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은 어린 시절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참으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더구나. 내가 무심히 물었다.
"아, 그렇게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시고……."
그러자 박 시장님이 정색을 하며 말을 정정하셨어.
"공지영 작가님, 잠깐만요. 저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했지 불행하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직도 어린 시절의 집을 생각하면 가난한 중에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아끼며 서로 나누고 사랑받았던 기억이 제게는 충만합니다."
엄마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토록 부끄러웠던 적이 또 있었나 싶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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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 있잖아. 별것도 아닌 말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하는 날,
그 때문에 실은 하루 종일 우울한 날, 갑자기 모든 가능성의 문이 닫히고 영원히 세상의 불빛 밖으로 쫓겨난 것 같은 날, 열심히 노력하면 어찌어찌 손에 잡힐 것 같은 소망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누군가가 네 귀에 이런 말을 속삭이지……. "너무 애쓰지 마, 넌 안 돼.
그건 처음부터 너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거야,
넌 아니구." 뭐 그런 날. - P11

위녕, 산다는 것도 그래. 걷는 것과 같아. 그냥 걸으면 돼. 그냥지금 이 순간을 살면 돼. 그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그 순간을 가장의미 있게, 그 순간을 가장 어여쁘고 가장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만들면 돼. 평생을 의미 있고 어여쁘고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 수는 없어. 그러나 10분은 의미 있고 어여쁘고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 수 있다. 그래, 그 10분들이 바로 히말라야 산을 오르는 첫 번째 걸음이고 그것이 수억 개 모인 게 인생이야. 그러니 그냥 그렇게 지금을 살면 되는 것.
- P27

명심해라, 이제 너도 어른이라는 것을, 어른이라는 것은 바로 어린 시절그토록 부모에게 받고자 했던 그것을 스스로에게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이 애정이든 배려든 혹은 음식이든.
너는 무엇을 엄마에게 받고자 했으나 받지 못했니? 네 마음은 뜻밖에도 너의 질문에 많이 울먹거리게 될 것이고, 너는 오늘 밤 오래도록 네 안에 사는 어린아이와 대화해도 좋겠구나. 오늘 밤은 충분히 기니까. 그리고 그 안의 아이가 훌쩍 아름답게 자라날 만큼 깊으니까.
- P30

만일 어떤 친구와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보는데 네 뺨이 싱싱하게 보이고 눈이 반짝이면서 아름다워 보이고 ‘이 정도면 어디내놔도 괜찮지?‘ 하는 생각이 들고 왠지 책상에 앉아 차분히 일기라도 쓰거나 좋은 책을 읽고 싶어진다면, 그런 친구는 만나거라. 그런데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왠지 화가 나고 아이스크림, 짜장면, 라면,
불닭볶음, 이런 게 막 먹고 싶어지면서 오늘따라 내가 왜 이렇게 밉지, 하는 생각이 들거든 그 친구하고의 만남을 자제하거라. 이게 엄마가 네게 줄 수 있는 인생 선배로서의 가장 단순한 충고야.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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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킨새는 조류의 아름다움이라는 광대한 태피스트리의 작은일부일 뿐이다. 이 세상에는 가장 평범한 참새에서부터 가장 정교한 마나킨새에 이르기까지 1만 종 이상의 새들이 존재한다. 모든 종은 각자 나름의 (구애를 위한 의사소통과 성선택 과정에서 선호된) 특이한 성적 장식물을 보유한다. 이 점으로 미루어보아, 새들의 성선택능력은 모든 새의 공통조상, 심지어 쥐라기에 살았던 깃털 달린 수각류theropod 공룡에서 기원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즉, 미적 형질과 짝짓기선호의 레퍼토리는 단일 공통조상(깃털 달린 수각류 공룡)에서 출발하여 공진화를 거듭함으로써 오늘날 수천 가지 독특한 미적 형태로 방산했다. 새로운 생태계가 번식 시스템과 양육방법의 변이에 이바지함으로써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계통수의 가지에서 공진화적 변화의 페이스가 빨라지거나 지연되었고, 이는 배우자선택에 의한 성선택의 속성과 강도를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조류 계통에서 (때로는 양성 모두에게서, 때로는 암컷에게서만, 그리고 빈도가 훨씬 낮지만 때로는 수컷에게서만) 배우자선호가 계속 진화했고, 성적 아름다움의 레퍼토리도 그에 발맞춰 공진화했다.
각각의 계통과 종은 나름 독특하고 예측 불가능한 미적 궤적aesthetic trajectory을 따라 진화하여, 1만 가지 이상의 과시 및 욕망의 레퍼토리로 구성된 독특한 미적 세계가 활짝 꽃피게 되었다.
- P186

눈, 사지, 깃털과 마찬가지로, 마나킨새가 내는 ‘기계음‘은 진화적 혁신evolutionary innovation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완전히새로운 생물학적 특징으로, 어떠한 조상의 특징과도 상동관계에 있지 않다. 진화적 혁신은 지적으로 흥미로운데, 그 이유는 그것이 진화하기 위해 진화적 땜질(단순하고 점증적인 양적 변화) 이상의 것이필요하기 때문이다. 진화적 혁신이란 진정으로 새로운 진화, 즉 질적으로 참신한 현상과 특징의 등장을 수반한다.
- P191

 세상에 별의별 아름다움이 다 있지만, 성적 과시형질이 늘 생존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아니며, 특정 과시형질의 진화가 개체에게 되레 큰 비용을 부과할 수도 있다. 모든 과시형질은 성적 이점exualChantagr과 생존비용survival cost이 균형equilibrium을 이루는 선에서 진화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균형점은 자연선택이 수컷의 생존능력과 생식능력에 치중하여 선호하는 최적점optimal point 과 거리가 멀 수 있다. ‘배우자의 관심을 끌 수 있다‘라는 성적 이점은 ‘잘 적응할 수 있다‘라는 생존적 이점survival advantage 을 능가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잘생긴 용모를 가졌지만 무모함 때문에 요절한‘ 제임스 딘James Dean스타일의 수컷이 ‘책만 파면서 여든 살까지 생존한 범생이 스타일의 수컷보다 더 많은 자손을 남길 수 있다.
••••••
곤봉날개마나킨의 날개노래는 진화적 데카당스evolutionary decadence 극명한 예를 보여준다. 진화적 데카당스란 ‘성선택을 통해 한 개체군의 생존능력과 생식능력이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현상‘을 말한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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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날 왜 내가 새고개 맞은 봉우리 화전밭을 혼자 갈고 있지않았느냐. 밭 가생이로 돌 적마다 야릇한 꽃내가 물컥물컥 코를 찌르고 머리 위에서 벌들은 가끔 붕, 붕, 소리를 친다. 바위틈에서 샘물 소리밖에 안 들리는 산골짜기니까 맑은 하늘의 봄볕은 이불 속같이 따스하고 꼭 꿈꾸는 것 같다. 나는 몸이 나른하고 몸살(을 아직 모르지만 병)이 나려고 그러는지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이랬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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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컷은 정수리의 좌우에 작고 까만 뿔깃feathery horn을 하나씩 보유하고 있지만, 수컷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평상시에 은밀히 감춰져 있다. 즉, 횃대에 앉아 있을 때는 날개와 꽁지가 완전히 까맣지만, 일단 날개를 펼치면 날개깃의 안쪽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안쪽 것판의 색깔이 정수리 앞부분과 똑같은 황금색이다. 잠시 후 설명하겠지만, 비행할 때 날개에서 황금빛 광채를 뿜어내는 것은 구애하는 수컷의 핵심 레퍼토리 중 하나로, 너무 놀랍고 아름다워 숨이 막히게 하는 시각적 효과를 낸다.
- P170

시시각각으로 섬광을 뿜어내는 듯한 황금색 깃털이 유발하는 착시현상으로 인해 (종전에 인식할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이미지가 생성되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풍부하고 상세한 과학적 결론이 도출되었다. "흰목마나킨의 노래와 놀라울 만큼 비슷한 노랫소리는 황금날개마나킨이 통나무에 접근하면서 부르는 세레나데로구나!" 두종의 과시행동에서 나타나는 괄목할 만한 유사점은 일종의 상동행동behavioral homology 으로, 지금껏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던 공통조상에게 오래전에 물려받은 것이었다. 두 종은 다른 속屬에 속하는 데다가, 수컷들의 겉모습도 완전히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설마 이 두 종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가설을 제기한 사람은 아무도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과시행동을 관찰한 직후, "흰목마나킨을 비롯한 코라피포속 Corapipo 마나킨들이 황금날개마나킨이 속한 레피도트릭스 Lepidothrix의 가까운 친척이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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