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2월, 알코올 중독으로 이미 만신창이가 된 고흐는 남프랑스 아를로 향합니다. 그는 왜 미술 시장도 없고 친구도 없던 곳으로 간 걸까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색‘ 때문입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로말합니다.
"예전에는 이런 행운을 누려본 적이 없다.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랗고 태양은 유황빛으로 반짝인다.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푸른색과노란색의 조합은 얼마나 부드럽고 매혹적인지."
- P83

이미 삶과 육체 모두 극단까지 끌고 간 반 고흐 그는 색이 이끄는 예술의 극단을 향해 브레이크 없이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압생트 산지인 아를에서 말이죠.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까요? 여하튼 색의 최고음을 화폭에 담아내려는 반 고흐의 대역 없는 액션은 우리가 기억하는 불멸의 명작을 쏟아내기에 이릅니다. 노란 집〉과 〈아를의 밤의 카페입니다. 뭔가이상해 보이지 않나요? 정물도, 풍경도, 카페도, 심지어 자신의 집까지은 통 샛노랗습니다. 그가 아를에서 남긴 그림에는 노란색이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이것은 노란색에 대한 몰입이었을까요? 강박이었을까요?
녹색 요정은 어김없이 아를에서도 반 고흐와 함께였습니다. 마시고 또 마셨죠. 녹색 요정이 산토닌(Santonin)을 품고 있던 것을 모른 채, 반고흐는 산토닌에 중독되고 맙니다. 산토닌은 압생트 주원료인 향쑥의주요 성분으로 과다복용 시 부작용이 있습니다. 바로 황시증입니다. 세상이 노랗게 보이는 거죠. 고흐 또한 모든 대상을 노랗게 보게 됩니다.
노란색이 아닌 것도 노랗게 보이고, 노란색은 더욱 샛노랗게 보이는 운명에 처합니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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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오늘, 죽음에 대해 생각해봤나요? 아니, 지난 일주일간 죽음이무엇인지 느껴본 적 있나요? 보통 사람들은 일상에서 죽음을 잘 의식하지 않죠. 그런데 뭉크는 평생 죽음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것도 매일매일, 그 슬프고 절망적인 것을 매일 생각하며 살았다니 솔직히 안타깝기도 합니다. 평생 죽음을 의식했던 뭉크는 예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은 믿지않는다. 모든 미술과 문학, 음악은 심장의 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이다.
- P13

 찢어질 듯한 고통을 치유하고자 그림에 자신의 고통을 뜯어 붙이고 있는 아내를 보며 남편 디에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프리다는 기존의 어떤 예술사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개성 넘치는 걸작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진실을 직시하고, 잔인한 현실을 받아들이며,
고통을 감내하는 프리다의 힘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들이었다."
- P43

그녀는 루브르가 선택한 최초의 중남미 여성 화가로 기록되죠. 프리다.
가 세계적 예술가의 반열에 오르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불후의명작 <두 명의 프리다>를 그립니다.
심장이 혈관으로 연결되어 있는 두 명의 프리다가 앉아 있습니다. 멕시코 전통의상을 입은 우측 프리다의 손에는 디에고의 사진이 담긴 메달이 쥐어져 있습니다. 이 사진 역시 혈관을 통해 심장과 연결되어 있군요. 유럽풍 드레스를 입은 좌측 프리다는 가위로 심장으로 이어진 혈관의 끝을 잘라버렸습니다. 그림에서 프리다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멕시코에 있던 과거의 프리다는 디에고를 심장처럼 쥐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적 예술가이자 독립적 여성으로 거듭난 유럽의 프리다는 디에고를 잘라버리겠다. 혈관을 자르는 고통이 따르더라도….…!"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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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해받고 싶은 사람, 그러나 당신의 맨얼굴을 보고는 뒷걸음치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그러나 그사랑이 ‘나는‘으로 시작되는 사람이 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래도 나는‘ 이라고 말한 뒤 주저앉는 사람, 나는 한번 더 나는 이라고 말한 뒤 주저앉는 사람, 그러나 나는 멈출 수 없는 사람,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어떤사람인지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처음부터 다시 말하는사람이다. 하여, 우리는 흐르는 물에 손을 베이지 않고도 칼을 씻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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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미술 작품은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자연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한 아르누보 작가들에게 자연의 형태는 상징적인 것으로,
비의적인 종교적 의미를 띨 수도 있었다.
- P163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행해진 게르만화 정책으로 체코 땅에서는 체코의 말과 글을 가르치는 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체코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칠 수 있는 민간 학교를 짓기 위해 복권을 발행하게 되는데 이 복권의 홍보를 위한 포스터 <위협〉,
〈브르노 남서 모라비아를 위한 국민 연합 복권>에서 무하는 일체의 장식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더욱 대담하고 박진감 넘치는 연출을 구사하고 있다. 암흑과 절망 속에서 얼굴을 그러쥐고 흐느끼는소녀 뒤에서 조국을 상징하는 어머니는 닥쳐올 위협 앞에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그리고 책과 연필을 움켜쥐고 다부진 표정으로 우리를 응시하는 작은 슬라브 소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약하지 않아. 그러니 제발 나에게 배울 기회를 주세요."
무하는 이러한 포스터들을 무상으로 제작해주었다. 포스터뿐만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했을 때 국가의 국장, 우표, 지폐, 공공 기관의 제복까지 무상으로 디자인했다.
- P243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던 1918년 무하는 11편의 <슬라브 서사시>를 완성하고, 이듬해 프라하의 클레멘티눔에서 전시를 했다. 1921년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무하의 다른 작품들과 5점의 〈슬라브 서사시>가 전시되었을 때 이 전시는 6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전시회에 다녀간 사람들은체코가 겪고 있는 고통을, 슬라브인의 역사에 대해 처음으로, 혹은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예술가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무하라는 한 사람의 예술가에 의해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나라와 민족, 그들이 겪고 있는 사건에대해 함께 고민하고 함께 아파할 수 있게 되었다.
1926년 무하는 드디어 20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대서사시를완성하였다. 후원자와 사랑하는 가족들의 지지 속에 강한 의지와성실함으로 거의 20년에 걸친 필생의 작업을 마친 무하는 이렇게이야기했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모든 국민의 발전이 성공리에 끝나는 것은 그것이 국민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유기적으로 계속 성장했을 때뿐이다. 또 이 계속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과거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 - P262

무하는 커다란 포용력으로 상징주의, 신비주의, 강령술, 최면술의 이론과 당시 파리 예술계의 역동성, 공업과 상업에 의해 대두한예술상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흡수해갔다. 그리고 그에게 핵심이되는 종교적인 가치관은 조국 체코에 대한 애국심과 슬라브의 민족적 전통, 극장과 운명에 대한 그의 선천적 감각과 융합되어 이전에 없었던 실로 새로운 예술 형식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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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한 거야?"
순간 창밖 가로등이 잠시 깜빡하고 꺼졌다, 켜졌다. 오래전에도 그랬지만 그것은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가로등이 깜빡이는 순간이 세계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뜨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지구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들이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다고, 전신마비환자가 눈꺼풀로 쳐주는 박수처럼 가로등은 형에게 윙크했다.
그때 나는 가로등이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눈감아주기 위해 저기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적이란, 바로 그 눈감아주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일지 모른다고, 문득 나는, 언젠가 사촌형과 함께 음악을 들었던 날도 라디오가 제대로 작동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은, 그걸 언제 다 고쳐놓았던 것일까?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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