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변방에서 죄를 입어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밤에 간혹 구부려 누웠다가 망령되이 정이 일어나면, 인하여 생각이 꼬리를 물어 이리저리 걷잡을 수가 없었다. 용서를 받아 풀려나면 어찌할까? 고향을 찾아 돌아가서는 어쩐다지? 길에 있을 때는 어찌하고, 문에 들어설 때는 어찌하나? 부모님과 죽은 아내의 산소를 둘러볼 때는 어찌하며, 친척 및 벗들과 둘러모여 말하고 웃을 때는 어찌하나? 채소의 씨는 어찌 뿌리며, 농사일은 어떻게할까? 하다못해 어린애들 서캐와 이를 손수 빗질하고, 서책에 곰팡이 피고 젖은 것을 마당에 내다 볕 쬐는 데 이르기까지 온갖세상 사람들에게 있을 법한 일이란 일은 전부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렇듯 뒤척이다 보면 창은 훤히 밝아왔다. 막상이루어진일은 하나도 없고, 변함없이 위원군(渭原郡)의 벌 받아 귀양온 밥 빌어먹는 사내일 뿐인지라, 생각을 어느 곳으로 돌려야 할 지, 문득 내가 누군지조차 알지 못하여 혼자 실소하고 말았다.
- 노긍 <생각에 대하여,想解> - P110

또 가난한 집에 종살이하면서 두 눈이 늘 피곤하여, 일찍이단 하루도 일찍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등 긁고 머리를 흔들면서맑게 노래하며 환하게 즐거워해본 적이 없었기에 내가 이를 부그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 배를 가른다면 반드시 붉은 것이 있어 마치 불처럼 땅 위로 솟구쳐 오를 것이니, 평생 주인을향한 마음이 담긴 피인 줄을 알 것이다.
네가 이제 땅속에 들어가면 네 아비와 어미, 네 형과 너의 안주인과 작은 주인이 마땅히 네가 온 것을 보고 놀라 다투어 내가어찌 지내는지를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근년 이래로 온몸이 좋지 않아 이빨과 터럭은 시어져서 몹시 늙은이가 다 되었다고 말하여다오. 그러면 장차 서로 돌아보며 탄식하고 낯빛이 변하면서 나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아아!
- 노궁<죽은 종 막돌이의 제문, 祭亡奴莫石文> - P117

 천지고금을 굽어보고 우러르며 물러나 사노라니 사람들은 누추한 집이라고, 누추해 살 수가 없다고 말들 하지만, 내 보매는 신선 사는 땅이 따로 없다. 마음이 편안하고 몸도 편안하니 누가 이곳을 누추하다 말하리, 내가 정작 누추하게 여기는 것은 몸과 이름이 함께 썩는 것이다. 집이사 쑥대로 얽어두었다지만,
도연명도 겨우 담만 둘러치고 살았다. 군자가 여기에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
-허균<누추한 나의 집> 중에서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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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잘 지냈어요, 마르탱?"
마르탱은 조심스레 베르트랑드를 일으켜 세우고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는 베르트랑드를 밝은 빛 아래서 좀 더 잘 보려고 고개를 갸웃이 기울였다. 그리고 이내 중얼거렸다.
"오, 하느님! 내 아내가 이렇게 예뻤나요….…베르트랑드는 마르탱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르탱은 베르트랑드의 손을 잡고 함께 마을 사람들에게로 되돌아왔다.
- P66

"저는 아르노의 눈을 바라보았어요."
베르트랑드는 코라스에게 말했다.
"저는 그의 눈 속에서 희망이 사라졌음을 보았어요.
그리고 그가 뭘 원하는지를 알아차렸어요."
정적이 잠깐 흘렀고 다시 말이 이어졌다.
"그는 저와 제 자식들을 위해 적어도 제가 목숨을 보전하기를 바랐어요."
그 말을 하면서 베르트랑드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듯 아팠다. 그녀는 처음으로 흐느껴 울며 이렇게 마지막 말을 던졌다.
"저는 그를 위해 그렇게 했어요." - P231

마을 사람들과 게르 집안 사람들은 화염에 휩싸여 벌게진 교수대 주변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조종鐘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태양이 광장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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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이 휘날리는 그 대문 앞에 서서 우다왕은 문 안쪽을 바라보면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어찌 할 수 없는 창백한 원망이 서려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편지를 접어 다시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외투 안에서 붉은 비단으로 싼 팻말을 꺼내들었다. 두께가 반치쯤 되고 너비는 세 치, 길이는 한 자 두 치쯤 되는 것이 마치 특별히 제조된 선물용 담배상자 같았다. 그는 그 팻말을 초병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걸 류롄 누님에게 좀 전해주게."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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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증인이 늦게 도착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마을에서 13킬로미터쯤 떨어진 포사라는 곳에서 왔다. 그의 불쌍한 노새는 오는 내내 분명 무수히 발질을 받았을 것이다. 항상 검정 옷을 입고 있던 이 공증인의 턱은 헌 나막신 같았고, 손가락은 온통 잉크투성이였다.
마을에 올 때면 그는 우리에게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걸 알리려는 듯 늘 우리를 내려다보는 태도를 취했다.
그렇다고 술자리를 마다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회가 찾아들면 그는 많이 마셨다. 집에 되돌아갈 때 노새가 길을 아는 게 무척 다행일 정도였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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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의 편지글에 보면 "옛날에는 문을 닫고 앉아 글을 읽어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지요" 라는 구절이 있다. 정작 이해할 수 없는것은 오늘의 우리들이다. 인터넷 시대에 세계의 정보를 책상 위에서 만나보면서도 천하의 일은커녕 제 자신에 대해서조차 알 수가없다. 정보의 바다는 오히려 우리를 더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리게할 뿐이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나는 없고 정보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소유한 정보의 양이 늘어갈수록 내면의 공허는 커져만 간다. 주체의 확립이 없는 정보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 P82

납작한 돌을 골라 물결을 향해 몸을 뉘어 던졌다. 물껍질을 벗기며 세 번도 뛰고 네 번도 뛴다. 느린 것은 두꺼비가 물에 잠기는 것 같고, 가벼운 것은 마치 물찬 제비 같다. 어쩌다가는 대나무 모양을 만들면서 마디마디 재빠르게 뒤쫓기도 한다. 혹 동전을 쌓으며 쫓아가기도 하는데, 뾰족한 흔적은 뿔 같고, 층층의 무늬는 탑인 듯도 싶다. 이것은 아이들의 장난인데, 물수제비 뜨기라 한다.
고목이 절벽에 기댄 채 말랐는데, 우뚝함은 귀신의 몸뚱이 같고, 서리어 움츠림은 잿빛 같았다. 껍질을 벗은 것은 마치 늙은뱀이 벗어놓은 허물 같았고, 대머리가 된 것은 병든 올빼미가 걸터앉아 고개를 돌아보는 듯하였다. 속은 구멍이 뚫려 텅 비었고, 곁가지는 하나도 없었다. 산에 의지한 돌은 검고, 길에 깔린 돌은 희며, 시내에 잠긴 돌은 청록빛이었다. 돌들끼리 비벼 표백되고 깔리어 그런가 싶었다. 돌빛은 핥은 듯 불그스레 윤기가 나고 매끄러웠다. 한 필 비단 같은 가을 햇살이 멀리 단풍나무 사이로 펼쳐지자, 또 시냇가의 모래는 모두 담황색인 듯하였다.
- 박제가 <<妙香山小記>> 중에서
- P87

발로 물살을 가르자 발톱에서 폭포가 일어나고, 입으로 양치질하니 비는이빨 사이로 쏟아졌다. 두 손으로 허위적거리자 물빛만 있고 내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눈꼽을 씻으며 얼굴의 술기운을 깨노라니, 때마침 가을 구름이 물 위에 얼비쳐 내 정수리를 어루만지는구나.
- 박제가
- P90

 대저 속된 자들은 선방(禪房)에서 기생을 끼고 시냇가에서 풍악을 베푸니, 꽃 아래서 향을 사르고 차 마시는 데 과일을 두는 격이라 하겠다. 어떤 이가 내게 와서 묻는다.
"산속에서 풍악을 들으니 어떻습디까?"
"내 귀는 다만 물 소리와 스님이 낙엽 밟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오."
- 박제가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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