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진심보다 태도
‘약속 시간‘에 목숨 거는 나는 인터뷰 장소에 적어도 5분 전에 도착해야 안심이 된다. 하루는 한국 문단에서 떠오르는 소설가를 인터뷰하게 됐는데, 이날은 회사에서 일정이 많아 겨우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 싶게 아슬아슬했다. 홍대 전철역에 내리자마자 예약한 카페를 향해 달렸다. 사진 기자는 이미 도착해 있다고 하니 마음이 더욱 바빠졌다. 그런데 저기 어떤 남자가 나보다 더 빠른 속도로 카페 출입구를 향해 뛰고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이었다. 나는 그와 불과 10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일부러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는 나보다 더 급해 보였으니까. 쑥스러운 상황에서 첫인사를 나누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 저 사람도 약속 시간을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하며 속도를 조금 줄였다. - P9
지금까지 인터뷰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한마디를 꼽는다면, 정신과 전문의 김병수에게 들은 "성격은 생존 본능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성격이라는 게 대부분 생존에 이점이 있어서 발달된 것입니다. 40-50년을 한 성격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성격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죠. 신중하고 말수가 적은 남편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적극적으로 표현도 하고, 이전과 다른 행동을 보여 달라‘고 하는 건 당신의 유전자를 바꾸라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사람의 성격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방향으로 형성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생존에 가장 적합하게 구성되었습니다." - P17
행간을 읽는 사람이 있다. 단어보다 쉼표를 눈여겨 읽는 사람이있다. 말보다 표정을 먼저 읽으려는 사람이 있다. 말하지 못하는걸 듣는 사람, 그들을 만날 때 나는 마음이 쾌청하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말하는 걸 듣는 건 수비만 하는 것"이라며 "고통은 침묵으로 표현될 때가 많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P19
기억에 남는 후배가 있다. 특별히 가까운 관계는 아니었는데 갑자기 상담을 해 달라고 해서 퇴근 후에 만났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헤어지려던 순간, 후배는 문화상품권을 불쑥 건넸다. "선배가 밥도 사고 차도 사 줄 것 같아서요. 제가 드릴 건 없고 그냥 받으세요." 이런 마음은 어디에서 배웠을까? 지금도 문화상품권을 볼 때마다 후배가 생각난다. 내겐 미역 후배, 참기름 후배가 있다. 미역을 닮은 후배, 참기름 냄새가 나는 후배가 아니라, 후배가 준선물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산후조리 잘하라며 고향에서 키운 기장미역을 보내 준 후배, 스쳐 지나가는 말을 기억하고선 명절 선물로 참기름을 슬쩍 책상 위에 올려놓은 후배,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상적인 선물을 줬기 때문만이 아니다. 언제나 감정 표현에 있어서 인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 P25
"간단하게 말해 아이를 키운다는 건 기쁜 건 더 기쁘고 슬픈 건더 슬퍼지는 일 같아요. 감정의 폭이 넓어지고 알지 못했던 감정의 선까지 보게 되죠. 감정선이 깊어지다 보니 타인의 삶과 감정에 공감하는 폭이 넓어지고요." - P41
"행복하게 잘 지냈을 것 같습니다. 행복은 장소가 만들어 주지않습니다. 본인이 만드는 것이죠. 조금 더 스트레스를 받고, 조금더 많이 공부를 해야 했을 테고, 어쩌면 조금 더 학원비가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행복했을 겁니다. 그 안에서 행복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찾았을 겁니다. 저는 딸에게 그런 믿음이 늘 있습니다." "행복은 장소가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정답이었다. 한국에 있다고 슬로베니아에 있다고 행복한 게 아니었다. 같은 장소에 있다고 모두가 행복하지 않은 것처럼. 행복은 자신이 만든다는 말. 이보다 더 확실한 표현이 있을까. 행복은 잘 누리는 사람이 승자다. 내 아들에게 가장 바라는 바는 ‘행복을 잘 느끼고 누리는 사람‘으로 크는 일이다. 낙관적인 비관론자가 되어도 좋겠지만 되도록 긍정적인, 자신의 감정을 잘 느끼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기질은 타고나는 것이라지만 나는 의지의 쓸모, 생각의 에너지를 믿는다. - P47
대개는 잘 지키지 못한다고 부끄러워했고, 작가 몇 명은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다고 했다. 소설가 김영하도 그중 한 명이다. "예전에 학생들을 가르칠 때, 과제를 세 번 늦으면 무조건 F학점을 줬어요. 왜냐하면 소설을 잘 쓰는 건 가르쳐 줄 수 없지만 마감을 지키는 건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세상에 나가면 제때 원고를 쓰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될 텐데, 천재라면 F를 받아도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마감이라도 잘 지켜야죠. 학생 중에 숙제를 완성하지 않고 넘기려는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이 한시기에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오래고친다고 해도 나아지지 않아요. 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그래서 때가 되면 원고를 보내요. 내 능력의 70, 80퍼센트를 써야한다. 그런 철학을 갖고 있어요."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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