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표와 달리 은영은 매켄지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영은 쉽게 다른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어서는 아니고 싫어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들기 때문에 그럴 여력이 없어서다. 그런데도 매켄지는 어쩐지 거슬렸다. 매켄지는 자주 보건실 창문 앞을 지나다녔다. 처음에는 치기 어린 걸음걸이, 어슬렁어슬렁하며 몸을 과하게 기울이는 모양새가 탐탁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라 에로에로 에너지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게 문제였다. "말도 안 돼, 저건 가짜야." - P101
"다시 보면 쓸 거야." 은영이 슬쩍 허리 쪽으로 손을 두며 말했다. 그러자 매켄지가 지금껏 숨겨 왔던 에로에로 에니지를 한 번에 꽉 뿜었다. 너무 가까이 서 있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기분 나쁜 손들이 한꺼번에 마구 더듬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은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 P125
그리고 그걸 보고 만화 동아리 애가 만화 축제에 다녀왔냐고 말을 걸었다. 아니라고, 강선이 그린 거라고 하자 다들 놀랐다. 만화 동아리 애들이 보글보글 몰려들었고 어느새 강선과 은영은 그 무리에 낄 수 있게 되었다. 강선은 그림을 잘 그려서, 은영은 심령 소녀라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학교에서 두 사람을 가장 개의치 않아 하는 무리였다. 하긴 그렇게 폭 넓고 놀라운 이야기들에 푹 젖어 사는 아이들이었으니, 쉽게 편견에 사로잡힐 리 없었다. - P189
"장르를 잘못 택했단 말야. 칙칙한 호러물이 아니라 마구 달리는 소년 만화여야 했다고, 그랬으면 애들이 싫어하지 않았을 거야. 그 꼴로 다치지도 않았을 거고." "만화가 아니야." "그렇게 다르지 않아. 그래서 내가 한번 그려 봤지." 강선이 스케치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엔 교복을 입은 은영이 5등신 정도 되는 비율로, 치마는 좀 짧아진 채 그려져 있었다. 5등신이 기분 나쁜지 멋대로 치마를 잘라 먹은 게 기분나쁜지 얼떨떨했다. 그 그림 속 은영의 한 손에는 무지개 깔때기 칼이, 다른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은영이 뭐라 반응하기 전에 강선이 의자에 걸려 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정말로깔때기 칼과 비비탄 총을 꺼냈다. 낡고 흠집이 있는 게 분명강선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물건인 것 같았다. "도구를 쓰라고, 멍청아." "아." "다치지 말고 경쾌하게 가란 말이야." "하." "코믹 섹시 발랄? 아무래도 섹시는 무리겠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강선이 은영의 납작한 가슴(그리고 그 이후로 딱히 발육이 좋아지지 않았으므로 강선의 예언이 맞기도 했다.)을 삐딱하게 쳐다보았으므로 은영은 기운을 차리고 지우개를 던졌다. 캐릭터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르를 바꿀 수 있을 것같았다. 지우개가 명중하는 순간 은영은 예감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은영은 사실 강선의 설정인 셈이었다. - P192
은영은 이민 간 친척들을 떠올리며 속이 상했다. 내가 너를 싫어하는 것은 네가 계속 나쁜 선택을 하기 때문이지 네가 속한 그 어떤 집단 때문도 아니야. 이 경멸은 아주 개별적인 경멸이야. 바깥으로 번지지 않고 콕 집어 너를 타깃으로하는 그런 넌더리야. 수백만 해외 동포는 다정하게 생각하지만 너는 딱 싫어. 그 어떤 오해도 다른 맥락도 끼어들 필요 없이 누군가를 해치는 너의 행동 때문에 네가 싫어. 은영이 바늘 끝처럼 마음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미워하는 마음에는 늘 죄책감과 자기 검열이 따르지만 매켄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매켄지를 미워하는 데에는 명쾌하고 시원한 부분까지 있었다. - P216
"있잖아, 다음 선거에는 너희들한테도 선거권이 있어." 대흥의 설명을,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끄트머리에 그렇게 덧붙여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이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 뒤에 오는 이들은 언제나 더 똑똑해. 이 아이들이라면 우리보다 훨씬 나을 거야. 그러니까 그 바보 같은 교과서를 막길 잘했어. 가끔 수업을 하다가 교과서의 사진들에 눈이 머물 때가 있었다. 아는 얼굴들인 것만 같았다. 꿈속에서 몇 번이나 마주친 얼굴인 것만……. 누군가를 알아보기에는 사진도 꿈도 너무 희미했다. 그렇게 대흥의 눈이 갈색 얼굴들에 머무는 동안에도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 P239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인표가 은영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크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인표가 아니라 은영 스스로가 말한 것 같기도 했다. 거짓말이어서,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 P271
정말로 빛이 나는 건 아닐 텐데 잠든 은영의 손을 잡아주거나 가볍게 안아 주면 은은하게 발광했다. 인표는 그 사실을 은영에게 말하진 않았다. 그저 충전이 잘된 날, 완전히 차오른 은영의 얼굴을 바라보다 잠드는 게 좋았다. 그 빛나는얼굴이 인표의 수면등이었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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