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이 공영주택을 구입해서 이사를 오기 시작한 뒤로 교장은 학교의 평가를 올리는 데 힘쓰고 있어요. 저는 그 때문에 가난한 아이들이 점점 구석으로 내쫓기는 것 같아요.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상황이 더 힘들어졌을 거예요. 빈곤하다 해도 주위에 비슷한 사람들이 많은 것과 오직 나만 가난한 건 전혀 다르니까요. 후자가 훨씬 고통스럽죠. 배고플 때,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처지라면 소리 내어 말할 수 있지만 나만 배고프면 아무 말도 못 해요." - P124
"왜 나한테 주는데?" 팀은 커다란 초록색 눈으로 아들을 보며 물었다. 질문은 아들을 향했지만, 외려 내가 팀의 눈빛에 가슴을 꿰뚫린 것만 같았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서 있는데, 아들이 입을 열었다. "친구니까. 너는 내 친구니까." 팀은 "고마워." 하고는 교복을 쇼핑백에 넣고 아들과 하이파이브를 한 다음 현관으로 나갔다. "갈게." "잘 가. 내일 학교에서 봐." 현관 옆 창문으로 은빛이 섞인 금발을 한 자그마한 소년이쇼핑백을 흔들며 공영단지로 향하는 언덕길을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도중에 팀이 오른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는 듯한 동작을했다. 팀이 똑같은 동작을 한 번 더 하자 아들이 조용히 입을열었다. "팀도 엄마처럼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대. 맑은 날은 힘든가봐." "응, 오늘 진짜 꽃가루가 많네.... 엄마도 올해 들어 가장 힘든 것 같아." 아들은 오래도록 창문 옆에 서서 유리창 너머로 점점 작아지는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팀의 손에 들려 흔들흔들하는 노란색 쇼핑백이 초여름의 강한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반짝 빛났다. - P131
아이들에게 있어 양육자란 밖에 있다가도 언제든 돌아갈수 있는 안정적인 마음의 기지와 같은 존재다. 미국의 심리학자 메리 에인스워스 Mary Ainsworth는 그런 존재를 ‘안전기지‘secure base라고 불렀다. 밑바닥 어린이집의 책임자였던 나의 스승 애니는 곧잘 이렇게 말했다. "안전기지를 갖지 못한 채 성장한 사람은 어떡해야 자신이안전기지가 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육아를 힘겨워한다." 실제로 내가 일했던 어린이집에도 담당 사회복지사가 있는 아이는 그 부모 역시 복지과의 보호를 받으며 시설이나 위탁 가정에서 성장한 경우가 제법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자신이 갓난아이일 때 버려졌다고 말했다. 실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런 것으로 해두려 했다. - P211
"어려운 일 같아. 사물함이나 체육복은 누가 했는지도 모르고, SNS에 심한 말을 쓴 것도 애초에 다니엘한테 문제가있기 때문이라고 하면 맞는 말이긴 하니까. 다니엘이랑 말하지 않거나 무시하는 것도 개인의 취향이라고 하면 더 할 말이 없어." 아들과 친한 친구들 중에는 다니엘과 절교한 아이도 있다. 하지만 아들이나 (다니엘과 주먹싸움을 벌였던) 팀처럼 다니엘에게서 직접적으로 차별당해 서로 부딪쳤던 아이들은 친구로 남았다. "다니엘한테 심한 말을 들은 흑인 아이나 언덕 위 공영단지에 사는 아이들은 다니엘을 괴롭히는 데 끼지 않았어. 괴롭히는 건 전부 아무 말도 듣지 않았고 아무 일도 당하지 않은 관계없는 애들이야. 그게 제일 기분 나빠" 아들이 말했다. "인간이란 패거리로 어울려서 타인을 괴롭히길 좋아하니까" 내가 말하자 아들은 스파게티를 먹던 손을 멈추고 똑바로내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전에는 거의 본 적 없는 불가사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인간이 타닌을 괴롭히길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벌 주는 걸 좋아하는 거야." - P226
"그런데 그 학교에서 중국인이 학생회장이라니 대단하네.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 같은 학교였는데." "응, 시대가 변했다는 게 실감되더라." 내 말을 듣고 배우자가 말했다. "이래저래 반발이 있겠지." "어?" "절대 없을 것 같은 일이 그렇게 쉽게 일어날 리 없잖아." 확실히 그렇긴 하다. 내가 중학생들에게 "춘권 할매"라든가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은 게 5, 6년 전인데, 그런인식이 몇 년 사이에 깨끗이 사라질 수는 없기 마련이다. 학생들의 아지트였던 공원은 애들이 숨어서 나쁜 짓을 하던 수풀을 깨끗이 깎았다. 정기적으로 경찰이 돌아보며, 교사와 보호자들이 조직한 순찰대도 가서 둘러보곤 한다. 그래서 지금은 부모가 아이를 데려가 놀 수 있는 평화로운 곳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의 내면에 있는 감정이나 의식은 공원의 수풀처럼 간단히 잘라버릴 수가 없다. ‘드러내다‘와 ‘존재하다‘는 서로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 P243
"가톨릭 학교 애들도 시위에 못 갔다는 말을 듣고 좀 안심했어." 에스컬레이터로 내려서며 아들이 말했다. "너희만 시위를 즐기지 못한 게 아니라서?" 내가 묻자 아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답했다. "좀 슬펐어. 성적이든 뭐든 잘나가는 학교 애들은 전부 시위에 참가하는데, 별 볼 일 없는 학교는 허락해주지 않으니까 우리만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고 소외되는 느낌이었어." "그런 기분을 ‘주변화되었다marginalized‘라고 해." 내 말에 아들이 다시 질문했다. "변두리margin로 쫓겨난 느낌이라는 거야?" - P283
옐로에 화이트인 아이가 꼭 블루일 필요는 없다. 굳이 색깔로 말해야 한다면 그린이라는, 인종도 계급도 성적 지향도 관계없이 아들에게도 팀에게도 다니엘에게도 올리버에게도 다른 밴드 멤버들에게도 공통되는 아직 미숙한 10대의 색이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린 이디어트‘라는 밴드 이름은 이중적인 의미로도 좋지 않을까. 내 생각을 전하려 했지만 아들은 이미 2층으로 올라가 자기 방에서 기타를 친다. 정말이지 아이라는 존재는 멈출 줄을 모른다. 쭉쭉 나아가며 끊임없이 변한다.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그린... 일단 지금은. 색깔은 틀림없이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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