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미술 작품은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자연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한 아르누보 작가들에게 자연의 형태는 상징적인 것으로, 비의적인 종교적 의미를 띨 수도 있었다. - P163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행해진 게르만화 정책으로 체코 땅에서는 체코의 말과 글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체코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칠 수 있는 민간 학교를 짓기 위해 복권을 발행하게 되는데 이 복권의 홍보를 위한 포스터 <위협〉, 〈브르노 남서 모라비아를 위한 국민 연합 복권>에서 무하는 일체의 장식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더욱 대담하고 박진감 넘치는 연출을 구사하고 있다. 암흑과 절망 속에서 얼굴을 그러쥐고 흐느끼는소녀 뒤에서 조국을 상징하는 어머니는 닥쳐올 위협 앞에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그리고 책과 연필을 움켜쥐고 다부진 표정으로 우리를 응시하는 작은 슬라브 소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약하지 않아. 그러니 제발 나에게 배울 기회를 주세요." 무하는 이러한 포스터들을 무상으로 제작해주었다. 포스터뿐만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했을 때 국가의 국장, 우표, 지폐, 공공 기관의 제복까지 무상으로 디자인했다. - P243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던 1918년 무하는 11편의 <슬라브 서사시>를 완성하고, 이듬해 프라하의 클레멘티눔에서 전시를 했다. 1921년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무하의 다른 작품들과 5점의 〈슬라브 서사시>가 전시되었을 때 이 전시는 6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전시회에 다녀간 사람들은체코가 겪고 있는 고통을, 슬라브인의 역사에 대해 처음으로, 혹은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예술가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무하라는 한 사람의 예술가에 의해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나라와 민족, 그들이 겪고 있는 사건에대해 함께 고민하고 함께 아파할 수 있게 되었다. 1926년 무하는 드디어 20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대서사시를완성하였다. 후원자와 사랑하는 가족들의 지지 속에 강한 의지와성실함으로 거의 20년에 걸친 필생의 작업을 마친 무하는 이렇게이야기했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모든 국민의 발전이 성공리에 끝나는 것은 그것이 국민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유기적으로 계속 성장했을 때뿐이다. 또 이 계속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과거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 - P262
무하는 커다란 포용력으로 상징주의, 신비주의, 강령술, 최면술의 이론과 당시 파리 예술계의 역동성, 공업과 상업에 의해 대두한예술상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흡수해갔다. 그리고 그에게 핵심이되는 종교적인 가치관은 조국 체코에 대한 애국심과 슬라브의 민족적 전통, 극장과 운명에 대한 그의 선천적 감각과 융합되어 이전에 없었던 실로 새로운 예술 형식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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