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얼굴색이 피오 똥처럼 변한다. 핑계를 대고 급히 자리를뜬다. 푸세식 변기에 혼자 있을 때에만 호흡이 침착해진다. 여기서만 진정할 수 있다니! 말도 안 돼. 가장 안전하게 느껴지는 곳이라는 이유로 필요한 시간보다 오래 푸세식 변기에 앉아 있기 시작했다는게 믿어지지 않는다. 벌레와 구더기와 나방이 종이접기 하듯 서로 포개져 있는데! 기름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이 덜덜 떨린다. 평소의 대처방식, 그러니까 나는 멋져 보이고, 웃고 있고, 여기에 적합한 사람이고, 괜찮다고 다짐하는 것이 더러운 물집투성이 손가락 주위에서 부서진다. 노랗고 검은 거미가 서까래에 친 거대한 거미집에 매달려 있다. 첫날 밤에 보고 소리를 질렀던 바로 그 거미다. 나는 거미에게 해그리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해그리드가 나를 바라본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어두운 눈. 그 앞에서는 나의 미소가진짜 미소로 보이지 않을 것만 같다. 거미가 나의 마음속 어두운 곳까지, 온갖 안 좋은 것들을 꽁꽁 숨겨둔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까? 내 표면에 드러난 것들은, 차와 자파케이크(초콜릿이 발린 동그란 모양의 영국 과자 - 옮긴이)가 먹고 싶어, 날씨는 어때, 같은 게 전부다.
하지만 속으로는 엿 같은 ‘운명의 산(소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화산. 주인공 프로도는 그의 동료 샘와이즈 감지와 함께 절대반지를 파괴하러 ‘운명의 산‘으로 여정을 떠난다-옮긴이)‘을 오르고 있다. 와이라도 나의 그런 모습을 간파하고 있을까? 그래서 내가 자기 주변에 있지 않기를 바라는 걸까?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속상함에 눈물이 난다.
화장실 바깥이 숨 막힐 듯 고요해서 입을 막고 소리를 죽인다. 그동안 가본 여느 장소와 달리 정글은 실제로 모든 것을 듣고 있다. 이 모든 소음에도 개의치 않는다. 수 킬로미터에 걸쳐 존재하는 생명체, 나무와 식물과 버섯, 암석과 대지에도 개의치 않는다. 지금껏 나 자신이 이토록 연약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정글은 듣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 정글이 싫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 P86

따뜻한 물로 샤워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참이다. 쿠션이 깔린 의자에 앉을 그날을, 단 몇 초라도 벌레에 물리지 않고 서 있을 그날을……. 하지만 나뭇가지에 매달린 야생 꼬리감는 원숭이가 태평하게 망고를 먹으며 구경하는 동안, 해리가 자기보다 큰 돼지에게 뽀뽀를 퍼붓는 모습에는 무언가가 있다. 숲 천장의 틈 사이로 햇살이 반짝거리며 진흙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모습에도 마찬가지다. 나의 마음 한구석을 살짝이나마 여는 것. 내가 갈망하는 것. 예전에는 그 존재를 미처 알지 못했던 것.
나는 고개를 젓는다. 어느 모로 보나 이 남자는 형편없는 멍청이에 불과하다. 이 돼지는 오래된 죽과 똥으로 뒤범벅이다. 그리고 와이라는... 와이라는 그냥 화만 내는 양아치일 뿐이다. 나는 마음을 강하게 먹으며 서둘러 숙소로 돌아간다. 함께 마음껏 뒹굴고 있는 해리와 판치타를 뒤로한 채. - P98

"나를 핥고 있어!" 목소리를 낮춰 감탄한다.
문 반대편에서 무릎을 감싼 채 쭈그려 앉아 있던 제인이 웃
"너무 들뜨지는 마. 소금기 때문일 거니까."
와이라는 도도하게 이마를 들이밀어 나의 팔을 뒤집더니 다른쪽까지 핥기 시작한다. 하마터면, 정말이지 하마터면 와이라는 케이지 안에, 나는 바깥에 있다는 것조차 망각할 뻔했다. 마치 정반대로 느껴진다. 와이라가 바깥 정글에, 우리가 케이지 안에 있는 것처럼. 정글이 암녹색을 드리워 와이라를 감싼다. 와이라의 혀는 거칠다. 살갗이 벗겨질 정도다. 생각보다 아프지만, 그만두지 않으면 좋ㄱ다. 지금 와이라의 낮은 소리는 지칠 대로 지친, 자포자기한 나의 귀에는 그가 나를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들린다. 와이라는 내 팔 쪽으로 머리를 숙이고 앞발 한쪽을 철조망 가장자리에 편안히 댄 채로균형을 잡는다. 할짝, 할짝, 할짝, 살갗이 벌게진다. 몸의 나머지 부분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오직 와이라와 접촉한 이 좁은 살갗만이 감각의 대상이 된다. 그저 그 부분만이 나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 이를테면 놓친 버스, 시내를 구경할 기회, 이전의 생활 모두가 흐릿해져간다. 와이라는 나를 케이지가 실재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 처음 만난 날 하악거리던 고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똑같이 생겼지만, 결코 똑같지 않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다. 워낙 활짝 웃고 있어서 또다시 우스꽝스러운 순간에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와이라, 고마워." - P108

나의 숨이 와이라에 발맞춰 느려진다. 그는 할기를 끝냈다. 전장한 두 뒷발은 진흙 속에 오그라져 있다. 한쪽 앞발은 여전히 내바지 끝에 놓여 있다. 발톱을 집어넣고 발가락에 힘을 뺐다. 다른 쪽 앞발은 턱을 받치고 있다. 그의 눈이 서서히 감기고, 숨이 깊어간다. 가슴이 오르내리고, 속눈썹이 흔들린다. 믿기 힘들지만, 갑자기와이라가 연약한 존재로 보인다. 어안이 벙벙하다. 우리가 없는 매일 밤마다 케이지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우리를 만날 시간을 기대하고 있을까. 아니면 불안해할까. 또 현기증이 난다. 몸이 기우는 것같다. 아드레날린 때문이려나. 너무 오랫동안 이곳을 맴돌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껏 앞으로 위로 어딘가로 움직여야 했던 압박과 소리와 빛 속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방향을 잃은 삶에 손이 떨리고 사지가 피곤에 찌들었다. 지금도 역시 피곤하긴 하지만 무언가가 다르다. 오랜 시간 동안 처음으로, 와이라의 차분한 숨소리와 나를 둘러싼 정글의 편안한 심장 박동을 들으며 몸이 떠오르는듯하다. 내 몸이 허공에서 멈춘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이런 장소에있다니. 더군다나 퓨마와 함께라니. 나는 와이라가 나에게 보이고싶어하는 모습만큼 용감하거나 대담하진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깨닫고 있다. - P113

"파라미, 로스 아니말레스 레스 카타도스 손 코모 라스 세보야스(나한테는 구조된 동물이 양파처럼 느껴져요)."
밀라는 나를 바라보며 말뜻을 이해했는지 확인한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안절부절못할 뿐이다. 밀라는 한숨을 쉬고,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천천히 말한다. 구조된 동물은 양파와 같다. 불안의 껍질을 힘겹게 한 꺼풀 벗겨내면 예기치 못한 다른 껍질이 나오고, 전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껍질이 그 아래에 숨어 있다. 우리모두는 이곳 동물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기에, 전부 제각기 엉망이고 망가져 있기에, 우리 또한 양파나 다름없다.
"이 에소 에스로 케 아세 엘 파르케." 밀라가 미소를 머금는다. "바로 그게 파르케가 하는 일이죠. 그렇지 않나요? 우리의 껍질을벗겨내는 것." 그가 나의 가슴팍을 툭툭 두드리고 말을 이어간다. "당신과 나 말이에요. 한 꺼풀씩, 한 꺼풀씩. 그러면서 우리 자신에대해, 우리가 돌보는 동물들에 대해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죠. 카다디아, 매일매일. 훈토스, 함께. 함께하는 거예요. 포르 에소 메 에나모레 데 에스테 루가르, 그래서 제가 이곳을 좋아하는 거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결코 알 수 없어요." - P118

야생 원숭이들의 고함이 차츰 잦아든다. 원숭이들의 우두머리는 무리를 이끌고 캠프 근처로 와서 코코와 파우스티노를 비웃곤한다. 우두머리는 덩치 큰 수컷 원숭이인데, 그래 봤자 코코가 몸집이 더 크다. 털의 붉은빛도 더 짙고 턱수염도 더 길고 두껍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만일 상황이 달랐더라면, 숲이 벌목되지 않았더라면, 나와 같은 관광객이 이색 애완동물의 수요를 부채질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존재를 억누르고 짓밟는 행태가 정상이 아닌 세상이었더라면, 코코는 자신의 힘과 열정과 관대함을 앞세워 무리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두운 실루엣의 밀라가 나타난 뒤에야 코코가 움직인다.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진다. 하늘은 분홍색에서 금빛 붉은색으로 변하고, 그에 따라 숲 꼭대기가 구릿빛으로 물든다. 밀라가 우리에게 천천히 걸어온다. 카우보이모자가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다. 밀라가 주머니에서 치즈 한 조각을 꺼낸다. 코코가 밀라의 품속으로 들어가 치즈를 입안에 밀어 넣는다. 그리고 차마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듯 얼굴을 가슴 속에 파묻는다.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워 보인다.
동물은 그저 동물일 뿐이라 여겼던 과거의 삶을 떠올린다. 그랬던 내가 싫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내가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 P132

고양이들은 주로 봉사자들과 헤엄을 치며 시간을 보낸다. 야생에서도 헤엄을 칠 것이다. 물속을 응시하는 와이라를 보면 이따금 그가 용기를 내려고 애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있다. 나는 이해한다. 허세 부리기, 하악거리기, 으르렁대기. 전부 그의 대처 방식이다. 미소 짓기와 괜찮은 척하기가 나의 대처 방식인 것처럼. 내가 나뭇가지를 밟자 와이라가 1미터가량 공중으로 뛰어오른다. 제 그림자조차 무서워하는 퓨마다. 야생을 두려워하는 퓨마.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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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라가 발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본다. 몇 발짝 뒤에 있던 오스카도 걸음을 멈춘다. 와이라의 머리 위에 청설모 한 마리가나타났다.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빠른 청설모. 털색은 안전 고깔과 비슷하고, 꼬리는 지난주에 미용실에 갔다 온 듯 풍성하다. 대나무 줄기에 앉아 갈색 열매를 앞발로 꼭 붙들고 있다. 청설모도 와이라의 존재를 감지했다. 나에게도 보일 만큼 깜짝 놀란 모양새다.
철저한 공포, 일말의 희망. 꼼짝 않는다면, 정말로 꼼짝 않는다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리란 희망. 하지만 와이라의 꼬리 끝은 집고양이처럼 돌연 홱 움직인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안다. 반짝이는 물고기 장난감이나 깃털 혹은 양말, 아니면 그 어떤 것이라도 끝장나기 일보 직전이라는 뜻이다. 나는 힘없이 청설모를 바라보며 마음을 다해 원한다. 뛰어! 와이라의 입에서 군침이 뚝뚝 떨어진다. 그의 얼굴이 위쪽을 향한 탓에, 어둠 속에 사는 짐승처럼 눈이 더 큼지막해 보인다. 눈앞의 사건을 전부 담아낼 작정으로 눈이 점점 더커진다. 케이지에 있던 와이라는 작아 보이기만 했던 게 아니었다.
짓눌린 것처럼 보였다는 게 맞다. 밖에서 보니, 그는 자신이 채워야했던 공간을 이제야 채운다는 듯 부풀어 있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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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 프리드먼을 위시한 시카고 대학 출신의 통화주의 경제학자들을 시카고학파라고 한다. 시카고학파는 미국의 전통적인 하버드학파와 더불어 현대 주류 경제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시카고학파의 특징은 첫째, 인간의 경제 행위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분석 도구로서 가격 이론을 신봉하고, 둘째, 자유시장경제가 자원 배분은 물론 소득 배분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때문에 정부의 시장 개입은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있다. 시카고학파는 케인스 경제학의 입장을 계승한 신경제학new economics에 대립해 생산, 고용, 가격 등의 수준을 결정하는 요인으로서 통화공급량을 중시한다. 이 같은 시카고학파의 주장은 미국의 닉슨 행정부에 의해 처음으로경제 정책에 반영되었고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에서는 레이거노믹스의 온상이 되는 등  그 영향력을 더해 가고 있다. - P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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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남김없이 이름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의 앞길을 가로질러서, 혹은 내 피부 위에서 헤엄치고 날아다니고 뛰어다니고 기어다니는 동안, 밤중에 내게 살며시다가오거나 한낮에 나와 얼마간 나란히 동행하는 동안,
그들이 얼마나 친근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들의 이름이 나와 그들 사이에 뚜렷한 장벽처럼 가로놓였을 때보다 그들이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너무도 가까워서 그들을 향한 나의 두려움과 나를 향한 그들의 두려움이 하나의 두려움이 되었다. 비늘과 피부와 깃털과 털을 서로 만지고 문지르고 쓰다듬고, 서로 피와 살을 맛보고, 서로 몸을 녹이길 바라는 욕구, 많은 이들이 느꼈던 그 끌림은이제 두려움과 함께 모두 하나였다. 누가 사냥꾼이고 사냥감인지, 누가 포식자고 먹잇감인지 알 수 없었다.
-어슐러 K. 르 귄, <이름을 거부한 여자 She Unnames Them>

지금은 2007년, 내 나이는 스물넷. 조그맣진 않지만 크지도 않은 체구. 170센티미터쯤 되는 키에 비뚤어진 코. 가슴 무게 때문에 허리가 쑤시고 발목이 약해 발걸음이 늘어진다. 나는 방황하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나는 일생을 거의 홀로 지냈다. 불안할 때면 뭔가를 먹고 담배를 피운다. 그리고 자주 불안에 빠진다. 엄마와 아빠는두 분 다 심리학자고, ‘성공한 삶을 살았다. 나는 영국에서 태어나미술사 전공으로 대학원을 졸업했다. 원숭이도 사람처럼 농담을 던지거나 우울해질 수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는 사람이다. 퓨마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링가, 아키(아가씨, 여기예요)!"
곧 부서질 듯한 버스에 앉아 덜컹거리며 나아가던 참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섯 시간쯤? 금이 간 창문에 맺힌 물방울을 소매로 문지르고 기다란 자국 사이로 밖을 내다본다. 온통 정글뿐이다.
"¿엔 세리오 (여기라고요)?" 목소리에 두려움이 배어 나온다. - P19

와이라는 그늘과 색이 비슷해서 언뜻 봐선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허공을 가르는 긴 꼬리는 단번에 알아보겠다.
"올라, 와이라." 나는 소리를 낮춘다.
뚜렷한 것이라곤 와이라의 두 눈뿐이다. 그의 눈은 카누 노잎이 달린 식물의 꼭대기처럼 초록색이다. 코는 노을의 끝자락처럼 분홍빛이 감돈다. 와이라가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침묵의 순간. 그 순간이 너무 길어서 아예 움직이지 않으려나 생각하던 차에 와이라가 단 꼭대기로 펄쩍 뛰어올라 마치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는 듯 우아하게 착지한다. 나는 경외감에 뒤로 물러난다.
와이라가 어슬렁거리며 우리를 향해 걸어온다. 나는 주눅이들어 가만히 바라본다. 그때 제인이 철조망 안으로 살며시 두 손을밀어 넣는다. 비명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나는 또다시 빠르게 뒤로 물러난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반경 80킬로미터 내에는 의사도 없다고! 정글을 뚫고 캠프로 돌아가서 수의사가 제인의 살갗을 꿰매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모든 장면이 와이라가 케이지를 가로지르는 찰나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철조망으로 다가온 와이라가 무언가를 핥기 시작한다. 제인의 손을 핥고 있다. 제인의 표정은 마치 다른 세계로 가 있는 것 같다. 소매를 걷어올리자 퓨마가 제인의 손에 머리를 들이민다.
이제야 제인이 무얼 하려 했는지 알겠다. 나는 퓨마를 마운틴라이언이라고 부르곤 했다. 다른 이름들도 머릿속 깊은 곳에서 표면 위로 떠오른다. 쿠거, 팬서……. 더는 모르겠다. 이 모든 이름이 같은 동물을 가리키는 것인지 전혀 몰랐다. 이 깨달음을 큰소리로 말해볼까 했지만 이내 그러지 않기로 한다. 할짝대는 소리만 들려온다. 깔깔한 사포로 문대는 듯 거친 소리.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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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인정머리들도 없습니다. 이젠 지긋지긋합니다. 전부들 지겹단 말입니다. 내가 파티를 열 때는 그렇게 야단스럽게 나를 치켜세우더니 이제 늙고 병이 드니까 필요 없다 이거지요. 제가 앓아누운 후로 병문안 온 사람은 열 명도 안 되고, 이번주 내내 받은 거라곤 초라한 꽃다발 하나가 전부입니다. 내가 안해준게 뭐 있습니까? 음식도 내주고 술도 내주고 심지어는 심부름도 해 줬습니다. 그들이 여는 파티에도 빠짐없이 참석해 줬지요. 그들을 위해 내 모든 걸 보여 줬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얻은 게 뭡니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내 생사조차 신경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매할 수가 있는지......."
그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움푹 팬 두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국을 떠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죽음을 코앞에 둔 노인이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다고 아이처럼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몹시 서글퍼졌다. 충격적이기도했지만 동시에 견딜 수 없을 만큼 그가 애처로웠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엘리엇, 그날 비라도 내릴 겁니다. 그럼 파티는 완전히 엉망이 되겠지요."
그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듯 내 말을 잡고매달렸다. 눈물을 흘리던 그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 P380

"그렇죠. 그러니 선처를 부탁드릴게요, 키스 부인. 초대장 한장만 주세요. 어차피 오시지도 못할 테니까, 그저 가엾은 노인네를 기쁘게 해 드리자는 겁니다. 키스 부인까지 그분한테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요. 저한테 늘 아주 잘해 주셨죠. 그분은 신사예요. 제가 신사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몇 명 안 되거든요. 이 집에 와서 공작 부인의 돈으로 살찐 배를 채워 가는 신사들은 신사로안 보죠."
원래 지체 높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귀가 되어 줄 충실한 부하를 두고 있는 법이다. 이런 부하들은 무시나 모욕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스스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 상대를 정확히 겨냥하여 주인에게 그 사람에 대한 혹평을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그렇게 해서 주인까지 그 사람을 미위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과는 되도록 좋은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엘리엇은 언제나 가난한 친척들과 늙은 하녀들, 충실한 비서들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고 진심 어린 미소를 보냈다. 틀림없이 키스 부인과도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고, 크리스마스에는 초콜릿 한 상자나 휴대용 화장품 케이스, 핸드백 등을 선물로 보냈을 것이다.
"키스 부인,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는 겁니다."
키스 부인은 코안경을 올려 오뚝한 코에 똑바로 걸쳤다.
"저더러 주인을 배신하라는 건 아니겠죠. 몸 선생님? 게다가 제가 배신한 걸 알면 그 노인네는 당장 절 해고할 거예요. 초대장은 책상에 있어요. 봉투에 들어 있죠. 저는 그냥 창밖을보고 풍경을 즐기고 있을게요.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다리가 저리니까요. 제가 등을 돌리고 있을 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저한테 책임을 묻지 못하겠죠."
키스가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을 때 초대장은 이미 내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 P384

당시 비행기들은 너무 허술해서 하늘에 오를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했죠. 비행고도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정말 우스운수준이었어요. 하지만 그땐 그보다 더 좋은 게 없을 정도로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죠. 저는 하늘을 나는 게 너무 좋았어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죠. 굳이 말로 표현하면, 뿌듯하고 행복한 기분이랄까? 허공에 떠 있으면 나 자신이 아주 위대하고 아름다운 무언가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어요. 대체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도 몰랐죠. 제가 아는 거라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2000피트 상공에 혼자 떠 있으면서도 어딘가에소속된 느낌이 들었다는 것뿐이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정말 그랬어요. 거대한 양떼 같은 구름 위를 날 때면 한없이 편안한 기분이 들었죠."
래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꿰뚫을 수 없을 듯한 우묵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지만 정말 나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광경을 직접본 적은 없었어요. 그래서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죠. 그러다가 죽은 사람을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됐어요. 수치심이 밀려들더군요"
"수치심?"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수치심, 그 친구는 저보다 서너 살 위였는데,
정말 정력적이고 용감한 사람이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혈기왕성하고 선량하던 사람이 애당초 살아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엉망진창의 고깃덩어리로 변해 버린 겁니다." - P416

 그랬다면 제 길이 확실히 정해 있었을 테니 저도 수도회에 들어갔겠죠. 이 세상에선 도저히 믿음이 생기지 않았어요. 저도 믿고 싶었는데, 평범한 사람들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는 하느님을 믿을 수가 없더군요. 수사들이 그랬죠.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지만 그건 그리 가치 있는 목적이 아니라는 생각이들었어요. 베토벤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교향곡들을 만들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속에 존재하던 음악을 어떻게든 표현해야 했고, 그래서 자신이 아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최대한 완벽하게 만든 것뿐이죠.
수사들이 암송하는 주기도문을 듣고 있으면 저들은 어떻게 한치의 의심도 없이 꾸준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죠. 아이들이 땅에 있는 자기 아버지한테 양식을 달라고 간청하는 것 보셨습니까? 아이들은 아버지가 당연히 먹여 줄 거라고 믿잖아요. 아버지가 음식을 준다고 해서 고마워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죠. 오히려 낳아 놓고 제대로 못 먹이거나 안먹이면 우린 그런 사람을 비난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물질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할 준비가 안 됐다면 그들을 창조하지 말았어야죠."
"맙소사, 래리, 자네, 오히려 중세에 안 태어난 게 천만다행인 것 같은데, 중세에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화형당했을 테니까말이야." - P421

"윤회가 세상의 악에 대한 설명이 되는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우리가 겪는 나쁜 일들이 전생에 지은 업보라면 그저 단념하고 견뎌 내려고 노력하지 않을까요? 그 과정에서 선을 추구하면 다음 생에서는 고통이 줄어들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고요. 하지만 자신이 겪는 악이나 불행은 비교적 쉽게 견딜 수 있죠. 약간의 강인함만 있으면 되니까요. 반면, 다른 이들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 종종 너무나도 부당하게 보이는 일들은 더 받아들이기가 힘들죠. 그런데 그것이 과거의 업보로 인한 불가피한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애석한 마음도 들고 고통을 분담하려고 노력하기도 하겠죠. 그게 마땅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그에 대해 분개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요?" - P437

"저는 뭔가를 묘사하는 데는 젬병이에요. 어떤 말을 동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눈부시게 날이 밝아 오면서 제 앞에 펼쳐진 그 장엄한 광경을 어떻게 하면 눈에 보이듯이 설명할 수 있을까요? 깊은 정글로 뒤덮인 산들, 여전히 나무 꼭대기마다 뒤엉켜 있는 안개, 그리고 저 아래 펼쳐진,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숲속 나무들 사이로 새어 든 햇살이 호수를 비추면서호수가 마치 강철판처럼 반짝거렸죠.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광경이었어요. 그토록 엄청난 기쁨, 그토록 초월적인 환희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죠. 묘한 흥분이 일더군요. 짜릿한 느낌이 발끝에서부터 온몸을 타고 머리끝까지 올라왔어요. 순간, 육체에서 해방되는 느낌, 육체에서 빠져나온 순수한 영혼에 이전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아름다움이 깃드는 느낌이 들었죠. 인간을 초월한 어떤 인식이 나를 소유하면서 그동안 혼란스러웠던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골치 아팠던 모든 것이 설명되는기분이었죠. 너무 행복한 나머지 고통이 밀려들어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어요. 그런 상태로 조금만 더 있으면 틀림없이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엄청난 환희에서 벗어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했죠. 제가 느낀 기분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마치 천국에 온 듯한 그 황홀경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없을 것 같아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기진맥진해서 떨고있더군요. 그러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어요." - P454

"래리, 자네가 이 기나긴 모험을 시작한 건 결국 악이라는문제 때문이었지. 자네를 재촉한 건 바로 악의 문제였어. 지금까지 긴 얘기를 들었지만 그 해답을 찾았다는 얘긴 없었던 것같군."
"애초에 해답이 없었을 수도 있고 제가 모자라서 끝내 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죠. 라마크리슈나는 이 세상을 신의 장난으로 보았어요. ‘그것은 유희와도 같으며, 그 유희에는 기쁨과 슬픔, 미덕과 악덕, 지식과 무지, 선과 악이 존재한다. 삼라만상에서 죄와 고통이 모두 제거되면 그 유희는 끝을 맞는다‘라고 말했죠. 하지만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생각을 거부하고 싶습니다. 제가 주장할 수 있는 건, 절대자가 이 세상에그 자신을 현현했을 때 선과 악이 본질적인 상관관계를 갖고있지 않았을까 하는 거예요. 지각변동이라는 상상하기 힘든 공포가 없었다면 히말라야 산맥의 장관은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겁니다. 중국의 장인들은 얇은 도자기로 예쁜 모양의 꽃병을 만들어 거기에 아름다운 디자인을 넣고 멋지게 색칠한 다음, 완벽한 광택을 추가하죠.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꽃병도 그 본질적인 속성 때문에 쉽게 깨질 수밖에 없어요. 바닥에 딸어뜨리면 산산조각이 나고 말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도 오직 악과 결합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 P461

"시도는 할 수 있잖아요. 물레도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거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도 한 사람이었어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작게나마 영향력을 갖고 있게 마련이죠. 연못에 돌 하나를 던져도 이 우주는 돌을 던지기 전의 우주와 똑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인도의 성자들이 헛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에요. 그들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과도 같은 존재죠.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워 주는 이상과도 같은 존재예요. 보통 사람들은 결코 그런 위치에 달하지 못하지만 그들을 우러러보고 존경하면 그들에게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죠. 한 인간이 고결하고 완벽해지면 그런 성품의 영향력이 널리 퍼져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그 사람에게 이끌리게 됩니다. 제가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삶을 이끌어 나간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죠. 물론 영향이라고 해 봐야 연못에 돌을 던졌을 때 작은 물결이 이는 것처럼 아주 미미할 겁니다. 하지만하나의 물결은 또 다른 물결을 일으키고, 그것은 그다음 물결로 이어지죠. 그렇게 되면 몇몇 사람들이나마 제 생활 방식이 행복과 평화를 준다는 점을 깨닫고 자신이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수도 있잖아요."
"자네가 어떤 상대와 맞서야 하는지 알고나 있는 건가, 래리? 잔인한 사람들은 더 이상 고문대나 화형주 같은 걸로 입막음을 하려 들지 않아. 그런 건 이미 오래전에 폐기했지. 그보다 훨씬 더 파괴력이 뛰어난 무기를 발견했거든. 그 무기란 바로 신랄하게 비꼬는 말이지."
"그 정도는 버틸 수 있답니다." - P464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나는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사람이다. 따라서 그처럼 보기 드문 인물에게서 나오는광채를 동경할 수는 있어도, 평범한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그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거나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래리는 자신의 바람대로 떠들썩하고 소란스러운 인간 집단에 흡수되었다. 이해관계의 상층으로 괴로워하고 세상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며, 선(善)을 강렬히 소망하면서도 외부에 대해서는 독단적이고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매우 소심한 인간들, 친절하지만 까다롭고, 남을 잘 믿으면서도 의심이 강하며, 야비하면서도 너그러운 미국인들 속에 흡수되어 버렸다. 내가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전부다. 만족스럽진 않겠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달리 방법을찾지 못한 채 확실한 결말도 없이 책을 끝낸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머릿속으로 나의 긴 이야기를 되짚어 보았다. 혹시라도 좀 더 만족스러운 결말이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말이다. 그러곤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내 의도와는 달리, 이 글이 일종의 성공담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등장시킨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원하는 바를 얻지 않았는가? 엘리엇은 사교계에서 명성을, 이사벨은 막대한 재산을 확보하여 활동적이고 교양 있는 지역사회에서 확실한 지위를 얻었으며, 그레이는 안정적이고 수익성 높은 직업과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하여 6시에 나설 수 있는 사무실을 얻었다. 수잔 루비에는 안정을, 소피는 죽음을, 래리는 행복을 얻었다. 물론 ‘자칭‘ 지식인들은 거드름을 피우며 트집을 잡겠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대중은 모두 성공담을 좋아한다. 그러니 나의 결말도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고는 할 수 없다. - P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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