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는 이런 연구를 접하고 나서 현재 일어나는 전쟁에는 공통된 구조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전쟁 당사자 중에서 가장 잔인한 의사(意思)를 가진 인간, 즉 전쟁 개시를 결정하는 최고 권력자만큼 적으로부터 심리적, 물리적 거리가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었다. 백악관에서 만찬회에 출석하고 있는 대통령은 적이 흩뿌린 피를 뒤집어쓰지도, 육체를 파괴당한 전우가 내뱉는 단말마의 외침을 듣지도 않는다. 살인에 뒤따르는 정신적 부담을 거의 받지 않는 환경에 있기에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잔학성을 더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군대 조직이 이러한 형태로 진화하고 과학 기술 덕에 병기가 개선되고 있는 이상, 근접전에서 살육이 격렬해지는 것이 당연했지만 전쟁의 의사결정자는 아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대규모 공중 폭격을 명령할 수 있는 셈이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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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세속주의의 이상이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세속주의의 가치는 진실이다. 단지 믿음이 아닌 관찰과 증거를기반으로 한 진실을 말한다. 세속주의자들은 이 진실과 믿음을 혼동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 P307

모든 종교와 이데올로기, 신조에는 그늘이 있다. 어떤 신조를 따르든지 불가피한 그늘을 인정하고, "우리에게는 일어날 리 없다"라는 안일한 확신을 피해야 한다. 세속주의 과학은 전통 종교 대다수와 비교하면 한 가지 큰 이점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그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은 원리상 기꺼이 자신의 실수와 맹점을 인정한다. 그것이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힘이 계시한 절대 진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실수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 자신이 믿는 이야기 전체를 무효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류를 범하기 마련인 인간의 진리 추구를 믿는다면, 실수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게임의 일부가 된다.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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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즘이란 말 그대로 물리적 피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퍼뜨리는 방법으로 정치 상황을 바꾸려 드는 군사 전략이다. 이런 전략은 적에게 물리적으로는 큰 피해를 입힐 수 없는 아주 약한일당이 주로 사용한다. 물론 군사 행동도 모두 공포를 유발한다. 하지만 재래식 전쟁에서 공포는 물리적 손실에 따라붙는 부산물이며,
대개 손실을 입히는 힘에 비례한다. 반면, 테러리즘에서는 공포가주무기다. 테러범이 실제로 갖고 있는 힘과 그것이 유발하는 공포사이의 불균형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 P239

이렇게 보면 테러범은 도자기 가게를 부수려는 파리를 닮았다.
파리는 너무나 미약해서 찻잔 하나도 혼자서 움직일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파리 한 마리가 도자기 가게를 부술까? 파리는 먼저 황소를 찾아낸 다음 귓속으로 들어가서 윙윙대기 시작한다. 황소는 두려움과 분노로 미쳐 날뛰면서 도자기 가게를 부순다. 바로 이런 일이 9.11 이후에 일어났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이라는 황소를 자극해서 중동이라는 도자기 가게를 파괴했다. 이제 테러범들은 도자기 잔해 속에서 번성하고 있다. 세상에 성마른 황소들은 널렸다.
- P241

개인적으로 나는 잔혹한 세계 정복자들보다, 남의 일에는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는 하찮은 사람들에게서 나온 사상을 좋아한다. 많은 종교들은 겸손의 가치를 받든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자신들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상상한다. 개인의 온순함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뻔뻔한 집단적 오만함을 뒤섞는다. 모든 종교가 겸손을 보다 진지하게 여기면좋을 것이다.
모든 형태의 겸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신 앞에서의 겸손일 것이다. 사람들은 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자신을 극도로 낮춘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신의 이름을 활용해 신도들 위에 군림한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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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전등 라이트를 예거는 빛에 비추어 보이는 풍경에 그만 깜짝 놀랐다. 트럭이 정차한 좁은 길은 터널이 되어 있었다. 좌우의 정글에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저 멀리까지 아치를 형성하고 있었다. 문명사회의 일원이었던 예거는 인식의 전환을 받아들였다. 도로 양쪽에 숲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깊고 광대한 숲 속에 인간이라는 작은 동물이 만든 짐승의 길이 사라질 듯 말 듯 가느다란 선이 되어 가까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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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의 사건들을 보면, 민족주의는 러시아와 인도,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과 미국 시민들에게까지 아직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힘에 의해 소외되고, 국가 차원의 보건, 교육, 복지 체계의 운명을 걱정하며 민족의 품 안에서 안도감과 의미를 찾고 있다.
- P177

원자폭탄은 너무나 명확하고 즉각적인 위협이어서 아무도 무시할 수 없다. 반면 지구온난화는 상대적으로 불분명하고 오래 계속된 위협이다. 따라서 장기적인 환경을 고려하다가도 단기적으로 고통스러운 희생이 요구될 때마다 민족주의자들은 당장의 국가 이익을 우선시하고 환경 문제는 나중에 걱정해도 된다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쪽으로 행동하기 쉽다. 아니면 아예 문제 자체를 부인할 수도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회의주의를 민족주의 우파가 옹호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 P187

우리에게는 새로운 지구적 정체성이 필요하다. 국가 단위의 제도는 전례 없는 일련의 지구적 곤경을 다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전 지구 차원의 생태계와 경제와 과학이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민족 단위의 정치에 고착돼 있다. 이런 부조화 때문에 정치 체제가 우리의 주요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효과적인 정치를 위해 우리는 생태계와 경제와 과학의 행진을 탈지구화하거나 우리의 정치를 지구화해야 한다. 생태계와 과학의 행진을 탈지구화하기는 불가능하고, 경제의 탈지구화는 십중팔구 비용이 많이 들것이기 때문에, 유일한 현실적 해법은 정치를 지구화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세계 정부‘를 수립하자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의심스럽고 비현실적인 비전이다. 그보다는 한 나라나 심지어 도시 단위의 정치가 작동하는 과정에서도 전 지구 차원의 문제와 이익에 좀 더 무게가 실려야 한다는 뜻이다.  - P195

하지만 일본은 서구의 청사진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자신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보호하고, 과학이나 근대성, 그리고 어떤 모호한 지구 공동체가 아닌 일본에 충성을 바치는 나라가 되기위해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 목적을 위해 일본은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를 일본 정체성의 초석으로 고수했다. 사실 신도를 재발명했다. 전통 신도는 다양한 정령과 신령, 귀신에 대한 믿음이 뒤섞인 애니미즘 신앙이었다. 모든마을과 신사가 자기만의 정령과 지역 관습을 갖고 있었다. 19세기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일본은 국가 공인 신도를 만들면서 수많은지역 전통들은 억압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 신도‘에는 민족성과 인종이라는 대단히 근대적인 사상이 주입됐다. 일본 엘리트들이유럽 제국주의에서 따온 요소였다. 불교와 유교, 사무라이 봉건 윤리 등에서도 국가 충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모두 가져다 뒤섞었다. 그 위에다 일본의 황제 숭배를 최고 원리로 신성시했다. 이들은 일본 황제를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직계 후손이자 살아 있는 신으로 간주했다.
- P208

위의 두 경우는 모두 인종주의의 기미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이들은 인종주의자가 아니다. ‘문화주의자‘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영웅적인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그사이 전쟁터가 이동했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결과 전통적인 인종주의는 줄어들고 있는 반면, 오늘날 세계는 ‘문화주의자들‘로 가득하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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