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에 나는 한가하게 놀고먹기 좋은 직업을 얻었다. 그것은바로 촌에 가서 민요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그해 여름 내내 나는어지러이 노니는 참새처럼, 시끄러운 매미 소리와 햇빛 가득한 시골 마을 들녘에서 빈둥거렸다.
- P15

나는 고개를 저었어.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하루아침에 내 비단옷은 엉망이 되었고, 어깨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네.
혼자 집으로 가면서 울고 또 울었지.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겨우 하루 돈을 나르고도 사지가 다 풀릴 정도로 힘든데, 그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고생했을까 싶더라구. 그제야 난 아버지가 왜 은화가 아니라 동전을 고집했는지 알게 됐지. 바로 그런 이치를 깨닫게 하려고, 그러니까 돈을 번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하려고 그러신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이상 걸을 수가없었어. 그대로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허리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꺼이꺼이 울었지.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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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기본적인 교통수단인 인간의 다리, 말, 기차, 노면 전차,
지하철, 자동차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경향이 있다. 이슬람 세력이 우위를 차지할 무렵, 바퀴 달린 마차(거리의 폭이 비교적 넓어야 다닐 수 있다)는 비용효과가 더 좋은 화물 운반수단인 낙타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시 당국의 규정에 따르면 거리의 폭은 반대 방향의 낙타 두마리가 서로 지나칠 수 있을 정도면 되었다. 가옥 소유자들은 거리를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건물의 2층 이상을 서로 이어주는 연결부를 만들어도 무방했다. 따라서 거리는 촘촘한 도시 경관을 파고 들어가는 폐쇄형 복도로 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 P207

중세 내내, 세계 20대 도시 중 19개가 이슬람 도시이거나 중화제국에 속한 도시였다(콘스탄티노폴리스가 유일한 예외였다). 인간세계의 부와 에너지가 스페인의 코르도바와 서아프리카 가나 제국의 도시 GhanaCity에서 중국의 광저우까지 땅과 바다에 걸쳐 펼치진 진주 목걸이럼 연결된 도시망으로 집중되었고, 그 중심에 바그다드가 있었다. 중세는 유럽에게 암흑시대였지만, 유럽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게는황금시대였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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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표와 달리 은영은 매켄지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영은 쉽게 다른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어서는 아니고 싫어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들기 때문에 그럴 여력이 없어서다. 그런데도 매켄지는 어쩐지 거슬렸다.
매켄지는 자주 보건실 창문 앞을 지나다녔다. 처음에는 치기 어린 걸음걸이, 어슬렁어슬렁하며 몸을 과하게 기울이는 모양새가 탐탁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라 에로에로 에너지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게 문제였다.
"말도 안 돼, 저건 가짜야."
- P101

"다시 보면 쓸 거야."
은영이 슬쩍 허리 쪽으로 손을 두며 말했다. 그러자 매켄지가 지금껏 숨겨 왔던 에로에로 에니지를 한 번에 꽉 뿜었다. 너무 가까이 서 있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기분 나쁜 손들이 한꺼번에 마구 더듬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은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 P125

그리고 그걸 보고 만화 동아리 애가 만화 축제에 다녀왔냐고 말을 걸었다. 아니라고, 강선이 그린 거라고 하자 다들 놀랐다.
만화 동아리 애들이 보글보글 몰려들었고 어느새 강선과 은영은 그 무리에 낄 수 있게 되었다. 강선은 그림을 잘 그려서,
은영은 심령 소녀라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학교에서 두 사람을 가장 개의치 않아 하는 무리였다. 하긴 그렇게 폭 넓고 놀라운 이야기들에 푹 젖어 사는 아이들이었으니, 쉽게 편견에 사로잡힐 리 없었다.
- P189

"장르를 잘못 택했단 말야. 칙칙한 호러물이 아니라 마구 달리는 소년 만화여야 했다고, 그랬으면 애들이 싫어하지 않았을 거야. 그 꼴로 다치지도 않았을 거고."
"만화가 아니야."
"그렇게 다르지 않아. 그래서 내가 한번 그려 봤지."
강선이 스케치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엔 교복을 입은 은영이 5등신 정도 되는 비율로, 치마는 좀 짧아진 채 그려져 있었다. 5등신이 기분 나쁜지 멋대로 치마를 잘라 먹은 게 기분나쁜지 얼떨떨했다. 그 그림 속 은영의 한 손에는 무지개 깔때기 칼이, 다른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은영이 뭐라 반응하기 전에 강선이 의자에 걸려 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정말로깔때기 칼과 비비탄 총을 꺼냈다. 낡고 흠집이 있는 게 분명강선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물건인 것 같았다.
"도구를 쓰라고, 멍청아."
"아."
"다치지 말고 경쾌하게 가란 말이야."
"하."
"코믹 섹시 발랄? 아무래도 섹시는 무리겠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강선이 은영의 납작한 가슴(그리고 그 이후로 딱히 발육이 좋아지지 않았으므로 강선의 예언이 맞기도 했다.)을 삐딱하게 쳐다보았으므로 은영은 기운을 차리고 지우개를 던졌다.
캐릭터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르를 바꿀 수 있을 것같았다. 지우개가 명중하는 순간 은영은 예감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은영은 사실 강선의 설정인 셈이었다.
- P192

은영은 이민 간 친척들을 떠올리며 속이 상했다. 내가 너를 싫어하는 것은 네가 계속 나쁜 선택을 하기 때문이지 네가 속한 그 어떤 집단 때문도 아니야. 이 경멸은 아주 개별적인 경멸이야. 바깥으로 번지지 않고 콕 집어 너를 타깃으로하는 그런 넌더리야. 수백만 해외 동포는 다정하게 생각하지만 너는 딱 싫어. 그 어떤 오해도 다른 맥락도 끼어들 필요 없이 누군가를 해치는 너의 행동 때문에 네가 싫어. 은영이 바늘 끝처럼 마음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미워하는 마음에는 늘 죄책감과 자기 검열이 따르지만 매켄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매켄지를 미워하는 데에는 명쾌하고 시원한 부분까지 있었다. - P216

"있잖아, 다음 선거에는 너희들한테도 선거권이 있어."
대흥의 설명을,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끄트머리에 그렇게 덧붙여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이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 뒤에 오는 이들은 언제나 더 똑똑해. 이 아이들이라면 우리보다 훨씬 나을 거야.
그러니까 그 바보 같은 교과서를 막길 잘했어.
가끔 수업을 하다가 교과서의 사진들에 눈이 머물 때가 있었다. 아는 얼굴들인 것만 같았다. 꿈속에서 몇 번이나 마주친 얼굴인 것만……. 누군가를 알아보기에는 사진도 꿈도 너무 희미했다. 그렇게 대흥의 눈이 갈색 얼굴들에 머무는 동안에도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 P239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인표가 은영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크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인표가 아니라 은영 스스로가 말한 것 같기도 했다. 거짓말이어서,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 P271

정말로 빛이 나는 건 아닐 텐데 잠든 은영의 손을 잡아주거나 가볍게 안아 주면 은은하게 발광했다. 인표는 그 사실을 은영에게 말하진 않았다. 그저 충전이 잘된 날, 완전히 차오른 은영의 얼굴을 바라보다 잠드는 게 좋았다. 그 빛나는얼굴이 인표의 수면등이었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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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해변을 도시 안에 만들면 어떨까? 2003년부터 지금까지 파리는 가마솥 같은 여름에 지진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고 편히 쉴 수 있도록 도시 해변을 조성해왔다. 센 강 옆의 조르주 퐁피두Georges Pompidou 고속도로는 여름 몇 달 동안 차량 통행이 차단되고, 그 빈자리를 모래와 야자수, 해먹과 일광욕객에게 내어준다. 파리 플라주Paris Plage("파리 해변‘이라는 뜻 옮긴이)는, 사회주의 성향의 시장이 파리시민들, 특히 휴일을 즐길 여유가 없고 황량한 주변부에 틀어박혀 지내는 파리 시민들이 ‘공공 공간을 점유하고 기존과 다른 도시 생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려고 고안한 것이었다. 파리 플라주를 설치한 것은 정치적 행위였다. 당시의 파리 시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리플라주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서로 뒤섞이는, 멋진 단골 장소가 될 것이다. 파리 플라주는 이 도시의 철학이자 공유와 형제애를 위한 시적공간이다."
- P172

도시는 연약한 존재다. 지속적인 투자와 재건 활동과 시민의식이없으면 도시는 정말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성직자 길다스가 브리타니아의 폐허에서on the Ruin of Britain)에 남긴 기록에 따르면 서기2007년에 로마군이 철수한 직후 총 28개의 로마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미 당시 그 28개의 도시들은 2세기에 걸친 점진적 탈도시화로 인해 껍데기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론디니움은 서기 5세기 말엽에 완전히 버림받은 도시로 전락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룬덴위크(lundeavi 라는 색슨족의 촌락이 유령 도시인 론디니움에서 서쪽으로 1.6킬로미터 떨어진 곳, 즉 오늘날의 코번트 가든 Coventandin에 해당하는 지역에 들어섰다.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서 로마도시들은 대규모 촌락 정도의 크기로 축소되었다. 한때 인구 10만 명을 자랑하는 속주의 수도였던 트리어는 대성당 주변에 모인 몇 개의촌락으로 쪼개졌고, 심지어 1300년경에도 인구가 8,000명에 불과했다. 아우구스투스가 갈리아에 세운 도시 오텀 Autum은 10제곱킬로미터넓이의 땅에 수만 명이 모여 살던 도시에서 면적 0.1제곱킬로미터의 촌락으로 쪼그라들었다. 님Nime과 아를 Arle 에서는 사람들이 원형 극장의 커다란 방어벽 안으로 피했고, 거기서 도회지가 형성되었다. 도시는 이제 약탈자와 습격자들이 군침을 흘리는 먹잇감이었다. 도로는교역의 길이 아니라 침입의 길로 바뀌었다. 그리스와 발칸 반도, 이탈리아에서는 사람들이 평지의 도로변에 있는 도시들을 버리고 방어에유리한 언덕 꼭대기의 촌락, 흡사 로마 시대 이전 그들의 조상들이 살았던 곳과 비슷한 곳으로 향했다. 한편 북유럽에서는 토목공사를 하고 통나무집을 갖춘 오피둠이 다시 생겼다.
석조 공사는 중단되었다. 문맹률이 치솟았다. 그린란드 만년설의 오염도를 측정한 결과에 의하면 이 무렵의 금속 가공량은 선사시대수준으로 하락했다. 원거리 교역으로 먹고살기 힘들어지자 큰 도시들은 경제적 능력을 상실했다. 권력과 재력이 도시에서 수도원과 장원 (봉건사회의 경제적 단위를 이루는 영주의 토지 옮긴이), 성채로 옮겨갔다. 적어도 향후 1,300년 동안 유럽은 기반시설, 기술체계, 위생처리, 수도 시설, 인구, 시민문화, 생활 수준, 고상함 등의 측면에서 로마 제국의 도시화 수준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1800년까지 인구 100만 명을 넘긴 도시가 없었다. 도시적 세련미의 표상인 목욕탕은한번 자취를 감춘 후 1829년에 리버풀의 피어 헤드Pier Head 시립 욕장이 개장할 때까지 다시는 일반 대중을 위한 용도로 쓰이지 않았다.
- P191

목욕은 도시의 생명력을 가늠하는 기준이다.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목욕탕과 수로교의 유적은 도시성의 붕괴를 가리켰다. 이슬람권 대도시들과 아시아 전역의 도시들에서 살아남은 목욕탕은 만개한 도시 생활을 상징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부분이 예전처럼 다시보잘것없는 곳으로 전락하는 동안,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 대부분은 맹렬한 에너지와 도시화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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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의 보충수업 기간,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 신발장 냄새가 진했다. 짧은 방학은 무더위 속에 지나가 버렸고 보충이 시작되자 모두 우울한 얼굴이었지만 사복이 허용되었으므로 옷 입는 재미로 버티고들 있었다. 그러나 승권은 그마저도 전혀 흥미가 없는 편이었다. 연하늘색 핀 스트라이프 반셔츠에 면바지가 승권의 최선이었고, 승권이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오직 하나였다.
혜현.
- P15

안은영은 아까의 한문 선생을 보호하고 있던 거대한 에너지 장막에 감탄하고 있었다. 보건실에만 박혀 있다 보니, 가까운 데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누군가 그 신생님을 매우 사랑했던 사람이, 죽어서도 강력한 의지를 남긴 게 틀림없었다.
그런 보호를 받고 있는데 왜 다리를 다쳤지? 희한한 일이다.
친해지기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만약 사태가 심각해지면 도움을 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거의 걸어 다니는 행운의 부적이나 다름없었다. 탐났다.  - P27

우연히 들었다. 윗집 아줌마가 미끄럼틀에서 떨어져 죽은아이 얘기를 하며 겁을 줄 때 그게 정현이란 걸 알았다. 그걸 알았을 때는 이미 학교에 들어간 참이었고, 가족들과 친구들이 세계의 단단한 부분을 밟고 살아간다면 자신은 발이 빠지는 가장자리를 걸어야 함을 슬슬 깨달아 가던 중이었다. 그리하여 완전히 아이처럼 보였던 정현이 점점 젤리처럼 보였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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