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는 입맛이 까다로워서 어부가 던져놓은 미끼를 삼키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개는 낚싯바늘 옆을 빠르게 헤엄쳐 나가다가 옆구리를 꿰였다. 원양을 달리던 고등어는 낚시에 걸린 불운을 견디지 못해서 건져 올리면 이미 죽어 있었다. 고등어는 등이 푸르고 배는 은빛인데, 등에서 배 쪽으로 검은 물결무늬가 일렁였다. 어부들은 고등어가 바다를 빠른 속도로 건너다니기때문에 물결의 무늬가 몸통에 찍힌 것이라고 말했다. 정약전은 그 말이 그럴싸하게 들렸다. 어부들은 고등어가 먼 남쪽 바다에서 올라온다고 믿었는데, 오륙년 동안 흑산 바다에 나타나지 않는 때도 있어서 어부들은 고등어를 기약할 수 없었다. 어부들은 하룻밤에 열대여섯 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고등어는 빨리 죽고 또 빨리 상해서 어부들은 잡자마자 소금에 절였다. 고등어의 푸른 등에 바닷속의 모든 흔들림을 감지하는 관능이 살아 있을 것 같았지만, 관능은 그것을 누리는 자만의 것이었다. 창대는 모르는 것을 대답하지 못할 때 늘 긴장해 있었다. 어부들의 말처럼,
고등어는 푸른 바다를 등으로 밀고 헤치면서 건너가기 때문에 등에 푸른 물이 밴 것일 수도 있었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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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살짝 앞으로 돌려 1854년,
태평천국이 점령한 난징 천경으로 서양인들이 찾아옵니다.
태평천국의 정체에 대해서양인들이 관심을아니 가질 수 없죠.
무능·부패 · 권위주의에 찌든청나라 전제정에 경멸을 금치 못하던 서양인들은 태평천국의 기독교 혁명이라는 간판에 솔깃.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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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는 바르샤바의 문화적·정치적·경제적 의미를 박탈하고, 공포통치를 무기로 일반 시민들을 억압하면서 바르샤바의 심장을 도려냈다. 대학교와 초·중·고등학교는 폐쇄되었다. 교과서, 역사책, 외국어 문헌이 압수되었다. 오페라와 연극이 금지되었다. 서점이 문을닫았다. 인쇄기가 멈췄다. 폴란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인 쇼팽Chopin이 만든 음악을 연주하는 행위가 금지되었다. 와지엔키 공원에 있던 그의 동상은 폭파되어 대좌에서 떨어져 나갔고,
흩어진 청동 조각들은 히틀러에게 선물로 바쳐졌다. 코페르니쿠스의동상도 제거되었는데, 사실 그는 나치가 독일인이라고 선전한 인물이었다.
그렇게 바르샤바의 문화와 역사는 조금씩 지워졌다. 독일인들은폴란드 국립박물관과 국립미술관Zacheta Fine Arts Gallery, 도 파괴했고, 남은 시설물과 소장품을 압수했다. 요리, 식품 보존, 채소 재배, 가축 사육 등에 관한 책들만 출판이 허용되었다. 노예는 주인의 인어를 이해하지 못해야 한다는 이유로, 폴란드인들의 독일어 학습이 금지되었다.
독일은 폴란드를 차지하자마자 바르샤바의 지식인들을 대상으로숙청 작전을 개시했다.  - P486

도시는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다. 파괴의 상처가 아무리 넓고 깊어도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는 생존할 수 있다. 도시를 말살하는 모든 방법 중에서 공중폭격은 가장 비효과적인 것이었다. 물론 폭격으로 수많은 건물이 부서진 유럽 도시들의 모습은 끔찍했다. 그러니도시의 물리적인 부분은 가장 쉽게 복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유럽의대도시들은 폭격으로 인한 상처를, 전쟁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치료하는 능력을 보여줬다. 코번트리가 초토화된 지 2일 뒤,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일주일 뒤에는 상수도가 복구되었고, 전화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6주 만에 2만 2,000채의 주택이 살기에 적합한 수준으로 복구되었다. 1941년 3월, 독일군의 대공습이 계속되는와중에도 영국에서는 5만 5,990채의 파손 가옥이 수리되고 있었고,
약 100만 채는 이미 거주할 만한 수준으로 수리되었다.
- P496

전시에 모두가 힘을 모으고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의식은 사기를 높이는 효과가 있었다. 전쟁 초기의 공황 상태는 폭격의 충격이 차츰 잦아들자 일종의 체념 상태로 바뀌었다. 1941년 3월에 실시한어느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 영국인의 8퍼센트만 공습을 전쟁으로야기된 여러 문제 중에서 최악의 문제로 여겼다. 그리고 전체 독일인의 15퍼센트만 전쟁에서 패배한 원인으로 적군의 공습을 꼽았다. 손상된 건물들의 처참한 모습이 손상된 사회적 결속력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도시들은 그곳 주민들에 힘입어 생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 P498

나치가 물러가자마자 사람들이 도시로 되돌아왔다. 사람들은 일단 황무지 같은 곳에 거처를 마련했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온 데서 알수 있듯이, 현대의 가장 극단적인 도시 말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돌아오자 바르샤바에는 조금씩 생기가 돌았다. 사람들은 중심가에 집을 다시 지으며 자력으로 도시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폐허의 처리 방법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부의 의견은 갈렸다. 어떤 사람들은 바르샤바를 포기하고, 수도를 크라쿠프나 우치로 옮기기를 바랐다. 그들은 바르샤바의 비참한 잔해와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상대로 저지른 범죄를 영원히 기억하는 기념물로 남겨두고자 했다. 다른 사람들은 바르샤바를 1939년 9월 이전의 모습으로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치에 대한 저항 행위이자 정신적 상처를 입은 생존자들에게 원래의 소중하고 친숙한 바르샤바의 모습을 되돌려주는 방법이기도 했다. 얀 흐미엘레프스키같은 몇몇 도시계획가들과 건축가들에게 파괴된 바르샤바의 모습은 지독한 충격이 아니라 전화위복의 계기로 다가왔다. 오래된 대도시의 비합리적 혼돈 상태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 급진적이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황금 같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 - P525

 독일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친근한 도시 풍경으로 회귀하려는 시민들의 욕구와 새로운 전후 세계에 걸맞은 현대 도시를 원하는 당국의 시각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냉정한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볼 때, 현대주의 건축의 통일성과 보편성은, 그리고 도시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현대주의 건축의 열망은, 도시라는 개념과 도시성에 대한 공격이었다. 질서를 향한 갈망이 도시 생활의 본질적성인 혼란, 혼돈, 개별성과 씨우고 있었다.
반면, 자립과 주민 조직화의 전통이 강한 도쿄에서는 재건 사업의 상당 부분이 개인들의 손에 맡겨졌다. 주거 구역의 대다수 재건 사업은, 전통적인 공사 기법과 고유의 건축술을 활용하고 현지 건축업자들을 동원한 가옥 소유주들이 진행했다. 무계획적이고 점진적인 재개발 과정은 도쿄가 폐허에서 벗어나 20세기 후반기의 세계적 대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판자촌과 무허가 정착촌은 도시 성장의 발판이 되었고, 따라서 도쿄는 몹시 촘촘하고 차별화된 도시 구조를 지니게 되었다. 도쿄는 다른 도시들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특히 바르샤바에서는 권위주의와 온정주의 때문에 개인들과 도시의 소규모 공동체들이 도시의 미래를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 P531

대량생산된 주택들이 대형 쇼핑몰과 결부되는 형태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와 미국 각지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모방되었다. 1950년에 레이크우드가 첫선을 보이고 나서 20년 동안 미국 주요 도시들에는1,000만 명의 주민이 새로 유입되는 데 그쳤지만, 교외 지역으로는무려 8,500만 명이 이주했다. 도시를 탈출하는 주민들의 행렬은 계속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체 미국인의 13퍼센트만 교외에 거주했지만, 1990년대에는 미국인의 절반이 교외에서 살고 있었다. 미국의 도시와 교외에 거주하는 인구는 75퍼센트 증가한 반면, 도시와 교외에 조성된 건축환경의 면적은 300퍼센트나 늘어났다. 자동차 기반의 도시화에 따라 새로운 종류의 도시가 탄생했고, 그 과정에서 생활방식이 혁신적으로 바뀌었다. 당시 미국 문명은 도시의 공공 생활이 아니라 개별 가정의 사적 영역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 P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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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부가 주거 구역이나 업무지구라기보다 관광용 테마 공원처럼보이는 도시들이 많다. 뉴올리언스나 방콕에 대규모 관광객들이 없다.
고 상상해보기 바란다. 런던, 뉴욕, 파리, 상하이 같은 금융 중심지들에서조차 중심부의 상당 부분이 관광객들을 배려한 술집과 식당, 즉석식품점과 오락시설, 호텔과 호스텔과 에어비앤비airbnb 아파트를 갖춘 곳으로 바뀌었다. 현지 주민들이 차츰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수백만 명의 관광객들은 확실히 현대 대도시들의 모습을 바꾸고 있는 중요한 힘 중 하나다.
그것은 대도시를 일시적으로 찾은 사람들이 현지 주민들보다 더 많을 때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 P414

인상파 화가들은 도시 생활의 병폐를 찾아냈을 뿐 아니라 그 처방전도 제시했다. 도시에 흠뻑 스며들 때 우리는 플라뇌르나 바도가 된다. 도시를 판독하는 사람, 도시 생활의 연극을 지켜보는 사람이 된다. 도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심리적 자기방어수단은 ‘냉담함‘이나 ‘무감각함‘이 아니라 자기 주변에서 도시가 펼쳐질 때의 광경과 소음, 정서와 느낌에 몰두하는 것이다.
우리는 날카로운 플라뇌르나 호기심 많은 바도, 목적 없는 거리를 배회하는 건달이나 소극적인 구경꾼, 적극적인 참여자일 수 있다. 우리는 미식가일 수도, 대식가일 수도 있다. 우리는 선명한 형체가 없는 익명의 군중 속에 녹아들며 ‘원격성‘을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대도시에서 쉽게 눈에 띄는 모임과 하위문화(이웃, 클럽, 술집, 카페, 팀, 교회등)를 선택함으로써 ‘근접성‘을 만끽할 수도 있다. 도시에서 소외와 사교는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 우리는 마네의 그림에 나오는, 인파속에서 홀로 술을 마시는 사람이나 카유보트가 화폭에 담은, 도시적소외의 비밀을 즐기며 (잠시) 홀로 산책하는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에는 스스로 선택한 공동체에 흠뻑 젖어 들 수도 있다.
- P430

그동안 도시를 상상 속에서 빚어낸 사람들, 소설, 그림, 사진, 산문 등을 통해 도시의 거리를들의 체험을 전달한 사람들은 주로 남성들, 특히 중산층이나 상류층 남성들이었다. 보들레르는 대도시의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이 밀림이나 평원을 탐험하는 것만큼 위험하다고 썼다. 도시의 사회적 지층과 다채로운 지형을 누비며 도시를 차지하는 것은 남성적 행위였다. 20세기까지, 서양에서 도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여자들은 남자를 유혹하려는 여자로, 혹은 남자들의 성적 구애에 넘어갈 공산이큰 여자로 치부되었다. 거리를 걸어 다니는 여자들은 그야말로 거리의 여자들이었고, 관음적 성향의 플라뇌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20세기 초반에 사회현상을 조사하려고 무일푼의 여자로 변장해 거리를 누렸던 메리 힉스Mary Higgs 는 "가난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과감하고 자유로운 시선은 직접 느껴봐야 실감이 날 것이다"라고 썼다. 그런 문제는 지금도 남아 있다. 
- P437

 심리지리학으로 부르는 심층지형학으로 부르든 간에 플라느리를 둘러싼 역사와 문학을 통해 우리는 도시 생활과 도시 관광을 즐기는 방법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얻을수 있다. 훌륭한 건물과 기념물은 마치 도시가 정지해 있고 시간을 초월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도시의 진면목은 움직일때 드러난다.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 유기체를 지탱하는 힘줄과 결합조직에서 드러난다. 걸어 다니기는 도시를 살 만한 곳으로, 무엇보다 즐거운 곳으로 만드는 비결이다. 걸어 다니기는 현지인이나 방문객이 도시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 P441

맨해튼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사무용 건물들은 뉴욕에 꼭 들어맞는 상징이었다. 20세기로 넘어올 무렵에 하늘 위로 솟구치려는 열망은 뉴욕의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즉, 뉴욕 사람들은 공간을 두고 서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섬이라는 지리적 한계와 지나치게 빠른 성장 속도, 그리고 도시계획을 둘러싼 시 당국의 자유방임적 태도때문에 맨해튼은 인구과밀에 시달리게 되었다. 맨해튼의 부두는 해안가 쪽 땅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평일에는 외부에서 또 200만 명이 뉴욕의 부실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기업 본사, 은행,
법률 사무소, 공장, 노동 착취 작업장, 최신식 백화점, 허름한 공동주택 등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맨해튼으로 몰려들었다. 그 같은 압력에 짓눌린 뉴욕은 하늘 위로 부풀어 오르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 P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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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이 행한 제도와 정책은 여러모로 특이한 것들이 많습니다. 사유재산 제도를 금지하고 토지를 비한 모든 재화를 공동소유, 공동 분배한다든가, 남성과 여성을 철저히 분리한 인력 통제라든가, 그런 성별 분리 정책 폐지 이후에는 혼인 허가증을 직급에 따라 차등 배분하고 무작위로 짝을 지어준다든가 등등, 천호전우제도라는 타이틀로 시행된 태평천국의 사회제도 구상은 세계사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만큼 그 실험성과 파격성으로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물론 중국사 5천 년에 걸쳐 않은 봉기 세력이 공산주의적인 이상 사치상을 제시해온 바가 있기에, 그러한 전통의 맥락에서 태평천국의 사회제도를 이해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태평천국의 지배영역 전체에 걸쳐 모든 백성을 저 제도의 틀안에 꽉 쥐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는것이 말입니다. 태평천국의 행정망이 그렇게까지 총총하고 치밀하게 짜인 효율적인 물건이 아니었고, 정책일관성을 계속 견지해나갈 만큼 통일된 관료집단이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때문에 태평천국의 여러 특이한 제도들은 전 기간, 전 영역에 걸쳐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온 것들이라기보다는 몇몇 지역에서 단발적으로 띄엄띄엄 시행되었던 것들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기질 향촌의 전통적인 지주 토호 유지 들이 부와 향촌 축제력을 그대로 쥔 채로 태평천국에 협력하는 형태가 맡았다고 합니다. 향촌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의외로 상당한 결속력으로 묶여 있는 운명 공동체적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았고, 이런 난리를 맞이해 이들 향촌 공동체가 잠시 태평천국의 편에 세금을 보내는 걸로 안위를 도모함은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죠.
뭐, 결국 이 태평천국이라는 현상에는 참으로 여러 양상이 섞여 있지 않았겠습니까. 정말 종교적 열정에 휩싸여 이 쓰나미를 주도한 신병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 사회개혁적인 이념을 실현하기를 진심으로 바란 서인도 있었을 것이고, 난생 처음으로 남성과 동등한 사랑대접을 받은 여군 병사도 있었을 것이고, 한촉 부흥을 꿈꾸며 홍수전이 제1의 주원장이 되길 소망한 인족주의자도 있었을 것이고, 우리 마을의 안위를 위해 이 괴상한 장발적 무리에게 협력한 마을 유지들도 있었을 것이고, 단지 청군의 학살을 피해 태평천국을 택할 수밖에없었던 난민들도 있었겠죠.
그 모든 것의 결착이 몇천만의 죽음, 후세의 냉소라는 건....
그 먹먹함은...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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