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은 삽화 횟수가 많을수록 재발 가능성이 높아지며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더 심각해지고 간격도 짧아진다. 이러한 가속성은 우울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우울증의 첫 발병은 대개 충격적인 사건이나 비극과 관련되어 있다. 우울증 발병의 유전적 소인을 지닌 사람들은, 케이 재미슨의 표현을 빌자면 "바짝 마른 장작처럼, 삶에서 불가피하게 튀는 불똥들에 무방비한 상태로 놓여 있다." 그리고 재발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상황에 관계없이 일어난다. 어떤 동물에게 매일 한 차례씩 자극을가해 발작을 일으키면 결국 나중에는 자극을 가하지 않아도 하루에 한 번씩 자동적으로 발작이 일어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뇌도 몇 차례 우울증을 겪게 되면 자꾸 되풀이해서 그런 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울증이 외적인 비극에 의해 야기된다 해도 결국 생화학적 작용뿐 아니라 뇌의 구조까지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 P88
스트레스로 장기간 코르티솔 수치가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하면 코르티솔 체계가 손상되어, 나중에는 일단 코르티솔 수치가 증가하기 시작하면 쉽게 중단되지 않는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가벼운 충격에는 코르티솔 수치가 증가했다 이내 정상화되지만 코르티솔 체계가 손상된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어느 것이나 그러하듯 코르티솔 체계도 한번 무너지면 작은 충격에도 다시 무너지기 쉽다. 과로로 심근경색을 일으킨 사람은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아서도 다시 심근경색을 일으킬 수 있는데 그것은 심장이 지쳐서이따금 큰 무리가 없이도 그냥 손을 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정신에도 그런 일이 발생한다. 내과적 질병이라 해서 사회심리적 원인들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엘리자베스 영과 함께 일하는 후안 로페스의 말을 들어보자. "내 아내는 내분비 전문의로 소아당뇨병 환자들을 봅니다. 당뇨병은 분명 췌장의 질환이지만 외부적 요인들의 영향도 받아요. 먹는 음식뿐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까지도. 가정 환경이 나쁜 아이들은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지게 되고 그러다 보면 혈당량이 증가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뇨병이 정신 질환이 되는 것은아니에요." 우울증의 경우 정신적 스트레스가 생물학적 변화를 불러오며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된다. 사람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CRH가 분비되며 우울증의 생물학적 실재가 야기되는 경우가많다. 과도한 스트레스를 방지하는 심리학적 기술들은 CRH와 코르티솔 수치를 억제하도록 도울 수 있다. 다시 후안 로페스의 말이다. ‘타고난 유전자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발현을 통제할 수는 있지요." - P92
이런 현상은 가족들과 가족 관계에 커다란 부담을 준다. "아내는 자기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지. 그녀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두는 법을 배웠어. 고마운 일이지." 그러나 대개 가족들과친구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너무 관대하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완전히 무능력자가 된 것처럼 취급하면 그 자신도 스스로를 완전한 무능력자로 보게 되며 결국 그는 (어쩌면 필요이상으로) 진짜 무능력자가 되어 버린다. 약물치료는 사회적 불관용을 낳았다. 한번은 병원에서 어떤 여자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문제가 있니? 그럼 프로작을 먹고 이겨 낸 다음에 연락해라." 우울증 환자에게 어느 정도까지 관대할 것인지에 대한 바람직한 기준을 정하는 것이 환자나 가족을 위해 꼭 필요하다. "우울중 환자의 가족들은 절망에 전염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 P99
피츠버그에서 이루어진 연구 결과에 따르면, 중증 우울증의첫 삽화는 대개 생활사건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지만 두 번째삽화로 가면서 관련성이 적어지고 네 번째, 다섯 번째쯤 되면 생활사건과 전혀 관련성이 없어진다. 조지 브라운은 우울증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자체의 추진력으로 발병하는" 임의적이고 내인적인형태가 되며 생활사건과 분리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우울증을 지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특정한 사건들을 겪은 건 사실이지만, 그런사건들을 경험하는 사람들 가운데 우울증을 일으키는 이는 다섯 명가운데 한 명 꼴에 불과하다. 스트레스가 우울증 발병률을 높이는건 분명하다. 스트레스 중에서 으뜸은 굴욕감이고 두 번째는 상실감이다. 생물학적 취약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최선의 방어책은 외적인 굴욕들을 흡수하고 최소화하는 ‘행복한‘ 결혼 생활이다. 조지 브라운은 이렇게 인정한다. "사회심리적 변화가 생물학적 변화를 만든다. 다만 취약성은 반드시 먼저 외적인 사건에 의해 자극을 받아야 한다." - P100
우울증은 불안 증세들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불안증과 우울증을 따로 다룰 수도 있지만 불안증 분야의 손꼽히는 전문가인 사우스캐롤라이나의과대학교의 제임스 밸린저는 그것들을 "이란성 쌍둥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조지 브라운은 간명하게 "우울증은 과거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고 불안증은 미래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라고 설명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두려움에 대한 슬픔의 관계는 희망에 대한 기쁨의 관계와 같다고 했듯 불안증은 우울증의 전조다. 나는 우울증 상태에서 너무도 많은 불안을 겪었고 불안에시달릴 때 너무도 우울했으므로 위축감과 두려움이 뗄 수 없는 관게임을 알고 있다. 순수한 불안장애를 갖고 있는 환자들의 절반가량이 5년 이내에 중증 우울증에 이르게 된다. 우울증과 불안증은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경우 단일 유전자 세트를 공유한다. (이 유전자세트는 알코올중독 유전자들과도 관련이 있다.) 불안증을 동반한 우울증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자살률이 훨씬 높으며 회복하기도 훨씬 어렵다. 제임스 밸린저의 말을 들어 보자. "날마다 몇 번씩 공황 발작을 일으킨다면 한니발 장군이라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요. 그렇게 되면 누구라도 녹초가 되어 태아처럼 웅크리고 누워 있을수밖에 없죠.‘ - P103
우리의 목숨을 구하는 것들은 사소한 것들인 경우가 (대단한것들인 경우 못지않게 많다. 그중 하나는 프라이버시 문제인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자신의 불행을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기때문이다. 눈부신 미남인 데다 유명하고(고등학교 때 내가 알던 여학생들은 침실에 그의 포스터들을 도배하다시피 붙여 놓았었다.)재능도 뛰어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도 이십대 후반에는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으며 매우 진지하게 자살을 고려했노라 토로했다. "허영심이 내 목숨을 구했지요. 사람들이 내가성공할 수 없었다느니, 성공의 중압감을 견디지 못했다느니 하면서 비웃을 생각을 하니 도저히 자살할 수 없었어요." 유명인이나 성공한 사람들이 우울증에 더 취약한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은 결점투성이이기 때문에 완벽주의자들은 우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울증에 걸리면 자신에 대한 존중감은 낮아지지만 대개 자존심까지 잃지는 않는다. 자존심은 내가 아는 그 어떤 것보다 우울증과의 싸움에 도움이 된다. 우울증이 깊어져 사랑조차 무의미한 것으로 느껴질 때에도 허영심과 의무감이 우리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 - P110
존 그리든의 말을 들어 보자. "장기 복용이 정확히 어떤 효과들을 가져올지는 나도 모릅니다. 아직 프로작을 80년 동안 복용한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러나 약을 끊거나 먹었다 안 먹었다 하거나, 부적절하게 복용량을 줄이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는 분명히 압니다. 뇌가 손상됩니다. 만성화에 따르는 결과들이 일어납니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점점 더 심각한 형태의 재발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당뇨병이나 고혈압은 꾸준히 치료해야 하는 병으로 알면서 왜우울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런 이해 못 할 사회적 압력은 대체 어디에 기인할까요? 우울증이라는 병은 약물치료를 중단하면 1년 이내 재발률이 80퍼센트에 이르며 약물치료를 하면 회복률이 80퍼센트입니다." 국립정신건강연구소의 로버트 포스트도 같은 의견이다. "사람들은 평생 약에 의존하는 것의 부작용에 대해 걱정하지만 그 부작용은 미미하다고 볼 수 있어요. 우울증을 방치하면 치명적인 결과에 이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지요. 당신의 친척이나 환자가 강심제를 복용하고 있다면 그에게 복용을중지하라 권유하겠습니까? 그러다 심장이 점차 기능을 잃으면서 폐나 다른 조직으로 혈액이 몰리는 울혈성심부전 발작이 일어나 심장이 다시는 제 모습을 찾지 못하게 된다면? 우울증도 그런 경우와 조금도 다를 게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약의 부작용을 겪는 것이 병을 안고 사는 것보다 훨씬 건강한 것이다. - P129
이제 나는 우울증 삽화에 대비해 어떤 절차들을 밟아야 하는지 알게 된 터였다. 어떤 의사들에게 연락해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언제쯤 면도칼들을 치우고 개를 데리고 열심히 산책을 다녀야 하는지도 알았다. 나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우울증이 재발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소중한 친구들이 내 집으로 들어와 두 달 동안 함께 살면서 하루 일과 중 힘겨운 부분들을 견뎌 내도록 도와주고, 내 불안과 공포를 대화로 가라앉혀 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꼭꼭 끼니를 챙겨 먹도록 하고, 내 외로움을 덜어 주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내 평생의 마음의 벗이 되었다. 동생이 연락도 없이 캘리포니아에서 날아와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아버지도 즉각 내게 주의를 집중했다. 나는 발 빠르게 대처하고, 언제라도 연락할 수 있는 의사를 확보하고, 자신의 우울증 패턴을 분명히 파악하고, 아무리 힘들고 싫어도 수면과 식사를 조절하고, 스트레스는 즉시 풀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동원한 덕에 구원받을 수 있었다. 재발 첫날에 나는 대리인에게 전화해서 상태가 안 좋으니 아무래도 책의 집필을 보류해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이번 재난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알 수 없노라 고백했다. "내가 어제 차에 치어 지금 병원에서 엑스레이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언제 다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나는 멍한 그로기 상태가 되는 걸 무릅쓰고 자낙스를계속 먹었는데 불안이 폐와 위장에서 멋대로 날뛰도록 방치하면 상태가 악화되어 곤란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발광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제정신이 아니었다. 전시에 폭격을 피하지 못해 처참하게 파괴되어 가는, 그리하여 겨우 남은 유물의 자취가 잔해 속에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독일의 드레스덴이 된 기분이었다. - P140
나는 과거라는 것을, 시간의 경과라는 진실을 받아들이기가너무도 힘들다. 내 집에는 과거를 너무 생생히 연상시킨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읽지 못하는 책들과 듣지 못하는 음반들과 볼 수 없는사진들이 가득하다. 어쩌다 대학 친구들을 만나면 그 시절이 너무 행복했기에 (지금보다 반드시 더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시절만의 독특한 행복감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기에) 그때 얘기를 너무 많이 하지 않으려 한다. 빛나는 청년 시절은 나를 초조하게한다. 나는 항상 과거의 즐거움이라는 벽에 부딪히는데, 내게는 과거의 즐거움이 과거의 고통보다 더 견디기 어렵다. 외상후스트레스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는 알지만 내게는 다행히도 과거의 외상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 존재한다. 하지만 과거의 즐거움들은 견디기 어렵다. 이제 이 세상에 없거나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린 사람들과 함께했던 행복한 기억들이 내겐 현재 최악의 고통이다. 나는 과거의 즐거움의 파편들에게 제발 기억을 되살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한다. 지나치게 무섭고 끔찍했던 체험들 못지않게 지나치게 즐거웠던 체험들도 우울증을 낳을 수 있다. ‘기쁨 후 스트레스(post-joy stress)‘라는 것도 있다. 최악의 우울증은 과거를 이상화하거나 한탄하며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 P1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