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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글은 글쓴이 자신의 이야기다.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형식이 다를 뿐이다. 영화든 소설이든 논문이든 신문 기사까지, 모두 쓴 사람의 이야기다. 따라서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이다. 자기 현실과 재현 사이의 거리는 글마다 다르지만, 가장 어려운 글쓰기는 <헝거> 같은 형식의 이야기다. ‘자서自敍‘는 자서전自敍傳과 다르다.
성별과 인종, 계급 등 사회적 위치성과 무관하게 ‘자서‘는 상처와 고통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 이슈들은 ‘드러내기 어렵다‘기보다 ‘잘‘ 드러내기 어렵다. 자기 연민과 나르시시즘은 최악의 인성이자 글쓰기태도인데 그 덫에 걸리기 쉽다. 예술에서 권력자는 상처받은 사람,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하긴 상처가 아니라면, 왜 쓰겠는가? 상처가 없으면 쓸 일도 없다. 작가는(학자도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팔아먹을 수 있는‘ 덮어도 덮어도 솟아오르는 상처wound가 있어야 한다.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삶이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산을 넘는 일이다. - P9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고 역사가 있다. 지금 이곳에서 내 이야기와 내 역사를 들려주려 한다. 내 몸과 내 허기에 관해 고을 하려 한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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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휴대전화 액정 위로 두 손가락을 벌려 엄마 얼굴을 확대했다. 긴 투병 기간 동안 엄마 몸은 계속 달라졌다.
장기는 물론이고 몸의 전체적인 선과 색이 변해갔다. 평소 엄마 모습을 많이 그려온 소리는 그걸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아픈 엄마를 그리다 말고 종종 손을 멈췄다. 소리는 엄마가 떠난 뒤에도 엄마 얼굴을 자주 그렸다. 엄마의 눈동자에 고인 빛을 표현할 땐 더 공을 들였고, 어깨선을 다듬을 땐 실제로 엄마를 쓰다듬는 것처럼 했다. 그렇게 한때 엄마였거나 여전히 엄마인 선들을 좇으며 손끝으로 엄마를 만졌다. 그런 식으로 엄마를 한번 더 가졌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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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자동차 급발진 의심 사고가 지난 40여 년간 발생하였음에도 단 한 건도 최종 승소한 경우가 없다. 그만큼 관련 법규가 운전자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즉 관련 법규인 제조물책임법(PL법)에는 운전자가 자동차의 결함을 밝혀야 하는 구조로 되어있어서,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운전자가 가장 복잡한 자동차의 결함을 찾는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동차 급발진의 원인은 전자제어의 이상으로 추정되는 만큼 흔적이 남지 않아서 국과수에서 조사한 결론도 브레이크가 정상 동작하는 등으로 밝혀져 불리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자동차 사고기록장치인 EDR(Event Data Recorder)의 기록도 ‘제작사의 면죄부‘라고 언급될 정도로 운전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EDR이라고 불리는 장치는 이전에 제작사가 자사 차량의 에어백이 터지는 전개과정을 보기 위해 넣은 소프트웨어가 어느 시점부터 자동차 사고기록장치로 둔갑한 경우다. 이 기록은 자동차가 정상적으로 동작한 경우에는 중요한 증거로서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으나 실제로 자동차 급발진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급발진의 경우 자동차 전자제어시스템이 오동작하고 있는 만큼 자동차의 두뇌라 할 수 있는 전자제어장치(ECU)를 통해 기록되는 EDR의 기록은 신뢰성 측면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치매환자나 정신병자의 증언은 증거로 사용할 수 없는데, EDR의 기록도 증거로 사용하는 데 문제가 많다. 그럼에도 수십 년간 다양한재판과정에서 국과수에서 제출한 EDR 자료는 운전자가 패소하는 직접적인 증거로 활용되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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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이 공영주택을 구입해서 이사를 오기 시작한 뒤로 교장은 학교의 평가를 올리는 데 힘쓰고 있어요. 저는 그 때문에 가난한 아이들이 점점 구석으로 내쫓기는 것 같아요.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상황이 더 힘들어졌을 거예요. 빈곤하다 해도 주위에 비슷한 사람들이 많은 것과 오직 나만 가난한 건 전혀 다르니까요. 후자가 훨씬 고통스럽죠. 배고플 때,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처지라면 소리 내어 말할 수 있지만 나만 배고프면 아무 말도 못 해요." - P124

"왜 나한테 주는데?"
팀은 커다란 초록색 눈으로 아들을 보며 물었다.
질문은 아들을 향했지만, 외려 내가 팀의 눈빛에 가슴을 꿰뚫린 것만 같았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서 있는데, 아들이 입을 열었다.
"친구니까. 너는 내 친구니까."
팀은 "고마워." 하고는 교복을 쇼핑백에 넣고 아들과 하이파이브를 한 다음 현관으로 나갔다.
"갈게."
"잘 가. 내일 학교에서 봐."
현관 옆 창문으로 은빛이 섞인 금발을 한 자그마한 소년이쇼핑백을 흔들며 공영단지로 향하는 언덕길을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도중에 팀이 오른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는 듯한 동작을했다. 팀이 똑같은 동작을 한 번 더 하자 아들이 조용히 입을열었다.
"팀도 엄마처럼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대. 맑은 날은 힘든가봐."
"응, 오늘 진짜 꽃가루가 많네.... 엄마도 올해 들어 가장 힘든 것 같아."
아들은 오래도록 창문 옆에 서서 유리창 너머로 점점 작아지는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팀의 손에 들려 흔들흔들하는 노란색 쇼핑백이 초여름의 강한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반짝 빛났다. - P131

아이들에게 있어 양육자란 밖에 있다가도 언제든 돌아갈수 있는 안정적인 마음의 기지와 같은 존재다. 미국의 심리학자 메리 에인스워스 Mary Ainsworth는 그런 존재를 ‘안전기지‘secure base라고 불렀다.
밑바닥 어린이집의 책임자였던 나의 스승 애니는 곧잘 이렇게 말했다.
"안전기지를 갖지 못한 채 성장한 사람은 어떡해야 자신이안전기지가 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육아를 힘겨워한다."
실제로 내가 일했던 어린이집에도 담당 사회복지사가 있는 아이는 그 부모 역시 복지과의 보호를 받으며 시설이나 위탁 가정에서 성장한 경우가 제법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자신이 갓난아이일 때 버려졌다고 말했다. 실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런 것으로 해두려 했다. - P211

"어려운 일 같아. 사물함이나 체육복은 누가 했는지도 모르고, SNS에 심한 말을 쓴 것도 애초에 다니엘한테 문제가있기 때문이라고 하면 맞는 말이긴 하니까. 다니엘이랑 말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것도 개인의 취향이라고 하면 더 할 말이 없어."
아들과 친한 친구들 중에는 다니엘과 절교한 아이도 있다.
하지만 아들이나 (다니엘과 주먹싸움을 벌였던) 팀처럼 다니엘에게서 직접적으로 차별당해 서로 부딪쳤던 아이들은 친구로 남았다.
"다니엘한테 심한 말을 들은 흑인 아이나 언덕 위 공영단지에 사는 아이들은 다니엘을 괴롭히는 데 끼지 않았어. 괴롭히는 건 전부 아무 말도 듣지 않았고 아무 일도 당하지 않은 관계없는 애들이야. 그게 제일 기분 나빠"
아들이 말했다.
"인간이란 패거리로 어울려서 타인을 괴롭히길 좋아하니까"
내가 말하자 아들은 스파게티를 먹던 손을 멈추고 똑바로내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전에는 거의 본 적 없는 불가사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인간이 타닌을 괴롭히길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벌 주는 걸 좋아하는 거야." - P226

"그런데 그 학교에서 중국인이 학생회장이라니 대단하네.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 같은 학교였는데."
"응, 시대가 변했다는 게 실감되더라."
내 말을 듣고 배우자가 말했다.
"이래저래 반발이 있겠지."
"어?"
"절대 없을 것 같은 일이 그렇게 쉽게 일어날 리 없잖아."
확실히 그렇긴 하다. 내가 중학생들에게 "춘권 할매"라든가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은 게 5, 6년 전인데, 그런인식이 몇 년 사이에 깨끗이 사라질 수는 없기 마련이다. 학생들의 아지트였던 공원은 애들이 숨어서 나쁜 짓을 하던 수풀을 깨끗이 깎았다. 정기적으로 경찰이 돌아보며, 교사와 보호자들이 조직한 순찰대도 가서 둘러보곤 한다. 그래서 지금은 부모가 아이를 데려가 놀 수 있는 평화로운 곳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의 내면에 있는 감정이나 의식은 공원의 수풀처럼 간단히 잘라버릴 수가 없다.
‘드러내다‘와 ‘존재하다‘는 서로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 P243

"가톨릭 학교 애들도 시위에 못 갔다는 말을 듣고 좀 안심했어."
에스컬레이터로 내려서며 아들이 말했다.
"너희만 시위를 즐기지 못한 게 아니라서?"
내가 묻자 아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답했다.
"좀 슬펐어. 성적이든 뭐든 잘나가는 학교 애들은 전부 시위에 참가하는데, 별 볼 일 없는 학교는 허락해주지 않으니까 우리만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고 소외되는 느낌이었어."
"그런 기분을 ‘주변화되었다marginalized‘라고 해."
내 말에 아들이 다시 질문했다.
"변두리margin로 쫓겨난 느낌이라는 거야?" - P283

옐로에 화이트인 아이가 꼭 블루일 필요는 없다. 굳이 색깔로 말해야 한다면 그린이라는, 인종도 계급도 성적 지향도 관계없이 아들에게도 팀에게도 다니엘에게도 올리버에게도 다른 밴드 멤버들에게도 공통되는 아직 미숙한 10대의 색이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린 이디어트‘라는 밴드 이름은 이중적인 의미로도 좋지 않을까. 내 생각을 전하려 했지만 아들은 이미 2층으로 올라가 자기 방에서 기타를 친다.
정말이지 아이라는 존재는 멈출 줄을 모른다. 쭉쭉 나아가며 끊임없이 변한다.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그린... 일단 지금은.
색깔은 틀림없이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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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가 잠시 뜸들이다 자신 없는 투로 답했다.
-그냥...... 이야기가 좋아서?
순간 소리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래? 넌 이야기가 왜 좋은데?
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끝이...... 있어서?
소리가 신기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난 반댄데
-뭐가?
난 시작이 있어 좋거든. 이야기는 늘 시작되잖아.
지우가 잠시 먼 데를 봤다.
-이야기에 끝이 없으면 너무 암담하지 않아? 그게 끔찍한 이야기면 더.
소리도 시선을 잠시 허공에 뒀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시작조차 안 되면 허무하지 않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잖아. - P66

채운이 기억하기로 아버지는 구태의연한 말을 의기양양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삶에서 진부한 교훈을 추출해 남들에게 설파하기를 즐기는 사람. 그러나 본인은 그 교훈대로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티브이에 여행 프로그램이나왔을 때도 그랬다. 여행자가 러시아의 한 공예품점에 들어가 ‘마트료시카를 살 땐 맨 마지막 것까지 채색이 잘 되어있는지 꼭 확인하라‘고 하자 아버지는 비웃는 투로 말했다.
-저것 봐라. 인간들은 틈만 나면 서로 속이고 거짓말하고 등쳐먹으려 한다.
-......
-그러니 너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

-우리 삼촌은 오늘 가게 한쪽에 작은 산타 인형을 만들어놨어. 뿔소라로 산타 모자도 만들고.
요즘 지우가 종일 보는 거라고는 황량한 시멘트 벽면과온갖 배관, 전선, 비계뿐이었지만 지우는 그렇게 썼다.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여기 잘 왔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고향이기도 하고.
지우는 자기도 모르게 술술 새어나오는 거짓말에 조금 놀랐다. 사실 방학 첫날 소리에게 용식을 맡길 때 지우는 ‘방학동안 외삼촌 가게를 도울 거‘라고 했다. ‘게스트하우스랑 카페, 파도타기 용품 대여를 겸하는 곳인데 삼촌이 와서 일도 배우고 마음도 좀 추스르라 했다‘면서 지우는 ‘마음 좀 추스르라‘는 말이 소리에게 어떻게 들릴지 알았고, 순간 그런 계산을 하는 스스로가 좀 싫었다. 그때만 해도 소리와 이렇게 연락을 주고받을 줄 몰랐는데, 단지 용식을 돌봐주고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우는 소리가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의 신뢰감과 친밀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 P88

채운은 의아했다. 그렇지만 우리 아버지가 그애 어머니에게 무례하게 군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곤 그애 어머니 앞치마에 오만원쯤 찔러줬을지도 모르지. 당장 집에 생활비도 잘못 주면서.‘
평소 아버지는 본인이 잘못한 상황일 때 상대에게 과한선물을 줘서 그 순간 상대를 피해자가 아닌 부채자로 만들었다. 채운만 해도 아버지에게 받은 비싼 축구화며 유니폼이 셀 수 없이 많았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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