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역시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나를 등진 채 퍼걸러 테이블 앞에서 있는 건 이모가 아니라 장작개비였다. 어머니를 겁주고, 들쑤시고, 어르고, 뺨을 쳐서 나를 망가뜨리게 만든 요망한 장작개비.
내 몸은 소리를 죽이기 시작했다. 숨 쉬듯 욱신대던 뒤통수가 평온을 되찾았다. 숨소리는 목 밑으로 잦아들고, 갈비뼈 안에선 심장이 느리게뛰었다. 배 속에서 공처럼 구르던 긴장이 사라졌다. 오감이 날을 세웠다.
몇 미터 거리가 있는데도, 겁먹은 것의 축축하고 거친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세상이 엎드리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들이 길을 열고 대기하는 느낌이었다.
- P283

나는 질끈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 됐다. 줄타기하던 줄에서 뚝 떨어진기분이었다. 조금만 기다리지 그랬어. 내가 사라질 동안만 참지 그랬어.
가방 싸들고 옥상 철문으로 나가는 데 10분이면 차고 남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너도 좋고 나도 좋았을 텐데. 너는 이토록 힘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나는 너를 잃지 않았다고 믿으며 떠날 수 있을 테고.
"그래서 나는…침대보를 젖혀봤어. 나머지는......"
마침내 해진은 본론을 끄집어냈다.
"네가 설명해."
- P337

보내주지 않은 덕택에 나 홀로 소망을 이뤘다. 비록 요트가 아닌 새우잡이 어선이었지만, 하루하루가 죽을 만큼 고달팠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오늘 아침 항구에 내리기 직전까지 머리 없는 짐승처럼 살았으므로, 세상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다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들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메일을 닫고 PC방을 나왔다. 잘 곳을 찾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도로는 한적하고, 12월의 밤은 스산하고, 바다는 부옇게 젖어 있었다. 저 앞 흐릿한 안개 속에선 누군가 걸어가고 있었다.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짠 바람을 타고 피 냄새가 훅, 밀려왔다.
-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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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예혁명으로 왕과 가신의 권한은 약화되었고 경제제도를 결정할 권한은 의회에 귀속되었다. 동시에 사회 각계각층이 폭넓게 참여하는 정치체제가 마련되었다. 사회 전반이 정부의 기능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명예혁명은 다원적 사회를 만드는 발판을 마련했고 더 나아가 중앙집권화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세계 최초로 포용적 정치제도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명예혁명이었다.
....

명예혁명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정부는 투자와 거래, 혁신을꾀할 만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경제제도를 채택했다. 아이디어에 대한 재산권인 특허권을 부여해 혁신을 추구할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등사유재산권도 단호하게 집행했다. 법질서도 수호했다. 잉글랜드 법을은 시민에게 적용한 것은 역사를 통틀어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자의적 과세는 중단되었고 독점은 거의 철폐되었다. 잉글랜드 정부는 상업 활동을 적극 장려했고 국내 산업 육성에 힘썼다. 이를 위해 산업 활동 확대를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하는 한편 잉글랜드 해군을 총동원해 상인의 상업 활동을 보호했다. 사유재산권을 완연히 합리화함으로써 잉글랜드 정부는 도로망, 운하에 이어 훗날 철도에 이르기까지 산업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사회 기간시설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토대 덕분에 사람들이 느끼는 인센티브가 완전히 바뀐 것은 물론 성장의 기틀을 마련해 산업혁명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 P156

 그렇게 촉발된 새로운 갈등은 프랑스혁명으로 절정에 달한다. 프랑스혁명은 서유럽의 제도가 잉글랜드에 가까워지고 동유럽의 제도는 한층 더 멀어지는 또 다른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유럽 이외의 세상은 제도적으로 다른 길을 걸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제도적 이질성이 심화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유럽의 식민지 건설이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포용적 제도가 발달했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착취적 제도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되는 불평등 패턴을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에스파냐정복자들이 만든 정치·경제적으로 착취적인 제도는 끝까지 살아남아대부분 지역을 가난에 찌들게 했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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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은 내래 모단 걸이 되는 거이 꿈이었습네다. 아이디, 안즉도 모단걸 되구자 하는 꿈은 저버리지 못했지요. 기래도 인제는 파업단에서 선봉이 되는 거이 나의 바람입네다.
저건 뭐 하는 물건이냐, 하는 조로 웃음소리가 더욱 커진다. 나잇살은 집어먹곤 철이 덜 나서 허풍 떠는 여편네, 또는 앞에 나서서 좀웃겨보자고 나온 사람으로 보이리라.
우에 웃으십네까들? 근로하는 고무 직공은 모단 껄 못 하란 법이있습데? 내일 막 시작하였을 적에 우리 반장이 내 머리채 잡구 뚜드려 패면서 그랬습네다. 모단 껄은 학생 아이면 기생이라고, 모단껄 할라면 저하구 자유연애 한번 하자구 드런 소리까지 하였습네다.
내 배운 것이라군 에서 배워준 교육밖에 없는 무지랭이지마는 교육 배워놓으니 알겠습데다. 어직공은 하찮구 모단 껄은 귀한 것이아이라는 것.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 고무공이 모단 껄 꿈을 꾸든말든 관리자가 그따우로 날 대해서는 아니 되았다는 것.
좌중은 고요해진다. 누군가 손뼉을 치기 시작한다. 조용히 시작된박수 소리가 섬섬 커진다. 주룡은 박수 소리가 잠잠해실 때까지 기다리며 목으로 올라오는 울음의 기미를 누른다.
- P180

저짝이 먼처 모욕을 하였는데 내래 욕 좀 하면 어드렇습네까?
그런 욕을 할 줄 안다는 것은 그런 욕을 들으며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욕설은 듣는 쪽보다 하는 쪽의 품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룡 씨는 어떻습니까?
주룡은 잠시 말을 잃는다. 어느 정도는 달헌의 말이 옳다. 방금 한 욕은 주룡이 언젠가 들어보았던 곡이다. 그런 욕을 들으며 살았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는 일이 어디가 잘못되었다는 것인지는알기 어렵다.
달헌 씨 말은 반은 료해가 되고 또 절반은 아니 됩네다.
그게 뭐 어떻다고 그러시오. 자기 자신을 다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까?
- P204

달헌은 제 머릿속에서조차 말을 듣지 않는 그 여자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본다. 하늘로 올라가는 길처럼 빛나는 광목을 주룡은 단단히 붙든다. 사실은 두려워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이면서, 사실은 살고싶어서, 그 누구보다도 더 살고 싶어서 활활 불타고 있으면서.
지붕 위에서 잠든 그 여자를 향해 누군가가 외친다.
저기 사람이 있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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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가 내린 유명한 정부의 정의는 널리 통설로 받아들여진다.
베버는 사회에서 "합법적인 폭력 사용을 독점monopoly of legitimate violence"하는 것이 곧 정부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합법적 폭력의 독점과 그에 따른 일정 수준의 중앙집권화가 없다면 정부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경제활동을 규제하는 것은 물론 법질서를 강제할 수도 없다. 정부가 중앙집권화에 실패하면 그 사회는 소말리아처럼 곧 혼란에 빠지고 만다.
우리는 충분히 중앙집권화되고 다원적인 정치제도를 포용적 정치제도(inclusive political institutions) 라고 부를 것이다. 두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한다면 착취적 정치제도(extractive political institution)라 할 만하다. - P126

착취적 정치제도하에서 가능한 두 번째 성장 유형은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그런 제도가 어느 정도 포용적 경제제도의 발달을 허용하는 상황에서 목격된다. 착취적 정치제도를 갖춘 사회라면 으레 창조적 파괴가 두려워 포용적 경제제도를 꺼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사회마다 엘리트층이 권력을 독점할 수 있는 정도가 다르기 마련이다. 엘리트층의 입지가 워낙 확고해 자신들의 정치권력이 위협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한다면 어느 정도 포용적 경제제도를 수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는 역사적 상황 때문에 착취적 집권 세력이 얼마간 포용적 성향의 경제제도를 물려받게 되고, 어떤 이유에서든 그런 제도를 차단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럴 때가 착취적 정치제도하에서도 성장이 가능한 두 번째 경우라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이 급속도로 산업화한 것이 그런 예다. 박정희는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당시 한국 사회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고 경제 또한 본질적으로 포용적이었다. 박정희정권이 권위주의적이라고는 해도 경제성장을 추진할 만큼 권력 기반에대한 확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대단히 적극적으로 경제성장을 추구했다. 아마도 그가 정권을 지탱하기 위해 반드시 착취적 경제제도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착취적 제도하에서 성장을 이룬 소련 등 다른 대부분 사례와 달리 한국은 1980년대 들어 착취적 정치제도 역시 포용적 정치제도로 변모한다.  - P141

정치제도가 착취적 성향에서 포용적 성향으로 바뀌지 않는 한 권력을 분배하고 행사할 능력은 언제든 경제적 번영의 기반을 훼손할 수 있다는 뜻이다.
- P145

(서유럽에서)흑사병으로 노동력이 급감하자 봉건질서의 기반이 흔들렸다. 소작농이 변화를 요구할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엔셤 수도원Fynsham Abbey에서는소작농이 벌금과 부역을 대폭 줄여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들은 실제로 그 뜻을 이루었고 새로운 계약을 맺었는데, 이런 기록이 덧붙여져 있다. "1349년 창궐한 페스트로 숨진 사망자가 많아 영지에는소작농이 고작 둘밖에 없었다. 이들은 당시 영주이자 수도원장이었던 업턴의 니컬러스 사제 Brother Nicholas of Upton 가 새로운 계약을 맺지 않는다.
면 떠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영주는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엔념 수도원의 사례는 곳곳에서 되풀이되었다. 소작농은 강제노역을 비롯해 영주에 예속됨으로써 져야 했던 온갖 부담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임금도 차츰 올랐다. 
.....
잉글랜드 엘리트층이 가장 염려한 것은 가뜩이나 귀한 소작농을 스카우트하려는 다른 영주들의 유혹이었다. 고용주의 허락 없이 고용을 파기하면 징역형에 처하는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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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감고 이마 한중간을 꾹꾹 눌렀다. 신음 같은 한숨이 샜다.
세상에는 외면하거나 거부해봐야 소용없는 일들이 있다. 세상에 태어난일이 그렇고, 누군가의 자식이 된 일이 그러하며,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그렇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추측항법으로 날아가는 제트기는 되고싶지 않았다. 나에 대한 마지막 주권 정도는 되찾고 싶었다. 이 빌어먹을상황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 내 삶은 내가 결정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남은 힘을 끌어모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둠속에 갇힌 2시간 30분을 내 앞으로 끌어내야 했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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