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표가 나서는 안돼…‘
나는 그애에게 때이른 만족을 주고 싶지 않았다. 끄덕이고 안도한 뒤 자족해 돌아서 버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애가 바란 것 이상으로 그애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만족이 임계점을 넘으면 만족이 아니라 감탄이 되니까. ‘아!‘ 하는 순간의 탄성이 만들어내는 반향을 타고, 그 반향이 일으키는 가을 물결을 타고, 그 애가 내게 쓸려오길 바랐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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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군은 대부분 말 그대로 농민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농사짓고 사는 백성입니다. 총칼은커녕 죽창 하나만 들고 싸운 사람이 훨씬 많았어요. 그러니 잔뜩 걸려 있는 총을 보고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농민군은 옷 속에 부적을 붙였다고 해요. 그 부적을 붙이면 총알이 피해간다고 믿었대요. 정말로 그렇게 믿었을까요? 아니요. 당연히 믿지 않았을 겁니다. 너무 무서우니까, 무서워서 한 발짝 떼기도 힘드니까 붙였던 거예요. 종잇조각 하나지만,
아무 소용도 없는 걸 알지만, 그거라도 붙여야 한 발짝이라도 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붙인 것 아닐까요? 부적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참 짠하더라고요. 이 아무개들은 용감하게 싸운 게 아니에요. 두려워하면서 싸웠어요.
- P47

 조상이 큰 죄를 지어서 그 자손들이 벼슬을 할 수없게 된 집안을 폐족이라고 해요.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가문이 몰락한 상황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금방 나아질 거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관직에 나갈 수 없는 폐족일지라도 선비의 기상을 유지하는 길을 끊임없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폐족끼리 무리를 짓지 말 것, 과일과 채소를 키우고 뽕나무를 심어 가난에서 벗어날 것, 벼슬을 하지 못하더라도 벼슬하는 사람처럼 나라와 세상을 위해 살 것……. 그중에서도 핵심은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해도 책은읽을 수 있으니까요. "폐족에서 벗어나 청족이 되려면 오직 독서 한 가지 일뿐이다"라고 했지요. 청족은 대대로 절개와 의리를 숭상해온 집안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한 정약용은 자신이 계속해서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도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지금의 생각을 남기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은 사헌부의 재판 기록만 보고 자신을 죄인 정약용으로 기억할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끊임없이 기록하겠다는 것입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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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아."
"네?"
"너 언제부터 아팠지?"
"세살요…… 엄마가 그렇다고 했잖아요."
"그럼 얼마 동안 아팠던 거지?"
"음, 십사년요."
"그래, 십사년."
"근데 그동안 씩씩하게 정말 잘 견더왔지? 지금도 포기 않고 이렇게 검사받고 있지? 다른 사람들은 편도선 하나만 부어도 얼마나 지랄발광을 하는데, 매일매일, 십사년, 우린 대단한 일을 한 거야.
그러니까."
"네."
어머니가 목소리를 낮추며 부드럽게 말했다.
"천천히 걸어도 돼."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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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시기에 한 말이 무엇인지 또렷이 생각나진 않는다. 언어의 한정된 어떤 부분, 그러니까 동심원의 가장 안쪽과 접촉한 경험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 테니까. 아니, 그건 너무 일찍 도착한 맨가장자리 원일지도 모르니까. 다른 것은 잘 모르겠다. 다만 사람이 언어와 조우한 첫 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신의 섭리가 궁금할 따름이다. 만나되 만나지 않게 하신 것. 먼저 배우고, 잊어버리게 한 뒤, 다시 배우게 하신 것. 그런 것이 이상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내가 다른 데가 아닌 외가에서 말을 깨쳤다는 사실은 퍽 마음에 든다.
바깥 외(外)에 집 가(家)자. 바깥 집이라니, 왠지 근사한 느낌이다.
- P71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나는 그 찰나의 햇살이 내게서 급히 떠나가지 않도록 다급하게 자판을 두드렸다.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그렇게 써놓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누구도 본인의 어린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니까, 특히 서너살 이전의 경험은 온전히 복원될 수 없는 거니까, 자식을 통해 그걸 보는 거다. 그 시간을 다시 겪는 거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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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면, 내 속 낱말카드가 조그맣게 회오리친다. 해풍에 오래 마른 생선처럼, 제 몸의 부피를 줄여가며 바깥의 둘레를 넓힌 말들이다. 어릴 적 처음으로 발음한 사물의 이름을 그려본다. 이것은 눈(雪), 저것은 밤(夜), 저쪽에 나무, 발밑에 땅, 당신은 당신………소리로 먼저 익히고 철자로 자꾸 베껴쓴 내 주위의 모든 것. 지금도 가끔, 내가 그런 것들의 이름을 안다는 게 놀랍다.
- P10

모든 생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터져나오는‘ 거란 걸 어머니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아무렴 시골에서 자랐는데 모를 리가없었다. 어머니가 본 꽃은, 짐승은, 곤충은 대부분 제 몸보다 작은 껍질을 찢고 폭죽처럼 터져나왔다. 그동안 많이 참아왔다는 듯 도저히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웃음처럼, 야유처럼, 박수처럼, 펑! 펑!
벗어놓은 허물을 봄 그 큰 날개와 다리가 어떻게 다 들어가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완연한 몸뚱일 갖고서였다.  - P44

"나 때문에 그래요?"
"응."
"제가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
아버지가 멀뚱 나를 쳐다봤다. 그러곤 뭔가 고민하다 차분하게
"네가 뭘 해야 좋을지 나도 모르지만, 네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좀 알지."
"그게 뭔데요?"
"미안해하지 않는 거야."
"왜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네."
"흔치 않은 일이니까…"
"......"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
"그러니까 너는,"
"네, 아빠."
"......"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
"......"
"그리고 마음이 아플 땐 반드시 아이처럼 울어라."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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