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은 어떻던가?
- 글이 아니라 몸과 같았습니다. 스스로 능히 알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렇지. 그랬겠어.
-그랬습니다. 물 뿌려 마당 쓸고 부르면 대답하는 일이 근본이라고 했는데, 그 분명함이 두려웠습니다.
-아, 그랬겠구나. 그토록 쉬운 말이었구나.
-쉬워서 겁이 났습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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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아도 배가돌아오지 않고, 다시 날이 저물어도 배가 돌아오지 않는 저녁에물가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제가끔 흩어져서 집으로 돌아갔다. 굴뚝에서 저녁연기가 오르지 않았고 마을은 어둠 속에서 고요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집에서 눌렸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면, 울음은 이 집 저 집으로 번져갔다. 여인네들의 울음소리는 어둠을 찢었고 늙은이의 울음은 메말라서 버석거렸다. 마을은 밤새 울었고, 놀란 개들이 짖어댔다.
슬픔은 비빌 곳이 없어서 지층처럼 사람들의 마음 밑바닥에쌓였고, 사람들은 다시 바다로 나아갔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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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초겨울에 남풍이 불어서 흑산행 돛배는 출항하지 못했다. 무안 수군진 판옥선은 백리 밖바다를 나가본 적이 없었고 협선들은 바닥이 썩고 노가 부러져서 선창에 묶여 있었다. 무안 포구에다른 관선官船은 없었다. 장삿배 한 척이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곡식을 싣고 나가서 흑산 바다의 여러 섬들을 돌면서 홍어와간재미, 미역을 매집하는 사선私船이었다. 목선은 길이 마흔 자에, 폭 여덟 발짜리 황포 돛 두 대를 세웠다. 배가 낡아서 목재의 나이테에 허연 골이 드러났다. 고물 쪽 갑판은 사개가 뒤틀린 자리에 꺾쇠를 박았고, 짓무른 뱃전에 청태가 끼어 있었다.
- P7

•••저것이 바다로구나, 저 막막한 것이, 저 디딜 수 없는 것이…
•••마음은 본래 빈 것이어서 외물에 반응해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 하니, 바다에도 사람의 마음이 포개지는 것인가.
정약전은 삿갓바위를 지나서 선창 쪽으로 걸었다. 저녁 추위에 매 맞은 엉치뼈가 시리고 결렸다. 엉치뼈는 그 주인의 몸뚱이와는 상관없이 홀로 추위를 향해 불거진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통증은 삭신으로 퍼졌다. 매를 맞을 때, 고통은 번개와 같았고 매를 맞고 나면 고통은 늪과 같았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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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곧 황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두운 밤이 하늘에서 내려오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광활한 대지가 단단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부름의 자세다. 여인이 자기 아들딸을 부르듯이, 대지가 어두운 밤을 부르듯이.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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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어두워지자 눈까지 내렸어. 그리고 꽤 오랫동안 포성이 멎었지. 우리는 참호 바깥에 누워 있는 부상자 수천 명의 비명을 듣고 있었는데,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했다네. 어쨌거나 그건 고통에 겨워 내는 소리였지. 나는 그 후로 두 번 다시 사람을 그토록 두려움에 떨게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네. 그 소리는 커다랗게 용솟음치는 밀물처럼 우리 몸 위로 사정없이 밀려왔어. 그 와중에 눈꽃이 떨어졌지만, 하늘이 너무 어두워 눈으로 볼수는 없었지. 그저 몸이 얼었다 축축해졌다 하고, 또 손 위에 보드라운 솜조각 같은 게 앉았다가 천천히 녹아내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두꺼운 눈꽃 층이 쌓이는 걸 느낄 뿐이었다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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