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시코! 여기 코냑 두 잔만 주게. 좋은 것으로, 마르탱이 돌아왔거든 우리 집사람의 남편 말이야. 자네도 알지? 실종된 ‘두 자매 호‘에 타고 있던 마르탱 말이야."
그러자 배가 나오고 혈색이 붉고 뚱뚱한 주인이 한 손에 술잔 세 개, 다른 손에는 술병을 들고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런! 마르탱, 자네가 돌아왔군!"
마르탱이 대답했다.
"그래 돌아왔어!" - P567

포로
Les Prisonniers

숲에서는 나무에 내리는 눈송이가 가볍게 떨리는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눈은 정오부터 내렸다. 작고 고운 눈송이들이 차가운 거품처럼 나뭇가지를 감싸고, 덤불 숲의 낙엽을 은빛 지붕으로 얇게 덮어 놓았다. 눈송이들은 폭신한 흰 양탄자처럼 길을 따라 펼쳐져 있었다. 빽빽한 나무들이 숲의 깊은 침묵을 더욱 두텁게 했다.
삼림 관리인의 집 문 앞에서 젊은 여자 하나가 팔을 걷어붙인 채 돌위에 놓인 장작을 도끼로 패고 있었다. 그녀는 삼림 관리인의 딸이자 또 다른 삼림 관리인의 아내로, 키가 크고 야위었으며 힘이 센 숲의 여자였다 - P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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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있는
제자에게

옛 제자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상하고 초췌해져 있었다.
이유가 있을 텐데 입을 쉬이 열지 못하던 제자는 마침내 오열을 터트렸다.
실컷 울게 가만히 기다려준 뒤 따뜻한 차와 보드라운 수건을 건네주었다. - P17

내 자식을 내 친구 자식과 비교하기 전에
나부터 내 친구와 비교해보자!
사실 비교할 가치가 없다. 그는 그고 나는 나니까.
내 자식이 나를 향해 "내 친구 엄마는..." 하며
다른 친구 엄마를 부러워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양육자의 자존감이 바닥난 상태라면
결국 자신의 피양육자를 타인의 자식과 비교하게 될 것이다.
비교하는 순간, 시샘과 부러움과 질투심이 생겨
마음은 지옥이 되고 불행의 가시밭길이 펼쳐진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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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라는 말의 가장 오래된 뿌리는 ‘뚫다‘라는 뜻의 그리스어다. 트라우마에 의해 인간은 꿰뚫린다. 정신분석 사전은 그 꿰뚫림의 순간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충격의 강렬함, 주체의 무능력, 효과의 지속성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으로는 실감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젠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었을 때에야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는 트라우마를‘이라는 문장은 애초에 성립될 수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트라우마는 나를...‘이라고 겨우 쓸 수 있을 뿐이다.
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런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상상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대상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걸 잊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한다. 이제는 정신을 차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고 이런 말은 지금 대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체가 될 것을, 심지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말이다. 당신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가 그렇게 잔인하다. - P42

중년의 사내는 홀로 카페를 정리하며 자신과의 대화를 계속한다. 그는 노인의 기분을 알 것 같다.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공포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건 그가 너무도 잘 아는 허무였다. 모든 것이 허무였고 인간 또한 허무였다. 바로 그 때문에 빛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또 약간의 깨끗함과 질서가필요한 것이다." (241쪽) 이 소설의 제목인 ‘깨끗하고 불빛 환한곳(A Clean, Well-Lighted Place)‘이 여기에서 나왔다. 삶의 허무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장소, 노인이 밤마다 떠나지 못하는그 카페 같은 곳.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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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21세기의 새로운 경제적 도전에
맞서기 위한 핵심 아이디어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는 죽기 전 2년 동안 무려 28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개정판을 준비하면서 그런 처절한자기 성찰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흐처럼 두 귀를 머리에서 떼어내는짓도 하지 않았다. 나는 1989년 초, 그러니까 이 책의 초판 출간을 위해E.P. 듀턴사에 원고를 넘긴 이후로는 이 책을 두 번 다시 거들떠보지않았다. 작가들 중에는 자신의 작품을 간간이 다시 읽으면서 재치 있는문장이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추억에 잠기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책을 읽어보며 추억에 잠기는 대신, 책 출간 이후 10년 넘게 지나온 세계 경제의 추이를 살펴보면서 이 책의 아이디어와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아이디어가 현실 경제에 어떻게 접목되고 있는지 되짚어봤다.  - P19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다음 세 가지 변화다. 첫 번째는세계 평화와 관련된 다소 긍정적인 이야기다. 즉,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수억 명의 동유럽인들이 구소련의 압제와 굴레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의 자유 시장 체제에 뛰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낯선 체제에 잘적응해나갔지만, 어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시장경제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 책이 체코와 불가리아에 번역 소개되었다. 두 번째는1980년 말에 세계를 호령하던 경제 대국 일본이 1990년대 들어 초라한난쟁이로 탈바꿈한 것이다. 1989년에 3만 9,000선까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도쿄 주식시장 Nikkei 은 2007년에 1만 7,000선으로 떨어졌다. 그 우수성을 자랑하던 일본의 관리기법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것일까? 세 번째는 중국이 세계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은 미국과 일본을 제외한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고 있다. 1970년대에 미미한 국내총생산 수준을 보였던 중국이 이제 당당히 세계 경제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 P21

 1998년에 일어난 러시아의 경제 붕괴는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법제도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자유시장 freemarket은 말 그대로 자유방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시장 행위자들이 따라야 하는 일정한 규칙을 필요로 한다. 계약의 실행을 강제할 법정, 범죄자와 범죄 집단을 단죄할 경찰, 그리고 세금을 징수할 기관이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정실 자본주의로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로 볼 수 있다.  - P24

첫째, 일본 정부가 자국의 대기업들이 제조업 부문을 지배하는 것을장려하고 있을 때, 미국은 금융과 보건 의료 같은 서비스 산업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비록 일본의 은행들이 규모면에서 세계 금융 시장을 지배하기는 했지만, 수익성이나 정교함에 있어서는 많이 뒤처져 있었다. 주가지수 연동형 펀드에서 복합 파생 금융 상품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금융 상품 대다수는 미국에서 개발된 것이었다. 왜 일본은 이런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했을까? 이유는 국내에서 별다른 경쟁 압력을 받지 않았기때문이었다. 일본 재무성은 예금은행으로부터 보험회사를, 그리고 기업금융으로부터 예금은행을 보호해주었다. 즉, 미국에서 이들 산업들이서로 피 터지는 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 일본 정부는 관료주의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했던 것이다. 재무성은 쥐꼬리만 한 이자를 주는 은행에 돈을 맡기라고 가계를 부추기면서 기업들에게 온순한고객을 잡아먹으라고 데려다 바쳤던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지금까지살아 있다면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의 은행들은 자국 내에서 주어진 밥그릇 싸움만 하느라 더 큰 현실세계에서 싸우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둘째, 일본은 정보통신기술에서도 열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 일본인 친구는 처음 인터넷을 접했을 때 거의 모든 웹사이트가 영어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머리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린 망했다." 비록 일본이 전자제품 같은 제조업 상품에서 시장 점유율이 높기는 했지만, 한국과 말레이시아 기업들이 전자 산업에 뛰어들면서 어쩔 수 없이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기업들은 아예 싸움을 포기하고 경쟁력 없는 공장들의 문을 닫기 시작했다. 대신 바다 건너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에 공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평생고용 lifetime employment‘의 개념이 사라지면서 직장 여성과 남성의 사기도 꺾였다. 일본의 비평가들은 이런 현상을 ‘도넛doughnut‘ 경제라 불렀다. 즉, 경제 한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려버린 것이었다. - P26

돌이켜보면 우리는 중상주의자들이 왕족들에게 한 충고 가운데 몇가지 공통적인 견해를 끄집어 낼 수 있다. 첫째, 국가는 왕족에 복종하는 충신들에게 독점권, 특허권, 보조금, 그리고 각종 특권들을 보장해왕족의 권위와 위계를 세우고 유지해야 한다. 둘째, 국가는 국부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귀금속과 원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식민지를 개척해야 하며, 또한 그것들이 있어야 식민지 전쟁도 치를 수 있다. 셋째, 국가는 대외 무역을 엄격히 규제해 수입보다 수출을 늘려야 한다. 무역에서 계속 흑자를 내야 채무국들로부터 황금, 즉 부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중상주의 시대에 국가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할 수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길드 guild(중세 시대 장인 및 상인의 동업 조합). 독점권, 관세 등 경제 권력을 왕실이나 귀족 등 측근들에게 분배함으로써 국내 경제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자국의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까지 이런 통제를 가한 나라들도 있었다. 프랑스 루이 14세 치하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장 바티스트 콜베르 Jean-Baptiste Colbert는 상품 제조에 대해 각종 규제를 단행하고, 길드에 막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그는 루이 14세의 위세를 등에 업고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디종 지역(원래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해 있었으나 1678년에 프랑스로 귀속)에서 생산되는 직물은 1.408수로 되어야 한다고 공표하기도 했다!
이런 중상주의자들은 애덤 스미스의 비판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애덤 스미스에서 근대 경제사상사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내 생각이 그렇다는 뜻이다. 그는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중상주의자들의 이론을 비판했다. 첫째, 중상주의자들은 화폐와 귀금속에 기초해 부를 측정했다. 반면 스미스는 실제 부는 국민들의 생계 수준으로 측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금 자루가 아무리 많다고 한들 그것이 언제나 쌀가마니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둘째, 스미스는 부는 한 나라의 소비자 관점에서 측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 통치자나 그에게 아첨하는 상인들에게 돈을 쥐어주는 얄팍한 술책은 국민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셋째, 스미스는 개별적인 동기 부여, 발명, 혁신이 경제 번영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수 특권층에게 독점권이나 보호 정책 같은 혜택을부여하고자 했던 중상주의자들의 정책은 부를 늘리기는 했지만, 정치체제는 마비시켰다. 이렇게 해서 근대 경제학이 태동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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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5)에서 천하의 무자비한 폭군도 극장에서는 타인의 불행을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태생적 동정심을 긍정했다. 그런데 한 저자는 저 대목을 거꾸로 읽는다. 극장에서는 태연한 눈물을 흘리는 인간도 자신이 직접 행하는 악덕에는무감각해질 수 있다는 뜻으로 말이다. "우리가 스스로 야기한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야기하지 않은 고통 앞에서는 울 수 있어도 자신이 야기한 상처 앞에서는 목석같이 굴 것이다." (사이먼 메이, 《사랑의 탄생》, 문학동네, 2016, 292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슬픔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한다. 이 경우 타인의 슬픔은 내가 어떤도덕적 자기만족을 느끼며 공감을 시도할 만한 그런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추궁하고 심문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슬픔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나를 불편하게 할것이다. - P25

아이스킬로스의 소위 ‘고통을 통한 배움 (pathei mathos)‘(<아가멤논>, 177행)이란 고통 뒤에는 깨달음이 있다는 뜻이지만 고통없이는 무엇도 진정으로 배울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비참한 소식이다. 그런데 더 비참한 소식은 우리가 그런 교육을 통해서도 끝내 배움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교육이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내 존립을 위협하기라도 한다면 말이다. 아가멤논과 스티븐과 우리 사이에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어 다른 많은 차이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 이것은 거부할 수도 박살낼 수도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킬링 디어>가 엄밀한 의미에서 ‘비극‘인 것은 이 인간 조건의 비극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 P27

 <킬링 디어>의 첫 장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뛰고 있는 심장이다. 이 장면은 말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띈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 P28

이에 대한 내 대답은 조심스러웠고 변변치 않았다. 반박할 논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논리를 갖다 댈 영역이 아니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이 세상의 슬픔 중에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것은 많지 않겠으나, 그런 논리들이 그 슬픔에 ‘위로‘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프로이트가 소개한 또 다른 유명한 꿈을 떠올렸다. 병든 아이의 침상 곁에서 며칠을 지새운 아버지는 아이가 죽자 촛불로 둘러싸인 시신을 잠시 놓아두고 옆방에서 잠이 든다. 그런데 꿈에 죽은 아이가 나타나 아버지에게 말한다.
"아빠, 내가 불에 타는 것이 안 보여요?" 깨어나 옆방으로 달려가보니 촛불이 넘어져 아이의 수의(衣)가 타고 있더라는 것.
물론 옆방의 빛과 열기가 잠든 아버지에게도 전달되어 꾸어진 꿈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어떻게 그 위급한 상황에서 신속히 깨어나지 않고 꿈을 꾸고 있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프로이트의 답은 이렇다. ‘아버지는 꿈에서 다시 만난 아이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었다.‘ 그러니 이 꿈 역시 소원 성취인 것이다. 이 꿈을 말할 때 내 목소리는 조금 떨렸는데 학생들은 몰랐을 것이다. ‘아빠, 내가 물에 잠기는 것이 안 보이세요?"라고 말하는 아이를 오늘도 꿈에서 만나고 있을 많은 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꿈은 고통일 테지만, 그 꿈에서 깨어나는 일은 그보다 더한 고통일 것이다. 2년 내내 그러했으리라.
(2016.4.7) - P35

최근 어느 글에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문학이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라는 말도 옳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 말에 보충설명이 필요해 보여서뒤늦게 덧붙이려고 한다. 문학의 기능들 중에 위로라는 것도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더라도, 그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분들이 많을 것이다. 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분들일수록 더욱 그렇지 않을까. 인간과 세계에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전달하는 것이 문학의 더 본질적인 기능이며, 공감이니 감동이니 위로니 하는 ‘감정‘의 작용들은 부수적이거나 보조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이다. - P37

인식의 영역과 감정의 영역이 별개라는 전제하에서만 그렇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 둘이 서로 뒤섞여 있는 것이라면? 감정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도 인식의 영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이렇다.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 P38

슬픔에 대한 어설픈 통찰을 늘어놓으면서 빨리 거기서 빠져나오라고 훈계하는 대목은 어디에도 없으므로 어디를 인용해도 상관없지만 내키는 대로 ‘휴식‘이라는 제목의 챕터를 펼친다. "순수한 휴식은 슬픔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다. 그러나 슬퍼하는 사람이 참 하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도 휴식이다."(161쪽) 휴식이 왜 어려운가. 저자들은 "슬픔이 원기를 고갈시키는 것처럼, 좋은 감정 역시 에너지를 무척이나 소진시킨다는 점" (165쪽)을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므로 나는 좋은 감정으로 응대한다. 그러나 그 응대는 그 자체로 나의 감정적 자원을 크게 소모시키는 일이다. 그런 일들이 피곤하다고 느껴지면 고마워할줄 모르는 나 자신에게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것이 또 나를 갉아먹는다.
이런 대목만 보아도 이 저자들이 슬픔에 빠진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구나 하는 신뢰를 가질 수 있다. 저자들은 이렇게 말을 잇는다. 슬픔에 빠져 있지만 말고 외출도 하고 사람도 만나라고 말하는 이들의 헛소리에 신경 쓰지 말라고 당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저 아무 일도 안 하고 쉬는 것일 뿐이라고, 집안일도 남에게 맡겨버리고 필요하면 수면제도 먹으라고 수면제 대신 캐머마일 차를 드셔보시라고 말하는 친척의 말은 샌드위치 그만 먹고 도장이나 핥으라는 말과 같으니 과감히 무시하라고 함께 기도해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하라고 "기도는 제가 직접 할 테니 설거지나 좀 해주시겠어요?" (168쪽) 이쯤 되면, 정확히 알지 못하면 제대로 위로할 수 없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문학에서도 그렇고 인생에서도 그렇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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