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인정머리들도 없습니다. 이젠 지긋지긋합니다. 전부들 지겹단 말입니다. 내가 파티를 열 때는 그렇게 야단스럽게 나를 치켜세우더니 이제 늙고 병이 드니까 필요 없다 이거지요. 제가 앓아누운 후로 병문안 온 사람은 열 명도 안 되고, 이번주 내내 받은 거라곤 초라한 꽃다발 하나가 전부입니다. 내가 안해준게 뭐 있습니까? 음식도 내주고 술도 내주고 심지어는 심부름도 해 줬습니다. 그들이 여는 파티에도 빠짐없이 참석해 줬지요. 그들을 위해 내 모든 걸 보여 줬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얻은 게 뭡니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내 생사조차 신경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매할 수가 있는지......." 그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움푹 팬 두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국을 떠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죽음을 코앞에 둔 노인이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다고 아이처럼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몹시 서글퍼졌다. 충격적이기도했지만 동시에 견딜 수 없을 만큼 그가 애처로웠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엘리엇, 그날 비라도 내릴 겁니다. 그럼 파티는 완전히 엉망이 되겠지요." 그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듯 내 말을 잡고매달렸다. 눈물을 흘리던 그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 P380
"그렇죠. 그러니 선처를 부탁드릴게요, 키스 부인. 초대장 한장만 주세요. 어차피 오시지도 못할 테니까, 그저 가엾은 노인네를 기쁘게 해 드리자는 겁니다. 키스 부인까지 그분한테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요. 저한테 늘 아주 잘해 주셨죠. 그분은 신사예요. 제가 신사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몇 명 안 되거든요. 이 집에 와서 공작 부인의 돈으로 살찐 배를 채워 가는 신사들은 신사로안 보죠." 원래 지체 높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귀가 되어 줄 충실한 부하를 두고 있는 법이다. 이런 부하들은 무시나 모욕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스스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 상대를 정확히 겨냥하여 주인에게 그 사람에 대한 혹평을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그렇게 해서 주인까지 그 사람을 미위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과는 되도록 좋은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엘리엇은 언제나 가난한 친척들과 늙은 하녀들, 충실한 비서들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고 진심 어린 미소를 보냈다. 틀림없이 키스 부인과도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고, 크리스마스에는 초콜릿 한 상자나 휴대용 화장품 케이스, 핸드백 등을 선물로 보냈을 것이다. "키스 부인,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는 겁니다." 키스 부인은 코안경을 올려 오뚝한 코에 똑바로 걸쳤다. "저더러 주인을 배신하라는 건 아니겠죠. 몸 선생님? 게다가 제가 배신한 걸 알면 그 노인네는 당장 절 해고할 거예요. 초대장은 책상에 있어요. 봉투에 들어 있죠. 저는 그냥 창밖을보고 풍경을 즐기고 있을게요.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다리가 저리니까요. 제가 등을 돌리고 있을 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저한테 책임을 묻지 못하겠죠." 키스가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을 때 초대장은 이미 내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 P384
당시 비행기들은 너무 허술해서 하늘에 오를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했죠. 비행고도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정말 우스운수준이었어요. 하지만 그땐 그보다 더 좋은 게 없을 정도로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죠. 저는 하늘을 나는 게 너무 좋았어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죠. 굳이 말로 표현하면, 뿌듯하고 행복한 기분이랄까? 허공에 떠 있으면 나 자신이 아주 위대하고 아름다운 무언가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어요. 대체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도 몰랐죠. 제가 아는 거라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2000피트 상공에 혼자 떠 있으면서도 어딘가에소속된 느낌이 들었다는 것뿐이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정말 그랬어요. 거대한 양떼 같은 구름 위를 날 때면 한없이 편안한 기분이 들었죠." 래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꿰뚫을 수 없을 듯한 우묵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지만 정말 나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광경을 직접본 적은 없었어요. 그래서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죠. 그러다가 죽은 사람을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됐어요. 수치심이 밀려들더군요" "수치심?"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수치심, 그 친구는 저보다 서너 살 위였는데, 정말 정력적이고 용감한 사람이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혈기왕성하고 선량하던 사람이 애당초 살아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엉망진창의 고깃덩어리로 변해 버린 겁니다." - P416
그랬다면 제 길이 확실히 정해 있었을 테니 저도 수도회에 들어갔겠죠. 이 세상에선 도저히 믿음이 생기지 않았어요. 저도 믿고 싶었는데, 평범한 사람들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는 하느님을 믿을 수가 없더군요. 수사들이 그랬죠.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지만 그건 그리 가치 있는 목적이 아니라는 생각이들었어요. 베토벤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교향곡들을 만들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속에 존재하던 음악을 어떻게든 표현해야 했고, 그래서 자신이 아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최대한 완벽하게 만든 것뿐이죠. 수사들이 암송하는 주기도문을 듣고 있으면 저들은 어떻게 한치의 의심도 없이 꾸준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죠. 아이들이 땅에 있는 자기 아버지한테 양식을 달라고 간청하는 것 보셨습니까? 아이들은 아버지가 당연히 먹여 줄 거라고 믿잖아요. 아버지가 음식을 준다고 해서 고마워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죠. 오히려 낳아 놓고 제대로 못 먹이거나 안먹이면 우린 그런 사람을 비난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물질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할 준비가 안 됐다면 그들을 창조하지 말았어야죠." "맙소사, 래리, 자네, 오히려 중세에 안 태어난 게 천만다행인 것 같은데, 중세에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화형당했을 테니까말이야." - P421
"윤회가 세상의 악에 대한 설명이 되는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우리가 겪는 나쁜 일들이 전생에 지은 업보라면 그저 단념하고 견뎌 내려고 노력하지 않을까요? 그 과정에서 선을 추구하면 다음 생에서는 고통이 줄어들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고요. 하지만 자신이 겪는 악이나 불행은 비교적 쉽게 견딜 수 있죠. 약간의 강인함만 있으면 되니까요. 반면, 다른 이들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 종종 너무나도 부당하게 보이는 일들은 더 받아들이기가 힘들죠. 그런데 그것이 과거의 업보로 인한 불가피한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애석한 마음도 들고 고통을 분담하려고 노력하기도 하겠죠. 그게 마땅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그에 대해 분개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요?" - P437
"저는 뭔가를 묘사하는 데는 젬병이에요. 어떤 말을 동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눈부시게 날이 밝아 오면서 제 앞에 펼쳐진 그 장엄한 광경을 어떻게 하면 눈에 보이듯이 설명할 수 있을까요? 깊은 정글로 뒤덮인 산들, 여전히 나무 꼭대기마다 뒤엉켜 있는 안개, 그리고 저 아래 펼쳐진,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숲속 나무들 사이로 새어 든 햇살이 호수를 비추면서호수가 마치 강철판처럼 반짝거렸죠.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광경이었어요. 그토록 엄청난 기쁨, 그토록 초월적인 환희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죠. 묘한 흥분이 일더군요. 짜릿한 느낌이 발끝에서부터 온몸을 타고 머리끝까지 올라왔어요. 순간, 육체에서 해방되는 느낌, 육체에서 빠져나온 순수한 영혼에 이전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아름다움이 깃드는 느낌이 들었죠. 인간을 초월한 어떤 인식이 나를 소유하면서 그동안 혼란스러웠던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골치 아팠던 모든 것이 설명되는기분이었죠. 너무 행복한 나머지 고통이 밀려들어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어요. 그런 상태로 조금만 더 있으면 틀림없이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엄청난 환희에서 벗어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했죠. 제가 느낀 기분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마치 천국에 온 듯한 그 황홀경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없을 것 같아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기진맥진해서 떨고있더군요. 그러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어요." - P454
"래리, 자네가 이 기나긴 모험을 시작한 건 결국 악이라는문제 때문이었지. 자네를 재촉한 건 바로 악의 문제였어. 지금까지 긴 얘기를 들었지만 그 해답을 찾았다는 얘긴 없었던 것같군." "애초에 해답이 없었을 수도 있고 제가 모자라서 끝내 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죠. 라마크리슈나는 이 세상을 신의 장난으로 보았어요. ‘그것은 유희와도 같으며, 그 유희에는 기쁨과 슬픔, 미덕과 악덕, 지식과 무지, 선과 악이 존재한다. 삼라만상에서 죄와 고통이 모두 제거되면 그 유희는 끝을 맞는다‘라고 말했죠. 하지만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생각을 거부하고 싶습니다. 제가 주장할 수 있는 건, 절대자가 이 세상에그 자신을 현현했을 때 선과 악이 본질적인 상관관계를 갖고있지 않았을까 하는 거예요. 지각변동이라는 상상하기 힘든 공포가 없었다면 히말라야 산맥의 장관은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겁니다. 중국의 장인들은 얇은 도자기로 예쁜 모양의 꽃병을 만들어 거기에 아름다운 디자인을 넣고 멋지게 색칠한 다음, 완벽한 광택을 추가하죠.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꽃병도 그 본질적인 속성 때문에 쉽게 깨질 수밖에 없어요. 바닥에 딸어뜨리면 산산조각이 나고 말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도 오직 악과 결합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 P461
"시도는 할 수 있잖아요. 물레도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거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도 한 사람이었어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작게나마 영향력을 갖고 있게 마련이죠. 연못에 돌 하나를 던져도 이 우주는 돌을 던지기 전의 우주와 똑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인도의 성자들이 헛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에요. 그들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과도 같은 존재죠.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워 주는 이상과도 같은 존재예요. 보통 사람들은 결코 그런 위치에 달하지 못하지만 그들을 우러러보고 존경하면 그들에게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죠. 한 인간이 고결하고 완벽해지면 그런 성품의 영향력이 널리 퍼져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그 사람에게 이끌리게 됩니다. 제가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삶을 이끌어 나간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죠. 물론 영향이라고 해 봐야 연못에 돌을 던졌을 때 작은 물결이 이는 것처럼 아주 미미할 겁니다. 하지만하나의 물결은 또 다른 물결을 일으키고, 그것은 그다음 물결로 이어지죠. 그렇게 되면 몇몇 사람들이나마 제 생활 방식이 행복과 평화를 준다는 점을 깨닫고 자신이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수도 있잖아요." "자네가 어떤 상대와 맞서야 하는지 알고나 있는 건가, 래리? 잔인한 사람들은 더 이상 고문대나 화형주 같은 걸로 입막음을 하려 들지 않아. 그런 건 이미 오래전에 폐기했지. 그보다 훨씬 더 파괴력이 뛰어난 무기를 발견했거든. 그 무기란 바로 신랄하게 비꼬는 말이지." "그 정도는 버틸 수 있답니다." - P464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나는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사람이다. 따라서 그처럼 보기 드문 인물에게서 나오는광채를 동경할 수는 있어도, 평범한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그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거나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래리는 자신의 바람대로 떠들썩하고 소란스러운 인간 집단에 흡수되었다. 이해관계의 상층으로 괴로워하고 세상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며, 선(善)을 강렬히 소망하면서도 외부에 대해서는 독단적이고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매우 소심한 인간들, 친절하지만 까다롭고, 남을 잘 믿으면서도 의심이 강하며, 야비하면서도 너그러운 미국인들 속에 흡수되어 버렸다. 내가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전부다. 만족스럽진 않겠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달리 방법을찾지 못한 채 확실한 결말도 없이 책을 끝낸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머릿속으로 나의 긴 이야기를 되짚어 보았다. 혹시라도 좀 더 만족스러운 결말이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말이다. 그러곤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내 의도와는 달리, 이 글이 일종의 성공담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등장시킨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원하는 바를 얻지 않았는가? 엘리엇은 사교계에서 명성을, 이사벨은 막대한 재산을 확보하여 활동적이고 교양 있는 지역사회에서 확실한 지위를 얻었으며, 그레이는 안정적이고 수익성 높은 직업과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하여 6시에 나설 수 있는 사무실을 얻었다. 수잔 루비에는 안정을, 소피는 죽음을, 래리는 행복을 얻었다. 물론 ‘자칭‘ 지식인들은 거드름을 피우며 트집을 잡겠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대중은 모두 성공담을 좋아한다. 그러니 나의 결말도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고는 할 수 없다. - P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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