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는 바르샤바의 문화적·정치적·경제적 의미를 박탈하고, 공포통치를 무기로 일반 시민들을 억압하면서 바르샤바의 심장을 도려냈다. 대학교와 초·중·고등학교는 폐쇄되었다. 교과서, 역사책, 외국어 문헌이 압수되었다. 오페라와 연극이 금지되었다. 서점이 문을닫았다. 인쇄기가 멈췄다. 폴란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인 쇼팽Chopin이 만든 음악을 연주하는 행위가 금지되었다. 와지엔키 공원에 있던 그의 동상은 폭파되어 대좌에서 떨어져 나갔고, 흩어진 청동 조각들은 히틀러에게 선물로 바쳐졌다. 코페르니쿠스의동상도 제거되었는데, 사실 그는 나치가 독일인이라고 선전한 인물이었다. 그렇게 바르샤바의 문화와 역사는 조금씩 지워졌다. 독일인들은폴란드 국립박물관과 국립미술관Zacheta Fine Arts Gallery, 도 파괴했고, 남은 시설물과 소장품을 압수했다. 요리, 식품 보존, 채소 재배, 가축 사육 등에 관한 책들만 출판이 허용되었다. 노예는 주인의 인어를 이해하지 못해야 한다는 이유로, 폴란드인들의 독일어 학습이 금지되었다. 독일은 폴란드를 차지하자마자 바르샤바의 지식인들을 대상으로숙청 작전을 개시했다. - P486
도시는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다. 파괴의 상처가 아무리 넓고 깊어도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는 생존할 수 있다. 도시를 말살하는 모든 방법 중에서 공중폭격은 가장 비효과적인 것이었다. 물론 폭격으로 수많은 건물이 부서진 유럽 도시들의 모습은 끔찍했다. 그러니도시의 물리적인 부분은 가장 쉽게 복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유럽의대도시들은 폭격으로 인한 상처를, 전쟁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치료하는 능력을 보여줬다. 코번트리가 초토화된 지 2일 뒤,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일주일 뒤에는 상수도가 복구되었고, 전화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6주 만에 2만 2,000채의 주택이 살기에 적합한 수준으로 복구되었다. 1941년 3월, 독일군의 대공습이 계속되는와중에도 영국에서는 5만 5,990채의 파손 가옥이 수리되고 있었고, 약 100만 채는 이미 거주할 만한 수준으로 수리되었다. - P496
전시에 모두가 힘을 모으고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의식은 사기를 높이는 효과가 있었다. 전쟁 초기의 공황 상태는 폭격의 충격이 차츰 잦아들자 일종의 체념 상태로 바뀌었다. 1941년 3월에 실시한어느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 영국인의 8퍼센트만 공습을 전쟁으로야기된 여러 문제 중에서 최악의 문제로 여겼다. 그리고 전체 독일인의 15퍼센트만 전쟁에서 패배한 원인으로 적군의 공습을 꼽았다. 손상된 건물들의 처참한 모습이 손상된 사회적 결속력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도시들은 그곳 주민들에 힘입어 생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 P498
나치가 물러가자마자 사람들이 도시로 되돌아왔다. 사람들은 일단 황무지 같은 곳에 거처를 마련했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온 데서 알수 있듯이, 현대의 가장 극단적인 도시 말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돌아오자 바르샤바에는 조금씩 생기가 돌았다. 사람들은 중심가에 집을 다시 지으며 자력으로 도시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폐허의 처리 방법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부의 의견은 갈렸다. 어떤 사람들은 바르샤바를 포기하고, 수도를 크라쿠프나 우치로 옮기기를 바랐다. 그들은 바르샤바의 비참한 잔해와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상대로 저지른 범죄를 영원히 기억하는 기념물로 남겨두고자 했다. 다른 사람들은 바르샤바를 1939년 9월 이전의 모습으로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치에 대한 저항 행위이자 정신적 상처를 입은 생존자들에게 원래의 소중하고 친숙한 바르샤바의 모습을 되돌려주는 방법이기도 했다. 얀 흐미엘레프스키같은 몇몇 도시계획가들과 건축가들에게 파괴된 바르샤바의 모습은 지독한 충격이 아니라 전화위복의 계기로 다가왔다. 오래된 대도시의 비합리적 혼돈 상태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 급진적이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황금 같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 - P525
독일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친근한 도시 풍경으로 회귀하려는 시민들의 욕구와 새로운 전후 세계에 걸맞은 현대 도시를 원하는 당국의 시각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냉정한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볼 때, 현대주의 건축의 통일성과 보편성은, 그리고 도시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현대주의 건축의 열망은, 도시라는 개념과 도시성에 대한 공격이었다. 질서를 향한 갈망이 도시 생활의 본질적성인 혼란, 혼돈, 개별성과 씨우고 있었다. 반면, 자립과 주민 조직화의 전통이 강한 도쿄에서는 재건 사업의 상당 부분이 개인들의 손에 맡겨졌다. 주거 구역의 대다수 재건 사업은, 전통적인 공사 기법과 고유의 건축술을 활용하고 현지 건축업자들을 동원한 가옥 소유주들이 진행했다. 무계획적이고 점진적인 재개발 과정은 도쿄가 폐허에서 벗어나 20세기 후반기의 세계적 대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판자촌과 무허가 정착촌은 도시 성장의 발판이 되었고, 따라서 도쿄는 몹시 촘촘하고 차별화된 도시 구조를 지니게 되었다. 도쿄는 다른 도시들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특히 바르샤바에서는 권위주의와 온정주의 때문에 개인들과 도시의 소규모 공동체들이 도시의 미래를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 P531
대량생산된 주택들이 대형 쇼핑몰과 결부되는 형태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와 미국 각지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모방되었다. 1950년에 레이크우드가 첫선을 보이고 나서 20년 동안 미국 주요 도시들에는1,000만 명의 주민이 새로 유입되는 데 그쳤지만, 교외 지역으로는무려 8,500만 명이 이주했다. 도시를 탈출하는 주민들의 행렬은 계속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체 미국인의 13퍼센트만 교외에 거주했지만, 1990년대에는 미국인의 절반이 교외에서 살고 있었다. 미국의 도시와 교외에 거주하는 인구는 75퍼센트 증가한 반면, 도시와 교외에 조성된 건축환경의 면적은 300퍼센트나 늘어났다. 자동차 기반의 도시화에 따라 새로운 종류의 도시가 탄생했고, 그 과정에서 생활방식이 혁신적으로 바뀌었다. 당시 미국 문명은 도시의 공공 생활이 아니라 개별 가정의 사적 영역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 P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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