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프랑스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혐오스러운 천재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천재적이면서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이 책은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드나 생쥐스트, 푸셰나 보나파르트 등의 다른 기이한 천재들의 이름과는 달리 장바티스트 그르누이라는 그의 이름은 오늘날 잊혀져 버렸다. 물론 그것은 오만, 인간에 대한 혐오, 비도덕성 등 한마디로 사악함의 정도에 있어 그르누이가 그 악명 높은 인물들에 뒤떨어지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의 천재성과 명예욕이 발휘된 분야가 역사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냄새라는 덧없는 영역이었기때문이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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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중요한 것은 정착생활이 장점과 함께 단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착집단은 갈등 해소가 한층 어려워질 수 있다. 이동생활을 하면 불화가 생겨도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이나 집단이 떠나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구 주거 건물을 짓고, 들고 다닐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자산을 쌓아두기 시작하면서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그냥 떠나버릴 수는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취락은 더 효과적인 갈등 해소 방법과 더 정교한 재산 개념이 필요했다. 취락과 가까운 땅에 누가 들어갈 수 있는지, 누가 이런저런 나무에서 열매를 딸 수 있는지, 냇물 어디에서 누가 낚시를 할 수 있는지 온갖 의사결정을 내려야 했다. 규칙도 마련하고, 그 규칙을 집행할 제도를 만들어 다듬어야 했다.
따라서 정착생활이 가능해지려면 먼저 수렵 채집인을 강제로 정착시킬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적 혁신이 선행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제도적 혁신으로 권력을 쥔 정치 엘리트가 사유재산권을 집행하고, 질서를 유지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나머지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자원을 착취할 수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규모는 작더라도 샤이암 왕이 주도했던 것과 흡사한 정치혁명이 돌파구가 되어 정착생활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 P207

하지만 착취적 제도하에서 달성한 성장은 포용적 제도하에서 창출된 성장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착취적 제도하의 성장은 지속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 성격상 착취적 제도는 창조적 파괴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기술적 진보 역시 기껏해야 제한적인 수준에 그친다. 따라서 착취적 제도를 통한 성장은 단명하고 만다. 소련의 경험은 이런 한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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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내부 분쟁과 불안정은 착취적 제도에 반드시 수반되는 태생적 특징이며, 비효율성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중앙집권화된 정치권력을 와해시키기 일쑤이며, 심하면 법과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려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고전기를 거치는 동안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던 마야 도시국가도 종국에는 이런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 P220

 첫째, 베네치아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포용적 제도를 향한 움직임은 뒷걸음질 치기도 한다. 베네치아는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 제도가 무너지자 번영의 동력은 후진 기어를 넣고 말았다. 오늘날 베네치아가 잘사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 돈을 번 이들이 관광을 와서 과거의 영화에 탄복하며 매상을 올려주기 때문이다. 포용적 제도가 후진할 수 있다는 것은 제도적 개선이 단순하게 축적 과정을 거쳐 차곡차곡 쌓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둘째, 결정적 분기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은 제도적 차이는 본디 오래갈 수가 없다. 작아서 번복될 수 있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가 재차 번복되곤 하는 것이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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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역시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나를 등진 채 퍼걸러 테이블 앞에서 있는 건 이모가 아니라 장작개비였다. 어머니를 겁주고, 들쑤시고, 어르고, 뺨을 쳐서 나를 망가뜨리게 만든 요망한 장작개비.
내 몸은 소리를 죽이기 시작했다. 숨 쉬듯 욱신대던 뒤통수가 평온을 되찾았다. 숨소리는 목 밑으로 잦아들고, 갈비뼈 안에선 심장이 느리게뛰었다. 배 속에서 공처럼 구르던 긴장이 사라졌다. 오감이 날을 세웠다.
몇 미터 거리가 있는데도, 겁먹은 것의 축축하고 거친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세상이 엎드리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들이 길을 열고 대기하는 느낌이었다.
- P283

나는 질끈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 됐다. 줄타기하던 줄에서 뚝 떨어진기분이었다. 조금만 기다리지 그랬어. 내가 사라질 동안만 참지 그랬어.
가방 싸들고 옥상 철문으로 나가는 데 10분이면 차고 남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너도 좋고 나도 좋았을 텐데. 너는 이토록 힘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나는 너를 잃지 않았다고 믿으며 떠날 수 있을 테고.
"그래서 나는…침대보를 젖혀봤어. 나머지는......"
마침내 해진은 본론을 끄집어냈다.
"네가 설명해."
- P337

보내주지 않은 덕택에 나 홀로 소망을 이뤘다. 비록 요트가 아닌 새우잡이 어선이었지만, 하루하루가 죽을 만큼 고달팠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오늘 아침 항구에 내리기 직전까지 머리 없는 짐승처럼 살았으므로, 세상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다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들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메일을 닫고 PC방을 나왔다. 잘 곳을 찾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도로는 한적하고, 12월의 밤은 스산하고, 바다는 부옇게 젖어 있었다. 저 앞 흐릿한 안개 속에선 누군가 걸어가고 있었다.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짠 바람을 타고 피 냄새가 훅, 밀려왔다.
-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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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예혁명으로 왕과 가신의 권한은 약화되었고 경제제도를 결정할 권한은 의회에 귀속되었다. 동시에 사회 각계각층이 폭넓게 참여하는 정치체제가 마련되었다. 사회 전반이 정부의 기능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명예혁명은 다원적 사회를 만드는 발판을 마련했고 더 나아가 중앙집권화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세계 최초로 포용적 정치제도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명예혁명이었다.
....

명예혁명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정부는 투자와 거래, 혁신을꾀할 만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경제제도를 채택했다. 아이디어에 대한 재산권인 특허권을 부여해 혁신을 추구할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등사유재산권도 단호하게 집행했다. 법질서도 수호했다. 잉글랜드 법을은 시민에게 적용한 것은 역사를 통틀어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자의적 과세는 중단되었고 독점은 거의 철폐되었다. 잉글랜드 정부는 상업 활동을 적극 장려했고 국내 산업 육성에 힘썼다. 이를 위해 산업 활동 확대를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하는 한편 잉글랜드 해군을 총동원해 상인의 상업 활동을 보호했다. 사유재산권을 완연히 합리화함으로써 잉글랜드 정부는 도로망, 운하에 이어 훗날 철도에 이르기까지 산업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사회 기간시설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토대 덕분에 사람들이 느끼는 인센티브가 완전히 바뀐 것은 물론 성장의 기틀을 마련해 산업혁명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 P156

 그렇게 촉발된 새로운 갈등은 프랑스혁명으로 절정에 달한다. 프랑스혁명은 서유럽의 제도가 잉글랜드에 가까워지고 동유럽의 제도는 한층 더 멀어지는 또 다른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유럽 이외의 세상은 제도적으로 다른 길을 걸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제도적 이질성이 심화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유럽의 식민지 건설이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포용적 제도가 발달했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착취적 제도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되는 불평등 패턴을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에스파냐정복자들이 만든 정치·경제적으로 착취적인 제도는 끝까지 살아남아대부분 지역을 가난에 찌들게 했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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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은 내래 모단 걸이 되는 거이 꿈이었습네다. 아이디, 안즉도 모단걸 되구자 하는 꿈은 저버리지 못했지요. 기래도 인제는 파업단에서 선봉이 되는 거이 나의 바람입네다.
저건 뭐 하는 물건이냐, 하는 조로 웃음소리가 더욱 커진다. 나잇살은 집어먹곤 철이 덜 나서 허풍 떠는 여편네, 또는 앞에 나서서 좀웃겨보자고 나온 사람으로 보이리라.
우에 웃으십네까들? 근로하는 고무 직공은 모단 껄 못 하란 법이있습데? 내일 막 시작하였을 적에 우리 반장이 내 머리채 잡구 뚜드려 패면서 그랬습네다. 모단 껄은 학생 아이면 기생이라고, 모단껄 할라면 저하구 자유연애 한번 하자구 드런 소리까지 하였습네다.
내 배운 것이라군 에서 배워준 교육밖에 없는 무지랭이지마는 교육 배워놓으니 알겠습데다. 어직공은 하찮구 모단 껄은 귀한 것이아이라는 것.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 고무공이 모단 껄 꿈을 꾸든말든 관리자가 그따우로 날 대해서는 아니 되았다는 것.
좌중은 고요해진다. 누군가 손뼉을 치기 시작한다. 조용히 시작된박수 소리가 섬섬 커진다. 주룡은 박수 소리가 잠잠해실 때까지 기다리며 목으로 올라오는 울음의 기미를 누른다.
- P180

저짝이 먼처 모욕을 하였는데 내래 욕 좀 하면 어드렇습네까?
그런 욕을 할 줄 안다는 것은 그런 욕을 들으며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욕설은 듣는 쪽보다 하는 쪽의 품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룡 씨는 어떻습니까?
주룡은 잠시 말을 잃는다. 어느 정도는 달헌의 말이 옳다. 방금 한 욕은 주룡이 언젠가 들어보았던 곡이다. 그런 욕을 들으며 살았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는 일이 어디가 잘못되었다는 것인지는알기 어렵다.
달헌 씨 말은 반은 료해가 되고 또 절반은 아니 됩네다.
그게 뭐 어떻다고 그러시오. 자기 자신을 다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까?
- P204

달헌은 제 머릿속에서조차 말을 듣지 않는 그 여자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본다. 하늘로 올라가는 길처럼 빛나는 광목을 주룡은 단단히 붙든다. 사실은 두려워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이면서, 사실은 살고싶어서, 그 누구보다도 더 살고 싶어서 활활 불타고 있으면서.
지붕 위에서 잠든 그 여자를 향해 누군가가 외친다.
저기 사람이 있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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