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누님이 갓 시집가서 새벽에 단장하던 일이 어제런 듯하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다. 버릇없이 드러누워 말처럼 뒹굴면서, 신랑의 말투를 흉내내어 더듬거리며 정중하게 말을 했더니, 누님이 그만 수줍어서 빗을 떨어뜨려 내 이마를 건드렸다. 나는 성이 나서 울며 먹물을 분가루에 섞고 기울에 침을 뱉어 댔다. 그러자 누님은 내게 옥압玉鴨과 금봉金蜂을 꺼내 주며 울음을 그치도록 달래셨다. 그때로부터 지금 스물여덟해가 되었구나!
강가에 말을 멈춰 세우고 멀리 바라보았다. 붉은 명정이 휘날리고 돛그림자가 너울거리다가, 배가 기슭을 돌아가고 나무에 가리게 되자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강가의 먼 산들은 검푸르러 누님의 쪽 찐 머리 같고, 강물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고운 눈썹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누님이 빗을 떨어뜨렸던 일을 생각하였다. 유독 어렸을 적 일은 역력할 뿐더러 즐거움도 많았고 세월도 더디더니, 중년에 들어서는 노상 우환에 시달리고 가난을 걱정하다가 꿈속처럼 훌쩍 지나갔구나. 남매가 되어 지냈던 날들은 또 어찌 그리도 빨리 지나갔던고!
- P379

아아! 가난한 선비의 아내를 옛사람들은 약소국의 대부大夫에 견주었다. 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지탱하려 하나 언제 망할지 모르는 지경인데도 능히 제 힘만으로 외교사령外交辭令을 잘하고 나라의 체모를 갖추었던 약소국의 대부처럼, 공인은 가난한 선비의 아내로서 보잘것없는 제물이나마 결코 제사를 거르지 않았으며, 넉넉지 못한 부엌살림이나마잔치를 너끈히 치러 내시었다. 그러니 어찌 이른바 ‘몸이 닳도록 힘을다하여 죽어서야 그만 둔 분이 아니겠는가?
- P381

전에 공인을 마주대하고 이렇게 말씀드린 적이 있다.
"우리 형님이 이제 늙으셨으니 당연히 이 아우와 함께 은거하셔야 합니다. 담장에는 빙 둘러 뽕나무 천 그루를 심고, 집 뒤에는 밤나무 천 그루를 심고, 문 앞에는 배나무 천 그루를 접붙이고, 시내의 위아래로는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 천 그루를 심을 겁니다. 세 이랑 되는 연못에는 한말의 치어稚魚를 뿌리고, 바위 비탈에는 벌통 백 개를 놓고, 울타리 사이에는 세 마리의 소를 매어 놓을 거구요. 아내는 길쌈을 할 겁니다. 형수님은 그저 여종을 시켜 들기름을 짜도록 재촉해서, 밤에 이 시동생이 등잔불을 켜고 옛사람의 글을 읽도록 도와만 주십시오."
공인은 그때 비록 병이 심했으나,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는 머리를 손으로 떠받치고 한 번 웃으면서,
"그건 바로 나의 오랜 뜻이었소!"
하고 감사해 하셨다.
- P382

죽은 사람이 죽음의 슬픔을 모르는 사실이 슬퍼할 만한 것과, 죽은 사람이 자신의 죽음이 슬퍼할 만함을 모른다는 사실을 산 사람이 아는 것이 슬퍼할 만한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슬플까?
••••••
아아, 슬프다! 아무리 그래도 산 사람은 제 슬픔에 스스로 슬퍼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 슬퍼하는지 슬퍼하지 않는지는 알지 못하는 법이다. 그렇다면 평소에 나처럼 그를 아끼던 사람이 어찌 애사를 지어, 한편으로는 산 사람의 슬픔을 위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은 사람이 자신의 슬픔을 슬퍼하지 못함을 애도하지 않겠는가.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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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로 말하면, 당초의 제 예감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답니다. 도련님이 벌판에서 말을 타거나 산책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고 매우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아서 실제로 건강이 회복되었음에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린튼 도련님이 그렇게 열의를 가진 것처럼 보였던 것이 히스클리프 씨의 음모였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설마 죽어가는 자식을 그처럼 잔인하고 사악하게 대하는 아버지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요. 히스클리프 씨는 그의 욕심 많고 냉혹한 계획이 린튼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허사가 될 것 같은 위협을 느껴 더욱 다급히 서둘렀던 모양이에요.
- P429

" 이제 삼촌이 정말 돌아가시게 됐대, 아이 좋아, 삼촌이 돌아가시고 나면 내가 그 집의 주인이 될 테니까 말이야. 캐서린은 언제나 그게 제 집이라고 말했거든. 그건 자기 집이 아니지!
내 집이라고, 아빠가 그러시는데 캐서린의 것은 모두 다 내 것이래. 그 재미있는 책들도 모두 내 것이지. 캐서린은 내가 만약 우리 방 열쇠를 가지고 와서 자기를 내보내 주기만 하면, 그 재미있는 책들이며 예쁜 새, 조랑말 미니도 다 내게 준다는 거야. 하지만 난 그것들은 모두가 내 것이니까 네가 나한테 줄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 줬어.
그랬더니 캐서린은 울면서 목걸이에서 조그만 그림을 꺼내더니 그걸 나더러 가지라는 거야. 금으로 만든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두 개의 사진인데 한쪽에는 자기 엄마의 사진이 있고, 다른 쪽에 삼촌 사진이 있는데 두 분 다 젊었을 때 찍은 거였어. 그게 어저께였어. 난 그것들도 내 것이라고 말하고 캐서린에게서 뺏으려고 했지. 그 망할 것이안 주려고 나를 떠밀어서 아프게 했어. 난 소리를 질렀어.
캐서린은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지. 아빠가 올라오시는 소리가 들리자, 캐서린은 케이스의 한쪽을 떼더니 둘로 나누어 엄마의 초상이 들어 있는 쪽을 내게 주고 다른 쪽은감추려고 했어. 그런데 아빠가 왜 그러느냐고 묻기에 내가설명을 했지. 아빠는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고, 캐서린에게 제 것을 내게 주라고 말하니까 안 된다지 뭐야. 그래서 아빠가 캐서린을 때려 넘어뜨리고 그 케이스를 줄에서 비틀어 떼어 발로 짓밟아버렸어."
- P466

"다행히 저는 성격이 좋으니 그의 나쁜 점을 용서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가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도 그를 사랑해요. 히스클리프 씨, 당신은 아무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아무리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아저씨의 그 잔인한 성격은 아저씨가 우리보다 훨씬 비참하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풀려요. 아저씨는 비참해요, 그렇지 않아요? 악마같이 외롭고 시기심이 많은 거죠. 아무도 아저씨를 사랑하지 않아요. 아저씨가 죽어도 아무도 울어주지 않을 거예요! 저는 아저씨처럼 되진 않을 거예요!"
캐서린 아가씨는 일종의 서글픈 승리감을 맛보며 말했지요. 아가씨는 앞으로 가족이 될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원수의 슬픔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듯이 보였답니다.
- P478

"나는 연장 창고에서 삽을 꺼내다가 힘껏 파기 시작했어.
살 끝이 관 모서리에 닿는 소리가 나더군. 그러자 엎드려서 손으로 후볐지. 관 뚜껑의 못 박은 자리가 벌어지고 내가 목적하던 바가 거의 이루어질 참인데, 그때 바로 묘 가장자리에서 내 머리 위로 몸을 구부리며 누군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 ‘내 이 뚜껑을 열 수만 있다.
면 나를 함께 묻고 흙을 덮어주면 좋으련만!‘ 하고 나는 중얼거렸어. 그리고 나는 더욱더 미친 듯이 뚜껑을 잡아떼려고 했지, 바로 내 귓전에서 다시 한숨 소리가 들리더군.
진눈깨비를 몰고 오는 바람을 물리치는 따뜻한 숨결 같은느낌이었어. 피가 통하는 산 인간이 옆에 없다는 건 알고있었지. 그러나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면 눈으로 분간은 못 할망정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난 확실히 캐시가 거기 땅속이 아니라 땅 위에 있는 걸 느꼈어.
갑자기 안도감이 심장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지더군, 난 고뇌에 찬 일을 그만두고 당장 마음이 놓여 돌아보았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이 위안이 되었지. 그녀의 모습이 내옆에 있었단 말이야. 내가 파낸 묘를 다시 메우는 동안 그대로 거기 있다가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어." - P481

"초라한 종말이군그래." 그는 방금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나의 그 맹렬한 노력이 이렇게 끝장난단 말인가? 두 집을 부숴버리려고 지렛대며 곡괭이를 장만해 놓고 헤라클레스와 같이 괴력을 낼 수 있도록 나 자신을 훈련했건만, 막상만반의 준비가 되고 내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자어느 쪽 집에서도 기와 한 장 들어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으니! 나의 숙적들은 나를 넘어뜨리지는 못했어. 이제야말로 바로 그들의 후손에게 복수를 할 때지. 내 힘으로 할수 있지. 그리고 아무도 막지 못해. 하지만 그래서 무슨소용이 있겠어? 난 사람을 때리고 싶지 않아.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귀찮아졌단 말이야! 이렇게 말하니 마치 오직 아량의 미덕을 보이기 위해서 이제까지 애를 써온 것처럼들리는데, 그와는 거리가 먼 얘기지. 난 그들의 파멸을 즐길 만한 힘도 없어졌고 쓸데없이 남을 파멸시킬 생각도 없어졌단 말이야.
- P538

내겐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있고, 내물과 능력이 그것을 성취하기를 열망하고 있어.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얼마나 꿋꿋하게 그 소원의 성취를 열망했던지 나는 그것이 꼭 성취되리라고 믿고 있지. 그것도 얼마 있지 않아서 말이야. 그것을 위해 내 생애를 바쳐왔기 때문이지. 나는 소원이 성취되리라는 기대 속에 갇혀버린거야.
내가 고백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이 고백이 내 성격의 설명할 수 없는 면에 대한 설명은 될 거야. 아, 젠장! 오랜 싸움이었지. 이제 끝장이 났으면 좋겠어" - P541

무덤을 찾아보았더니, 벌판에서 가까운 언덕배기 위로 비석 세 개가 이내 눈에 띄었다. 가운데 것은 회색이었고 히스에 반쯤 묻혀 있었다. 에드거 린튼의 것만 비석 밑의 잔디와 이끼 때문에 어울려 보였다. 히스클리프 것은 여전히 벌거벗고 있었다.
나는 포근한 하늘 아래 그 비석들 둘레를 어슬렁거렸다.
히스와 초롱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방들을 지켜보고, 풀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저렇게 조용한 땅속에 잠든 사람들을 보고 어느 누가 편히 쉬지 못하리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 P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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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두 산 사이에서 쏟아져 나와, 바윗돌과 부딪치며 거세게 다툰다.
그 화들짝 놀란 듯한 파도, 분노를 일으킨 듯한 물결, 슬피 원망하는 듯한 여울물은 내달아 부딪치고 휘말려 곤두박질치며 울부짖고 고함치는듯하여, 항상 만리장성을 쳐부술 듯한 기세를 지니고 있다. 전거戰(전투용 수레) 만 채, 전기 (기마병) 만 대隊(대열隊列), 전포戰砲 만 문, 전고戰鼓 만개로도, 무너져 내려앉고 터져 나오며 짓누르는 저 강물의 소리를 비유하기에 부족하다.
백사장에는 거대한 바윗돌이 우뚝하게 늘어서 있고, 강둑에는 버드나무들이 어두컴컴하여 형체를 분간하기 힘들다. 흡사 물귀신들이 다투어나와 잘난 체 뽐내는 듯하고, 좌우에서 이무기들이 사람을 낚아채려고 애쓰는 듯하다. - P282

강물을 건널 적에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보길래, 나는 그 사람들이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향해 속으로 기도를 드리나 보다 하였다. 그런데 한참 있다가 안 사실이지만, 강을 건너는 사람이 물을 살펴보면 물이 소용돌이치고 용솟음치니, 몸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듯하고 눈길은 물살을 따라 흘러가는 듯하여, 곧 어지럼증이 나서 물에빠지게 된다. 그러니 저 사람들이 고개를 쳐든 것은 하늘에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요, 물을 외면하고 보지 않으려는 짓일 뿐이었다. 또한 잠깐 재에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판인데 어느 겨를에 속으로 목숨을 빌었겠는가.
이와 같이 위태로운데도, 강물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요동 벌판이 평평하고 드넓기 때문에 강물이 거세게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다" 라고 모두들 말하였다. 그러나 이는 강에 대해 잘 모르고 한 말이다. 요하가 소리를 내지 않은 적이 없건만, 단지 밤중에 건너지 않아서 그랬을 뿐이다. 낮에는 물을 살펴볼 수 있는 까닭에 눈이 오로지 위태로운 데로 쏠리어, 한창 벌벌 떨면서 두 눈이 있음을 도리어 우환으로 여기는 터에,
또 어디서 소리가 들렸겠는가? 그런데 지금 나는 밤중에 강을 건너기에눈으로 위태로움을 살펴보지 못하니, 위태로움이 오로지 듣는 데로 쏠리어 귀로 인해 한창 벌벌 떨면서 걱정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마침내 이제 도道를 깨달았도다! 마음을 차분히 다스린 사람에게는 귀와 눈이 누를 끼치지 못하지만, 제 귀와 눈만 믿는 사람에게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할수록 병폐가 되는 법이다.
- P284

소리와 빛깔은 나의 외부에 있는 사물이다. 이러한 외부의 사물이 항상 귀와 눈에 누를 끼쳐서, 사람이 올바르게 보고 듣는 것을 이와 같이 그르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강을 건너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할 뿐 아니라, 보고 듣는 것이 수시로 병폐가 됨에랴! 나는 장차 나의 산중으로 돌아가 대문 앞 계곡의 물소리를 다시 들으며 이와 같은 깨달음을 검증하고, 아울러 처신에 능란하여 제 귀와 눈의 총명함만 믿는 사람들에게도 경고하련다.
- P286

문득 보니 발(廉) 곁에서 제비가 지저귀는데, 이른바 ‘회여지지 지지위지지‘ 회汝知之 知之爲知之라 하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
회여지지 지지위지지 회汝知之 知之爲知之 :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가 자로子路에게 말하기를
"너에게 아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니라"(회汝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하였는데, 원문의 음이 제비의 지저귀는 소리와 비슷하다 하여 제비의 울음소리를 묘사할 때 흔히 쓰인다.
*가르칠 회 - P330

하지만 지기를 잃은 쓰라림으로 말하자면 그렇지가 않네. 내가 다행히 눈을 지녔지만 누구와 더불어 나의 보는 것을 같이하겠는가? 내가 다행히 귀를 지녔지만 누구와 더불어 나의 듣는 것을 같이하겠는가? 내가 다행히 입을 지녔지만 누구와 더불어 나의 맛을 함께하겠는가? 내가 다행히 코를 지녔지만 누구와 더불어 나의 향내 맡음을 같이하겠는가? 내가 다행히 마음을 지녔지만 장차 누구와 더불어 나의 지혜와 깨달음을같이 하겠는가?
-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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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곧 네 이름이긴 하지만, 너의 몸에 속한 것이 아니라 남의 입에달려 있는 것이다. 남이 부르기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되고, 영광스럽게도 치욕스럽게도 되며, 귀하게도 천하게도 되니, 그로 인해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마구 생겨나는 것이다.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유혹을 받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공포에 떨기까지 한다. 이빨과 입술은 네 몸에 붙어 있는 것이지만,
씹고 뱉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는 셈이니, 네 몸에 언제쯤 내 이름이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저 바람 소리에 비유해 보자. 바람은 본시 공허한 것인데, 나무에 부딪쳐 소리를 내고, 도리어 나무를 흔들어 댄다. 너는 일어나 나무를 살펴보아라. 나무가 가만히 있을 때 바람이 어디에 있더냐? 너의 몸에는 본시 이름이 없었으나 몸이 생겨남에 따라 이름이 생겨서, 네 몸을 칭칭 감고 너를 겁박하며 억류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 P226

매탕梅宕(이덕무)이 전에 처마 사이에서 왕거미가 거미줄 치는 모습을 보고는, 기뻐하며 나에게 말하기를,
"절묘하더군요! 때로 머뭇거리는 모습은 마치 무슨 생각이 있는 듯하고, 때로 재빨리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듯하며, 파종한 보리를 발로 밟아주는 것 같기도 하고, 거문고 줄을 손가락으로 누르는것 같기도 합디다."
하더니, 지금 담헌이 풍무와 어우러져 연주하는 것을 보고서 나는 왕거미의 행동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 P230

"무릇 물고기가 물속에서 놀지만 눈에 물이 보이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보이는 것이 모두 물이라서 물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 그런데 지금 낙서 자네의 책이 마룻대까지 가득하고 시렁에도 꽉 차서 앞뒤 좌우가 책 아닌 것이 없으니, 물고기가 물에 노는 거나 마찬가지일세. 
아무리 동생 董生에게서 학문에 전념하는 자세를 본받고 장군張君에게서 기억력을 빌리고 동방삭東方制에게서 암송하는 능력을 빌린다해도, 장차 스스로 깨달을 수는 없을 터이니 그래서야 되겠는가?"
그러자 낙서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렇다면 장차 어찌 해야겠습니까?"
"자네는 물건 찾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가? 앞을 바라보면 뒤를 놓치고, 왼편을 돌아보면 바른편을 빠뜨리게 되지. 왜냐하면 방 한가운데 앉아 있어 제 몸과 물건이 서로 가리고, 제 눈과 공간이 너무 가까운 탓일세. 차라리 제 몸을 방 밖에 두고 들창에 구멍을 내서 엿보는 것이 낫지.
그렇게 하면 오로지 한쪽 눈만으로도 온 방 물건을 다 취해 볼 수 있다네"
- P238

그때 나는 과연 밥을 못 먹은 지 사흘이나 되었다. 행랑아범이 남의 집지붕을 이어주고 품삯을 받아, 그날 밤에야 비로소 밥을 지었다. 그런데어린아이가 밥투정을 부려 울면서 안 먹겠다고 하자, 행랑아범은 성이나서 사발을 엎어 개에게 주어 버리고는 아이에게 뒤져 버리라고 악담을 하였다.
이때 나는 겨우 밥을 얻어먹고 식곤증이 나서 누웠던 참이었다. 행랑아범에게 장괴애가 촉蜀 지방을 다스릴 적에 어린아이를 베어 죽인 고사를 비유로 들어 타이르고 나서, 또 말하기를,
"평소에 가르치지 않고서 도리어 꾸짖기만 하면, 커 갈수록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상하게 되는 법일세."
하였다. 그러면서 하늘을 쳐다보았더니, 은하수가 지붕 위에 드리웠고 별똥별은 서쪽으로 흐르며 흰 빛줄기를 공중에 남겼다.
- P246

들려오는 맹꽁이 울음소리는 눈 어둡고 귀먹은 원님 앞에 난민亂民들이 몰려와서 소송을 벌이는 듯했다. 매미 울음소리는 일과를 엄히 지키는 서당에서 시험일에 닥쳐 소리 내어 글을 외우는 듯했다. 닭 울음소리는 한 선비가 홀로 나서서 바른말 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삼는 듯했다.
- P271

"통곡하기에 좋은 장소로다! 통곡할 만하구나!"
그러자 정 진사가 묻기를,
"이처럼 하늘과 땅 사이에 시야가 탁 트인 드넓은 곳을 만났는데, 갑자기 또 통곡을 생각하다니 왜 그러시오?"
하기에, 내가 말하였다.
"그렇기도 하오만, 꼭 그렇지만은 않소. 자고로 영웅은 울기를 잘하고미인은 눈물이 많은 법이오. 하지만 그들의 울음은 두어 줄기의 소리 없는 눈물이 옷깃 앞에 굴러 떨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들의 울음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했다는 말은듣지 못했소,
사람들은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情) 중에 오직 슬픔(哀)만이 통곡을유발하는 줄 알고, 일곱 가지 감정이 모두 통곡할 만한 줄은 모르오. 기쁨(喜)이 극에 달하면 통곡할 만하고, 노여움(怒)이 극에 달하면 통곡할 만하고, 즐거움(樂)이 극에 달하면 통곡할 만하고, 사랑(愛)이 극에 달하면통곡할 만하고, 미움(惡)이 극에 달하면 통곡할 만하고, 욕심(欲)이 극에 달하면 통곡할 만하다오.
그리고 억눌린 감정을 시원스레 풀어버리는 것은 울음소리보다 더 빠른 게 없으니, 통곡이란 천지에 있어서 격렬한 천둥에 비길 만하오. 극에달한 감정에서 우러나오고, 우러나온 것이 사리에 들어맞기만 하다면,
통곡이라 해서 웃음과 무엇이 다르리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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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나가자, 그는 제게 말을 잇는 것이었어요.
"내 아들은 장차 당신이 사는 곳의 주인이 될 텐데, 이 아이가 후계자라는 확신이 설 때까지는 죽게 하고 싶지 않단말이야. 더욱이 이 애는 내 자식이니까 내 후손이 당당하게 그 집 재산의 주인 노릇을 하고, 내 아들이 그 집 애들에게 품삯을 주어 그들 조상의 땅을 갈게 하는 것을 보는 쾌감을 맛보고 싶단 말이야. 내가 이런 녀석을 참고 받아들이는 것도 오직 그런 생각이 있기 때문이지. 난 이 녀석 자체도 싫지만 이 녀석이 기억을 되살려 주기 때문에 더싫어. 그러나 아까 말한 그런 요량이 있으니까 문제없어.
저 녀석은 나한테 맡겨도 아무 탈 없을 거야. 당신네 주인이 제 자식 보살피는 것 못지않게 나도 이 애에게 잘해 줄테니까. 저 녀석한테 주려고 위층에 방을 잘 꾸며 놓았지.
저 녀석이 배우고 싶은 것을 가르쳐줄 가정교사도 2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한 주일에 세 번씩 오도록 약속해 두었고, 헤어튼에게도 저 애의 말에 순종하라고 일러놓았어.
사실 나는 저 녀석을 주위 사람들과는 달리 저 자신의 우수한 점과 신사적인 면을 유지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았지, 그런데 애쓴 보람이 거의 없게 생겼으니 몹시 섭섭하군 내가 이 세상에서 바라는 복이 있었다면 그것은 저 녀석이 자랑할 만한 자식이 되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는데, 저렇게 허여멀건 얼굴에 울보라니 몹시 실망이야!"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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