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태평양太平洋 거대한 평온이라이름 붙은 대양. 고래들이 싸돌아다니려면이 정도 스케일의 바다는 필요한 것.
억 년이 가도록고래들은 이 바다 이름의 평平 자를 누려 나가리니.
- P10

포경산업은 19세기 미국 경제의 가장 중요한 기둥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산업혁명을 맞아 각종 기계와 소명에 필요한 기름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석유산업은 아직 그 포텐이 터지기 전이었습니다. 가축과 작물을 삶아 짜서 만드는 기름으로는 수요를 충당하기 어려웠죠. 그 상황에서 거대한 몸뚱이를 지방으로 풍만하게 채운 고래는 그야말로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노다지였습니다. 19세기 전반, 미국 경제는 그 기름을 유유 삼아 매끄럽게 성장해온 것입니다. 기름 그 자체가 가져다주는 부와 더불어, 포경선 건조를 위한 조선산업이 크게 향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만드는 데 온갖 자재와 부품, 인력이 동원되는 거대한 배는 관련 제조업 전반에 즐거운 파급력을 끼치게 마련입니다. 이는 미국 동북부의 공업 성장에도 큰 역할을 하죠.
북부 주들이 이처럼 고래기름으로 기름진 배를 두드릴 때, 남부 주들은 흑인 노예들의 노동력과 함께 기름을 쥐어짜고 있었습니다. 흑인 노예들이 열심히 수확한 면화의 씨앗에서 짜낸 면실유가 식용유 시장을 석권해나간 것입니다. 흑인들의 고단한 삶에 작은 낙이 되어준 프라이드치킨은 고래기름이 아닌 면실유로 튀겨낸 치킨이죠. 영국의 피시&칩스 같은 튀김 요리도 이 시기에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던기름 대량생산은 고칼로리를 저령하게 제공함으로써 산업혁명시대에 양질의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19세기의 산업혁명 포텐 폭발은 석탄과 철의 대량생산뿐 아니라, 이와 같은 기름의 대량생산도 그 기둥의하나로 삼았던 것입니다.
즉 고래는 지구상의 모든 동물들 중에 산업혁명에 가장 크게 기여한 동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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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노치티틀란의 직교형 지면 구획과 주요 거리, 건물의 방향은 항성과 행성의 운동이 반영된 우주론적 지도에 따라 결정되었다. 호수 안의 그 섬 도시는우주의 축소판이었다. "모든 우주적 질서의 근원이자 중심, 핵심이었다." 완벽한 도시로 설계된, 테노치티틀란은 광대한 제국의 영적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맡았다. 권력은 테노치티틀란이라는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퍼져나갔다.
도시계획가들은 최소한 테노치티틀란 도심 구역의 거룩한 대칭성을 유지해야 했다. 테노치티틀란은 마치 정교한 농업에 힘입어 식량을 확보하고 기다란 송수로를 통해 산악지대로부터 깨끗한 물이 공급되는 기계와 같았다. 4개의 웅장한 대로는 수많은 일꾼들이 깨끗이 관리했다. 시민들은 정기적으로 분뇨가 처리되는 공중변소를 이용할수 있었고, 분뇨는 가죽을 무두질할 때 섞는 재료나 수경재배장인 치남파에 뿌리는 거름으로 쓰였다. 악취를 풍기는 유럽의 도시들에 비해 테노치티틀란은 기술체계와 위생이 매우 앞서 있었다.
- P306

중앙아메리카의 세련된 도시 체계는 유럽인들이 나타나면서 치명상을 입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하고 나서 천연두가 퍼지자 테노치티틀란의 인구가 3분의 1이나 줄어들었다. 1521년, 코르테스가 군대와 최신 공성용 무기, 조선공들과 함께 돌아왔다. 테노치티틀란은 75일 동안 버텼다. 10여 년 전의 믈라카처럼 테노치티틀란에서도 잔인무도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코르테스는 주택과 건물을 하나씩 부수는 방식으로 전진한 끝에 결국 테노치티틀란을 장악했다. 그는 도시계획가인 알론소 가르시아 브라보 Alonso Garcia Bravo를 시켜 중앙아메리카 최후의 대도시의 폐허 위에 유럽식 도시를 건설했고, 훗날 그 도시는 멕시코시티가 되었다.
- P304

 다른 나라들과 명백한대조를 이룬 네덜란드는 각기 다른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특정 종교의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관용적 태도를 보이는 나라였다. 네덜란드의 도시들은 이주자들에게 개방적이었다. 그 도시들에서는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의 비율이 유달리 높았다. 도시 여기저기에 서점이있었고, 암스테르담은 북유럽 출판계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시민권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상거래의 자유에 힘입어 네덜란드..
그리고 특히 암스테르담은 자유사상가와 반체제인사, 기업가들에게무척 매력적인 곳이 되었다. 암스테르담은 온갖 급진적 사상의 용광로였다. 암스테르담의 출판업자들은 잉글랜드에서 출판이 금지된 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저서와 갈릴레오, 스피노자, 데카르트 등의 저서같은 당대 가장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킨 책들을 연거푸 내놓았다.
••••••
혁신적 사고는 그간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네덜란드가 유럽에서,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하게 해주는 동력이 되었다. 전쟁과 박해를 피해 암스테르담으로 건너온 사람들에게는 나름의빼어난 기능과 국제적 인맥이 있었다. 
- P308

그때까지의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도시 건설을 촉진하는 세계 최강의 동력으로 작용한 것은 아시아의 자원과 물산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초반, 암스테르담이 상품의 흐름을 통해 거대한 괴물로 변모했다. 안트베르펜 출신의 망명자들은 많은 양의 자본뿐 아니라 안트베르펜에서 최초로 고안된 정교한 금융기법도 가지고 있었다. 1609년에 설립된 암스테르담 외환은행 Amsterdamsche Wisselbank은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수표 체계, 자동이체, 계좌 간 이제 같은 여러 가지 은행업 방식을 고안했다. 암스테르담 시청에 입주해 영업한 암스테르담외환은행은 공공기관이었고,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의 번영과 안정성, 재력 덕분에 신용을 쌓을 수 있었다.
기업과 은행은 현대 경제의 두 기둥이다. 네덜란드의 경우, 세 번째 기둥은 암스테르담 주식 거래소였다. 세계 최초의 주요 공개 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식이 발행되자 최초의 증권 시장이 생겼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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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에의 영국군이 청군보다 기술적으로 앞선 부분도 컸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병법과 조직력이라는 소프트 파워에서 월등하게 앞서 있었다는 점입니다장과 부사관, 병사로 이뤄진 조직의 효율성, 그 개개인이 전장환경에서 같은 바 임무를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수행해내기 위해 갖는 의지력, 공격과 밤어에 있어서의친형 구출 등등, 오랜기간 유럽에서의 전쟁을 통해 다져온 노하우들이 있었던 겁니다. 근대유럽 보병의 조직력에 대해 나플레용이 남긴 유명한 멘트가 있지요,
"프랑스 보병 3명과 맘루크 기병 1명이 싸우면 프랑스 보병이 진다.
하지만 프랑스 보병 100명과 맘루크 기병 300명이 싸우면 프랑스 보병이 이긴다."
아편전쟁때, 청군은 등패병 이라는 특수부대를 투입합니다. 호랑이 코스프레를 하고듣나지 방패를 든 병사지요, 기병의 말을 놀래키기위해 호랑이 분장을 했다고 합니다영국군이 이에 놀라 도망가지는 않았지만, 그 이미지에 깊은 인상을 받아영국의 아편전쟁 기록화에 동패병의 모습이 그려져 역사에 남게 되었답니다.
- P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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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상인들은 동업조합을 결성했고, 동업조합을 통해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디고 위험한 동東발트 해를 개척해 공해상에서의 상호방어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활동에 나섰다. 적대적인 지역에서, 그들은 하나로 뭉쳐 배타적인 게르만계 공동체를 형성했다. 성벽과 무기로 방어하는 그 공동체를 가리키는 독일어 단어는 Hanse‘다. Hanse‘
는 원래 무장 호송대를 뜻하는 용어있다. 그 어떤 국가도 원거리 교역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세계에서 무역과 무력은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한자동맹의 상인들은 북유럽 전역으로 진출했고, 혈연적유대를 통해 단합했다. 그리고 위험을 분담하고 보상을 공유함으로써 원거리 교역의 비용을 절감했다.
- P257

도시는 1년 내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으면 존속하지 못한다. 변변찮아 보이지만 단백질이 풍부한 생선인 청어를 절여 저장한 음식은추운 북유럽 중세 도시들의 존속과 성장에 필요한 수단이었다. 뤼네부르크산 소금은 뤼벡으로 운반되었고, 거기서 다시 청어의 산란지인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로 수출되었다. 1360년, 뤼벡 한 곳에만 청어잡이 배 250척이 그 은빛 별미를 자랑하는 생선을 잔뜩 싣고 들어왔다.
뤼벡에서 청어는 다시 북유럽의 도회지들로, 즉 저장식품에 의존하는 헨트 Ghent, 이에페르Ypres, 아라스Arras, 브뤼허 Bruges 같은 성장 일로의 직물 생산지들로 수출되었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등지의 연안 곳곳에서 잡힌 대구도 뤼벡으로 건너왔다. 절여 보관한 대구는 북유럽뿐 아니라 이베리아와 지중해 시장에서도 수요가 있었다. 중세의 뤼벡은 오늘날의 석유 부자인 아라비아의 수장국音長國과 같은 존재였다. 당시의 연료는 생선과 소금이었지만 말이다.
- P258

 1800년까지 유럽의 기대수명은 농촌이 도시에 비해 50퍼센트 더 길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도시에 거주하는 데 있어 그 같은 대가가 필요하지 않았다. 중국의 경우 오히려 도시 사람들이 농촌 사람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오래 살았다. 유럽 도시들은 불결했기 때문에 사망사고 다발지역이었다. 반대로 중국 도시들은 청결함의 상징이었다. 유럽인들은 육류를 좋아했고, 돼지나 닭을 가까운 데서 키우며 살았지만, 아시아인들은 채식 위주로 식사했고, 도시 안에서 가축들을 많이 키우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늘 전쟁에 시달렸기 때문에 도시는 요새화되었고,
따라서 물리적으로 성장이 억제되고 밀집도가 증가함에 따라 병원균증식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었다. 전쟁으로 군대가 대륙 곳곳을 누비면서 병원균이 확산했다. 중국에서는 강력한 중앙 권력이 확립되어 분쟁이 줄어들었고, 덕분에 도시가 성벽 밖으로 팽창해 사람들과 시장이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동아시아인들은 개인위생의 기준도 더 높았다. 오물이나 배설물은 근처의 전답에서 거름으로 쓰였다.
유럽의 도시 거주자들은 오물과 함께 살았다.
- P266

 소모전이 이어지는 바람에 유럽의 군대는 다른 대륙의 군대보다 훨씬 앞서 나름의 기술체계를 습득하게 되었다. 유럽의 급속한 도시회는 유럽인들의 진취적 기업가 정신에 따른 결과였지만, 그 역동적 변화는 흑사병, 십자군 운동, 고질적인 전쟁, 심각한 도시 내부의 대립 관계 같은 부정적요인들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유럽의 신흥 대도시들은 다른 곳의 대도시들과 상당히 달랐다. 물론 그 대도시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민주적인 곳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대도시들은 왕국들 보다. 그리고 관료제에 의해 운영된 중국과 일본의 도시들보다 정치적 참여도와 사회적 유동성이 더 높았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유럽의 도시들은 다른 대륙의 도시들보다 문맹률이 낮았다. 작고 취약했어도 유럽의 도시들에서는 훗날 전 세계를 휩쓴 군사적 · 상업적 혁명이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 P276

이후 캘리컷을 포위한 채, 바스코 다 가마는 사무티리에게 모든 무슬림 상인들을 추방하고 그들과의 무역을 금지하라고 명령했다. 사무티리는 포르투갈인들이 사실상 해적 같다고, 또 "캘리컷의 항구는 예로부터 항상 열려 있었다" 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다 가마는 캘리컷을 향해 수많은 쇠 포탄과 돌 포탄을 쉴새 없이 퍼부었다. 그 끔찍한 포격이 벌어지는동안, 다 가마는 무슬림 상인과 힌두인 어부 들 34명을 돛 위의 활대에 매달아 교수형에 처했다. 이후 몇 년 만에, 세계 유수의 큰 도시 중 하나였던 캘리컷은 폐허로 변했고 사람들은 앞다퉈 그곳을 떠났다.  포악하고 집요한 위협에 직면한, 그리고 변변한 방어 수단이 없는말라바르 해안의 도시들은 난폭한 침입자들과 합의를 보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인들은 면허장을 사든지 아니면 망하든지 결정하라며 선주들과 상인들을 협박했다. 이렇게 인도양 전역에서 보호비를 뜯을 수있는 체제를 구축했다. 어느 무슬림 통치자는 겁에 질린 채 말했다.
"배를 타고 바다를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한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포르투갈인들이 나타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승부가 끝났음을 인정한 무슬림 무역 공동체들이 속속 복기했다. 스와힐리 해안과 말라바르 해안의 대부분 지역은 이미 포르투갈인들이 장악한 상태였다. 여기저기에 요새가 건설되었고, 현지의 통치자들은 포르투갈인을 제외한 사람들과 교역할 수 없었으며 포르투갈인들이 정해준 가격으로만 교역해야했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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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에 나는 한가하게 놀고먹기 좋은 직업을 얻었다. 그것은바로 촌에 가서 민요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그해 여름 내내 나는어지러이 노니는 참새처럼, 시끄러운 매미 소리와 햇빛 가득한 시골 마을 들녘에서 빈둥거렸다.
- P15

나는 고개를 저었어.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하루아침에 내 비단옷은 엉망이 되었고, 어깨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네.
혼자 집으로 가면서 울고 또 울었지.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겨우 하루 돈을 나르고도 사지가 다 풀릴 정도로 힘든데, 그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고생했을까 싶더라구. 그제야 난 아버지가 왜 은화가 아니라 동전을 고집했는지 알게 됐지. 바로 그런 이치를 깨닫게 하려고, 그러니까 돈을 번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하려고 그러신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이상 걸을 수가없었어. 그대로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허리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꺼이꺼이 울었지.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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