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학생들에게 소설은 어떤 면에서건 욕망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곤한다. 나이가 들수록 인생은 대체로 우리 욕망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게 마련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원하고 원하니까. 아, 우리는 얼마나 원하는가. 우리는 허기로 가득하다. - P273

나에게 연애와 우정이 이다지도 어려웠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내가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사랑받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고 상대가 원하는 행동을 해야만 누군가가 날 좋아해주고 사랑해줄 거라 믿었다. 스트레스였다. 언제나 최고의친구나 여자 친구가 되기 위한 갖가지 시도를 공들여 했고 그러면서 진정한 나 자신, 즉 따뜻한 심장을 가지긴 했으나 언제나 착하고 좋을 수만은 없는 그 사람과는 점점 더 멀어졌다. 미안해하지 않아야 할 일을 미안해했고 내 잘못이 아닌 일에도 사과했다. 그저 내가 나라는 사실이 죄스러웠다. - P284

나이를 먹으며 자기 인식이, 아니면 자기 인식과 닮은 무언가가 찾아왔고 이런 행동 유형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내가 선택한 이 사람 앞에서내가 너무나 노력해야 하지 않기를, 너무 많이 주고 그 사람이 원하는 모습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이 모습 그대로 살아가면서 이대로도 충분하기를 바라는 건 겁나는 일이기도 하다. 당신이 지금 그대로의 당신 모습이 앞으로도 계속 충분할수 있으리라 믿는 건 겁나는 일이다.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에는 늘 불안한 점이 있다. "그러다 잘 안되면?"이라는 질문이 언제나 머리 위에 둥둥 떠다니며 괴롭힌다. 내가 앞으로 영원히 이대로 충분치 못하면 어쩌지? 내가 어떤 사람에게 영영 충분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어쩌지? - P285

그 일이 있고 벌써 2년이나 흘렀다. 왼쪽 발목의 철심은 언제나 그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그래, 이쪽 뼈가 부러졌었지."
나는 치유의 정체가 무엇일지, 몸의 치유뿐만 아니라 영혼의 치유는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늘 궁금했다. 정신과 영혼도 뼈처럼 깔끔하게 붙거나 치료된다는 생각에 매혹되곤 했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고 적절한 조건만 갖춰진다면 원래 갖고 있던 힘을 되찾게 된다는 생각에 끌렸다. 하지만 치유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절대 그렇지 않다. 몇 년 전,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언젠가는 다른이들 때문에 겪은 일들에 대해 느껴온, 조용하지만 끝없는 분노를 그만 느끼게 될 날이 올 거라고.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면 더 이상 플래시백은 없을 것이라고, 눈을 뜨자마자 내가 겪은 폭력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지않는 날이 있을 거라고, 맥주의 맥아 냄새를 잊을 수 있는 날이, 단 몇 초동안이라도, 아니 몇 분, 몇 시간 정도는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잊는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를 괴롭히는 과거는 끝이 없었다. 그리고그런 날은 절대 오지 않았다. 아니, 아직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더 이상 그날이 올 것이라고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 P315

내 몸과 이 몸으로 세상을 헤쳐나가야 했던 경험은 나의 페미니즘을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바꾸었다. 내 몸에서 산다는 일은 다른 사람을 향한 공감과 동정의 범위를 넓혀주고 다른 사람들 몸의 진실에 대해 알게해준 계기가 되었다. 또한 다양한 신체의 종류에 대한 (용인을 넘은) 포용과 인정의 중요성을 확실히 가르쳐주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내 몸의 존엄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더 신중한 단어인 사이즈란 말을 사용하는데, 나는 사이즈가 좀 되는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될 수 있고 최소한 지난 20년 동안 그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나의 또 다른 정체성도 마찬가지였다. 이 몸이 불러오는 혼란과 수치와 도전에도 불구하고 내 몸을 존중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노력한다. 이몸은 회복탄력성이 크다. 내 몸은 모든 종류의 고통을 견딜 수 있다. 내몸은 존재감이라는 힘을 제공하기도 한다. 내 몸은 강력하다.
또한 내 몸으로 살면서 다른 사람들의 몸이, 그 몸이 어떻게 각자 다른 능력을 갖고 이 세상을 어떻게 헤쳐가는지를 유심히 관찰할 수 있었다.  - P332

적어도 나의 일부는 나의 최악의 날들을 지나왔다는 것을 알고 나 자체를 바꾸고 싶지 않다.
더 이상 내가 지은 이 몸이라는 요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벽의 일부는 파괴해야만 하고 이 파괴가 어떤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상관없이, 오직 나만을 위해서 벽을 무너뜨려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작업을 무너졌던 나를 되돌리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이제까지 작업했던 그 어떤 책보다 쓰기 어려웠다. 이렇게까지 나를 펼쳐 보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자신과 내 몸이 살아온 인생을 직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나 그래도 꾸역꾸역 한 자씩 써내려간 이유는 나와 당신에게 필요한 작업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내 몸에 대한 고백록을 쓰면서, 내 몸에 대한 이런 진실들을 당신들에게 털어놓으며 나의 진실, 오직 나만 아는 나의 진실을 털어놓았다고 생각한다. 이건 사람들이 그다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진실일 수도 있다. 나 또한 듣기 불편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건대, 나는 여기에 내심장을 펼쳐 보였고 여기에 그 심장이 남긴 자국이 남았다. 여기에서 당신에게 나의 강렬한 허기의 진실을 펼쳐 보였다. 마침내 여기에 연약하고 상처받고 지독하게 인간적인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그리고 자유가 주는 해방감을 한껏 즐기고 있다. 바로 여기에 내가 무엇에 허기졌는지, 그리고 내 진실이 나로 하여금 무엇을 창조하게 했는지가 있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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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20대 초반에는 주로 엄마와 같이 쇼핑을 하러 갔는데 내 옷을 살 수 있는 유일한 옷 가게에 갈 때마다 엄마의 얼굴은 실망으로 어두워졌다. 나는 딸이 다른 몸을 가졌으면 하는 엄마의 바람을 보았다. 엄마의 좌절감과 수치심을 보았다. 엄마는 가끔 이런 말도 했다. "제발, 우리가 여기서 쇼핑하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렇다고중얼거렸다. 나도 엄마와 같은 희망을 품었다. 그러면서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 혼자 적지 않은 불만을 혹은 분노를 품었다. 엄마의 말에, 엄마의 실망에, 더 좋은 딸이 될수 없는 나에게, 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또 하나의 소중한 일상인 엄마와 쇼핑하는 즐거움이 허락되지 않은 내 인생에 불만을 품었다. - P205

나도 그런 딸이었으니까. 들어간 매장에 있는 어떤 옷도 입지 못할 정도로 너무 큰 몸을 하고, 그저 어떻게든, 아무거나 나에게 맞기만 하는 옷을 찾아 헤매면서 그 와중에 생각해주는 척하는 사람들의 뾰족하고 무신경한 평가와 잔소리까지 꾹 참고 들어야 하는 그런 소녀. 옷 가게에서그런 소녀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소녀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잘 안아주는 사람이 아니지만 당장이라도 그 소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소녀를 이 나쁜 세상으로부터, 뚱뚱한 사람에게 믿을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이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싶었다. 사실 나도이 세상이 어떤지 알고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내가 그 친구에게 해줄수 있는 건 없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타인의 잔인한 눈초리와 지적질에서, 너무나 좁은 의자에서, 아니 이 너무나 큰 몸에는 너무나 작은모든 것에서 도망쳐버릴 수 있는 안전한 은신처나 안전지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탈의실까지 따라 들어가서 그 소녀에게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실제로 정말 아름다운 소녀였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얼굴 위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와 소녀는 각자마저 쇼핑을 했다. 그 소녀의 엄마 얼굴을 쥐어뜯고 싶었다.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자꾸만 빨려 들어가게 되는자기혐오의 소용돌이에서 나를 꺼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 매장을 불질러버리고 싶었다. 악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 소녀는 엄마와 함께 매장을 나갈 때까지 울고 있었다. 내가 너무나 잘 아는 눈빛을 하고 있던 소녀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소녀가 그토록 눈에 띄는 몸에 자신을 구겨 넣으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소녀는 사라지려고 노력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토록 작은 걸 바라는데도 너무나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걸 참을수가 없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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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대가를 지급하기로 약속한 결과 창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향상되기는커녕 오히려 저하되었다. 교육 심리학에서는 이외에도 다양한 실험으로 대가, 특히 ‘예고된‘ 대가가 인간의 창조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현저히 훼손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 가운데 유명한 실험을 하나 예로 들자면 에드워드 데시 교수와리처드 리스트너 교수, 리처드 라이언 교수의 연구를 꼽을 수 있다.
그들은 대가가 학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128건의 연구에 메타 분석meta analysis (단일 주제를 조사한 많은 연구물의 결과를 객관적으로 종합해 고찰하는 연구 기법-옮긴이)을 실시했다. 이 실험의 결과로 그들은 과정의어느 단계에서든 대가를 예고하면 이미 재미를 느껴 몰입해 있는 활동에 대한 자발적 동기가 저하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에드워드 데시 교수의 연구에서는 대가를 약속하면 피험자의성과가 저하되고, 예상 가능한 정신 측면에서의 손실을 최소한도로 억제하거나 또는 성과급이 기대되는 행동만을 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즉 대가를 약속받으면 높은 성과물을 내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많은 대가를 얻기위해서 무엇이든 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스스로 과제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향상시킬 수 있는 도전적인 과제가 아니라 가장 많은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과제를 선택하게된다. - P64

예정설에 따르면 깊은 신앙심이나 많은 선행은 그 사람이 신에게 구원받는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 이러한 사고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동기‘의 인식과 크게 모순을 일으킨다. 대가와 노력의 관계에서 보면, 대가가 약속되어 있기에 노력하려는 동기가 생겨난다는 사고가 보편적이다. 그런데 예정설에 따르면 노력 여부와 상관없이 대가를 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
이 인과관계를 불교와 비교해 보면 예정설의 이상한 점이 눈에띈다. 불교에서는 모든 일이 원인에서 발생한 결과이며 원인 없이는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인과율을 중시한다. 전 우주는 인과율에 지배받고 있으며, 석가모니의 큰 깨달음 역시 이 인과율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석가모니는 전 우주를 지배하는 인과율을 ‘다르마dharma‘, 즉 법이라고 명명했다. 당연히 석가모니 이전부터 법은 존재했다. 교조와는 별개로 절대적으로 법이 존재했으므로 이를 ‘법전불후法前佛後‘라고 한다. 반면 예정설은 이를 완전히 뒤엎는다. 신이 모든것을 미리 정해 놓기 때문에 인과율은 적용되지 않는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신전법후神前法後‘인 셈이다. - P78

그렇다면 노력 여부에 관계없이 구원받을 사람은 미리 정해져 있다는 믿음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까? 이 물음에 "그 반대다!"라고 외친 사람이 막스 베버다. 그는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칼뱅파의 예정설이 자본주의를 발달시켰다는 논리를 펼쳤다.
구원 여부도 불확실하고 현세에서의 선행도 의미가 없다면 사람들이 쉽게 허무 사상에 빠져들 수 있다. 혹은 현세에서 어떤 삶을살아가든 구원받을 자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쾌락을 좇으며 사는과감한 선택을 내리기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물론 그런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전능한 신에게 구원받기로 미리 정해진 사람이라면 금욕적으로 천명(독일어로 beruf,
이 단어는 ‘직업‘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됨-옮긴이)을 다해 성공하는 인간일거라 생각하고 ‘자신이야말로 구원받기로 선택된 인간‘이라는 증거를 얻기 위해 금욕적으로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는 것이 막스 베버의 논리다. - P79

로크가 도달한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일이든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 즉 현실 세계에 관한 이해는 직접 감각을 통해 얻은 경험에 의해 이끌리든가 아니면 간접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요소가 바탕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아주 당연하게 들린다.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무엇을 긍정하고 있는지보다 무엇을 부정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있다. 철학에서도 이러한 사고방식은 유용하다. 과연 로크는 무엇을 부정했을까? 로크는 두 위대한 철학자의 사고를 부정했다.
한 사람은 데카르트다. 세상을 단순한 사고와 연역으로 이해할수 있다는, 즉 경험에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로크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로크가 부정한 또 한 사람은 플라톤이다. 로크는 이데아와 관련해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전생에서 얻은 지식을 갖고 있다는 플라톤의 주장을 강하게 부정했다. 그는 사람이 태어날 때는 백지 상태이며 그 위에 경험이 채색되면서 점차 현실에 관한 지식과 이해가 구축된다고 믿었다. - P83

시민이 중세 이후 지속된 봉건제도의 예속에서 해방된 시기는유럽은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친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후,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치고 난 뒤다. 시민이 자유를 획득하기까지는수많은 희생이 따랐다. 소위 자유라는 것을 얻기 위해 매우 비싼 값을 치른 셈이다. 그렇다면 그 값비싼 자유를 손에 넣은 사람들은 과연 행복해졌을까?
프롬은 나치 독일에서 발생한 파시즘‘ascism에 주목했다. 왜 비싼대가를 치르고 획득한 ‘자유의 과실‘을 맛본 근대인이 그것을 내던져 버리고 파시즘의 전체주의에 그토록 열광했을까? 날카로운 고찰은 언제나 예리한 질문에서 탄생한다. 이 의문에 대한 프롬의 대답또한 우리의 가슴을 찌를 듯이 날카롭다.
프롬의 분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유에는 견디기 어려운고독과 통렬한 책임이 따른다. 이 고독과 책임을 감당하고 견디면서, 더욱이 진정한 인간성의 발로라고 할 수 있는 자유를 끊임없이 갈구함으로써 비로소 인류에게 바람직한 사회가 탄생하는 법이다.
하지만 자유의 대가로서 필연적으로 만들어지는, 폐부를 찌르는 듯한 고독과 책임의 무게에 몹시 지친 나머지 그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손에 넣은 자유를 내던지고 나치의 전체주의를 택한다. 특히나치즘을 지지하는 세력의 중심에 소상인, 장인, 사무직 근로자들로이루어진 하층 및 중산 계급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프롬은 자유로부터 벗어나 권위에 맹종하는 길을 선택한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성격 특성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프롬은 하층 및 중산계급 중에서 나치즘을 반기며 맞이한 이들이 자유로부터 도피하기 쉬운 성격이며 자유의 무게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존과 종속을 추구하는 성향임을 밝히고 이를 ‘권위주의적 성격‘이라고 명명했다. 프롬에 의하면, 이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권위를 따르기 좋아하는 한편, 스스로 권위를 갖고 싶어 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고 싶어 한다. 한마디로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첨하고 아랫사람에게는 거만하게 구는 인간‘이다. 이 권위주의적 성격이 파시즘 지지의 기반이 된 것이라고 프롬은 강조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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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비만이면 당신의 몸은 여러 측면에서 공식 기록이 된다. 당신의 몸은 지속적으로 뚜렷하게 대중에게 전시된다. 사람들은 당신의 몸에 대해 자신들이 추측한 이야기를 입힐 뿐이고 당신의 몸에 담긴 진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 진실이 무엇인가에는 상관없이.
뚱뚱하다는 건 피부색과 흡사하게 절대로 숨길 수 없는 특징으로 아무리 짙은 색 옷만 입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 가로줄 무늬 옷을 피해도별수 없다. 파티에서 벽에 기대어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에 점점더 능숙해지기도 한다. 혹은 파티에서 재담꾼이 되어야만 하는데, 그래야 사람들이 당신을 비웃거나 당신과 함께 웃느라 바빠서 그들이 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을 당신의 체중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있기때문이다. 이 세상은 당신 같은 몸에는 어떤 인내심도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고 어떻게든 이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고안해야한다.
당신이 무슨 말과 행동을 하는지에 상관없이 오직 당신의 몸만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때론 낯선 사람들에게 공공 담론의 대상이 된다. 당신의 몸무게가 늘었을 때, 감량을 했을 때, 혹은 그대로 유지했을 때도 어느 누구나 당신 몸의 비평가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비만의 위험성에 대한 각종 통계와 정보를 코앞에 들이미는데 마치 당신은 뚱뚱할 뿐만 아니라 멍청해서 당신 몸의 실체에 대해, 그 몸을 최대한 적대적으로 대하는 이 세상에 대해 무지하거나 착각에 빠져 있는 줄 아는 것 같다. 그 사람들은 언제나 당신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이런 비평들은 항상 염려라는 말로 포장되곤 한다. 그들은 당신이 사람이라는 것을 잊는다. 당신은 곧 당신의 몸이고 결코 그 이상이 아니며 당신의 몸은 그보다 더 못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 P145

유행병이란 급속히 확산되는 전염성 질환을 말한다. 인류는 주기적으로 도래하는 전염성 질환의 행군을 막을 수가 없었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아는 수많은 유행병이 있으나 -홍역, 독감, 수두, 가래톳 페스트, 황열병, 말라리아, 콜레라-뉴스 보도에 따르면 이 가운데 어떤 것도 비만 유행병만큼 치명적이거나 만연해 있지 않다고 한다. 이 질병의 증상은 고열, 물집, 림프샘 비대, 발진이 아니라 출렁거리는 복부와 비대한 몸집이다. 비만인의 몸은 무절제와 타락과 나약함의 상징이다. 비만인의 몸은 대규모 감염이 진행되고 있는 현장이다. 이 몸은 의지력과 음식과 신진대사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다가 폐허가 되어버린 전쟁터이며 당신이 최후의 패배자다. - P147

내가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여성스러운 표현이 있다. 왜냐하면 내 몸이 사회에서 강요하는 여성스러운 몸에 대한 기준에 맞지 않으므로 내겐 그런 표현을 사용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 나를 혹은 내가 누군가를 부드럽게 만지는 식의 온화한 애정 표현을 거부한다. 마치 나 같은 몸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런 쾌락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듯이. 학대는 사실 내가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다. 나는 내게 매력이 있다는 것도 부정한다. 물론 내게도 매력적인 면이 있지만 그것을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것을 원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감히 내가 원하는 것을 고백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감히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행동할 수 있을까?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스스로 금기시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기를 깨고 뛰쳐나오려고 몸부림치는 수많은 욕망이 내 안에 있다.
거부함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둘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와 호텔 방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즐겁게 밀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친구가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엄지손톱에 매니큐어를 발라주겠다고 했다. 꼭 발라주고말겠다고 거의 협박조로 말했지만 나는 애매한 이유들을 대가며 거부하고 또 거부했다. 그러다 마침내 나는 굴복했고 내 손을 친구의 손에 맡겼고 친구는 사랑스러운 분홍색으로 내 손톱을 정성스럽게 칠해주었다.
호호 불었고, 마르게 놔두라고 했고, 두 번째 코팅을 했다. 그날 밤은 그렇게 흘렀다. 다음 날 나라 반대쪽으로 가는 비행기에 앉아서 내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최근에 언제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이라는 단순한 기쁨을 스스로에게 허락했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내 손톱을 바라보는건 매우 기쁜 일이었는데 내 손톱은 적당히 길었고, 모양도 가지런했고,
내가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이 있지만 아직 물어뜯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는 그만 자의식에 사로잡혔고 엄지를 손바닥에 바짝 붙였다. 마치 이 손가락을 숨겨야 한다는 듯이, 마치 나에게는 예쁠 자격이없다는 듯이, 나 자신에 대해 좋은 기분을 느끼면 안 된다는 듯이, 여성으로서 지켜야 하는 규범-여자란 아담한 몸을 가져야 하고 공간을 적게 차지해야 한다는-을 명백히 어기고 있기 때문에 나를 여성으로 인정하면 안 된다는 듯이 말이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친구는 비행기에서 먹으라고 감자칩 한 봉지를 사주겠다고 했었지만 나는 거부했다. 내가 말했다. "나 같은 사람은 공공장소에서 그런 음식 먹는 거 아니야."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한 말 중에서 가장 솔직한 말이었다. 우리 우정의 깊이 덕분에 그런 고백까지 할 수 있었고, 그다음에는 내가 이런 끔찍한 서사에 나를 맞추고 내면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졌고, 내가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졌고, 너무나 많은 것을 부정하고 살면서도 여전히 충분하지 않은 듯 수많은 것을 부정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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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배우는 새로운 방법

세상에는 소위 철학 입문서가 차고 넘친다. 인터넷 서점에 ‘철학 입문‘이라고 검색하면 철학의 대가인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무려 만 권이 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까지 많은 입문서가 쓰였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대표할 만한 책이 아직 쓰이지 않았다는 증거이므로 새롭게 철학 입문서를 쓰는 의미가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이렇게나 많은 철학입문서가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지금까지 쓰인 유사 도서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요소를 드러내지 않는 한 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지금까지 나온 방대한 철학 입문서들과 이 책의 차이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이 책을 여타 철학 입문서들과 구별 짓는 핵심은 다음 세 가지다.
① 목차를 시간축으로 구성하지 않는다
② 현실의 쓸모에 기초한다
③ 철학 이외의 영역도 다룬다 - P26

•물음의 종류 What‘과 ‘How‘
•배움의 종류 ‘프로세스‘와 ‘아웃풋‘

우선 첫 번째 축인 ‘물음의 종류‘에 관해 생각해 보자. 고대 그리스 시대 이후 수많은 철학자가 다양한 사고를 전개해 왔는데, 이 모든 사상은 다음 두 가지 물음에 어떻게든 답하려 했던 노력으로 인식할 수 있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 What의 물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 How의 물음

‘물건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라는 문제에 집중한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는 전형적으로 ‘What의 물음‘에 몰두한 철학자다. 한편 기독교적 관점에서 초극(곤경이나 어려움을 극복해 냄옮긴이)을 염두에 두고, ‘근대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를 ‘초인‘의 개념을 통해 풀고자 했던 니체는 전형적으로 ‘How의 물음‘에 주력한 철학자다. - P39

 르상티망은 사회적으로 공유된 가치판단에 자신의 가치판단을 예속 또는 종속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자신이 무언가를 원할 때, 그 욕구가 ‘진짜‘ 자신의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타인이 불러일으킨 르상티망에의해 가동된 것인지를 판별해야 한다.
지금까지 르상티망에 사로잡힌 사람이 전형적으로 나타내는 반응, 즉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가치 기준에 복종하는 일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이번에는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가치판단을 뒤바꾸는 일의 위험성에 관해 고찰해 보자. 니체가 르상티망 문제를 다룬 것도 바로 이 두 번째 반응 때문이었다. 니체에 의하면 르상티망을 갖고있는 사람은 대부분 용기와 행동으로 사태를 호전시키려 들지 않기때문에 르상티망을 발생시키는 근원이 된 가치 기준을 뒤바꾸거나 정반대의 가치판단을 주장해서 르상티망을 해소하려고 한다.
니체는 대표적인 예로 기독교를 들었다. 니체에 따르면 고대 로마시대에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유대인은 줄곧 빈곤에 허덕였고 부와 권력을 거머쥔 로마인, 즉 지배자를 선망하면서도 증오했다. 하지만 현실을 바꾸기도, 로마인보다 우위에 서기도 어려웠던그들은 복수를 위해 신을 만들어 내 ‘로마인은 풍요로운데 우리는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우리 쪽이다. 부자와 권력자 들은 신에게 미움받고 있어서 천국에는 갈 수 없다‘는 논리를 세웠다. 니체는 신이라는, 로마인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가공의 개념을 창조함으로써 현실 세계의 강자와 약자를 반전시켜 심리적인 복수를 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열등감을 노력이나 도전으로 해소하려 하지 않고 열등감을 느끼는 원천인 ‘강한 타자‘를 부정하는 가치관을 끌어내 자신을 긍정하려 한 사고관이다.  - P53

인격personality은 그 자체의 정의로 볼 때 본래 짧은 시간에 크게 변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상황이나 주변과의 관계를 위해 인격을 달리 포장해야 할때가 있다. 이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사람이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이다. 그는 인격 가운데서 외부와 접촉하는 외적 인격을 페르소나persona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페르소나는 원래 고전극에서 배우가 사용하는 ‘가면‘을 뜻하는데, 융은 페르소나를 한 사람의 인간이 어떠한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는가에 관한, 개인과 사회적 집합체사이에서 맺어지는 일종의 타협이라고 정의했다. 즉, 실제 자신의 모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가면이 페르소나라는 것이다.  - P58

이렇게 서로 다른 입장이나 역할을 종적인 사일로(기업 내의어떤 부문이나 부서가 외부와 정보를 공유하거나 연계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고립된 상태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개인이 속한 다양한 입장과 소속.
즉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뜻함-옮긴이)라고 생각할 경우, 그 사일로를 횡적으로 연계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 사일로 자체는 자신이 만들고자해서 만드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인생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어느 사이엔가 만들어진 것도 있다. 반드시 모든 사일로를 충분히납득하고서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사일로들이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룸으로써 사람이 인격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휴대전화가 등장하면서 사일로의 강렬한 횡적 연계가시작된 듯하다. 가령, 집단 따돌림은 아마도 고대부터 있었을 텐데 요즘에 와서 특히 문제의 심각성이 커진 이유는 아이들이 학교와 가정이라는 두 개의 사일로를 구분해 행동하지 못하게 된 데 있다.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는 학교에서 아무리 심한 일을 당해도 집에돌아오면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학교와는 일단 거리를 두어야한다. 그런데 휴대전화라는 가상의 횡적 연계 매체가, 학교라는 사일로에서 심리적으로 분리되기를 바라는 아이에게 그런 상황을 허용해 주지 않는다.
이는 회사원이 가정과 직장, 그리고 개인이라는 세 가지의 인격요소(음식으로 말하면 틀림없이 페르소나인데)를 구분해서 생활하기가 어려워진 것과도 같은 현상이다. 물리적으로 어느 장소에 있든, 또한어떤 사회적 입장에 있든 회사원으로서의 페르소나와 가정의 일원으로서의 페르소나가 따라다닌다. 이렇게 되면 여러 개의 사일로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 잘 살아가야 할 인류가 고대에서부터 지속해 온 생존 전략 자체의 기능을 잃게 되는데, 사실 이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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