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주제와 범위에 관하여
나는 지난 5년간 이 책의 집필에 매달렸는데 이따금 내 생각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추적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었다. 생소한 이름들과 기술적인 전문용어들을 늘어놓으면 독자들에게 어수선한느낌을 줄 것 같아 그런 출처들은 책 뒷부분의 주에 따로 정리해 놓았다. 나는 이 책에 소개된 인물들에게 실명을 싣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실명을 실어야 실화의 근거가 더 확실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신 질환의 오명을 씻기 위한 목적도 있는 책이기에 우울증 환자들의 신분을 떳떳이 밝히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실명을 밝힐 수 앖는 일곱 명은 가명을 썼다. - P9
우울증은 다양한 이름들과 모습들로, 생화학적이고 사회적인 이유들로 어디에나 존재해 왔다. 나는 이 책에 우울증의 시간적, 공간적 범위를 모두 담으려 애썼다. 우울증이 때때로 현대 서유럽 사회 중산층의 개인적인 고통으로 여겨지는 것은 바로 이 집단에서갑자기 우울증을 인식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치료하고받아들일 새로운 소양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지, 그들만 우울증에대한 특권을 지니고 있어서는 아니다. 인간의 고통을 모두 담을 수있는 책은 없지만 나는 그 고통의 범위를 보여 줌으로써 우울증에시달리는 이들의 해방을 도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근절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우울증을 완화시킨다고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지만 이 책에 담긴 지식이 사람들의 고통을 얼마간 덜어 주기를 바란다. - P13
1 슬픔과 우울
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절망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울은 그 절망의심리 기제다. 우리에게 찾아온 우울증은 자아를 변질시키고, 마침내 애정을 주고받는 능력까지 소멸시킨다. 우울증은 우리의 내면이 홀로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것은 타인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자신과의 평화를 유지하는 능력까지 파괴한다. 사랑은, 우울증을 예방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의 충격을 완화하는 장치가 되어 마음을 보호해준다. 약물치료와 심리치료는 우리가 더 쉽게 사랑하고 사랑받을수 있도록 만들어 이런 보호 기능을 되살려 줄 수 있으며 그래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정신이 건강한 상태에서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신을 사랑하며, 이런 열정들은 우울증의 반대인 활기찬 목적의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랑은이따금 우리를 저버리며 우리도 사랑을 저버린다. 우울증에 빠지면 모든 활동, 모든 감정, 나아가 인생 자체의 무의미함이 자명해진다. 이 사랑 없는 상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감정은 무의미함이다. - P17
우울증은 부분적으로는 사회적, 의학적 현상이지만 감정적 변덕에 따른 언어적 변덕의 결과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울증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우리에게 억지로 가해지고 그다음에는 외부적 요인과도 무관해지는 감정적인 고통일지 모른다. 우울증을 단순히 커다란 고통이라 할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큰 고통은 우울증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슬픔은 상황에걸맞은 우울함이지만 우울증은 상황에 걸맞지 않은 슬픔이다. 우울증은 가을에 밑동에서 부러져 들판을 굴러다니는 회전초처럼 자양분을 주는 대지와 분리되어서도 죽지 않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자라는 고뇌다. 그것은 오로지 은유와 우화로만 설명될 수 있다. 성안토니오는 사막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찾아온 천사들과 화려하게 치장한 악마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었냐는 물음에 그들이 떠난후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대답했다. 천사가 왔다가 떠나면 그의 존재로 인해 힘이 솟고 악마가 왔다 떠나면 공포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슬픔은 우리에게 강하고 분명한 생각들과 자신의 깊이에 대한 이해를 남기는 허름한 옷차림의 천사다. 그리고 우울증은 우리를 겁에 질리도록 만드는 악마다. - P18
붕괴가 아무리 갑작스럽게 느껴진다 해도그것은 부식이 누적된 결과다. 결코 매우 극적이거나 부식의 누적과 별개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 비를 맞은 순간부터 녹이 대들보의 철근을 먹어 들어간 시점까지의 긴 시간을 의미한다. 극히핵심적인 부분에 부식이 생겨 붕괴가 전체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보이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그보다는 부분적인 붕괴가 더 빈번하다. 한 부분이 붕괴하면서 다른 부분에 충격을 주어 극적으로 부식의 균형을 깨는 것이다. 부식을 체험하는 것, 거의 날마다 내리는 비의 파괴에 노출된자신을 발견하는 것, 자신이 연약한 존재로 변모하고 있고 자신의 점점 더 많은 부분들이 강풍에 날려 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아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감정의 녹이 더 많이 슨다. 우울증은 생기를 빼앗고 하루하루를 뿌연 안개로 덮고 일상적인 행동들을 힘겹게 만든다. 우리를 피곤하고 지치고 망상에 시달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헤쳐 나갈 수 있다. 행복하게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헤쳐 나갈 수는 있다. 중증 우울증이 시작되는 붕괴 시점에 대한 정의는 아직 내려지지 못하고 있지만 그 지점에 도달하면 그것을 혼동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 중증 우울증은 탄생이자 죽음이다. 어떤 것의 새로운 출현인동시에 어떤 것의 완전한 소멸이다. - P21
육체와 정신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종종 화학이 동원된다. 의사가 우울증을 "화학적 작용"이라고 말할 때 환자가 안도감을보이는 것은 충분한 근거가 있는 슬픔과 난데없는 슬픔을 구분하고 완전한 자아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화학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이 싫다거나 늙어 가는 것이 걱정스럽다거나사랑에 실패했다거나 가족을 미워한다거나 하는 스트레스성 불만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부담감을 덜어 주는 듯하다. 화학적이란 단어는 사람들을 죄책감으로부터 유쾌하게 해방시켜 준다. 만일 우리의 뇌가 우울증의 소인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는 우울증에 걸린 것에 대해 자신을 탓할 필요가 없다. 자신을 탓하든 진화를 탓하든 기억할 점은, 탓하는 것 자체도 화학적 작용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행복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화학과 생물학은 ‘진짜‘ 자아에 작용하는 것들이 아니며, 우울증은 그것을 앓는 사람과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우울증의 치료는 정체성의 분열을 완화시켜 일종의 정상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요소를 지닌 정체성을 재조정하여 사람을 조금 변화시키는 것이다. - P27
고소공포증은 세상에서 가장 흔한 공포증인데 우리 조상들에게 분명 유익한 것이었으리라. 고소공포증이 없었다면 벼랑에서 떨어져 자손을 남기지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벼랑 끝에 서서 아래를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난다. 몸이 그 어느 때보다 작동을 잘해서 완벽한 정확성을 가지고 뒤로 물러나야 하는데 제대로 되지 않는다. 꼭 떨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고 그렇게 한참을 내려다보다 보면 진짜로 떨어진다. 몸이 마비되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잠베지강 위로 높은 절벽이 깎아지른 듯 솟아 있었다. 우리는 젊은 혈기에 누가 더 절벽 끝에 바짝 다가가 사진의 포즈를 취할 수 있는지 시합을 했다. 모두가 선 자세보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더 다가갈 수 있었고, 절벽 끝에 가까워지자 현기증과 함께 마비 증세를 느꼈다. 나는 우울증이란 것이 대개는 우리를 벼랑 끝 너머로 보내는 것이라기보다는(그러면 곧 죽게 될 것이다.) 벼랑 끝으로 바싹 끌어당겨 너무 멀리갔다는 생각에 공포에 젖어 현기증으로 균형 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때 빅토리아 폭포에서, 실제 절벽 끝보다 훨씬 안쪽에 우리가 지나가지 못할 보이지않는 끝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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