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노키즈존‘이 없는 세상은 그저 이상일 뿐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노키즈존‘은 사라져야 한다. ‘어린이‘라는 사실은 명백히 어린이의 정체성이다. 정체성 때문에 특정한 장소에 출입을 못 하게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어쩔 수 없다 해도, 논리적으로 어쩔 수 없이 차별이다. 이차별이 사회적으로 허용된다면 ‘노 휠체어 존‘이, ‘노 시니어 존‘이, 또 ‘노 무슨 무슨 존‘이 생길 것이다. 사실 문제상황을 가정한다면 차별과 배제는 제일 쉬운 해결책이다. 나는 이 어려운 문제를 어렵게 풀고 싶다. 평등을 찾아가는 길은 원래 어려운 법이니까. 나는 ‘노키즈존‘이라는 ‘쉬운 말‘이 없어지면 좋겠다. 말과 함께 그 개념도 낡은 것이 되어 사라지면 좋겠다. 카페에 식당에 ‘노키즈존‘이라고 써 붙이는 간단한 해결책보다. 서로의 사정을 헤아리고 조율해가는 번거롭고 불편한 해결책이 더 합리적이다. - P264
마찬가지로 ‘노키즈존‘이라는 말 대신,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맞다. 깨지기 쉬운 장식품이 많아서 어린이 출입이 어렵다거나, 난간이 위험해서 어린이 출입을 제한한다거나, 음식이 뜨거워서 어린이가 돌아다니면 위험하기 때문에 어린이 동반석을 어디어디로 제한한다거나, 여러 이유를 설명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래 봤자 결론은똑같다고 하더라도, ‘노 키즈 존‘이라는 말로 차별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쉬운 말‘은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손님이 헛걸음하지 않게 홈페이지나지도 앱에 미리 표시를 한다면, 적어도 ‘몇 세 미만 출입 제한‘ ‘몇 세 이상 출입 가능‘ 등으로 돌려 말하면 좋겠다. 역시 결론은 똑같더라도 최소한 그 과정이 번거롭기라도 해야 되는 것 같다.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날 때까지, 나는 어린이 출입 제한 구역에 대해서만큼은 복잡하게 말하고 싶다. - P266
어느 날 역시 콩나물 해장국을 먹고 있는데, 옆 테이블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장님이 어떤 테이블 옆에서서 손님들이 식사하는 걸 빤히 보고 계셨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 일행 중 네댓 살 되어 보이는 어린이가 있었다. 사장님은 아이 어머니인 듯한 분한테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걸, 반찬을 사온 거야? 뭐야, 장조림이야?" "네, 애가 매운 걸 못 먹어서요. 죄송해요." 미리 양해를 구한 듯한 분위기였지만 아무래도 어머니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근데 이게 뭐야, 왜 반찬을 밥뚜껑에 놨어?" "아...... 반찬이 다 매워서 따로……." "그릇을 하나 달라고 하지. 있어봐." 아이 어머니가 "아이, 아니에요, 사장님. 그냥 먹어도 돼요" 하며 말렸지만 사장님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새 접시를 가져다주셨다. 나는 어린이 앞에서, 청중 앞에서, 무엇보다 글에, 되도록 속어를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번만은 예외로 해야겠다. 그때의 사장님 말씀을 그대로 옮겨야 하니까. "애기가 가오가 있지." 애기가 가오가 있지. ‘아기가 체면이 있지‘라고 순화해야겠지만, 이 말이 너무 멋지지 않은가? 애기가 가오가 있지. - P277
그러다 어느 날 동네 미용실 의자에서 갑자기 길을 찾았다. 염색 자주 하면 머리가 상할 수도 있으니 며칠 있다가오시라는 원장님한테 호통을 치는 할머니 덕분이었다. "죽을 때까지 몇 번이나 할지도 모르는데 그냥 해줘!" 할머니는 원장님이 염색약을 바르는 동안에도 엄청난기세로 말씀을 이어갔다. "나는 인제 하고 싶은 거 다 해. 수박도 한 통씩 먹어. 복숭아는 일곱 개. 포도는 입이 시릴 때까지. 아주 잇몸이 시릴 때까지. 내가 90살까지는 살아야지 했는데 이제 12년밖에 안 남았어." 그러자 다른 할머니들의 증언이 쏟아졌다. 나는 술 먹고담배 피우고 못된 건 다 하는데 블루베리를 먹어서 건강하다, 나는 파프리카 먹고 눈이 좋아져서 안경을 내던졌다, 나는 운동 안 하고 친구들이랑 얘기나 하면서 하루에 딱만 보만 걷는다. 할머니들 머리는 모두 짱짱하게 까맸다. 이제 내 꿈은 수박 한 통을 해치우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저녁에 아파트 벤치에 앉아 산책 나온 동네 강아지들의 인사를 받는 할머니도 되고 싶다. 도서관에 ‘큰글자도서‘를 제일 많이 신청하는 할머니가, 철마다 버스를 타고 패키지여행을 다니는 할머니가 되겠다. 병원에서 검사실을 잘못 찾고 의사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 하는 할머니도 되겠지. 그 걱정은 그때 가서 하자. 2053년의 ‘요즘 문화‘에 쩔쩔매는 할머니가 되겠지만 그때 가서 쩔쩔매자. 일단 머리가 까맣고 후드티를 입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나의 노후준비는 수박 먹는 양 늘리기, 블루베리랑 파프리카 챙겨 먹기다. 나중에 만 보를 함께 걸을 친구들과 계속 술 먹기, 동네 강아지들 이름 많이 알기다. 잘하면 끝까지 살아남을것 같다. - P308
어떤 이들은 돈이 오갈 때, 싸울 때, 위기 상황에서 누군가의 참모습을 본다고 한다. 나에게는 ‘친절함‘이 기준이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이야 이럴 때 "사진 찍어드릴까요?"가 자연스럽게 나오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척망설였고 괜히 떨기만 하다가 기회를 놓칠 때가 많았다. 그전에는 아예 생각하지도 못했다. 사진 한 장 찍어주겠다고나서는 게 무슨 큰 착한 일이나 대단한 친절도 아니다. 하지만 나에겐 왠지 쑥스러운 일이었다. 어린이 일행을 눈여겨보고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나설 준비를 하면서, 나는다정함뿐 아니라 용기도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거절당하거나, 무안해지거나, 때로는 후회할 각오까지도 해야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저분에게 도움이 필요한지 아닌지판단도 잘해야 하고, 나서는 순간도 잘 잡아야 한다. 어디까지 돕고 퇴장할지도. 나는 새로 사귄 친구가 앞으로도나와 잘 통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친절‘에는 왜 ‘베풀다‘가 붙을까? ‘주다‘ 정도면 좋을 텐데. 너무 거창한 것 같아서 ‘베풀다‘라는 말을쓰지 않으려니까 표현이 잘 되지 않는다. 아무튼 내가 용기를 내면서까지 누군가에게 친절을 드리는 이유는 그게나에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기쁨, 뿌듯함, 효능감, 자신감 등 좋은 감정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기분은 남에게 친절을줄 때만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작은 친절도 결코 공짜가 아니다. 늘 후한 값을 매겨준다. - P322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런 일을 할 때조차 용기가 필요하다. 남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기로 순식간에 판단하고 행동하는 분도 있지만 나는 어린이한테 화장실 순서를 양보할 때조차 용기를 내야 한다. 그래도 계속 손톱만한 용기라도 내보려고 한다. 보상도 보상이지만, 내 생각에는 ‘친절‘만큼 구체적으로 세상에 윤기를 더하는 행동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친절하게 대한 것을 후회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나의 친절을 이용하거나 나를 얕잡아 보는 사람들 말이다. 그럴 테면 그러라지. 그런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줄 친절이 줄어들면 안 된다. 그러면 내가 지는 게 되니까. - P325
날마다 보는 험악한 뉴스만큼, 험악한 뉴스에 무감해지는 나 자신에게 겁이 난다. 그럴 때 친절해지기로 한 번 더마음을 다진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주려면 상황 파악도 잘해야 되고, 용기도 내야 한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낼 수 있는 용기는 여기까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소중히 여기려고 한다.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는 게 ‘친절함‘이라면 나는 그에 걸맞은 판단력도, 용기도 갖고 있을테니까. 언제까지나 다정하고 용감한 어른이 되고 싶다. 그게 나의 장래희망이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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