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들이 5명 가운데 1명꼴로 살아남은 나라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민감하고 또 거북스럽게 된 것은 피고에 대해서가 아니라 배경 증인들에 대해서였다. 하우스너 씨는 ‘비극적 다수의 희생자들을 불러모았는데, 이들은 이처럼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고, 이들 각각은 법정에서 시간을보낼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확신했다. 판사들은 ‘일반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지 또는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검사와 논쟁했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일단 증인이 증언대에서자 증언 사이에 끼어들어 짧게 끝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란다우 판사가 말한 것처럼, "증인의 명예와 그가 말하려는 사안 때문이었다."
인간적으로 말해, 이 사람들이 법정에서 어느 누구라도 증언을 못하게할 사람은 누가 있겠는가? 또한 비록 증인들이 말해야 하는 것이 단지 ‘이 재판의 부산물로 간주될 뿐이라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말해 이들이 증언대에서 자신의 피맺힌 한을 쏟아 부을 때 그 세부사항의 정확도에 대해 누가 감히 문제를 제기하겠는가?
이외에도 다른 난제가 있었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이스라엘에서도 재판에 출두한 사람은 유죄가 판명 날 때까지는 무죄로 간주된다. 그러나 아이히만의 경우 이것은 완전히 허구에 불과했다. 그가 예루살렘에 등장하기 전에 유죄임이 어떠한 합당한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유죄임이 확정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감히 납치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납치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벤구리온 수상은 1960년 6월 3일 날짜의 서신에서 아르헨티나 대통령에게 왜 이스라엘이 ‘아르헨티나 법에 대한 형식상의 위반‘을 범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전 유럽에 걸쳐 거대한 그리고 전례 없는 규모로[우리 동족 600만 명)의 대량학살을 조직적으로 수행한 사람이 바로 아이히만이다"라고 썼다. - P297

세 번째로 고려해야 할 항목은 학살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아이히만의 책임문제였다. 검찰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학살수용소에서 상당한 권위를 누렸다고 한다. 이 문제들에 대한 증인들의 증언을모두 파기한 사실은 판사들의 고도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웅변적으로보여주었다. 이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그 상황 전체에 대해 그들이진정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수용소에는 두 범주의 유대인이 있었다는 점에서 시작했다. 하나는 이른바 ‘수송된 유대인‘(Transportjuden)로서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나치스의 눈으로 보기에도 한 차례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다른 범주는 ‘보호관리대상‘(Schutzhaftjuden)에 속하는 유대인들로 어떤 위반 사항 때문에 독일강제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인데, 이들은 정부가 ‘무고한 사람들을 완전한 공포 하에 두려고 하는 전체주의적 원칙 하에 있었지만, 제국 내부의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을 없애려는 목적으로 동부로 이송되는 와중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에 있었다. (아우슈비츠에대한 훌륭한 증인인 라자 케이건 부인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아우슈비츠의 커다란 패러독스였다. 범죄행위로 체포된 이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선택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대체로 살아남은 것이다.) 아이히만은 보호관리대상과는 무관했다. 그러나그가 전문적으로 처리한 수송된 유대인의 경우, 수용소에서 사역시키기 위해 선택된 특별히 신체가 건강한 사람 25퍼센트를 제외하고는 규정상 죽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판결문에서 제시된 방식에 따르면 그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아이히만은 이 희생자들의상당수가 죽을 운명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을 위한 선별작업은 현장에서 친위대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이송될 사람의 명단은 통상 자국에서 유대인위원회나 치안경찰에 의해 이루어졌고 결코 아이히만이나 그의 요원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누가 살게 되고 누가 죽게 되는가를 말할 권한이 그에게는 없었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그는 알 수도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아이히만이 "저는 그 문제에 관한 한, 단 한 사람의 유대인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도 죽이지 않았어요. •••••• 저는 유대인을 죽이라는 명령도, 유대인이 아닌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도 내린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과연 그 말이 거짓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아무도 죽이지 않은 (특히 이 경우에 있어서는 아마도 살해할 배짱조차도 갖지 못한) 대량학살자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검찰은 개별 살인행위를입증하려고 지속적으로 애를 썼다. - P302

히틀러는 외국 국가를 정복한다는모든 관념을 거부한다는 점과, 그가 요구하는 것은 독일인들의 이주를위한 동부의 ‘빈 공간‘ [volkloser Raum)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연설을들은 사람들(특히, 블롬베르크, 프리츄, 레더)은 그런 빈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동부에서의 독일 승리는 자동적으로 전체 원주민의 ‘소개‘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만 했을 것이다. 동부 유대인에 대한 조치는 반유대주의의 결과일 뿐아니라 포괄적인 인구정책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만일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폴란드인들은 유대인과 동일한 운명(즉 종족학살)을 겪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추정이 아니다. 독일의 폴란드인들은 이미 유대인의 별 대신에 특별한 ‘P‘자 표지를 달고 다니도록 이미 강요받았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이미 알듯이 파괴의 과정을 제도화하는 가운데 경찰이 취한 최초의 조치였던 것이다.)9월 회의 이후 이동학살대의 사령관들에게 보내진 속달 편지에는 재판에 제출된 특별한 관심을 끄는 문서들이 있었다. 그것은 단지 점령지역의 유대인 문제‘만을 지칭하고 있으며, 비밀을 지켜야만 할 ‘최종목표‘와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예비적 조치들‘을 구별하고 있었다. 후자에 속하는 그 문서는 철도 가까운 곳에 유대인을 수용하라고 분명히언급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라는 구절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최종 목표‘란 아마도 폴란드 유대인의 파멸을 의미했을 것이며, 이것은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새로운 내용은 제국에 새로이 합병된 지역에살고 있던 유대인이 폴란드로 이주되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이것이 실로 독일을 유대인이 없는 지역으로 만드는, 따라서 최종 해결책을 향한 첫 번째 조치였기 때문이다.
아이히만과 관련된 한 이 문서들은 비록 이 단계에서도 아이히만은동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보여준다. 여기서도 역시 그의 역할은 ‘이송‘과 ‘이주‘ 전문가로서의 역할이었다. 동부에서는 ‘유대인 전문가가 필요 없었고, 어떤 특별한 지시들‘도 요구되지 않았으며, 어떠한 특권적 범주도 존재하지 않았다. 유대인위원회 요원들조차도 게토가 마침내 소개되었을 때 예외 없이 처리되었다. 예외는 없었다. 왜냐하면 노예 노동자들에 부여된 운명은 단지 다른 종류의 보다 느린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행정적대량학살에서 그 역할이 아주 본질적이라고 생각되어 ‘유대인 장로회기구가 즉각적으로 설립하게 된 유대인 관료조직은 유대인을 체포하고수용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군대의 배후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야만적 대량학살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군 사령관들은 민간인들의 대량학살에 저항한 것 같고, 또 하이드리히는 독일 고위 지휘관과 유대인, 폴란드 지식인, 가톨릭 성직자, 그리고 귀족들에 대한 완전한 ‘즉각적인 청소‘의 원칙을 수립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2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이 청소되어야 하는 작전의 규모 때문이 유대인이 먼저 게토에 수용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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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 산꼭대기에서 보낸 그 마지막 겨울이 사실은 내게 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람은 당나라 시인 두보였다. 두보는 곡강 이수曲江 二首 그의 첫번째 수를 이렇게 시작했다. 人生七十古來稀‘라는 유명한 구절이 담긴 시다.

한 조각 꽃이 져도 봄빛이 깎이거니
바람 불어 만 조각 흩어지니 시름 어이 견디리
스러지는 꽃잎 내 눈을 스치는 걸 바라보노라면
몸 많이 상하는 게 싫다고 술 머금는 일 마다하랴
一片花飛減却春風飄萬點正愁人
且看欲盡花徑眼 莫厭傷多酒入唇

그해 겨울, 나는 간절히 봄을 기다렸건만 자신이 봄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만은 깨닫지 못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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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동안 그들은 자신의 역사에 대해 그것이 옳든 그르든 간에 오랜 수난의 이야기로 이해하는 데 익숙해져왔다. 이것은 이 재판의 모두 연설에서 검사가 잘 기술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의 배후에는 ‘암 이슈라엘 하이‘(AmYisrael Chai), 즉 이스라엘 민족은 살게 될 것이라는 승리의 신념이 오랫동안 존재했다. 유대인 개인들, 유대인 가족들 전체가 조직적 학살로죽었고, 공동체 전체가 소멸되기도 했지만 민족은 살아남았다! 그들은결코 민족적 대량학살을 직면해보지는 않았다. 더욱이 그러한 오랜 위로의 구절은 적어도 서부 유럽에서는 어쨌든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
고대 로마 이래로, 즉 유럽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유대인은 약간 더 부유하거나 가난한 차이가 있었고, 또 불행이나 영광을 경험한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유럽 국가들과 친선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지난150년간 그 관계는 꽤나 좋았고, 또 영광의 순간들이 너무나 많아 중부및 서부 유럽에서는 그것이 관례가 된 듯했다. 따라서 이 민족이 결국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신념은 더 이상 유대인 공동체의 다수에게는 그다지 중요성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유럽 문명의 틀을 벗어난 유대인의 삶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만큼 그들은 스스로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유럽을 그려볼 수도 없었다.
세상의 종말은 비록 놀랄 만큼 단조롭게 진행되기는 했어도 유럽에존재한 국가들의 수만큼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것은 유럽 민족의 발전에 익숙하거나 민족국가 체제의 등장에 익숙한 역사가들에게는 놀랄 만한 일은 아니지만 나치스에게는 커다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나치스는 반유대주의가 모든 유럽을 통일하는 공통분모가 될 것이라고 진정으로 확신했다. 이것은 커다란, 많은 대가를 지불한 오류였다. 비록 이론적으로는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나라에서 반유대적 태도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이 금세 드러났다. 한층더 성가셨던 일은 그것이 손쉽게 예견되기는 했어도 독일의 ‘근본적‘다양성이 완전히 평가된 것은 나치스가 ‘인간 이하의‘ 야만적 무리들로간주하기로 결심한 동부 유럽 사람들(우크라이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그리고 어느 정도는 루마니아 사람들)에 의해서뿐이었다는 점이다. 유대인에 대해 남들과 같은 증오감을 보여주지 않았던 사람들은 스칸디나비아 민족들 (크누트 함순과 즈벤 헤딘은 예외였음)이었는데, 이들은 나치스에 따르면 독일과 피를 나눈 형제였다. - P232

이들 외국계 유대인은 통상 그들 국가에 귀화한 시민이거나 보다 심한 경우는 사실상 무국적 상태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러나 외국에있는 동안 그것을 지니고 있음으로써 유효한 여권을 모종의 아주 의심스런 방법으로 획득한 것이다. 이것은 특히 남미계 국가들에서 그러했는데, 이 나라의 해외 주재 영사들은 유대인에게 아주 공공연히 그런여권을 판매했다. 그런 여권을 소지하고 있는 운 좋은 사람들은 그들의 ‘모국‘으로 들어갈 권리를 제외하고는 영사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포함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외무성의 최후통첩은 적어도 오직 명목상으로만 시민권을 가진 이 유대인에 대해 외국 정부들로부터 최종 해결책을 적용하는 데 동의를 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자국 내에 항구적인 주거지를 마련하고 있지 않은 수백 또는 수천의 유대인에게 스스로 도피처를 제공할 호의를 보이지 않은 정부들이 그러한 유대인 전체가 추방되고 제거되는 날 별반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은가? 아마도 그것이 논리적이기는 하겠지만, 우리가 곧 보게 되는 것처럼 합리적이지는 않았다.
1943년 6월 30일, 히틀러가 희망한 것보다 한참 지난 뒤에 제국(독일. 오스트리아 및 보호국들)에서 유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포가 이루어졌다.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실제로 이 지역에서 이송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수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일 통계에 따르면1942년 1월까지 이송되었거나 이송될 사람들의 수 26만 5000명 가운데 탈출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마 수백, 기껏해야 수천의 사람들이 숨거나 전쟁 기간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 뿐이다. 유대인의 이웃의 양심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이었는가는 1942년 가을 당 자문단이 발행한 회보에 나타난 이송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공식 설명을 통해 가장 잘 예시된다. "어떤 점에서는 이러한 아주 어려운 문제들이 오직 무자비한 강인성(rücksichtsloser Härte)에 의해서만 우리 민족의 영원한 안전이라는 이해관계 속에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 사태의 본질이다." - P240

 1942년 여름과 가을 동안 2만 7000명의 무국적 유대인(파리에서 1만8000명, 비시 정부에서 9000명)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그때 프랑스 전역에는 대략 7만 명의 무국적 유대인이 남아 있었는데 독일인들은 첫 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프랑스인들이 유대인을 이송하는 데 아주 익숙하므로 이제는 더 이상 이 일을 꺼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여 독일인들은 프랑스계 유대인도 포함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이는 단지 행정적 처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일이 국면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유대인을 독일인에게 인도하기를 완강히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히만이나 그의 요원들로부터가 아니라 고위층 친위대와 경찰 지도자들로부터) 힘러가 이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자마자 즉각 포기하고는 프랑스계 유대인을 남겨두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었다. ‘재정착‘에 대한 최초의 소문이 프랑스에 도달했다. 프랑스의 반유대주의자들이나 비반유대주의자들도 외국계 유대인이 어떤 다른 곳이라면 그곳으로 이주하기를 바랐을 터이지만, 반유대주의자들조차도 대량학살의 공범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열심히 생각해보았던 조치, 즉 1927년 이후(또는 1933년 이후)에 유대인에게 부여한 귀화권의 박탈조치를 취하기를 거부했다. 이 조치가 이루어졌더라면 5만 명의 유대인이 더 이송되었을 것이다!  - P244

그러나 반유대인 조치들에 대해 네덜란드에 널리 퍼져 있던 적개심과 반유대주의에 대한 네덜란드 국민들의 상대적 면역은 두 가지 요소로 통제되었는데, 이로써 결국 유대인은치명적인 결과를 맞게 된다. 첫째, 네덜란드에 아주 강한 나치스 운동이 있었다는데, 이는 유대인을 체포하고 은신처를 수색하는 등의 경찰조치를 수행하는 데 신뢰를 얻었다. 둘째, 원주민 유대인에게는 자신과 새로 들어온 유대인을 구별하는 아주 강한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독일로부터 온 난민들에 대한 네덜란드 정부의 아주 비우호적인 태도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또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서의 반유대주의가 외국계 유대인을 향한 것이라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이것은 나치스가 유대인위원회를 상대적으로 쉽게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유대인위원회는 오랫동안 오직 독일계 유대인과 외국계 유대인만이 이송의 희생물이 될 것이라는 인상을 주면서 존속했다. 또 친위대가 네덜란드의 경찰병력뿐만 아니라 유대인 경찰력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 결과는 여타의 서부 유럽 국가의 경우와 비할 수 없을 정도의 파국이었다.  - P249

덴마크와 스웨덴을 갈라놓은 5마일 내지 15마일의 바다를 가로질러10월 어느 좋은 날 모든 유대인을 싣고 페리호는 떠났다. 스웨덴은5919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는데, 이 가운데 적어도 1000명은 독일 태생이었고 1310명은 반쪽 유대인이었으며, 686명은 유대인과 결혼한 비유대인이었다. (덴마크계 유대인의 절반가량은 그 나라에 남아 은신처에서 전쟁 기간 동안 살아남은 것 같다.) 비덴마크계 유대인은 이전보다 살기가 나아졌고, 모두가 노동허가를 받았다. 독일경찰이 체포한 수백 명의 유대인은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늙거나 가난해서 제때 소식을 듣지 못했거나, 소식을 들었어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못했다. 덴마크 기관들과 사람들이 끝없는 ‘소란‘을 일으킨 덕분에 수용소에서 이들은 어느 다른 집단보다 더 큰 특혜를 누렸다. 48명이 죽었지만 이 숫자는 그 집단의 평균연령을 고려해 보았을 때 특별히 많은것은 아니다. 이 모든 일이 지났을 때 아이히만이 숙고해서 내린 의견은 "여러 이유에서 덴마크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행동은 실패였다"는반면, 이 별난 베스트 박사는 ‘그 작전의 목표는 많은 유대인을 체포하는 것이 아니라 덴마크에서 유대인을 없애는 것이었는데, 이 목표는 달성되었다‘고 선언했다.
정치적으로 또 심리학적으로 이 사건의 가장 흥미로운 측면은 덴마크 내의 독일 당국이 취한 역할, 즉 베를린으로부터 온 명령에 대해 그들이 명백히 사보타주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치스가 원주민으로부터 공개적 저항을 받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경우이며, 그 결과이 저항에 노출된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를 일으킨 것 같다. 그들 자신은 분명히 민족 전체의 처형을 더 이상 당연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원칙에 기초한 저항과 맞닥뜨리자 그들의 ‘강인성‘은 태양 아래놓인 버터처럼 녹아내려, 진정한 용기를 몇 차례 조심스럽게 드러낼 수있기까지 했다. ‘강인성‘이라는 이상은, 아마도 몇몇 반은 미친 야수들을 예외로 하고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합일을 이루려는 무자비한 욕망을 감춘 자기기만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 재판에서 피고들은 서로를 고발하고 배신했으며, 자신들은 "항상 거기에 반대했다"고 세상을 납득시키려 하거나 또는 아이히만이 그런 것처럼 자신들의 최상의 재능이 상관들에 의해 "오용"되었다고 주장했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권력에 있는 자들‘이 자신의 "복종심을 오용했다고 고발했다. "좋은 정부의 신하가 되는것은 행운이고, 나쁜 정부의 신하가 되는 것은 불운이다. 나는 운이 없었다.") 분위기는 바뀌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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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흘러서 바다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높다란 마루에서 거울을 보고 백발을 슬퍼하는 것을
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가 저녁에 눈처럼 된 것을
君不見 黄河之水天上来,奔流到海不復回
君不見·高堂明鏡悲白髮 朝如靑絲暮成雪

고등학교 다닐 때, 참고서 한샘국어에도 나왔던 이백의 너무나 유명한 시 「장진주將進酒였다. 하지만 이상하기도 하지, 고등학생 시절에는 이 시를 읽으면서 한 번도 그런 서늘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얼마나 서늘했냐 하면 정신이 번쩍 드는것과 동시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상태에 도달할 정도였다. 아니,
다시 말하자면 눈앞이 캄캄하다는 사실을 그제야 바로 보게된 것이다. ‘君不見‘이 세 글자에 나는 그만 눈이 트이고 말았다. - P90

하늘이 나 같은 재질을 냈다면 반드시 쓸 곳이 있으리라
천냥 돈은 다 써버려도 다시 생기는 것을
양을 삶고 소를 잡아서 우선 즐기자
한꺼번에 삼백 잔은 마셔야 된다
天生我材必有用,千金散盡還復來
烹羊宰牛且為樂會須一飮三百盃

‘生我材必有用‘ 제비꽃을 바라보며 한없이 빈둥거리던 그해 봄여름, 나는 이 구절을 입에 달고 지냈다. 기분이 좋아지면, ‘須一飮三百盃‘라고 말하면서 나보다 할 일 많은 친구들에게 술을 따르며 강권했다. 내게 천냥 돈은 없었지만, 내게는 반드시쓸, 하늘이 내린 재주만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영조 마을 앞 해변에서 하늘에 박힌 별들을 바라보던 그날 저녁, 나는내가 오만으로 똘똘 뭉친, 그러나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있는 젊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나는 하늘이 낸 사람도 아니고, 한꺼번에 3백 잔을 들이켤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더없이 아픈 일이지만,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먼저 나자신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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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 내가 꼭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도 흥미가없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만이 내 마음을 잡아끈다. 조금만 지루하거나 힘들어도 ‘왜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는 의문이 솟구치는 일 따위에는 애당초 몰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청나라 사람 장조張潮는 이런 글을 남겼다.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된다.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수 없다.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되고, 사람은 벽이없어서는 안된다.
花不可以無蝶,山不可以無泉,石不可以無苔,
水不可以無藻,喬木不可以無藤蘿,人不可以無癖.

‘벽‘이란 병이 될 정도로 어떤 대상에 빠져 사는 것. 그게 사람이 마땅히 할 일이라면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는 역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 나는 가장 잘산다. 힘들고 어렵고 지칠수록 마음은 점점 더 행복해진다. 새로운 소설을 시작할 때마다 ‘이번에는 과연 내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많은 인간이다. 힘든 일을 견디지 못하고 싫은 마음을 얼굴에 표시내는 종류의 인간이다. 하지만 글을 쓸 때, 나는 한없이 견딜 수 있다. 매번 더이상 할 수 없다고 두 손을 들 때까지 글을쓰고 난 뒤에도 한 번 더 고쳐본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그때 내 존재는 가장 빛이 나기 때문이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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