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남김없이 이름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의 앞길을 가로질러서, 혹은 내 피부 위에서 헤엄치고 날아다니고 뛰어다니고 기어다니는 동안, 밤중에 내게 살며시다가오거나 한낮에 나와 얼마간 나란히 동행하는 동안,
그들이 얼마나 친근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들의 이름이 나와 그들 사이에 뚜렷한 장벽처럼 가로놓였을 때보다 그들이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너무도 가까워서 그들을 향한 나의 두려움과 나를 향한 그들의 두려움이 하나의 두려움이 되었다. 비늘과 피부와 깃털과 털을 서로 만지고 문지르고 쓰다듬고, 서로 피와 살을 맛보고, 서로 몸을 녹이길 바라는 욕구, 많은 이들이 느꼈던 그 끌림은이제 두려움과 함께 모두 하나였다. 누가 사냥꾼이고 사냥감인지, 누가 포식자고 먹잇감인지 알 수 없었다.
-어슐러 K. 르 귄, <이름을 거부한 여자 She Unnames Them>

지금은 2007년, 내 나이는 스물넷. 조그맣진 않지만 크지도 않은 체구. 170센티미터쯤 되는 키에 비뚤어진 코. 가슴 무게 때문에 허리가 쑤시고 발목이 약해 발걸음이 늘어진다. 나는 방황하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나는 일생을 거의 홀로 지냈다. 불안할 때면 뭔가를 먹고 담배를 피운다. 그리고 자주 불안에 빠진다. 엄마와 아빠는두 분 다 심리학자고, ‘성공한 삶을 살았다. 나는 영국에서 태어나미술사 전공으로 대학원을 졸업했다. 원숭이도 사람처럼 농담을 던지거나 우울해질 수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는 사람이다. 퓨마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링가, 아키(아가씨, 여기예요)!"
곧 부서질 듯한 버스에 앉아 덜컹거리며 나아가던 참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섯 시간쯤? 금이 간 창문에 맺힌 물방울을 소매로 문지르고 기다란 자국 사이로 밖을 내다본다. 온통 정글뿐이다.
"¿엔 세리오 (여기라고요)?" 목소리에 두려움이 배어 나온다. - P19

와이라는 그늘과 색이 비슷해서 언뜻 봐선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허공을 가르는 긴 꼬리는 단번에 알아보겠다.
"올라, 와이라." 나는 소리를 낮춘다.
뚜렷한 것이라곤 와이라의 두 눈뿐이다. 그의 눈은 카누 노잎이 달린 식물의 꼭대기처럼 초록색이다. 코는 노을의 끝자락처럼 분홍빛이 감돈다. 와이라가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침묵의 순간. 그 순간이 너무 길어서 아예 움직이지 않으려나 생각하던 차에 와이라가 단 꼭대기로 펄쩍 뛰어올라 마치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는 듯 우아하게 착지한다. 나는 경외감에 뒤로 물러난다.
와이라가 어슬렁거리며 우리를 향해 걸어온다. 나는 주눅이들어 가만히 바라본다. 그때 제인이 철조망 안으로 살며시 두 손을밀어 넣는다. 비명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나는 또다시 빠르게 뒤로 물러난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반경 80킬로미터 내에는 의사도 없다고! 정글을 뚫고 캠프로 돌아가서 수의사가 제인의 살갗을 꿰매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모든 장면이 와이라가 케이지를 가로지르는 찰나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철조망으로 다가온 와이라가 무언가를 핥기 시작한다. 제인의 손을 핥고 있다. 제인의 표정은 마치 다른 세계로 가 있는 것 같다. 소매를 걷어올리자 퓨마가 제인의 손에 머리를 들이민다.
이제야 제인이 무얼 하려 했는지 알겠다. 나는 퓨마를 마운틴라이언이라고 부르곤 했다. 다른 이름들도 머릿속 깊은 곳에서 표면 위로 떠오른다. 쿠거, 팬서……. 더는 모르겠다. 이 모든 이름이 같은 동물을 가리키는 것인지 전혀 몰랐다. 이 깨달음을 큰소리로 말해볼까 했지만 이내 그러지 않기로 한다. 할짝대는 소리만 들려온다. 깔깔한 사포로 문대는 듯 거친 소리.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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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인정머리들도 없습니다. 이젠 지긋지긋합니다. 전부들 지겹단 말입니다. 내가 파티를 열 때는 그렇게 야단스럽게 나를 치켜세우더니 이제 늙고 병이 드니까 필요 없다 이거지요. 제가 앓아누운 후로 병문안 온 사람은 열 명도 안 되고, 이번주 내내 받은 거라곤 초라한 꽃다발 하나가 전부입니다. 내가 안해준게 뭐 있습니까? 음식도 내주고 술도 내주고 심지어는 심부름도 해 줬습니다. 그들이 여는 파티에도 빠짐없이 참석해 줬지요. 그들을 위해 내 모든 걸 보여 줬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얻은 게 뭡니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내 생사조차 신경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매할 수가 있는지......."
그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움푹 팬 두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국을 떠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죽음을 코앞에 둔 노인이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다고 아이처럼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몹시 서글퍼졌다. 충격적이기도했지만 동시에 견딜 수 없을 만큼 그가 애처로웠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엘리엇, 그날 비라도 내릴 겁니다. 그럼 파티는 완전히 엉망이 되겠지요."
그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듯 내 말을 잡고매달렸다. 눈물을 흘리던 그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 P380

"그렇죠. 그러니 선처를 부탁드릴게요, 키스 부인. 초대장 한장만 주세요. 어차피 오시지도 못할 테니까, 그저 가엾은 노인네를 기쁘게 해 드리자는 겁니다. 키스 부인까지 그분한테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요. 저한테 늘 아주 잘해 주셨죠. 그분은 신사예요. 제가 신사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몇 명 안 되거든요. 이 집에 와서 공작 부인의 돈으로 살찐 배를 채워 가는 신사들은 신사로안 보죠."
원래 지체 높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귀가 되어 줄 충실한 부하를 두고 있는 법이다. 이런 부하들은 무시나 모욕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스스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 상대를 정확히 겨냥하여 주인에게 그 사람에 대한 혹평을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그렇게 해서 주인까지 그 사람을 미위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과는 되도록 좋은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엘리엇은 언제나 가난한 친척들과 늙은 하녀들, 충실한 비서들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고 진심 어린 미소를 보냈다. 틀림없이 키스 부인과도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고, 크리스마스에는 초콜릿 한 상자나 휴대용 화장품 케이스, 핸드백 등을 선물로 보냈을 것이다.
"키스 부인,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는 겁니다."
키스 부인은 코안경을 올려 오뚝한 코에 똑바로 걸쳤다.
"저더러 주인을 배신하라는 건 아니겠죠. 몸 선생님? 게다가 제가 배신한 걸 알면 그 노인네는 당장 절 해고할 거예요. 초대장은 책상에 있어요. 봉투에 들어 있죠. 저는 그냥 창밖을보고 풍경을 즐기고 있을게요.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다리가 저리니까요. 제가 등을 돌리고 있을 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저한테 책임을 묻지 못하겠죠."
키스가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았을 때 초대장은 이미 내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 P384

당시 비행기들은 너무 허술해서 하늘에 오를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했죠. 비행고도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정말 우스운수준이었어요. 하지만 그땐 그보다 더 좋은 게 없을 정도로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죠. 저는 하늘을 나는 게 너무 좋았어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죠. 굳이 말로 표현하면, 뿌듯하고 행복한 기분이랄까? 허공에 떠 있으면 나 자신이 아주 위대하고 아름다운 무언가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어요. 대체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도 몰랐죠. 제가 아는 거라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2000피트 상공에 혼자 떠 있으면서도 어딘가에소속된 느낌이 들었다는 것뿐이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정말 그랬어요. 거대한 양떼 같은 구름 위를 날 때면 한없이 편안한 기분이 들었죠."
래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꿰뚫을 수 없을 듯한 우묵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지만 정말 나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광경을 직접본 적은 없었어요. 그래서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죠. 그러다가 죽은 사람을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됐어요. 수치심이 밀려들더군요"
"수치심?"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수치심, 그 친구는 저보다 서너 살 위였는데,
정말 정력적이고 용감한 사람이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혈기왕성하고 선량하던 사람이 애당초 살아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엉망진창의 고깃덩어리로 변해 버린 겁니다." - P416

 그랬다면 제 길이 확실히 정해 있었을 테니 저도 수도회에 들어갔겠죠. 이 세상에선 도저히 믿음이 생기지 않았어요. 저도 믿고 싶었는데, 평범한 사람들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는 하느님을 믿을 수가 없더군요. 수사들이 그랬죠.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지만 그건 그리 가치 있는 목적이 아니라는 생각이들었어요. 베토벤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교향곡들을 만들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속에 존재하던 음악을 어떻게든 표현해야 했고, 그래서 자신이 아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최대한 완벽하게 만든 것뿐이죠.
수사들이 암송하는 주기도문을 듣고 있으면 저들은 어떻게 한치의 의심도 없이 꾸준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죠. 아이들이 땅에 있는 자기 아버지한테 양식을 달라고 간청하는 것 보셨습니까? 아이들은 아버지가 당연히 먹여 줄 거라고 믿잖아요. 아버지가 음식을 준다고 해서 고마워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죠. 오히려 낳아 놓고 제대로 못 먹이거나 안먹이면 우린 그런 사람을 비난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물질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할 준비가 안 됐다면 그들을 창조하지 말았어야죠."
"맙소사, 래리, 자네, 오히려 중세에 안 태어난 게 천만다행인 것 같은데, 중세에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화형당했을 테니까말이야." - P421

"윤회가 세상의 악에 대한 설명이 되는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우리가 겪는 나쁜 일들이 전생에 지은 업보라면 그저 단념하고 견뎌 내려고 노력하지 않을까요? 그 과정에서 선을 추구하면 다음 생에서는 고통이 줄어들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고요. 하지만 자신이 겪는 악이나 불행은 비교적 쉽게 견딜 수 있죠. 약간의 강인함만 있으면 되니까요. 반면, 다른 이들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 종종 너무나도 부당하게 보이는 일들은 더 받아들이기가 힘들죠. 그런데 그것이 과거의 업보로 인한 불가피한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애석한 마음도 들고 고통을 분담하려고 노력하기도 하겠죠. 그게 마땅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그에 대해 분개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요?" - P437

"저는 뭔가를 묘사하는 데는 젬병이에요. 어떤 말을 동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눈부시게 날이 밝아 오면서 제 앞에 펼쳐진 그 장엄한 광경을 어떻게 하면 눈에 보이듯이 설명할 수 있을까요? 깊은 정글로 뒤덮인 산들, 여전히 나무 꼭대기마다 뒤엉켜 있는 안개, 그리고 저 아래 펼쳐진,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숲속 나무들 사이로 새어 든 햇살이 호수를 비추면서호수가 마치 강철판처럼 반짝거렸죠.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광경이었어요. 그토록 엄청난 기쁨, 그토록 초월적인 환희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죠. 묘한 흥분이 일더군요. 짜릿한 느낌이 발끝에서부터 온몸을 타고 머리끝까지 올라왔어요. 순간, 육체에서 해방되는 느낌, 육체에서 빠져나온 순수한 영혼에 이전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아름다움이 깃드는 느낌이 들었죠. 인간을 초월한 어떤 인식이 나를 소유하면서 그동안 혼란스러웠던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골치 아팠던 모든 것이 설명되는기분이었죠. 너무 행복한 나머지 고통이 밀려들어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어요. 그런 상태로 조금만 더 있으면 틀림없이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엄청난 환희에서 벗어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했죠. 제가 느낀 기분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마치 천국에 온 듯한 그 황홀경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없을 것 같아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가 기진맥진해서 떨고있더군요. 그러고는 그대로 잠이 들었어요." - P454

"래리, 자네가 이 기나긴 모험을 시작한 건 결국 악이라는문제 때문이었지. 자네를 재촉한 건 바로 악의 문제였어. 지금까지 긴 얘기를 들었지만 그 해답을 찾았다는 얘긴 없었던 것같군."
"애초에 해답이 없었을 수도 있고 제가 모자라서 끝내 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죠. 라마크리슈나는 이 세상을 신의 장난으로 보았어요. ‘그것은 유희와도 같으며, 그 유희에는 기쁨과 슬픔, 미덕과 악덕, 지식과 무지, 선과 악이 존재한다. 삼라만상에서 죄와 고통이 모두 제거되면 그 유희는 끝을 맞는다‘라고 말했죠. 하지만 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생각을 거부하고 싶습니다. 제가 주장할 수 있는 건, 절대자가 이 세상에그 자신을 현현했을 때 선과 악이 본질적인 상관관계를 갖고있지 않았을까 하는 거예요. 지각변동이라는 상상하기 힘든 공포가 없었다면 히말라야 산맥의 장관은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겁니다. 중국의 장인들은 얇은 도자기로 예쁜 모양의 꽃병을 만들어 거기에 아름다운 디자인을 넣고 멋지게 색칠한 다음, 완벽한 광택을 추가하죠.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꽃병도 그 본질적인 속성 때문에 쉽게 깨질 수밖에 없어요. 바닥에 딸어뜨리면 산산조각이 나고 말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도 오직 악과 결합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 P461

"시도는 할 수 있잖아요. 물레도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거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도 한 사람이었어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작게나마 영향력을 갖고 있게 마련이죠. 연못에 돌 하나를 던져도 이 우주는 돌을 던지기 전의 우주와 똑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인도의 성자들이 헛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에요. 그들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과도 같은 존재죠.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워 주는 이상과도 같은 존재예요. 보통 사람들은 결코 그런 위치에 달하지 못하지만 그들을 우러러보고 존경하면 그들에게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죠. 한 인간이 고결하고 완벽해지면 그런 성품의 영향력이 널리 퍼져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그 사람에게 이끌리게 됩니다. 제가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삶을 이끌어 나간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죠. 물론 영향이라고 해 봐야 연못에 돌을 던졌을 때 작은 물결이 이는 것처럼 아주 미미할 겁니다. 하지만하나의 물결은 또 다른 물결을 일으키고, 그것은 그다음 물결로 이어지죠. 그렇게 되면 몇몇 사람들이나마 제 생활 방식이 행복과 평화를 준다는 점을 깨닫고 자신이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수도 있잖아요."
"자네가 어떤 상대와 맞서야 하는지 알고나 있는 건가, 래리? 잔인한 사람들은 더 이상 고문대나 화형주 같은 걸로 입막음을 하려 들지 않아. 그런 건 이미 오래전에 폐기했지. 그보다 훨씬 더 파괴력이 뛰어난 무기를 발견했거든. 그 무기란 바로 신랄하게 비꼬는 말이지."
"그 정도는 버틸 수 있답니다." - P464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나는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사람이다. 따라서 그처럼 보기 드문 인물에게서 나오는광채를 동경할 수는 있어도, 평범한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그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거나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래리는 자신의 바람대로 떠들썩하고 소란스러운 인간 집단에 흡수되었다. 이해관계의 상층으로 괴로워하고 세상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며, 선(善)을 강렬히 소망하면서도 외부에 대해서는 독단적이고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매우 소심한 인간들, 친절하지만 까다롭고, 남을 잘 믿으면서도 의심이 강하며, 야비하면서도 너그러운 미국인들 속에 흡수되어 버렸다. 내가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전부다. 만족스럽진 않겠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달리 방법을찾지 못한 채 확실한 결말도 없이 책을 끝낸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머릿속으로 나의 긴 이야기를 되짚어 보았다. 혹시라도 좀 더 만족스러운 결말이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말이다. 그러곤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내 의도와는 달리, 이 글이 일종의 성공담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등장시킨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원하는 바를 얻지 않았는가? 엘리엇은 사교계에서 명성을, 이사벨은 막대한 재산을 확보하여 활동적이고 교양 있는 지역사회에서 확실한 지위를 얻었으며, 그레이는 안정적이고 수익성 높은 직업과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하여 6시에 나설 수 있는 사무실을 얻었다. 수잔 루비에는 안정을, 소피는 죽음을, 래리는 행복을 얻었다. 물론 ‘자칭‘ 지식인들은 거드름을 피우며 트집을 잡겠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대중은 모두 성공담을 좋아한다. 그러니 나의 결말도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고는 할 수 없다. - P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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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케인스는 투자라는 것이 본래부터 변덕스럽다는 것을 주장한다.
케인스는 대부분의 투자가 ‘동물적 감각animal spirits‘ 으로 불리는 비이성적인 힘에 이끌려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기업가들과 투기업자들은 투자를 하는 데 있어 객관적인 데이터보다는 자신들의 동물적인 감각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힘은 일관적이지 않다. 즉,

수많은 무지한 사람들의 대중 심리에서 비롯한 진부하고 상투적인 판단은 뜬금없는 소문에 의해 갑작스럽게 바뀔 수 있다. (...) 시장은 낙관과 비판의 물결에 맞춰 함께 출렁인다. 물론 이것은 얼핏 보편 불합리하게 보이지만, 합리적 계산을 위한 분명한 토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정당한 판단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케인스는 주식시장에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최고의 기업 분석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떠돌아다니는 소문이나 풍문을 제대로 간파해낼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 가지 재미있는 비유를 통해 전문적인 투자자들을 다음과 같이 비유했다.

100점의 인물 사진 작품 중에 가장 아름다운 얼굴 여섯 명을 가려야 하는 신문사 주최의 한 대회가 있다고 하자. 수상은 대회 참가자 전원이 평균적으로 선호하는 얼굴에 가장 부합하거나 근접하는 사진작품을 선택한 사람에게 수여된다. 이때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진다.
각각의 경쟁자는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진을 고르기보다는 그가 생각하기에 다른 경쟁자들이 가장 선호할 것 같은 사진을 선택한다. 따라서 사실상 모든 참가자들이 같은 관점에서 같은 문제에 접근하게 된다. - P435

우리는 모든 것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불합리한 심리 상태에 의존한다고 (…)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반대로, 장기 기대 상태는 종종 안정되어 있다. (...) 우리는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인간의 결정이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엄밀한 수학적 기대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수학적 계산을 할 수 있는 토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이 제대로 굴러가도록 만드는 것은 활동하고자 하는 우리의 타고난 충동이라는 것, 여러 대안 가운데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합리적 자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합리적 자아는 가능한 논리적이고 치밀한 계산을 하지만, 우리의 동기를 일시적인 기분이나 감정 또는 요행에 맡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 - P436

이번 장에서는 케인스의 모델을 비판했던 경제학의 한 지적 흐름에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통화주의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케인스의 모델을 비판했다.

첫째, 정부는 대개 훌륭한 운전사가 되지 못한다.
둘째, 경제의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는 재정 정책과는 아무런 관계가없다.

통화주의 monetarism 라 불리는 경제학의 한 지적 조류는 경제가 가속페달과 브레이크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가속 페달은 ‘화폐의 공급을 늘리는 것 higher money supply‘ 이고, 브레이크는 ‘화폐의 공급을 줄이는 것 lower money supply‘ 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통화주의자들은 누가 운전석에 앉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케인스주의자들과 의견을 달리한다.
케인스주의자들에 따르면, 정부 지출과 조세 정책에 대해 권한을 갖고있는 의회가 운전석에 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통화주의자들은 금융 업계를 관장하는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운전석에 앉아야 한다며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 P443

적정 화폐 공급량 또는 수준이란 무엇일까? 해답은 간단하다. 생산된 모든 상품을 구매하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물가 상승 없이 완전고용을 달성할 수 있는 양이다. 그러나 이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문제를 간과한다. 그렇다면 완전 고용과 물가 안정을 위해 유통되어야 하는 통화의 양은 얼마나 되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얼마나 빨리 지출하는지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수중에 있는 돈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편일까 아니면 바로 써버리는 편일까? 돈은 얼마나 빨리 사람들 손에서 손으로 옮겨 다니고, 경제를 관통하며 유통할까?
만일 화폐가 빨리 움직인다면, 비록 사람들이 화폐를 양말 서랍에 넣어놓고 몇 달 동안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양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많은 경제학자들과 국민 경제가 이런 단순한 문제에 매달리고 있다. 화폐량이 1년 동안 회전하는 비율은 화폐의 유통속도velocity of money라 불린다.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GDP, 즉 국내총생산 Gross Domestic Product 과 비교하면서 화폐의 소득 유통 속도income velocity of money (이것을 V로 표기한다)에 대해 이야기한다. 따라서 V는 GDP를 화폐 공급량으로 나눈 것과 같다.
예를 들어, GDP가 36조 달러이고 화폐 공급량이 6,000억 달러라면, V는 60이 된다. 만일 화폐가 1년 동안 6번 회전한다면, 사람들은 현금 또는 당좌예금 형태로 자신의 연간소득 가운데 약 2개월 치에 해당하는 금액을 보관한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화폐의 유통 속도는 왜 중요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그리고 속 시원하게 논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만일 화폐의 유통 속도가 안정적이라면, 그리고 중앙은행이 화폐 공급량을통제할 수 있다면, 정부는 경제의 속도를 높이거나 늦출 수 있는 강력한 도구를 갖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 페달은 엔진을 직접 컨트롤하는 ‘화폐 공급량‘을 나타냈다. 반대로 화폐의 유통 속도가 불안정하다면, 즉 사람들이 현금과 당좌 예금 형태로 많은 돈을가지고 있어야 할지 적게 가지고 있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오락가락한다면, 화폐 공급량을 통제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며,
가속 페달도 제대로 말을 듣지 않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양측의 입장을 간단히 정리하면, 통화주의자들은 화폐의 유통 속도가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케인스주의자들은 그것이 불안정하다고 간주한다. 이런 측면에서 통화주의자들이 화폐 공급량을 정부가 운전하는 자동차에서 가장 강력한 페달로 간주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반편 케인스주의자들은 재정 정책을 무엇보다 가장 중요시하며, 통화주의자들의 통화 정책을 자동차의 앞 유리 와이퍼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화폐의 유통 속도가 불안정하다는 것은이미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P447

화폐 공급량과 GDP를 직접 연동하는 변속 메커니즘transmission mechanism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화폐의 유통 속도가 일정하다는 통화주의자들의 가정이 옳다고 전제하자. 만일 FRB가 채권을 구입하는 형식으로 화폐 공급량을 늘린다면, 채권 판매자의 수중에는 더 많은 화제가 쥐어질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 사람들은 화폐 보유량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고 싶어 한다. 이때 통화주의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일상적인 거래에 필요한 돈만을 수중에 갖고 있다. 그러나 시중에 현금이 풀리면서 여분의 돈이 수중에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은 상품, 재화, 실물자산 등에 그 돈을 지출할 것이다. 따라서 GDP는 상승한다.
반대로 FRB가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갖고 있던 채권을 매각한다면, 사람들이 수중에 갖고 있는 돈의 양은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들은 화폐 보유량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고 싶어하기때문에 대신 씀씀이를 줄일 것이다. 따라서 GDP는 하락한다.
통화 정책 monetary policy 이란 본질적으로 민간 부문에서 일어나는 화폐 유동성과 벌이는 게임이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일정 수준으로 유동성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한, 통화 정책은 GDP를 예측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FRB는 국민들을 부처님 손닥에 올려놓고 그들의 지출 수준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 - P453

이때 케인스가 주요 비판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화폐의 유통 속도였다. 왜 화폐의 유통 속도가 일정하다고 가정해야 할까? 중앙은행이 화폐 공급량과 유동성을 높이면 어떻게 될까? 왜 사람들이 평소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는 돈 외에 추가로 생긴 돈을 주로 지출할 것이라고 가정해야 할까? 오히려 그 돈을 이불 밑이나 벽장에 보관할 수도 있지 않은가! 만일 그들이 추가로 생긴 돈을 벽장에 꼭꼭 숨겨 놓는다면, 화폐의 유통 속도는 떨어질 것이고, 중앙은행이 가속 페달을 밟아 화폐 공급량을 늘린 것은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결국 GDP에도 큰변화가 없을 것이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불황이 닥쳤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화폐수량설을 옹호하는 통화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일상적인 구매를 위해 또는 ‘만약을 대비해‘ (예비적 동기) 화폐를 보유한다고 주장했지만, 케인스는 제3의 동기, 즉 ‘투기‘를 목적으로 돈을 보유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보통 전자는 거래적 동기 transactions motive라부르고, 후자는 투기적 동기 speculativce motive라 부른다. 사람들은 주식이나 채권 시장에 투자하기 위해 여분의 유동성을 보유할 수도 있다. 만일 금리가 오르면 화폐에 대한 투기 수요 역시 오를 것이다. 따라서 화폐공급량이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돈을 쓰지 않고 쌓아두려고 하는 욕구도 덩달아 상승할 수 있다. - P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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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이나 가족들이나, 지난 2년 반 동안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겠어." "그럼요. 주식시장이 폭락하기 시작할 때 처음엔 믿기지가 않았어요. 우리가 파산한다는 건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었죠.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어떻게 우리가•••••. 정말 생각도 못했어요.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마지막 순간에 결국은 회복하리라고만 믿었죠. 그런데 정말 모든 게 무너졌을 때, 더 이상 살아갈 의미도 없다고 느껴졌어요. 정말이지, 미래고 뭐고 암담하기만 했어요. 한 2주 동안은 처참한 기분에 빠져 있었죠. 모든 걸 잃어버리고, 더 이상 사는 낙도 없을 것만 같고, 좋아하던 모든 것들과 헤어져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 2주쯤지나고 나니 결국 이렇게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래, 다 잊어버리자. 과거에 대한 미련 같은 것, 다시는 떠올리지 말자.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했어요. 지금도 미련은 없어요. 가졌을 때 충분히 즐겼고, 이젠 없으니 그뿐이고, 그렇게 생각해요." - P233

"스스로 소유욕이 강한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있나? 그레이가 깊은 시인의 감성을 갖고 있다고도 했고, 잠자리에서 아주 열정적인 연인이라고도 했어. 그렇다면 두 가지 모두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얘기잖아. 하지만 네가 말 안 한 게 있어. 그 두가지를 합한 것보다 네게 훨씬 더 중요한 무엇. 그건 바로, 그리 작진 않지만 아름다운 너의 그 두 손 오목한 곳에 그를 붙잡아 두고 있다는 느낌이지. 래리였다면 언제든 거기서 빠져나 - P275

 키츠의 시 기억하나? ‘사랑에 빠진 용감한 연인이여, 당신은 결코 입 맞출 수 없으리라.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기만할뿐."
"가끔 보면 선생님은 스스로 아주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사실은 그렇지도 못하면서."
그녀는 다소 신랄한 말투로 대화를 이었다.
"여자가 남자를 잡아 두는 방법은 한 가지에요. 그게 뭔지는 선생님도 아시죠? 한 가지 더 알려 드릴까요? 중요한 건 남녀가 처음 잠자리를 가질 때가 아니에요. 두 번째가 중요한 거라구요. 두 번째 잠자리에서 남자를 잡아 둘 수 있으면 그를 영원히 잡아 둘 수 있는 거죠." - P276

"열정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파스칼은, 가슴은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다고 말했지.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건 열정이 가슴을 사로잡으면 가슴은 사랑을 위해 세상을 잃어도 좋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그럴듯한, 심지어는 결정적인 이유들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야. 그래서 명예를 희생시켜도 좋고 치욕도 그리 큰 대가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지. 열정은 파괴적인 거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넬과 키티 오셰이도 결국 열정 때문에 파멸로 치닫고 말았잖아. 그리고 열정은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으면 소멸해 버려. 그러고 나면 수년 동안 인생을 허비했다는 걸 깨닫고 비참한 기분이 들겠지. 사람들에게 망신을 당하면서 무서운 질투의 고통을 견뎌 내고 그 모든 쓰디쓴치욕을 삼켜야 하는 순간이 올 테니까. 자신이 가진 애정을 전부 가난한 매춘부한테 소진했음을, 어리석고 하찮은 존재에게 자신의 꿈을 모두 걸었음을, 껌 한 쪽만도 못한 상대에게 영혼을 전부 쏟아부었음을 깨닫는 비참한 순간이 찾아오는 거지." - P280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나는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샤르트르에 갔다가 파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레이가 운전을 하고 래리는 조수석에, 이사벨과 나는 뒷좌석에 앉았다. 긴 하루를 보낸 터라 모두들 지친 상태였다. 래리는 조수석 등받이 위쪽으로 팔을 뻗어 걸쳐놓았는데, 그 자세 때문에 셔츠 소매가 올라가면서 가늘지만 강인한 팔목과 팔뚝이 드러났다. 팔뚝을 가볍게 뒤덮은 솜털 위로 햇살이 쏟아져 황금빛으로 빛났다. 순간 나는 이사벨의 몸이 경직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녀를 흘끗보았다. 그녀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호흡이 빨라지면서 두 눈은 금빛 솜털로 뒤덮인 강인한 손목에 고정되었다. 그의 손가락은 길고 섬세하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나는 사람의 얼굴에서 그토록 강렬한 욕정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색욕의 가면 같았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그토록 방자하고 음탕한 표정이 떠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라기보다 짐승에 가까웠다.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음탕한 표정 때문에 섬뜩하고 무섭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마치 교미 중인 암캐의 얼굴을 보는 듯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듯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래리의 손뿐이었다. 무심하게 등받이를 감싼 그 손이 그녀를 광란의 욕정으로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마치 경련이 인 듯 그녀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두 눈을 감고 구석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말했다.
"담배 한 대만 주세요."
귀에 거슬리는 거친 목소리가 도무지 그녀의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케이스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어 그녀에게 불을 붙여주었다. 그녀는 굶주린 듯이 깊이 빨아들였다. 그 이후로 도할 때까지 창밖을 보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P313

"남편과 아기가 죽었을 때 소피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껴졌을 거야. 그래서 자신이 어떻게 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은채 술과 난잡한 성교라는 끔찍한 타락으로 스스로를 내몬 거지. 자신을 그렇게 잔인하게 대한 삶에 복수하기 위해서 말이야 천국 같은 생활을 하다가 그것을 잃게 되니까 보통 사람들이 사는 보통 세상을 견디지 못하고 좌절해서 지옥으로 곤두박질친 거야. 더 이상 신들이 마시는 넥타를 마실 수 없다면 차라리 밀주를 마셔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는 얘기지."
"그런 건 선생님 소설에나 나올 만한 얘기잖아요. 말도 안된다는 거 선생님도 아시죠? 소피가 술독에 빠진 건 술을 좋아해서 그런 거예요. 남편과 아이를 잃은 여자가 어디 한두 명이에요? 그 애가 타락한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선에서 갑자기 악이 ‘툭‘ 튀어나올 수는 없죠. 악은 예전부터 항상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걸 잘 막아 두고 있다가 차 사고로 그 방어막이 깨지면서 본래의 모습이 나온 것뿐이에요. 쓸데없이 소피를 동정하지 마세요 소피는 원래 그런 애였어요" - P328

"정말 너무하시네요. 제가 래리를 남자나 밝히는 막돼먹은여자한테 넘겨주려고 모든 걸 포기한 줄 아세요?"
"왜 네가 모든 걸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단지 래리의 앞길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놓아줬으니까요."
"거짓말은 그만두라구, 이사벨. 네가 래리를 포기한 건 다이아몬드와 모피 코트 때문이었잖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빵과 버터가 담긴 접시가 내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접시를 잡았다. 바닥에 빵과 버터가 흩어졌다. 나는 일어나서 접시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 크라운더비 접시가 깨졌으면 네 엘리엇 외삼촌께서 아주 고마워하셨을걸. 도싯 공작 3세를 위해 만들어진 거라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거니까."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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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 다루는 분야는 가격, 이윤, 지대, 비용 등에 한정되지 않는다. 법, 도덕, 유행, 철학 등도 모두 경제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들분야는 경제학을 뒷받침할 수도 있고, 또는 그것의 정체성에 손상을 줄수도 있다. 소스타인 베블런과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경제학의 정의또는 범위를 확장했고, 동료들이 더 넓은 사회 현상에 눈을 뜨도록 촉구했다. 경제학은 앨프리드 마셜이 생각했던 것만큼 쉬운 학문이 아니다. - P397

케인스주의자 Keynesian 란 어떤 사람을 의미할까? 다음 두 가지 기본명제를 따르는 사람을 말한다.

1.민간 경제 private economy 는 완전 고용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2. 정부 지출은 경제를 자극해 완전 고용과 불완전 고용의 틈을 메울수 있다.

어떤 정치가가 정부 지출을 통해 경기를 활성화할 수 있는 정부 프로그램을 지지하거나 소비 진작을 위해 세금 인하를 촉구할 경우 그는 이미 케인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 P402

1차 세계대전 직후, 케인스는 영국 재무부 대표로 베르사유에서 개최된 파리강화회의 Paris Peace Conference‘에 참석한다. 이번에도 그는 공무원 생활에 싫증을 느끼는데, 이전과는 달리 지루한 업무 때문은 아니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그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이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 Lloyd George와 프랑스 수상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의 협잡에 넘어가 패전국 독일에 터무니없는 전쟁 배상금을 물리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이때 케인스는 이미 또 다른 전쟁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런 외교적 공포를 맨 정신으로 지켜보기 힘들었던 케인스는 재무부에 사표를 낸 뒤 서둘러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뿐만 아니라 블룸즈버리 그룹 기준으로도 가장 신랄하고 논쟁적인 《평화의 경제적 귀결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이라는 글을 발표한다.그는 세계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각국 지도자들의 무능함을 질타하면서 독일이 전쟁 배상금을 지불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조심스럽게 피력했다.  - P410

물론 자본가들은 특정 상품을 더 많이 생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총체적인 공급 과잉은 아니다. 그런 과잉 상품은 제때에 소비자를 만나지 못할 경우 점차 가격이 떨어질 것이고, 따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공급 과잉은 사라질 것이다. 이런 세이의 법칙을 믿는 사람에게 장기 실업이나 불황 같은 것은 턱도 없는 소리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장기 실업과 불황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다. 물론 케인스에게 정신병자는 정통파바보 멍청이들이었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동료들을 매도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그들에게 세이의 법칙을 한 번 의심해볼 것을 충고하면서그냥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혀를 찼다.
그렇다면 정통파 바보 멍청이들이 세이의 법칙에서 간과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세이의 법칙에서 가정하는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경제의 주기적인 흐름에서 뭔가 중요한 누수가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가계저축을 간과했다. 그렇다면 왜 가계 저축이 중요한가? 세이의 법칙대로라면, 상품 생산은 생산자와 공급업자에게 소득을 발생시킨다. 그리고생산자와 공급업자, 즉 소비자들은 이렇게 벌어들인 소득을 그 상품을 구입하는 데 모두 지출한다. 그런데 그들이 벌어들인 소득의 일부를 지출하지 않고 저축한다면? 생산된 상품은 전부 판매되지 않고 창고에 쌓여갈 것이다.  - P416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고전파 경제학에 대해 양면 공격을 시작했다. 첫째, 그는 저축과 투자가 자동적으로 연결된다고 보지 않았다. 가계와기업은 완전히 다른 이유에서 저축하고 투자한다. 가계는 습관적으로또는 자동차 구입이나 노후 대비 같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저축할 것이다. 반면 기업은 정치 상황, 확신, 기술, 환율, 또는 어느 팀이 프로야구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할 지에 따라 투자 계획을 바꿀 것이다.
이렇게 저축과 투자 목적이 다른 가계와 기업이 이자율 하나로 서로 조화를 이루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만일 가계 저축이 기업의 투자를 초과하면, 상품의 공급 과잉 현상이 나타날 것이고, 기업은 이에 맞서 우선적으로 종업원들을 해고할 것이다. 그 결과 소비는 더욱 위축된다. 1997년과 1998년에 일본의 가계는 중앙은행이 단기 대출 금리를 0.5퍼센트 인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출을 줄였다. 소득이 줄어들면, 저축은 투자 수준에 맞춰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완전 고용 상태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
둘째, 케인스는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임금과 물가에 대해서도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물가가 상품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항상 적정 수준에서 오르락내리락 할 것이라고 말하는 정치가들이 있다면, 그들은 수리수리하면 올라가고, 마수리하면 떨어질 것이다"라고 주문을 외는 점술가나 마찬가지다. 독점 상황에서 상품의 수요와 공급이 저절로 조절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지의 소치다. 고전파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경기 침체가 닥치면 실질 임금은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명목 임금이 떨어지는 것을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케인스는 생각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경기가 후퇴하면 기업은 투자를 줄인다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저축은 결국 투자와 일치하게 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될까? 그것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투자가 늘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으면서 저축할여력도 동시에 잃기 때문이다. 게다가 임금과 물가가 서로 조정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리기 때문에 경기 침체나 공황은 상당 기간 오래지속될 수 있다.
그리고 1930년대 초에 저축과 투자가 일치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즉, 저축도 없었고, 투자도 없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전파 경제학의 화려한 쇼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 P419

+이것이 케인스의 유효수요이론이다. 유효수요란 실제로 물건을 살 수 있는 돈을 갖고 물건을 구매하려는 욕구, 즉 확실한 구매력이 뒷받침되는 수요를 말한다. 반대로, 구매력에관계없이 물건을 구입하고자 하는 것을 절대적 수요라고 한다. 또, 돈이 있어도 물자 통제때문에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없다거나 가격이 비싸서 손을 댈 수 없지만 가격이 내려가면 구매하겠다거나, 소득이 증가하면 구매하겠다는 등 어떤 사정으로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수요를 잠재 수요라 한다. 케인스의 유효수요이론은 그의 고용 이론의 기본으로 다음과같다. 첫째, 총고용량은 총유효수요에 의해 결정된다. 실업은 총유효수요의 부족 때문이다. 둘째, 고용이 증가하면 소득이 증가하고, 소득이 증가하면 소비도 증가하지만 소비가 증가하는 액은 소득이 증가하는 액보다 적다. 그러므로 고용의 증가를 유지하는 데 충분한 수요를 갖기 위해서는 소득과 그 소득에서 지출되는 소비와의 차액을 메우기 위한 신투자(투자의 증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P421

그럼, 모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완전 고용에 도달한 건강한 경제를 달성하려면, 가계는 충분히 소비해야 하고, 기업은 상품의 생산과 판매가 균형을 이루도록 충분히 투자를 해야 한다. 만약 사람들이 소득의 전부를 소비한다면(이 경우 한계소비성향MPC=1이 된다), 세이의 법칙에 의해 경제는 완전 고용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득의 일부를 저축하기 때문에 기업 투자가 이 부족한 부분을 메워야 한다. 이론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저축한 만큼 소비는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생산이 판매를 초과할 것이고, 재고가 늘어날 것이며, 결국 고용주들은 종업원들을 해고할 것이다. 저축이 경기 침체의 주범으로 몰리는 순간이다. - P422

산업혁명을 전후로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논자들이 노동자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귀족들과 자본가들에게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다면, 케인스는 그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마음씨 착하고 순박한 이웃 할머니를 포함한 선의의 저축가들이 악덕 자본가들보다 경제에 더 큰 해를 입힌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해악은 단순한 해악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해악을 낳는다. ‘부패 rot‘가 온 동네에 악취를 풍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케인스의 승수이론multiplier이다. 승수 이론은 원래 그의 제자이자 뒤에 킹스 칼리지 경제학과에서 교직원으로같이 일하는 리처드 칸Richard Kahn 의 것이었다. 승수 이론의 핵심은 어떤 한 사람의 지출 변화가 시간이 지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에는 국가 지출 전체에 영향을 주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는 데 있다.
여기에 메이너드 주식회사가 있다고 하자. 이 회사는 남성 화장실을 신축하기 위해 100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그 결과 국가 전체의 총지출은 이전에 비해 100달러 증가한다. 메이너드 주식회사는 이 돈의 일부를 배관공, 건축가, 실내장식가에게 임금으로 지급한다. 그럼, 배관공, 건축가, 실내장식가는 이 돈을 어떻게 할까? 그들은 일부는 지출하고 나머지는 저축할 것이다. 그들이 지출하는 돈은 식료품점 주인, 텔레비전 세일즈맨, 맥주집 주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한편, 이들도 각각 자신들이 벌어들인 수입의 일부는 지출하고, 나머지는 저축할 것이다.
이런 연쇄 반응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비록 처음에 메이너드 주식회사가 투자한 비용은 100달러이지만, 총수입은 300달러로 늘어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승수는 3이 된다. - P423

케인스는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이 자신의 이런 적극적인 재정 정책fiscal policy을 공격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의 재부무 관리들은 균형 예산balanced budget 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따라서케인스의 재정 정책을 따른 다는 것은 예산 적자, 즉 정부의 재정 적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케인스는 "그러면 어떤가?"라고 응수했다. 경기 침체기에 균형 예산 정책을 펴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예산은 세입 tax revenues 과 세출 outlays 두 항목으로 되어 있기때문이다. 경기 침체로 인해 소득이 떨어지면, 정부는 세금을 삭감할 수있다. 한편, 경기 침체 상황에서도 정부가 균형 예산 정책을 기본 기조로 계속 유지하고자 한다면, 정부 지출을 줄이거나 세금을 인상하면 된다. 그러나 둘 다 승수 효과로 인해 경기 침체를 가속화할 것이다! 케인스는 경기 순환 전체로 보면 정부 예산은 균형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럼 이와 반대되는 상황, 즉 경기 호황을 상정해보자. 경기가호황인 경우 정부는 국민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고, 따라서 재정 흑자를 기록할 것이다. 그러나 경기 침체기에 정부는 재정적자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런데 미국과 영국의 재무부 바보 멍청이들은 당시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 P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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