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사들 중 상당수가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골괴사 등부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트라우마였다. 심해 잠수를 하는 이들에겐 바다에서 시신을 건져내는 일이 아주 드물지는 않은데, 유독 세월호 참사에서 상흔이 심한 건자발적으로 달려가 목숨을 걸고 작업을 했음에도 그 끝에 남은게 자부심이 아니라 배신감과 수치감이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만약 이들이 의상자로 인정받았다면, 그들의 희생과 헌신을의로운 행위라고 법적으로 인정해주었다면 그동안의 수치심과모멸감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어느 정도는 털어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참사 이후 6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김관홍법이 만들어져 민간잠수사들이 최소한의 보상을 받게 되었지만, 세월호피해지원법에서 보상은 그 본질이 ‘손실 보상‘이다. 부상을 당해 앞으로 잠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금전적으로 보상해줄 뿐, 순수하게 달려간 그 마음에 갖추는 예우나 지원의 성격이 아니다. 의로운 행위에 일그러진 보상이 못내 안타깝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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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제와 범위에 관하여

나는 지난 5년간 이 책의 집필에 매달렸는데 이따금 내 생각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추적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었다. 생소한 이름들과 기술적인 전문용어들을 늘어놓으면 독자들에게 어수선한느낌을 줄 것 같아 그런 출처들은 책 뒷부분의 주에 따로 정리해 놓았다. 나는 이 책에 소개된 인물들에게 실명을 싣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실명을 실어야 실화의 근거가 더 확실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신 질환의 오명을 씻기 위한 목적도 있는 책이기에 우울증 환자들의 신분을 떳떳이 밝히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실명을 밝힐 수 앖는 일곱 명은 가명을 썼다. - P9

우울증은 다양한 이름들과 모습들로, 생화학적이고 사회적인 이유들로 어디에나 존재해 왔다. 나는 이 책에 우울증의 시간적, 공간적 범위를 모두 담으려 애썼다. 우울증이 때때로 현대 서유럽 사회 중산층의 개인적인 고통으로 여겨지는 것은 바로 이 집단에서갑자기 우울증을 인식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치료하고받아들일 새로운 소양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지, 그들만 우울증에대한 특권을 지니고 있어서는 아니다. 인간의 고통을 모두 담을 수있는 책은 없지만 나는 그 고통의 범위를 보여 줌으로써 우울증에시달리는 이들의 해방을 도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근절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우울증을 완화시킨다고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지만 이 책에 담긴 지식이 사람들의 고통을 얼마간 덜어 주기를 바란다. - P13

1 슬픔과 우울

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절망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울은 그 절망의심리 기제다. 우리에게 찾아온 우울증은 자아를 변질시키고, 마침내 애정을 주고받는 능력까지 소멸시킨다. 우울증은 우리의 내면이 홀로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것은 타인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자신과의 평화를 유지하는 능력까지 파괴한다. 사랑은, 우울증을 예방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의 충격을 완화하는 장치가 되어 마음을 보호해준다. 약물치료와 심리치료는 우리가 더 쉽게 사랑하고 사랑받을수 있도록 만들어 이런 보호 기능을 되살려 줄 수 있으며 그래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정신이 건강한 상태에서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신을 사랑하며, 이런 열정들은 우울증의 반대인 활기찬 목적의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랑은이따금 우리를 저버리며 우리도 사랑을 저버린다. 우울증에 빠지면 모든 활동, 모든 감정, 나아가 인생 자체의 무의미함이 자명해진다. 이 사랑 없는 상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감정은 무의미함이다. - P17

우울증은 부분적으로는 사회적, 의학적 현상이지만 감정적 변덕에 따른 언어적 변덕의 결과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울증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우리에게 억지로 가해지고 그다음에는 외부적 요인과도 무관해지는 감정적인 고통일지 모른다. 우울증을 단순히 커다란 고통이라 할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큰 고통은 우울증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슬픔은 상황에걸맞은 우울함이지만 우울증은 상황에 걸맞지 않은 슬픔이다. 우울증은 가을에 밑동에서 부러져 들판을 굴러다니는 회전초처럼 자양분을 주는 대지와 분리되어서도 죽지 않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자라는 고뇌다. 그것은 오로지 은유와 우화로만 설명될 수 있다. 성안토니오는 사막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찾아온 천사들과 화려하게 치장한 악마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었냐는 물음에 그들이 떠난후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대답했다. 천사가 왔다가 떠나면 그의 존재로 인해 힘이 솟고 악마가 왔다 떠나면 공포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슬픔은 우리에게 강하고 분명한 생각들과 자신의 깊이에 대한 이해를 남기는 허름한 옷차림의 천사다. 그리고 우울증은 우리를 겁에 질리도록 만드는 악마다. - P18

 붕괴가 아무리 갑작스럽게 느껴진다 해도그것은 부식이 누적된 결과다. 결코 매우 극적이거나 부식의 누적과 별개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 비를 맞은 순간부터 녹이 대들보의 철근을 먹어 들어간 시점까지의 긴 시간을 의미한다. 극히핵심적인 부분에 부식이 생겨 붕괴가 전체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보이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그보다는 부분적인 붕괴가 더 빈번하다. 한 부분이 붕괴하면서 다른 부분에 충격을 주어 극적으로 부식의 균형을 깨는 것이다.
부식을 체험하는 것, 거의 날마다 내리는 비의 파괴에 노출된자신을 발견하는 것, 자신이 연약한 존재로 변모하고 있고 자신의 점점 더 많은 부분들이 강풍에 날려 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아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감정의 녹이 더 많이 슨다. 우울증은 생기를 빼앗고 하루하루를 뿌연 안개로 덮고 일상적인 행동들을 힘겹게 만든다. 우리를 피곤하고 지치고 망상에 시달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헤쳐 나갈 수 있다.
행복하게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헤쳐 나갈 수는 있다. 중증 우울증이 시작되는 붕괴 시점에 대한 정의는 아직 내려지지 못하고 있지만 그 지점에 도달하면 그것을 혼동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
중증 우울증은 탄생이자 죽음이다. 어떤 것의 새로운 출현인동시에 어떤 것의 완전한 소멸이다.  - P21

육체와 정신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종종 화학이 동원된다. 의사가 우울증을 "화학적 작용"이라고 말할 때 환자가 안도감을보이는 것은 충분한 근거가 있는 슬픔과 난데없는 슬픔을 구분하고 완전한 자아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화학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이 싫다거나 늙어 가는 것이 걱정스럽다거나사랑에 실패했다거나 가족을 미워한다거나 하는 스트레스성 불만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부담감을 덜어 주는 듯하다. 화학적이란 단어는 사람들을 죄책감으로부터 유쾌하게 해방시켜 준다. 만일 우리의 뇌가 우울증의 소인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는 우울증에 걸린 것에 대해 자신을 탓할 필요가 없다. 자신을 탓하든 진화를 탓하든 기억할 점은, 탓하는 것 자체도 화학적 작용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행복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화학과 생물학은 ‘진짜‘ 자아에 작용하는 것들이 아니며, 우울증은 그것을 앓는 사람과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우울증의 치료는 정체성의 분열을 완화시켜 일종의 정상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요소를 지닌 정체성을 재조정하여 사람을 조금 변화시키는 것이다. - P27

고소공포증은 세상에서 가장 흔한 공포증인데 우리 조상들에게 분명 유익한 것이었으리라. 고소공포증이 없었다면 벼랑에서 떨어져 자손을 남기지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벼랑 끝에 서서 아래를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난다. 몸이 그 어느 때보다 작동을 잘해서 완벽한 정확성을 가지고 뒤로 물러나야 하는데 제대로 되지 않는다. 꼭 떨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고 그렇게 한참을 내려다보다 보면 진짜로 떨어진다. 몸이 마비되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잠베지강 위로 높은 절벽이 깎아지른 듯 솟아 있었다. 우리는 젊은 혈기에 누가 더 절벽 끝에 바짝 다가가 사진의 포즈를 취할 수 있는지 시합을 했다. 모두가 선 자세보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더 다가갈 수 있었고, 절벽 끝에 가까워지자 현기증과 함께 마비 증세를 느꼈다. 나는 우울증이란 것이 대개는 우리를 벼랑 끝 너머로 보내는 것이라기보다는(그러면 곧 죽게 될 것이다.) 벼랑 끝으로 바싹 끌어당겨 너무 멀리갔다는 생각에 공포에 젖어 현기증으로 균형 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때 빅토리아 폭포에서, 실제 절벽 끝보다 훨씬 안쪽에 우리가 지나가지 못할 보이지않는 끝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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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당신은 우라늄의 두 부분을 어떻게 다시 합칠 생각이오? 그리고 언제? 공중에서?」
「네. 바로 그거예요. 물리학자님! 아님 혹시 화학자님이신가요? ......오, 아니라고요?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지금 선생님들의 문제는 원자를 폭발시킬 수는 있는데 그걸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다는 거잖아요……. 하지만 만일 임계 질량의 우라늄을 반으로 나눠 버리면, 그건 더 이상 임계 질량이 아니잖아요, 그렇죠? 거꾸로, 이렇게 나눠진 두 개의 비임계 질량을 합쳐 놓으면 다시 임계 질량이 되죠.」「그렇다면 어떻게 이 두 개의 질량을 합쳐 놓을 생각이시오? 가만있자, 성함이…… 실례지만 당신은 누구시죠?」 수석물리학자 오펜하이머가 물었다.
「저는 알란이에요.」「그렇다면 알란 씨는 어떻게 우리가 이 두 질량을 하나로 합쳐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우리가 늘 쓰는 재래식 폭약을 쾅 터뜨려서요. 저는 이런종류의 폭발물 다루는 데 자신 있지만, 선생님들께서도 잘하시리라고 생각해요.」물리학자들은 그렇게 멍청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이런 요청에서 일하는 물리학자들은 더더욱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수석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는 쭉 펼쳐 놓으면 수십 미터는 될기나긴 방정식으로 머릿속에서 단 몇 초 만에 휘리릭 풀었고, 지금 커피를 나르는 웨이터의 말이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세상에! 이렇게 복잡한 문제가 이렇게나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니! 우리가 늘 쓰는 재래식 폭약을 폭탄의 뒤쪽에서 터뜨려 비임계 질량의 우라늄을 앞으로 밀어내어 폭탄 앞쪽의 또다른 비임계 질량과 부딪치게 한다면...? 그 순간 두 개의 비임계 질량은 융합되어 임계 질량으로 변하리라. 중성자들은 움직이기 시작하고, 원자들은 분열되리라. 그리하여 연쇄 반응이시작되어…….
「꽝!」 수석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네, 바로 그거예요! 수석 물리학자님께선 벌써 다 이해하신것 같네요..... 혹시 커피 더 원하시는 분 계세요?」 알란이 말했다. - P143

그동안 알란과 소냐는 매우 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금방 마음이 통했다. 사실 그들에게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가 어느 날 창문에서 뛰어내려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면, 다른 하나는 호수에 뛰어들어 똑같은 선택을 했다. 그리고 둘 다 이 일이 있기 전에는 오랫동안 세상을 편력한 바 있었다. 더구나 알란은 주름으로 쭈글쭈글한 소냐의 머리통이 지혜 깊은 노인네의 머리통과도 비슷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 P156

폭약 전문가 알란 칼손, 주방 보조 아밍, 그리고 이들에게큰 은혜를 입게 된 장칭은 야음을 틈타 배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다음 과거 장칭이 남편의 부대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바있는 산악 지대로 들어갔다. 얼마 안 있어 아밍이 준비한 비상식량이 바닥났지만, 이 지역의 티베트 유목민 사이에서 장칭은 잘 알려진 인물이어서 먹을 것을 구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처럼 티베트인들이 인민 해방군 사람들을 호의적으로 대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내전에서 승리하면 티베트가 독립을 얻는다고 믿고 있었던것이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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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센트미하이가 설명한 도표를 살펴보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과제 수준과 능력 수준의 관계가 달라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처음에는 ‘불안‘의 영역에 있었다 해도 계속해 나가는 동안에 능력이 향상되어 결국은 ‘각성‘의 영역을 거쳐 ‘몰입‘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몰입 영역에서 같은 일을 계속하면 결국은 많은 기술을 습득하게 되어 몰입에서 ‘자신감‘ 영역으로 옮겨간다. 그렇게되면 이른바 ‘안정‘ 영역에 들어가 편안한 상태가 되기는 하지만, 당연히 그 이상의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 즉, 자신의 능력과 업무의난이도는 역동적인 관계이며 몰입을 계속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 관계를 주체적으로 바꿔 가야만 한다.
칙센트미하이는 ‘행복한 인생은 어떤 것일까‘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심리학의 길로 나아갔고, 그렇게 해서 다다른 것이 몰입의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몰입의 상태에 있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많은 사람이 ‘무기력‘의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칙센트미하이는 한탄했다. 물론 무기력의 영역에서빠져나와 몰입 영역을 목표로 나아간다 해도 능력 수준과 과제 수준을 결코 단번에 높일 수는 없다. 우선 과제 수준을 높이고 일에 몰입함으로써 능력 단계를 올려 나가는 수밖에 없다. 행복한 몰입의 영역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마음 편하지 않은 걱정이나 불안의 영역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게 아닐까.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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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변호사는 유사 사례들만으로도 법이 문제라는 결론에는 자연스럽게 이르렀다. 자식을 기르지 않은 부모가 상속받는 일은 흔하지 않은 세 가지 조건, 즉 ① 부모 중 일방이 이혼이나 가출로 자식에 대한 부양의무을 저버렸고, ② 자식이 미혼 상태에서 부모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③ 죽은 자식에게 재산이있다는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비로소 문제가 될 수 있다. 예전에는 이런 조건이 다 갖춰지는 게 드물었기에 보편적인 정의에 반함에도 불구하고 공론화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혼가정, 한부모 가정 등 가족 형태가 다양해지고 사고사의 경우 보상금이나 손해배상금 명목으로 자식 앞으로 목돈이 나오는일이 많아졌다. 현실은 달라졌는데, 법은 6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그대로이니 그 간극에서 생기는 균열이 점점 커지는 건 당연했다.
미국에서는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은 상속인을 상속결격 사유, 즉 상속인 자격을 박탈하는 사유에 포함하고, 일본에서는 상속인 폐제, 즉 유언이나 가정법원의 판결로 상속을 제한한다. 우리에게도 부양의무 이행 여부에 따라 상속을 제한하는 법이 필요해 보였다. 물론 법이 만들어져도 원칙상 소급 적용이 되지 않으니 이 사건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론이 입법 필요성에 공감한다면 상속재산 분할 심판 청구 사건에서 기여분과 관련해 조금은 유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 변호사는 구호인 씨에게 제안했다. 동생의 이름에 기대 입법운동을 해보자고. - P93

민식이
2011. 11. 18. ~ 2019. 9. 11.
충남 아산에서 김태양 • 박초희 부부의 첫 아이로 태어났다. 부모의 애정을 한몸에 받는 아이였고, 두 동생에게는 의젓한 형이었다. 2019년 9월 11일집 근처 어린이보호구역 내 횡단보도를 건너다 아홉 살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숨졌다.

민식이법
민식이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어린이보호구역 내 안전시설을 강화하는 도로교통법 개정 조항과 어린이보호구역 내 어린이 치사상 사고에 대해 가중처벌하는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 조항을 말한다. 두 개정법은모두 2019년 12월 10일 국회를 통과해 2020년 3월 25일 시행되었다. - P114

민식이법에 가장 큰 힘이 된 여론은,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후 돌연 그 얼굴을 바꿔 민식이 부모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다. 민식이 사건의 가해자가 당초 유가족의 오해와 달리 제한 속도이하로 운행한 사실이 드러나며 여론이 오히려 가해자를 동정했다. 또한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내 아이가 사고로 죽을 수도있지만, 내가 미처 아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실수로 사고를 낼수도 있는데, 그 경우 민식이법에 따라 가중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이 부실. 과잉 입법 논리와 접목되며 여론이 갑작스레 등을 돌렸다. - P123

사람 이름을 딴 법에는 장단점이 있다. 특정 사건에 느끼는 안타까움이 커서 공감대가 빨리 형성되므로 상대적으로 쉽게 법개정이 될 수 있고, 딱딱하고 긴 정식 법률명 대신 누군가의 이름으로 부르면 간명하기도 하다. 하지만 단시간에 형성된 여론의 압박으로 국회가 심사에 소홀할 수 있고, 법 개정의 계기가 된 이들의 사생활이 과하게 파헤쳐지거나 이용되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민식이법이 그랬다. 특정범죄가중법에 대한비판이 유가족을 향한 과도한 비난이 되어 그들의 삶을 할퀴었다. 민식이법을 이야기해야 하는 건 사람 이름으로 불리는 법을 대하는 우리의 이중적인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 P127

도로교통법 개정안과 달리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주의 의무를위반해 어린이 사상사고를 내면 가중처벌하는 내용의 특정범죄가중법 개정안은 민식이 사건을 계기로 처음 발의되었다.
교통사고 관련 형사 기본법인 교통사고처리법은 다른 형사법과 달리 기본적으로 가해자의 형사 책임을 되도록 묻지 않기위해 만든 법이다. 자동차가 보편적인 교통수단인 만큼 사고는 불가피하게 발생하게 마련이고, 교통사고는 대개 고의가 아닌 과실이므로 교통사고로 인한 손해는 민사로 신속히 해결하고 형사처벌은 자제한다는 취지다. 그래서 교통사고 중에서도 과실이 아닌 고의로 저지른 범죄들 중 비난 가능성이 큰 범죄만 특정범죄가중법으로 편입되었는데, 이른바 뺑소니라 불리는 사고 후 도주 차량(피해자가 사망한 경우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 음주 등 약물운전 위험의 경우(피해자가 사망한 경우 ‘무기또는 3년 이상의 징역)였다.
문제는 민식이법에서는 과실범이어도 고의범과 같은 수준으로 처벌한다는 점이다. 강훈식 의원안은 어린이 사망 사고가났을 때 무기 또는 징역 3년 이상에 처한다는 내용이고, 이명수의원안은 사망 시 외에 상해 시 (1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500만원 이상 3천만원 이하의 벌금) 처벌 규정도 포함했다.  - P129

국회가 졸속 심사로 문제의 원인을 제공했다면 언론과 전문가들은 ‘뒷북‘으로 문제를 더 키웠다. 법이 통과되기 전까지 개정안의 법정형과 절차 위반, 졸속 심사에 대해 언급한 보도는거의 없었다. ‘마침내‘라는 부사까지 쓰며 민식이법을 환영한언론은 뒤늦게 특정범죄가중법 개정을 비판했다. 입법 과정이 초스피드였다는 점, 법안이 상임위에 상정되면 법안심사소위로 일단 넘겨 심사하는 관행과 달리 특정범죄가중법은 상정한그날 전체회의에서 곧바로 가결했다는 점, 토론이 부실했다는 점도 그제야 보도됐다. 과잉 형벌을 우려하는 법률 전문가들의 의견이 나온 것 역시 법 시행 이후였다. 여론의 온도가 입법 전후로 달라진 건 당연했다.
특정범죄가중법이 과잉 형벌이냐 아니냐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국회에서 절차를 위반했고, 법안 심사 때 예상 가능한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는 유가족을 향한 여론의 가혹한 비난, 불필요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우리는 과실범의 가중처벌 규정을비판하기 위해서 가장 손쉬운 상대를 고른 것이 아닐까. - P134

임세원
1971, 8, 1.-2018.12.31.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이자 강북상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일했다. 우울증과 불안 장애를 주제로 100여 편의 학술 논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게재하는 등 활발한 연구 활동을 했고, 학술지 《Anxiety andMood》의 편집위원장을 지냈다.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부소장으로서 직장인의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과학적으로 평가하고 개선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고, 한국자살예방협회 교육위원장으로서 한국형 표준자살예방교육 프로그램 ‘보고듣고말하기‘ 개발에 헌신했다. 갑작스런 허리 통증과 그로 인한 우울증을 앓으며 자살까지 생각한 경험을 진솔하게 써 내려간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라는 책으로 우울증 환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전하기도 했다. 2018년 12월 31일 진료 중 환자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급박한 피살의 위협에도 주위에 적극적으로 위험을 알리는 등 타인에 대한구조 행위를 해 의사자死로 인정받았다.

임세원법
임세원의 유가족이 ‘안전한 진료 환경과 정신건강 치료 지원을 당부한 것이계기가 되어 개정된 의료법 및 ‘정신건강 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 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을 일컫는다. 의료법은 의료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의료행위를 하는 의료인 등에 대한 폭행으로 상해, 중상해 또는 사망의 결과가 발생한 경우 가중처벌하는 내용과 의료기관 개설자의 안전·보안 조치 의무를 담았다. 정신건강복지법은 자타해 위험이 있는 환자가 퇴원할 때 외래치료 지원 및 지역정신건강복지센터 사례 관리를 강화하는 내용 등으로 개정되었다. 두 법 모두 2019년 4월 5일 국회를 통과해 2019년 10월 24일 시행되었다. - P146

며칠 후 우리 사회는 또 다른 충격에 빠졌다.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이를 잃고 누구보다 비통하고 참담할 유가족의 입장 발표를 듣고서였다.

"우리 가족의 자랑이던 임세원 의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의료진의 안전이 지켜지고, 모든 사람이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 사회적낙인 없이 적절한 정신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빈소가 차려진 2019년 1월 2일, 장례식장에서 유가족이 밝힌 공식 입장을 들은 기자들이 당황했다. 환자를 도우려 한의사가 그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사실만으로 온 사회가 분노하고있는데, 정작 유가족은 가해자를 엄벌해달라고 말하는 대신 정신질환자를 향한 사회의 낙인을 염려했다. 가해자를 심신미약으로 봐주지 말고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위험한 정신질환자는 사회에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떠들고 공감한 우리는 심한 부끄러움에 빠졌다. 우리가 무고한 이의 목숨을 부당하게 앗아간 잔인한 ‘가해자‘를 볼 때, 유가족은 몇 년째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만 ‘환자‘를 보았다. 임세원이 그랬듯 말이다.  - P150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임세원 사건의 본질이 핵가족화에 있다는 설명이었다. 핵가족화와 임세원 사건이 무슨 관계가 있나 싶어 의아해하니 그가 자세히 말해주었다.

"대부분의 정신질환자들은 순하고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급성기 환자들이 공격성을 띨 때 자해나 타해 위험이 있는 게 문제이지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급성기 정신질환자들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그 짐을 다 가족이 떠맡았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못 나오게 하고 숨기고 살든, 정신병원이나 요양시설을 보내든가족이 책임을 졌죠. 그런데 인구구조나 가족제도가 변하면서 더이상 가족이 책임질 수 없는 사회가 온 겁니다. 정신질환자들에대한 책임이 가족에서 국가와 사회로 변화하는 전환기에 와 있는데 그걸 빨리 대처를 하지 못했기에 이런 사고가 생긴 것이죠."

고개가 끄덕여졌다. 위험한 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정신질환자를 밖에 돌아다니게만 해도 그 가족을 처벌하는 조항이 2012년까지 건재하지 않았나. - P167

사랑이(가명)
2013-
2013년 여름, 혼인하지 않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않아 엄마가 떠나고 완전히 연락을 끊어 줄곧 아빠 품에서 자랐다. 미혼부혼자서 출생신고를 하지 못하는 법 때문에 여러 번의 소송을 거쳐 14개월늦게 출생신고가 되었다. 이름처럼 사랑스럽게 자라 어느덧 의젓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사랑이법
사랑이 아빠 김지환 씨의 사연이 계기가 되어 개정된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제57조를 말한다. 미혼부가 단독으로 아이의 출생신고를 하는 것이 원래는 불가능하지 않았으나, 2011년 6월 30일 대법원이 "부가혼인 외의 자구에 대한 출생신고 시 모를 불상으로 신고할 경우 이를 수리하여서는 아니 된다"라는 내용의 가족관계등록선례(제201106-2)를 제정한후 매우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개정된 법에서는 신청 절차 한 번으로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했다. 2015년 4월 30일 국회를 통과해 그해 11월 19일 시행되었다. - P180

아동인권단체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보편적출생등록제도라고 주장한다. 아이가 태어날 때 병원에서 곧바로 출생을 국가에 통보해 출생신고에서 누락되는 아이가 없게 하면 부모가 아이를 출생신고 하지 않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어 아동 학대나 방임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도 그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다. 2019년 <포용국가 아동정책>을 통해 출생통보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정부는 2021년6월 의료기관이 국가에 출생사실을 통보하도록 하는 내용을담은 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보편적출생등록제도가 필요한 이유는 어떤 아이도 부모를 선택해 태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와 ‘하민이‘들이 존재하는 사회는 부모가 누구인가에 따라 태어난 아이를 차별하는사회다. 그 아이들에게는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의 문장이 태어날 때부터 무너져 있다. "아동은 태어난 즉시 출생등록되어야 한다"
는 유엔 아동권리협약(제7조)의 저 당연한 법문이 아프게 다가오지 않게, 존재하지만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아이들이 더 이상없는 세상이 반드시, 하루빨리 와야 한다. - P198

김관홍
1973. 6. 20. 2016, 6. 17.
경기도 고양시에서 태어났다. 군 제대 후인 1995년 레포츠 잠수를 배우기시작해 레포츠 잠수 강사와 산업잠수사로 일했다. 2014년 4월 23일 세월호 실종자 수습을 위한 민간잠수사팀에 합류해 같은 해 7월 10일 해경의철수 명령으로 현장을 떠날 때까지 팀원들과 함께 292명의 실종자를 수습했다. 민간잠수사팀 선임인 공우영 잠수사가 해경에 업무상 과실치사로 기소된 일 등을 계기로 현장에서 벌어진 부당한 일들과 정부의 불의에 대해적극적으로 발언했다. 허리 디스크, 어깨 회전근막 파열, 잠수병 등 여러 부상과 트라우마를 입었으나 정부의 치료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후유증에 시달렸고, 다시는 잠수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수면 장애와 감정조절 장애에 시달리다 2016년 5월 17일, 아내와 어린 세 남매를 남겨둔 채심장 쇼크로 사망했다.

김관홍법
2016년 6월 20일 ‘4·16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상희생자 및 피해자 정의 규정을 확대해 세월호 구조·수습 과정에서 희생되거나 피해받은 이들이 손해배상 등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으로 발의된 법안이다. 민간잠수사에 한정된 법안은 아니었으나 발의 직전 김관홍이 숨지면서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김관홍법이라고 불렀다. 2018년 7월, 발의안과달리 민간잠수사에 대해 손실보상을 하는 내용으로 대폭 축소되어 상임위에서 수정가결되었다. 법사위 체계·자구 심사로 넘겨진 후 일부 의원들의 반대로 2년 넘게 묶여 있다가 20대 국회 마지막 회의가 열린 2020년 5월 20일, 법사위와 본회의를 통과해 같은 해 6월 9일 공포되고, 9월 10일 시행되었다. - P206

같은 해 7월 10일 해경은 잠수 방식을 바꾼다며 25명의 잠수사들에게 문자 한 통으로 철수를 통보했다. 그때까지 292명의 실종자를 수습하는 성과를 낸 잠수 방식을 왜 갑자기 바꿔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70여 일간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까지 걸고 일한 잠수사들에게 양해도 없이 달랑 문자 한 통만을 보낸 것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김관홍은 허탈함을 넘어 분노에 휩싸였다. 해경을 찾아가 항의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미수습자 11명을 향한 미안함과 도우러 왔다가 쫓겨나게 된 자괴감에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25명의 잠수사는 잠수병 전문 치료 시설과 잠수의학 전문의가 있는 삼천포서울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았다. 안전 수칙을 어겨가며 잠수했으니 다들 몸이 말이 아니었다. 근육이 찢기고인대가 늘어난 건 다반사였다. 골괴사가 발생해 어깨와 고관절, 무릎뼈가 썩어 들어가거나 신장병이 악화되어 투석을 받는이도 있었다. 김관홍은 목 디스크가 심했고, 골괴사도 진행되고있었다. 하반신 감각이 떨어져 대소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열 발자국을 쉼 없이 걸어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잠수는 물론 일상생활조차 어려울 정도로 몸이 망가져 있었다.
트라우마도 심했다. 시신을 수습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달려가 위험을 감수하고 도왔지만 상처만 남았기 때문이었다. 실종자를 찾고 있을 때 청와대 대변인이 잠수사들이 ‘일당 100만 원에 시신 한 구당 500만 원‘을 받는다며 악의적 왜곡을 하기도 했다. 실종자 11명을 바닷속에 둔 채 쫓기듯 세월호를 나왔을 때는 일을 마무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돌덩이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환청과 환영, 악몽에 시달렸다. 심해에서 건져낸 아이들 건져내지 못한 이들이 밤마다 찾아왔다. - P210

개정안이 국회에 접수된 날은 김관홍이 세상을 떠난 지 사흘째인 2016년 6월 20일, 그가 살아 있었다면 44번째 맞을 생일이었다. 의원 발의 법안은 최소 공동 발의자가 10명인데, 이법안은 박주민 의원 외 70명이나 되었다. 박 의원은 이 법안을 김관홍법이라고 불렀다. 생전의 김관홍이 제안한 내용을 반영하기도 했지만, 발의를 목전에 두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세월호 의인‘을 추모하는 의미이기도 했을 것이다.
국가의 명령에 따라 구조 활동을 하다 부상을 입고 더 이상잠수사로 생계를 이을 수 없게 되었다면 국가가 잠수사들의 부상을 치료해주고 그들이 입은 손실을 보상해주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김관홍법은 어쩌면 발의 자체가 필요 없는 법이었다. 그러나 당시 수상구조법에는 수난구호업무에 종사하다 다친이들에 대한 지원과 보상이 애매하게 규정되어 있어 문제였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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