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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2일 월요일

그가 좀 더 일찍 결정을 내려 남자답게 그 결정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알란칼손은 행동하기 전에 오래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노인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그는벌써 말름셰핑 마을에 위치한 양로원 1층의 자기 방 창문을 열고 아래 화단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이 곡예에 가까운 동작으로 그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사실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니, 이날 알란은 백 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백회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양로원 라운지에서 한 시간 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시장도 초대되었고, 한 지역 신문도 달려와 이 행사를 취재하기로 되어 있었다. 지금 노인들은 모두 최대한 멋지게 차려입고 기다리는 중이었고, 성질머리 고약한 알리스 원장을 위시한 양로원 직원 일동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파티의 주인공만이 불참하게 될 거였다. - P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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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처음 정신약리학 전문의를 찾은 후로 나는 약 게임을 펼쳐 오고 있다. 나는 정신 건강을 위해 졸로프트, 파실, 나반, 이펙서, 웰부트린, 세르존, 부스파, 자이프렉사, 덱시드린, 자낙스, 발륨, 암비엔, 비아그라를 다양한 혼합과 복용량으로 먹어 왔다. 처음 시작했던 계열의 약들이 반응이 좋았으니 나는 운이 좋은 셈이다. 그렇지만 실험의 끔찍함에 대해서는 증언할 수 있다. 다른 약들을 시도하다 보면 자신이 다트 판이 된 듯한 기분이다.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요새는 우울증도 완치될 수 있어요. 당신은 두통이 날때 아스피린을 먹듯이 항우울제를 먹는군요." 그건 틀린 말이다. 아직 완치는 시기상조이며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것은 암 환자가 방사선 치료를 받는 것과 같다. 그런 치료들은 어쩌다 기적적인 결과를낼 수도 있지만 치료 과정이 쉽지도 않고 결과도 일정하지 않다. - P194

우울증의 새로운 치료법에 대한 연구는 네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예방 치료로의 전환인데 정신 질환의 경우에도 문제를 조기에 발견할수록 치료가 쉽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약의 특수성 강화다. 뇌에는 최소한 열다섯 가지 이상의 세로토닌 수용체가 존재한다. 항울 효과는 이 중 단 몇 가지에만 의존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으며 SSRI 계열 약들의 많은 부작용들은 그 외의 수용체들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세 번째는 효과가 더 빠른 약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생리적 위치보다는 증세에 대한 특수성을 높여서 약을 고르기 위해 시험적으로 써 볼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울증의 유전적 아류형을식별할 수 있는 표지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각 아류형에 맞는 치료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국립정신건강연구소에 몸담은 적이있는 윌리엄 포터는 이렇게 말한다. "기존의 치료 약물들은 작용 방식이 너무 간접적이기 때문에 통제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위와 같은 특수화는 쉽지 않을 것이다. 기분장애는 단일한 유전자의 단일한 계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유전자들이 조금씩 위험성을 보태다 외적인 상황에 의해 그 총합적인 취약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 P195

작가인 마사 매닝은 우울증과 ECT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놀라울 정도로 유쾌하고 아름다운 저서 「암류(Undercurrents)』에 담았다. 현재 그녀는 웰부트린과 소량의 리튬과 데파코트, 클로노핀, 졸로프트로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 약들을 손에 들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무지개를 손에 넣은 것 같다. 나는 만기일도 없는 과학 연구물이다." 그녀가 농담처럼 한 말이다. 그녀는 우울증이 극에 달했을때 장기간 강렬한 ECT를 체험했다. 그녀는 자살을 하려고 총포사주소를 뒤지다가 치료를 결심했다. "나는 스스로를 증오하기 때문에 죽고 싶은 게 아니었다. 고통을 끝내고 싶을 정도로 자신을 사랑했기에 죽고 싶었다. 나는 날마다 욕실 문에 기대어 서서 딸아이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딸은 그때 열한 살이었는데 샤워할 때면 늘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랫소리를 듣고 있으면 하루 더 자살을 미룰 수 있었다. 문득 내가 자살한다면 그 아이가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게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죽음은 딸아이를 침묵하게 할 것이다. 바로 그날 ECT를 신청했다. 그건 나를 쓰러뜨린 상대에게 마침내 항복을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 나는 몇 주 동안 ECT 치료를 받았다. 숙취감과 두통에 시달리며, 다이어트 콜라를 찾으며." - P197

그녀는 자부심에 차 있었다. "약의 도움 없이 해냈지."
함께 서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건 완전히 미친 짓이야. 나는 그렇게 미친 소리는 처음 들어, 자기 인생에 그런 짓을 하다니 너는 미친 게 분명해." 그가 한 말이었다. 당신을 미치게 하는 행동들을 피하는 것이 미친 짓일까? 아니면 당신을 미치게 하는 삶을 견딜 수 있도록 약물치료를 받는 것이 미친 짓일까?
나도 삶의 질을 낮추고 하는 일을 줄일 수도 있었다. 여행도 줄이고,
아는 사람들도 줄이고, 우울증에 관한 책도 쓰지 않고..  그런 식으로 살았다면 약물치료가 필요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견딜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살 수도 있었다. 그건 내가 우선적으로 선택한 방법이 아니었지만 분명 합리적인 방법이다. 우울증을 안고 사는 것은 염소와 춤을 추며 균형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 균형 감각이 뛰어난 상대를 선호하는 건 지극히 합리적인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모험과 복잡한 일투성이인 내 삶이 너무도 만족스러우며 그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절대로! 친구들을 반으로줄이느니 차라리 약을 세 배로 늘리겠다. 유나바머 [20여 년간 연쇄폭탄 테러로 미국을 공포에 떨게 한 극단적인 문명 혐오론자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별명]는(그의 표현 방식은 잘못된 것이었지만 기계 문명의위험성에 대한 통찰은 훌륭하다.) 성명서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에게 지독하게 불행한 상황들을 강요한 다음 불행한 느낌을 제거하는 약들을 주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그런 일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 사실상 항우울제는 환자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회적 상황들을 견뎌 낼 수 있도록 내면의 상태를 조절하는 수단이다." - P203

우울증에 빠졌을 때는 자신이 잿빛 베일을 쓰고 저조한 기분이라는 베일을 통해 세상을 보는 거라는 생각은 못 하지. 오히려 행복의 베일이 벗겨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해. 우리는 진실은 고정된 것이라는 생각으로 진실을 핀으로 꽂아 놓고 분석해 보려고 하지만 진실은 살아 움직이는 거야. 자기 안에 악마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정신분열증 환자라면 붙은 악마를 쫓아내 줄 수 있지. 하지만 우울증 환자들은 다루기가 더 힘든 것이, 자기가 진실을보고 있다고 믿거든. 하지만 진실은 거짓말을 해. 나 자신을 보면서 ‘나는 이혼했어.‘라고 생각하면 그게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일처럼 여겨지지. ‘나는 이혼했어!‘라고 생각하면서 근사한 해방감을 느낄수도 있는데 말이야. 그 고통 속에서 정말 도움이 된 말이 있었지. 한 친구가 한 말인데 바로 이거야. ‘앞으로 계속 이렇지는 않을 거야. 그걸 기억할 수 있는지 봐. 지금은 이렇지만 언제까지나 이렇지는 않을 거야.‘ 그 친구는 이런 말도 했지. ‘그건 우울증이 말하는 거야. 우울증이 너를 통해 말하는 거야.‘ 이 말도 도움이 됐어." - P210

이렇게 우울증을 예방하는 식품들이 있는가 하면 우울증을 유발하는 식품들도 있다. "많은 유럽 사람들이 밀 알레르기를 갖고 있고 많은 미국인들이 옥수수 알레르기를 갖고 있다." 『음식 박사의 저자 비키 에지슨의 설명이다. 음식 알레르기도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물질들이 뇌의 독소가 되어 온갖 종류의 정신적 고통을 촉발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당과 탄수화물의 과잉 섭취로 인한 만성피로 증후군의 일환으로 우울증 증세들을 겪고 있다. "단것과 정크 푸드 [칼로리는 높고 영양가는 낮은 식품]로 끼니를 때워 종일 혈당량이 아래위로 요동친다면 당신은 수면 장애를 겪게 된다. 이것은 하루하루를 살아갈 능력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인내심과 아량까지도 제한한다. 이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은 늘 피로하고 성욕도 잃게 되며 온몸이 아프다. 신체 조직이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셀리악병 [소장에서 발생하는유전성 알레르기 질환]을 일으키며, 일반적으로 성장 장애가 일어난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은 커피가 에너지를 준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실 커피는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불안 반응을 자극한다. "물론 알코올도 인체에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 "우울증은 우리의 몸이 그만 혹사시키라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몸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다." - P228

우울증의 주요 증상들 가운데 하나는 수면 장애여서 우울증이 심각한 사람들은 깊은 잠을 전혀 자지 못하거나 많은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도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울증 때문에 수면장애가 일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잠을 잘 못 자는 것이 우울증의 한원인이 되는 것일까? "우울증으로 이어지는 슬픔도 수면 장애를 일으키고, 조증 상태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랑에 빠지는 현상도 다른 방식으로 수면을 방해합니다." 국립정신건강연구소 토머스 웨어의 지적이다. 우울증이 아닌 사람들도 한밤중에 공포에 휩싸여 잠이 깰수 있으며 대개 금세 지나가는 그 공포와 절망의 상태는 건강한 사람의 가장 근접한 우울증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아침에는 상태가 악화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진다. 토머스 웨어는 통제된 수면 박탈로 우울증의 일부증세들을 완화시켜 주는 일련의 실험들을 실시했다. 이 방법은 장기적인 용도로는 실용성이 없지만 항우울제의 효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환자들에게는 유용할 수 있다. "수면을 억제함으로써 시간의 경과에 따른 호전 현상을 연장시킬 수 있어요. 우울증 환자들은 잠의 망각을 추구하지만 사실 우울증은 잠 속에서 유지, 강화되지요. 밤중에 어떤 마귀들이 찾아와 그런 현상을 초래하는 걸까요?"
토머스 웨어의 말이다.
F. 스콧 피츠제럴드는 『붕괴라는 작품에 이렇게 썼다. "새벽3시만 되면 소포 하나를 깜빡 잊은 것이 사형 선고처럼 심각해진다. 약도 듣지를 않는다. 날마다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영혼의 칠흑 같은 밤이 찾아든다. "‘ 그 새벽 3시의 악마가 내게도 찾아왔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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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인터넷지도가 디지털 기술의 산물이라는 이유로 종이지도보다 ‘항상‘ 정확하다는, 다소 맹목적인 편견이 일반인들에게 퍼져 있는 듯하다. 일종의 ‘디지털 정보 맹신주의‘라고 할 수있다. 어떤 사람들은 인터넷 홍수 시대의 모든 정보가 스마트폰안에 있으므로 이제 종이로 된 자료의 시대는 끝났다고 극단적으로 주장한다. 인터넷지도가 그 정보 자체의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편리하다는 점 때문에 그 파급력이 더욱 막강하고 광범위하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연 정확성을 담보하고 있느냐의 문제는 깊이 따져 보아야 한다.
저널리즘 학자 메레디스 브루사드는 인터넷 기술과 정보에대한 맹신을 ‘기술쇼비니즘technochauvinism‘이라고 불렀다.‘ ‘기술쇼비니즘 시대에 종이지도는 과연 과거의 유물로 사라질 것인가‘라는 물음에 그녀는 종이지도가 독특한 장점이 있기 때문에 살아남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인지연구가들은 얕은 지식과 깊은 지식을 구분한다. 편안한 여행을 추구하는 여행자는 길 찾기 정도의 얕은 지식만으로도 충분히 여행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깊은 지식이 앎의 유희를 높여 줌으로써 여행을 좀 더 풍요롭게 해주기도 한다. 이때 지도는 여행의 목적지 간 이동에 도움을 주는 얕은 지식을 전하는 나침반이면서 동시에 목적지 간의 맥락을 파악하게 해주는 깊은 지식이자 지리적 상상력의 보고가 된다.

우리는 특정한 대상의 시각 정보를 인지지도로 새겨넣을 때,그 대상을 단독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주변에 관한 정보도 연결시켜 수용한다. 카페에서 친구와 만나는 일을 생각해 보라. 좌석과 의자, 진열된 커피와 관련 용품들, 주문대와 바리스타들의 커피 제조 공간, 시원한 통창을 통해 내다보이는바깥 풍경, 독특한 조명과 냄새 등 이 모든 것의 어우러짐 속에나의 좌석이 자리 잡고 있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나의 현재 위치를 주변 경관의 어우러짐 속에서 파악한다. 이런 점에서 인터넷지도는 이리저리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행의 혼란을 중폭시킬 수 있다. 하지만 종이지도는 큰 지면에 고정된 정보를 담고 있음으로써 오히려 가독성이 높다. 강과 산의 흐름, 도시와 국가의 위치, 교통로 등의 정보만을 담고 있는데도 그 맥락을 훨씬 잘 파악할 수 있다. - P82

전이적 장소는 경계의 안쪽도 아니고 바깥쪽도 아닌, 경계에놓인 장소를 말한다. 공항, 기차역, 항구, 버스터미널처럼 경계안쪽과 경계 너머를 연결해 주는 통로 역할을 하는 장소가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통로로서의 장소에서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통과의례를 치른 후,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흩어져나간다. 이곳을 거치는 모든 여행자는 그동안의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을 출발지에 남겨 놓은 채 마음을 가다듬고 새로운 곳의일들을 상상한다. 그러한 여행자의 마음은 순례자의 의식과 다를 바 없다. - P87

그때 내 옆에 앉아 우리를 안내하던 연변대 지리학과 학생이정말 궁금한 표정으로 넌지시 말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여기만 오면 아무 소리 안하고 전부 두만강 쪽만 바라본단 말입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신기합니다."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마음속 경계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날카롭게 지적하는말이었다. 나는 그에게 두만강은 어떤 곳인지 물어보았다. 그는그저 물놀이하던 재미난 놀이터였으며 가끔 물 건너 북한 땅에가서 놀다 온 적도 있다고 대답했다. 나와 그의 심상지도에 그려진 북한 국경의 의미는 이처럼 달랐다. 나의 북한 국경은 넘어서는 안 되고 넘을 수도 없는 차단막 같았다면 그의 북한 국경은 자연스레 넘나들어도 문제없는 통로 같았다.
이처럼 여행은 전혀 예기치 못한 나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해준다. 경계 너머를 여행하며 경험하는 ‘나‘밖의 것들이야 당연히 낯설게 다가오겠지만, 그것들을 경험하는 나 자신조차도 낯설게느껴지는 경험은 무척이나 신기하고 경이롭다. 내 자신이 낯선존재로서 새롭게 다가오게 되고, 그 속에서 나도 모르던 내 가치와 능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 P95

사실 한 도시의 역사에 대해 깊이 알자면 도서관에서 며칠동안 책을 읽는 것이 더 낫다. 하지만 책으로는 그곳을 ‘알‘ 수는 있지만 ‘느낄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의 얼굴을 아는것과 친구가 되는 것은 엄연히 다르듯이, 그 도시의 정보를아는 것과, 사람들과 교류하고 땅과 자연이 내뿜는 기운을온몸으로 느끼며 체험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여행은 새로운 것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떠나기 위해 준비하고 먹고 자고 이동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헬리콥터를 타고 히말라야에 오르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더위와 바람과 추위를 모두 견디며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체험해야만 인생에 무언가를 남기는 여행을 할 수가 있다.
_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 P110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지도를 살펴봐야 한다. 장소와 경관 하나하나는 일종의 숲속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생물과 무생물 같은 개별적인 요소들이다. 이것들은 결코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상호밀접한 연관 속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따라서 구성 요소들각각을 제대로 경험하고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것들이 속해 있는 전체 숲의 특성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2차원 평면 위에 개념화되고 기호화되어 있는 지도는실제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 주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여행자들에게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도시 전체를 조망하라고 말해 주고싶다. 마치 숲 밖에서 숲 전체를 바라보듯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여행지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장소와 경관이처한 맥락을 파악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 개별적인 장소와 경관들을 살펴보는 데 도움을 준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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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치료는 정신분석에서 나왔고 정신분석은 교회의 고해성사로 처음 형식을 갖춘, 위험한 생각들을 털어놓는 의식에서 나왔다. 정신분석은 특수한 기술들을 이용하여 신경증을 유발한 어린시절의 정신적 외상을 밝혀내는 치료법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시간(보통 일주일에 네다섯 시간)을 요하며 무의식의 내용을 드러내는데 집중한다. 프로이트와 그에게서 나온 정신역동적 이론들을 비판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지만, 사실 프로이트의 모델은 (결점은 있지만) 훌륭하다. 루어만의 표현을 빌리면, 거기에는 "인간의 복잡성과 깊이에 대한 인식, 자신의 거부들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 인생의 힘겨움에 대한 존중"이 들어 있다. 사람들은 프로이트가 이룬 업적의 세부 사항들을 왈가왈부하고 그 시대의 편견들에 대해 프로이트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느라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동기들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의 포로‘라는 그의 글의 기본 진실을, 그의 숭고한 겸손을 간과한다. 우리는 자신의 원동력의 작은 부분만을 (타인의 원동력에 대해서는 더 작은 부분만을) 알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원동력에 대한 이론을 세운 것만으로도(이 원동력은 ‘무의식‘ 혹은 ‘통제를 벗어난 두뇌 회로들‘이라 부를 수 있다.) 정신 질환 연구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 P165

 CBT(cognitive behavioral therapy)는 객관적 타당성을 가르친다.
치료사는 우선 환자가 자신을 현재의 처지로 몰고 온 고난들, 즉 ‘생활사(史) 자료‘의 목록을 만들도록 돕는다. 그런 다음 이 고난들에 대한 반응들을 도표로 정리하고 과잉 반응의 특징적 형태들을 파악한다. 환자는 자신이 왜 특정한 사건들에 대해 그토록 우울해했는지 깨닫고 부적절한 반응들에서 벗어나려 노력한다. 이런 거시적인 단계 이후에는 환자가 자신의 ‘자동적인 생각들‘을 중화시키는 미시적인 단계가 이어진다. 감정들은 세상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들이 아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먼저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고 그다음에 인식이 감정들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환자가 인식을 바꿀 수 있다면 그에 수반되는 감정 상태도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환자가 애인이 일에 몰두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직장의 요구에 대한 이성적인 반응이라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경우를 살펴보자. 그러면 그 환자는 자신이 사랑스럽지 못한 머저리라는 자동적인 생각이 자기 비난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낳고 이 부정적인 감정이 우울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일단 그 악순환이 깨지면 환자는 얼마간 자기 통제력을 갖게 된다. 실제로 일어난 일과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구분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 P173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한 여성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녀는 다하우 수용소에 1년 이상 갇혀 지내며 가족이 모두죽는 걸 지켜봐야 했다. 어떻게 견뎠느냐고 묻자 그녀는 그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현실을 생각하면 미쳐서 죽고 말리란 걸 깨달았다고말했다. "그래서 결심했지. 내 머리에 대해서만 생각하겠노라고. 그곳에서 내내 머리 생각만 했어. 언제 머리를 감을 수 있을까 궁리하면서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는 생각을 했다네. 어떻게 하면 간수들에게 걸려 머리를 박박 깎이는 걸 면할 수 있을까 궁리했고. 그리고 수용소에 득실거리는 이들과 씨름하며 시간을 보냈지. 그런 식으로내가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스스로 현실과 차단되어 살다 보니 그 모든 걸 견딜 수 있었네." 이것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CBT의 원칙이 극단적인 형태로 이용된 예다. 만일 자신의 생각을 특정 패턴으로 몰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구제받을 수 있다. - P176

현재 항우울제는 네 가지 계열이 유통된다. 그중에서 가장 큰인기를 누리고 있는 선택적 세로토닌재흡수억제제(SSRI)는 기분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의 수치를 높인다. 프로작, 루복스, 팍실, 졸로프트, 셀렉사가 모두 이 계열에 속한다. SSRI 계열보다 오래된 종류가 두 가지 있는데 삼환계 (TCAS)와 모노아민산화효소억제제(MAOI) 계열이다. 삼환계는 화학 구조의 명칭을 딴 것으로 세로토닌과 도파민에 영향을 미친다. 엘라빌, 아나프라닐, 노르프라민, 토프라닐, 파멜러가 모두 삼환계다. MAOI계열은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의 붕괴를 억제하며 나르딜과 파르나테가 이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비정형적 항우울제로는다수의 신경전달물질 체계에 작용하는 아센딘, 웰부트린, 세르존, 이펙서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어떤 약을 쓸 것인지는 대개 (적어도 처음에는)부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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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내 눈에 띈 것은 지붕 위에 달린 텔레비전 수신용 위성 접시였다. 그녀는 한국의 방송프로그램을시청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 나는 가장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물었다. 물어보면서도 아마 드라마나 가요 프로그램이 아닐까 지레 짐작했다. 그러나 대답은 뜻밖에도 <세계는 넓다>라는 프로였다. 지금은 종영한 이 프로그램은 일반 여행자가 특정 여행지에서 찍은 동영상을 직접 설명해 주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가보고 싶은 곳이 참 많은데 이 프로그램을 통해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고, 직접 여행을 떠날 수 있는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더 재미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공간에 갇혀 있는 삶에 대한 나의 무지와 몰이해를 깨달았다. 법적인 문제와 육체적 한계 때문에 제자리를 벗어나기 어려운 사람조차 늘 떠남을 희구하면서 살아가는 이 모습이야말로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어쩔 수 없는이유로 공간에 갇혀 있는 존재라고 해서 경계 너머 넓은 곳으로나가고 싶은 욕망조차 접고 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욕망은 오히려 훨씬 더 간절한지 모른다. - P46

19세기 이후 선진국에 산업화와 근대화의 바람이 불면서 전통 문화와 경관은 소멸하기 시작했고 산업형 관광은 점차 활성화되어 갔다. 자신들에게는 이미 사라져 버린 것들과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것들 그리고 색다른 것들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장거리 여행으로 발현된 것이다. 문명을 갖기 이전에 지니고 있던 자신들의 순수한 모습을 찾고자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갈 수 는 없으니 아직 산업화를 겪지 않은 가난한 나라로 가서 순수하고 덜 훼손된 자연과 문화를 보고자 한 셈이다. 사회학자 존 어리는 이를 관광객의 시선Tourist‘s Gaz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관광객들은 전통 유산을 지닌 어떤 여행지를 방문할 때 현지인들이 전통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라는 일련의 기대감을 갖는다. 그리고 관광 회사와 지역 정부는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여 경제적인 성취를 이룩하고자 관광객의 시선을 확대해 재생산한다.
그런데 순수한 타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고 하더라도 관광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그 순수성은 훼손되기 마련이다. 타자 역시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생산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산업으로서의 관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타자가 아니라 수요자의 요구에 맞게 적극적으로 개조된 타자, 때로는 완전히 ‘발명된 타자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소위 재현된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 P58

고난을 수반하던 전통적인 여행은 산업화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관광산업으로 발전하는 한편, 대중화되었다. 그 결과 현대사회에서는 여행과 관광이 엄밀한 구분 없이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행과 관광은 비슷하면서도 분명하게 다른 용어다.
관광은 잠시 둘러보며 구경하고 즐긴다는 의미가 강하다. 자신이 떠나온 곳과 친숙한 곳에 머물면서 잠시 낯선 것을 경험하는 데 초점을 둔다. 새롭고 특이한 것을 경험하긴 하지만,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다. 편안한 숙소에서 지내며 가능한 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으려 한다. 그래서 패키지관광상품 광고는 얼마나 고급 호텔인지나 얼마나 맛있는 음식인지 혹은 한식이 포함되었는지를 피력한다.
특히 패키지관광에는 재현된 퍼포먼스를 경험하는 일정이 포함된다. 이는 관광객들을 위해 볼거리들을 인위적으로 마련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관광을 산업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진국의 자본을 관광지에 투입해 관광객을 충족시킬 만한관광자원을 개발하고, 관광객들로 하여금 소비하게 한다. 고급호텔이나 리조트는 물론, 어떤 경우에는 현지 문화를 재창조해관광 이벤트나 쇼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관광지에서 살고 있는 현지 사람들이 과거에 지니고 있던 생활양식인 경우가 많다. 그들의 현재와는 상당히 유리된 삶인 것이다. - P60

반면에 여행은 객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동참해 들어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색다른 낯선 세계에 동참해 그 사람들의 독특한 생활양식과 문화를 접하고 이해하는 데 초점을 둔다. 재현된 퍼포먼스보다는 여행지의삶을 있는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다.
관광과 여행의 또 다른 차이점은 여정의 구체적인 계획 수립여부다. 관광이든 여행이든 볼 것, 경험할 것을 미리 정해 놓음으로써 전체 여정을 짜기 마련이다. 하지만 관광은 정해진 시간과 가격에 꽉찬 일정을 소화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출발하기 전에 정해 놓은 여정(만)을 모두 성취해 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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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역시 대략적인 여정을 짜서 무엇을 보고 체험할지 정하기는 한다. 하지만 반드시 계획한 것만 수행하고 돌아오지는 않는다. 마음과 머리를 열어 놓기 때문에 정해진 것 외에도 더 많은 것을 경험한다. 관광은 예기치 않은 경험을 최대한 막아서 안전성을 보장하려 하지만, 여행은 예기치 않은 경험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만족감을 더 높이려고 하는 것이다.  - P61

물론 여행에도 경계는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관광의 경계와다르다. 이쪽과 저쪽을 분리하지 않고 구멍이 뚫려 있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즉 차단막이 아닌 연결 통로로서 늘 열려 있고 언제든 넘나들 수 있는 경계다. 그래서 여행을 하다 보면 위험에노출되기도 하고, 불편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관광이 낯익은환경을 유지한 채 낯선 것들을 경험하려 한다면, 여행은 애당초낯선 환경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낯익은 것들을 찾아보려 하기 때문이다.
경계 너머의 문화를 어떤 관점으로 경험하는지에 있어서도관광과 여행은 다르다. 관광은 경계 안쪽과 바깥쪽의 문화를 비교하며 살펴본다. 그때 비교의 기준은 경계의 안쪽, 즉 나(여기)의 문화다. 관광은 색다름을 향유하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에 계속 바깥쪽에서 경계의 안쪽에 없는 것들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가령 선진국 사람들의 경우 제3세계 지역을 관광하면서 자신들의 과거를 발견하며 회한에 젖거나, 그들만의 독특한 환경과 문화를 확인하며 즐거워한다. 나와의 비교가 관광의 핵심인 것이다. 이러한 비교가 지나쳐 문화의 ‘차이‘를 자칫 ‘우열‘로 나누고, ‘열등한 타자‘의 발견에 열을 올리는 경우가 있다. 동남아시아를 관광하는 한국의 일부 장년층들이 더운 환경과 그 속의 고단한 삶을 과거 자신들의 어렵던 시절과 비교하면서 열등하게 바라보는 경우가 그 예다.
한편 여행은 비교하지 않고 이해하려 한다. 시간적이고도 지리적인 맥락 속에서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한다. 이때 이해의 기준은 나(여기)가 아닌, 그들(거기)이다. 여행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지 주민들의 입장에서 경험하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여행자는 다름을 확인하고 한 발짝 떨어져 비교하는것이 아니라, 다름을 만든 주체들의 노력과 결과를 공감하고 그 가치를 이해한다. 더불어 그에 비추어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해낸다. 이것이 바로 여행의 핵심이다. - P66

프랑스 작가 미셸 옹프레는 그의 책 『철학자의 여행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행은 우리에게 치료제로 작용하기보다는 우리 존재에 대해서 정의해 주고,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해준다. 우리는 자아를 치유하기 위해서 여행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에 더 익숙해지고 더 강해지고 더 잘 느끼고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여행하는 것이다.
_미셸 옹프레, 『철학자의 여행법」

정체성은 고정되고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늘 새롭게 구성된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세상은 모두다르면서도 같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마크 트웨인 여행기:때 묻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로 떠난 여행』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실려 있다. "여행은 편견, 고집과 편협한 정신에는 치명적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여행을 필요로 한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따뜻하면서도 해박한 식견은 평생 지구의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으로는 얻어질 수 없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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