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복잡한 계로 생각하는 데서 나올 수 있는, 혹은 나올 법한 결과는 어떤 것일까?> 마틴은 이렇게 묻고, 다음과같이 설명했다. 첫 번째 결과는 모든 것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무력하게 느끼는 역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말하자면, 힘을 부여받은 무력함의 상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 부분적으로라도 책임을 느낀다면, 그런데 그 몸이 사회와 환경을 비롯하여 다른 복잡한 계들과 연결된 복잡한 계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자신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그 모든 요소를 다 통제한다는 건 너무나도 버거운 과업이 된다. - P202
그러나 질병이 정말로 무언가에 대한 벌이라면, 그것은 오직 살아 있는 데 대한 벌일 뿐이다. 어릴 때 내가 아버지에게 무엇이 암을 일으키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는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생명. 생명이 암을 일으킨단다.」 암의 역사를 쓴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아버지의 저 대답을 교묘한 둘러댐으로만 여겼다. 무케르지는 책에서 생명이 암의 원인일 뿐 아니라 심지어 암이 곧 우리라고 주장했다. 〈그 타고난 분자적 핵심까지 속속들이, 암세포는 과잉 활동적이고, 생존 능력을 타고났고, 공격적이고, 생식력이 뛰어나고, 창의적인 우리 자신의 복사본이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이것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 P209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두려움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으로 무엇을할까? 내게 이 질문은 시민이 된다는 것과 어머니가 된다. 는 것 둘 다에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처럼 느껴진다. 어머니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힘과 우리의 무력함을 조화시켜야만 한다. 우리는 아이를 어느 정도까지 보호할수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전혀 취약하지 않게 만들 순없는 것처럼, 아이도 전혀 취약하지 않게 만들 순 없다. 도나 해러웨이가 말했듯이, 인생이란 취약성의 기간이다. - P231
정원의 은유를 우리의 사회적 몸으로까지 확장하면, 우리는 자신을 정원 속의 정원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때 바깥쪽 정원은 에덴이 아니고, 안락한 장미 정원도 아니다. 그 정원은 몸이라는 안쪽 정원, 그러니까 우리가 <좋고> <나쁜> 균류와 바이러스와 세균을 모두 품고 있는 곳 못지않게 이상하고 다양한 곳이다. 그 정원은 경계가 없고, 잘 손질되지도 않았으며, 열매와 가시를 모두 맺는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야생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혹은 공동체라는 말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회적 몸을 무엇으로 여기기로 선택하든, 우리는 늘 서로의 환경이다. 면역은 공유된 공간이다.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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