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32년 정부는 ‘제1차 선거법 개정안 First Reform Act‘을 통과시켰다. 버밍엄, 리즈, 맨체스터, 셰필드 등에 선거권을 부여했고 의회에서 수공업자의 뜻이 반영될 수 있도록 유권자 기반도 확대했다. 이에 따른 정치권력의 변화로 정부 정책은 신흥 정치 이익집단에 유리한 방향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1846년에는 그토록 증오하던 곡물법을 철폐시켜 창조적파괴가 단순히 소득만이 아닌 정치권력마저 재분배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했다. 당연히 정치권력의 재분배는 시간이 흐르면서 소득의 재분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 P301

 산업혁명이 유독 잉글랜드에서 싹이 터 가장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것은 독보적이라 할 만큼 포용적인 경제제도 덕분이었다. 물론 포용적인 경제제도는 명예혁명이 가져다준 포용적 정치제도의 기반 위에 마련된 것이다. 명예혁명은 사유재산권을 합리적으로 강화하고, 금융시장을 개선했으며, 해외무역에서 정부가 허용한 독점을 와해시키고 산업 확장을 가로막는 진입 장벽을 제거해주었다. 경제적 필요성과 사회의 열망에 한층 더 민감한 개방적인 정치체제를 만들어준 것도 명예혁명이었다.
- P302

연합세력이 광범위했다는 것은 다원주의적 정치제도 창설에 대한 요구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였다. 어떤 식으로든 다원주의가 뿌리내리지않으면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 중 하나가 나머지를 물리치고 권력을 찬탈할 위험이 상존했다.  - P306

에스파냐에 착취적 경제제도가 자리 잡은 것은 절대왕정이 수립되고 정치제도가 잉글랜드와는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카스티야왕국과 아라곤왕국은 서마다 서로 다른 집단 또는 ‘신분‘을 대표하는 의회인 코르테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의회처럼 카스티야왕국에서도 새롭게 세금을 걷으려면 코르테스를 소집해야 했다. 하지만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코르테스는 잉글랜드 의회와 달리 주로 도시 외곽이나 농촌 지역이 아닌 주요 도시만 대변했다. 15세기에는 고작 18개 도시만 대변했으며 각 도시는 두 명의 대의원을 파견했다. 따라서 코르테스는 잉글랜드 의회처럼 광범위한 시회집단을 대변하지 못했고 절대왕정에 제동을걸기 위해 투쟁하는 다양한 이해집단의 결합제로 발전하지도 못했다.
입법 활동도 불가능했고 과세와 관련한 권한 역시 제한적이었다. 에스파냐 왕실이 절대왕정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코르테스를 배제하기가 한결 쉬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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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정부가 근대적이고 효율적인 조세 관료제를 수립하고 있을 때 에스파냐 정부는 이번에도 반대의 길을 걸었다. 왕실은 기업가의 사유재산권을 안정시키는 데 실패하고 무역을 독점했을 뿐 아니라 관직과세금징수권을 매매해 세습시키기 일쑤였고, 한술 더 떠 면책특권까지사고팔았다.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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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등 다른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 사례와 마찬가지로 로마 역시 공화정 당시에는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경험했다. 하지만 일부 포용적제도하에서 달성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성장은 한계가 있었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았다. 로마의 경제성장은 비교적 높은 농업 생산성, 속주에서 거두어들이는 막대한 공물과 장거리 무역에 의지했을 뿐 기술적 진보나 창조적 파괴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었다. 로마인도 철제 도구와 무기, 문자해득력, 쟁기 농업, 건축 기법 등 일부 기본적인 기술을 물려받았고 공화정 초기에는 시멘트 벽돌, 펌프, 수차 등 다른 기술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로마제국 시대를 통틀어 기술은 답보 상태를 면치못했다. 가령 조선 부문만 보더라도 배의 설계나 삭구具에 거의 변화가 없었고, 로마인은 방향타를 개발한 적이 없어 늘 노를 저어 방향을 잡았다. 수차 역시 아주 더디게 확산된 탓에 수력 에너지가 로마 경제에혁신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송수로와 도시 하수도처럼 로마의 위대한 업적 역시 로마인이 완성했다고는 하지만 기존 기술을 사용했을 뿐이다. 혁신이 없어도 기존 기술에 의존해 어느 정도의 경제성장은 가능했지만, 창조적 파괴가 수반되지 않는 성장에 불과했으며 또 오래가지도 못했다. 사유재산권이 갈수록 불안해지고 시민의 경제적 권리가 정치적 권리와 더불어 움츠러들면서 경제성장 역시 퇴보하고 말았다.
- P250

앞서 살펴보았던 러다이트 운동과 마찬가지로 손뜨개질 인력과 같은노동자의 저항은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는 때가 많다. 하지만 특히 정치권력을 위협받는 엘리트층은 그런 혁신을 도입하는 데 한층 가공할 만한 걸림돌이 된다. 창조적 파괴 과정에서 잃을 게 많은 세력은 새로운 혁신을 도입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혁신에 저항하고 막아보려 애쓰기 일쑤다. 그것이 사회에 가장 급진적인 혁신을 도입해줄 새로운 주역이 필요한 이유이고, 그런 새로운 주역과 이들이 초래하는 창조적파괴는 막강한 지도자와 엘리트층을 비롯해 이런저런 저항 세력을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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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으로 직접 그의 목을 졸라 죽이거나 입이나 코를 막는 것이 더 확실한 방법이었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그를 만지고 싶지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다가가면, 직접 자기 손으로 눌러 죽이고 싶은 생각이 사라지게 되는 살찐 거미를 볼 때처럼 구역질이 났기 때문이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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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혐오스러운 천재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천재적이면서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이 책은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드나 생쥐스트, 푸셰나 보나파르트 등의 다른 기이한 천재들의 이름과는 달리 장바티스트 그르누이라는 그의 이름은 오늘날 잊혀져 버렸다. 물론 그것은 오만, 인간에 대한 혐오, 비도덕성 등 한마디로 사악함의 정도에 있어 그르누이가 그 악명 높은 인물들에 뒤떨어지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의 천재성과 명예욕이 발휘된 분야가 역사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냄새라는 덧없는 영역이었기때문이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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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중요한 것은 정착생활이 장점과 함께 단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착집단은 갈등 해소가 한층 어려워질 수 있다. 이동생활을 하면 불화가 생겨도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이나 집단이 떠나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구 주거 건물을 짓고, 들고 다닐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자산을 쌓아두기 시작하면서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그냥 떠나버릴 수는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취락은 더 효과적인 갈등 해소 방법과 더 정교한 재산 개념이 필요했다. 취락과 가까운 땅에 누가 들어갈 수 있는지, 누가 이런저런 나무에서 열매를 딸 수 있는지, 냇물 어디에서 누가 낚시를 할 수 있는지 온갖 의사결정을 내려야 했다. 규칙도 마련하고, 그 규칙을 집행할 제도를 만들어 다듬어야 했다.
따라서 정착생활이 가능해지려면 먼저 수렵 채집인을 강제로 정착시킬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적 혁신이 선행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제도적 혁신으로 권력을 쥔 정치 엘리트가 사유재산권을 집행하고, 질서를 유지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나머지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자원을 착취할 수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규모는 작더라도 샤이암 왕이 주도했던 것과 흡사한 정치혁명이 돌파구가 되어 정착생활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 P207

하지만 착취적 제도하에서 달성한 성장은 포용적 제도하에서 창출된 성장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지속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 성격상 착취적 제도는 창조적 파괴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기술적 진보 역시 기껏해야 제한적인 수준에 그친다. 따라서 착취적 제도를 통한 성장은 단명하고 만다. 소련의 경험은 이런 한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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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내부 분쟁과 불안정은 착취적 제도에 반드시 수반되는 태생적 특징이며, 비효율성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중앙집권화된 정치권력을 와해시키기 일쑤이며, 심하면 법과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려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고전기를 거치는 동안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던 마야 도시국가도 종국에는 이런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 P220

 첫째, 베네치아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포용적 제도를 향한 움직임은 뒷걸음질 치기도 한다. 베네치아는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 제도가 무너지자 번영의 동력은 후진 기어를 넣고 말았다. 오늘날 베네치아가 잘사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 돈을 번 이들이 관광을 와서 과거의 영화에 탄복하며 매상을 올려주기 때문이다. 포용적 제도가 후진할 수 있다는 것은 제도적 개선이 단순하게 축적 과정을 거쳐 차곡차곡 쌓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둘째, 결정적 분기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은 제도적 차이는 본디 오래갈 수가 없다. 작아서 번복될 수 있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가 재차 번복되곤 하는 것이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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