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워낙에 작은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 무슨 수를 써도 절대 아담한 사람이 될 수가 없다. 일단, 나는 키가 무척 크다. 이것은 저주이자 은혜가 되기도 하는데 나는 존재감이 있다는 말을자주 듣는다. 나는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 나는 중압감을 준다. 나는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싶지 않다. 나는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다. 나는 숨고 싶다. 내 몸의 주도권을 다시 찾을 때까지 잠시 사라져버리고 싶다.
내 몸이 어떻게 이렇게 제멋대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안다. 이것은 내가 늘 입에 달고 다니는 후렴구와도 같다. 내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것은 축적의 문제였다. 나는 내 몸을 바꾸기 위해 먹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내 의지가 매우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소년들이 나를 파괴했고 나는 파괴 현장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그와 같은 폭력을 또다시 겪으면 살 수가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았고 나의 몸이 역겨워지면 남자들을 멀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열심히 먹었다. 어린나이에도 뚱뚱하면 남자들에게 매력적이지 않다고 이해했고, 그들이 경멸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가 된다는 걸 이해했고, 나는 그들의 경멸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소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배운다. 날씬하고 아담해야 한다고. 자리를 많이 차지해선 안 된다고. 남자들 눈에 보기 좋아야 한다고, 사회에서 받아들일 만해져야 한다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알고 있다. 우리는 점차 작아지고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더 크게 반복적으로 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이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기준에 힘없이 굴복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다. - P32

하지만 이건 내가 한 일이다. 이 몸은 내가 만들었다. 나는 뒤룩뒤룩살이 쪄갔다. 갈색의 살덩이들이 내 팔과 허벅지와 배를 몇 겹으로 돌돌말고 있다. 지방들은 내 팔다리 주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더 이상 갈곳이 없게 되자 그 살들 위에서 눕고 뻗을 자리를 만들어갔다. 나의 몸곳곳에 살이 튼 자국들이 선명히 찍혔고 거대한 허벅지에는 셀룰라이트주머니들이 출렁거렸다. 지방 덩어리들은 새로운 몸을 형성했고 이런몸이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나를 안전하게 느끼게 했으며 그때는 안전의느낌만큼 중요한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아무도 통과할 수 없는 요새가 되고 싶었고 아무도 맞서지 못하는 무적이 되고 싶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내 몸에 손대지 않길 바랐다.
내가 나 자신에게 이런 짓을 했다. 온전히 나의 과오이자 나의 책임이다.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이 몸에 대한 책임을 나 혼자 감당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 P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본인이 기분좋을 때는 한없이 다정한 아빠처럼 굴다 금방 변덕 부리며 모두를 긴장시켰던 것도. 정말이지 채운은 그 긴장이 지긋지긋했다. 아마 엄마도 그랬을 터였다. 그 어느 곳보다도 편안하지 않던 곳. 현관문 앞에서 늘 크게 다짐하며 들어가야 했던 곳이 채운에게는 ‘가정‘이었다. - P136

문득 네 어릴 때 생각이 난다. 네가 막 걷기 시작했을 무렵 뽕뽕 소리 나는 샌들을 신고 아장아장 동네 골목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그럴 때면 나는 뿌듯한 감정이 들면서도 왠지 네가 그대로 영영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가슴이 저렸지.
부모들은 한 번쯤 다 겪는 감정이고.
그런데 이제 나는 네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눈앞에 출구가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아니라 기도니까. 너는 너의 삶을 살아, 채운아. 나도 그럴게. 그게 지금 내 간절한 소망이야. 이건 희생이 아니란다. 채운아. 한 번은 네가, 또 한번은 내가 서로를 번갈아 구해준 것뿐이야. 그 사실을 잊지 말렴. - P182

지우는 화면 속 태오의 얼굴을 가만 바라봤다. 그러곤전자 펜으로 지우기 기능을 이용해 태오의 눈가에 어린 물기를 수정했다. 마치 그림 속 인물의 눈물을 닦아주듯 펜 끝으로 눈가의 물기를 지우고 또 채워나갔다. 지우가 이해하기로 지우개는 뭔가를 없앨 뿐 아니라 ‘있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대상에 빛을 드리우고 그림자를 입힐때 꼭 필요했다. 그 대상이 사물이거나 인물, 심지어 신일때조차 그랬다. 누구든 신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는 신의얼굴을 조금 지워야 했다. ‘광원‘, 즉 빛이 출발한 곳을 먼저파악해 빛이 닿는 곳은 어둡게, 그렇지 않은 데는 밝게 표현하는 게 기본이었다.  - P200

꿈에서 나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돌아왔다.

지우가 속으로 그 문장을 한번 더 되었다. 동시에 한 손이 파르르 떨렸다. 평소에 연필을 쥐는 손이었다. - P2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뇌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대표적인 실험이 1870년대 독일 생리학자 구스타프 프리츠(GustavTheodor Fritsch)와 에두아르트 히치히(EduardHitzig)의 뇌 전기자극 실험이다. 두 독일 과학자는 뇌 특정 영역을 전기로 자극함으로써 뇌가 근육 운동을 조절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증명했다.
이들은 인간이 아닌 개를 대상으로 실험했다. 개의 두개골을 열고 뇌 피질을 노출한 후 전극을 사용해 뇌의 다양한 부분에 전기자극을 가했다. 자극한 뇌 위치에 따라 다리, 얼굴, 목 등의 움직임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다. 이 실험을 통해 뇌의 특정 부위(운동피질)가 신체 특정 부위를 제어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로 인해서 뇌의 각부분이 특정 기능에 특화되어 있다는 개념도 확고해졌다.  - P83

뉴럴링크가 개발한 BCI는 운동피질에 있는 뉴런의 전기 신호를 기록하고 컴퓨터로 신호를 전송한 후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운동피질은 사고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알렉스는 어떻게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을까? 프리츠와 히치히의 연구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운동피질은 신체가 움직일 수 있도록 명령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칩이 뉴런으로부터 받는 뇌파는 몸을 움직일 때 필요한 여러 가지 명령어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텔레파시 칩은 알렉스의 생각을 읽어서 컴퓨터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움직이고자 하는 명령을 기록해 이용하는 셈이다. - P85

칭화대학 연구진은 중국 서우두의과대학 부속 쉔우병원 연구진과 함께 교통사고로 14년동안 침대에 누워 지내고 있던 사지 마비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2024년 1월 29일 쉔우병원은 실험에 참여한 환자가 오른손에 공기압력 장갑을 끼고 생각만으로 물잔을 들어 물을 마신 후 다시 물잔을 내려놓는 모습을 공개했다. 환자는 전해 10월 24일 뇌와 두개골 사이 경막외 공간에 동전 크기의 칩 두 개를 이식받았다. 환자 뇌에 삽입한 칩은 NEO (NeuralElectronic Opportunity)라고 불린다. 쉔우병원 자오궈광 원장은 두 개의 프로세서는 각각 4개의 접점을 가지고 있으며, 환자의 오른손에 신경을 전달하는뇌 영역에 총 8개의 접점이 배치되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수술 전에 MRI로 ㅓ뇌 기능을 측정해 오른손을 움직일 때나 움직이려고 할 때 활성화한 뇌 영역을 찾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뉴럴링크 기술과 달리 두개골에 칩을 장착할 수 있어 신경 조직을 파괴하지 않고도 신호 품질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근거리 무선 전원 공급 및 신호 전송 방식을 채택해서 별도의 배터리가 필요 없는 것도 큰 장점으로 꼽았다. - P89

이 턱뼈 화석은 1790년대에 옥스퍼드셔(Oxfordshire)에 있는 한 광산에서 발견된 거였다. 끝부분만 보존된 턱뼈였지만 크기가 어른 손바닥 두 개만한 큰 화석이었다. 턱뼈 한쪽에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들쑥날쑥 솟아 있었다.
퀴비에는 이것이 도마뱀의 아래턱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퀴비에는 이 화석이 거대한 파충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당시옥스퍼드대학의 지질학 교수 윌리엄 버클랜드(William Buckland)에게 귀띔해줬다. 그동안 학계에서 보고된 적이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동물이었다. 퀴비에로부터 중요한 힌트를 얻은 버클랜드는 이때부터 이 거대 파충류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학의 인기 강사였던 버클랜드는 하루하루가 바쁜 사람이었다. 그의 연구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
1824년이 돼서야 버클랜드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학계에 보고할 수있었다. 그는 이 파충류에게 ‘큰 도마뱀‘이란 뜻의 그리스어 ‘메갈로사우루스(Megalosaurus)‘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메갈로사우루스는 학계에 최초로 이름을 붙여준 공룡이었다. 메갈로사우루스를 시작으로 한 공룡 연구가 2024년 200주년을 맞이했다. - P119

하지만 당시 그 누구도 메갈로사우루스와 이구아노돈을 공룡이라 부르지 않았다. 공룡 자체를 아무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메갈로사우루스와 이구아노돈이 좀 특별한 파충류임을 처음 알아차린 사람은 생물학자이자 고생물학자였던 리처드 오웬(Richard Owen)이었다.
1842년 오웬은 당시 영국 왕립 외과 의과대학(Royal College of Surgeonsof England)의 교수였다. 그는 메갈로사우루스와 이구아노돈의 다리 구조가일반적인 파충류보다는 포유류와 무척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도마뱀이나 악어와 같은 파충류는 다리가 몸의 옆으로 뻗어 있다. 땅을 향해 내리누르는 몸무게를 지지하기가 힘든 구조다. 반면에 메갈로사우루스와 이구아노돈은 포유류처럼 다리가 몸의 밑으로 뻗어 있었다. 거대한 몸을 잘 지지할 수 있는 구조였다.
오웬은 메갈로사우루스와 이구아노돈을 묶어서 새로운 파충류 무리를 보고했다. 그는 파충류 무리에게 그리스어로 ‘무서울 정도로 큰 도마뱀‘이란 뜻의 ‘다이노소어 (dinosaur)‘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메갈로사우루스, 이구아노돈이란 두 동물 모두 몸집이 커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19세기 말쯤에 ‘다이노소어‘는 일본에서 한자로 ‘恐(두려울 공)‘, ‘龍(용 룡)‘으로 번역됐다. ‘공룡‘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 P120

1975년에 로버트 파커는 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오늘날의 포유류와 조류처럼 과거에 살았던 공룡 또한 항온동물이었다는 내용이다. 그는 공룡의 뱃속에 혈관 구조인 하버스관(haversian canal)이 발달했음을 알아냈다. 하버스관은 빠르게 성장하는 항온동물에서 관찰되는 특징이다. 빠른 성장은 곧 먹이 활동을 많이 했음을 의미한다. 변온동물은 몸을 작동시키는데필요한 대부분의 에너지를 햇볕에서 받기 때문에 먹이 활동을 자주 할 필요가 없다.
뒤이어 공룡이 사회성이 있는 동물이었음을 보여주는 화석 증거들이발견됐다. 1978년 몬태나주에서는 초식 공룡의 집단 산란지가 발견됐다. 공룡들이 주기적으로 모여서 안전하게 둥지를 만들고 새끼를 키웠던 곳이었다. 둥지 속에서 발견된 새끼 공룡들은 다리가 연약해 걷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이빨은 닳아 있었다.
발견된 화석들을 토대로 당시 몬태나대학의 연구원이었던 존 호너(John Homer)는 새끼 공룡들이 둥지 속에서 지내며 부모가 가져다주는 먹이를 받아먹었을 것으로 해석했다. 공룡이 새끼를 돌보았다는 최초의 증거였으며, 이는 새끼를 적극적으로 돌보는 오늘날의 항온동물과 비슷한 습성이었다. 1979년 호너는 이 공룡에게 ‘좋은 어미 도마뱀‘이란 뜻의 그리스어 마이아사우라(Maizsaura)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오스트롬과 바커, 그리고 호너의 연구 결과는 그동안의 공룡에 대한인식을 뒤엎어버렸다. 공룡은 더 이상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굼뜬 ‘진화의 실패작‘이 아니었다. 공룡은 활동적이었고 사회성을 보였으며, 새끼도 돌볼 줄 아는 성공적인 동물들이었다. 이러한 인식 변화 덕분에 학계 내에서는 다시 공룡이 중요한 연구 주제로 취급받게 됐다. 데이노니쿠스의 발견을 시작으로 공룡연구가 다시 활기를 찾게 된 시기를 ‘공룡 르네상스
‘라고 한다. - P128

1980년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도시 구비오(Gubbio)에서 지질 조사를 하고 있던 지질학자 월터 알바레즈(Walter Alvarez)는 중생대 지층과 포유류의 시대인 신생대 때 만들어진 지층 사이에서 얇고 하얀 진흙층을발견했다. 이 진흙층 안에는 이리듐(iridium)이라는 원소가 다량 들어 있었다. 이리듐은 지상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주로 소행성에서 발견되는 희귀한 원소다.
알바레즈는 자신의 아버지인 물리학자 루이스 알바레즈(Luis Alvarez)와함께 이것을 연구했고, 중생대 지층과 신생대 지층 사이의 이리듐층을 소행성의 잔해물로 해석했다. 중생대가 끝날 무렵에 커다란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했고, 이때의 충돌로 인해 지구 환경이 급변하면서 공룡이 멸종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리듐 진흙층은 북아메리카와 유럽, 그리고 남아메리카에서만 발견된다. 그래서 알바레즈 부자는 소행성이 충돌한 지점이 이 일대와 가까운 지역이었을 거라고 보았다.
운석 충돌설이 세상에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행성이 충돌했던 지점이 발견됐다. 멕시코의 석유회사 페멕스(Permex)가 석유를 찾던 중 멕시코의 유카탄 (Yucatan) 반도에서 지름이 200km, 깊이가 1m나 되는 운석공(crater,운석구덩이)을 찾았다. 운석공 주변으로는 소행성 충돌로 인해 지구 표면의 암석이 녹았다가 빠르게 식어 만들어진 텍타이트(tektite)라는 암석들이 발견됐다. 연대 측정한 결과 텍타이트가 만들어진 시기는 약 6600만 년 전이었다. 중생대가 끝나는 시기와 맞아떨어졌다.
이젠 공룡 시대가 소행성 충돌로 인해 끝났다는 게 정설이다. 운석공의 크기를 통해 추정한 소행성은 지름이 약 10km로, 에베레스트산만 한 크기였다. 공룡 시대를 끝낸 소행성을 칙술루브 소행성 (Chicxulub asteroid)이라고 부르는데, 운석공이 발견된 지역 근처 마을에서 따온 이름이다. 칙술루브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했을 때 발생한 에너지는 히로시마 원폭 10억 개와 맞먹었다. 충돌지점의 온도는 태양의 표면만큼이나 높아졌다. 이 엄청난 에너지로 인해 소행성은 증발했고, 이때 발생한 대량의 먼지가 대기로 올라가는 바람에 햇빛이 20년 동안 가려졌다.
가려진 햇빛으로 인해 식물이 광합성을 하지 못해 죽었고, 그 뒤를 이어 초식 공룡과 육식 공룡도 차례로 죽었다. 이때 자취를 감춘 건 공룡뿐만이 아니다. 생태계가 붕괴되는 바람에 다양한 생물들이 피해를 봤다. 하늘을나는 파충류인 익룡 (Pterosauria)과 다양한 해양 파충류뿐만 아니라 일부 거북과 악어, 원시 포유류 등 당시 생물의 75%가 이때 멸종했다. 지구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일어난 대량멸종 사건이었다. - P130

 2022년 벨기에 왕립 자연사 박물관의 연구팀은 아주놀라운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 익룡과 공룡 깃털의 세부적인 구조가 서로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두 동물은 모두 억센 털처럼 생긴 원시 깃털, 그리고 깃대를 중심으로 얇은 가지들이 갈라져 있는 복잡한 깃털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 동물 중에는 익룡과 공룡만 깃털이 확인됐다.
연구팀은 더 나아가 익룡과 공룡의 깃털 화석을 주사전자현미경(scanning electron microscope)으로 촬영했다. 줄임말로 SEM이라고 부르는 이 기기는 성능이 아주 뛰어난 현미경으로, 모기 더듬이에 난 털도 촬영이 가능할정도다. 아무튼 SEM을 이용해 연구팀은 익룡과 공룡의 깃털 화석에서 똑같이 생긴 멜라노솜(melanosome)을 찾았다. 멜라노솜은 색소를 만드는 세포 속 작은 기관이다.
익룡과 공룡의 깃털은 겉모습뿐만 아니라 미세구조도 똑같았다. 그래서 연구팀은 이 두 동물의 깃털이 같은 조상 동물로부터 물려받았을 것으로 결론지었다. 벨기에 연구팀의 주장이 맞는다면 깃털은 적어도 2억 4700만년 전, 그러니까 익룡과 공룡의 조상 동물이 등장했던 시기부터 있었을 것이다. 조류는 약 7200만 년 전에 처음 등장했다. 깃털이 조류보다도 훨씬 오래됐다는 얘기다.
SEM으로 촬영한 멜라노솜으로 학자들은 요즘 공룡의 색깔도 복원할수 있다. 멜라노솜은 오늘날 살아 있는 동물도 갖고 있다. 멜라노솜의 모양을 관찰하면 피부나 깃털이 어떤 색이었는지를 추정할 수 있다. 소시지처럼 길쭉한 멜라노솜은 검은색에서 회색 계열의 색을 만든다. 단팥빵처럼 둥근모양의 멜라노솜은 적갈색에서 황색 계열의 색을 만든다. 각각의 멜라노솜밀도를 관찰하면 공룡의 피부와 깃털 색을 복원할 수 있다. 이런 멜라노솜의흔적을 ‘물감‘ 화석이라고 부르는 학자들도 있다. 공룡 세계의 색을 가져올수 있게 된 것이다. - P1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추천사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글은 글쓴이 자신의 이야기다.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형식이 다를 뿐이다. 영화든 소설이든 논문이든 신문 기사까지, 모두 쓴 사람의 이야기다. 따라서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이다. 자기 현실과 재현 사이의 거리는 글마다 다르지만, 가장 어려운 글쓰기는 <헝거> 같은 형식의 이야기다. ‘자서自敍‘는 자서전自敍傳과 다르다.
성별과 인종, 계급 등 사회적 위치성과 무관하게 ‘자서‘는 상처와 고통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 이슈들은 ‘드러내기 어렵다‘기보다 ‘잘‘ 드러내기 어렵다. 자기 연민과 나르시시즘은 최악의 인성이자 글쓰기태도인데 그 덫에 걸리기 쉽다. 예술에서 권력자는 상처받은 사람,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하긴 상처가 아니라면, 왜 쓰겠는가? 상처가 없으면 쓸 일도 없다. 작가는(학자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팔아먹을 수 있는‘ 덮어도 덮어도 솟아오르는 상처wound가 있어야 한다.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삶이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산을 넘는 일이다. - P9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고 역사가 있다. 지금 이곳에서 내 이야기와 내 역사를 들려주려 한다. 내 몸과 내 허기에 관해 고을 하려 한다. - P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리가 휴대전화 액정 위로 두 손가락을 벌려 엄마 얼굴을 확대했다. 긴 투병 기간 동안 엄마 몸은 계속 달라졌다.
장기는 물론이고 몸의 전체적인 선과 색이 변해갔다. 평소 엄마 모습을 많이 그려온 소리는 그걸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아픈 엄마를 그리다 말고 종종 손을 멈췄다. 소리는 엄마가 떠난 뒤에도 엄마 얼굴을 자주 그렸다. 엄마의 눈동자에 고인 빛을 표현할 땐 더 공을 들였고, 어깨선을 다듬을 땐 실제로 엄마를 쓰다듬는 것처럼 했다. 그렇게 한때 엄마였거나 여전히 엄마인 선들을 좇으며 손끝으로 엄마를 만졌다. 그런 식으로 엄마를 한번 더 가졌다. - P1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