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간식 시간에 어린이들과 요구르트를 마셨다. 우리는 빨대를 쓰지 않고 덮개를 뜯어내고 마시기로 했다. 잘 뜯어지지 않아서 애를 먹는 어린이도 있었지만, 그래도 열두 살답게 어찌어찌 해결했다. 다들 조그만 통 조그만 구멍에 입을 대고 달짝지근한 요구르트를 홀짝, 또는 호로록 소리를내며 마셨다. 한 어린이가 말했다.
"이상하게 요구르트를 마시면 일곱 살이 된 것 같아요."
일곱 살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다. 5학년인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옛날이다. 어른한테는 ‘언제 이만큼 컸나. 세월 빠르다‘ 하고 느낄 만한 시간이 어린이 자신한테는 추억을 쌓기 충분한 세월이다. 똑같이 입술을 오므리고 요구르트를 마시고 있자니, 나도 일곱 살이 된 것 같았다. 동그랗게 모여 앉아 어린이 네 명과 어른 한 명이 모두 일곱 살이 되었다. 무언가 공평해졌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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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론idealism을 거부했다. 독일 철학자 루드비히 포이어바흐를 따라 마르크스는 역사에서 물질의 힘에 주목했다.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The Essence of Christianity>에 따르면, 신은 단지 인간의 욕망, 필요, 그리고 속성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 같은 말이지만,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실존적 존재인 인간이 신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냈다.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는 뒤에 종교를 "민중의 아편opium of the people"으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열망을 신과 내세에 투영하는 한, 그들은 현실 세계의 물적 조건 materialconditions 과 불의 injustices 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 P250

마르크스는 변증법적辨證法的방법과 유물론唯物論materialism 을 결합했다. 뒤에 엥겔스는 이것을 변증법적 유물론 dialectical materialism 또는 역사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이라 이름 붙였다. 헤겔의 머리가 구름 너머 저편에있었다면, 마르크스는 코를 땅에 박고 문지르고 싶어 했다. 마르크스는역사는 땅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말했다. 종교, 윤리, 또는 민족주의가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창밖을 내다봐라. 인간이 한갓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얼마나 애쓰고 발버둥치고 있는지 똑똑히 보라. 인간 없는 역사는있을 수 없다. 그리고 빵 없이 인간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최초의 역사적 행위는 이런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을 생산하는 것이다."  - P251

마르크스는 역사가 노예제 사회에서 봉건제, 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역사적 경로는 하늘에 떠 있는별들이나 어떤 불변적인 법칙에 사이에 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에 놓여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은 인간과 생산수단)의 관계(생산양식 또는 생산제관계에 놓여 있다. 각각의 생산 양식은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을 만들어낸다. 각각의 시대는 지배 계급이 수익을 수취해 가는 특별한 방식으로 특징지어진다. 로마 시대에는 노예를 소유한자가 노예가 생산한 것에 대해 소유권을 가졌다. 봉건제 시대에는 영주가 농도가 생산한 것에 대해 소유권을 가졌고, 자본주의 시대에는 공장 및 토지의 소유자가 임금 노동자가 생산한 것에 대해 소유권을 가졌다. 이처럼 지배 계급의 생존은 피지배 계급의 노동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것이 노동자들의 교섭력을 높여줄까?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은 지배 계급과 협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배 계급이 생산 수단을 통제하기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구슬을 챙겨 집으로 가지고 갈 수 없다. 그것은자신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P252

마르크스에 의하면 사적 소유 제도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지배 계급은 대중을 현혹한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에게 주식이나 채권을 보유하고, BMW를 구매하는 꿈을 꾸도록 한 것은 바로 유인suggestion 과 설득persuasion의 힘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개인들은 이런 꿈을 외부의 유인과 설득의 힘이 아닌 자기 자신의 고유한 것으로 생각하고, 따라서 그것들을 내면화하거나 주관화한다. 다시 말해, 그것을 외부에서 주입된 의식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기존 지배 관계의 유지에 관여하는 관념, 법, 윤리를 상부구조superstructure 라 불렀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Political Economy》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 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지적 생활을 조건 짓는다.
(•••)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결정한다." - P253

마르크스에 따르면, 생산 과정의 기술이 바뀌면 기존의 생산 과정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새로운 생산 기술이나 방법은 토지, 노동, 그리고 자본의 양과 질을 바꾼다. 발견, 발명, 교육, 인구 증가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물질적 생산력은 동적 dynamic이다. 이렇게 새로운 생산력이 더해지면서 오래된 생산 과정은 폐기된다. 예를 들어, 노예제는 토지 대비 노동자의 비율의 높을 때 이윤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트랙터나 수확기의 생산성이 노예보다 더 효율적이거나 노동자 인구가 상승하면, 노예제는 이윤을 많이 낳지 못할 것이다. 즉, 미래의 생산력은 새로운 생산 과정에 달려 있다. 그러나 정치, 윤리, 그리고 법 제도 전반은 낡은 방법에 의존한다는것을 잊지 말자. 즉, 생산력이 발전한다고 해서 이런 제도들이 발맞춰 신속하게 바뀌지는 않는다. 산업혁명 이후에도 성직자들은 여전히 노예 제도가 신의 왕국으로 가는 첩경이라고 설교했다. 이것은 성직자들의 마음과 중세 성당의 대리석에 새겨진 영원불멸의 진리였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듯이 상부구조는 정적 static 이다.
구(지배 계급이 낡은 관념을 틀어쥐고 새로운 경제발전을 저해함으로써 역동적인 역사 과정을 방해할 때 투쟁이 일어난다. 마르크스는 수동 제분기가 중세 영주를 낳았고, 증기 제분기가 산업자본가를 탄생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세 영주는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산업자본가들과 대립한다. 뒤에 길드 장인들은 공장 소유자와 대립한다.  - P255

사회의 물질적 생산제력 material forces of production 은 어떤 발전 단계에서 기존의 생산제관계와 대립하게 된다. (...) 이런 관계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발목을 잡는다. 이때 사회 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 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다소 빠르게 변한다. 그런변화를 고찰함에 있어서 토대와 상부구조, 즉 엄밀한 자연과학을 통해확인할 수 있는 경제적 생산제조건의 물질적 변화와 법적, 정치적, 종교적, 예술적 또는 철학적 변화, 간단히 말해 인간이 이런 갈등에 대해 의식적으로 되고 끝까지 결판을 내야하는 이데올로기 형식들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 P257

만일 자본주의가 ‘필연성‘에 의해 몰락하고 사회주의가 도래한다면, 그리고 이것을 역으로 추산해 본다면, 자본주의가 도래한 것은 봉건주의가 몰락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로가기 위한 꼭 거쳐야 하는 불가피한 단계가 아닐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많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그다지 불필요한 살육자, 또는 인류에게 닥친 불행이 아니다. 마르크스는자본주의를 사악한 인간에 의해 악의적으로 고안된 체제로 묘사하는비과학적 낭만주의자들을 비판했다. 사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에게 몇가지 그럴듯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특히 그는 자본주의가 인간이 봉건제의 열악한 물질적 상황과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사실을 명확히 했다. 이런 인식 때문이었을까.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했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 수단의 급속한 발전, 통신 수단의 손쉬운 활용을 통해 가장 미개한 사회를 포함해 모든 나라를 문명화시킨다. 부르주아지의 값싼 상품은 중국의 만리장성을 무너뜨리고 외국인에 대해 뿌리 깊은 증오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미개인들을 강제로 굴복시키는대포와 같다. (...) 부르주아지는 백년 남짓 하는 지배 기간 동안 이전의모든 세대들보다 더 크고 더 많은 생산력을 창출했다. - P258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경제력 집중을 자본의 집적centralization 및 집중concentration으로표현했다. 자본의 집적이란 자본이 잉여 가치 또는 이윤의 일부를 생산 규모의 확대에 사용함으로써 자본 규모 및 생산 규모가 확대되는 것을 말한다. 자본 축적과 같은 말이라고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본의 집적 증대는 자본의 축적을 증진하지만, 자본가의 재산이상속에 의해 분할되는 경우 또는 잉여 가치가 원래의 자본으로부터 분리해서 독립된 새로운 개별 자본으로 기능을 할 경우에는 자본가의 수가 증가하고, 자본 축적은 분산하는 형태로 집적된다. 그러나 그 이외의 자본의 집적은 사회적 자본의 축적에 의해 제한된다. 반면, 자본의 집중은 둘 이상의 자본이 각각의 자립성을 잃고 결합, 합병 또는 흡수 등에 따른 자본의 가치 증대이다. 그것은 자본가에 의한 자본가의 수탈로 다수의 소자본이 소수의 대자본에 흡수되는 것이어서 축적이나 집적과는 달리 사회적 자본의 축적 한계에 의해제한되지 않는다. 이처럼 정의상 집적과 집중은 명확히 구별되지만, 사회적 축적 과정에서양자는 자본의 축적을 기초로 해서 자본의 집중이 일어나고, 이 집중에 의해 집적이 촉진되는 식으로 서로 작용한다. 그리고 자본의 집적과 집중의 진전에는 경쟁과 신용이 가장강력한 지렛대 역할을 한다. 또한, 그것은 자본의 동원을 조장해 주식회사 제도의 전개를촉진시키고, 주식 지분의 지배 집중에까지 이르게 한다. 또한 자본의 집적과 집중의 상호규정적 진행은 개별 자본의 거대화와 시장 집중도의 고도화를 가져오고, 시장 참여를 매우 어렵게 해서 소수 거대 자본의 독점적 시장 지배, 독점화 경향을 초래한다. - P271

마르크스는 그렇게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소득의 ‘공정한‘ 분배나 부의 전면적인 재분배를 갈망하는 것을 경멸했다. 사회주의에서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에 대해 ‘완전히 등등한 대가‘는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지불되지 않고 남는 부분은 공공 목적을 위해 사용될 것이다. - P275

그러면 마르크스가 자신의 ‘노동가치‘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상상력과 기업가 정신 entrepreneurship을 간과했다. 부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유형재의 투입만으로는 부족하다. VCR (카세트 녹화기)를 개발하는데 새로운 유형의 재료나 더 철저한 노동 착취 방식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당시 비디오 산업은 다음 두 가지를 필요로 했다. 즉, 발명과 투자에 대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기업가 정신이 그것이다. 구소련 시절에 러시아인들이 미국산 데님 청바지를 그렇게갈망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구소련이 질 좋은 옷을 생산할 수있는 면화나 노동자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상상력, 혁신, 규율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비유형적인 요소가 성공적인 기업들과 나라들을 그렇지 않은 기업들과 나라들과 나뉘는 기준이다. - P278

일부 마르크스를 옹호하는 논자들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의구세주로서 정부 부문의 성장을 강조한다. 특히 그들은 사회복지 지출중대가 자본가들을 심각한 경기 침체와 혁명에서 보호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들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그들이 기억해야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정치 제도와 상부구조는 정적으로 변화에 저항한다고 선언했다는 점이다. 즉, 상부구조의 경직성이 자본주의의 붕괴에 일조한다. 그런데 거꾸로 상부구조가 자본주의를 구제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고한다면, 마르크스의 예언은 또 빗나간 것이 된다. - P284

처음부터 마르크스는, 비록 말년에 후진 농업 국가였던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점치기는 했지만, 공산주의를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들에서나 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러시아 혁명 이후, 스탈린Joseph V. Stalin 은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농업 국가였던 러시아를 산업국가로 발전시키기 위해 어려운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체제에서 ‘소유권에 대한 전제적인 침해‘ 방식으로 《공산당선언>에 나와 있는 10가지 계획 가운데 (1) 토지에 대한 소유를 폐지하고, 모든 지대를 공공의 목적을 위한 사용한다고 한 것과 (9) 농업과 제조업을 결합하고, 인구를 전국적으로 좀 더 균등하게 배치함으로써 도시와농촌의 차이를 점진적으로 폐지한다고 한 제안에 따라 농민들을 집단농장 및 국영 농장에 강제로 편입시켰다. 1932년에서 1933년의 추운 겨울 동안, 스탈린은 이런 강제 편입에 대한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수백만 농민들을 아사시켰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는데, 그 결과 인명 피해도 다른 곳에 비해 더 컸다.
스탈린 이전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Vladimir I. Lenin 역시 사회주의 러시아를 건설하면서 같은 정치적 난관에 봉착했었다. 그의 집권 시기동안,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정당 독재로 변모했다. 그리고 이 독재는 소련이 붕괴되던 1989년도까지 지속됐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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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가지 않는 어두운 숲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죽은 자와 산 자가 자리바꿈하는 날이 오리라. 숲은 움직이게 되리라. 우리에겐 희망이 없지 않다. 많은 경찰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장 심각한 범죄들은 미결로 남으리라. 마찬가지로 우리 삶 어딘가에 미결의 위대한 사랑이 있는 것이다.
나는 어두운 숲을 물려받았지만 오늘은 다른 숲, 밝은 숲을걷는다. 노래하고 꿈틀대고 꼬리 흔들고 기는 모든 생명들!
봄이 왔고 공기가 무척 강렬하다. 나는 망각의 대학을 졸업을 하였고, 빨랫줄 위의 셔츠처럼 빈손이다. (<소곡> 전문) - P282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아마 수많은 대답이 나올 겁니다. 문학은 그만큼 복잡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태도‘입니다. 최근 시인 이성복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선생께서도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축구선수가 찬 공은 발의 각도를 그대로 가지고 날아간다. 공이 작품이라면 발은 정신이다." 이 ‘정신‘을 다른 말로 ‘태도‘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제게는 이상과 김수영이 삶과 문학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김수영의 태도를 한마디로 ‘정직‘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그럴듯한 시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기에게 있지도 않은 무엇을보태어 시를 꾸며내는 일을 그는 혐오했습니다. 그런 사기를 김수영은 포즈(pose)라고 불렀습니다. 포즈는 사진을 찍을 때만 인위적으로 취하는 자세니까요.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현대성보다도 사상보다도 백배나 더 중요한 일이다."(<요동하는 포즈들>)
"진지성이다. 포즈 이전에 그것이 있어야 한다. 포즈의 밑바닥에 그것이 깔려 있어야 한다."(<포즈의 폐해>) 그래서 김수영은 포즈를 버리고 자신의 옹졸함과 폭력성을 시로 썼습니다. 자기 자신을 폭로하는 시 쓰기가 읽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율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을 입증한 사람이 바로 김수영입니다. - P305

급기야 3연에서는 인과관계 자체가 소멸된다. 1연에서 풀은바람보다 늦었지만 2연에서 풀은 바람을 앞섰다. 3연의 핵심 구절에는 이 두 방향이 뒤섞여 있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이렇게 인과가 해체되면 ‘풀이 운다‘라고 생각할 이유는 또뭐겠는가. 마침내 화자는 풀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흐린 하늘과 눕는 풀을 원경으로 보여주는 시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제 비관주의만은 아닌 어떤 것이 배어나오기 시작한다. 시는 여기서끝나지만, 그 시작은 삶에서 계속 실험될 것이었다. 그러나 불의의 교통사고로 그 실험은 중단되고 말았다.
당대 한국 사회의 후진성에 절망하지 않으려고 고투했던 김수영은 풀에 자신의 절망을 투영했다가 풀로부터 다시 희망을 길어 올린다.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능력‘의 산물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이기도 하다. - P311

-부기
이후 2018년에 출간된 개정판 《김수영 전집》(민음사)에 다음과 같은 추천사를 적었다.

"시인 김수영은 한국시사에 최소 두 개의 시학적 발명품을 선사했다. 비속한 일상어로도 계시적 효과를 거두는 기술, 그리고 카오스모스에 가까운 시적 구조로 역동적인 난해함을 창출하는 기술, 시를 쓰는 데에만 사용된 기술이 아니다. 일상적 시어는 제 자신의 속물성을 적발하고고백함으로써 나날이 거듭나려 했던 그의 사인(私人)적 고투의 반영이고 카오스모스적 구조는 한국 사회가 억압적인 질서정연함이 아니라해방적인 혼란으로 가득하기를 바랐던 그의 무한 자유를 향한 시민적신앙의 반영이었다. 그는 각각을 ‘죽음의 연습‘과 ‘사랑의 변주‘라 불렀는데, 이는 4.19에서 목격한 빛을 5.16 이후의 동굴 속에서도 끝내 잊지 않기 위해 그가 연마한 존재의 기술이기도 했다. 다시 온 세상이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오기를 바랐던 그의 희망은 1987년과 2017년의 시민혁명으로 실현됐으니, 과연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능력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에게서 배운다. 그러나 아무리 배우고 또 배워도 언제나 새로운 그를 누구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리라. 이 시인.• 사인 • 시민의 성(聖)삼위일체를 우리는 ‘김수영‘이라고 부른다." - P312

둘째, 왜 정확한 칭찬인가. 칭찬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서 하는 일이 아니다. 칭찬은, 칭찬의 대상에게도 그렇지만 칭찬의 주체에게도 위험할 수 있는 일이다. 부정확한 비판이 분노를 낳는다면 부정확한 칭찬은 조롱을 산다. 어설픈 예술가만이 정확하지 않은 칭찬에도 웃는다. 진지한 예술가들은 정확하지 않은 칭찬을 받는 순간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칭찬은 자신이 칭찬한 작품과 한 몸이 되어 함께 세월을 견디고 나아간다. 그런 칭찬은 작품의 육체에 가장 깊숙이 새겨지는 문신이 된다. 지워지지도 않고 지울 필요도 없다. - P324

모든 관계는 일종의 교환이라는 생각이 출발점이었다. 사랑도 하나의 관계라면, 사랑 안에서도 모종의 교환이 이루어지고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런데 여타의 관계와는 다른, 사랑 고유의 교환 구조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결여의 교환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결여를 갖고 있다. 부끄러워서 대개는감춘다. 타인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그의 결여를 발견하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의 결여가 못나 보여서 등을 돌리게 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여 때문에 그를 달리 보게 되는 일. 그발견과 더불어, 나의 결여가 사라졌으면 싶은 어떤 것이 아니라오히려 그의 결여와 나누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내가 아니면그의 결여를 이해할 사람이 없다 여겨지고, 그야말로 내 결여를 이해해줄 사람으로 다가온다. 결여의 교환 구조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을 대체 불가능한 파트너로 만들었으니, 두 사람은 이번 생을 그 구조 안에서 견뎌나갈 수 있으리라. 말하자면 이런 관계가 있지 않을까. 있다면, 바로 그것을 사랑의 관계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 P332

그 이후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위 논의를 보완하고 싶어졌다. ‘사랑의 관계 속으로 진입할 때 나에게 생기는 변하는 어떤 것일까? 흔히 다시 태어난다고들 하는데, 새로 태어난 나는 이전의 나와 어떻게 다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완전함‘과 ‘온전함‘을 분별할 필요가 있다.(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할 사람도 있겠으나, 영어의 ‘perfect‘(완벽)와 ‘complete‘(완성)사이에도 어감의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말하기로하자.) 사랑의 관계를 형성한다고 해서 내 결여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여가 없다는 의미에서의 ‘완전한 사람이될 수는 없다. 그러나 상대방을 통해서 내 결여와 새로운 관계를맺을 수는 있다. 내 결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과 더불어살아가는 관계. 결여가 더는 고통이 아닌 생, 그런 생을 살 수 있게 된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사랑은 나를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온전하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지금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홀로 있을 때가 아니라 그와 함께있을 때, 나는 더 온전해진다.‘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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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1

지금껏 이렇게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소설을 시작해 본 적이없다. 내가 이 글을 소설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단지 마땅히붙일 다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줄거리다운 줄거리도 별로 없고 결말이 죽음이나 결혼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내며 따라서 포괄적인 결론이다. 결혼 역시꽤 괜찮은 마무리 방식이지만, 고상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해피엔딩이라 부르는 것을 비웃어야 한다고 경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결혼으로써 이제 필요한 이야기는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정상적인 본능이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면 그들은 생물학적 임무를 완수한 셈이고 이제 관심은 그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그러나 나는 독자들에게 정해진 결론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내가 이따금 만나서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한 남자를 회상한 내용이다. 나는 그가 나와 만나지 않았던 기간에는 어떤 일을 경험했는지 거의 아는 바가없다. 나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기간에 있었을 법한 일을 그럴듯하게 꾸며 내 좀 더 조리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단지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이야기를 쓰고 싶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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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청준이 암시하듯 예언이 동시대의 사회역사적 진리에 대한 통찰이자 그 통찰에 대한 헌신일 수있다면, 우리 문학사에서 그런 예언자를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올해 50주기를 맞은 김수영이야말로 그에 부합하는 사례일 수 있다. 김수영 자신은 "나는 사후 백 년 후에 남을 시를 쓰려고 노력할 수는 없지만, 작품이 끝난 후 반년 정도의 앞을예언할 만한 시를 쓰고 싶다"(<시작 노트 2>)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지나치게 겸손했던 것이 아닐까.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사랑의 변주곡>) 이를테면 이런 구절은 1980년 5월, 1987년 6월, 그리고 2017년 겨울에 대한 예언이라고 할 수는 없겠는가. - P196

물론 다른 이들도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서 입신출세한 사람을 선망은 할 수 있어도 존경까지 할 필요는없다. 나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그 고통을 함께하기로 결심한 사람,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자신의 안락을 포기한 사람들만을 존경한다. 나는 우리의 대통령이 부디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혹자는 성품이 아니라 능력을 봐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성품이나 능력이냐‘라는 물음은 잘못된 양자택일이다. 대통령에게 필요한 능력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성품이 곧 능력이다. 이 판단이 정치적으로는 매우 순진한 것일 수있음을 안다. 그러나 고집을 부리고만 싶다.
환상을 품고 있지는 않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구세주가 될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삶이 오늘의 그를 믿게한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능력과 그것을 차마 외면하지못하는 능력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치명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귀 기울일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말을, 반값 임금에 혹사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말을, 차별당하는 소수자들의 말을. 그 고통을 알겠어서, 차마 도망칠 수 없어서,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다. 대통령(大統領)이 대통령(大痛靈)이면, 우리 중에 가장 크게 아파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2017.5.4) - P203

김현경의 책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에 따르면 ‘인간‘과 ‘사람‘은 다르다. 인간은 그냥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고 사람은 ‘사회적 인정‘의 문제라는 것. 한 ‘인간‘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31쪽) 우리 사회가 장년층·노년층을 사회적 인정의 장에서 배제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들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주고 삶의 의미를 생산해내는 거대한 발전소를 만든 것이라면, 그것은 단지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기만 할까. ‘사회적 인정‘의 영역에서도 복지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보는 날들이다. - P211

첫째, 대상이 ‘강자인가 약자인가‘는 오래된 기준 중 하나다.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강자를 대상으로 할 때에만 풍자다. 그때 그 일은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폭로하는 숭고한 행위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적 권력자와 단순한 유명인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권력자는 대개 유명인이지만, 유명인이 연제나 권력자인 것은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 나에게 위해를 가할수 있는 사람이 권력자라면, 직업의 성격상 대중에게 이름이 알려졌을 뿐인 사람은 유명인이다. 유명인을 향한다고 해서 조롱이 풍자로 변하지는 않는다. 오늘날의 매체 환경 속에서 실명이노출된 유명인과 익명의 보호를 받는 네티즌 중에서 누가 더 강자인가 유명인이라면 감수해야 할 고통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가학을 합리화하는 궤변이다.
둘째, 대상의 속성이 ‘선택인가 조건인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권력자의 판단과 행위와 그 결과가 광범위하고 부정적인 대중적 영향을 끼쳤을 때, 그의 그런 ‘선택‘과 관련된 사항들은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존재가 스스로 선택한바 없는 자신의 ‘조건‘은 웃음거리가 될 수 없다. 장애인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이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걸음걸이를 문제 삼는 일은 비판도 풍자도 아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여전한 권력자이고 박근혜 현 대통령은 그야말로 권력자다. 그러나 누가 그들의 판단과 행위와 그 결과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외모와 성별을 웃음거리로 만든다면 그 대상이 아무리 권력자라 해도 그 행위는 비열하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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