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이 공영주택을 구입해서 이사를 오기 시작한 뒤로 교장은 학교의 평가를 올리는 데 힘쓰고 있어요. 저는 그 때문에 가난한 아이들이 점점 구석으로 내쫓기는 것 같아요.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상황이 더 힘들어졌을 거예요. 빈곤하다 해도 주위에 비슷한 사람들이 많은 것과 오직 나만 가난한 건 전혀 다르니까요. 후자가 훨씬 고통스럽죠. 배고플 때,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처지라면 소리 내어 말할 수 있지만 나만 배고프면 아무 말도 못 해요." - P124

"왜 나한테 주는데?"
팀은 커다란 초록색 눈으로 아들을 보며 물었다.
질문은 아들을 향했지만, 외려 내가 팀의 눈빛에 가슴을 꿰뚫린 것만 같았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서 있는데, 아들이 입을 열었다.
"친구니까. 너는 내 친구니까."
팀은 "고마워." 하고는 교복을 쇼핑백에 넣고 아들과 하이파이브를 한 다음 현관으로 나갔다.
"갈게."
"잘 가. 내일 학교에서 봐."
현관 옆 창문으로 은빛이 섞인 금발을 한 자그마한 소년이쇼핑백을 흔들며 공영단지로 향하는 언덕길을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도중에 팀이 오른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는 듯한 동작을했다. 팀이 똑같은 동작을 한 번 더 하자 아들이 조용히 입을열었다.
"팀도 엄마처럼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대. 맑은 날은 힘든가봐."
"응, 오늘 진짜 꽃가루가 많네.... 엄마도 올해 들어 가장 힘든 것 같아."
아들은 오래도록 창문 옆에 서서 유리창 너머로 점점 작아지는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팀의 손에 들려 흔들흔들하는 노란색 쇼핑백이 초여름의 강한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반짝 빛났다. - P131

아이들에게 있어 양육자란 밖에 있다가도 언제든 돌아갈수 있는 안정적인 마음의 기지와 같은 존재다. 미국의 심리학자 메리 에인스워스 Mary Ainsworth는 그런 존재를 ‘안전기지‘secure base라고 불렀다.
밑바닥 어린이집의 책임자였던 나의 스승 애니는 곧잘 이렇게 말했다.
"안전기지를 갖지 못한 채 성장한 사람은 어떡해야 자신이안전기지가 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육아를 힘겨워한다."
실제로 내가 일했던 어린이집에도 담당 사회복지사가 있는 아이는 그 부모 역시 복지과의 보호를 받으며 시설이나 위탁 가정에서 성장한 경우가 제법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자신이 갓난아이일 때 버려졌다고 말했다. 실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런 것으로 해두려 했다. - P211

"어려운 일 같아. 사물함이나 체육복은 누가 했는지도 모르고, SNS에 심한 말을 쓴 것도 애초에 다니엘한테 문제가있기 때문이라고 하면 맞는 말이긴 하니까. 다니엘이랑 말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것도 개인의 취향이라고 하면 더 할 말이 없어."
아들과 친한 친구들 중에는 다니엘과 절교한 아이도 있다.
하지만 아들이나 (다니엘과 주먹싸움을 벌였던) 팀처럼 다니엘에게서 직접적으로 차별당해 서로 부딪쳤던 아이들은 친구로 남았다.
"다니엘한테 심한 말을 들은 흑인 아이나 언덕 위 공영단지에 사는 아이들은 다니엘을 괴롭히는 데 끼지 않았어. 괴롭히는 건 전부 아무 말도 듣지 않았고 아무 일도 당하지 않은 관계없는 애들이야. 그게 제일 기분 나빠"
아들이 말했다.
"인간이란 패거리로 어울려서 타인을 괴롭히길 좋아하니까"
내가 말하자 아들은 스파게티를 먹던 손을 멈추고 똑바로내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전에는 거의 본 적 없는 불가사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인간이 타닌을 괴롭히길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벌 주는 걸 좋아하는 거야." - P226

"그런데 그 학교에서 중국인이 학생회장이라니 대단하네.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 같은 학교였는데."
"응, 시대가 변했다는 게 실감되더라."
내 말을 듣고 배우자가 말했다.
"이래저래 반발이 있겠지."
"어?"
"절대 없을 것 같은 일이 그렇게 쉽게 일어날 리 없잖아."
확실히 그렇긴 하다. 내가 중학생들에게 "춘권 할매"라든가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은 게 5, 6년 전인데, 그런인식이 몇 년 사이에 깨끗이 사라질 수는 없기 마련이다. 학생들의 아지트였던 공원은 애들이 숨어서 나쁜 짓을 하던 수풀을 깨끗이 깎았다. 정기적으로 경찰이 돌아보며, 교사와 보호자들이 조직한 순찰대도 가서 둘러보곤 한다. 그래서 지금은 부모가 아이를 데려가 놀 수 있는 평화로운 곳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의 내면에 있는 감정이나 의식은 공원의 수풀처럼 간단히 잘라버릴 수가 없다.
‘드러내다‘와 ‘존재하다‘는 서로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 P243

"가톨릭 학교 애들도 시위에 못 갔다는 말을 듣고 좀 안심했어."
에스컬레이터로 내려서며 아들이 말했다.
"너희만 시위를 즐기지 못한 게 아니라서?"
내가 묻자 아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답했다.
"좀 슬펐어. 성적이든 뭐든 잘나가는 학교 애들은 전부 시위에 참가하는데, 별 볼 일 없는 학교는 허락해주지 않으니까 우리만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고 소외되는 느낌이었어."
"그런 기분을 ‘주변화되었다marginalized‘라고 해."
내 말에 아들이 다시 질문했다.
"변두리margin로 쫓겨난 느낌이라는 거야?" - P283

옐로에 화이트인 아이가 꼭 블루일 필요는 없다. 굳이 색깔로 말해야 한다면 그린이라는, 인종도 계급도 성적 지향도 관계없이 아들에게도 팀에게도 다니엘에게도 올리버에게도 다른 밴드 멤버들에게도 공통되는 아직 미숙한 10대의 색이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린 이디어트‘라는 밴드 이름은 이중적인 의미로도 좋지 않을까. 내 생각을 전하려 했지만 아들은 이미 2층으로 올라가 자기 방에서 기타를 친다.
정말이지 아이라는 존재는 멈출 줄을 모른다. 쭉쭉 나아가며 끊임없이 변한다.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그린... 일단 지금은.
색깔은 틀림없이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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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가 잠시 뜸들이다 자신 없는 투로 답했다.
-그냥...... 이야기가 좋아서?
순간 소리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래? 넌 이야기가 왜 좋은데?
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끝이...... 있어서?
소리가 신기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난 반댄데
-뭐가?
난 시작이 있어 좋거든. 이야기는 늘 시작되잖아.
지우가 잠시 먼 데를 봤다.
-이야기에 끝이 없으면 너무 암담하지 않아? 그게 끔찍한 이야기면 더.
소리도 시선을 잠시 허공에 뒀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시작조차 안 되면 허무하지 않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잖아. - P66

채운이 기억하기로 아버지는 구태의연한 말을 의기양양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삶에서 진부한 교훈을 추출해 남들에게 설파하기를 즐기는 사람. 그러나 본인은 그 교훈대로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티브이에 여행 프로그램이나왔을 때도 그랬다. 여행자가 러시아의 한 공예품점에 들어가 ‘마트료시카를 살 땐 맨 마지막 것까지 채색이 잘 되어있는지 꼭 확인하라‘고 하자 아버지는 비웃는 투로 말했다.
-저것 봐라. 인간들은 틈만 나면 서로 속이고 거짓말하고 등쳐먹으려 한다.
-......
-그러니 너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

-우리 삼촌은 오늘 가게 한쪽에 작은 산타 인형을 만들어놨어. 뿔소라로 산타 모자도 만들고.
요즘 지우가 종일 보는 거라고는 황량한 시멘트 벽면과온갖 배관, 전선, 비계뿐이었지만 지우는 그렇게 썼다.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여기 잘 왔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고향이기도 하고.
지우는 자기도 모르게 술술 새어나오는 거짓말에 조금 놀랐다. 사실 방학 첫날 소리에게 용식을 맡길 때 지우는 ‘방학동안 외삼촌 가게를 도울 거‘라고 했다. ‘게스트하우스랑 카페, 파도타기 용품 대여를 겸하는 곳인데 삼촌이 와서 일도 배우고 마음도 좀 추스르라 했다‘면서 지우는 ‘마음 좀 추스르라‘는 말이 소리에게 어떻게 들릴지 알았고, 순간 그런 계산을 하는 스스로가 좀 싫었다. 그때만 해도 소리와 이렇게 연락을 주고받을 줄 몰랐는데, 단지 용식을 돌봐주고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우는 소리가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의 신뢰감과 친밀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 P88

채운은 의아했다. 그렇지만 우리 아버지가 그애 어머니에게 무례하게 군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곤 그애 어머니 앞치마에 오만원쯤 찔러줬을지도 모르지. 당장 집에 생활비도 잘못 주면서.‘
평소 아버지는 본인이 잘못한 상황일 때 상대에게 과한선물을 줘서 그 순간 상대를 피해자가 아닌 부채자로 만들었다. 채운만 해도 아버지에게 받은 비싼 축구화며 유니폼이 셀 수 없이 많았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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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습관 교정만으로 체중이 조절되지 않으면, 약물 치료를 시작하게된다. 지금까지 다양한 비만치료제가 개발됐지만, 많은 약물이 우울증, 자살충동, 심혈관질환 등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켜 시장에서 금지되거나 퇴출됐다. 그래서 시중에 사용되고 있는 비만치료제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현재 사용되는 비만치료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식욕을 억제해 음식을 적게 먹도록 하는 ‘식욕억제제‘가 있다. 대표적으로 펜터민·토피라메이트 복합제(상품명 큐시미아), 날트렉손·부로피온 복합제(상품명콘트라브) 등이 있다. 이들은 시상하부의 멜라노코르틴 경로에 작용하는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등의 신경전달물질 양을 증가시켜 식욕을 억제하고, 에너지 대사량을 늘려준다. 펜터민·토피라메이트 복합제의 체중 감량 효과는 1년 복용 시 평균 6.8%, 날트렉손·부로피온 복합제의 경우는 평균 4%로 알려져 있다. 다만 식욕억제제는 중추신경계에 작용하기 때문에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분류되며, 그만큼 부작용이 심해 4주 이내, 최대 3개월까지 단기적으로만 복용할 수 있다. 특히 펜터민의 경우 필로폰으로 유명한 메스암페타민 계열의 약물로, 체중 감소 효과가 크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크다.
두 번째로 ‘지방흡수 억제제‘가 있다. 지방이 많은 음식을 먹으면, 장에서는 지방 분해 효소인 리페이스(lipase, 리파아제)를 분비한다. 리페이스는 몸에 들어온 지방을 지방산과 모노글리세리드로 분해해 우리 몸으로수시킨다. 지방흡수 억제제는 바로 이 리페이스를 억제해 섭취한 지방의 소화와 흡수를 줄이고, 지방의 체내 축적을 막는다. 대표적으로 오르리스타트(상품명 제니칼 혹은 알리)라는 약물이 있다. 오르리스타트는 1999년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세계 최초의 비만치료제이며, 25년이 필씬 넘은 지금에도 꾸준히 처방되고 있다. 오르리스타트는 섭취한 지방의 약30%를 배출시킨다. 임상시험에 따르면, 저칼로리 식단과 함께 오르리스타트를 1년간 복용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평균 2.9% 이상 체중을 더 감량했다. 체중 감량 효과가 크지는 않지만, 지방 분해 효소 이외의 다른 효소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고 위장관 내에만 작용하기에 식욕억제제와는 달리 뇌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지방이 많은 식사를 할 경우, 흡수되지 않은 지방이 대장까지 이동해 기름지고 묽은 대변을 볼 수 있다. 지방흡수 억제제를 복용하는 사람들은 이런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고지방 식품을 피하고, 균형 잡힌 저칼로리 식이요법을 해야 한다. 또 지용성 비타민(A, D, E, K)은 잘 흡수되지 않을 수 있으므로 따로 챙겨 먹어야한다. - P50

마지막으로 최근 비만치료제 시장을 휩쓸고 있는 주인공, ‘글루카곤유사 펩타이드(GLP-1 유사체‘가 있다. GLP-1 수용체 작용제라고도 하며, 삭센다, 위고비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GLP-1 유사체는 처음에는 비만치료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원래 GLP-1 유사체는 당뇨병 치료제로 개발됐다.
우리가 섭취한 탄수화물은 위와 소장을 거쳐 포도당으로 분해된다. 혈액 속에 포도당 농도가 높아지면, 췌장은 인슐린을 분비해 포도당을 간이나근육으로 보내 글리코겐으로 저장하도록 하면서 혈당을 낮춘다. 당뇨병은이런 인슐린의 분비가 감소하거나, 인슐린의 효과가 떨어지면서 혈당이 조절되지 않는 질병이다. 과학자들은 1980년대 초, 당뇨병과 혈당 조절을 연구하던 중 GLP-1을 발견했다. GLP-1은 음식 섭취 후 장에서 분비되는 인크레틴 호르몬 중 하나로, 인슐린의 분비를 촉진한다. 글루카곤과 비슷해 글루카곤 유사(glucagon-like)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이름과 달리 혈당을 높이는 글루카곤과는 정반대의 역할을 한다. GLP-1이 당뇨병 치료제로 처음 개발됐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만 우리 몸에서 GLP-1은 분해 효소인 DPP-4에 의해 금방 분해된다. 어떤 물질의 농도가 절반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반감기‘라고 하는데, GLP-1의 반감기는 고작 1~2분 이내에 불과했다.
이에 제약회사들은 GLP-1과 구조가 비슷하고 체내에서 충분히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반감기를 늘린 GLP-1 유사체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덴마크의 제약회사 노보노디스크가 개발한 GLP-1 유사체 ‘리라글루타이드‘는 GLP-1의 34번째 아미노산을 바꾸고, 26번째 아미노산에 탄소원자 16개 길이의 지방산 사슬을 붙인 분자다. 이 물질은 DPP-4가 분해하기 어려워 반감기가 13시간으로 길다. 그러면서도 GLP-1처럼 GLP-1 수용체에 붙어 효과를 나타낸다. 게다가 GLP-1 유사체는 기존 인슐린 분비 촉진제보다 혈당을 낮추는 효과가 컸고, 저혈당을 일으킬 위험도 적었다. GLP-1 유사체로 당뇨병 치료제를 개발해 임상시험을 진행하던 중,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GLP-1 유사체가 당뇨병 치료뿐 아니라 체중 감소에도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추가 연구를 통해 GLP-1이 식욕 조절에도 관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쥐의 뇌에 GLP-1을 주입했더니, 쥐가 음식을 덜 먹는다는것을 확인한 것이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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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뭐가 이렇게 골치 아픈지 몰라. 초등학교에도 부모님이 외국인인 아이가 많았지만 귀찮은 일은 없었는데."
"가톨릭 학교 아이들은 국적이나 민족성이 달라도 가정환경은 비슷해서 그랬던 거야. 다들 아빠 엄마가 다 있고 무상급식 대상자도 없었잖아. 하지만 네가 지금 다니는 중학교에는 국적이나 민족성과는 기준이 다른 다양성이 있어."
"다양성은 좋은 거 아냐? 학교에서는 그렇게 배웠는데?"
"맞아."
"그럼 왜 다양성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거야?"
"원래 다양성이 있으면 매사 번거롭고, 싸움이나 충돌이 끊이지 않는 법이야. 다양성이 없는 게 편하긴 하지."
"편하지도 않은데 왜 다양성이 좋다고 하는 거야?"
"편하려고만 하면, 무지한 사람이 되니까."
내 말에 아들이 "또 무지한 게 문제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전에 길에서 인종차별주의자의 욕설을 들었을 때도 내가 그 사람들이 무지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했기 때이다.
"다양성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어렵고 귀찮지만, 무지를 없애기 때문에 좋은 거라고 엄마는 생각해." - P68

"그렇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누구도 정체성이 하나뿐인 사람은 없어요."
어느 한쪽을 고르라든가 그중 하나를 내세우라며 서로 옥신각신하는 세상이 된 건 분명하다. 저기 축구장에도 동유럽인의 피가 흐르는 아이, 몇 대를 거스르면 인도계 선조가 있는 아이, 아일랜드인의 아이 등이 분명 있을 것이다. 유복한 집의 아이도, 그렇지 않은 아이도, 양친이 모두 있는 아이도, 싱글맘이나 싱글파더의 아이도 있을 것이다.
분단이란, 여러 정체성 중 하나를 타인에게 덮어씌운 다음그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정체성을 골라 자신에게 둘렀을때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P75

곧잘 엠퍼시와 혼동되는 단어가 심퍼시sympathy다. 아이들이나 영어 초보자인 외국인들은 엠퍼시와 심퍼시의 차이점을 중점적으로 배우곤 한다.
옥스퍼드 영영사전의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면 심퍼시는다음처럼 정의되어 있다.

1. 누군가를 가엾게 여기는 감정, 누군가의 문제를이해하여 걱정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
2. 어떤 사상, 이념, 조직 등에 대해 지지하거나 동의하는 행위.
3. 비슷한 의견이나 관심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우정이나 이해.

한편 엠퍼시의 의미는 매우 간단하다.

타인의 감정이나 경험을 이해하는 능력.

결국 심퍼시는 ‘감정‘ 또는 ‘행위‘ 또는 ‘이해‘지만, 엠퍼시
‘능력‘인 것이다. 전자는 평범하게 동정하거나 공감하는 것을가리키지만, 아무래도 후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케임브리지 영영사전의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면 엠퍼시의 뜻은 다음과 같다.

자신이 타인의 입장이었다면 어떨지 상상함으로써
누군가의 감정이나 경험을 함께 나누는 능력.

즉 심퍼시는 가여운 사람이나 문제를 떠안고 있는 사람,
자신과 비슷한 의견을 지닌 사람을 보며 품는 감정이기 때문에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하지만 엠퍼시는 다르다. 자신과 이념이나 신념이 다른 사람, 또는 그다지 가엾지는 않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상상해보는 능력인 것이다. 심퍼시가 감정적 상태라면, 엠퍼시는 지적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 P86

선의가 엠퍼시와 연결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핏 생각하면 감정적인 심퍼시가 선의와 관련 있을 것 같지만, 의견이나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과 공감하는 데에는 굳이 선의가 필요 없다.
인간이 남의 신발을 신어보려 노력하는 것. 그렇게 한번분발하게 하는 원동력. 그것이야말로 선의, 아니 선의와 가까운 무언가가 아닐까.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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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가지 마세요." 내가 말했다. "잠깐만 더 저한테 시간을 내주세요. 도시에서 약속했던 일을 해내지 못했으니 더 부탁드릴 자격이 없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커피잔 아주머니와 레인코트 아저씨가 만난 날 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기억해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죠. 그래서 저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라도 다시 만나는 걸 해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아요. 그들이 잘되길바라고 어쩌면 서로 만날 수 있게 돕기도 한다는 걸요. 그러니까 제발 조시와 릭을 생각해 주세요. 이 아이들은 아직 어려요. 조시가 세상을 뜬다면 둘은 영영 헤어지게 돼요. 해가 거지 아저씨와 개에게 주었던 것 같은 특별한 자양분을 조시에게 주기만 하면 조시와 릭은 친절한 그림에서처럼 같이 어른이 될 수 있어요. 둘의 사랑이 단단하고 영원하다는 걸 제가 보증할 수 있어요. 커피잔 아주머니와 레인코트 아저씨처럼요." - P398

"그러니까 물어볼게. 릭, 네가 승자가 됐다고 생각하느냐고. 조시는 도박을 했어. 그래, 내가 주사위를 던졌지. 이기거나 질 사람은 내가 아니라 조시였지만, 조시는 크게 걸었는데 라이언 박사 말이 맞는다면 곧 지게 될 모양이다. 하지만 너는 안전하게 갔지. 그래서 너한테 묻는 거야, 지금 넌 기분이 어떠니? 네가 정말 승자라고 생각해?"
어머니는 이 말을 하는 동안 계속 어두운 하늘을 보고있다가 이제는 고개를 돌려 릭을 마주 보았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한다면 말이야, 이거 한번 생각해 보라고 첫째, 네가 이겨서 얻은 게 정확히 뭐지? 왜냐하면 조시는 내가 처음 그 애를 안은 순간부터, 나는 조시가 온몸으로 삶을 갈구하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 조시에게는 온 세상이 경탄의 대상이었지.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조시에게 기회를 안 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 조시가 자기 정신에 걸맞은 미래를 요구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크게 걸었다고 하는 거야. 그런데 넌 어떠니, 릭? 네가 정말 그렇게 똑똑하다고 생각해? 너희 둘 중에서 승자는 너라고 생각해? 만약 그렇다면 너 자신한테 이렇게 물어봐라. 네가 뭘 얻었는지. 한번 봐 네 미래를 보라고." 어머니는 창문 쪽으로 한 손을 흔들었다. "너는 안전하게 갔고, 그래서 네가 얻어 낸 건 작고 보잘것없어. 지금은 꽤 우쭐한 기분이겠지. 하지만 네가 그렇게 느낄 이유는 없다고 내가 말해 주마. 우쭐해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 P406

어머니의 눈이 커지고 두려움으로 가득 찼지만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시의 메시지는 이런 거였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어떻게 되든 간에, 조시는 엄마를 사랑한다고,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했어요. 엄마가 자기 엄마여서 정말 고맙고 단 한순간도 아니길 바란 적이 없었다고. 이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어요. 향상을 택한 것에 대해서요.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걸 어머니가 아셨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다시 선택할 수 있다고 해도, 이번에는 자기가 선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머니가 했던것하고 똑같이 할 거라고 했고 어머니는 자기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엄마라고 했어요. 그런 말이었어요. 말씀드렸듯이 조시가 알맞은 때가 되기 전에는 전하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 말씀드리기로 한 것이 옳은 판단이었으면 좋겠네요." - P407

해가 조시를 침대 전체를, 격렬한 주황색 반원으로 비추어서 침대에 가장 가까이 있던 어머니는 손을 들어 얼굴을가려야 했다. 릭은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린 것같았고, 또 신기하게도 어머니와 가정부 멜라니아도 핵심을파악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우리 모두 꿈쩍하지 않고 그렇게 서 있었고, 해는 조시에게 더욱 눈부신 빛을 집중했다.
우리는 지켜보면서 기다렸다. 한순간 주황색 반원이 마치불이 붙을 것처럼 타올랐는데도 아무도 아무 조치도 하지않았다. 그때 조시가 부스스 깨어나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손 하나를 허공에 들어 올렸다.
"와. 왜 이렇게 눈부셔?" 조시가 말했다.
해는 계속 빛을 가차 없이 조시에게 쏟아부었다. 조시는뒤척거리더니 몸을 돌려 베개와 침대 머리판에 머리를 기댔다.
"무슨 일이야?"
"좀 어떠니, 아가?" 어머니가 두려움이 어린 눈빛으로 조시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
조시는 베개에 다시 머리를 대고 거의 천장을 바라보며누웠다. 하지만 조시의 몸놀림에서 새로 솟은 기운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 P411

"릭 말이 맞아요. 릭과 조시가 각각의 계획을 세운 걸 보니 불안해져요."
릭은 발끝으로 자기 앞쪽 자갈을 살살 찼다. 그러더니 말했다. "클라라. 네가 조시의 건강을 위험하게 할 말을 할 필요는 없고, 이 말만 할게. 네가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 사랑한다고 전했을 때는 그게 진실이었어. 네가 속였다거나 오해를 일으켰다고 할 사람은 없어. 하지만 이제 우리는 어린애가 아니니까. 서로 잘되길 빌어 주고 각자의 길을 가야 해.
내가 대학에 가서 향상된 애들하고 경쟁한다는 건 애초에말이 안 되는 일이었어. 지금은 나도 나름의 계획이 있고 그게 최선이야. 그래도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어. 그리고 이상한 이야기지만 지금도 거짓이 아니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요."
"그러니까 내 말은, 조시와 내가 각자 세상에 나가서 서로안 만나고 산다 해도 어떤 부분은,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늘 같이 있을 거라는 거야. 조시는 어떨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세상에 나가면 항상 꼭 조시 같은 누구를 찾으려고 할거야. 그러니까 절대로 속임수가 아니었어, 거기에서 네가 누구랑 거래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도 내 마음속, 조시 마음속을 들여다본다면 네가 속이려고 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겠지." - P421

"내가 다시 왔을 때는 네가 여기 없겠지. 넌 정말 최고였어, 클라라, 정말로."
"고마워요." 내가 말했다.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마워요."
"당연한 선택이었지." 그러더니 조시는 다시 나를 안았다.
이번에는 짧게 안았다가 다시 몸을 세웠다. "잘 있어, 클라라. 잘 지내."
"잘가요, 조시."
조시는 차에 올라타면서 다시 명랑하게 손을 흔들었다.
새 가정부 쪽보다는 나를 향한 손짓이었다. 차는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지나쳐 언덕을•넘어갔다. 조시와 내가 전에 수도 없이 같이 지켜보았던 것처럼, 차는 그렇게 사라졌다. - P434

매니저는 한동안 말없이 웃음 띤 얼굴로 보고만 있었다.
그래서 내가 계속 말을 했다.
"조시를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요. 지금까지그 일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봤어요. 만약 그래야만 했다면 제가 조시를 계속 이어 갈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렇게 되어서 훨씬 잘되었어요. 릭과 조시가 함께하지는 않지만."
"네 말이 틀림없이 맞을 거야. 클라라. 그런데 ‘조시를 계속 이어 간다‘라는 게 무슨 뜻이야? 무슨 소리지?"
"저는 조시를 배우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그래야만 했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했을 거예요. 하지만 잘되었을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정확하게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머니, 릭, 가정부 멜라니아, 아버지. 그 사람들이 가슴속에서 조시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는 다가갈 수가없었을 거예요. 지금은 그걸 확실하게 알아요."
"그래, 클라라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한다니 다행이다."
"카팔디 씨는 조시 안에 제가 계속 이어 갈 수 없는 특별한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에게 계속 찾고 찾아봤지만 그런 것은 없더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저는 카팔디 씨가잘못된 곳을 찾았다고 생각해요.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만 조시 안에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카팔디 씨가 틀렸고제가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결정한 대로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 P441

"안녕히 가세요, 매니저님. 고맙습니다."
매니저는 의자로 썼던 철제 상자를 다시 시끄러운 소리를내며 원래 위치로 끌어다 놓았다. 그러더니 쌓인 물건들 사이 긴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나는 매니저가 가게에서와 다른 걸음걸이로 걷는다는 것을 알았다. 두 번째 걸음을 디딜때마다 몸이 왼쪽으로 기울어서 긴 코트 자락이 흙바닥에닿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중간쯤 갔을 때 매니저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나는 매니저가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보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매니저는 저 먼 곳, 지평선 근처 건설용 크레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가던 길을 갔다. - P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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