지 않을 이유를 몇 가지 더 떠올릴 수 있는가. 전부 적고 난 뒤에 당신의 마음을 살펴보라.

두렵다. 하지만 나는 안다. 재능이 아니라 노력이 문제임을.
양이 누적되면 질이 된다는 사실을.

또한 나는 알고 있다. 교육 심리학책과, 경영서의 사례와, 뇌과학의 이야기와, 성공한 사람들의 인터뷰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음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계속 가는 거다. 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다고 믿기 때문에 계속 가는 거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알고 있는 것을 자꾸 잊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계속 책을 읽는다.

"사람들은 동기 부여가 오래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목욕도 마찬가지다. 그 때문에 매일 목욕하는 것이다"라는 미국의 작가 지그 지글러Zig Ziglar의 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쩌면 자신이 증명해내기 전까지는 완전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지고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증명해낼 수 없다. 당신의 공부는 지금 망각과 믿음 사이 어디쯤에 있는가.

한 번의 모의고사가 10시간의 공부와 맞먹는다

많이 꺼내본 사람이 더 잘 꺼낸다. 꺼내는 것도 공부다.

"수학은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푼다"

소설가 김영하는 강연에서 이런 이야기도 했다. "소설가의 뇌는 손가락 끝에 있다." 공상만 하고 앉아 있어서는 글이 전개되지 않으며, 일단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겨야 소설이 술술 풀린다는 뜻이다. 혹시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은 정확한 묘사다.

모차르트Mozart가 평소에 손과 입을 움직이며 곡을 썼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다. 피아니스트들은 음표를 근육으로 기억한다.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으면 손가락이 ‘기억한 대로’ 알아서 움직인다고 한다. 배우들이 표정 연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며, 춤을 연습한 뒤 음악에 따라 저절로 몸이 움직여지는 것도 같은 이치다.

성과는 여유가 있어야 나온다. 여유 속에서 방향도 점검하고, 방법도 수정하며, 놓친 것도 찾아낸다. 창의성이 싹트는 터전인 셈이다.

지속 가능한 공부를 만드는 것은 노력 사이사이에 마블링처럼 섞여 있는 여유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방황한다고 느끼는 걸음은 훗날 돌아봤을 때 자신만의 특별한 이력이 될지도 모른다.

경영학의 구루인 랜디 코미사Randy Komisar의 조언처럼 말이다.
"자기가 밟아온 길들은 앞 유리가 아니라 백미러를 통해 볼 때 더욱 분명하게 이해된다."

"Follow your bliss." 당신의 희열을 따르라.
 

"뭔가를 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한 느낌을 따라가는 것이 내년에 돈이 어디서 나올지 찾아다니는 것보다 더 확실한 선택입니다."
— 조지프 캠벨, 『블리스, 내 인생의 신화를 찾아서』

진로를 찾기 위한 3가지 힌트

첫째, 어렸을 때 하고 싶었던 일을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원하던 것은 ‘세상의 기준’과 무관하게 당신의 무의식이 즐거워하는 일이다. 학교 성적과 세상의 고달픔으로 당신의 마음이 움츠러들기 전, 당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보자.

둘째, 당신의 마음이 누구를 시기하는지 본다. 지인이 어느 분야에서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감정이 동요하는가.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데’라는 마음이 들 때, 온전한 축하를 보내지 못하는 자신을 볼 때, 바로 거기에 진실이 있다. 시기심은 비록 성숙한 감정은 아니지만 정직한 마음의 소리다.

셋째, 대가가 없어도 열심히 하게 되는 일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취미를 통해 천직을 찾아낸다. 보수가 없어도 자꾸만 에너지가 흐르는 곳, 거기가 당신의 길이다. 제대로 하면 점점 더 잘하게 될 것이므로 잠재력과 경쟁력도 있다. 그 일을 하며 돈까지 받는다면 얼마나 신날지 상상해보자.

포커 판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은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이루어진다. 바로 앉을 테이블을 고르는 일이다. 당신의 삶도 마찬가지다.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해보는 것이며, 그 점에 있어서는 설사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걸음마로 걸음을 배웠고 옹알이로 말을 배웠다.

그 길에는 당신만이 닿을 수 있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이렇게 조언한다.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인간’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인간이 되는 것은 가능합니다. 정말로 무언가를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무언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라도 일단 무언가를 해본다’라는 게 아닐까요."

귀한 것은 계획이 아니라 실천이다. 디테일한 100장짜리 사업 계획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한낱 종이에 불과하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다이어리와 스케줄러가 공부에 보탬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공부 자체는 아니다. 행동으로 옮겨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

해야 할 시기에 하지 않으면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한다. 당신은 지금 성장하고 있기를.


"누구나 나이를 먹지만 누구나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미국의 야구 선수 칠리 데이비스Chili Davis의 말을 반드시 기억하기를.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특유의 아우라가 있다.

일본의 양명학자 야스오카 마사히로安岡正篤가 말하길,
사람이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기운이 겉으로 배어 나와
속된 느낌이 사라진다고 했다.

도올 김용옥 선생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외국에서 공부할 때 어떤 교수가 그를 보고 대뜸 "열심히 사는 사람이군요" 하고 말했다고 한다. 어리둥절하던 도올 선생에게 그는 "눈을 보면 압니다"라고 말을 덧붙였다.

당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도 안다. 공부가 잘되는 사람은 목소리가 밝고, 보람찬 기운이 드러나며, 쉬는 모습도 떳떳하다. 최선을 다해 공부하기를. 내면의 빛은 말하지 않아도 드러난다.

"항상 남이 눈치챌 정도로 최선을 다하라."
미국의 장군 조지 패튼George Patton의 말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면 그 사람이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끌리는 것을 화제로 삼고 꺼리는 것은 피하려 한다. "공부는 잘되어가니?"라는 부모님의 물음에 "몰라요" 하고 짜증을 내면 답을 듣지 못해도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국의 추리 소설 작가 얼 스탠리 가드너Erle Stanley Gardner는 원래 변호사였다. 퇴근한 후 밤 11시에서 새벽 3시까지 매일매일 꾸준히 글을 쓰다가 작가가 되었다.

자신을 섬세하게 관찰해보자. 아침에 공부가 잘되는지, 저녁 운동이 맞는지, 식사는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 관찰하고 수정해서 당신의 리듬을 찾아라. 프로세스가 향상되면 생산성이 높아진다. 과정을 개선하면 결과는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사람이다.

하나 둘 하나 둘. 규칙적인 호흡과 발 구름만 존재한 채, 나 자신이 텅 비는 듯한 감각이 있고, 이대로 영원히 달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른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다. 이런 느낌을 일과 공부에서도 맛볼 수 있다면 어떻겠는가. 다른 종류의 러너스 하이Learner’s High가 당신에게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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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인간의 일상생활을 연구하는 것

첫째, 경제학을 배우면 변화하는 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인터넷기업 구글과 유투브는 이메일 서비스와 동영상 서비스를 왜 무료로 제공하는 것일까? 세계 최대 석유매장국가인 베네수엘라는 왜 식량이 부족한 것일까?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은 과연 종이 화폐를 대체할 것인가? 왜 주택 임대료 상한제는주택의 수량과 품질의 저하를 가져 오는가? 생존에 꼭 필요한 물값은 저렴한데생존과는 무관한 다이아몬드의 가격은 왜 비쌀까? 경제학을 배우면 이와 같은경제현상들 뿐만 아니라 경제신문에 등장하는 금융, 세금, 환율, 주식 등 경제적사건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둘째, 경제학을 배우면 경제적 의사결정을 보다 합리적이고 지혜롭게 할 스있게 된다. 학생, 직장인, 주부, 자영업자 등 여러분들은 세상을 살면서 반드시경제적 의사결정을 하여야 한다. 학생들은 진학과 취직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결정을 하여야 하며, 가정에서는 소득을 소비와 투자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 결정하여야 한다. 자영업자는 어떤 사업을 하여야 할지 또는 제품의 가격을 얼마로 결정하여야 할지 결정하여야 한다. 경제학을 배우면 자원의 희소성, 기회비용, 한계효용 등의 기본원리를 이해하여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된다.

셋째, 경제학을 배우면 경제정책의 효과 및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최저임금제가 시행되면 모든 근로자들에게 좋은 것인가? 안전띠 의무화 규제를 하면 과연 교통사고 건수는 감소할 것인가? 사치세를 부과하면 과연 부자들이 그세금을 부담하는 것인가? 담배가격을 인상하면 담배소비는 과연 감소하는가?
균형재정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재정적자가 좋은 것인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인가? 경제학을 배움으로써 여러분들은 유권자로서의 올바른 의사결정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이는 궁극적으로경제적 의사결정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conomy 라는 단어는 원래 집안 살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oiko nomos‘에서 유래한 것처럼 가정의 살림살이와 경제에는공통점이 많다. 어느 가정이든지 많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누가 저녁을 차려야 할지, 누가 빨래를 해야 할지, 가족 중 누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또 그대가로 무엇을 받아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경제학- 유한한 희소자원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연구하는 학문

경제학의 10대 기본원리 중 첫 번째 기본원리는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있다.‘라는 것이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우리가 무엇을 얻고자 하면 대개 그 대가로 무엇인가 포기해야 한다. 

개인이 시간을어느 한 곳에 배분하거나 돈을 어느 한 곳에 쓴다면, 그만큼 다른 용도에사용할 시간이나 돈이 줄어들게 된다. 사회전체의 관점에서도 ‘대포와 버터‘의 사례에서처럼 대포를 선택하면 버터를 포기하게 되며, 버터를 선택하면 대포를 포기하게 된다.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란 어떤 선택을 위해 포기한 모든 것으로 어떤의사결정을 할 때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선택에 대한 기회비용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깨진 유리창 우화‘ 에서처럼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너무 집착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소홀히 하여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는 경향이 있다. 유리창이 깨지지 않았다면 빵집주인은 그 돈을 얼마든지 다른 소비행위에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에 해당하는 기회비용을 반드시 고려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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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눈먼 장님’이나 ‘꿀먹은 벙어리’와 같은 표현을 쓰거나 이 같은 표현을 쓴 정치인의 발언을 인용하는 뉴스는 지금도 많다. 핵심을 보여주는 단어라 하더라도 비하의 개념이 들어간 용어는 인용하지 말아야 한다

언론은 공익적 보도에 대한 책무를 이행했을 때 빛을 발한다. 결국 언론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얘기다. 최소한 부끄러운 뉴스는 내보내지 말아야 한다. 우리 언론인 스스로 말이다.

[사설] ‘성추행 검사’의 변호사 등록 무사통과, 개탄스럽다

서지현 검사에 대한 성추행과 인사 보복으로 지탄을 받았던 안태근 전 검사장이 변호사 등록을 허가받았다. 대한변호사협회(변협)가 지난 25일 등록심사위원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허가 결정을 내린 것이다. 앞서 서울지방변호사회가 ‘부적격’ 의견을 냈음에도 변협이 정반대로 쉽사리 허가를 내준 데 대해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몸을 거쳐야만 한다. 새로운 몸이 있어야만 그 안에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삶을 불어넣을 수 있다."
— 조지 쉬언, 『달리기와 존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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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그 의미를 풀어 보면,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제목은 ‘비극적인’ 과거로부터 얻은 교훈에서 미래에 대한 ‘낙관’이 샘솟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붙인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삶의 의미와 존재 가치를 일깨워 주는 대학자이자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런 그가 강제 수용소에서 한 경험은 이제 개인의 경험이 아닌 인류의 경험이 됐다.

이시형


강제 수용소에서는 모든 상황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을 여기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인간이 지닌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끔찍한 공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작은 고통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강제 수용소에서의 일상이 평범한 수감자들의 마음에 어떻게 반영됐을까 하는 질문에 답하려고 쓴 것이다

수용소 생활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수용소 생활에 대해 그릇된 생각, 즉 감상이나 연민을 갖기 쉽다. 하지만 밖에 있던 사람들은 당시 수감자 사이에서 벌어졌던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과 목숨 자체를 위한 투쟁이자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친구를 구하려는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아니면 이제 곧 끌려갈 친구의 목숨을 구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자기를 대신할 다른 사람, 즉 다른 ‘번호’를 수송자 명단에 집어넣는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믿음을 상실하면 삶을 향한 의지도 상실한다

어느 날 동료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자신을 지탱해 나갈 힘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했다. 일단 그 믿음을 잃고 나면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다시 생기기는 힘들었다.

"아우슈비츠야. 저기 팻말이 있어."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심장이 멈췄다. 아우슈비츠! 가스실, 화장터, 대학살. 그 모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이름, 아우슈비츠! 기차는 망설이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불쌍한 우리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아우슈비츠라는 끔찍한 현실로부터 구해 내고 싶다는 듯이…….


"당신 친구가 간 곳이 바로 저기요. 아마 지금쯤 하늘 위로 올라가고 있을 겁니다."

나는 그가 쉬운 말로 사실을 이야기해 줄 때까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우리는 우스꽝스럽게 벌거벗겨진 몸뚱이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분리시켜 어떤 일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 수용소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수단으로 이런 마음가짐을 가꾸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간을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한 도스토옙스키의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정신 의학적 관찰은 아직 이런 것을 말할 수 있는 단계까지 진전하지 못했다. 우리 중 이런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심리적 반응의 첫 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절망이 오히려 자살을 보류하게 한다

수용소에 있던 사람 중에서 잠깐이라도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나에게도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면서 겪는 고통이 자살을 생각하게 했다.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은 첫 번째 단계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가스실조차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했다.

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너무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창밖을 봤다. 방금 전 밖으로 옮겨진 시체가 동태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간 전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다시 수프를 먹었다.

만약 그때 내가 정신과 의사로서 직업의식을 가지고 나의 감정 결핍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 일을 기억해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그 일이 나에게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작 참기 힘든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다.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일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다.

내가 여기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아무리 감정이 무뎌진 수감자라고 할지라도 분노를 느끼는 순간이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 분노는 육체적인 학대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지막 남아 있던 피하 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에 가죽과 넝마를 씌워 놓은 것같이 됐을 때 우리는 우리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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