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객들은 대부분 미국과 유럽에서 온 서양 사람들이었다. 프로그램을 마친 후 그들과 함께 곳곳을 천천히 걸어 보았다. 그때 문득 내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은 북쪽 방향을 향해 설치되어있는 커다란 위성 수신 접시였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는 미국 방송의 음악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서 일하는 관계자들을 위한 일종의 휴게실이었던 것 같다. 과연 그 사람들의 현재 삶은 여러가지 퍼포먼스로 보여 준 전근대적 삶과 같다고 말할수 있을까? 그보다는 글로벌화의 영향권에 들어와 혼종문화를 만들어 가는독특한 삶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전근대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리라 상상하기 쉬운 지구 한구석의 토착민들도 자본주의 경제의 글로벌화에 편입되어 우리와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순수한 자급자족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던 전통문화는 사실상 거의 사라져 버렸고, 시장경제가 지구 전체에 확산되고 있다. 이제 그들도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을 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아마존 원주민들이나 뉴기니의 토착 부족민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이어가는 방편으로 문화 퍼포먼스를 택했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기꺼이 옷을 벗고 때로는 진지하게또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조상들의 과거를 보여 주는 퍼포먼스를 하며 자본주의 경제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 P161
소림 말고도 시베리아 횡단열차 승객들의 생각과 행동은 인공조미료를 싹 뺀, 투박하면서도 담백한 자연의 맛과 같았다. 장거리 여행에 익숙한 이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한 듯 멍하니 시간 때우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또 표피적인 웃음기를 뺀 무뚝뚝한 표정과 짧은 문장으로 구성된 절제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서로의 관심사가 통하기라도 하면, 마음속 깊은 곳의 친절과 호의를 꾸밈없이 표출했다. 이런 그들과 대화할 때는 더들더듬 짤막한 러시아어와 영어를 섞어서 주고받아 보지만 한계가 있기는 했다. 오히려 각자의 언어로 조잘거릴 때 신기하게 소통이 잘 됐다. 눈빛으로, 손짓으로, 살가운 어깨동무로 서로의 마음을 열고 훈훈한 동반자가 된 것이다.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였지만, 이는 그동안 그런 방식의 친절과 호의에 익숙하지 않던 내가 느끼는 부담감일 뿐이었다. 열차는, 특히 야간열차는 사람 냄새를 맡고 서로 소통하며 이해하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객차 안 개방된 공간에서 며칠 밤을 같이 보낸다는 것은 각별하고도 편안한 느낌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게 해준다. 자석처럼 붙었다가 천천히 멀어져 가기를 반복하는 차창 밖 풍경을 고독하게 응시하는 것도, 시베리아 벌판을 붉게 물들이는 어슴새벽이나 해거름을 보며 쓸쓸한 마음을 느끼는 것도 모두 선택 사항일뿐이다. 누군가와 친밀하게 함께하고 있어 이 세상이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곳, 그곳이 바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다. - P176
아프리카에도 머리를 갸우뚱하게 하는 희한한 지명들이 많다.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잠비아 짐바브웨접경지대의 빅토리아폭포Victoria Falls는 유럽인으로는 처음 그곳에 도착한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당시 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이름을 붙여 만든 이름이다. 제국주의 세력들은 엄연히 원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땅인데도 불구하고 아프리카를 마치 하얀 도화지같이 비어 있는 땅으로 인식했다. 그러니 처음 도착한 땅에자기 마음대로 지명을 만들어 붙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 원주민인 칼롤로로지족에게 그 폭포는이미 신성한 ‘모시-오야툰야‘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천둥치는 연기‘라는 뜻이었다. 참으로 그 모습을 제대로 표현한지명이 아닌가? 지도를 펼쳐 아프리카 중서부에 있는 기니Guinea 만도 살펴보자. ‘상아해안‘ ‘설탕 해안‘ ‘후추 해안‘ ‘노예 해안‘ 등 희한한 지명들이 붙어 있다. 이곳에 있는 코트디부아르Côte d‘Ivoire라는 이름의 국가는 또 어떠한가. 프랑스어로 되어 있는 이 국가명을 영어로 옮기면 ‘상아 해안‘을 뜻하는 아이보리코스트Ivory Coast가된다. 상아해안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국명으로 사용되고 있는것이다. 아시아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별 의문 없이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중동이니 극동이니 하는 지명은 사실 따지고 보면 대단히 유럽 중심적인 지명이다. 유럽에서 동쪽으로 아시아를 볼때 가장 가까운 곳인 터키반도 일대가 근동Near East, 중간쯤은 중동Middle East, 가장 멀리 우리가 속해 있는 동북아시아 일대가 극동Far East이기 때문이다. 유럽으로부터의 거리를 기준으로 붙인 그들 중심의 지명들이 지금도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 P188
여행지는 현지인의 삶의 터전이지 여행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늘 기억해야 한다. 현지인은 여행자들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삶터를 소중하게 품고서 열심히 살아간다. 여행자가 자신이 방문하는 장소를 일탈의 행복과 새로움의 추구를위한 대상으로 잠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현지인은 일상의 행복을 가꾸면서 평생을 살아온 삶의 터전으로써 그곳을 더없이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런 소중한 곳에서 여행자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해서야 되겠는가?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여행지와 현지인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예의가 필요하다. - P199
그런데 이내 나는 그 아름다운 피오르의 마을들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 속 삶의 현장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부풀어 오른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페리가 속도를 늦춰 아름다운 마을 레이캉에르Leikanger의 선착장에 정박하자, 곧이어 마을 주민들이 올라탔다. 그들은 여가를 즐기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목적을 이루고자 베르겐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이 배는 여행자들을 위한 관광용 페리인 동시에 대중교통, 즉 우리로 따지면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완행 시외버스였던 것이다. 물론 탑승객의 수를 비교해 보면, 관광용 페리로 이용하는 여행자들이 대중교통용 여객선으로 이용하는 주민보다 훨씬 큰비중을 차지했다. 더군다나 여행자들은 큰돈을 들여 먼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지인이 누리는(누려야 할 ‘삶터‘에서의 권리보다 여행자들이 누리는(누려야 할) ‘여행지‘에서의 권리가 더 크게 인정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행자는 숫자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또 비용 지불의 여부와 상관없이 여행지에서 늘 손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잠시 방문하는 손님으로서의 예의를 갖추고 소중한 삶의 터전이 잘 유지되도록 힘을 보태는 것이 여행자들의 책무다. - P201
그러나 수용 가능한 범위 이상으로 관광객이 몰려오면 그곳을 삶터로 삼고 있는 주민들은 전에 없던 불편함을 겪게 된다. 이를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혹은 과잉관광이라고 한다. 관광객의 증가로 인한 소음 증가, 쓰레기 증가, 교통 및 주차 혼잡, 환경파괴, 물가와 주거비 상승, 지역정체성 혼란 등이 주민들의 삶터를 열악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때로는 관광혐오, 즉 투어리즘포비아 tourism phobia까지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외래투기 자본의 유입으로 주거지와 상가의 임대료가 과도하게 높아져 원래의 주민들이 자신의 삶터를 떠나기도 하는데, 이를 투어리스티피케이션 touristification이라고 한다. 도시 내 특정 지역이상업화되고 임대료가 상승하면서 현지인들이 이를 감당하지 못해 자신의 삶터를 떠나게 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 과도한 관광지화touristify와 관련해 발생할 수도 있음을 나타낸 용어다. - P203
이처럼 도움의 손길에 어려움이 해소되는 경험을 할 때마다나는 여행자야말로 정말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현지인들 역시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면 먼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자신들의 장소에서만큼은 어리숙한 이방인 여행자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여행에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저앉아 버리고 싶지 않다면 현지인에게 공손한 자세로 마음을 열어 보자. 그들은 우리의 여행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여행자의 순수한 마음이 전달된다면 그들 역시 경계를 풀고 친절과 호의를 베풀어줄 것이다. - P212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현지인과 여행자 간의 오가는 시선이 서로 불편할 때가 있다. 여행지에서 나를 향한 누군가의 시선이 내가 원하지 않는 혹은 예상치 못한 시선이라면 불쾌한 감정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현지인도 같은 시선을 받게 된다면 당연히 불쾌한 감정을 갖는다. 특히 제3세계 사람들을 향한 선진국 사람들의 응시의 권력, 즉 위험한 식민주의적 세계관은 그들에게 커다란 불편함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는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다. - P216
여행 중에는 몸으로 전해지는 다채로운 느낌들 그리고 순간순간 번득거리는 앎의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몸속에서 과포화상태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크고 작은 느낌과 생각은 정제되지 않으면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망각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그 느낌과 생각이 소중하다면, 그래서 몸속에 오래 붙들어 두어 삶의 일부로 만들고 싶다면 부지런히 기록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 P233
일상을 떠난 경계 너머로의 여행은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기간 동안에만 이루어진다. 이러한 여행은 인생의 긴 여정과 비교해 본다면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짧은 여행이주는 재미와 의미는 한순간의 거품처럼 일었다가 사라지는 덧없는 것들이 아니다. 추억할 수 있는 과거가 되어 화석처럼 남겨지는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풍요롭게 해줄 거름이 된다. 그래서나는 오늘도 떠남의 설렘을 안고 지리를 공부한다. 그렇게 항상 여행을 준비한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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