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묘하기도 하구나! 이 인연이 하나로 모임은, 누가 그 기미를 알겠는가? 그대는 나보다 먼저 나지 않고, 나 또한 그대보다뒤에 나지 않아 나란히 한 세상에 살고 있고, 그대는 흉노처럼얼굴 껍질을 벗기지 않고 나도 남쪽 오랑캐같이 이마에 문신하지 않으며 함께 한 나라에 살고 있소. 그대는 남쪽에 살지 않고 나는 북쪽에 살지 않아 더불어 한 마을에 집이있고, 그대는 무(武)에 종사치 않고 나는 농사일을 배우지 않으며 같이 유학에 힘을 쏟으니, 이것이야말로 큰 인연이요 큰 기회라 하겠소. 비록 그러나 말이 진실로 같고 일이 진실로 합당하다면, 차라리 천고(千古)를 벗삼고 백세(百世)의 뒤를 의혹하지 않음이 나을 것 같구려.
- 박지원<여경보與敬甫>
- P219

꽃병에 11송이 꽃을 꽂아 팔아 동전 스무 닢을 얻었소, 형수님께 열 닢을 드리고, 아내에게 세 닢, 작은 딸에게 한 닢, 형님방에 땔나무 값으로 두 닢, 내 방에도 두 닢, 담배 사느라 한 닢을 쓰고 나니, 공교롭게 한 닢이 남았소. 이에 올려보내니 웃고 받아주면 참 좋겠소.
- 박지원<여무관 與무官> 이덕무에게
...

내가 마침 구멍난 창을 바르려 했지만 종이만 있고 풀이 없었는데, 무릉씨(武陵氏)가 내게 돈 한 닢을 나누어주는 바람에 풀을 사서 바르는 일을 마쳤다. 올해 귀에 이명(耳鳴) 이 나지 않고손이 부르트지 않는 것은 모두 무릉씨의 덕분이다.
- 이덕무의 답장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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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른바 장차 올 후생이 과연 두려워할 만하다면, 뒤에송생과 같은 자가 또한 적지 않을 것인데 내가 또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설령 송생으로 하여금 더 오래 살게 하여 그 사업을 채우게 하였더라도 세상은 송생의 어짊을 오늘날처럼 알아줌이 없을 것이다. 그럴진대 비록 송생으로 하여금 오히려 살아 있게 하였더라도 한낱 궁한 선비가 되는 데 지나지 않았을 따름일 터이니, 내가 비록 슬퍼하지 않고자 해도 그럴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 삶도 죽음도 모두 슬퍼할 만하여, 한결같이 슬프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어찌 송생을 위하여 슬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가 송생을 슬퍼하는 것이 그 홀로 송생만을 슬퍼함이겠는가?
- 조찬한 <宋生傳> 중에서 - P165

내(茶山)가 황상에게 문사(文史) 공부할 것을 권했다. 그는 쭈뼛쭈뼛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한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가 있다.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한 사람은 소홀한 것이 문제다. 둘째로 글 짓는 것이 날래면 글이 들떠 날리는 게 병통이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거친 것이 폐단이다. 대저 둔한데도 계속 천착(穿鑿)하는 사람은 구멍이 넓게 되고,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성대해진단다. 답답한데도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하게 된다. 천착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뚫는 것은 어찌 하나?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네가 어떤 자세로 부지런히 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 P182

황상은 도중에 스승의 부고를 듣고, 그 길로 되돌아와 스승의 영전에 곡을하고 상복을 입은 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845년 3월 15일 황상은 스승의 10주기를 맞아 다시 두릉을 찾았다. 다산의 아들 정학연(丁學淵)은 10년 만에 기별도 없이 불쑥 나타난 황상을 보고 신을 거꾸로 신고 마당으로 뛰어내려왔다. 황상은 이제 예순을 눈앞에 둔 늙은이였다. 꼬박 18일을 걸어와 스승의묘 앞에 섰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부르튼 발을 보고 학연은 아버지 제자의 손을 붙들고 감격해 울었다. 그의 손에는 그 옛날 스승이 주었던 부채가 들려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그립고 제자의 두터운 뜻이 고마워, 늙어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부채 위에 시를 써주었다. 그리고는 정씨와 황씨 두 집안간에 계를 맺어, 이제로부터 자손 대대로 오늘의 이 아름다운 만남을 기억할 것을 다짐했다. 그 정황계안(黃契案))은 황상의 문집에 실려 있다.  - P193

매탕(梅宮) 이덕무(李德愁)가 한 번은 처마 사이에서 늙은 거미가 거미줄 치는 것을 보다가 기뻐하며 내게 말하였다.
"묘하구나! 때로 머뭇머뭇할 때는 생각에 잠긴 것만 같고, 잽싸게 빨리 움직일 때는 득의함이 있는 듯하다. 발뒤꿈치로 질끈밟아 보리 모종하는 것도 같고, 거문고 줄을 고르는 손가락 같기도 하구나."
- 박지원 <夏夜연記>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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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
2004년 9월 12일 새벽은 내가 아버지 편에 서 있었던 마지막 시간이었다. 그땐 아무것도 몰랐다. 아버지가 체포됐다는 사실도, 어머니의 죽음도, 밤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막연하고도 어렴풋한 불안을 느꼈을 뿐이다. 아저씨의 손을 잡고 두 시간여 숨어 있던 세령목장 축사를 나선 후에야, 뭔가 잘못됐다는 확신이 왔다.
- P6

고양이는 천둥이 치기 전에 뇌에 자극을 느낀다고 한다. 인간의 뇌 변연계에도 비슷한 감관이 하나 있다. 재앙의 전조를 감지하면 작동되는
‘불안‘ 이라는 이름의 시계, 자리에 누운 후로도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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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변방에서 죄를 입어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밤에 간혹 구부려 누웠다가 망령되이 정이 일어나면, 인하여 생각이 꼬리를 물어 이리저리 걷잡을 수가 없었다. 용서를 받아 풀려나면 어찌할까? 고향을 찾아 돌아가서는 어쩐다지? 길에 있을 때는 어찌하고, 문에 들어설 때는 어찌하나? 부모님과 죽은 아내의 산소를 둘러볼 때는 어찌하며, 친척 및 벗들과 둘러모여 말하고 웃을 때는 어찌하나? 채소의 씨는 어찌 뿌리며, 농사일은 어떻게할까? 하다못해 어린애들 서캐와 이를 손수 빗질하고, 서책에 곰팡이 피고 젖은 것을 마당에 내다 볕 쬐는 데 이르기까지 온갖세상 사람들에게 있을 법한 일이란 일은 전부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렇듯 뒤척이다 보면 창은 훤히 밝아왔다. 막상이루어진일은 하나도 없고, 변함없이 위원군(渭原郡)의 벌 받아 귀양온 밥 빌어먹는 사내일 뿐인지라, 생각을 어느 곳으로 돌려야 할 지, 문득 내가 누군지조차 알지 못하여 혼자 실소하고 말았다.
- 노긍 <생각에 대하여,想解> - P110

또 가난한 집에 종살이하면서 두 눈이 늘 피곤하여, 일찍이단 하루도 일찍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등 긁고 머리를 흔들면서맑게 노래하며 환하게 즐거워해본 적이 없었기에 내가 이를 부그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 배를 가른다면 반드시 붉은 것이 있어 마치 불처럼 땅 위로 솟구쳐 오를 것이니, 평생 주인을향한 마음이 담긴 피인 줄을 알 것이다.
네가 이제 땅속에 들어가면 네 아비와 어미, 네 형과 너의 안주인과 작은 주인이 마땅히 네가 온 것을 보고 놀라 다투어 내가어찌 지내는지를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근년 이래로 온몸이 좋지 않아 이빨과 터럭은 시어져서 몹시 늙은이가 다 되었다고 말하여다오. 그러면 장차 서로 돌아보며 탄식하고 낯빛이 변하면서 나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아아!
- 노궁<죽은 종 막돌이의 제문, 祭亡奴莫石文> - P117

 천지고금을 굽어보고 우러르며 물러나 사노라니 사람들은 누추한 집이라고, 누추해 살 수가 없다고 말들 하지만, 내 보매는 신선 사는 땅이 따로 없다. 마음이 편안하고 몸도 편안하니 누가 이곳을 누추하다 말하리, 내가 정작 누추하게 여기는 것은 몸과 이름이 함께 썩는 것이다. 집이사 쑥대로 얽어두었다지만,
도연명도 겨우 담만 둘러치고 살았다. 군자가 여기에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
-허균<누추한 나의 집> 중에서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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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잘 지냈어요, 마르탱?"
마르탱은 조심스레 베르트랑드를 일으켜 세우고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는 베르트랑드를 밝은 빛 아래서 좀 더 잘 보려고 고개를 갸웃이 기울였다. 그리고 이내 중얼거렸다.
"오, 하느님! 내 아내가 이렇게 예뻤나요….…베르트랑드는 마르탱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르탱은 베르트랑드의 손을 잡고 함께 마을 사람들에게로 되돌아왔다.
- P66

"저는 아르노의 눈을 바라보았어요."
베르트랑드는 코라스에게 말했다.
"저는 그의 눈 속에서 희망이 사라졌음을 보았어요.
그리고 그가 뭘 원하는지를 알아차렸어요."
정적이 잠깐 흘렀고 다시 말이 이어졌다.
"그는 저와 제 자식들을 위해 적어도 제가 목숨을 보전하기를 바랐어요."
그 말을 하면서 베르트랑드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듯 아팠다. 그녀는 처음으로 흐느껴 울며 이렇게 마지막 말을 던졌다.
"저는 그를 위해 그렇게 했어요." - P231

마을 사람들과 게르 집안 사람들은 화염에 휩싸여 벌게진 교수대 주변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조종鐘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태양이 광장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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