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변호사는 유사 사례들만으로도 법이 문제라는 결론에는 자연스럽게 이르렀다. 자식을 기르지 않은 부모가 상속받는 일은 흔하지 않은 세 가지 조건, 즉 ① 부모 중 일방이 이혼이나 가출로 자식에 대한 부양의무을 저버렸고, ② 자식이 미혼 상태에서 부모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③ 죽은 자식에게 재산이있다는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비로소 문제가 될 수 있다. 예전에는 이런 조건이 다 갖춰지는 게 드물었기에 보편적인 정의에 반함에도 불구하고 공론화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혼가정, 한부모 가정 등 가족 형태가 다양해지고 사고사의 경우 보상금이나 손해배상금 명목으로 자식 앞으로 목돈이 나오는일이 많아졌다. 현실은 달라졌는데, 법은 6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그대로이니 그 간극에서 생기는 균열이 점점 커지는 건 당연했다. 미국에서는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은 상속인을 상속결격 사유, 즉 상속인 자격을 박탈하는 사유에 포함하고, 일본에서는 상속인 폐제, 즉 유언이나 가정법원의 판결로 상속을 제한한다. 우리에게도 부양의무 이행 여부에 따라 상속을 제한하는 법이 필요해 보였다. 물론 법이 만들어져도 원칙상 소급 적용이 되지 않으니 이 사건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론이 입법 필요성에 공감한다면 상속재산 분할 심판 청구 사건에서 기여분과 관련해 조금은 유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 변호사는 구호인 씨에게 제안했다. 동생의 이름에 기대 입법운동을 해보자고. - P93
민식이 2011. 11. 18. ~ 2019. 9. 11. 충남 아산에서 김태양 • 박초희 부부의 첫 아이로 태어났다. 부모의 애정을 한몸에 받는 아이였고, 두 동생에게는 의젓한 형이었다. 2019년 9월 11일집 근처 어린이보호구역 내 횡단보도를 건너다 아홉 살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숨졌다.
민식이법 민식이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어린이보호구역 내 안전시설을 강화하는 도로교통법 개정 조항과 어린이보호구역 내 어린이 치사상 사고에 대해 가중처벌하는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 조항을 말한다. 두 개정법은모두 2019년 12월 10일 국회를 통과해 2020년 3월 25일 시행되었다. - P114
민식이법에 가장 큰 힘이 된 여론은,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후 돌연 그 얼굴을 바꿔 민식이 부모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다. 민식이 사건의 가해자가 당초 유가족의 오해와 달리 제한 속도이하로 운행한 사실이 드러나며 여론이 오히려 가해자를 동정했다. 또한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내 아이가 사고로 죽을 수도있지만, 내가 미처 아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실수로 사고를 낼수도 있는데, 그 경우 민식이법에 따라 가중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이 부실. 과잉 입법 논리와 접목되며 여론이 갑작스레 등을 돌렸다. - P123
사람 이름을 딴 법에는 장단점이 있다. 특정 사건에 느끼는 안타까움이 커서 공감대가 빨리 형성되므로 상대적으로 쉽게 법개정이 될 수 있고, 딱딱하고 긴 정식 법률명 대신 누군가의 이름으로 부르면 간명하기도 하다. 하지만 단시간에 형성된 여론의 압박으로 국회가 심사에 소홀할 수 있고, 법 개정의 계기가 된 이들의 사생활이 과하게 파헤쳐지거나 이용되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민식이법이 그랬다. 특정범죄가중법에 대한비판이 유가족을 향한 과도한 비난이 되어 그들의 삶을 할퀴었다. 민식이법을 이야기해야 하는 건 사람 이름으로 불리는 법을 대하는 우리의 이중적인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 P127
도로교통법 개정안과 달리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주의 의무를위반해 어린이 사상사고를 내면 가중처벌하는 내용의 특정범죄가중법 개정안은 민식이 사건을 계기로 처음 발의되었다. 교통사고 관련 형사 기본법인 교통사고처리법은 다른 형사법과 달리 기본적으로 가해자의 형사 책임을 되도록 묻지 않기위해 만든 법이다. 자동차가 보편적인 교통수단인 만큼 사고는 불가피하게 발생하게 마련이고, 교통사고는 대개 고의가 아닌 과실이므로 교통사고로 인한 손해는 민사로 신속히 해결하고 형사처벌은 자제한다는 취지다. 그래서 교통사고 중에서도 과실이 아닌 고의로 저지른 범죄들 중 비난 가능성이 큰 범죄만 특정범죄가중법으로 편입되었는데, 이른바 뺑소니라 불리는 사고 후 도주 차량(피해자가 사망한 경우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 음주 등 약물운전 위험의 경우(피해자가 사망한 경우 ‘무기또는 3년 이상의 징역)였다. 문제는 민식이법에서는 과실범이어도 고의범과 같은 수준으로 처벌한다는 점이다. 강훈식 의원안은 어린이 사망 사고가났을 때 무기 또는 징역 3년 이상에 처한다는 내용이고, 이명수의원안은 사망 시 외에 상해 시 (1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500만원 이상 3천만원 이하의 벌금) 처벌 규정도 포함했다. - P129
국회가 졸속 심사로 문제의 원인을 제공했다면 언론과 전문가들은 ‘뒷북‘으로 문제를 더 키웠다. 법이 통과되기 전까지 개정안의 법정형과 절차 위반, 졸속 심사에 대해 언급한 보도는거의 없었다. ‘마침내‘라는 부사까지 쓰며 민식이법을 환영한언론은 뒤늦게 특정범죄가중법 개정을 비판했다. 입법 과정이 초스피드였다는 점, 법안이 상임위에 상정되면 법안심사소위로 일단 넘겨 심사하는 관행과 달리 특정범죄가중법은 상정한그날 전체회의에서 곧바로 가결했다는 점, 토론이 부실했다는 점도 그제야 보도됐다. 과잉 형벌을 우려하는 법률 전문가들의 의견이 나온 것 역시 법 시행 이후였다. 여론의 온도가 입법 전후로 달라진 건 당연했다. 특정범죄가중법이 과잉 형벌이냐 아니냐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국회에서 절차를 위반했고, 법안 심사 때 예상 가능한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는 유가족을 향한 여론의 가혹한 비난, 불필요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우리는 과실범의 가중처벌 규정을비판하기 위해서 가장 손쉬운 상대를 고른 것이 아닐까. - P134
임세원 1971, 8, 1.-2018.12.31.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이자 강북상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일했다. 우울증과 불안 장애를 주제로 100여 편의 학술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게재하는 등 활발한 연구 활동을 했고, 학술지 《Anxiety andMood》의 편집위원장을 지냈다.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부소장으로서 직장인의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과학적으로 평가하고 개선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고, 한국자살예방협회 교육위원장으로서 한국형 표준자살예방교육 프로그램 ‘보고듣고말하기‘ 개발에 헌신했다. 갑작스런 허리 통증과 그로 인한 우울증을 앓으며 자살까지 생각한 경험을 진솔하게 써 내려간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라는 책으로 우울증 환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전하기도 했다. 2018년 12월 31일 진료 중 환자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급박한 피살의 위협에도 주위에 적극적으로 위험을 알리는 등 타인에 대한구조 행위를 해 의사자死로 인정받았다.
임세원법 임세원의 유가족이 ‘안전한 진료 환경과 정신건강 치료 지원을 당부한 것이계기가 되어 개정된 의료법 및 ‘정신건강 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 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을 일컫는다. 의료법은 의료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의료행위를 하는 의료인 등에 대한 폭행으로 상해, 중상해 또는 사망의 결과가 발생한 경우 가중처벌하는 내용과 의료기관 개설자의 안전·보안 조치 의무를 담았다. 정신건강복지법은 자타해 위험이 있는 환자가 퇴원할 때 외래치료 지원 및 지역정신건강복지센터 사례 관리를 강화하는 내용 등으로 개정되었다. 두 법 모두 2019년 4월 5일 국회를 통과해 2019년 10월 24일 시행되었다. - P146
며칠 후 우리 사회는 또 다른 충격에 빠졌다.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이를 잃고 누구보다 비통하고 참담할 유가족의 입장 발표를 듣고서였다.
"우리 가족의 자랑이던 임세원 의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의료진의 안전이 지켜지고, 모든 사람이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 사회적낙인 없이 적절한 정신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빈소가 차려진 2019년 1월 2일, 장례식장에서 유가족이 밝힌 공식 입장을 들은 기자들이 당황했다. 환자를 도우려 한의사가 그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사실만으로 온 사회가 분노하고있는데, 정작 유가족은 가해자를 엄벌해달라고 말하는 대신 정신질환자를 향한 사회의 낙인을 염려했다. 가해자를 심신미약으로 봐주지 말고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위험한 정신질환자는 사회에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떠들고 공감한 우리는 심한 부끄러움에 빠졌다. 우리가 무고한 이의 목숨을 부당하게 앗아간 잔인한 ‘가해자‘를 볼 때, 유가족은 몇 년째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만 ‘환자‘를 보았다. 임세원이 그랬듯 말이다. - P150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임세원 사건의 본질이 핵가족화에 있다는 설명이었다. 핵가족화와 임세원 사건이 무슨 관계가 있나 싶어 의아해하니 그가 자세히 말해주었다.
"대부분의 정신질환자들은 순하고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급성기 환자들이 공격성을 띨 때 자해나 타해 위험이 있는 게 문제이지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급성기 정신질환자들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그 짐을 다 가족이 떠맡았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못 나오게 하고 숨기고 살든, 정신병원이나 요양시설을 보내든가족이 책임을 졌죠. 그런데 인구구조나 가족제도가 변하면서 더이상 가족이 책임질 수 없는 사회가 온 겁니다. 정신질환자들에대한 책임이 가족에서 국가와 사회로 변화하는 전환기에 와 있는데 그걸 빨리 대처를 하지 못했기에 이런 사고가 생긴 것이죠."
고개가 끄덕여졌다. 위험한 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정신질환자를 밖에 돌아다니게만 해도 그 가족을 처벌하는 조항이 2012년까지 건재하지 않았나.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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