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군요. 문득 이 세계가 외계(外界)처럼 느껴졌다. 기하 형의 뒷모습이, 그래서 더욱 외로워 보였다. 인간은 서로에게, 누구나 외계인이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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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나는 지금 헛간 옆 버려진 빨간 기차간 위에 서 있다. 머리카락이 세차게 부는 바람에 날려 얼굴을 때리고, 열린 셔츠 목 사이로 들어온 한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산에 이렇게 가까워지면 돌풍이 세다. 마치 산꼭대기가 숨을 내쉬는 것처럼, 저 아래 보이는 계곡은 바람의 영 향이 미치지 않아 평화롭다. 그러나 우리 농장은 춤을 춘다. - P11

아버지가 해주는 이야기는 모두 우리 산, 우리 계곡, 우리가 사는 아이다호의 황량한 작은 땅덩어리에 관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산을 떠나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지나 낯선 곳에 섰을 때, 지평선 끝까지봐도 인디언 프린세스를 찾을 수 없는 곳에 섰을 때,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집에 돌아올 시간이라는 신호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아버지는 한 번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 P14

타일러 오빠의 죄책감은 엄청났다. 오빠는 사고가 전적으로 자기책임이라고 생각했고, 그 후로도 오래도록 여러 번 해가 바뀐 후에도 모든 결정, 모든 결과, 모든 반향 들이 모두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순간과 그로 인한 모든 결과가 오로지 자기 것이라고 느꼈다.
마치 시간 자체가 그 순간, 우리 스테이션왜건이 길에서 벗어난 그 순간에 시작됐고, 자기가 열일곱의 나이로 운전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든 그 순간 이전까지는 어떠한 역사도, 문맥도, 주체도 없었던 것처럼, 지금까지도 엄마가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조금만 뭔가를 잊어버리거나 하면 오빠의 눈에는 그 표정이 떠오른다. 
...

삶을 이루는 모든 결정들, 사람들이 함께 또는 홀로 내리는 결정들이 모두 합쳐져서 하나하나의 사건이 생기는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모래알들이 한데 뭉쳐 퇴적층을 만들고 바위가 되듯이. - P74

돌이켜보면, 바로 그것이 내 배움이요 교육이었다. 빌려 쓰는 책상에 앉아 나를 버리고 떠난 오빠를 흉내 내면서 모르몬 사상의 한 분파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보낸 그 긴긴 시간들 말이다.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참고 읽어 내는 그 끈기야말로 내가 익힌 기술의 핵심이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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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를 만난 뒤에는 그 사람의 사유를 적기보다 나의 사유를 적는다. 나의 이상은 우리의 공통된 사유를 더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적으면서도 나의자유를 적는 것이다. 쓰는 사람은 하나의 관념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내가 깊이 흡수하는 것, 꿰뚫어보려 애쓰는 것, 단어의 모든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나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쓰는 동시에 쓰는 것을 내 재산의 일부로 저장한다.
-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공부하는 삶」에서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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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를 단순히 ‘베껴 쓰기‘라고 생각한다면 고정관념입니다. 필사는 결국 자기 글을 쓰기 위한디딤돌입니다. 좋은 글을 베껴 쓰다 보면 나중엔 ‘나의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자연스레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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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아무런 병도 없었다. 사람들은 뼈가 쑤시고 아리는 일이 없었다. 또한 고열이 나는 일도 없었다. 그때는 천연두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복통, 폐결핵도 없었다. 그때는 사람들이 두 발로 바르게 서 있었다. 허나 이방인들이 오면서 모든 게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공포를 들고 왔다.
그들은 꽃을 말려 죽이러 왔다.  - P298

잉카의 마추픽추가 부분적으로는 피부점막리슈만편모충증의 성행 탓에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잉카인들은 이 병이라면 학을 뗐어요." 쿠스가 말했다. 리슈만편모충을 옮기는 샌드플라이는 높은 고도에서는 살지 못하지만, 잉카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작물인 코카나무를 경작하는 저지대에는 널리 퍼져 있었다. 마추픽주는 딱 적당한 고도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마추픽추에서 왕과 조정 대신들은 가장 무시무시한 병에 걸릴 위험 없이 안전한 장소에서 통치를 하고, 코카 경작과 관련된 제식을 주재할 수 있었다.
16세기에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남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안데스산맥 저지대의 원주민들, 특히 코카나무 경작자들의 안면 기형을 보고 섬뜩함에 몸서리를 쳤다. - P312

 사실 그 병은 제1세계 사람들을 공격한 제3세계 질병이었다. 현재 세계는 구세계와 신세계가 아니라 제1 세계와 제3세계로 나뉜다. 과거에는 제3세계에만 국한되었던 병원균들이 이제는 제1세계를 지독할 정도로 잠식해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벌어질 질병의 미래 궤도인 셈이다. 병원균에게는 경계가 없다. 그것들은 궁극의 여행자들이다. 병원균에게 연료가 되는 인간이라는 땔감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간다. 우리 제1세계 사람들은 질병, 특히 ‘소외된 열대병들‘이 제3세계에 격리되어 있을 것이라고, 병원균들이 못 들어오게 막고서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 무사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과할 정도로 안일하게 생각했다. 머나먼 땅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의 고통은 외면한 채 말이다. - P375

 이때껏 영원히 살아남은 문명은 없었다. 하나같이 차례대로 소멸을 향해 움직였다. 해변의 부서지는 파도처럼 말이다. 그 어떤 것도 이러한 우주의 섭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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