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면, 내 속 낱말카드가 조그맣게 회오리친다. 해풍에 오래 마른 생선처럼, 제 몸의 부피를 줄여가며 바깥의 둘레를 넓힌 말들이다. 어릴 적 처음으로 발음한 사물의 이름을 그려본다. 이것은 눈(雪), 저것은 밤(夜), 저쪽에 나무, 발밑에 땅, 당신은 당신………소리로 먼저 익히고 철자로 자꾸 베껴쓴 내 주위의 모든 것. 지금도 가끔, 내가 그런 것들의 이름을 안다는 게 놀랍다. - P10
모든 생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터져나오는‘ 거란 걸 어머니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아무렴 시골에서 자랐는데 모를 리가없었다. 어머니가 본 꽃은, 짐승은, 곤충은 대부분 제 몸보다 작은 껍질을 찢고 폭죽처럼 터져나왔다. 그동안 많이 참아왔다는 듯 도저히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웃음처럼, 야유처럼, 박수처럼, 펑! 펑! 벗어놓은 허물을 봄 그 큰 날개와 다리가 어떻게 다 들어가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완연한 몸뚱일 갖고서였다. - P44
"나 때문에 그래요?" "응." "제가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 아버지가 멀뚱 나를 쳐다봤다. 그러곤 뭔가 고민하다 차분하게 "네가 뭘 해야 좋을지 나도 모르지만, 네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좀 알지." "그게 뭔데요?" "미안해하지 않는 거야." "왜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네." "흔치 않은 일이니까…" "......"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 "그러니까 너는," "네, 아빠." "......"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 "......" "그리고 마음이 아플 땐 반드시 아이처럼 울어라."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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