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호수가 다현의 몸을 삼켰다.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머리칼과 잘록한 허리, 밤을 새워 지분대던 가슴과 길쭉한 다리, 사랑을 나눌 때면 천장을 향해 만족스러운 듯 뻗던 희고 긴 손가락이 기억과 함께 호수 바닥으로 사라졌다.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그를 재촉하듯 질러대던 교성은 이미 숨을 잃은 다현이 더이상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다현을 완전히 삼킨 호수는 조용히 파문을 일으켰다. 거친숨을 헐떡이며 준후는 파문의 궤적을 응시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 P7

댓돌 위에 신발을 벗어두고 나무 마루 위로 올라갔다. 마루를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에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싸구려 문짝은 시트지가 떨어져 덜렁거렸다. 오른쪽으로 난 문을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할머니가 쓰던 안방인 것 같았다. 벽에는 채다현으로 보이는 어린아이의 유치원 졸업 사진이 걸려 있었다. 옆으로는 크고 작은 사진들이 액자도 없이 벽에 붙어 있었다. 젊은 여성이 아기를 안고 있는 계곡의 사진, 아름드리나무앞에서 노인이 무심하게 어딘가를 쳐다보는 사진, 꽃 앞에서 찍은 사진, 동물원 사진. 거의 모든 사진에 아이가 있었다. 하지만그 아이는 열 살가량으로 보이는 사진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성장하지 않았다. 그들의 행복은 거기서 멈춘 것 같았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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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아름다움
L‘Inutile Beauté

훌륭한 검은 말 두 마리가 끄는 우아한 사륜마차가 저택 계단 앞에서 있었다. 6월 말 오후 5시 30분경이었다. 앞뜰을 빙 두른 지붕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하늘은 햇빛과 온기가 가득하고 마음을 들뜨게 했다.
마스카레 백작 부인이 외출을 하려고 계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그때, 그녀의 남편이 외출에서 돌아와 저택 대문에 도착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내를 바라보았고,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그녀는 무척 아름다운 여자였다. 늘씬하고, 갸름한 타원형 얼굴에 기품이 넘쳐흐르고 상앗빛 피부는 금빛으로 반짝이고, 커다란 잿빛 눈과 검은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심지어 그를 보지도 못한 것 같았다. 그 태도가 너무나 우아해서 백작은 오래전부터 그를 사로잡고 있는 치사한 질투심을 새삼 느꼈다. 심장이 또다시 조여들었다. 그는 아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 P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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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자신이 ‘기독교적 환상 문학‘이라 명명한 이 소설의가설들이 놀랍도록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더 끌리는논변은 지적의 것이다. 《죽은 신을 위하여》 (2003)에서 그는 유다의 행위가 ‘신뢰의 궁극적 형태로서의 배반‘이라고 말한다. 어떤이가 공적 영웅이 되려면 누군가의 배반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는 것, 그럴 때는 그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만이 기꺼이 그를 배반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유다는,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배반해야만 그 사랑을 완성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던, 비극적인 인물이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터무니없는 오독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이 오독의 빛에 의지해 인간이라는 심해로 내려간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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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프랭클린이 미국에서 제공한 자료를 토대로 맬서스는 인구가25년마다 2배로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인구는 그가 예상한것보다 더 빠르게 증가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맬서스는 좀 더 급진적인 사례를 인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온건한 쪽을 선택했다. 프랭클린은 15년 만에 인구가 2배로 증가한 마을도 있다고 보고했다! 비록 프랭클린이 제공한 자료에는 식량 공급에 관한 자료는 들어있지 않았지만, 맬서스는 식량 생산이 결코 인구 증가를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어렵지 않게 내렸다. 맬서스는 인구가 억제되지 않을 경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할 뿐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기하급수니 산술급수니 하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기하급수geometrical ratio (또는 등비급수exponential rate)는 어떤 하나의 수에 같은수를 곱해 계속 배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하급수는 계속해서 ㅎ배로 증가한다. 산술급수arithmetic ratio는 어떤 하나의 수에 상수를 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맬서스는 다음과 같은 훌륭한 예를 들었다. 그는 현재 인구가 10억 명이라고 할 경우, 인구는 1, 2, 4, 8, 16, 32, 64, 128, 256의 속도로 증가하는 반면, 식량 생산은 1, 2, 3, 4, 5, 6, 7, 8, 9의 속도로 증가한다고 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해보자. 10억은 너무 큰 수니 현재 인구가 1명이고, 인구가 25년마다 배로 증가하며, 그리고 처음에 한 사람이 쌀 1가마니씩을 가진다고 가정하자. 맬서스의 계산대로라면, 100년 뒤에 인구는 16배, 200년 뒤에는 256배 증가한다. 반면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기때문에 100년 뒤에 5가마니, 200년 뒤에는 9가마니 밖에 생산되지 않는다. 즉, 200년 뒤에 인구 256명이 쌀가마니를 나누어 가져야 하는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또 다시 100년 뒤에 인구는 4,096배로 증가하고, 쌀은13 가마니 밖에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된다! - P111

그 전에 실제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다음 두 가지 억제 요인이 인구 증가를 저지한다. 하나는 ‘적극적positive‘ 억제이고, 다른 하나는 ‘예방적preventative‘ 억제다. 맬서스에게 적극적 억제는 낙관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 억제 개념checks은 사망률을 높이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기하급수적인 인구 증가에 따른 위기에서 우리를 ‘구해줄 수 있는 적극적인 힘들 positive forces 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전쟁, 기아, 그리고 역병이다. 흑사병은 이미 도처에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기회가 오기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유아 사망률은 과잉 인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리고 기근은 항상 물귀신처럼 우리를 졸졸 따라다닌다. 맬서스는 이렇게 말했다.

기근은 자연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마지막이자 가장 치명적인 수단처럼 보인다. 인구 성장률은 지구상의 인구를 부양하는 데필요한 식량을 생산하는 지력(地力), 즉 생산력을 뛰어넘기 때문에 인류는 어떤 식으로 든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자체적으로 인구를 조절할 수 없는 인류의 결함이 인구를 감소시키는 최적의 수단이 된다. 그것은 인구 감소의 특명을 받은 대규모 학살 부대의 선봉장이며, 자체적으로 이런 무시무시한 임무를 완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다음으로 유행병, 페스트, 그리고 역병 등지원 부대가 맹렬한 속도로 진격해 수천수만의 목숨을 일순간에 앗아간다. 이것으로도 임무가 완수되지 않을 경우, 대규모 기근이 불가피하게 뒤따라 일어나고, 따라서 인구는 단번에 식량 생산량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 P116

출산율을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예방적 억제는 적극적 억제에 비해 엄격하지 않고, 따라서 성과도 그렇게 높지 않다. 만약 사람들이 성적 욕구를 억제하고 결혼을 늦춘다면, 결국 그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될것이라고 맬서스는 주장했다. 즉, 맬서스가 보기에 아이를 많이 갖는다는 것은 가족의 생계 수준을 낮추는 것밖에 되기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맬서스는 이것에 별다른 기대를 걸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반대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물론 자신의 책을 읽은 중간 계급과 상류 계급은 자신의 논의를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양 자녀수가 많을수록 빈민구제수당을 더 많이 받는 이때 하층 계급에게 결혼을 늦추라거나 아니면 결혼은 하더라도 아이는 적게 낳거나 늦게 낳으라고어떻게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맬서스는 자연의 엄격한 견제에 의해 통제되는 인구 성장이 임금을 최저 생계 수준으로 유지시킬 것이라는 예견했다. 만일 임금이 상승하면, 노동자들은 더 많은 아이를 낳을 것이고 그 결과 식량 부족이 뒤따르면서 생계 수준이 자연적으로 하락할것이다. 물론 임금도 다시 최저 생계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는 이 악순환이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 P117

피트 수상은 빈민구제법이 오히려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자녀를 갖도록 조장함으로써 인구를 증가시키기 때문에 얼마 안 있어 인구 감소를 위해 ‘예방적 억제책‘을 도입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하층 계급은 재차 황폐화되고 빈민구제법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는 맬서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사실, 지나가며 하는 말이지만, 하층 계급에게 빈민구제수당을 지급하는 대신 일자리 창출이나 노동 의욕을 고취시켜 자체적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빈민 또는 빈곤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이상의 내용으로 맬서스를 하층 계급을 멸시하거나 증오하는 사람으로 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예방적인 억제가 실패해 적극적인 억제, 즉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이 난무하며, 역병이 창궐할 경우 가장 큰 피해와 고통을 입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그들에 대한 온정어린 시선으로 가득하다. 후일 케인스가 주장한 것처럼, 맬서스가 인구 성장에 대해 비관적인 결론을 내린 것은 사실 그의 진리에 대한 사랑과 인류애 때문이다.  - P118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그의 예측은 빗나갔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 않았다. 산술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던식량 생산 및 공급은 예상과 달리 바닥을 기지도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여전히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맬서스가 제시했던 이유 때문은 아니다. 반대로, 맬서스가 관심을 두었던 영국과 유럽대륙에서 사람들은 더 잘 먹고, 더 잘 살고, 더 오래 살았으며, 맬서스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높은 ‘도덕적 자제력‘을 보였다.
맬서스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몇 가지 흐름을 놓쳤을 뿐만 아니라 몇가지 분명한 통계학적 실수를 범했다. 사소한 실수이기는 하지만, 맬서스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제공한 인구통계조사 자료에서 미국의 인구 증가율이 해외에서 유입되는 이민자 수와 본토에서 태어나는 신생아 수를 구분한 것인지 사전에 확인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맬서스는 이 둘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뭉뚱그려 계산함으로써 이미 미국 본토에 정착한 영국의 어머니들이 뉴욕 항을 통해 입국하는 네덜란드계 이민자들의 자식까지 낳고 있는 치명적인 계산상의 실수를 범했다. 자신이 범한 이런 통계학적 실수는 까마득히 모른 채, 프랭클린이 제공한 자료를 토대로 미국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영국 어머니들이 엄청난 속도로 아이들을 낳고 있다고 간주했던 것이다. 아마 그는 영국 어머니들이 다른 일은 하지 않은 채 별다른 고통 없이 평생 아이만 낳는 기계 장치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보다 더 결정적인 실수는 맬서스가 의학의 발전, 농업 혁명, 그리고 산업혁명의 시작을간과했다는 것이다. 이런 실수는 그를 족집게 예언가에서 거짓말쟁이 점쟁이로 추락시켜버렸다. - P125

그렇다면 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 않았을까? 경제학자들은 ‘인구 변천demographic transition‘ (또는 인구학적 추이)에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첫 번째 단계인 전(前)산업 사회에서는 높은 사망률이 높은 출산율을 상쇄함으로써 인구를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했다. 두 번째 단계, 즉 초기 산업 사회에서는 보건 위생의 발전으로 사망률이 감소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출산율이 높아졌으며, 그 결과 인구가 빠르게 증가했다. 맬서스가 바로 이 시기에 인구 자료를 수집했고, 그것을 토대로 인구 변화를 예측했기 때문에 잘못된 예측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도시화와 교육이 출산율을 낮추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이렇게 사망률도 계속 떨어지고 출산율도 떨어지면서 인구는 완만한 성장 곡선을 그렸다.
마지막으로 사회가 완숙 단계에 이른 네 번째 단계에서는 성공적인 산아제한과 맞벌이 부부의 등장으로 자녀를 많이 두려고 하지 않으면서 인구가 안정된 수준을 유지한다. 마르크스는 역사라는 기차가 굽은길을 돌때마다 모든 지식인들이 차장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맬서스는 첫 번째 단계와 두 번째 단계는 직접 목격했지만, 세 번째 단계와 네 번째 단계는 보지 못했다. 그가 그려 놓은 인구 예측 도표에서 수치가 떨어졌을 때, 그는 벌써 기차 밖으로 튕겨져 나온 상태였다. - P127

세 번째, 비관주의자들은 희소자원을 대신할 대체 자원 개발을 고려하지 못했다. 현재 알루미늄, 철강, 플라스틱 등을 제조 생산하는 기업들은 자동차 산업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있다. 즉, 그들은 기존의 철강을 대체할 새로운 소재 개발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1967년에 개봉한 마이크 니콜스 Mike Nichols 감독의 영화〈졸업The Graduate>을 보면, 한 중년의 신사가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는주인공 벤저민 역의 더스틴 호프만Dustin Hoffman에게 ‘플라스틱 산업‘이 투자가치가 있는 유망한 사업이라고 귀띔한다. 실제로 플라스틱 산업은 당시 전문가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발전했고, 지금은 일상생활 곳곳에서 플라스틱이 사용되지 않는 곳이 없다. 석기시대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더 이상 사용할 돌덩이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역으로 인류가 석유나 석탄 같은 화석 연료를 사용하지않게 될 경우, 그것을 화석 연료가 고갈되었기 때문이라고 가정할 수는없다. 인류는 지금도 화석 연료를 대체할 새로운 에너지 개발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고 있다.
종말 모델은 기술 개발이 자원의 수요를 앞지를 수 없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가정에 기초해 있다. 기술 technology 이 고대 그리스 희극에 자주 등장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나 할리우드의 서부극에나오는 자주 나오는 기병대(騎兵隊)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이 둘을 깔보거나 업신여길 수는 없다.  - P134

원래 이런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은 것은 멕시코 국영방송사인 텔레비사Televisa의 부사장을 역임한 미구엘 사비도Miguel Sabido였다. 사비도는 텔레비전 시리즈가 다양한 사회적이슈들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과 태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함께 갑시다‘의 뜻을 가진 아콤파넴므Acompéneme>라는 제목의 시리즈에서 피임 문제를 정면으로다룬다. 이 시리즈에는 가난한 한 젊은 부부가 나오는데 성적인 문제로 항상 불화를 겪는다. 아내는 자신을 위해 자식을 셋까지만 낳고 그만 낳고 싶지만, 남편은 별다른 생각이없다. 오히려 생리 주기를 따지며 잠자리에 드는 부인에게 불만이 많다. 이 시리즈는 회를거듭하면서 가족의 규모나 가정 내 여성의 역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리즈가 방영되고 10년이 지난 뒤에 멕시코의 출산율은 34퍼센트나 떨어졌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후에 이런 식의 노력은 중국, 인도, 브라질,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등으로 널리 보급됐다. - P137

다인종과 다문화로 구성된 미국 같은 사회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던 ‘용광로melting pot‘는 ‘샐러드 그릇salad bowl‘으로 바뀌면서 찬장 한구석으로 처박혀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은 지 오래됐다. 샐러드 그릇이란서로 문화적 통합성을 이루기보다는 각각의 인종 집단이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서로에 대해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같은동족들 사이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는 가르치라는 압력을 받기도 하지만, 중국의 젊은이들조차 그들이 미국 문화에 너무 빠르게 동화되면 서로 ‘바나나banana‘(원래는 미친놈)이란 뜻의 속어지만, 여기에서는 겉은 중국인이지만, 속은 백인처럼 생각한다는 뜻에서)라며 놀려댄다.
경제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더 많은 우려를 표시한다. 즉,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새롭게 몰려오는 이민자들의 소득수준이, 아일랜드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폴란드인,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토착민들의 소득수준을 따라잡을 수 있는가, 아니면 그것에 미치기는커녕 공적 부조public assistance에 의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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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어 갔고, 눈이 장밋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크리스털처럼 맑은 눈의 표면에 갑자기 미풍이 일면서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울리히는 목소리를 울리게 하여 길고 날카롭게 아리 영감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가 산들이 잠들어 있는 죽음과도 같은 침묵 속으로 날아올랐다. 새 우는 소리가 파도치는 바다 위로 퍼져 나가듯, 그의 목소리는 꽁꽁 언 거품 같고 끄떡도 하지 않는 두터운 눈밭 위로 멀리 퍼져 나갔다.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지만 화답하는 소리는 전혀 없었다. - P660

오를라
Le Horla

1판
저명하고 탁월한 정신과 의사인 마랑드 박사가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동료 셋과 학자 넷에게 자신이 운영하는 정신병원에 와서 환자 하나를한 시간 정도 봐달라고 부탁했다.
친구들이 모두 모이자 박사는 말했다.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가장 기묘하고 염려스러운 환자를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 환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환자가 직접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박사가 초인종을 누르자 하인이 남자 한 명을 들여보냈다. 환자는 무척 야위어 시체처럼 보일 정도였다. 온갖 공상에 시달리는 몇몇 광인들이 바싹 야위었듯이, 병적인 생각은 열병이나 폐병보다 인간의 살을 더 많이 먹어 치우는 법이다.
그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더니 입을 열었다. - P672

구멍
Le Trou

폭행 및 과실치사, 실내장식업자 레오폴드 르나르 씨를 중죄재판소에출두시킨 기소 내용은 이러했다.
그의 주변에는 사건의 주요 증인들, 즉 희생자의 미망인인 플라메슈부인과 가구점 직공 루이 라뒤로, 그리고 배관공 장 뒤르당이 배석해있었다.
피고 옆에는 검은 옷을 입은 그의 아내가 있었다. 키가 작고 못생겼으며, 부인복을 입은 긴꼬리원숭이처럼 보이는 여자였다.
르나르(레오폴드)는 그 비극이 일어난 정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 P686

클로셰트
Clochette

오래된 이상한 기억들이 사라지지 않고 머릿속을 맴도는 경우가 있다!
너무나 오래된 기억이라서 어떻게 그리도 생생하고 끈질기게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슬프거나 감동적이거나 끔찍한 일들을 이후로도 수없이 목격했지만, 옛날에, 너무나 오래전에, 내가 열살에서 열두 살이었을 때 보았던 클로셰트 아주머니의 얼굴을 눈앞에떠올리지 않고는 단 하루도 보낼 수 없다는 사실에 종종 놀라곤 한다.
클로셰트 아주머니는 옷가지를 수선하러 일주일에 한 번 화요일마다 우리 집에 오던 나이 든 수선사다. 당시 내 부모님은 성城이라고 불리는 시골 별장에 살고 계셨는데, 사실 그 별장은 지붕이 뾰족한 오래된 집이었고 주위의 농장 네다섯 곳이 그 별장에 속해 있었다. - P697

당번병
L‘Ordonnance

장교들이 가득한 묘지는 마치 꽃이 핀 들판 같았다. 하얗고 검은 십자가들이 죽은 사람들 위에 쇠, 대리석 혹은 나무로 된 팔을 비통하게 벌리고 있었고, 그 무덤들 사이로 군모와 빨간 반바지, 계급장과 금단추, 검, 참모부의 견장, 병사와 경기병의 단춧구멍 장식 끈들이 지나갔다.
방금 리무쟁 대령의 아내를 매장한 참이었다. 그녀는 이틀 전 미역을감다가 익사했다.
다 끝났다. 사제도 떠났다. 하지만 대령은 장교 두 명에게 부축을 받으며, 이미 부패가 시작된 젊은 아내의 시체가 담긴 나무관이 보이는 구멍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 P705

초상화
Un portrait

"야, 밀리알이네!" 내 옆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사람들이 가리키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돈 후안 같은 사나이를 알고 싶은 마음이 오래전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젊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흐린 잿빛이어서, 북쪽 지방 사람들이 쓰는 털모자와 조금 비슷했다. 가늘고 긴 턱수염은 가슴까지 내려와 있어서 짐승의 모피처럼 보였다. 그는 웬 여자에게 몸을 기울인 채 경의와 호의가 가득한 온화한 눈길로 그 여자를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P711

파리
Mouche

어느 뱃놀이꾼의 추억
그가 우리에게 말했다.
뱃놀이하면서 지내던 시절에 나는 별난 일과 별난 여자들을 많이 보았어요. 내 나이 스무 살에서 서른 살 사이의 일이지요. 그때 경험한 억지스럽고 태평한 삶, 즐겁지만 가련한 삶, 활기차고 떠들썩한 삶을 ‘센강에서‘라는 제목의 책으로 쓰고 싶은 욕구를 얼마나 여러 번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때 나는 가난뱅이 사무원이었어요. 지금은 순간의 변덕을 위해 엄청난 돈을 써버릴 수 있는 성공한 남자지만 말입니다. 당시 내 마음속에는 상상에서 튀어나와 온갖 기대를 하게 만들고 내 존재를 금빛으로 물들이는 대수롭지 않지만 실현될 수 없는 수많은 욕망들이 들끓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어떤 욕망이 찾아와도 내가 졸고 있는 안락의자에서 나를 일으켜 세우기 힘들 겁니다.  - P718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웠어요. 모든 것이 가능한 밑그림 같은 여자, 소묘화가가 저녁 식사를 한 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다가 카페 냅킨 위에선 몇 개로 간략하게 그린 캐리커처 같은 여자였어요. 자연은 이따금그런 존재를 만들어 내지요. - P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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