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상인들은 동업조합을 결성했고, 동업조합을 통해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디고 위험한 동東발트 해를 개척해 공해상에서의 상호방어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활동에 나섰다. 적대적인 지역에서, 그들은 하나로 뭉쳐 배타적인 게르만계 공동체를 형성했다. 성벽과 무기로 방어하는 그 공동체를 가리키는 독일어 단어는 Hanse‘다. Hanse‘ 는 원래 무장 호송대를 뜻하는 용어있다. 그 어떤 국가도 원거리 교역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세계에서 무역과 무력은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한자동맹의 상인들은 북유럽 전역으로 진출했고, 혈연적유대를 통해 단합했다. 그리고 위험을 분담하고 보상을 공유함으로써 원거리 교역의 비용을 절감했다. - P257
도시는 1년 내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으면 존속하지 못한다. 변변찮아 보이지만 단백질이 풍부한 생선인 청어를 절여 저장한 음식은추운 북유럽 중세 도시들의 존속과 성장에 필요한 수단이었다. 뤼네부르크산 소금은 뤼벡으로 운반되었고, 거기서 다시 청어의 산란지인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로 수출되었다. 1360년, 뤼벡 한 곳에만 청어잡이 배 250척이 그 은빛 별미를 자랑하는 생선을 잔뜩 싣고 들어왔다. 뤼벡에서 청어는 다시 북유럽의 도회지들로, 즉 저장식품에 의존하는 헨트 Ghent, 이에페르Ypres, 아라스Arras, 브뤼허 Bruges 같은 성장 일로의 직물 생산지들로 수출되었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등지의 연안 곳곳에서 잡힌 대구도 뤼벡으로 건너왔다. 절여 보관한 대구는 북유럽뿐 아니라 이베리아와 지중해 시장에서도 수요가 있었다. 중세의 뤼벡은 오늘날의 석유 부자인 아라비아의 수장국音長國과 같은 존재였다. 당시의 연료는 생선과 소금이었지만 말이다. - P258
1800년까지 유럽의 기대수명은 농촌이 도시에 비해 50퍼센트 더 길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도시에 거주하는 데 있어 그 같은 대가가 필요하지 않았다. 중국의 경우 오히려 도시 사람들이 농촌 사람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오래 살았다. 유럽 도시들은 불결했기 때문에 사망사고 다발지역이었다. 반대로 중국 도시들은 청결함의 상징이었다. 유럽인들은 육류를 좋아했고, 돼지나 닭을 가까운 데서 키우며 살았지만, 아시아인들은 채식 위주로 식사했고, 도시 안에서 가축들을 많이 키우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늘 전쟁에 시달렸기 때문에 도시는 요새화되었고, 따라서 물리적으로 성장이 억제되고 밀집도가 증가함에 따라 병원균증식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었다. 전쟁으로 군대가 대륙 곳곳을 누비면서 병원균이 확산했다. 중국에서는 강력한 중앙 권력이 확립되어 분쟁이 줄어들었고, 덕분에 도시가 성벽 밖으로 팽창해 사람들과 시장이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동아시아인들은 개인위생의 기준도 더 높았다. 오물이나 배설물은 근처의 전답에서 거름으로 쓰였다. 유럽의 도시 거주자들은 오물과 함께 살았다. - P266
소모전이 이어지는 바람에 유럽의 군대는 다른 대륙의 군대보다 훨씬 앞서 나름의 기술체계를 습득하게 되었다. 유럽의 급속한 도시회는 유럽인들의 진취적 기업가 정신에 따른 결과였지만, 그 역동적 변화는 흑사병, 십자군 운동, 고질적인 전쟁, 심각한 도시 내부의 대립 관계 같은 부정적요인들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유럽의 신흥 대도시들은 다른 곳의 대도시들과 상당히 달랐다. 물론 그 대도시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민주적인 곳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대도시들은 왕국들 보다. 그리고 관료제에 의해 운영된 중국과 일본의 도시들보다 정치적 참여도와 사회적 유동성이 더 높았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유럽의 도시들은 다른 대륙의 도시들보다 문맹률이 낮았다. 작고 취약했어도 유럽의 도시들에서는 훗날 전 세계를 휩쓴 군사적 · 상업적 혁명이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 P276
이후 캘리컷을 포위한 채, 바스코 다 가마는 사무티리에게 모든 무슬림 상인들을 추방하고 그들과의 무역을 금지하라고 명령했다. 사무티리는 포르투갈인들이 사실상 해적 같다고, 또 "캘리컷의 항구는 예로부터 항상 열려 있었다" 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다 가마는 캘리컷을 향해 수많은 쇠 포탄과 돌 포탄을 쉴새 없이 퍼부었다. 그 끔찍한 포격이 벌어지는동안, 다 가마는 무슬림 상인과 힌두인 어부 들 34명을 돛 위의 활대에 매달아 교수형에 처했다. 이후 몇 년 만에, 세계 유수의 큰 도시 중 하나였던 캘리컷은 폐허로 변했고 사람들은 앞다퉈 그곳을 떠났다. 포악하고 집요한 위협에 직면한, 그리고 변변한 방어 수단이 없는말라바르 해안의 도시들은 난폭한 침입자들과 합의를 보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인들은 면허장을 사든지 아니면 망하든지 결정하라며 선주들과 상인들을 협박했다. 이렇게 인도양 전역에서 보호비를 뜯을 수있는 체제를 구축했다. 어느 무슬림 통치자는 겁에 질린 채 말했다. "배를 타고 바다를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한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포르투갈인들이 나타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승부가 끝났음을 인정한 무슬림 무역 공동체들이 속속 복기했다. 스와힐리 해안과 말라바르 해안의 대부분 지역은 이미 포르투갈인들이 장악한 상태였다. 여기저기에 요새가 건설되었고, 현지의 통치자들은 포르투갈인을 제외한 사람들과 교역할 수 없었으며 포르투갈인들이 정해준 가격으로만 교역해야했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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