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주장한 ‘음모‘ 죄는 기각되었는데, 이 항목으로 그는 ‘주요 전범‘이 되어 최종 해결책과 관련된 모든 일에 대해 자동적으로 책임지도록 되어있었다. 그들은 비록 몇몇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면소를 시키기는 했지만 15개의 기소 항목 모두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다른 죄목과함께‘ 그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를 범했다. 즉 1)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살상함으로써‘ 2)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신체적인 파멸로 이끄는 상황으로 몰아감으로써, 3) 그들에게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해를 끼침‘으로써, 4)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유대인 여성들의 출산을 금하고 임신을 방해함으로써 이 민족을 파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유대인에 대해범죄를 저질렀다는 4가지 기소 항목에 따라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그들은 1941년 8월 이전의 시기에 대해 부과된 어떠한 죄목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는데, 그 시점은 총통의 명령이 전달된 때였다. 그 이전의 시기의 활동들과 베를린 및 빈, 프라하에서 그는 ‘유대인을 파멸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 P339
11항에서는 ‘수천 명의 집시들‘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한 것을 다루었다. 그러나 판결문에서는 "피고가 집시들을 파멸 지역으로 이송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가 우리 앞에서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말의 의미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대량학살 죄목도 부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집시들의 처형이 상식이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아이히만은 경찰심문 시 그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힘러의 명령이었다는 것. 유대인에 대해서 있었던 것과 같은 ‘지시사항‘이 집시들에게는 없었다는 것. 그리고 ‘집시 문제‘에 대해서는 기원과 관습, 습관, 조직•••••• 민요•••••• 경제‘ 등과 같은 것에 대한 어떠한 ‘조사‘도 없었다는 것을 아이히만은 희미하게나마 기억했다. 그의부서는 제국의 영역으로부터 3만 명의 집시들을 ‘소개하는 업무를 담당했는데, 그가 세부사항들을 아주 잘 기억할 수 없었던 것은 어느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집시들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제거되기 위해 이송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는 결코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의 학살에 대해 유죄인 것과 전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집시들의 학살에 대해서도 유죄였다. - P340
자신이 기소된 범죄들에 대해 ‘교사‘한 부분에서만 유죄일 뿐이며, 공공연한 행위를 자행한 적이 결코 없었다는 것을 아이히만이 줄곧 주장한 점은 기억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판결문은 검찰이 이 점에서 아이히만이 유죄라는 것을 입증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한편으로 인정했다. 이 점은 중요했다. 그것은 일상적 범죄에 해당되지 않는 이 범죄의 핵심 자체에 닿아 있으며, 일반 범죄자가 아닌 이 범죄자의 본질 자체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함축적으로 판결문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실제로 살상 수단들을 손으로 조작한 사람들은 통상 수감자들과 희생자들이었다는 섬뜩한 사실을 역시 인정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했던 것은 정확성 이상의 것이었으며, 그것은 진실이었다. "우리의 형법 제23조에 따라 그의 행동들을 표현하자면, 그들은 타인에게 [범죄적] 행위를 하도록 돕거나 사주한 사람이거나, 또는 자문이나 충고를 함으로써 유혹한 사람이라고 말해야만한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고민하고 있는 범죄의 경우처럼 엄청나고 복잡한 경우, 즉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차원에서 그리고 다양한 행동방식(그들의 다양한 지위에 따라 입안자, 기획자, 실행자)으로 참여한경우 범죄를 저지르도록 자문하고 유혹했다는 일상적 개념을 사용하는것은 의미가 없다. 이러한 범죄들이 희생자의 수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범죄에 개입한 사람들의 숫자의 측면에서도 집단적으로 이루어졌기때문에, 이 수많은 범죄자들 가운데 희생자들을 실제로 죽인 것에서 얼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었던가 하는 것은, 그의 책임의 기준과 관련된 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와 반대로, 일반적으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 P342
원래의 판결문과 명백히 대조된 점은 "항소자가 ‘상관의 명령‘을 전혀 받지 않았음"이 이제는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스스로가 자신의 상관이었으며, "유대인 문제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그가 모든 명령을 내렸다." 더욱이 그는 "중요성에 있어서는 뮐러를 포함한 그의 모든 상관들을 능가했다." 아이히만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유대인의 운명이 더 나아지지는 않았을것이라는 피고 측의 주장에 대해, 판사들은 이제 "최종 해결책이라는 아이디어는 항소자와 그의 공범자들의 억누를 수 없는 피의 갈증과 광신적 열정이 없었다면 수백만의 유대인의 벗겨진 살갗과 고문당한 살이라는 연옥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검찰의 논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언어 자체도 차용한 것이다. 같은 날인 5월 29일에 이스라엘 대통령 이츠하크 벤츠비는 ‘변호사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4장의 친필로 된 아이히만의 사면 청원서를 린츠에 있는 그의 아내와 가족으로부터 온 편지와 함께 받았다. 대통령은 또한 전 세계로부터 온 관대한 조치를 호소하는 수백 통의 편지와 전문을 받았다. 이들 가운데 저명한 인사로는 미국랍비중앙회, 미국개혁주의 유대교대표단, 그리고 마르틴 부버가 이끄는 예루살렘 소재 히브리 대학 교수의 한 그룹이 있었다. 부버는 처음부터 이 재판에 반대했으며, 이제는 벤구리온에게 관대한 조치를 내리도록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대법원이 판결을 내린 지 이틀이 지난 5월 31일에 벤츠비씨는 모든 자비의 청원을 물리쳤다. 그리고 같은 날 몇 시간이 지난 뒤(그날은 목요일이었다) 자정이 되기 직전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사체는 화장되었고 재는 지중해의 이스라엘 수역 밖에 뿌려졌다. - P345
마르틴 부버는 이 재판을 "역사적 차원에서의 실수"라고 불렀다. 이 일이 "독일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느끼는 죄책감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상하게도 아이히만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부버는 아이히만이 독일 청년들의 어깨에서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을 공개처형해주기를 원했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했다. (부버처럼 저명할 뿐만 아니라 아주 위대한 지성인이 이 같은 아주 대중화된 죄책감이 필연적으로 얼마나 기만적인가를알지 못했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만일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 데도 죄책감을 느낀다면 이는 유쾌한 일이다. 이 얼마나 고귀한일인가! 반면 죄를 인정하고 회개를 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며 상당히 우울한 일이다. 독일의 젊은이들은 생활의 모든 면과 모든 행로에서 실제로 죄가 크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정부 당국이나 공공기관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이런 사태에 대한 정상적반응은 분개하는 것이겠지만, 분개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생명과 신체에 위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취업에 결정적으로 장애가 된다. 아주 가끔씩, 「안네의 일기』와 같은 소동이나 아이히만 재판과 같은 경우, 히스테리컬한 죄책감의 분출로 우리들을 대하는 그들 젊은 독일의 남녀들은 과거의 부담, 즉 그들의 아버지의 죄 아래서 혼미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바로 현재의 현실적인 문제들이 주는 부담으로부터 값싼 센티멘털리티로 도망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 P347
아돌프 아이히만은 아주 근엄한 태도로 교수대로 걸어갔다. 그는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요구했고 그 절반을 마셨다. 그는 그에게 성서를 읽어주겠다고 제안한 개신교 목사 윌리엄 헐 목사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는 두 시간밖에 더 살 수 없기 때문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감방에서 형장에 이르는 50야드를 조용히 그리고 꼿꼿이 걸어갔다. 간수들이 그의 발목과 무릎을 묶자 그는 간수들에게 헐렁하게 묶어서 자신이 똑바로 설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검은색 두건을 머리에 쓰겠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그것이 필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는 완전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로 남긴 기괴한 어리석음보다도 이 점을 더 분명히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을 믿는 자라고 분명히 진술하면서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일반적인 나치스 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 P349
뉘른베르크 국제군사법정은 그들의 범죄가 지역으로 구분될 수 없는 전범들을 위해서 수립되었는데, 그 외 모든 다른 전범들은 그들이 범죄를 저지른 나라들로 보내졌다. 오직 ‘주요 전범들만이 지역의 한계 없이 활동했고, 아이히만은 분명히 그러한 사람들가운데 한 명은 아니었다. (이것이 그가 뉘른베르크에서 고발되지 않은 이유였다. 흔히 언급되는 것처럼 그의 잠적이 이유가 아니었다. 예컨대 마르틴 보르만은 궐석으로 고발되고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았다.)만일 아이히만의 활동이 점령지 유럽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그가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어서 지역적 제한이 그에게는 적용되지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그의 부하들이 전 유럽대륙을 돌아다닌 것이 그의 업무, 즉 모든 유대인을 모아서 이송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범죄가 뉘른베르크 헌장의 제한적인 법적 의미에서 ‘국제적 관심사로 만든 것은 유대인이 지역적으로 분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일단 유대인이 그들 자신의 영역, 즉 이스라엘 국가를 갖게 되자 마치 폴란드인들이 폴란드에서 저지른 범죄들에 대해 심판할권한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의 권한을 유대인은 자기 민족에 대해 저지른 범죄들에 대해 분명히 가지게 된 것이다. - P357
희생자가 유대인인 한에서는 유대인의 법정이 재판하는 것이 옳고도 적절하다. 그러나 그 범죄가 인류에 대한 범죄인 한, 그 범죄를 심판하는데는 국제 재판소가 필요했다! (법정이 이러한 차이점을 인식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은 그 차이에 대한 구분이 전 이스라엘 법무장관 로젠 씨에의해 과거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놀랄 만한 일이다. 로젠 씨는 1950년에 "[유대인에 대한 범죄를 위한]이 법안과 대량학살 방지 및 처벌법의 차이점"에 대해 주장했는데, 이러한 구분이 이스라엘 의회에 의해 논의되었으나 통과되지는 않았다. 법정은 국내법의 한계를 넘어설 권리가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법에 해당되지 않는 대량학살은 그 논의의 적절한 대상이 될 수 없었음이 분명했다.) 예루살렘에서 재판하는 데 대해 반대하며 국제 재판소를 선호한 수많은 고도의 자격을 갖춘 목소리들 가운데 오직 하나, 카를 야스퍼스의 목소리만이 (재판이 시작되기전에 가진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 말이 나중에 『모나트」에 인쇄되어)나왔다. "유대인에 대한 범죄는 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점과 "따라서판결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법정에서만 내려질 수 있다"는 점을 명백하고 분명하게 진술했다. 사실과 관련된 증언을 청취한 뒤 예루살렘법정은 스스로 판결을 ‘내릴 자격이 없음‘을 공표하면서 판결의 권리를 ‘철회할 것을 제안했다. 왜냐하면 문제가 된 범죄의 법적 성격이아직도 논쟁의 대상이 되어 있고, 그에 이어지는 질문, 즉 누가 국가의 명령에 따라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 판결을 내릴 권리가 있는가라는 질문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야스퍼스는 한 가지 점만은 분명하게 주장했다. "이 범죄는 일반적 살인 그 이상이면서 동시에 그 이하이다." 그래서 비록 이것이 ‘전쟁범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국가들이 그러한 범죄가 지속되는 것을 허용한다면 인류는 분명 파멸될 것이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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